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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ijen
Kissing You 05-08

5



아침이 밝았다.

잠을 제대로 못자, 굉장히 푸석한 얼굴을 하고 지윤은 침대에 걸터앉아 있었다.
어제는 조금 열이 난다는 핑계로 결석하고 말았지만 오늘은 안된다.
수능이 두달도 채 안 남았는데 침대안에서 꼼지락 거리고 있다면
그건 되도 않은 자만이고 만용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지윤은 침대에서 일어나 욕실로 갔다.
세수를 하며 거울을 보자, 왠지 웃음이 났다.
이틀 사이에 눈가가 퀭하게 보일정도로 얼굴이 형편없어졌다.
그게 동시에 서글퍼져서 수건으로 얼굴을 닦으면서
조금 찔금거리며 나오는 눈물도 같이 찍어내듯이 닦았다.
억울했다.
뭣땜에 내가, 이상한 후배 하나 때문에 이렇게 속을 썩혀야 하는 거지.

교복을 입는데 주머니 안에서 뭔가 찰강, 하고 느껴져 손을 넣었다.
손을 넣으며 아차, 싶었지만
이미 손가락은 주머니안의 열쇠고리를 움켜쥐고 있었다.
조금 망설이다가, 꺼내보았다.
잠시 열쇠고리를 이리저리 살피던 지윤은 뒷면에 박힌 글자에 시선을 두었다.

『 부동심(不動心) 』

" ……. "

이번엔 웃음이 나오지 않았다.
대신 인상이 찌푸려지고, 눈앞이 희뿌옇게 흐려진다.
가만히 서서 눈물을 흘리면서도, 지윤은 지금 자신이 울고있는 이유를
제대로 파악할 수가 없었다.

그렇게 등을 돌리고 걸어가던 재인이 원망스러웠다.
그 이전에, 마음에도 없는 말로 그를 상처입힌 자신이 미웠다.
재인에게 미안한 마음이 들다가, 왜 하필이면 나를 좋아했냐…에 생각이 미치자,
다시 그가 미워졌다.

그냥 내버려 두지.
키스같은 거 하지 말고, 그냥 내버려 두지.

키스까지는 어쩔 수 없었다 치자.
하지만 여름에, 방파제에서,
왜 재인은 너였냐, 고 물어보는 자신에게 그렇게 쉽게 긍정하고
거기다 좋아한다고 당당하게 고백했을까.
차라리 시치미를 떼고, 무슨말 하시는지 모르겠습니다- 라고 돌아갔다면
지금 이렇게 자신이 괴로워할 일은 없었을텐데.

이재인, 이라는 존재가
이렇게 크게 자신안에 자리할 일도 없었을텐데.

" ……. "

지윤은 손등으로 눈물을 닦고 열쇠고리에 달린 열쇠를 돌려서 빼기 시작했다.
열쇠는 쉽게 빠지지 않았다.
도중에 몇번이고 눈앞이 흐려져, 지윤은 번번이 소맷자락을 눈가로 가져갔다.

그리고 분리된 열쇠는 다시 주머니안에 집어 넣고,
열쇠고리는 책상 서랍을 열고 아무렇게나 던져 놓았다.
쾅- 소리가 나게 서랍을 닫고 방을 빠져나왔다.





" 야, 괜찮냐? "

툭, 하는 손길에 돌아보자 환규가 서 있었다.

" 뭐가…. "
" 어제 전화했더니 지환이 형이 너 아프다고 그러던데? "
" 그냥 좀. "  

그렇게 말하고 다시 문제풀이에 집중하자 금새 환규가 문제집을 샥, 하고 빼낸다.

" 하…. "
" 응? "
" ……. "

지윤은 소리없는 한숨을 내뱉은 뒤, 그대로 책상위로 쓰러졌다.
환규는 재미없다는 듯, 다시 문제집을 지윤의 머리위로 올려놓으며

" 무슨 일 있냐? "

하고 물었다.

무슨일은… 지윤은 들릴 듯, 말 듯 대꾸하며
머리위에 얹혀진 문제집을 내리고 다시 책상위에 두 손을 포갠 뒤
이마를 갖다댔다.

" 일어나. 야, 이지윤. 재미없잖아. 나가자. "
" 나가긴 어딜 나가…. "

붙잡힌 팔을 억지로 뿌리쳤지만 환규는 집요하게 다시 팔을 붙잡고
지윤을 일으킨 다음, 끌다시피 복도로 나갔다.
몇번인가 책상사이를 지나며 여기저기를 부딪힌 지윤은
체념하고 자력으로 걷기로 했다.

" 야, 내가 걸을게. 환규야아~ "

말려도 막무가내로, 환규는 빨리가자, 를 연발하며
지윤을 이끌고 계단을 내려갔다.



점심시간도 끝나갈 무렵으로 매점안은 생각보다 한산했다.
지윤이 자리를 잡고 앉아있자, 샌드위치와 콜라를 사들고 돌아온 환규가

" 먹고 싶은거 없냐? 사줄게. "

하고 왠일로 선심을 내보였다.

" 별로. "

지윤이 짧게 대답하자 우옷- 하며 호들갑을 떤다.

" 야, 내가 산다니까? 기회는 지금뿐이야. 빨리 아무거나 골라. "
" 나도 기회가 지금 뿐이란건 잘 알고 있는데 말이야…
   정말 무지하게 안타깝다. 나, 지금 목구멍으로 뭘 넘길 상태가 아니거든.    억울해 죽겠다. "
" 아쉽다앙. 난 정말 오늘은 니가 아무리 비싼걸 원해도 다~ 사줄 수 있는데. "

킬킬거리며 환규가 샌드위치의 포장을 뜯었다.

" 그럼 현금으로 줘. "
" 이거나 먹어라. "

그리고 불쑥 내민 샌드위치를 물리고 지윤은 다시 테이블위로 엎어졌다.

" 짜식이… 어르신 식사하고 계신데 버릇업게시리…. "

환규가 한손으로 마구 머리를 헝클며 말한다.

순간, 떠올라 버렸다.

바닷바람에 헝클어진 자신을 머리를 털어주고, 엉킨곳을 풀어주던 손길.
엉망으로 엉켜 조금만 잡아당겨도 여기저기가 아플 상태였던 자신의 머리를
조심 조심, 아프지 않도록 숨 죽이며 풀어내고 있었을 그.
커다란 손과, 맞닿은 가슴에서 풍기던 풋사과 향이 묻어나는 바다내음……

지끈, 하고 머리가 아파왔다.
분명 이 다음 순서는 눈물이 차오르는 것.

늘 같은 패턴은 지겹잖아.

그렇게 생각한 지윤이 재빨리 고개를 들고 두 손으로 눈을 부볐다.

" 왜? "

환규가 콜라를 집어들며 묻는다.

" 하품. "
" 너, 공부도 좋지만…. "
" 그런 거 아냐, 임마. "

웃으며 계속 눈을 부빈다.
그리고 눈을 떴을 때,

" ……. "

필요 이상으로 맑은 시야속에
그가 서 있었다.

" 재, "

하마터면,
이름을 부를 뻔 했다.



재빨리 시선을 돌리자,
마주 앉아있던 환규가 등 뒤로 돌아보고 그리고 어, 하며 그를 알아본다.

" 안녕하세요. "

독특한 울림이 귓바퀴를 한번 돌고, 고막을 뚫고 들어온다.

" 너도 매점이란델 오기는 오는 구나. "
" 그래도 기껏 매점이라고 있어주는데,
   용건을 만들어서라도 한번씩은 와 줘야지요. "
" 말은 잘해요. 대회 준비는 잘 돼가냐? "
" 네. "

그렇게 환규와 몇마디를 더 나눈 재인이 매점을 나서고,
다시 환규의 시선이 지윤을 향했다.

" 왜 말을 안해? "
" 뭐가. "

환규가 샌드위치의 잔해를 주섬주섬 모으며 말을 이엇다.

" 재인이랑 안 친하냐? "

환규는 정말로 별 뜻 없이 던진 질문일테다.
하지만 지윤은, 가슴속에서 쿵, 소리가 날 만큼 놀랬다.

" 내가 왜! "

한층 격양된 목소리에 환규가 놀란 눈으로

" 야, 왜 그렇게 화를 내냐…. "

하고 바라본다.



" 기주가, 너희둘이 상당히 친한것 같더라고 하길래. "

계단을 오르며 환규가 말했다.

" 그래서? "
" 그래서라니? "
" 그래서 넌 뭐라고 했는데. "
" 뭘 뭐라고 해. 그냥 그랬냐고, 의외라고 말했지. "

왜 의외인 거냐고 물을까 하다가 관뒀다.

" 안 친해. "
" 그러냐. "

환규는 두어칸을 더 오르다, 멈칫 멈추었다.

" 싸운건 아니고? "
" 내가 걔랑 무슨 건덕지로 싸움을 해. "
" 하긴. "

그리고 다시 계단을 오르기 시작했다.

" 그런데… "
" 그런데…? "

교실이 늘어선 복도에 발걸음을 내딛으며 환규가 말했다.

" 왜 그렇게 울것처럼 앉아 있었냐. "



" 내가? "

한참만에 지윤이 되물었다.

" 응. "

환규는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대답했다.

" 그래서, 뭔가 엄청난 일이 있었나 싶었지.
   니가 안절부절 못하고, 정말로 그냥 울것같은 표정이길래.
   몸이 안 좋아서 그런거였냐? "

그랬나…
중얼거리듯 대꾸하고 교실로 들어갔다.
왠일인지 다리에 힘이 풀려 주저앉듯이 의자에 걸터앉아 다시 책상위로 쓰러졌다.

쇼크였다.
환규에게 단번에 들켜버릴 정도로 동요한 자신이.
엄청난 쇼크였다.

어쩌면 난, 생각보다 훨씬 더, 재인을 크게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그만큼, 좋아했다는 얘긴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가슴이 욱씬거렸다.

" ……. "

지윤은 처음으로 자신의 괴로움의 원인이 손에 잡히는 듯 했다.









떡 본김에 제사 지낸다.
쇠뿔도 단김에 빼라.
생각났을 때, 행동하라.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지 말라.
A little too late, is much too late. (약간 늦는 것이 너무 늦는 것이다.)



마지막은 조금 틀린가?
그렇게 생각하며 지윤은 체육관을 향해 걸었다.

늦은 9월.
해는 마치 체육관 뒤로 숨으려는 듯
아직은 붉은 기운이 남은 노란 빛으로 서서히 저물어 가고 있었다.
걸음, 걸음이 마치 녹을 듯 저무는 태양의 빛 속에서 떨어진다.
목적하고 있는 체육관 까지의 거리는,
도무지 좁혀질 것 같지 않으면서도 무서운 속도로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후 수업은 완전히 엉망이었다.
차라리 듣지 말걸… 하고 후회 할 정도로
잡다한 내용들이 마치 믹서기에 넣고 돌린 것처럼 섞여 뇌속을 잠식했다.
그나마 알고 있던 내용들마저 깡그리 잊혀진 것 같다고 지윤은 생각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꼭 하나만은 절대로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 재인.
- 이재인.



생각하면 저절로 인상이 찌푸려 질 만큼 가슴이 아픈데, 자꾸만 떠오른다.
그게 너무 괴로워서 눈을 감고 엎드려 버리면
오히려 더욱 뚜렷한 잔상이 눈앞에 펼쳐져, 지윤은 울고 싶었다.

그래서 그를 만나기로 했다.

만나서,
지난 일요일의 만남에 대해서 사과하기로 했다.
내가 잘못했다,고.
실은 네가 그 여자애와 이야기를 나눈다는게,
왠지… 이유는 잘 모르지만 어쨋든 싫었다, 고
부끄럽지만 솔직하게 말할 생각이었다.

재인의 대답이 과연 어떠할 것인지에 대해서 자신은 짐작할 바가 없지만
어쨋든 지금 이 순간이 견디기 힘들 뿐 인 지윤은
일방적으로 사과라도 하고나면 속이 시원해 질 것만 같았다.
단지 그것 뿐이었다.



" ……. "

체육관 안은 떠들썩 한 가운데 고요했다.
더욱 자세히 설명하자면, 정 중앙의 두 사람을 둘러싼
주변의 소란을 제압 할 만한 기(氣)와 위엄이 체육관 한 가운데에 서려있었다.

지윤이 그 고요의 중심에 선 재인을 알아본건
꼭 그의 카본(Carbon) 때문만은 아니었다.
큰 키와 다부진 몸매는 이 체육관 안의, 거의 모든 검도부원들의
평균적인 체형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윤은 단번에 그가 재인임을 알아보았다.

검은 도복을 갖춰입고, 두 손으로 카본을 쥐고 서 있었다.
단지 그것 뿐인데, 굉장히 독특한 기운이 풍기고 있었다.
충분히 예를 갖춘 절제있는 태도에 차분하게 가라앉은 살기가 느껴졌다.
그것은 마치 바닥에서부터 스멀 스멀 올라오는 검은 연기처럼
재인을 감싸고 있었고, 상대방을 감싸고 있었다.
그래서 대부분의 재인의 상대는,
시합이 시작하기도 전에 그에게 패배하고 마는 것이다.
그런 독특한 분위기가, 도(刀)를 쥔 재인에게서 풍겨나오고 있었다.
아마도 시합은, 재인의 승리로 끝이 났을것이다.

먼저 호면을 벗은 건 상대방이었다.
얼굴을 확인하고 지윤은 깜짝 놀라고 말았다.
비오듯 땀을 흘리며 복잡한 표정을 하고 있던 상대는 다름아닌 사범님.
학교에서 거금의 강습비를 지원하고 불러들인 전 국가대표 출신의 사범이었다.
그는 꽤 난감한 한편, 즐거운 표정이기도 했는데
아마도 날로 발전하는 제자가 자랑스러운 모양이다.
사범은 머릿수건을 한 채로, 맞은편에 선 제자의 어깨를 두드린 후
탈의실을 향해 걸어갔다.

재인은 한참동안 그런 사범의 뒷모습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리고 가볍게 고개를 숙인 후 지윤이 서 있는 현관쪽을 향해 몸을 돌렸다.
그가 자신의 존재를 눈치챘을리 만무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윤은 무서운 기세로 방망이질 하는 가슴을 억누르고
서 있었다.

재인이 천천히 호면을 벗고, 머릿수건을 벗었다.
약간 땀에 젖었지만 여전히 단정한 얼굴과,
길게 찢어진 눈은 아래를 향해 시선을 내리고 있었다.
그리고 손끝으로 머리를 매만지며 털고 있는 그를 바라보며
지윤은 왠일인지 무서워졌다.

그래,
두려워졌다.





" 죄송합니다. "

불러낸 장소 - 체육관 뒤 - 로 척척 걸어나온 재인은
지윤의 앞에 서자마자 대뜸 고개를 숙였다.
'뭐가?' 라고 채 물어보기도 전에 재인이 말을 이엇다.

" 죄송했습니다. 잊어주세요. "
" 어…? "
" 선배께 고백했던 일, 잊어달라고 부탁드리는 겁니다.
   제가 경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

이번에야 말로 어이가 없어진 지윤이 입도 다물지 못한 채
하, 하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 처음부터 어이가 없는 놈인줄은 알았지만… 이건 그거냐? 갖고 논 거야? "
" …그렇게 생각하실줄은 몰랐습니다만, 아닙니다. "

재인은 딱 부러지게 대답했다.
그 꼴이 너무 너무 얄미워서 한 대 때려주고 싶었다.

" 아니면 뭐야. 뭘 잊어달라는 거야. 경솔했다고? 넌 경솔한 짓을 왜 하는건데.
   지금 이렇게 잊어달라고 말하는 자체가 더 경솔한거 아냐?"

재인은 한참동안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늘 당당하게, 똑바로 지윤을 바라보던 시선이 바닥을 향해 떨구어져 있었다.

" 선배를 모르겠습니다. "
" ……. "
" 제가 이렇게 말씀드리면, 분명 기뻐하실거라 생각했습니다. "
" 야…, "
" 선배, 그날 갑자기 어디가 그렇게 편찮으셨던 겁니까. "

갑작스런 질문에 지윤은 "그건 체해서…." 하고 작게 얼버무렸다.
재인이 슬핏 웃었다.
그 웃음이 마치 생선가시처럼 목에 걸려,
지윤은 저도 모르게 몇번인가 콜록거렸다.

" 짐작은 했어요. 그래서 집으로 가는 동안 내내 생각했습니다.
   함께 마주보고 있는 것 만으로 불편해서,
   긴장해서 먹은 음식이 체해버리고 마는 상대라면……
   그건 절대로 좋은 관계는 아니지 않습니까.
   차라리 보통 선후배였더라면
   같이 밥을 먹는 정도로 그토록 긴장하지는 않았을겁니다, 선배. "
" 그건, "
" 제 생애 처음으로 후회란걸 했습니다. "

쿵------
심장이 단단한 돌덩이가 되어 떨어졌다.
쿵, 하고.

" 고백하지 말걸 그랬나.
   그랬다면, 최소한 보통 선후배 사이로
   더욱 가깝지는 않더라도 이렇게 불편한 사이는 되지 않았을텐데,
   하고 말입니다.
   제 성격에, 흔히들 모 아니면 도다, 라는 성격에
   미적지근한건 죽어도 싫습니다.
   선배에게 고백한 이유도 그거예요.
   제가 바라는 사이가 되던지,
   그게 아니면 차라리 죽을때까지 선배 얼굴을 못보게 된다던지.
   후자의 경우도 어느정도 각오는 했기때문에 마음먹고 고백한겁니다.
   하지만 안되더군요. 미움받는건,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괴로웠습니다. "
" 재인아, "
" 선배-, "

지윤의 말 허리를 자르며 재인이 다시 깊숙한 저음을 흘린다.

" 그러니까 잊어주세요. 없었던 일로 해 달란 말입니다.
   그러면 적어도 저, 미움받을 일은 없지 않을까요.
   그러면 그걸로 족합니다.
   선배에게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되어버린다면 그걸로 충분해요.
   적어도 떠올리면 괴로운 사람, 함께 있으면 부담스럽고 고통스러운 사람이
   되는건 싫습니다. 아무리 저, 라해도, …참을 수 없는 일이 있어요. "

그렇게 말하는 얼굴은
전혀 괴로운 기색을 보이지 않는 미소마저 머금은 단아한 표정이라
지윤은 금새 눈물이 차오른 자신이 한심스러웠다.

" 재인아, 그게 아니라…. "
" 선배인생에 가장 중요한 시기에 이런 쓸데없는 일에 시간 빼앗아 버린 점,
    사과드립니다. 공부 열심히 하세요. 건강 조심하시구요……. "
" 야, 기다려 봐. 왜 이제 다시는 안 볼 것처럼 이야기 하는 거야. "

울먹이며 말을 하자
재인의 얼굴이 굳는게 눈에 보인다.

" 뭘 들은 겁니까. 이제 다시는 보지 말자고 드리는 말씀입니다.
   귀찮게 해 드려 죄송하다구요.
   이제 저 때문에 불편해 하신다거나 신경쓴다거나 하시는 일 없이,
   선배일에만 충실하시라구요. "
" 그거 마음대로 안 되잖아. "
" 선배, 제발. "

재인이 손으로 이마를 덮었다.
그리고 눈을 감고는 깊게 한숨 쉬었다.

" 재인아……. "
" 선배 왜 이러시는 겁니까. 전 정말로… 선배께서 기뻐하실 줄 알았습니다.
   이제 다시는 나를 보지 않아도 된다, 고 말씀드리면…
   선배, 그 때 처럼 그렇게 웃어주실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말씀드린거예요.
   싫지만, 스스로는 이런 말, 죽어도 하기 싫지만
   선배 기뻐하시는게 보고 싶어서 말씀 드린겁니다.
   이제 저한테 끌려다니실 필요 없구요, 그냥, 잊어주시면 되는겁니다.
   아시겠어요? "

그래, 알아. 니가 무슨말을 하고 있는건지 충분히 알고 있다구…
지윤이 쥐어짜듯이 말했다.

" 그럼 빨리 웃어주세요. 고맙다는 말까진 바라지도 않습니다.
   건강해라, 한마디 정도만 해 주세요. 그리고 돌아가시면 되는 겁니다. "

웃음이 나올리가 없다.
건강해라, 고 말하고 돌아서면 그걸로 끝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재인의 말이 사실이라면,
정말로 그걸로 끝이 날 일들이라면 지금 이렇게 온 몸이 떨릴 정도로
겁이나고 두렵고 눈물이 날 것만 같은 자신은 어떻게 설명하란 말인가.

나 스스로도 이해 할 수 없는 지금 이 심정을,
무슨 재주로 재인에게 납득시킨단 말인가.

지윤은 크게 심호흡 했다.



" 니가 좋아. "







6



딱---!

호면을 쓰고 있는 탓에 아프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덜컹- 하는 충격이 있었다.
뒤를 돌아보자 기주가 죽도를 한손에 들고 서서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다.

" 넌 시합이 얼마나 남았다고 농땡이냐? "
" 한달 정도 남았군. "

내미는 손을 거절하고 스스로 힘으로 일어서자
머쓱해진 손을 슥슥 가슴에 닦으며 기주가 상대해줄까, 하고 묻는다.

" 다칠 걸. "

나름대로 친절하게 해 준 충고를 깔끔히 무시하고
기주는 호면을 깊숙이 눌러 쓰더니 반대측 진영으로 가서 선다.
마주보고,
인사.





「 니가 좋아. 」





그런말을 들은게 벌써 보름 전.
그 이후로 지윤의 콧빼기도 보지 못한 재인은 시간이 지날수록
가슴이 답답하고 한숨이 느는게 탈이 나도 단단히 난 것 같다.

그냥 지윤이 좋아한다, 고 말했을때
다가가서 끌어안아 줬다면 좋았을텐데… 하고 몇번이나 생각했다.
하지만 그 때 자신은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이 둔하고 얼빵한 남자가,
과연 순간의 설렘에 이끌려서 자신에게 '좋아한다' 고 고백한 거라면
그건 싫다.
싫다기 보다는 안된다.





" 뭐가 안된다는 거야…. "
" 선배 분명 지금 착각하고 계신거니까요.
   그저 잘 알던 후배 하나가 아는척을 않는다. 인사를 못한다.
   시선을 마주치기 힘들다. 단지 그 이유 하나로 지금 달려오신 겁니다.
   달리 상대가 저, 라서가 아니란 말입니다."
" 야, 네 멋대로 단정짓지 마. "

지윤은 화가 난 듯 했다.

" 멋대로가 아닙니다. 그건 선배 성격이예요.
   상처받기 싫고, 상처주기 싫으니까 그냥 같이 끌어안자. 포용하자…
   그게 선배 성격입니다. 제가 반한 부분입니다. 잘 모를리가 없어요. "
" 그런식으로 얼버무리지도 말어. "
" 말이랑은 다르게 얼굴은 빨간데요. "
" …갈게. 할 말은 다 했으니까. "

그러고는 휙 돌아서는 지윤을 붙잡았을 때,
툭-, 하고 눈물이 떨어져서 굉장히 놀랐다.
어느 정도로 놀랐냐면, 붙잡고 있던 팔을 저도 모르게 놓아버릴 만큼 놀랐다.

" 왜… 우는 겁니까, 선배. "
" 너란놈한테……. "
" 선배…? "

뚝, 뚝
눈물방울이 땅으로 떨어진다.

" 너란놈한테, 그 한마디를 해 주려고 여기까지 온 내가 한심해서.
   넌 니 생각밖에 안 하는 놈이야… 기껏 생각하고 생각해서,
   자존심 같은거 다 버리고 여기까지 찾아 온 사람한테, 뭐가 어쩌고 어째?
   이렇게는 안 된다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는건데.
   너 참 머리 좋구나. 그 짧은 순간에 이렇게는 안된다, 차라리 저렇게 하자,
   그런식으로 계획하고 설계할 정도로 말이다. "

재인은 즐거웠다.
지윤은 아마 평생 모르겠지.
자신이 극도로 흥분하면 얼굴이 빨~개진 상태에서
말이 빨라지고 그 덕에 굉장한 속도로 상대방을 쏘아붙인다는 사실을.
평생 몰라도 돼.
말하지는 않았지만 재인은 그런 지윤을 보는게 즐거웠다.
꼭… 토끼같아.

라고 말했다면 분명 고함을 지르고 한대 걷어 채였을지도.
더군다나 울고 있는 상황에서.

" 다 선배를 위해서입니다. "
" 웃기지 마아. "
" 이렇게 말씀하시면 이번엔 제가 서운해해야 순서가 맞는 건가요?
   생각해보세요. 선배, 지금 가장 중요하다는 시기 아닌가요?
   어쩌면 수험이라던지 진로, 대학같은거… 이것 저것 맞물린게 너무 많아서
   혼란한 건지도 모릅니다. 그래서 복잡한 기분에 단정지어 버린건지도 모릅니다.
   아, 내가 재인일 좋아하는구나, 하고 말이예요. 제 말 틀렸습니까? "
" ……확실히, 생각한 시간은 짧았지만…. "

그 말 한마디에 재인은 확- 하고 화가 치밀었다.

이것봐요.
보통은 그럴때 '아니, 난 충분히 생각했어. 역시 니가 좋아.' 라고
대답해줘야 하는겁니다. 아시겠어요, 선배???
그 때,

" 그치만 내가 복잡한 기분에, 아무렇게나 단정지은건 아니라고.
   넌 날 항상 맹하게만 보는 경향이 있는데, 나도 심각해.
   진지하고, 깊게 생각해서 내린 결론이야. 그래서 말인데……. "

절묘한 타이밍의 지윤의 의외의 역공에 재인이 잠시 놀라고 있자니,
주인공이 고개를 푸욱 수그리더니 중얼거렸다.

" …역시 니가 좋아……. "





늦은 가을바람에 나른한 기운이 섞여 흐른다.
해는 일찌감치 떨어져, 사방을 비추고 있는 건 체육관 주변의 환한 등.





" ……저도 선배가 좋아요. "
" ……. "
" 이미 몇번이나 말했지만, 좋아합니다. "
" 그,그만해……. "

재인이 그만 풋, 하고 웃어버렸다.
지윤은 귀까지 달아오른 상태로 여전히 고개를 숙인 채,
바닥과 눈싸움을 하고 있었다.

" 그래서 선배, 더 생각해보세요. "
" 뭐어? "

번쩍 고개를 들자, 아직 물기가 묻은 눈가가 붉었다.
저도 모르게 손이 올라가려는 걸 순간적인 이성이 자제시킨다.

" 저는 나중에라도 선배가 착각이었다, 널 좋아한다고 말한건 내 실수였어,
   등의 소릴 하신다면……. "
" …한다면? "
" 죽어버리지는 않겠지만, 아무튼 그에 비할정도로 괴로울겁니다. "

오버하기는… 지윤이 비죽거렸다.

" 분명히 괴로울거예요.
   그때 선배가 헤어지자느니, 이제 관두자는 소릴 한데도 절대로 안돼요.
   아시겠지요? "
" 무슨 소린지는 알겠는데, 그게 말야…
   사람들이 사귀다 보면 헤어지는 경우도…. "
" 저는 싫습니다. "
" 야, 그치만 솔직히 우리가 결혼을 할 것도 아니고. "

그런말을 하면서 다시 붉어진다.
재미있다.

" 기분 문젭니다.
   선배도 저와 사귀는건 결혼을 전제로, 라는 생각을 항상 염두에 두세요. "
" 그치만 우리나라는 남자끼리는…. "
" 한 십년뒤면 법도 바뀌겠지요. 안되면 제가 바꾸겠습니다.
   그것도 안되면 호주로 가면 되는거구요. "

슬쩍, 지윤의 눈에 공포가 어린다.
이런 제길(-_-;).
재인은 너무 급하게 몰아세운 자신의 바보스러움을 한탄했다.

" ……농담이구요. "
" 응…. "

그렇게 안도하지 마십시오!!!
라고 속으로 항변하며 재인이 한숨을 내쉬었다.

" 요는, 더 생각해 보시라는 겁니다.
   선배, 생각해보세요. 진지하게 생각해 보시구요, 또 생각해 보세요.
   그래도 제가 좋으면, 그 때 다시 말씀해 주세요.
   지금은 선배 수험일로도 충분히 복잡하시잖습니까.
   수능이 끝나면, 그때부터 천천히 고민해보세요.
   그래도 변하지 않는다면…
   선배가 그 때도 제게 좋아한다, 고 말씀하실 수 있는거라면…
   그 때 다시 말씀해 주십시오. "

지윤이 잠시 머리를 긁적였다.

" 넌, 그 동안 뭘 할건데…. "  
" 기다려야죠. "
" 뭘? "
" 선배 마음이 변하지 않도록, 기다려야죠. "
" ……네 마음이 변할수도 있는 문제잖아. "
" 그럴리 없으니까요. "

재인이 간단하게 잘라말했다.

" 그럴리 없습니다. "
" 어떻게 장담하는건데…. "

그렇게 물어오는 지윤이 조금은 기쁜듯한 얼굴을 하고 있어,
재인은 저도 모르게 웃음이 났다.

" 변할수가 없으니까요. "
" ……. "
" 그렇게 알고만 계세요. "
" 잘은 모르겠지만, "

지윤이 작게 헛기침을 했다.
그리고 고개를 비죽이 들더니 말한다.

" 넌 끝까지 내가 좋을거란, 그 말이지? "
" 네. "
" 그럼, 남은건 나 하나란 얘기? "
" 그렇습니다. "
" 모르겠다, 이재인. 난 분명히 네가 좋다고 말했어.
   다시 생각해보라고 내 등을 떠민건 너야.
   만약에, 한달후에 내가 '미안, 역시 오해였다' 고 말한데도 넌 절대 원망못해.
   알았지? "
" 그런 사태를 방지하게 위해 다시 생각하고 오시라고 등 떠미는 겁니다. "

재인이 웃으며 나무 기둥에 몸을 기댔다.
지윤은 잠시 복잡한 표정을 짓더니 망설임 끝에 말했다.

" 뭐가 뭔지… 솔직히 잘은 모르겠지만… 생각해볼게.
   나도, 그 사이에 변해버릴 마음이라면 빨리 정리하는게 좋겠지.
   일단은 너한테 고맙다고 말할게.
   이것도 네 방식이라면, 네 방식의 배려라고 생각하니까.
   그럼 한달후에나 보자… 도중에라도 만나거나 한다면…
   분명 또 뭐가 뭔지 흐트러질게 분명하니까. "
" 그게 좋겠지요. "





" 그래서 한달 뒤에 만나자고 한 거라고?"
" 응……. "

환규가 물고있던 빵을 그대로 손안으로 떨어뜨렸다.

" 더럽다. 환규야. "

지윤이 인상을 찌푸리자, 환규가 어이 없다는 듯 한숨쉬다가
냅다 뒷통수를 후려친다.

"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뭐야, 너… 아니지. 너랑 재인이 놈이랑.
   뭐야, 뭐야~ 너 공부를 너무 열심히 해서 돌아버린 거야? "
" 역시 돌아버린걸까……. "

지윤이 울먹이며 그렇게 중얼거렸다.
덜컥, 겁이 난 환규가 화들짝 놀라 손을 내저엇다.

" 아니,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요즘에 뭐, 연예인도 커밍아웃 하는 마당에
   그걸 가지고 돌았다고 할 정도는 아니지만…
   그러니까, 난 하리수도 예쁘다고 생각하고…
   그게 문제는 아니지만, 아무튼!!! "

괜히 손으로 얼굴을 부채질 한다.
한꺼번에 너무 떠들어서 산소가 결핍된걸까, 할 정도로 환규는 호흡이 곤란했다.

" 그냥 난 조금 놀란 것 뿐이거든. "
" 그러니까, 내가 재인이랑 그렇고 그런 사이니까…. "

「그렇고 그런 사이」란게 도대체 뭐냐!!!
그냥 평범하게(?) 좋아하는 사이, 라고 할 수는 없는거냐!!!
하고 소리치고 싶은걸 꾸욱 참고, 환규는 다시 친구의 등을 두드렸다.

" 누가 들으면 오해할 만한 대사는 집어치우고… 하긴, 오해도 아니다마는….
   아무튼 잘 생각해봐. 그렇게 네가 좋다고 쫓아다니던 재인이가 생각해보라고
   할 정도면… 생각을 다시 해 보는게 좋지 않을까, 싶다. 나도. "
" 쫓아다니진 않았어. "
" 토 달지 마. "

응, 하고 지윤이 고개를 끄덕였다.
환규는 소리없는 한숨을 내쉬며 천장을 올려다 보았다.

모처럼의 토요일. 수험의 압박에 시달릴 친구를 위해
함께 잠이나 자 줄까, 해서 온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건
그 친구의 충격고백 이랄까……
왠지 지윤이는 어릴 때 부터 생긴 것처럼 하는짓도 맹했고…
그래서 남자애들보다는 여자애들과 소꿉놀이 하는게 더 어울렸다고 해야하나.
그렇다고 남자들 사이에서 겉도는 것도 아니었는데…….

힐끔 바라보자, 안경을 쓴 채로 지윤이 숨소리도 없이 잠을 자고 있다.
환규는 안경을 벗겨주며 실눈을 뜨고 찬찬~히 지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스탠드 아래서 바라본 지윤이라… 피부 상태가 다른녀석들 보다 좀 좋긴 하지만…
이 피부는 유전이라 지환이 형도 상태가 좋긴 마찬가지다.
하지만 지환이 형의 경우, 지윤이처럼 뽀얗다는 인상을 받기란 힘들다.
쌍커풀이 져서 그런가… 눈을 뜨면 남들보다 좀 더 크긴 하지만…
그렇다고 여자같은 얼굴은 아닌데.

" 으음…. "

환규는 턱을 괴고 잠시 생각했다.
아무리 봐도, 절대 가슴이 두근거린다거나 얼굴 빨개질만한 외모는 아니다.
그 이전에 역시 남자라는 문제가 있긴 하지만…



" 유행같은건가……? "

이 또래의 남자아이들은,
어떤 의미로는 무시무시 하니까.

하지만 왠지 지윤이라면, 별로 이상할 것도 없다는 생각이 든다.
원체 남을 챙기는 걸 잘 하는 녀석이니까……
(본인이 덜렁대고 얼빵한 것과는 별개의 문제로)

그리고 재인이라면…
재인이와 지윤이………

" 윽-. "

왠지 오싹해진 환규가 팔을 쓰다듬었다.

" 너무 잘 어울리는 거 아냐……? "







7



끝났다.

교문을 나서는 순간, 비로소 지윤은 그 사실을 깨달았다.
함께 우루루 교문을 빠져나온 학생들이 저마다 기묘한 소리를 지르며 달려나간다.

지윤은,
오른손을 펴 보였다.
찬찬히 들여다 본 후,
다시 쥐었다.

꽈악, 하고.







" 여-, 축하한다 동생. 이제 진짜 프리맨이네? "

지환이 뒤를 돌아보며 말한다.
그러자 옆에서 운전중이던 택시 기사가 "오늘 수능쳤나보지?" 하고
아는체를 해 온다.

" 네. 아저씨도 오늘 아침에 몇사람 태우셨겠네요. "
" 한 두, 세명 정도 태워다 줬나?
   새벽 다섯시 반부터 시험칠 학교로 출발하는 학생들이 있더라고.
   학생, 올해는 쉬웠남?
   작년에는 뭐 문제가 어렵느니 어쨋느니 하면서 난리도 아니드만. "

지윤이 멍하니 창밖만 바라보고 있는 통에 기사의 말을 듣지 못했다.
지환이 "윤아. 야, 이지윤." 하고 몇번이 부르자
그제야 "어?" 하며 앞을 향해 고개를 돌린다.

" 문제 쉬웠냐. "
" …언어영역이 좀 까다로웠던 것 같은데……. "
" 첫시간 과목이 원래 제일 까다롭다고 생각되는 법이다. "

지환이 쌈빡하게 말한다.

" 그래도 형들 때보단 쉬웠겠지. "
" 문제에 쉽고 어려운 게 어딨냐. 다 제 탓이지. "

그러자 옆에 있던 기사가 기특하단 듯이 껄껄 웃는다.

" 아이고, 학생 말 한번 시원하게 하네. 그렇지. 다 지 탓이지.
   그걸 가지고 문제가 어쨋는니 하고 남 탓하면 안돼지.
   요즘 학생들은 참 그게 없어요.
   뭘 혼자 하고, 안되면 자기가 부족해서 그렇다는 생각 안 하고
   무조~건 남탓이지. 그거 안돼~…. "
" 안되죠. 맞아요. 요즘 애들 그거 참 문제예요. "

자기도 수능 친지 오늘로 정확히, 딱 일년 째 인 주제에.
이제 겨우 스무살 인 주제에.

요즘 애들보고 문제란다.


그래도 마음이 콩밭에 가 있는 지윤은 지환에게 어택을 걸 생각도 없이
머엉- 하게 창밖만 바라보고 있다.

아…… 오늘 하루는 뭘 하고 놀아야할까?







" 나이트 가자, 나이트. "

침대위에서 환규가 말한다.
손에 들고 있던 만화책을 내려놓고 몸을 한 바퀴 옆으로 구르더니
착, 하고 엎드린 자세로 눈을 빛내며,

" 나이트으? "

지윤이 어이없다는 듯 되묻자
응, 응 하며 고개를 끄덕 끄덕.

" 그거 졸업식 때 가야하는거 아냐? "
" 야, 무슨 쉰소리야. 그런게 어딨어. 자기가 가고싶음 가는거지. "

가끔씩 이해 할 수 없는 친구를 바라보며
환규가 너야말로 어이없다는 듯 타박을 준다.

" 너 아직 한번도 안 가봤냐? "
" 임마. 고3이 시간이 남아도냐? 나이트까지 돌아다니게. "

지윤이 의자에 앉은 채, 침대위의 환규를 향해 발을 뻗자

" 으이구-, 깍쟁이. "

환규가 눈을 게슴츠레 뜨며 툭 던진 한마디.

" 내가 왜! "

그 한마디에, 왠일인지 확 얼굴이 붉어진 지윤이 정색을 하고 대들듯이 반문하자
환규는 오히려 재미있다는 듯 샐샐거리며 놀린다.

" 아유, 요 깍쟁이. 얼굴 빨개지는 것 좀 봐라. 그러니까 깍쟁이지. "
" 야, 좋은말 할 때 너 그만둬라. "
" 것 봐, 것 봐. 아이구우, 우리 깍쟁이 귀여워 죽겠다.
   너 거울 좀 봐라. 진짜 홍시같다. 홍시. "

머리를 마구 헝클어 뜨리며 환규가 재미있다는 듯 킬킬거린다.
지윤은 "내 얼굴이 왜!" 하며 그런 환규의 손을 뿌리치며 정말로 화 난다는 듯이

" 뭐야. 환규 너 적당히 안 하면 정말로 화 낸다.
   듣기 좋은 꽃노래도 자꾸 들으면 싫다고 그랬지?
   깍쟁이가 뭐냐. 여자도 아니고. "

지윤이 꽤 심각한 얼굴로 말했기에
환규는 꿀먹은 벙어리처럼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래도 쟤가 재인이랑 그런일이 있고 부터는
'여자같다' 는 면에 상당히 민감한 듯 하다, 고 생각하며
"안 할게, 임마…." 하며 수그러든다.

그제야 지윤은 후… 하고 숨을 내쉬더니 다시 의자에 걸터앉는다.
그리고 뭔가를 곰곰이 생각하는 듯 눈을 반쯤 내리깔고 턱을 괸다.
조금 기가 죽은 상태로 가만히 그 모습을 바라보고만 있던 환규는
그저 막연하게 '저자식 또 재인이 생각하는건가….' 하고
복잡한 얼굴로 친구를 바라보았다.
환규의 복잡한 마음이란 즉,

물론 누군가와 사귈 때 자신은 틈만 나면 그 아이를 생각했었고
생각하면 그냥 즐겁고 설레고, 헤실거리게 되었다.
간혹 이런저런 깊게 생각하다보면
뭔가 불안한 생각도, 그래서 우울한 생각도 하게 되지만
좋은게 좋은 거라고 '그냥, 지금 일만 생각하자' 는 식으로
다시 당장 내일 만날 일, 주말에 영화보러 갈 일, 등을 생각하곤 했다.
지금 지윤이, 재인일 생각한다고 해서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두 사람은, 분명 사귀는 사이니까.
아직 사귀는건 아닌가?
아무튼-,

그렇다고 해도,

남자끼리,
어떻게 하면 그런 감정이 생기는 걸까?

ㅡ라는 것이었다.



신기해…….





" 야, 너 11일에 갈거지? "
" 응? 어디? "

환규가 조금 놀란 얼굴을 했다.

" 어디라니… 임마, 재인이 시합말이야. "
" 아ㅡ! "

드물게,
지윤이 굉장히 놀란 얼굴을 했다.

" 까먹고 있었다. "
" 재인이 시합? "

어떻게 그런 걸 까먹냐.
사귀는 거 맞아? 하고 저도 모르게 말이 튀어나올 뻔한 걸 간신히 삼키며
환규가 한심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힛트는, 다음 순간이었다.

" 아니, 재인이. "
" 뭐? "
" 까먹고 있었다고. "
" 재인이를? "
" 어. "



하긴 세상 사람들이, 다 자기같지는 않겠지.
-하고 환규는 다시 생각했다.



" 뭐랄까… 나는 평소에도 네놈이 뭔가 하나가 빠진 것 같다고 생각은 했다만,
   그래도 살아가는데 전혀 지장없어 보이길래 상관없다고 생각했거든.
   너 그래도 밥 먹는건 안 까먹잖냐.
   매일 학교에 나가야 한다는 사실도 까먹은 적 없지? "

사실은 밥 먹는걸 까먹은 적은 있다… 고 말했다가는,
환규가 화를 낼 것 같아서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학교에 가는것도,
매일 눈 뜨면 어머니께서 '씻고 옷 입고 밥먹어라. 학교 가야지.' 하고
말씀해 주시는덕에 '아, 학교가야지.' 하고 생각을 하게 되는 것 같다.

" 근데 넌 애가 진짜 왜 이렇게 멍하냐? "

그러게.
내가 진짜 멍하긴 한가보다.

" 참 나… 아무리 수능 준비에 바빠도 그렇지,
   나같음 공부하는 틈틈이 좋아하는 애 얼굴 생각나서 공부도 못하겠다.
   넌 한번도 생각 안했냐? "
" 몰라. "

'아니, 맨날 생각했어' 라고 말하는게 그렇게 부끄러울수가 없었다.
그래서 고개를 숙이며 '몰라' 하고 말았지만 환규는 오히려

" 재인이한테 부끄럽지? 으이구…이상한 놈. "

하고 이상한 오해를 하는 듯 했다.
그냥 오해하게 냅두자, 고 생각하며
지윤은 환규에게 끌려가듯 체육관을 향해 걸었다.







" 진짜 오늘도 학교에 온 거 맞아? 1,2 학년은 오늘 노는 날이잖아. "  
" 시합이 코 앞인데 지가 안 나오고 베기냐. 연습하러 나왔을거야. "
" 그럼 자기가 다니는 도장에 가서 연습하겠지. "
" 재인이 도장 안 다닌다더라. "

그러면서 환규가 성큼 성큼 걸어가 체육관 문, 손잡이를 붙잡고
뒤를 돌아보며 말했다.

" 같이 나이트 가자고 하자. "
" 뭐? "
" 재인이, 누님들이 좋아하는 타입이란 말이야.
   같이 가 있으면… 아마 부킹 많이 들어올걸. "

지윤이 조금 복잡한 얼굴을 했다.



그야, 자기가 진짜 재인이 애인도 아니고,
지금은 그야말로 '보류' 중인 사인데 (정확히 뭘 보류라는건지는 잘 모르겠지만)
저렇게 아무렇지도 않게 '누님들이 좋아할 타입이니까, 나이트에 데려가자' 고
말하는 환규에게 조금 섭섭했다.
그렇다고 환규에게 '넌 내 앞에서 그런말을 하냐'고 그 심정을 드러내기엔……

진짜 진짜 쪽팔린다.
이것도 역시 재인이와 내가, 둘 다 남자인 탓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자신이 여자였거나, 혹은 재인이 여자였다면 당당하게 환규에게
'넌 어떻게 그런말을 하냐, 이 자식아' 하며 한 대 때려줬겠지만
역시 지금의 자신에게 그런 행동은, 확실히 오바다… 라고 생각했다.
그렇게 생각하자, 슬퍼졌다.

뭔가,
좋아하는 사람임에도 남들앞에선 그 태도를 확실히 드러 낼 수가 없는거구나.
하는 생각이 돌연, 머리를 스쳤기 때문이다.
그래서 만약 자신이 재인과 정말로 그런 사이가 되어서, 항상 같이 있고 싶고,
남들 앞에서도 당당하게 좋아한다고 표현을 할 수 있을 때가 온다면,
그렇게 해서는 안되는 현실에,
지금 이 마음보다 훨씬 더 괴로운 기분을 느낀다면
그 때는
지금보다 얼마나 더 힘들고 고통스러울까……
하고,

지윤은 생각했다.



" 재인인 그런거 안 좋아할걸. "

조금 가라앉은 음성으로 말했다.

" 그런가? 하긴 재인이가 좋아하는 사람 두고 딴 여자랑 말 붙일 놈은
   아니지만……. 그래서 데려가고 싶었는데.
   어차피 재인이야 너만 볼 테니까 재인이 얼굴보고 따라온 여자들은
   다 우리가 데리고 가면 되니까. 아깝다. "

앙?

" 그런거였어? "
" 응? "
" 아, 미안 미안. 환규, 나 잠깐 오해했었거든. "
" 무슨 오해? "
" 헤헷… 아니, 아무것도. "

그렇게 말하며 지윤은 두 손을 코트 주머니 안에 집어넣었다.
어쨋거나 다행인 건,
역시 환규가 재인이와 자신의 사이를 확실히 인정해 준다는 거였다.

" 역시 내 친구다. "
" 무슨 소릴 하는거야, 임마. "

환규가 이상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본다.
웃으며 지윤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하고 말했지만
그래도 뭔가 마음 한 구석은 저릿했다.

그래도 어차피 '그런 사실' 에 대해선 변함이 없는 걸.
동성끼리는, 좋아해도 함부로 그 마음을 표현해선 안 된다는 사실.



어째서일까.
서로가 좋아하는데.
그렇게 성립된 '사랑' 에 무슨 하자가 있을까?
두 사람 중, 어느 누구도 피해를 입지 않고,
오히려 그걸 강제로 막을 경우, 그 때야말로 사랑하는 두 사람에겐
'고통'이고 '괴로움'일 텐데.

가족들이 괴로우니까?
주변 사람들이 힘이 드니까?

남자가, 남자를 사랑하고,
혹은 여자가, 여자를 사랑하고,
상대가 그 마음을 받아 준다면.

그건 역시 '잘못된' 일 일까?
어느 누구에게 '피해'가 가지 않아도?




문득 지윤은, 오늘 수탐Ⅱ 시간에 풀었던 문제 하나가 생각났다.

「 다음의 경우, '갑'의 행동은 어떠한 측면에서 비판을 받을 수 있나 」
라고 시작한 문제의 답은,
아마도 4번, 「 사회의 윤리적 측면 」이었던 것 같다.

누구라도 쉽게 맞추었을 문제.

그것처럼,
해도 '되는 일' 과 '안되는 일' 의 확연한 구분은
어느 누구라도 쉽게 지을 수 있다.
그건 그야말로 가장 기초적인, 「윤리적인」 문제에 해당하는 것이니까.







" 재인이 선배 오늘 안 나오셨는데요. "

일학년 하나가 말했다.

" 시합이 언제라고……. 그놈도 많이 헤이해졌구만. "

환규가 '선배의 얼굴' 로 중얼거리자, 머뭇거리며 일학년이 다시 입을 열었다.

" …집에서 연습한다고 하시던데요…. "







" 참 나… 무슨 집에다 연습실을 만드냐. 돈이 튀는건지, 땅이 튀는건지. "

돌아오는 버스안에서 환규가 궁시렁 거렸다.
지윤은 가볍게 웃으며
"둘 다 튀는거겠지." 하고 대꾸해 주었다.
하지만,

" 어이구, 좋으시겠수. "

하고 환규가 장난스레 말을 건내었을 때,
지윤은 입을 다물었다.





   「 인간은 윤리적인 범위에서 어긋나는 행동을 할 때,
      '양심'의 가책을 받아 괴로워한다. 그래서 인간은
      '윤리적인' 존재인 것이다. 」





시험도 끝났는데.
이제 더 이상 암기하고, 되새기지 않아도 되는 문장인데.

자꾸만 떠오른다.












지환에게 볼만한 책 한권만 달라고 했더니
「 컴퓨터를 이용한 목표농도주입법 」 이란 책을 들이민다.
당황한 지윤이 '이런거 말고…' 하고 도로 내밀자
'왜? 재밌는데.' 하며 책꽂이에 꽂은 지환이 이번에 내민 책은

「 Grundlegung zur etaphysik der Sitten 」
라는 제대로 읽기조차 힘든 거대한 제목의 것이었다.

" 이거 읽으라고 주는거야? "
" 꽤 재밌다. 읽어 봐. 다 살이 되고 피가 되니까. "
" 원서……. "
" 번역본이다. "

해서 들여다 봤더니 일단 익숙한 한글이 늘어 서 있어 안도했지만
그 크기가 그야말로 깨알만하고 줄과 줄 사이도 다닥 다닥 붙어있어
약한 난시인 지윤이 읽기에는 너무 버거워 보였다.
슬적 읽어 본 내용도, 지윤의 취향에는 맞지 않는 듯 했다.

" 무슨 내용인데, 이거…. "
" 무슨 내용, 이라고 딱 집어서 말 못하는 내용. "
" ……. "
" 칸트다. "

아아, 칸트…
하고 지윤이 중얼거리자 지환이 의외라는 듯 "알아?" 하고 물어온다.

" 계몽주의 철학자. 합리적 이성을 중시한. "
" 오오… 또? "
" 음…합리주의, 라는게 처음에는 데카르트에서 시작했고 그걸 완성한게
   칸트였지. "
" ……그리고? "

뭔가, 지환의 표정이 심상찮다.

" 그리고 현실적으로는 현대과학과 기술체계로 나타난거지. "
" …다음은? "
" 몰라. "

지환이 진지한 얼굴로 잠시 생각하더니,

" 굉장히…굉장히 짧게 간추린 요점이구나.
   그것도 발생, 진행, 현대사회,에 이르는 순차적인 흐름에 따른. "

하고 말했다.

" 윤리 교과서엔 그거밖에 안 나와있으니까. "
" 그렇겠지. 서양철학 파트에. "

한숨을 쉬며 턱을 괴는 지환에게 울컥한 지윤이 책을 들이밀었다.

" 형은 어제 막 수능 친 애한테 뭘 바라는거야. 그리고 이거 안 읽을래.
   재미 없을거 같아. "
" 그럼 가서 신데렐라나 백설공주나 인어공주나 읽어라. "

그냥 한 말에도 지윤은 예민했다.

" 왜 꼭 공주 얘기만 읽으라는거야? 내가 여자야? "

'왜 동화책을 읽으라는거야? 내가 어린애야?' 가 아닌,
공주 얘기, 여자, 로 반응하는 동생에게 지환은

" 그럼 미운 오리 새끼를 읽던지. "

하고 대꾸했다.

" 뭐? "
" 미운 오리 새끼는 숫놈이니까. "
" 그, 그런 동화 밖에 없어?
   그냥 보통, 인간에 남자가 주인공인 동화책도 있잖아. "
" 아, 바보 이반. "
" 이… 씨……. "

킬킬거리는 지환을 뒤로 하고, 부서져라 방문을 세게 닫고 나온
지윤은 언제나처럼 풀썩, 제 방의 침대위에 누워버렸다.
침대 위에서 생각을 하자, '바보 이반이 보통 인간이냐? 바보지!' 하고
대꾸해 주지 못한게 안타까웠다.

어제 수능을 끝내고 환규와 함께 학교에 다녀 온 이후로
지윤은 이루 말할 수 없이 심란했다.
뭔가를 해야하는데, 밖으로 나가긴 귀찮고 그렇다고 가만히 있자니
온갖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져 자신을 괴롭혔다.
그래서 책을 읽자, 고 생각했다.
그랬는데 형이란 인간이 이렇게 속을 긁으니….

군대나 가라고 속으로 고시랑 거리는데 벌컥-- 문이 열리더니
지환이 들어왔다.

" 또 자냐? "
" 또 잔다. "

피식, 웃더니 툭, 책을 하나 던져준다.

" 뭐야? "
" 바보 이반. "
" ……. "

지환은 아무래도, 금방 겉으로 드러나는 동생의 반응을 즐기는 듯 하다.

" 무라카미 류다. 읽어 봐. "  

지윤이 몸을 일으키며, 지환이 던져 준 책을 집어들었다.
샛노란 표지에 포크와, 스푼과, 나이프가 나란히 서 있고
그 사이에 제목이 적혀있다.

「 달콤한 악마가 내 안으로 들어왔다 」

모 cf 문구와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아니, 똑같은가?

" 재미있어? "
" 재미는 있어. 내 취향이 아닐 뿐이지. "
" 무슨 내용인데? "
" 보면 아는 내용. "

아, 그렇습니까.
하고 지윤은 고개를 끄덕였다.

" 무라카미 류… 어디서 들어는 봤는데…… 유명하지? "
" 니가 들어 본 듯한 작가면 굉장히 유명 한 거 아닌가? "
" 난 메이저한 인간이야. 형, 이 작가 좋아해? "
" 난 마이너한 인간이라 별로 안 좋아한다. "
" 근데 책은 왜 샀어. "

알 수 없는 인간이네… 하며 지윤이 묻자, 지환은

" 누가 빌려준거다.
   별로 안 좋아한다고 했더니, 그 작가 추종자가 읽어보라고 빌려주더라. "
" 그래서, 좋아졌어? "
" 아니. 더 싫어졌어. 그치만 존경은 해. "

복잡한 말을 하며

" 그럼 잘 읽어봐라. 별 생각하지 말고, 그냥 가볍게 읽어. "

하고 방을 나서려는걸, "형!" 하고 지윤이 다급하게 불렀다.
왜? 하며 돌아보자,

" 바보 이반, 보통 인간 아냐. "

하고 상기된 얼굴로 말했다.

" 바보야. "



지환은 잠시 동생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더니,
참담한 얼굴을 하고 문을 열고 나갔다.
지윤은 괜히 말했다고 후회하며
바보는 이반이 아닌 자신이 아닐까, 하고 자책했다.







지환이 준 책은, 간단히 말하면 요리소설집 이었다.
유명한 작가, 라는 선입견에 의한 탓인지도 모르겠지만 여하튼 글은 재미있었고
읽는 동안, 지윤은 '맛있는 걸 먹고 싶다' 는 생각을 했다.

때마침 운도 좋게 아버지께서 '그동안 수고했다' 며
수능 치룬 기념으로 외식이나 하자며 연락이 와
오늘 늦게 들어온다고 연락이 온 지환을 두고
세식구가 저녁을 먹기 위해 나간 고급 레스토랑에서,
지윤은 고급 스테이크를 먹고 보란듯이 체해버렸다.







" 수험생 노릇도 끝났는데 또 뭐가 심기가 불편해서 체한거냐? "

따줄까?
하고 빙글거리며 물어오는 형을 "아버지가 벌써 따 줬어." 하고 밀어낸 지윤은

" 모처럼 맛있는거 먹었는데…….
   역시 고급 음식도 먹던 놈이나 먹어야 좋은 건가 봐. "

하며 중얼거렸다.

" 아아, 류? "
" 응. "

흐음, 하며 지윤의 책상위에 놓인, 이틀전에 자신이 던져 준 노란 표지의 책을
집어들며 지환이 '어떻든?' 하고 감상을 묻는다.

" 재미있던데… 저거, 소설집 맞지? "
" 글쎄. 작가가 소설이라고 하면 소설이고, 수필이라고 하면 수필이지. "
" 수필이면 저 사람 주변인들은 진짜 큰일 나는 거잖아. "
" 글쎄. "

지환은 팔짱을 끼고 선 채로 바닥을 노려보고 있었다.

" 싫어하는 이유는, 그것 때문이거든. "
" 응? "
" 난잡하잖아. "

아아, 하고 지윤은 납득했다.

" 개인차라고 봐 주면 되지. "
" 한계가 있다는 생각 안하냐? "
" 그거야 뭐……. "

지환은 모처럼 진지한 얼굴로 말했다.

" 단순히 난잡하다, 는 이유로 싫어하는건 아니거든.
   그치만 나는 일단은 정상인이고,
   제법 배우고 공부한 지식인 축에 든다고 생각해.
   류,를 싫어하는건 아냐.
   글은 재미있고 대작이라고 불릴 만한 작품도 충분하니까.
   작가로서 그를 싫어하지는 않아. 내가 싫어하는 부분이라면, "

지윤은 가만히 형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였다.

" 결여된 윤리의식 이랄까. "



두근, 하고
가슴이 뛴다.



" 그 사람의 철저히 비도덕적이고 타락한 생활방식이 마음에 안 든다는거지. "



조금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 젊은 시절에 어떻게 살았든 내가 알 바는 아냐.
   몇명의 여자와 난교 파티를 벌이던, 말던, 마약을 하던, 자기애를 지우게 하건,
   말건 내 알바는 아니지.
   영원히 몰랐을 수 도 있어. 하지만 읽어버렸으니까. 알아버렸잖아.
   그래서 싫어. "

지환은 계속 말했다.

" 유부녀와 불륜의 관계에 빠진 것도,
   부인을 두고 떠난 출장지에서 옛 연인을 만나 관계를 가지는 것도,
   전혀 부끄럽게 여기지 않잖아. 오히려 자랑스럽게, 당당하게 말해.
   전세계인이 자신의 책을 읽는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당당하게 책으로 내지. "
" ……. "
" 세상에 죄를 짓고 사는 사람은, 물론 수도없이 많아.
   따지고 보면, 류의 난잡한 생활관이란 흠이 될 수도 없으리만치
   사소한 일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그래서 쉽게 생각하고, 쉽게 이야기하고, 쉽게 잊고
   다시 안락하고 편안한 자신의 가정속으로 들어가려는 남자를
   이해할 수가 없다는거야.
   이런 말 하는것도 우습지만,
   난 저 사람 책을 읽을 때마다 사랑이란게 그렇게 숭고하고 거룩하고,
   가장 최상의 가치를 지닌 정신적 산물인가 하고 번번이 의심하거든. "

지환이 '사랑' 이라는 낯간지러운 단어를 꺼냈음에도,
전혀 우습다거나, 어색하다는 기분을 지윤은 느끼지 못했다.
너무 진지한 모습에, 오히려 지환에게 '사랑' 이라는 무형의 존재가
어떤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처음으로 생각하게 됐다.
물론 그건 단순한 남,녀의 '이성적인 사랑' 에 국한된 개념이 아니었다.

" 좀 다른 얘기지만…이런 면에서 내가 고지식하다는 생각을 가끔 하거든.
   일단 나는 정말로 결혼을 하기 전의 남,녀의 사귐은
   그것도 결국 나중엔 모두 하나의 '과거'가 된다고 생각한다.
   흔히 '과거있는 여자' '과거있는 남자' 라며 문제가 있니 어쩌니 하지만,
   그런 '과거'는 결국 누구에게나 있어.
   다만 그 '과거'의 관계가 얼마나 깊었나, 하는 정도에 따라
   그건 지나고 난 후에 단순한 '옛날 이야기'가 될 수도 있고
   그야말로 '심각한 과거'가 될 수도 있는 거지.
   물론 최상의 배우자를 찾기 위한 선택의 대안, 이라는 범위에서의
   연애활동을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겠지. 아마 대다수가.
   그건 그 사람들 얘기고, 내 얘기는 이거야. 니 말대로, 개인차지. "
" 그런 식으로 애인없던 솔로 20년의 생활의 비참함을
   무마하려 드는건 아니겠지. "

지윤이 웃으며 말했다.

" 안 먹히는구나. 많이 컸어, 자식. "

지환도 그제야 인상을 풀고 웃는다.

" 그럼 형, "
" 응? "
" 만약에, "
" 응. "
" 정말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았어. "
" 응. "
" 정말로, 진심으로 사랑해. 상대방도 날 똑같은 마음으로 사랑해. "
" ……. "
" 그런데 형이 말하는 '윤리적인' 이라는 가치관에 반하는 상대야. "
" ……. "
" 그럴 땐 어떻게 해야하지? "
" 난 니가 어머니를 그런 눈으로 보는 줄은 몰랐다. "
" 바보!!! "

낄낄거리며 지환이 지윤의 책상 의자에 걸터 앉았다.

" 내가 말해놓고도 소름 돋는다, 야. "
" 놀랬잖아. 으으… 진짜 이상한 기분이다. "
" 누구 얘기냐, 근데. "
" 그냥… 만약에, 라는 가정하에. "

음…
지환이 잠시 생각하는 시늉을 한다.

" 글쎄다. 그런 상황에 일반을 운운하는 것도 우습겠지만,
   일반적으로 진정한 운명의 상대라는건 그만큼 모든 조건이 맞다는 얘기 아닐까?
   그런데 윤리적으로 맺어질 수 없는, 이라는 상황은, 조건 중에서도 최악이지.
   그런 관계의 두 사람이 과연 운명적인,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
" 말, 못하는 건가? "

지윤이, 진지한 얼굴로 물었다.
지환은 조금 생각하는 듯 고개를 다른곳으로 돌렸다.

" 그것도, 다 그 상황이 되어봐야 알겠지만, "
" 응……. "
" 정말로 일생에 단 한 번, '죽어도 이 사람이다' 라는 결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고 있을 자신이 있는 상대라면,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의 상대자로 남아있을
   두사람이라면, 그게 정답이 아닐까, 한다. "
" ……. "
"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최상의 가치는 '사랑' 아니겠냐.
   내가 '이해할 수 없다' 는 건, 그 '진정한 사랑' 이 길지 않은 인생안에서
   두번 이상이나 그것도 꽤 여러번 행해질 때를 말하는 거지. "
" ……. "
" 나라면 말이다. "
" 응. "
" 내가 그 상황에 맞닥뜨리게 된다면, "
" …응. "
" 그것도 동서고금을 막론한 정석을 따르겠다. "
" 그게 뭔데. "
"「 마음이 움직이는 대로 」 지. "  







그리고 멋있게 방을 나서던 지환이,
마침 지윤의 방문을 열고 들어온 모친과 따악, 부딪히고 말았다.

" 얘, 지환아. 너 요즘 막노동판에서 일이라도 하니? "

느닷없는 어머니의 물음에 지환이 "네? 아니오?" 하고 대답한다.

" 그런데 어제, 오늘 왜 입고 들어오는 옷마다 먼지 투성이에
   때국물이 줄줄 흐르는건데. 세탁기로도 안 빠져서 손빨래 하게 생겼다, 얘. "
" 아아…… 저희 학교 체육관 옆에서 공사하고 있거든요.
   내일 저희 학교 주관으로 전국 고교생 검도 시합이 있는데
   그거 준비하면서 걸리적 거리는 공사자제도 좀 치우고 하느라구요. "

형과 모친의 대화를 듣던 지윤은 번쩍 귀가 트였다.



내일…!

재인의 시합 일이다.



" 그 일을 왜 니가 해? "
" 저희학교 검도생들 관리하시는 사범님이랑 좀 친해서요. "
" 니네 학교 사범님이 널 어떻게 아시고? "

지윤은 '전국 검도협회 관계자 사람들중에 형을 모르는 사람도 다 있겠어요'
하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복잡한 머리에 입을 열기도 귀찮았다.

" 몇번 연습하러 갔다가 이야기도 나누고 그러면서 어쩌다 그렇게 됐어요. "
" 넌 질리지도 않니? 너도 참 애가 용하다, 그래.
   내일 그 시합이니 뭐니 끝나면 제발 궂은 일 좀 하지마.
   한번만 더 옷 이런식으로 만들어오면 너더러 빨라고 할거다. "

하고 모친이 방문을 닫고 나갔다.
으쓱, 하고 어깨를 올렸다 내린 지환에게 지윤이 같은 말을 한다.

" 형은 질리지도 않아, 검도? "
" 너도 질리지도 않고 밥을 먹잖아. "

쳇.
지윤이 무언가를 더 말하려다 마는 걸 보고, 지환이 생각난 듯 묻는다.

" 너 내일 올거지? "
" 내,내가 왜!? "

소리쳐 놓고 아차, 싶은 지윤이었지만, 이미 지환은 놀란눈을 하고 묻는다.

" 왜 그렇게 소릴 쳐? 너 검도부 애들이랑 무슨 일 있었냐? "
" 그런거 없어…. 그냥 3학년이 그런델 왜 가나 싶어서……. "
" 야, 삼학년이 수능 끝났으면 당연히 후배들 나가는 대회에 가서 응원도 해 주고
   해야지. 환규랑 애들은 다 갈거라고 연락왔던데 뭘. "
" 그래도… 재인이 한명이 나가는데
   선배들까지 우루루 동원해서 응원한다는 것도 우습고……. "
" 보통 대회냐? 혼자니까 더더욱 다 와서 응원해 줘야지.
   그리고 그놈이 우승 후보라는데 행가레까진 기대 안 한다만
   좋은 결과 있으면 그만큼 거하게 축하해 줘야 할 거 아냐.
   너 안되겠다. 이건 형으로서 하는말이 아니라, 니 검도부 선배로서 하는
   명령이니까, 내일 꼭 와. 알았지? "

하고 지환의 스윽, 눈을 부라리더니 방을 나가버렸다.
아무래도 '내가 왜!' 라는 지윤의 외침이 꽤 충격이었나 보다.
물론 지윤으로서는, 지환이 행여나 재인을 염두에 두고 자신에게 내일 오는거냐,
고 말을 한 게 아닐까 싶어 노심초사한 마음에 외친 고함이었지만.
…그런 걸 지환이 알 턱이 있나.

긁어 부스럼, 이란 이런건가…… 하며 지윤은 한숨을 푸욱 내 쉬었다.





가야지.
가서, 시합하는 모습, 봐 줘야지…….

그리고…



지윤은 슬쩍, 책상위에 놓인 노란색 표지의 책에 시선을 주었다.



「 결여된 윤리의식이 싫은거니까 」

지환의 목소리가 생각났다.



「 그런데 윤리적으로 맺어질 수 없는, 이라는 상황은,
   조건 중에서도 최악이지. 그런 관계의 두 사람이
   과연 운명적인, 일생에 단 한번 뿐인
   진정한 사랑의 대상이라고 말 할 수 있을까? 」

「 '죽어도 이 사람이다' 라는 결론을 처음부터 끝까지
    안고 있을 자신이 있는 상대라면,
    그리고 실제로도 그렇게 처음부터 끝까지
    서로의 상대자로 남아있을 두 사람이라면 」



" 하지만 형……. "



지윤은 조금 씁슬한 표정으로 중얼거렸다.



" 그야말로 최악인 걸……. "




거기다, 지금은 본인의 마음조차 확실히 알 수가 없다.
어떻게 잊어버릴 수가 있냐, 고 어이 없어하던 환규의 목소리도 떠오른다.




  「 정말로 좋아하긴 하는거야, 너? 」








모르겠다.

이젠 정말, 뭐가 뭔지 모르겠다.



지금 당장, 이렇게 혼란한 머리로
어떻게 앞을 예상 할 수 있을까.

그것도, 무수히 많은,
남은 생애 동안의 사랑을.



그 앞날의 사랑을 자신있게 말 할 때,
비로소 그 사랑은 완성된 것이라고 할 수 있는걸까.
그렇게 되면,
지금 자신이 가지는 이 불안도, 괴로움도
모두 없는 것 마냥 깨끗이 잊고 살 수 있는걸까.






하지만,






" 모르겠단 말이야……. "





툭, 하고
눈물이 떨어졌다.



어쩌면, 정작으로 자신은
모르고 싶은건지도 모를 일, 이었다.

앞날을.
앞날의 사랑을.






8



역시 수능기간은 늘 추운거구나…



철컹---,

대문소리를 뒤로 하고 잘 떼지지도 않는 걸음을 옮기며 지윤은 '하아…' 하고
입김을 내뿜어 보았다.
분명히 눈 앞에 서리는 김.

집에서 그다지 멀지 않은 지하철 역까지 가는 도중에,
몇번이고 되돌아갈까, 하고 생각했다.

가서,
만난다면,
무슨 말을 해야하나…?
혹은, 재인은 무슨 말을, 어떻게 걸어올까…?

아마도 깨닫기 전이었다면 충분히 즐거웠을 상상.
하지만 이제는 생각하지 말자고 그렇게 노력해도 저절로 떠올라
자신을 괴롭히는 힘든 모습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노란색 정지선을 밟으며,
지윤은 생각했다.

아직은 어리니까.
아직은 어린, 자신과 재인이니까.
성숙하지 않은 감정과 순간적인 호기와, 그래서 얻어진 서로의 관계니까.
쉽게 생각하자.

' 웃기지도 않아. '

라고, 쉽게 생각하면 정말로 웃으면서 그만 둘 수 있다.
졸업을 하면, 길에서라도 우연이 만날 가능성은 극히 희박하다.

웃자.
웃으면서, 어이 없다는 듯 웃으면서
'이제 그만두지, 뭐' 라고 말하면 그만 두게 되는거다.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면, 아무것도 아닌게 된다.
아무것도 아닌일로, 가슴 아파하거나 괴로워하지는 않는다.

웃자.
가볍게.
웃어넘기자.







" 환규. "

어? 하고 돌아본 환규가 정색을 하고 달려온다.

" 뭐야? 너 왜 이제 와? "  
" …미안. "
" 아프냐? 얼굴이 왜 이래. "

꿀꺽, 마른침을 삼킨 지윤이 재인이는? 하고 물었다.

" 대기실에. "
" 대기실에 혼자 있냐? "
" 사범님이랑. 아까 지환이 형도 들어가던데 모르겠다. 지금도 있을런지. "
" 형이 왜? "

지환의 이름이 나오자 괜히 불안해졌다.

" 왜긴… 그냥 긴장도 좀 풀어주고, 잘 하라고 격려해주려는 거지. "  

거기까지 이야기 했을 때,
멀리서 지윤을 알아 본 후배들이 우르르 달려오며 인사한다.

" 안녕하십니까! "

하고, 마치 조직처럼 한 줄로 늘어서서 우렁찬 목소리로 외치며
꾸벅- 절을 하더니 허리를 펴기가 무섭게 달려들며 안부를 묻는다.

" 선배, 안녕하셨어요! "
" 지윤선배, 너무 오랜만인데요~! 수능 잘 치셨어요? "
" 형 대박나셨음 오늘 한턱 쏘세요! "

왁자지껄하니 쉴새없이 말을 붙여오자 머리가 아플 정도로 소란스럽다.
대충 웃으며 인사를 받아넘기는 지윤의 안색이 턱없이 파리함을 깨닫고,
환규가 후배들을 말린다.

" 이놈들아, 지윤이만 선배냐? 내가 올 땐 '형 오셨어요?' 딱 한마디로
   끝내더니만……. "
" 어, 환규선배 혹시 질투 하시는거…? "
" 질투난다. 어여 떨어져. "

지들끼리 뭐가 그리 신이 난다는 듯 웃더니,
다시 꾸벅 인사를 하고 선수진영의 응원석으로 돌아간다.

" 고맙다, 환규…. "

간신히 숨을 돌리며 말했지만 환규는 들은체 만체 지윤을 밖으로 이끌었다.





" 너, 무슨 일 있었냐? "
" 아니. "

환규는 굳이 '거짓말 하지마라' 고는 하지 않았지만,
눈빛으로도 충분히 커뮤니케이션이 가능함을 지윤에게 인식 시켜주고 있었다.

" 많이 늦은거야? 경기, 아직 다 안 끝났지? "
" 하나만 더 하면 끝나. "
" 어? "
" 점심먹고 결승전이다. 그런데 승부는 거의 난거 같아.
   재인이, 더 늘었더라. 고등부에는 상대가 없더라고. "



하아…….
숨이 새어나왔다.
벌써 정오를 넘어섰건만 11월 답지않은 지독한 혹한에
입김이 뭉게뭉게 피어오른다.





" 연습 많이 했나보더라.
   원래 잘 하는 줄은 알았지만 그렇게까지 무서운 놈인 줄을 몰랐거든. "
" 무서워? "
" 어. "

환규가 고개를 끄덕였다.

" 애들이 시작 하기도 전에 다 쫄아서는… 그냥 한번에 끝내버리데.
   예전에 비해 침착한 면은 많이 떨어진 것 같은데, 공격은 확실히 나아졌더라.
   예리하고 정확한게. 보는데 소름이 다 돋을 정도였는데, 뭐. "
" 침착함이 없어졌다고? "

지윤이 다시 물었다.

" ……없어졌다기 보다는… 그냥 좀 서두른다는 인상, 받았거든. 근데……. "
" 근데? "
" 너, 좀 심하다. "

갑작스런 말에 지윤은 덜컹, 심장이 내려앉는 듯 했다.
항상, 재인에 관련된 일이라면 싫어도 긴장하게 되고, 움츠러든다.
항상.

" 당연히 너 온다고 생각하고 기다리고 있을텐데, 왜 이제온거냐? "
" ……. "
" 너 수능치고 만난 적 없지? "
" 그래. "
" 그럼 네가 무슨 심경의 변화를 겪었는지 모르겠다만,
   재인이는 아직 모를 거 아냐.
   그럼 적어도 오늘 같은 날은, 일찍와서 힘내란 말도 해 주고 응원도 해 줘야지.
   경기 끝난후에 할말을 한다 해도, 일단은 그렇게 해 줘야하는거 아냐? "
" ……. "
" 난 너랑 재인이, 둘 다 진심이라고 생각했다. "


미처 주머니 안에 집어넣지 못한 손끝이 움찔, 떨리는게 느껴진다.

" 재인이가 허튼 소리 할 놈도 아니고,
   너도 생각없이 받아들이고 하는 놈 아닌거 아니까,
   그래서 그냥 그런거구나, 싶었어.
   너희 둘이면 이상할 것도 없겠다고, 괜찮겠지 싶었는데 너 뭐냐, 이지윤.
   좋아한댔다가, 까먹었댔다가. 내가 봤을 때 불성실한 건 너야. "

환규니까, 이런 소릴 하는거다.
지윤은 그렇게 생각했다.
나를 믿고, 재인일 믿는 환규니까 이런 소릴 하는거다.
그러니까, 서운하다거나 생각하면 안된다.
고맙게 생각하자.
환규에게 재인이는 소중한 검도부의 후배이기도 하니까.
환규는, 나도, 재인이도 모두 아끼는 녀석이니까.

하지만,

" 싫어진거냐…? "

그렇게 물어왔을 때, 지윤은 입술을 깨물 수 밖에 없었다.

슬펐다.
누군가에게 '재인이가 싫어진거냐' 는 소리를 들었다는 자체가 너무나 슬펐다.
자신은 오늘, 그 말을 하고자 이곳을 찾아왔음에도 불구하고.





딩동-
하고 스피커가 울린다.

「 전국 고교생 선수권 대회, 검도부문.
   십분 후 결승전이 시작됩니다. 마산 청운고 2학년 곽진원 선수와,
   서울 성신고 2학년 이재인 선수는 준비해 주시기 바랍니다 」

" 일단 들어가자. "
  
환규는 지윤의 팔을 붙잡고 안으로 이끌었다.
응원석으로 가나 했더니만 그대로 응원석을 지나, 선수들이 입장하는 출구를 지나
대기실로 지윤을 이끈다.

" 야, 너 어디 가는거야? 임마, 환규! "
" 조용히 해. 가서 열심히 하라고 한마디만 해 주란 말야. 니 몫이잖아. "







재인이 고개를 들었다.
아마도, 놀랬나보다.
대기실엔 사범님도, 지환이 형도 없었다.
재인은 혼자 의자에 앉은 채, 가만히 손에 쥔 카본을 바라보고 있었다.

" 선배…. "

하지만 정작 맞닥뜨렸을 때, 목소리를 들었을 때,
왈칵- 눈물이 솟은 쪽은 지윤이었다.
재인과 관련하야 눈물을 흘릴 때,
언제나 지윤은 자신이 우는 이유를 제대로 알지 못했다.
곰곰이 울고 싶은 이유를 생각하고, 가장 적당한 이유를 하나 납득하기 전에
언제나 이미 눈물이 흘러버리기 때문이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이름을 불러야 하는데, 힘내라고 말해줘야 하는데,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하지만 자신을 바라보는 재인의 표정이 뭔가가 이상하다는 것을
눈치챈 듯 했기에, 지윤은 서둘러 입을 열었다.
무슨 말이든, 빨리 해야만 할 것 같았다.

하지만



" ……흐…ㄱ…. "


입에서 터져 나온건, 아주 단말마의 나직한 울음.
얼핏, 한숨과도 같은 마치 신음에 가까운 짧은 울음 소리였다.
놀란 지윤이 후다닥 손으로 입을 막았다.
하지만 마치 그 순간을 신호로 하듯 주르르-- 눈물이 흘러내렸다.

벌떡.
재인이 일어서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지윤은 대기실을 박차고 나왔다.
입구에 서 있던 환규가 자신을 부르는 소리를 얼핏 들은것도 같다.



미쳤다.
미쳤어.
제 정신이 아냐.                                                              
                                                                              
흔한 표현같지만, 정말로 눈물샘이 망가진것 같다고 생각하며
지윤은 체육관 입구를 빠져나가 뒷쪽으로 달렸다.
왜 눈물이 나는건지 곰곰이 생각해 보고도 싶었다.
하지만 생각한다면, 그래서 결론에 도착 해 버린다면, 분명 가슴이 아플거다.  

틀림없이,
찢어지듯, 가슴이 아플거다.






함참을 달린 후에야 지윤은 멈춰섰다.
헉헉거리며 숨을 내 쉴 때마다 폐가 찢기듯이 아파왔다.
체력장때도 이렇게 전력질주를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다고 생각하며
그대로 쭈그리고 앉아 얼굴에 흐른 땀과, 범벅이 된 눈물을 훔쳐냈다.
거칠어진 자신의 숨소리만이 계속 귓가에 맴돈다.



병신.
병신.
병신.
그 간단한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병신.
병신…….





힉힉거리며 지윤은 울었다.
훔쳐내도 훔쳐내도 눈물은 자꾸만 흘러내리고 있었다.





보고 싶었다.
한달만에 처음으로 얼굴을 마주대하는 순간,
퍽, 하고 눈물이 나와버릴만큼 너무 너무 보고 싶었다.
잠깐 동안 마주대한 얼굴의 잔상이 언제까지고 눈앞에서 사라지질 않는다.

얼굴을 봐서 기쁜데, 가슴이 아팠다.
이렇게 될 걸 뻔히 알았던 자신이기에 차라리 잊고 있었던거다.

" ……. "

그제서야 지윤은
자신이 왜 그동안 재인을 아주 잊어버린 듯 살았었는지 알 것 같았다.

떠올린다면,
생각한다면,

아마 못 견딜게 틀림없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의지와는 상관없이 자신을 보호하고자 하는 본능은
아주 까맣게 차라리 재인을 잊고자 했던 것이다.

관심의 문제가 아니다.
환규의 말처럼 성실의 문제도 아니다.
오히려 너무나 재인이라는 존재에 빠져버린 자신이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차단한, 최후의 방어막 이었다.

한달이 지나면 이 억지스러운 망각도 끝이 난다.
수능이 끝나고 나면 거스를 것 없이 재인을 생각해도 되고, 떠올려도 되고,
그러다 참을 수 없게되면 만나러 가면 된다…….
그렇게 생각했는데.



" 윽… 으윽…… 으흑, 흣… 으흐흐윽……. "




'안되는 일'이었다.
어쩌면 처음부터 자신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누가 봐도 비상식적인 관계.
남자와 남자라니.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고는 있었다.

하지만, 알고 있었지만 재인이 처음 고백했을 때, 금방 그 자리에서
그렇게 격하게 반대를 하거나 안되는 일 임을 꼬집지 못한 이유는
한가지 밖에 없었다.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 낮은 목소리도.
가까이 다가가지 않으면 느끼지 못하는 풋사과향이 묻어난 마린향도.
이따금 살짝 지어보이는 수줍은 듯한 미소도 사실은, 모두 좋아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신을 좋아한다고 말 했을 때 놀라웠지만,
그보다 몇배는 더 한 기쁨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우쭐한 기분이었고, 그만큼 더 즐거웠다.

하지만 정상이 아닌거다.
윤리적으로 반하는 일이라는 사실을 주위로부터 들었을 때,
비로소 자신들이 '상식인의 범주'에서 벗어났다는 사실을 더 크게 깨달았다.
좋아도 표현해서는 안 되는 일이란 걸 새삼 알게 되었다.

그게 싫었다.
내가 '비 상식적인 인간' 이라는 말을 듣는 것 보다
재인이 '상식적이지 못하다' 라는 소리를 듣는게 싫었다.
내가 '비 윤리적인 인간' 이라는 말을 듣는 것 보다
재인이 '윤리적이지 못하다' 라는 소리를 듣는게 싫었다.

어떻게 해도 나는 괜찮다.
하지만, 재인이 그런 소리를 들어야 한다거나,
혹은 정상적이지 못한 인간, 의 취급을 받아야 한다는건 생각만 해도 싫었다.

좋아하는데, 어느 누구에게도 폐를 끼치지 않을텐데
그 마음을 남들 앞에서 스스럼 없이 나타낼 수 없다는 사실이 괴로웠다.
그 모든 이유가 자신들이 둘 다 남자, 라는 이유에서라면
그게 너무나 불공평하고 말도 안되는 차별이라는 생각에서 더욱 서러워졌다.

'좋아한다' 라는 건
이성이나, 상식, 혹은 세상이 정해 둔 관점만으로는 이해할 수 없고
포용할 수도 어쩔 수 도 없는 '인간의 마음' 그 자체라고 생각했다.
지환의 말마따나 가장 숭고하고 거룩하고 최상의 가치를 지닌
그야말로 '사랑한다' 는 마음이 왜 그 부수적인 문제로 인해 좌절되어야 하고,
단념되어져야만 하는지 지윤을 알 수 없었다.

이것이 바로 현실과 이상의 괴리,
모순 그 자체였다.





깨닫고 보니 퍽퍽 목을 놓아 울고 있는 자신이 있어, 지윤은 꽤 놀랐다.
장소도, 시간도 잊고 엉망으로 울어버렸다…….  
라는 점에서 자신이 더욱 한심하고 비참하고 불쌍하게 느껴져서,
그래서 더욱 더 크게 울어버렸다.
울어버리면, 속이 시원해 질 거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울면 울 수록, 가슴은 더 아파왔다.

이래서는 안 되겠다고 차라리 지금 바로 집으로 가자는 생각을 하며 일어섰다.
울어서 엉망이 된 얼굴을 손으로 반쯤 가리고 지윤은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위치를 가늠하기 위해 둘러보니 여기 저기 건축 자제들이 쌓여있어
지환이 했던 말을 떠올리며 어쨋거나 체육관 근처겠거니… 하며
한 발짝 내딛는 순간,




" 선배-----! "



- 콰당탕!!!!

하고 굉장히 요란한 소리와 함께 무거운게 퍽! 하고 자신을 덮쳤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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