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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하리
선택 (하)



한 여름의 밤은 참으로 짧은 것이다.
침실 창을 통해 뿌옇게 밝아오는 새벽 빛을 바라보며 민의 몸을
받아들이던 수현은 조금만.. 조금만 더.. 날이 새지말고..
이대로 조금만 더 그를 품을 수 있기를 간절히 바랬다.
민의 심정 역시 수현과 같을 것이었다.
밤을 새워 수현을 애무하고, 소유하고, 그리고 자신을 던져버렸던
민 역시도 수현과 같은 심정인 것이다.
어젯밤.. 자신을 안아오는 민의 태도에서 그가 자신의 결정을 받아
들였다는 것을..
고집을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황홀한 오르가즘의 극치와 반대로 한없이 가라앉는 마음,
서로 상반된 상황의 틈에서도 두 사람은 서로를 탐하는 것을
멈추지 않았었다.
이대로 날이 새고.. 아침이 오면..
그땐 어떤 얼굴로 서로를 바라 보아야 할까... 어떤 얼굴로....



날이 밝아오는 것을 바라보며 서로의 품 안에 지쳐 잠이 들었었다.
잠결에 옆자리를 더듬던 민은 수현이 그곳에 없다는 것에 놀라
퍼뜩 잠에서 깨어났다.
멍한 정신을 가다듬으며 급하게 침실을 나서자
수현은 평소와 같은 모습으로 주방에서 식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하나 없는 행동, 같은 표정.....
마치 어제의 일들, 아니 그간의 모든 일들이 하룻밤 악몽이었던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하게 할 만큼 편안한 수현의 모습..

"수현아.."

"형.. 일어났구나. 씻고 옷 부터 입어. 그게 뭐야..."

"아.. 그.. 그래.."

"밥 차릴테니까 얼른 씻고 나와."

편안하기 그지없는 미소를 보여주곤 다시 싱크대로 몸을 돌리는
수현을 말없이 바라보다 욕실로 들어간 민은
깊은 상실감을 느껴야 했다.
이젠 아침마다 저 미소를 대할 수 없는 거겠지..
그저 기억 속에서만, 먼 기억 속에서만 떠올려야 하는 거겠지..


민이 욕실로 들어가는 기척을 느끼고 수현은 하던 일을 멈추었다.
그의 앞에서 이런 표정을 보여준다는 것이 쉽지 않았다.
하지만 그를 보낼 때까지 절대 힘든 모습도,
아픈 모습도 보여주고 싶지 않았다.
만날 수 없는 자신을 늘 걱정하며 살아갈 그에게 마지막 모습을
그런 식으로 기억시키고 싶지 않았다.
힘들어하는 것도, 아파하는 것도, 눈물 흘리는 것도..
나중에.. 그가 없을 때, 그때 하면 되니까.
그를 보내고 나면 수현에겐 정말 많은 시간이 남을테니까.
자신의 모든 시간을 채우고 있던 그가 가고 나면 그 시간들은
텅빈채로 남을테니까.......


평소와 다를 것없는 표정처럼
늘 대하는 아침 식탁을 준비한 수현과마주앉은 민은
그를 어떤 표정으로 바라보아야할지 알 수 없어
외면하고있었다.
그런 민을 안타깝게 바라보던 수현이 입을 열었다.

"형.. 나 좀 봐라.. 식탁에 구멍나겠어.
나 좀 봐봐.. 응? 고개 좀 들고,
형 얼굴 좀 제대로 보여줘."

수현의 말에 민은 들고 있던 숟가락을 내려놓고 고개를 들었다.
평소와 다를 것이 없는 얼굴이었지만 수현의 눈은 많은
감정을 담고 있었다.
눈은 마음의 창이라고 했던가?
그다지 감정표현이 풍부한 사람은 아니었다. 수현이란 사람은...
그런 그의 눈이 많은 것을 담고 있었다.
아픔, 그리움, 슬픔, 고통, 애절함.....
그리고 무엇보다도 결코 버릴 수 없는 사랑....
그를 보내는 것이 수현에게 어떤 것인지 눈이 말해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럼에도 수현은 그에게 가라고 하고 있었다.
그의 눈은 그 많은 감정을 담고서도 여전히 그에게 가라고
말하고 있었다.
그것이 수현의 결정이니까...
설령 그 선택이 자신들을 아프게 하고 상처 입힌다고 해도,
자신의 약속을 깨는 일이라고 해도.....

놓아주지 않을거라고 그렇게 결심했고, 맹세 했지만
세상이란 마음 먹은데로 살아지는 것이 아니란 사실..
억지로라도 수현을 붙잡으려 한다면 그렇게 못할 것도 없었다.
하지만 그렇게 수현을 잡아둘 명분이, 아니 잡아둘 수 있는
자격이 자신에겐 없었다.
사랑만으로 수현의 가슴에 무거운 짐을 지우고 살아가게 만들 수
없었다.

수현의 말대로
유일하게 자신들을 감싸주셨던 할머님이 원하시는 일..
아마 민 역시도 그리한다면 평생을 할머님에 대한 죄스러움을
안고 살아갈 것이다.
어떤 것이 더 옳은 일인지..
수현을 택하고 할머님을 외면 하는 것이 옳은 일인지,
아니면 수현을 포기하고 할머님의 바램을 들어드리는 것이
옳은 일인지, 깊이 생각했지만 민은 결정을 내릴 수 없었다.
어떤 길을 선택해도 후회할 것이 분명하고 상처가 남긴
마찮가지였다.
비겁하지만 그 결정을 수현에게 맡긴 것이다.
그리고 지금 수현은 결정을 했다.
헤어지자고...
그가 당연히 누려야할 것들과 책임져야할 사람들에게로 돌아가라고..
이젠 그가 없어도, 그를 사랑하는 마음만으로도 살아갈 수 있다고..
무슨 말을 해야할까.
말끄러미 자신을 바라보는 수현에게 무언가 말을 해야하는데
도저히 입이 열리질 않았다.
마치 말 하는 방법을 잊어버리기라도 한듯..

"형..십년 전.. 아니 내가 처음 형을 보았을 때나 지금이나
달라지질 않았다는 거 알아?
아마 세월도 형은 피해가는 모양이야.
형도 이젠 삼십을 훌쩍 넘겼네.
그렇지.. 내가 벌써 스물일곱이니까. 십년이네..
난 가끔 생각해. 형을 만나서 사랑을 받고, 그리고 사랑하고
우리가 같은 남자라고 해도 다른 부부와 전혀 다를 것이 없이.......
아니 어쩌면 보통의 사람들은 평생을 살아도 느껴보지 못할
그런 사랑을 할 수 있었다는 거 너무나 감사하더라.
아마도 내가 다시 태어난다고 해도 형처럼 사랑하는
사람은 절대 만날 수 없을거야.

형.. 그런데.. 나 이제 형 보내고 나면
조금만 아주 조금만 외로워하고..
그리고 누군가 함께 있을 사람을 찾을거야.
형처럼 사랑할 수 없겠지만 기댈 수 없을테지만..
사랑할 수 있는, 서로 의지할 수 있는 그런 사람 찾을거야.
그리고 남은 시간들은.....
가끔만 형을 그리워하면서 행복하게 살거야.

형... 그러니까 내 걱정 같은건 하지마.
나 잘 살거니까. 어디에 있던지 난 항상 형을 볼 수 있잖아.
그러니까.. 형이 날 지켜보는 것과 같아.
내가 형을 보는 것이 바로 형이 날 보는 것이니까.....
그러니까 절대로 행복하게 지낼거야.
형도 내가 항상 형을 지켜본다는 걸 잊지마.
꼭.. 꼭.. 행복하게 살아.
그리고.... 형이 나한테 했던 약속은 반드시 지켜줘."

"무슨....?"

"나 보다 먼저 죽지 않을거라는 약속.
절대로 나 보다 먼저 죽으면 안돼.
형이 행복하고 당당하게 자신의 자리에서 살아가는 모습을
지켜보다가 그 모습을 보면서 죽을 수 있게.
내가 먼저 가서 기다릴거니까.
걱정마.. 내가 먼저 가서
아버지한테 형 미워하시지 말라고 잘 부탁할 테니까.
형은 아무것도 걱정하지 말고, 미안해 하지 말고,
형이 날 떠나는게 아니라 내가 형을 보내는 거니까.
약속을 깬 사람은 나니까.
형은 그런 죄책감 따위 갖지 말고 살아줘.
알았지?"

"수현아.. 난...."

"혀엉.. 웃어라 좀..
나 형의 마지막 모습을 그런 모습으로 기억하기 싫어.
편하게 웃는 모습으로 기억하고 싶어.
우리 웃으면서 안녕하는 거야.
서로를 위해서, 그리고 자신을 위해서...
이건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선택이고,
난 절대로 후회하지 않을 자신 있어.
그러니까 형도 후회 같은거 하지 말고, 그렇게 살아.
아니.. 사는 동안 날 잊고 살아준다면 더 좋겠지만.."

"내가... 내가 널 어떻게 잊어.. 넌 잊을 수 있어?"

"아냐.. 형.. 그런 말이 아니라
형이 결코 날 잊지 않을거라는 거 나도 알아.
나도 형을 잊지 않을 거니까.
하지만... 형이 날 기억할 때
그 기억들이 형을 아프게 하는 건 싫어.
왜냐하면 난 늘 형을 기억할 때마다 행복할거니까.
그럴거니까.. 형도 그래줬으면 좋겠어.
그래.. 형.. 날 잊어버리지 말고 행복하게 기억해줘.
아주 많이 사랑했던 사람이라고...."

"아주 많이 사랑하는 사람. 사랑했던 사람이 아니라..
사랑하는 사람일거야. 내 모든 인생을 다해서 사랑하는
유일한 사람일거야. 나에게 넌 그런 사람이야.
수현아.. 네 말대로.. 그 약속 지킬게.
절대로 너 보다 먼저 죽지 않을거야. 꼭 지킬게......꼭.."

"고마워 형... 내 부탁 들어줘서.... 내 결정을 따라줘서.."


밝은 얼굴로 웃어주는 수현을 바라보며 민은 눈물이 흘러내리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자신에게 웃는 모습을 마지막으로 보여주기 위해 그가 얼마나
힘들게 참고 있는지, 저 가슴이 얼마나 찢어지고 있을지..
민 역시 그와 같은 심정이니까.
알 수 있었다. 수현의 마음을..
그렇기 때문에 그에게 웃는 모습을 보여주어야 하는데,
도저히 눈물을 참을 수 없었다.
태어나서 이렇게 눈물을 흘려본 기억은 없었다.
이런 상실감을 느껴본 기억도 없었다.
수현 말고는 이렇게 사랑한 사람이 없었으니까.

민이란 사람에게 수현은 그런 존재였다.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는  존재..
자신을 자신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주는 사람..
목숨 보다도 소중한 사람..
죽어서도 놓을 수 없을 귀한 사람..
그런데 이젠 그런 그를 홀로 놓아두고 가야한다.
먼저 죽지 말라고 말하는 그의 심정이 어떤 것일지 잘 알고 있었다.
졸지에 부모를 잃어버린 어린 소년이었던 수현..
그때 그의 눈에 서리던 공허함과 외로움을 기억하고 있었다.
다시는 그가 그런 눈을 하지않게 해주리라 다짐했었는데
결국 자신도 이렇게 수현을 홀로 남겨두게 되는 것일까.

"형.. 울지마. 바보 같아.
형이 우니까 바보 같아. 울지마.
바보.. 왜 울어. 난 걱정하지 말라니까..
형은 날 혼자 버려두는게 아니야.
내가 보내는 거라니까.
울지마 형.. 나 화낼거야. 울지말고 웃어줘.
형이 웃는 모습을 보고 싶지
그렇게 우는 모습 따위 기억하고 싶지 않아. "

"그래.. 진짜 바보같다. 눈물 샘이 고장 났나봐.
미안.. 아니.. 울지 않을게..
수현아...."

"응.."

"너 웃으면 정말 이뻐. 그거 아니?
니가 웃는 모습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란거?
너의 웃는 모습이 날 가장 행복하게 해주는 열쇠라는 거?"

"헛.. 남자 보고 이쁘다니. 그건 욕이야.
기왕이면 멋지다고 해줘.
난 형이 말 없이 미소지을 때가 가장 좋아.
진짜 멋있거든..
이 사람이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다.
날 사랑해주는 사람이다.. 라고 생각하면 정말 뿌듯하거든.

형.. 우리가 얼마나 더 살 수있을까?
사십년? 오십년? 아니면 그 보다 더 오래?
하지만 난 그 보다 더 오래 살게 된다고 해도
형의 미소, 형의 냄새, 형의 음성,
내가 알고 있는 형의 모든걸 결코  잊어버리지 않을거야.
늘 행복하게 기억할 거야.

난 전에는 사랑한 기억만으로도 행복할 수 있다는 말을
이해하지 못했어. 아니 믿지 않았었어.
그런데 지금은 충분히 그럴 수 있다는 걸 알겠어.
사랑한 기억만으로도 얼마든지 행복하게 살 수 있다는 거....
그건 그 사람을 보내도 평생 사랑할 수 있기 때문일거야.

난 그래.. 형을 보내지만 단지 몸만 보내는 거니까.
지난 시간동안 날 사랑해주었던 형을 보내는게 아니니까.
형을 보내지만, 형을 사랑한 기억들
그리고 사랑하는 마음들 형과 함께 보내는 거야.
가지고 가. 그건 누가 뭐라고 해도 형의 것이니까.
나라는 사람은 이 세상이 끝날 때가지 형의 사람이니까.
함께 있을 수 없다고 해서 그 사실이 변하는 건 아니니까.
난 그렇게 믿어 형...."

"그래.. 내 마음, 널 사랑했던 마음..
그리고 앞으로 살아가면서도 사랑할 내 마음..
모두 널 주고 갈게.
나도.. 세상 끝까지 너의 사람이니까.
난 널 사랑하니까. 너도 날 사랑하니까.
사랑해.. 사랑해.... 사랑해 수현아..."

"응.. 응.. 나도.. 나도 사랑해 형.. 영원히.."


안타까운 고백들, 안타까운 가슴들.....
함께 있어도 그리운 사람이란 어떤 시인의 싯구처럼
지금 마주 앉은 두 사람은 이미 서로를 그리워 하고 있는 것이다.
이렇게 가슴 가득 그리움을 안고 잘 살아갈 수 있을지..
보지 않고 견뎌낼 수 있을지..
살아보지 않고는 알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두 사람 모두 견뎌내야 한다고,
살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나를 위해서가 아니라 그를 위해서..
자신을 지켜볼 그를 위해서..
그리움을 아픔으로 담아두지 말고,
행복하게 그리워 하면서.....



조용히 시간이 흘러가고
민은 간단히 자신의 물건들을 챙겼다.
옷가지들, 함께 산 십년의 세월, 그 동안에 쌓여온 온갖 잡동사니들....
하지만 그것들을 모두 챙겨가기엔 무리가 있었다.
말하지 않았지만
이대로 간단한 옷가지만을 챙겨서 가는 것으로 암묵적인 동의를
하고 있었다.
이별이지만 이별이 아닌 듯..
마치 어딘가 잠시 여행이라도 다녀오듯..

그렇게 간단히 짐을 챙긴 민은 한숨을 내쉬며 침실을 둘러보았다.
서재에 있는 자신의 물건들, 그가 모아놓은 책들, 사무기기들..
그 모든 것을 이대로 두고 갈 것이다.
작은 흔적 조차 남겨두지 말아야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도 했지만
가뜩이나 외로움을 타는 수현에게 조금이라도 자신의 체취가
느껴질 것들이 남아서 위로가 되어주길 바랬다.
어쩌면 그것들을 볼 때마다 수현은 울지도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전혀 아무것도 없는 것 보다는 나으리라..
그리고 이기적인 욕심이었지만 그렇게라도 자신의 흔적들을
수현의 곁에 남겨두고 싶었다.

침대에 걸터 앉은 민은 왼손 약지에 끼워진 금반지를 내려다 보았다.
수현이 첫 월급을 타서 마련한 커플링..
아마도 평생 이 반지를 손에서 빼는 일은 없으리라.
수현의 말대로 누군가와 결혼을 하게 된다고 해도
절대로 이 반지를 빼고 다른 반지를 끼는 일은 없으리라.
어디서든 수현이 자신의 소식을 접하고 먼 발치에서
자신을 보게 된다면 그때 이 손에 끼워진 반지를 볼 수 있기를....
그렇게 자신이 결코 수현을 잊지 않았다는 사실을 알아주기를 바라므로..



"형.. 다 챙겼어?"

민이 짐을 챙기는 동안 수현은 서재로 들어가 열심히 무언가 하는
기색이었다. 그가 짐을 챙기는 모습을 차마 바라볼 수 없어서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대충.. 서재의 물건들.. 그냥 여기 둘께."

"응.. 그렇게 해. 형이 수집한 책들이랑..
내가 잘 간직할거니까.. 걱정말고.. 언제..."

"전화 했어. 곧 최비서가 올거야."

"그래... 형 뭐 시원하거 줄까? 아이스티 마실래?"

"어.. 그러자.."

너무나 간단한 짐꾸러미.
둘이 여행 다닐때 애용하던 작은 수트케이스 하나가 민이 꾸린 짐의 전부였다.
옷 같은 것들이야 새로 사면 그만이니까.
민이 가장 먼저 챙긴 것이 있다면 수현과 나란히 구입했던 파자마..
창피하다고 얼굴을 붉히면서도 행복한 표정을 감추지 못했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때의 수현은 아직 학생이었고, 그리고 어린 아이나 다름 없었는데
어느 새 이렇게 어른이 되어 있었다.

십 년간의 변화, 어린 사내 아이에서 성인남자로의 변화,
아마도 시간이 더 많이 흐르고 나면 그땐 나이든 중년의 모습이 되고,
그 모든 모습을 끝까지 지켜볼거라고 결심했었는데.....
이젠 그저 상상으로만 볼 수 있는 모습이겠지,
하지만 적어도 수현은 세월의 흐름에 따라 변해갈
자신의 모습을 볼 수 있을 것이다.
그에게 보여줄 수 있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했다.
적어도 같은 하늘 아래에서 살아갈테니까..
같은 하늘을 보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살 수 있다는 것만으로 만족해야 한다.


"형.. 여기. 특재 아이스티 대령이요."

"고맙다."

거실에 나란히 앉아 잔에 맺히는 물방울을 바라보며
그렇게 말없이 서로의 채온을 느끼고 있었다.
곧 최비서가 온다.
곧..
그리고 이 생에선 다시는 만날 수 없는 것이다.
우연히라도 마주치길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그런 우연이 생길리 없는 것이다.
민이 가야하는 세상과 수현이 살아갈 세상은 다른 곳이므로
아마도 어떠한 교차점도 존재 하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물리적인 거리와 상관없이
두 사람의 영혼은 언제나 함께 맞물려 갈것을 믿고 있었다.

평생을 다해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는 것은
굉장한 용기를 필요로 하는 것이다.
어설픈 사랑으로는 그런 결심을 할 수 없었다.
떠나는 사람 역시 마찬가지일 터
민도 수현도 서로의 마음을 굳이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서로가 평생 낼 수 있는 모든 용기를 그러 모았다는 것을,
그저 이렇게 떨어져 살아가면서 아프지 말기만을..
상처로 괴로워하며 살지 말기만을..
그리움으로 자신을 학대하고 파괴하며 살지 말기만을..


말없이 앉아 있던 민이 수현의 고개를 들어올렸다.

"형.."

수현의 두 눈을 마주 보며 민의 입술이 내려 앉았다.
따듯하고, 포근하지만 너무나 안타깝고 서글픈 입맞춤..
수현의 떨리는 입술을 가르고 들어오는 민의 입술도 떨리고 있었다.
마지막 입맞춤..
평생 가슴 속에 고이 간직해야할.
그리고 순결하기 그지없는 고백의 입맞춤....


영원히.. 널 사랑할거야. 오직 너 한 사람만을 영원히.....


정열이나 욕망이 서리지 않은 서로의 가슴을 주고 받는 입맞춤이
끝남과 동시에 벨이 울렸다.
마주 댄 입술을 떼고 한동안 서로의 눈을 바라 보았다.


행복해야해..
울지 말아야해..
상처받지 말아야해..
건강해야해..
그리고 잊지말아.. 항상 사랑해줘..
언제까지나 내가 널 사랑하듯..


민의 얼굴을 꼼꼼하게 쓰다듬는 수현의 얼굴에 미소가 어렸다.
민이 이쁘다고 말했던 그 미소를 띄고 수현은 그의 얼굴을
구석구석 손 안에 기억 시키듯이 더듬었다.
다시 벨이 울리자 수현은 결심한 듯이 일어나 문을 열었다.

"도련님. 모시러 왔습니다. 안녕하십니까 수현씨."

"네.. 최비서님 오랜만이네요."

"준비는.."

쇼파에 앉아 있던 민이 일어나 다가왔다.

"끝났습니다."

"짐은 어디 있습니까?"

"저게 다입니다. 먼저 내려가십시요. 곧 내려갈겁니다."

"예. 그럼.. 수현씨 안녕히 계십시요."

깍듯한 예의를 차리는 최비서의 모습.
언제나 예의바른 사람이었지만 그 예의바름 속에 수현에 대한
뾰족한 적대감을 감추고 있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이유 따위 알바 아니었지만
절대적으로 민의 집안에 충성을 받치는 최비서의 입장에서 보자면
이해못할 것도 없었다.
귀한 집안 자손, 그를 그 집에서 끌어낸 사람이
수현이라고 생각하는 최비서의 그런 태도에
그에게 전혀 불만이 없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수현은
체념에 가까운 감수를 하고 있었다.
하지만 지금 최비서의 태도는 전과 같은 그런 뾰족함은 전혀
느낄 수 없는 것었다.
이제 끝이라고 생각해서일까?
아니면 인간적인 동정 때문일까?
어느 쪽이든 달가운 것은 아니지만 적어도 민을 보내야하는
수현에게 노골적인 적대감을 보이지 않아주는 것이 고마웠다.

"수현아.."

"형.. 잘 다녀와."

"...현아."

"훗.. 잘 다녀와. 형..
나 언제나 형을 지켜보면서 기다릴께.
정말로 영원히 함께 있을 수 있을 때까지..
지금은 보내주어야 하지만..
그러니까.. 건강하게, 행복하게, 그리고 당당하게..다녀와..
형을 기다리는 사람,
형이 돌아올 곳이 있다는 거 잊어버리지 말고..
항상 형을 기다릴게. 행복하게.."

"수현아.. 너 좀 안아도 될까?"

"그런걸 꼭 물어봐야해?"

수현은 애써 장난스러운 표정을 하며 민의 품을 파고 들었다.
그만의 독특한 체취, 알싸한 사내의 향기..
수현이 세상에서 가장 좋아하는 향기였다.
한껏 그의 체취를 들이 마시며 그 향기를 뇌리에 기억시켰다.
절대로 잊을 수 없는 그의 체취와 체온....
이제 아주 오랫동안 느낄 수 없을테니까...
수현이 그렇듯이 민도 수현의 체취를, 따스한 체온을 한껏
기억 속에 담아두기 위해서 그를 품안에 꼭 끌어안았다.

그렇게 서로의 모든 것을 몸에, 뇌리에 새겨두려 했다.
절대로 잊지 않도록..
그리고 외로워질 때, 기억하고 견딜 수 있도록..


민의 품에서 빠져 나온 수현은 이마로 흘러내린
민의 머리를 쓸어올려주곤 그를 올려다 보며
아주 밝은 얼굴로 웃어주었다.

"형.. 잘 다녀와."

"그래.. 다녀올게. 내가 돌아올 때까지
너도 건강하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기다려줘.
반드시 너에게로 돌아올거니까.
내가 돌아올 곳은 너 밖에 없으니까."

"응.. 서두르지 말고, 천천히 오면 돼. 알았지?"

"그래.. 수현아.. 사랑... 사랑해.."

"사랑해.. 형.. 어서 가봐.. 늦겠다."

"....."

머뭇거리는 민의 등을 떠밀어 현관으로 내 보냈다.
닫히는 문소리가 두 사람 모두에게 이것이 진짜 마지막을
알리는 판결소리 처럼 들렸다.
문을 닫아 걸고 수현은 베란다로 나갔다.
잠시 후에 아파트를 나서는 민의 뒷 모습이 보였다.
차까지 돌아보지 않고 걸어간 민은 잠시 위를 올려다 보았다.
서로의 눈이 마주치자 수현은 밝은 얼굴로 웃으며
손을 흔들어 주었다.
민 역시 그런 수현에게 손을 흔들었다.
그리고 무어라고 입술만 움직여 말하는 것이 보였다.

'사랑해. 영원히.. 널 사랑해. 수현아..'

'응..형 나도 영원히 형을 사랑해. 영원히....'

민이 올라타자 바로 아파트를 벗어나는 차 꼬리를
보이지 않을 때까지 바라보고 있던 수현은
그대로 베란다에 주저 앉았다.
참고 참았던 눈물이 흘러내렸다.



지금만.. 그를 보낸 지금만 울자....
아마 지금쯤 그 사람도 울고 있겠지..
이렇게 가슴이 아프겠지? 나를 두고 가야하는 그도..
보내야 하는 나 만큼이나 아프겠지..
그를 위해서.. 그리고 나를 위해서.. 지금만 울자....
그리고.. 그가 돌아올 때까지.. 약속한데로..
행복하게.. 건강하게.. 살아가자.. 그를 지켜보면서..
나에게 돌아올 날을 기다리면서...





"도련님..?"

"신경쓰지 마십시요."

"...."

뒷자석에 몸을 묻고 흐느끼는 민을 돌아 본 최비서의 표정은
당혹스러움과 미안스러움이 어려 있었다.
수현을 좋아했던 적은 없었지만
작은도령이 얼마나 그를 사랑했는지는 알고 있었다.
집 안에서 유일하게 그를 인정하고 사랑해주었던
조모의 반대를 무릎쓰고 힘들게 설득해가면서 선택한 사람이었으니
어찌 아프지 않겠는가...
자신은 그러한 사랑이 어떤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마도 말로 표현할 수 없이 고통스러울 것이다.
그리고 수현이란 사람 역시 작은 도령과 같을 것이다.
그럼에도 민을 보내주는 수현의 결단을
최비서는 존경할 수 밖에 없었다.

자신이었다면 이렇게 사랑하는 사람을 과연 포기할 수 있을까?
아마도.. 저들의 사랑은 그런 것을 초월한
그런 사랑이 아닐까?
단순히 사람들이 말하는 사랑이 아닌,
진짜로 생사를 초월해 영혼으로 이어진..
그런 사람들이 이별을 경험하고 아픔을 감수해야한다는 것이
안스러웠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어차피 세상은 냉정하고 차가운 곳었다.
원하는 모든 것을 가질 수 없는 것이다.
그렇다면 가장 최선의 선택을 해야하고
아마도 저들은 지금의 결정을 가장 최선의 것이라고 판단했겠지..

안타깝지만 자신이 나설일도 아니었고,
나선다고 해결될 일도 아니니까.
작은도령이 짊어져야할 의무, 그리고 그에 따른 많은 권리와 지위..
대부분의 범인들은 꿈도 꾸지 못할 그런 것들이었다.
물론 그것이 더 좋은 것이라고 말할 수 없지만
권리와 지위를 떠나서
지켜야할 의무를 선택해준 작은도령이 고마웠다.
앞으로 자신이 충성과 신의를 받쳐야할 대상,
아마 지금까지 모셨던 민의 선친이나 형님에게 보다도
더 깊이 그를 신뢰 하고 모실 수 있을거 같았다.
십년의 세월, 수현이란 사람과 함께한 시간들..
그리고 그를 떠나는 아픔을 통해서 작은도령이 성숙한 어른으로
성장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으니까.
이전의 교만하고 길들여지지 않은 야생마와 같았던 면들이
좋은 쪽으로 변화했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를 통해서 가문은 더 성장할테고 더 단단한 반석을 마련할 것이다.
그것을 위해서 민도 수현도 너무 커다란 것을 희생했으니..



생각에 빠져있던 최비서는 결론이 나지 않는 생각을 접어두고
앞을 바라보았다.
하나의 고비를 넘어서 이젠 앞에 놓여진 길을 보아야할 때이다.
아마 작은 도령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 길이 어디로 향해져있는지
그가 걸어 도착할 곳이 어디인지 알 수 없지만
반드시 걸어가야할 길이란 것을.....


최비서의 걱정스러운 목소리를 물리치고 흐느끼던 민은
어렴풋이 수현의 목소리가 들리는 것같은 느낌에
뒤를 돌아 보았다.
하지만 뒤에 보이는 것은 끝없어 보이는 도로와
그 도로를 달리는  차들 뿐이었다.
여전히 사랑한다고 말하는 수현의 음성이 들려오는데.......
행복하라고.. 건강하라고..
그리고 돌아오라고.. 말하는 수현의 음성이..


뒤를 돌아 보던 민은 젖은 얼굴을 돌려 앞을 바라 보았다.
이제 앞을 보고 달려야 한다.
뒤를 돌아 보아도 수현은 없는 것이다.
오직 앞을 향해 달려야만 다시 그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수현의 말대로 행복하게, 건강하게, 그리고 당당하게....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최선을 다해 이행하리라.
그에게 돌아갔을 때 부끄럽지 않도록...
그가 기뻐하며 자신을 반길 수 있도록...
그렇게 앞을 보고, 절대 뒤돌아 보지 않으리라...
수현이 기다리고 있을 앞을 향해 달려가리라.....



한여름의 뙤약볕에 흐느끼는 매미들의 울음소리가 소란스러운
거리 위를 수 많은 차들이 목적지를 향해 달리고 있다.
그리고 그 안에 사랑하는 사람이 기다리는 곳을 향해서
아주 먼 길.. 오랜 길을 달리기 시작한 한 사람도 있다.




기다림이란 반드시 끝이 있기 마련이다.
그리고 기다림이란 꼭 슬픔만은 아닌 것이다.
기다릴 수 있어 행복한 사람들도 있다.
이들처럼....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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