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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하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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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랗게 높은 하늘의 색은 그대로 물이 뚝뚝 흐를 것만 같은
그런 쪽빛이었다.
하지만 그 아름다운 하늘의 빛이 이리도 서글프게 느껴지는 이유는
아마도 오늘이 바로 그 날이기 때문에..
언젠가는 맞이할 날이었지만 각오하고 있었어도
다시 한번 잃어버린 것에 대한, 자신이 보내야 했던 사람에 대한
타는듯한 그리움과 갈증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수현씨. 뭐해요?"

"응.. 그냥.. 하늘이 너무 이뻐서.."

"어머.. 수현씨도 그런 말 할 줄 알아? 나 당신 만나서 그런 말은 처음이야.
칫.. 또 무슨 궁리세요. 김 수현씨? 오늘은 안된다고 했죠?
우리 오늘 할 일이 많다구요. 수현씨가 늘상 일에 쫓기니까
이런 날이 아니면 언제 느긋하게 준비할 틈이 있어?
그러니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안 놓칠 거니까 그렇게 알아요."

"하아... 이런.. 넌 눈치가 너무 빨라. 어쩌냐? 나 오늘은 정말 아주~ 아주
중요한 약속이 있거든. 미안해. 대신 이번 일요일엔 하늘이 무너져도
너 하고 같이 다녀줄게. 오늘은 그냥 넘어가자."

"그러게 어딨어? 우리 결혼 보다 더 중요한 게 어딨어?
정말 너무해. 수현씨 나하고 결혼할 사람 맞아? 어쩌면 그렇게 자기
결혼식인데 무심할 수가 있어? 이해가 안돼.
정말 나 사랑하긴 하는 거야?"

"유진아. 그런 말이 .. 너 사랑해. 사랑하니까 결혼 하자고 했지.
그런데 요즘 일이 어떤지 알 잖아. 이번 주에 새로 직원들 들어오면
좀 숨통이 트일 거야. 아직 두 달이나 남았 잖아.
좀 봐주라. 그리고 오늘은 꼭 가봐야 할 곳이 있어.
그러니까 맘 넓은 유진이 니가 이해해주라. 대신 저녁에 맛있는 거
사줄게. 그래.. 니가 좋아하는 해산물 파스타 사줄게."

"흥.. 그까짓... 대체 누군데 그래? 수현씨가 파스타를 먹겠다고 할
정도로 신세를 진 사람이 누구야? 난 모르는 사람이야?
혹시.. 수현씨 옛 애인 아냐?"

"얘기가 왜 그런 쪽으로 비약이 되는 거니?
내가 전에 말했지? 부모님 돌아가셨을 때.. 많이 도와준 형이 있다고
돌아가신 아버지 제자였던... 오늘 그 형 좀 만나려고.."

"그럼 나도 갈래. 나 그분이 어떤 분인지 정말 궁금해. 나도 가자..응?"

"안돼."

"왜? 왜 안되는데? 이유가 뭐야?"

"어어.. 그.. 그게 형이 바쁜데다가 약속장소에 낮선 사람 나오는 것도
싫어하고, 오늘은 형이랑 상의할 일도 좀 있고, 그러니까 나중에 만나자.
오늘은 말고.. 미안. 유진아. 내가 언제 약속 안지킨 적 있었니?"

"휴.. 이 똥고집쟁이 아저씨. 알았어. 대신 저녁에 꼭 파스타 사줘..
그리고 영화도 보여줘."

"그래그래.. 영화도 보고 파스타도 먹고.. 됐지?"

"응.. 수현씨 사랑해요."

"응.."


전화를 끊고 다시 창 밖을 내다 보던 수현은 사랑해요라는 약혼녀의
목소리 위로 다른 사람의 소리가 겹쳐 들려오는 것 같아 힘껏 고개를
저으며 의자에서 일어났다.


삼년 전과 달라진 것이 하나도 없는 집.
아마도 두 달 뒤면 이 집도 조금 변해 버리겠지..
그리고 좀더 세월이 지나면 완전히 달라질 지도 모른다.
남겨진 모든 흔적들.....
서재 바닥에 새겨진 담뱃불 자욱, 서재를 빼곡하게 메우고 있는 책들.
이 모든 것이 살아있음을, 기다릴 수 있음을 말해주는 증거였는데
이젠 그 증거를 오직 가슴 속에만 담아두고 기다려야겠지....


수현은 왼손 약지에 끼워진 금반지를 내려다 보았다.
자신의 첫 봉급으로 마련했던 커플링.
수현이 이 반지를 결코 빼지 못하는 것처럼 그도 이 반지를 간직하고
있을까.
문득 눈가가 아릿하게 저려왔다.
그를 보내던 그 날 이후 수현은 결코 울지 않았다.
아니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이 삼년간 수현은 그가 바로 곁에 있는 것처럼,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것처럼, 그렇게 생각하며 울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하지만 오늘은 그런 노력이 소용없을 것 같았다.
시린 눈가를 부비며 거실 창가로 가서 밖을 내다 보았다.
가야 하는 걸까, 아니면 가지 말아야 하는 걸까.
가고 싶기도 했고, 가고 싶지 않기도 했다.

가서 먼 발치에서 나마 그를 보고 싶다는 마음과
그가 다른 사람에게 가는 모습을 볼 수 없다는 마음..
얼마 전부터 수현의 생각을 온통 사로잡고 휘젓던 갈등을
수현은 아직도 정리하지 못하고 있었다.



해도 휘회, 안 해도 후회라면 하고 후회 하는 것이 나은 거라고 하지만
자신의 결혼식을 앞두고 수현 이라면 그가 자기의 결혼식에 오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 분명하다.
아니, 앞으로 두 달 남은 결혼식, 수현은 그가 오지 않기를 바랬다.
자신의 결혼 소식을 알고 있을 것이 분명하지만 절대 오지 말아주길
간절히 바랬다.
그의 앞에서 다른 사람의 손을 잡을 수 있을 만큼
아직은 여유가 없었기 때문에..
어쩌면 평생 그런 여유따위는 생기지 않을 지도 모르니까.
그럼 그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것은 볼 수 있을까?
알 수 없었다.
수현 스스로 그를 보낸 거 였지만, 그에게 책임과 의무를 다하라고 했지만
그리고 그가 지금 다른 사람의 손을 잡아도 그것은 자신에게 돌아오기
위한 노력의 일부일 뿐이란 것을 믿고 있지만
그 모습을 보면 가슴이 아파서 견딜 수 없을 거 같았다.



다시 만날 그 때까지 절대로 만나지 말자고,  
그런 일은 없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서로 가질 수 없는 두 사람이 아무리 그리워도 만나선 안됀다고,
그런 시도조차 하지 말아야 한다고....

그저 행복하게 그가 돌아올 날을 기다리자...

필연, 우연, 운명 같은 것들...
수현과 그의 만남이 필연인지 우연인지, 정말 그것이 정해진
운명이었는지 모르지만 단 한번도 그를 만난 것을 후회해 본적 없었고,
그리고 그를 보낸 것 역시 후회 하지 않기 위해 노력해왔다.

하지만 자신 역시 결혼을 앞두고 있으면서도
그의 결혼 소식을 접했을 때 순간적으로 수현은 가슴이 송두리째
무너지는 것 같은 상실감을 다시 느껴야 했다.
그를 보내던 날, 멀어져 가는 차의 뒷 꼬리를 바라 보면서
이게 정말 마지막이구나라는 생각에 무너져 내리던 그런 느낌..
사람이란 그렇게 어쩔 수 없이 이기적이고 욕심스러운 동물인 걸까?




유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참 편한 여자였다.
밝음으로만 가득 차 있을 것 같은, 언제나 변함없는 미소를 보여주는
그런 사람이었다.
그녀가 먼저 수현에게 마음을 고백해왔을 때 수현은 주저하지 않고
그녀의 고백을 받아 들였었다.
그리고 이 년여를 사귄 끝에 수현의 청혼...
로맨틱한 것은 아니었지만 두 사람의 관계는 편안한 그녀의 성격 덕에
순조롭게 이어져 결혼에 이른 것이다.
오누이 사이 같기도 했고, 오랜 친구 사이 같기도 했다.
그렇다고 연인으로서의 감정이 전혀 없는 것도 아닌
언젠가 그에게 약속했던 데로 사랑할 수 있고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을 찾은 것이었다.
하지만 그런 유진과 함께 있어 행복할 때 조차도 수현의 가슴 한 구석은
늘 비가 내리는 것 같았다.


한 밤중에 기억 나지 않는 악몽에서 깨어나면 너무나 당연하게 옆 자리로
파고 들지만 그때마다 비어있는 옆 자리를 확인하고 얼마나 괴로웠는지.
행복하게만 기다리겠다고 약속했지만 그것이 얼마나 지키기 힘겨운 것일지,
그 힘겨움을 알면서도 서로를 안심시키기 위해 애써 외면하며 했던 약속들..
그도 수현과 같은 걸까?



'형.. 오늘이다. 하늘이 참 이뻐. 당장이라도 손을 내밀면 아주 시린
물이 손끝으로 뚝뚝 묻어날 것 같아.
나.. 두 달 뒤면 결혼해. 형처럼..
형의 곁에 있어줄 그 사람은 어떤 사람이야?
형이 담백한 한식을 좋아하는 걸 알아?
아주 더운 한 여름에도 에어컨 싫어하는 거..
그럴 땐 차가운 아이스티에 설탕을 타지 않고
레몬만 한 조각 띄운 아이스티를 즐긴다는 걸 알아?
잠들 때면 .. 아니 이건 나에게만 해당되는 이야기라고 했었지.
형이 한번 일을 시작하면 먹는 것도 자는 것도 잊어버리는 걸 알아?
아무리 더운 날에도 파자마는 꼭 입고 자는 건?
가끔 시골길을 걷는 걸 좋아하는 건?
담백한 한식을 좋아하는 형이 유일하게 먹는 양식이 햄버거라는 건?
콜라나 사이다 같은 청량음료는 질색인건?
생과일 주스 보다는 희석과일 음료를 더 좋아하는 건?


아참.. 이건 나하고 살 때의 습관이구나.
지금 형이 있는 곳은, 지금 형이 살아가는 생활은
나와 살 때와는 아주 많이 다르구나.
그래도 궁금해. 형의 그 작고 사소한 습관들.. 아직 그대로인지.
그리고 뭣 보다도 그 사람도 알아?
형이 나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까? 이야기 했을까?


형.. 난 말했어. 죽어서도 사랑해야 할, 아니 사랑할 수 밖에 없는
그런 사람이 있다구.
그래도 좋데 그만큼 사랑하지 않아도 좋데.
자기가 대신 더 사랑하겠데. 유진이는 그런 여자야.
나 좋은 사람 만난 거지? 그렇지? 형의 그 사람은 어때?
이야기 했어? 그 사람도 이해해줬어?


형... 나... 가야 할까? 형을 보러 가야 할까?'




먼저 대중매체를 통해 알게 되었지만 몇 일 후에 최비서가
직접 수현을 찾아와 소식을 전했었다 .
많은 말을 하지는 않았다.
그저 오늘 그가 결혼한다는 말..
오란 말도 오지 말란 말도 없었다.
왜 왔던 걸까.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을 굳이 알리러 올 필요는 없었는데....


늘 수현에게 적대감을 보이던 최비서였기에 처음엔 그 의도를
기분 나쁜 의미로 받아 들였었지만
돌아가는 순간까지 아무런 표정도 보이지 않던 최비서가
마지막 순간에 참으로 안타까운 표정을 보였었다.
그리고 수현에게 정말 감사하다고,  감사하고 있다고 했었다.
그 감사가 무엇에 대한 것인지 모르지만
그가 수현을 찾아온 의도가 결코 나쁜 의도는 아니란 것을
알 수 있었다.


아마도 민은 수현이 그러하듯 수현이 그의 결혼식에 오는 것을
바라지 않을 것이다.
또 간다고 한들 다른 사람들처럼 예식장이나 무슨 호텔 같은 곳에서
치뤄지는 식이 아닌 회원제 클럽..
소위 말하는 상류층 인사들 만의 비밀스러운 클럽에 치뤄지는 식이니
기껏해야 그 근방에서 들어가는 사람들이나 구경하다 오는 게 다 일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수현은 가고 싶은 마음이 자꾸 고개를 쳐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간다고 한들 가슴만 더 찢어질 건데....

그가 다른 사람의 손을 잡는 모습을 보지 못한다고 해도
이렇게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나는데
한참을 거실 창에 이마를 기대고 눈물을 흘리던 수현은 갑작스러운
전화벨 소리에 놀라 고개를 들었다.

'누구.. 윤진이는 아닐 텐데. 누구지..'

울어서 잠긴 목소리를 애써 다듬으며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다행이 집에 계셨군요. 최비섭니다."

"아.. 예.. "

"나오십시요. 현관 앞입니다."

"네? 무슨.."

"지금 출발하면 시간이 적당할 겁니다. 기다리겠습니다."

"최.. 최비서님.. 여보세요? 여보세요?"

일방적으로 끊긴 전화기를 들고 멍하게 서 있던 수현은 갑자기
벼락이라도 맞은 사람처럼 성급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라는 고민 속에서도 이미 나갈 준비는 하고
있었기에 옷장을 뒤져 양복을 꺼내 입고 수현은 허겁지겁 집을
나섰다.

하지만 아래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다시 갈등을 느껴야 했다.
최비서가 가자는 곳이 어디인지도 모르는데,
그가 자신을 식장으로 데려가려는 것인지, 아니면 혹시라도
난동을 부릴지 모른다는 기우에 어딘가 잠시 멀리 보내려는 것인지....
하지만 지난번 수현을 찾아와 그의 결혼 소식을 알릴 때 보여줬던
그 표정이 떠오르자 전자쪽이 분명하다고 확신이 생겼다.

아직도 정말 가는 것이 옳은 것인지 알 수 없었다.
그를 그저 먼 발치에서만 보고 올 수 있을까?
보게 된다면 그에게 가고 싶어지지 않을까?
그의 품으로 뛰어들고 싶어지지 않을까?



이미 나선 걸음, 고민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설령 가서 다시 한번 가슴을 찢고 온다고 해도..
가자.. 가서..
그도 나 처럼 더 이상 혼자가 아니라는 사실을 확인하고
나에게 돌아올 때까지 행복하기를 기도해 주자.
한번만, 그가 다른 사람의 곁으로 가기 전에 그 모습을
내 가슴 속에 새겨둘 수 있도록 한번만....



아파트를 나서자 차 앞에 나와 서 있던 최비서가 수현을
맞이 했다.

"나오셨군요. 타시죠."

"네..."

뒷 좌석의 문을 열어 주고 수현이 차에 오르자 그 옆 자리에
최비서가 앉았다.
이런 고급 세단은 처음이었다.
앞의 운전석과 완전히 분리된 칸막이가 되어 있어 뒷좌석의
소리가 운전석까지 들리지 않게 되어 있고 작은 차량용
냉장시스템까지 갖추고 있었다.


"안나오시면 어쩌나 했습니다."

"......."

"아이스티가 준비 되어 있는데, 한잔 하시겠습니까?"

"아니요. 생각 없습니다. 권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비서님."


어색하기만 대화가 끊기자 뒷 좌석은 불편한 침묵으로 가득 차버렸다.
그 침묵이 불편스러워 수현은 고개를 돌려 창 밖을 내다 보았다.
얼마나 그렇게 달리고 있었을까.
헛기침을 하며 최비서가 수현에게 말을 걸었다.

"어디로 가는 지 안 물어 보십니까?"

".......물어 봤어야 하는 겁니까?"

"혹, 제가 수현씨를 어딘가 가두어 두기 위해서 납치하는 걸지도
모른단 생각은 안하셨습니까?"

"무엇 때문에요? 최비서님이 그래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아.. 물론 저에겐 그래야 할 이유 따위 없지만 회장님쪽의 어르신들은
생각이 다르실 수도 있죠."

"글쎄요. 그 쪽 어르신들께서 그렇게 무경우하시다고는 생각 지 않는데요?
형의 누님도 그러셨고, 예의가 무언지 아시는 분들이라 생각하는데
아닌가요? 그리고 그것이 아니더라도 절 납치해서 가두어야 할
이유는 없을 거 같은데요."

"뭐.. 어르신들의 노파심이란.. 모르는 거 아닙니까?
호사다마라는 말도 있고, 어르신들 입장에선 좋은 일엔 반드시
마가 끼게 마련이란 생각 아니하실 수 없지 않을까요?"

"그래서요? 제가 그 마입니까?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마 그 댁 어르신들도 아실 텐데요. 저도 두 달 후면 결혼합니다.
그런 제가 무엇을 어떻게 해야 마가 되는 걸까요?"

"훗.. 수현씨를 당할 수 없군요. 회장님께서 수현씨의 어떤 면을 보셨던
건지 알 것 같습니다. 노마님 역시...."

"......."

알 것 같다고 말하는 최비서의 표정은 더없이 온화하고 편해 보이는
것이었다.
수현에 대한 해묵은 적대감은 모두 버린 것일까?
아니면 승자의 여유일까?
뭐라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어차피 지난 모든 일들, 그리고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두 사람의
사랑을 굳이 저 사람에게 이해받아야 할 이유는 없으니까.


"수현씨..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 제 사과를 받아 주십시오."

"무슨 말씀이신지요?"

갑자기 사과를 한다니...
수현은 최비서의 정중한 말투에 당황했다.

"수현씨를 오해했던 것, 그리고 수현씨에게 좋지 않은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 몰랐다고 하지는 마십시오.
누구라도 눈치챌 수 있는 일이니까요. 하지만 지금은 저의 그런
태도들, 정말 사과 드리고 싶습니다."


자기 보다 배나 나이가 많은,머리 위로 서리가 내려앉기 시작한 사람의 사과.
물론 알고는 있었다. 그의 그러한 적대감들, 자신에 대한 감정들,
그것이 아무렇지도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사실 수현은 그다지 신경을 쓰지는 않았었다.
신경이 쓰일 만큼 자주 만나야 했던 것도 아니었고
무엇보다 그런 감정을 가지고 있다고 해도 두 사람을 방해한다거나
헤코지를 하지도 않았으니까.
사람의 감정이란 다분히 개인적인 것이고 그것을 이렇다 저렇다
간섭할 이유도 없는 것이었다.
더욱이 그가 그런 적대감을 가져야 할 이유를 전혀 납득하지 못한
것도 아니었으니까.


"아닙니다. 최비서님이 사과하실 이유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감정이란 개인적인 것이고, 그리고 또 최비서님이 그런 감정을
가지고 계신 건 알고 있었지만 저에게 그다지 나쁘게 대하신 것도
아니었으니까요."

"그렇게 생각해주신다니 감사하군요.
수현씨.. 전 지금 수현씨에게 감사합니다.
회장님... 아니 작은 도련님을 보내주신 것 감사 드립니다.
전 솔직히 아직도 두 분의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제 상식으로
용납되는 일도 아닙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보낼 수 있는 용기.... 그것은 인정합니다.
그리고 수현씨와의 생활이 도련님을 얼마나 성장시켰는지,
또 수현씨가 보여준 용기를 통해서 도련님이 얼마나 강해지셨는지,
아마도 수현씨의 그 용기가 아니었다면 일은 아주 비극으로 풀렸을지
모르니까요.

이제 와서 드리는 말씀이지만
그때 수현씨나 도련님께서 그렇게 서로 포기하시지 않았다면 아마도
어르신들이 그냥 방관하고 계시진 않았을 겁니다.
무엇보다 노마님의 노여움이... 하지만 지금은 노마님도 수현씨에
감사하고 계십니다. 수현씨가 포기해주신 것에 대해서..."


"아...... 죄송합니다. 최비서님. 뭔가 잘못 알고 계시군요.
형도 저도.. 서로 포기하지 않았습니다."

"네?"

"훗.. 긴장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렇다고 해서 판을 뒤엎겠다는 소린 아니니까요.
단지.. 우린.. 우린.. 지금 함께 있을 수 없다는 걸 받아들인 겁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서로 사랑하는 마음을 포기한건 아닙니다.
형도.. 저도.. 아마.. 평생을 다해서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은
다신 없을 테니까요.
우린 그걸 잘 알고 있으니까.  그저 기다리는 겁니다.
더 이상 이별도 아픔도 없이 함께 할 수 있을 때까지....
대신 서로 외롭지 않게, 행복 하게요.
포기 라니요. 얼토당토 않은 생각들을 하고 계시군요.
우린 아직도 사랑하고 있고, 그리고 앞으로도 영원히 서로
사랑할 겁니다.
누굴 원망하지도 않고, 다른 사람을 탓하지도 않고......
제가 가장 바라는 건 형이 당연히 가질 수 있는 것들.
지켜야 할 것들을 끝까지 지켜주는 거니까요.
형도 그걸 알고 있으니까."


기다림... 누가 누굴?
문득 그때 작은 도령을 데리고 오던 날이 떠올랐다.
갈피가 잡히지 않는 생각의 끝에
최비서는 이제 작은 도령이 앞을 향해 나가야 할 때라고 생각했었다.
그 끝이 어디일지 모르지만, 그가 도착할 곳이 어디일지 모르지만..

이젠 알 수 있을 거 같았다.
작은 도령이 그 모든 의무를 한마디 불평 없이 잘 지켜내고 있는 이유...
수현을 떠나서도 그렇게 편안한 표정으로 지낼 수 있는 이유...
그는 지금 열심히 달리고 있는 것이다.
자신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을 향해서.
그는 자신이 걷고 있는 길의 끝이 어디인지,
열심히 달려 도착할 곳이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고 있는 것이다.
수현에게, 유일하게 사랑하는 사람에게....
대부분의 사람들이 미련을 두고 뒤 돌아 보게 마련인데
이들은 너무나 현명한 것이다.
아무리 뒤를 돌아봐도 보이는 것이라곤 지나가 버린 시간과 회한
뿐이라는 것을 잘 알고 있는 것이다.

작은 도령이 그를 향해 달리고 있듯이
아마 수현도 그가 돌아오기를 조용히 기다리고 있는 것이겠지.
그가 반드시 자신에게 돌아올 것을 알고 있기에
어떤 불안도 없이, 기다림이 길고 지루할지라도 행복하게..

최비서는 문득 숙연해짐을 느꼈다.
이런 사랑을 그는 알지 못했다.
젊은 시절, 그도 사랑을 해봤고 그 사랑으로 아파도 해봤지만
저들이 하고 있는 사랑은 그런 것과는 너무나 다른,
시간과 공간을 완전히 초월한 참된 영혼의 사랑인 것이다.


"그렇군요. 수현씨와 작은 도련님은 그렇게 사랑하고 계시군요.
전.... 정말 부럽습니다.
사람이 세상에 태어나서 많은 사람을 만나고, 또 여러 번 사랑을
하지만 두 분과 같은 사랑을 할 수 있는 사람이 과연 얼마나 있을지..
그런 사랑을 하시는 두 분이 정말 부럽군요."

자신들이 부럽다고 말하는 최비서에게 수현은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과연 이것이 부러운 것일까?
아웅다웅 싸우고 상처 주며 살아도 함께 있을 수 있는 것이 더 행복
한 것이 아닐까?
자신들은 그저 서로 함께 있을 수 없는 어쩔 수 없는 현실에
굴복했을 뿐인데....

하지만 어쩌면 최비서의 부럽다는 그 말은 진심일지도 모른다.
헤어지면 잊혀지고 마는, 혹은 헤어진 뒤에도 오래 아픈 기억이나
싫은 기억으로 남는 사람들 보다는 자신들이 더 행복할지 모른다.
적어도 육신은 함께 하지 못하지만 서로 사랑하는 마음은
항상 함께일 거란 사실, 보지 않아도 느낄 수 있는 사랑,
변하지 않는 믿음, 기다림.....
애타는 마음이야 뭐라 말로 할 수 없지만
그럼에도 그들의 기다림은 달콤한 것이었다.

자신들을 부럽다고 말하는 최비서를 보며 수현은 해사한 미소를
보여주었다.
다분히 남자다운 모습임에도 그의 그 미소는 참으로 아름다운
것이었다.


아마도 작은도령은 그의 저런 모습을 사랑했겠지..
아주 연약할 거 같지만 절대 꺾이지 않는 강한 마음을 가진 사람,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영혼으로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사랑은 단지 소유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사람,
수현이란 사람은 그런 사람이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 작은도령이 그를 거두고 집안에 그와의 관계를 밝혔을 때
처음 봤던 그 어리고 나약한 모습과 어쩌면 조금은 이기적으로 보이던
그 모습의 아래 숨어 있던 그의 모습은 저런 것이었던 거다..
작은 도령은 그것을 알아본 것이다.

수현의 해사한 미소에 같은 미소로 답을 해준 최비서는 자신들이
목적한 곳에 거의 다와 감을 깨닫고 수현에게 운을 떼었다.


"우리가 어디로 가고 있는지 궁금하지 않으십니까?"

"굳이 묻지 않아도 알 수 있을 거 같습니다.
지금 최비서님이 어디로 절 데리고 가시는지 ..."

"그렇군요. 어딘지 아신다면 제가 굳이 더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
같군요."

"단지...."

"단지?"

"지금 하시는 일이 최비서님의 독단인지 아니면 누군가의 지시인지
그게 궁금하군요."

"아... 이건 제 독단이기도 하고 아니기도 합니다."

"무슨...."

"음.... 회장님께서... 얼마 전에 수현씨 이야기를 하셨습니다.
그때 이후로 단 한번도 수현씨 이야기를 하신 적이 없었던 분이
먼저 결혼이란 걸 하게 된다는 말씀을 하시곤 웃으시더군요.
한번 쯤 결혼 전에 보고 싶다는 말씀을 지나가는 말로 하셨습니다.
물론 그렇게 하라고 지시를 하신 건 아니었습니다.
회장님도 제가 그 말들을 귀담아 듣고 있다는 것을 의식하지
못하고 계셨으니까요.
저도 사실 많이 고민했습니다.
과연 제가 잘 하고 있는 일인지, 하지만 전 두 분을 믿습니다.
제가 이렇게라도 잠시 두 분을 만나게 해드려도 아무일 없으리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결심을 한 겁니다.
이건 수현씨에 대한 제 사과의 표현이고, 회장님에 대한 감사의
표현입니다."


결혼 전에 한번이라도..
아마 최비서의 말대로 그는 그 말을 할 때 그것을 최비서가 듣고 있다는
사실을 의식하지 못하고 있었을 것이다.
수현은 알 수 있었다.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는 그의 심정..
자신 역시 두 달 후에 결혼을 하기 전에 먼발치에서라도 그를 잠시라도
볼 수 있다면 하는 생각을 수십 번 했으니까.
뉴스나 신문 따위를 통한 것이 아니라 살아서 움직이는 그를 보고 싶었다.
아무리 먼 거리에 있어도 그의 체취를 느낄 수 있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했지만 그것은 불가능한 일이라고 체념하고 있었을 뿐이다.


정말 감사해야 할 사람은 바로 수현 이었던 것이다.
최비서의 독단, 물론 그가 흘린 말을 듣고 옮긴 행동이었다고 해도
만일 그 쪽 집안의 누구라도 알게 된다면 결코 좋은 소리를 들을 리
없는 행동인 것이다.


"감사합니다. 최비서님."

"이런.. 저에게 감사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회장님을 모시는 사람으로서
지시 받은 일만 수행하는 것은 아닙니다. 표현하지 않는 깊은 심중까지
알아서 해결해 드려야 하는 것이 저의 일이니까요.
그리고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제가 본 두 분의 사랑을, 저의 판단이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확인하고 싶었습니다."

"만일.. 최비서님의 그 판단이 틀렸다면 어쩌시려구요?
그땐 어쩌시려고.."

"훗.. 글쎄요. 낼 모래면 오십 줄에 접어들 나이입니다.
살아오면서 다른 건 몰라도 사람에 대한 판단만은 정확하다고 자부
해왔습니다. 물론 수현씨에 대한 제 판단은 그다지 정확하지
못했지만, 아무런 사심 없이 내린 제 판단에 대해서 의심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설령 그 판단이 틀렸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저의 책임이고, 그 책임의 대가가 무엇인지 분명히 알고 있으니까요."

편안한 웃음을 보여주는 최비서의 태도에서 그가 얼마나 현명한
사람인지, 그리고 지금 형에게 없어서는 안될 사람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자신과 함께 있을 때의 형이 아닌, 지금의 형에겐 참으로 필요하고 중요한
사람일 것이다.
그리고 저 사람은 끝까지 형에게 믿음과 신의를 받칠 사람이 분명했다.

수현은 정말 다행이라는 생각을 했다.
형의 곁에 이런 사람이 있어주어서....
언제라도 힘이 되어줄 수 있는 현명한 사람이 있어주어서....
최비서는 자신에게 고맙다고 했지만 오히려 감사해야 할 사람은 그가
아닌 수현이었다.


형의 곁에 있어주어서..
그를 믿고 신뢰해주어서..
그에게 믿음을 주어서..
그를 보살펴주어서..
감사하다고...


하지만 굳이 말로 하지는 않았다.
오가는 눈빛 속에서 충분히 느낄 수 있는 감정이었다.


말없이 최비서를 향해 감사의 미소를 보내는 수현을 따듯한 눈으로
바라보던 최비서는 목적하는 장소에 도착한 것을 알고 긴장했다.
독단으로 행한 일..
어쩌면 작은도령은 최비서의 이런 행동을 달가와하지 않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이 일을 다른 사람들, 특히나 노마님이 아신다면 아마도....
일단 다른 사람들의 눈에 띄지 않게 수현을 안으로 데리고 들어가는
것이 중요했다.

회원들이 드나드는 정문쪽 출구를 피해 기사들이나 고용인들이 이용하는
후미진 곳의 출입구를 택한 이유도 그것이었다.
이곳은 수현의 얼굴을 아는 사람이 없을 테니까.

긴장하는 최비서의 모습에 수현도 흠칫 긴장을 했다.
혹.. 누군가.. 수현을 아는 사람의 눈에 띄기라도 한다면..
하지만 그가 그 정도 대책도 없이 자신을 이곳으로 데리고 오지는
않았을 거라고 생각하니 조금은 마음이 편해지는 것 같았다.




후문을 통해 외진 길을 꽤나 오래 달리자 화려하지는 않지만
품위가 절로 느껴지는 아름다운 건물이 눈에 띄었다.
이런 프라이빗클럽에 대해서 들어본 적은 있어도 직접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그와 함께 살때, 두 사람은 보통의 사람과 다를 것 없는 생활을 했었다.
수현이 그의 배경에 적응하지 못했을 뿐더러
그 자신도 그런 환경에 그다지 관심도 없었고, 좋아하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는 수현과 살면서 더없이 편해 했었다.
상류의 예의범절 따위, 그들이 가지고 사는 위선의 가면과 가식,
이런 것에서 떨어져 살 수 있는 것이 다행이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다.
그런 그를, 그가 그다지도 싫어하는 곳으로 떠다민 사람은 다름 아닌
수현 자신이었다.



한 그루에 수천만원을 호가할 것이 분명한 정원수들은 가지런하고
깔끔하게 손질이 되어 있었고.. 결혼식 준비로 분주하게 오가는
직원들의 모습도 마치 유럽 왕정시대 하인들의 그것처럼 절도 있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사람들 틈을 유유히 빠져나가 건물의 뒷 편, 후미진 장소에서
차가 멈추었다.


"수현씨.. 내리십시오."

"자.. 잠깐만요."

"왜 그러십니까?"

"형을 만날 수 있는 겁니까? 아니면 그냥 먼 발치에서 보아야
하는 겁니까?"

"그건 수현씨의 선택에 달렸습니다.
회장님을 만나고 싶으시다면 만나실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러고 싶지 않으시다면 멀리서 바라 보실 수 있도록
조치를 할겁니다.
수현씨를 모시고 온건 제 의지였지만 그건 여기까지 입니다.
그 다음은 수현씨가 결정하셔야 합니다."

"그런가요.."

자신이 결정해야 한다니....
순간 수현은 두려워졌다. 직접 그를 만나고 싶은 마음은 굴뚝 같았지만
그를 본다면 울지 않고 웃으면서 축복해줄 수 있을까?
그에게 자신이 아닌 다른 사람과 사는 동안 행복하라고 말해줄 수
있을까?
두려움이 수현을 주저하게 만들었다.
그럴 수 없을 것 같아서, 웃어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그를 보내던 그 날처럼 웃을 수 없을 것만 같아서.....



주저하는 수현을 안스러운 빛으로 지켜보던 최비서는
결정은 수현의 몫이라는 듯이 먼저 차에서 내려 문을 열고 기다렸다.
제촉의 말도, 조언도, 무엇도 없이 그저 침묵만을 지키며...




꽤 오래 생각에 잠겨 있던 수현이 결심을 한 듯 차에서 내렸다.

"결정하셨습니까?"

"네.."

"어떻게?"

"만나지 않겠습니다."

"그럼.."

"만나는 것도, 먼 발치에서 지켜보는 것도, 형을 위한 일이 아닌 것
같군요. 죄송합니다. 최비서님이 애써주셨는데...
그 마음은 감사히 받겠습니다."

"이대로 돌아가시겠습니까?"

"네."

"그럼 전하실 말씀이라도?"

"아뇨. 무슨 말을 전할만큼 우린 멀리 있지 않으니까요.
제가 여기 왔었다는 말도 하지 말아주십시오."

"수현씨...'


만나지 않겠다고, 이대로 돌아가겠다고 하는 수현의 결정은
최비서의 예상을 완전히 뒤엎어 버리는 것이었다.

그런 작은 이기심 마저 완전히 버리고 사랑하는 것일까?

수현의 사랑은 이런 것이었던가?

평안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그냥 돌아가겠다고 말하는 수현을
바라보던 최비서는 자신의 마음 저 구석엔 그를 시험하고 싶었던
고약한 마음이 숨어있었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작은도령이 무의식 중에 흘린 말을 듣고 움직인 것이었지만
그 이면엔 수현이라는 사람의 사랑이 어느 정도인지 확인 하고 싶은
그런 마음도 있었던 것이다.
어떤 결론이 내려지기를 바란 것은 아니었지만,
직접 만나거나 먼 발치에서 바라보거나, 분명 둘 중 하나일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수현은 그의 그런 생각은 보기 좋게 뒤엎어
버린 것이었다.

최비서는 수현을 똑바로 쳐다보기 부끄러워졌다.
보통의 사람들이라면 이런 경우 어떡게든 상대를 한번이라도
만나려 하기 마련이었다.
그리고 시험하고 싶었던 마음의 이면엔 수현 역시 그런 보통의
사람들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있었으니까.
역시 수현과 작은도령의 사랑은 자신이 가슴으로든 머리로든
납득하고 이해할 수 있는 좁은 테두리를 벗어난 그런 것이었다.


"죄송합니다. 저의 독단적인 행동이 수현씨를 번거롭게 해드렸군요."

"그런 말씀 마십시오. 오히려 감사합니다 최비서님.
형에게 그렇게 마음을 써주시는 것도, 또 형을 위해주시는 것도
전부 감사드릴 일 뿐인데요."

"아뇨.. 아닙니다. 부끄러운 일이지만 솔직히 수현씨를 모셔오면서
제 나름대로는 이럴 것이다 라는 답을 미리 내리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런 답으로 수현씨도 별 수 없는 보통 사람과 같다고
그렇게 판단을 미리부터 하고 있었던 모양입니다.
정말 부끄럽습니다."

"아닙니다. 누구든 그렇게 생각할 수 있지요. 사실 저도...
최비서님이 오시지 않았다고 해도 어쩌면 이 근처까지 왔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니.. 분명히 왔을 겁니다.
사람은 누구나 다 똑같은 걸요. 단지, 지금 제가 형을 만나는 건
정말 불필요한 일이니까.
만나고 싶어요. 형을 만나서 행복해야 한다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런 것 조차 아무런 의미가 없는 일이군요.
굳이 얼굴을 보고 말하지 않아도 형도 저도 서로 잘 알고 있는
일인데..
제가 지금 형을 만난다면 그건 앞이 아니라 뒤를 돌아보는 일이니까..
전 형이 돌아올 앞을 보고 기다릴 겁니다.
형이 있던 비어있는 과거가 아닌 미래를 말입니다."



더 이상 뭐라고 대꾸할 말이 없었다.
과거의 빈자리가 아닌 앞날을 바라보겠다는 말.....
최비서는 최대한 정중하게 허리를 숙여 수현에게 인사했다.
그런 최비서에게 마주 허리를 숙인 수현은 평안하기 그지없는
얼굴로 주위 전경을 한번 더 둘러 보고, 건물을 바라보고,
웃는 얼굴로 다시 차에 올랐다.

수현이 창에 오르자 최비서는 운전사에게 간단하게 지시를 내리고
따듯한 미소를 띤 얼굴로 수현에게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시동이 걸리고 차가 멀어지는 모습을 말없이 지켜보던 최비서는
차가 완전히 클럽을 벗어난 것을 확인하고 건물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한번쯤 뒤 돌아보고 싶었다.
그 건물 어느 곳엔가 형이 있을 텐데....
혹시 창 밖을 내다 보고 자신을 발견하지 않을까,
자신을 발견하고 달려 나와 주진 않을까....
하지만 그런 나약한 생각은 더 이상 하지 말자고 결심했다.
이곳에 잠시라도 왔었다는 것만도 스스로 용서하기 힘든 것을,
절대로 만나지 말자고 다짐했으면서 이렇게 나약해진
모습을 보여주고 싶진 않았다.

이대로 좋은 것이다.
서로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믿고 있는데..
그는 무슨 일이 있어도 약속을 지킬 것이다.
수현과 했던 모든 약속을 평생 지킬 것이다.
그리고 수현 자신도 그와 했던 약속을 반드시 지킬 것이다.
지금은 서로 함께 일 수 없으니까.
각자가 놓여진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 행복하게 살면 된다고,
서로가 늘 함께라는 사실을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형.. 나 참 바보 같은 짓을 할 뻔 했어.
다행이야. 형을 만나지 않을 수 있어서.
그리고 형의 곁에 최비서님 같은 분이 있어서.
또... 그리고.. 또.. 남은 인생...... 형이 외롭지 않게
함께 해줄 사람이 생겨서.. 다행이야....'





수현을 돌려보내고 최비서는 착찹한 심경을 갈무리해야 했다.
사람이 사람을 위한다는 것은 나의 판단이 아닌 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야 하는 것인데, 이만큼 나이를 먹고서도
그런 단순한 기본조차 망각해버린 자신이 부끄러웠다.
그의 행동은 누굴 위한 것이 아닌 자신의 독단이었을 뿐이었다.
작은 도령이 그런 말을 한 것이 꼭 만나고 싶다는 것은
아니었다는 사실....
아마 수현도 작은 도령도 이렇게 서로 그리움과 기다림만으로
살아야 하겠지만 그럼에도 결코 후회하거나 뒤를 돌아보지
않을 것이란 것을 분명히 알 수 있었다.
자신이 그것을 이해하고 못하고가 중요한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기본적으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기 마련인 작은
욕심까지도 모두 버리고 사랑하고 있다는 사실을......



개인실의 문을 노크하고 들어서자 창가에 서서 정원을
내려다 보고 있는 민이 보였다.

설마.. 수현이 왔던 것을 본 것일까?


"최비서님.. 괜한 일을 하셨군요. 하지만 감사합니다.
저를 위해서 해주신 일이니 뭐라 책할 수 없군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고개를 숙이고 서있는 최비서를 향해 민은 밝게 웃어주었다.
그가 왜 그렇게 행동했는지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집안 어르신들이 아신다면 아마도 질책을 면치 못할 것을
알면서도 이렇게 움직인 이유는 오직 자신을 위해서 였다는
것을 민은 알 수 있었다.

이전에 그가 가지고 있던 생각이 어떤 것이었든
민이 지금의 자리로 돌아온 뒤의 최비서는 오직 민, 한 사람만을
위해서 움직였고 민 역시 그런 그를 믿고 있었으니까.

"미안해 하실 필요 없습니다. 그래 수현인 어떻던가요?"

"네?"

"아니.. 이런 것을 묻는 것도 우습군요.
녀석에게 무슨 일이 있다면 제가 가장 먼저 알았을 테니까요.
감사합니다 최비서님. 덕분에 먼 발치에서나마 그 녀석을
볼 수 있었군요. 건강해 보였어요.
그리고 정말 평안해 보였고..
수현이가 돌아가주어서 다행입니다.
솔직히 그를 만났다면 저도 어떻게 했을지 장담을 할 수
없군요. 어쩌면 최비서님의 배려를 무시하고 행동했을지도
모르겠습니다.
전 아직도 그를 떠나서 산다는 것에 익숙하지 않으니까요.
아마.. 수현인 그걸 알고 있었을 거에요.
그리고 제가 그렇게 고집을 부린다면.. 수현이도 이번엔
절 말리지 못했을 겁니다.

정말 다행이지 뭡니까?
언제나 그래요. 제가 수현이를 지켜주겠다고 했지만
녀석은 늘 저 보다 한 발자국 쯤 앞서 있어요.
무엇이 중요한지.. 무엇을 해야 할지...
참 현명한 아이죠."

".............."



그의 말대로 수현이란 사람은 늘 앞서 있는 걸지도 모른다.
쉽게 생각하면 싸운다는 것이 두려워 지레 포기했다고
생각할 수 도 있었다.
실제로 이쪽 집안의 사람들은 모두 그렇게 받아들였었다.
대단한 배경도 무엇도 없는 사람이 무슨 배짱으로 자신들에게
대항 하겠느냐는 생각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건 단지 착각에 불과했다.
그렇지 않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기껏해야 작은 도령과
노마님, 그리고 아가씨 뿐이었다.
그리고 이젠 자신까지..
그는 싸우는 것이 두려워 지레 겁을 먹고 물러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그 보다 더 큰 용기로 잠시 작은 도령을 보내준 것이란
사실을.....

착찹하기 그지없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작은 도령을
마주 보던 최비서는 여전히 그의 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를 보았다.
수현의 손에도 같은 것이 끼워져 있었다.
갑자기 최비서는 궁금해졌다.
과연 작은 도령이 저 반지를 뺄 것인지..


최비서가 자신의 손을 뚫어지게 쳐다보는 것을 깨달은
민은 손을 내려다 보며 피식 웃었다.


"궁금하십니까?"

"네?"

"이 반지의 향방이 궁금하신 겁니까?"

"회.. 회장님.."

"놀라실 거 없습니다. 아마 수현이의 손에도 이 반지가
끼워져 있겠죠?"

"네. 수현씨도 아직 그 반지를 끼고 계시더군요."

"그럴 줄 알았습니다. 궁금하시죠 최비서님?"

"아.. 아닙니다."

"하하.. 궁금하다는 표정이신데요."

"죄송합니다 회장님."

"아니에요. 궁금하신 게 당연하죠.
이제 결혼해서 각자 다른 사람의 곁에 서야 할  두 사람이
이 반지를 어떻게 할지 궁금한 게 당연합니다.
할머님도 물어 보시더군요. 반지를 어떻게 할건지..
전 이 반지를 뺄 마음이 없습니다.
이미 지수씨에게도 양해를 구했습니다.
다른 건 몰라도 이 반지가 제 손을 떠나는 일은 절대 없을
거란 사실을 그녀도 받아들였으니까요.
그건 수현이도 마찬가지 일거라고 생각합니다.

정말 다행인건..
그 녀석에게 의지해서 함께 걸어갈 사람이 생겼다는 거죠.
저도 수현이도 운이 참 좋은 사람들입니다.
이렇게 사랑할 수 있어서, 그리고 그 사랑을 간직한 채로
살 수 있어서, 그것을 이해해주는 사람들을 만나서..
정말 다행이죠."



다행이라는 말....
어쩌면 그 말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말일런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최비서는 하게 되었다.
이전엔 다행이란 말처럼 좋은 말은 없다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그 다행이란 말의 이면엔 참으로 많은 것을 포기해야
하는 아픔이 서려 있는 걸지도 모를 일이었다.
자신이 가장 원하는 것을 포기하고, 최선의 것을 포기하고
그리고 차선의 것에 만족하기 위한 자기위안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회장님. 용서하십시오. 제 짧은 생각이 공연히 두 분의
심기를 어지럽혀드린 것 같습니다."

"아니라니까요. 전 이렇게라도 수현이를 잠시 볼 수 있어서
정말 기쁩니다.
그는 언제든 저를 만날 수 있지만 전 그렇지 못하니까요.
가끔 말입니다. 한밤 중에 깨어날 때가 있습니다.
그렇게 깨어나면 습관처럼 옆 자리를 더듬죠.
그리고 소스라쳐서 일어납니다.
수현이가 곁에 없다는 것에 놀라서 말입니다.
그리곤 이젠 그가 전처럼 곁에서 체온을 나누어줄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닫곤 절망하기도 합니다.
하지만 그 절망 뒤엔 희망이 보입니다.
지금은 이렇게 떨어져 지내지만 언젠간 그의 곁으로
돌아갈 수 있을 거라는 희망 말입니다.

어쩌면 수현이도 저와 같을지 모릅니다.
지난 십년.. 수현이도 저도 정말 습관처럼 서로에게 길들여
졌기 때문에 하루 아침에 거기서 벗어날 수 없을 테니까요.
아니 어쩌면 평생 그 습관에서 벗어나지 못할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서로가 곁에 없다는 것에 더 이상 절망하고 싶지는
않군요.
약속했으니까요.
그의 곁으로 돌아갈 때까지 행복하게 지낼 거라고 약속
했으니까요."



.
지난 삼년간 얼핏 수현을 한번이라도 보고 싶다고 혼자
뇌까린 것 말고는 단 한번도 수현에 관해서 말을 꺼낸 적이
없었다.
마치 그런 사람을 알지 못하는 것처럼..
처음부터 이 자리에 있었던 사람처럼 그렇게 지내왔던
작은 도령이었다.
모두 그런 그를 보며 그것을 당연하게 여겼고 최비서 자신도
어느 정도 작은 도령의 가슴이 아프리라 생각은 했지만
그가 이렇게 힘겹게 견디고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었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은 듯이, 묻어버린 듯이 지냈지만
작은 도령의 가슴 속은 격렬한 그리움과 외로움으로
소용돌이 치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저렇게 조용히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그에게
최비서는 더 이상 죄송하다는 말 조차 할 수 없었다.


"잠시 쉬고 싶습니다. 하객들이 도착하면 알려주십시오."

"네. 물러가겠습니다. 회장님."


방을 나와 로비로 향하던 최비서는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노마님과 마주쳤다.

"왜 나와 계십니까?"

"자네를 기다렸네."

"네?"

"자네 괜한 일을 한 게야. 그 아이들 그렇게 만나봐야..
관두세.. 자네도 민이를 위한다고 한 행동일 테니.
하지만 앞으로 이런 일이 두 번은 없어야 할 게야."

"죄송합니다. 노마님."

"됐네. 이젠 자네도 알겠지. 저 아이들을 위해서 우리가
해줄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다는 걸 말일세.
난 가끔 내가 잘못하고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곤 한다네. 저렇게 서로 사랑하는 아이들을
떼어놓는 것이 정말 옳은 일인지 말일세.."


로비를 벗어나 정원으로 나가는 나이든 여인의 뒤를
조용히 따르며 최비서는 말없이 그녀의 읊조림을
듣고 있었다.

"가문이니 뭐니.. 이런 것들이 대체 얼마나 중요하다고
난 평생을 그것을 위해 살아왔기 때문에 그것 말고는
다른 것은 모르는 사람이야.
하지만 저 아이들은 다른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난 저 아이들을 떼어놓은 거야.
최비서.. 내가 한 일이 정말 옳은 일일까?"

"..........."

"어쩌면 내가 죽을 때까지도 그 답을 알 수 없겠지.
이 나이가 되었어도.. 세상의 돌아가는 순리를 제대로
알 수 없다니. 내 나이를 헛 먹은 것 같구먼.
내 저 애들한테 지은 죄는 죽어서 저승에나 가야
갚을 수 있을까?
그래 내가 지은 죄 값은 나중에 치르게 되겠지.
내게 소중한 것을 지키기 위해서 너무 큰 희생을 치르게
한 게야.
차마 저 두 아이들에게 용서하라는 말도 할 수 없구먼."

"아마도.. 제 짧은 생각일지 모르지만 회장님도 수현씨도
노마님을 원망하지는 않으실 겁니다.
두분 모두 같은 생각을 하고 계신 것을 오늘에야 알았습니다.
수현씨가 그러시더군요.
두 분은 서로를 포기한 게 아니라고,
잠시 떨어져 있을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여전히 서로 사랑하고 있고, 다시 만나기 위해
앞을 향해 나갈 뿐이라고 하시더군요.
그런 두 분이 노마님을 원망하시진 않을 것 같습니다."

"그래.. 그 아이가 그러던가?
우리 민이가 사람 하난 제대로 봤군.
앞으로 살아가면서 더 이상 가슴 아픈 일들은 없어야
할 텐데 말일세.
산다는 것이 대체 뭔지... "


깊은 한숨을 내쉬며 하늘을 올려다 보는 여인의 눈가에
이슬이 맺히는 것이 보였다.




누가 누굴 탓하기엔 산다는 것은 너무나 복잡한 것이었다.
사람의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그 운명에 순응해서 살아가는
것이 가장 현명한 일일 것이다.
지나간 과거에 얽메어 가슴 속에 원망과 미련을 쌓아두고
살아가기엔 살아야 할 시간은 너무나 긴 것이기에.
나이의 고하를 떠나 인생을 관조하고 내다보는 혜안을
가질 수 있는 사람은 행복할 것이다.
살아온 시간 보다 살아갈 시간들이 더 소중한 것을 안다면
아마도 가슴 속에 상처를 쌓아두고 살아가는 우를 범하는
일이 없을 것이기에......
그런 의미에서 수현과 민은 참으로 현명한 사람들인 것이다.
그리고 축복 받은 사람들인 것이다.

평생을 살아도 만나기 힘든 사랑을 만났고 또 그 사랑을
가슴 속에 소중하게 간직할 수 있다는 것은 커다란
축복이 아닐 수 없었다.

욕심을 버리고 앞을 내어다 보면 작은 이익에 연연하지 않고
자유로울 수 있다는 것을 대부분의 사람들은 알지 못한다.
수 많은 사람들이 진리를 찾기 위해 수행을 하고 고행을
하지만 그런 사람들 중에도 이런 간단한 이치를 깨닫고
그리 살아가는 사람은 극히 적다는 사실....

그들이 행복한 거라고 말한다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비웃을
것이다.
서로 사랑하는데도 함께 있지 못하는 것이 어째서 행복한
일이냐고 반문할 것이다.
하지만 함께 있지 못해도 기다릴 수 있다는 것..
그 기다림이 가슴 아픈 것이 아닌 기다림이라면
충분히 행복할 수도 있다는 것을 과연 이해 시킬 수 있을까?
혹자는 기다리는 사람이 오지 못한다면 자신이 그에게로
가면 된다고 말 하지만 그것 역시도 욕심을 버리지 못한
행동에 불과하다.
인생의 끝이 어디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것이다.
되풀이 되는 쳇바퀴 같은 것이 인생이므로..
굳이 기다리는 사람을 향해 가지 않아도 앞을 향해
열심히 달리다 보면 반드시 그 어디쯤에선가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니까.


초여름의 하늘은 전에 없이 맑고 푸른 빛을 보이고 있었다.
마치 가을 하늘과 같이 맑고 시린 빛을 보이는 하늘 위로
여린 잎새들이 수런거리며 다가올 더운 여름을 노래하고 있었다.
시간이란 흐르는 것이지만 넓게 보면 그것은 단지 앞을 향해
흐르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앞으로 나아가 다시 제 자리로
돌아오는 것이다.
저 여린 잎들이 가을을 지나 겨울이 되면 잠들었다
이듬해 봄에 다시 깨어나듯이 그렇게 인생이란 돌고 도는 것이다.



끝.



 
 53
  잠들지 않는 밤 번외편 : 하얀 손 [3]
atlantis    2003/04/09   1256 
 52
  잠들지 않는 밤 (하) [2]
atlantis    2003/03/17   1310 
 51
  잠들지 않는 밤 (중)
atlantis    2003/02/18   1329 
 50
  잠들지 않는 밤 (상)
atlantis    2003/02/13   1486 
 49
  선택 (속)
하리    2004/08/21   1043 
 
  선택 (외)
하리    2004/08/21   913 
 47
  선택 (하)
하리    2004/08/21   889 
 46
  선택 (상)
하리    2004/08/21   11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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