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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화(心畵)

심화(心畵)


                                                  -by atlant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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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초상화 하나만 그려주세요.  하나만있으면 돼요."




화실을 빠져나와 저녁반찬거리 몇가지를 고르고 기분좋게 바나나우유하나를 꺼내 노래를 흥얼거리며 집으로 돌아오던 길이었다.
한 소녀가 아파트 단지 앞에 쭈그리고 앉아있었다.

소녀의 행색은 몹시 추워보였다.
이제 첫눈이 내린지 몇주나 지나 두꺼운 패딩코트를 입은 사람들이 거리를 활보하고 다니는
날씨였다. 소녀는 낡은듯한 잠바 하나를 몸에 걸치고 긴머리는 생기없어 보였다.

소녀를 본체만체 막 관리실을 지날때 쯤 누군가가 내 코트자락을 잡았다.
뒤돌아 보니 좀전까지 앉아있던 소녀가 나를 바라보며 말했다.

"제 초상화 하나만 그려주세요. 하나만 있으면 되요."

나는 어안이 벙벙했다.  순간 당황하여 이 아이 나에게 장난치는 것인가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
혹시 또래의 다른 친구들이 어딘가에 숨어있진 않은지 주변을 두리번거리기 까지 했다.

"나보고 말한거니?"
소녀는 끄덕인다.

"저기, 나는 너를 모르겠는데 혹시 아저씨가 누군지 아는거니?"
"아니, 몰라요. 아저씨가 누군지 몰라요. "

나는 조금 황당했다. 그리곤 한숨을 쉬곤 다시 발을 돌려 단지내로 들어가려 하는데
소녀는 조금 울듯한 표정으로 아니, 분명 울기시작했다.

"하나면, 하나면 되는데. 흑... 그려주면 안되는 거에요?
나 돈같은거 없어요,  아저씨 그림그리시죠. 하나만 그려주세요. 예?"

"......저기...,"

내가 지금껏 철들기 시작했을 무렵부터 치더라도 지금껏 나에게 저렇게 울면서 메달렸던 사람은
없었다. 적지않게 당황스러웠다.

"꼬마야, 울지마. 아저씨는 화가가 아니라서 초상화 같은것은 그릴줄 몰라.
초상화가 필요하면 아저씨가 돈을 줄테니 저기 사거리에 가면 초상화 그려주는 곳이 있거든
거기서 그리는게  어떻겠니?"

소녀는 고개를 설레설레 젓는다.
나는 참으로 난감했다. 알지도 못하는 꼬마가 대뜸 초상화를 그려달라니 게다가
알지도 못하는 꼬마에게 내가 돈을 줄테니 전문가게에서 그리라고 했는데도 소녀는 싫다고 한다.

나는 어찌해야 할지를 몰라 날 쳐다보는 소녀를 바라보았다.


"아저씨가 그려주세요. 예쁘지 않아도 되요. 아저씨가 그려주세요..흑."

"나도 그려주고 싶은마음은 굴뚝같지만 초상화를 그려줄만큼 그림을 못그려.  미안하다. 꼬마야."

꼬마는 이내 잡고있던 코트를 놓고는 고개를 숙였다.
"...꼭 내 초상화를 줘야하는 분이 계신데....내가 앞으로 그분을 찾아갈수가 없을것 같아서요.
그걸 가져다주면 기뻐할것 같아서....그랬는데."

소녀가 운다.
물론 요즘  5년넘게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화실에 다니고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 취미이기때문에 절대로. 실력이 없다. 기본적인 소묘만 그릴뿐이지 인물같은것은 그리질 못한다.  아직 데생을 본격적으로 들어가지도 않은 시점에서 초상화를 그려달라는 소녀의 부탁은 이제 막 걸음마를 시작한 아기에게 뛰어보라고 하는것과 다르지 않았다.


어쩔수 없다. 해주고 싶은 마음은 있어도 그럴만한 실력이 없다. 게다가 어느집의 누구인지도 모르는 소녀의 말을 들어줄만큼 내마음은 어리숙하지  않은것이다.

나는 손에 들고있던 봉지를 뒤져 집에서 기다리고 있을 녀석의 몫의 바나나우유를 하나 꺼내 빨대를 꽂아 아이의 손에 쥐어주었다.  

몸을 숙여 아이의 눈을 보니 내 기분은 더욱 더 참담해졌다.

"..미안.  그려줄수가 없을것 같아. 미안해"

아이는 풀이죽은 체 뒤돌아서 걸어나갔다.
한참을 그 아이의 뒷모습을 바라보다가 결국 아이에게 달려갔다.



"저기, 언제까지 그려주면 되는거니?"
"....목요일까지......그려주시면 돼요."
".목요일까지?"

오늘은 화요일, 어쩌면 내일 화실에 나가 화실선생님께 부탁드려 함께 해본다면 목요일까지 해줄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 그려줄께.  근데 너네 집이 어디니?"
아이는 이내 손짓을 하며 어딘가를 가르킨다.

"저기에 살아요."
아이가 가르킨곳은 나도 어딘지 알고 있는 곳이었다.


"송원 사진관?"
"응"

그곳은 이 동네에선 조금 오래된 사진관으로 사진사가 분명 아주머니였다.
하지만 요즘같이 여기저기 좋은 사진관이 즐비한 시대에 허름한 건물에 조금 구식으로 찍어주는 사진관이라 장사가 잘 되지않는 곳이기도 했다.  구식이라하면 요즘처럼 얼굴을 수정해준다거나 화려한 바탕을 넣어준다거나 하지 않는것이다. 분명 내가 초등학교 입학식때 이름표에 붙인 어두운 얼굴에 점들이 그대로 다 보이는 그런 사진을 찍어주는 곳이다.

하지만 조금 의외다.
사진관집 딸이 무엇에 쓰려고 초상화가 필요하단 말인가?
자신의 얼굴을 주고 싶다면 어머니께 부탁드려 사진을 찍어서 주면 될것을 조금 이상했지만
그만한 이유가 있으려니 싶어 더이상 아무것도 묻지않았다.

"꼬마야, 사진 한장만 주겠니. 그걸 보고 그리면 돼거든."
이내 아이는 조금 낡은 사진 한장을 주었다.
사진은 아이가 더 어릴 때 찍었던 사진이었다.
아버지로 보일듯한 사람의 품에 안겨 온갖 울상을 찌푸리고 찍은 사진이었다.
아마 사진을 찍을 당시 뭔가 상당히 마음에 안들었던 모양이었다.


"이거밖에 없니? 더 예쁘게 찍힌건 없니?"
"응, 그거밖에 없어요. 사진이 못난이같아서 안돼요? 하지만 남아있는건 그거밖에 없어요.
그걸로 그려주시면 안돼요?"

사진관집 딸이 예쁘게 찍은 사진하나쯤 없을까 싶었지만, 자신이 이것밖에 없다고 하는데 거기다 토를 달기도 그렇고.  어쩔수 없다. 이걸로라도 그려주는수밖에.


"그럼 목요일날 아저씨가 사진관으로 가지고 갈께. 괜찮지?"
아이는 고개를 끄덕이곤  금세 웃으며 사라졌다.



집으로 돌아오니 시준이 막 샤워를 끝냈는지 젖은 머리를 수건으로 말리며 나오고 있었다.

"이제오는거야."
"응"
"추운데 뭘 그렇게 많이 사왔어. 이리줘."

녀석이 내손에 든 봉지를 들어준다.
"부르면 나갈텐데 , 바보"
"그냥 돌아오다가 갑자기 오징어볶음이 먹고싶더라고. 그래서 사왔지 뭐."

"아, 그럼 오늘 저녁은 오징어 볶음인건가..."
내가 시무룩하게 대꾸가 없자 녀석이 봉지를 식탁에 가져다 놓더니 이내 나에게로 와 코트를 받아준다.


"왜, 오늘도 화실선생이 너 그림 못그린다고 타박하디?"
"..아니"
"....그럼 혹시 오늘 집에서 취직하라고 연락왔어?"
"아니야, 아무일도 없어. 배고파. 나  오징어볶음 해줘."
"엑, 뭐야. 오늘 식사당번은 너잖아. 니가해줘."
"내가 장봐왔잖아. 니가 해줘."
"우, 행패다.  아무리 내가 요리사라지만  나도 니가 해준 밥 먹는게 더 좋단말야"

"아, 그러십니까. 그럼 제가 해드리는 오징어볶음을 드시고 오늘은 서로 오랜만에 각방을 쓰는것도 괜찮을 듯 하군요."

녀석이 군말없이 주방으로 들어간다.  같이 산지 3년이 넘었는데도 여전히 이런식으로 놀려도 항상 넘어간다.  생각해보면 녀석과 같이살기 시작한 것 부터가 미스테리다.

고등학교 2학년때 녀석과는 같은반이었지만 1년내내 말한마디 제대로 나눠본적이 없던 녀석이었다.
나도 그도 졸업을 하고 각자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던 3년전의 어느날 길에서 쭈구리고 앉아있는 녀석을  만났다.  처음엔 누군지도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나는 처량한 사람에게 끌리는 타입의 인간인 것이다.
녀석은 대뜸 친한척하더니 하루만 재워줄수 없냐고 한다. 물론 하루야 재워줄수도 있지만 졸업하고 난 후 처음본 녀석이 그런소릴하면 기분좋을 인간은 하나도 없다. 게다가 1년내내 대화한번 해보지 못한 상대라면 더 더욱. 그런데도 나는 잘도 녀석에게 좋다고 허락했다.

그런데 문제는 하루가 이틀이 되고 사흘이 되고 나중엔 열흘이 되어갔다.  이젠 도저히 참을수가 없다고 생각한 난 녀석에게 집을 나온 이유를 물었다. 녀석은  고교졸업후에 대학을 진학했지만 한학기만 다니고 다음학기부터 부모를 속이고 요리학원을 다녔단다. 그러다 어머니가 그 사실을 알게되고 대판 부모님과 맞짱을 뜨고(그녀석의 표현이다. 부모와 맞짱을 뜨다니 대단한 녀석이다.) 집을 나왔다는것이다.
녀석에 표현에 의하면,

"집에돌아가면 난 울 아버지한테 죽어, 그래도 내가 여기있으면 너에게 죽음을 당하는일은 없을테니 여기 있는게 훨씬 안전해. 그렇지?"

할말이 없어졌다. 내가 너무 만만히 본것인가.
결국 나중에는 부모가 우리집에 찾아와 사과를 하고 데려갔으나 녀석은 다시 짐싸들고 나와 함께 살고 싶다고 했다.   그렇게한다고 내가 다 받아주었다면 말이 안되지. 물론 나도 반항도 해보고 설득도 해보고 이것저것 다해보았지만 녀석이 포기를 안하는 것이다.  결국 녀석에게 악을 쓰며 왜 나와 살겠다는거냐고 물으니 녀석의 대답은 이러했다.

" 몰라,  니 모습이 아른거려서 아무것도 못하겠어. 그러니 니가 책임져.  나를 구워삶든 니 마음대로 해. 난 너하고 같이 있으면 그걸로 돼."

하...하....그렇게 시작된 동거였다. 결국 6개월동안 피터지게 싸우다 어쩌다 나도 정이 들었는지 2년 전 녀석과 본격적으로 연인사이가 되었다.  열번찍어 안넘어가는 나무가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으나 나의 경우 열번을 찍기도 전에 넘어갔다. 젠장.  지금은 나도 녀석을 상당히 좋아해서 녀석이 없는것을 상상할수가 없다.  너무 불공평하군. 생각해보니.


예전일을 생각하다보니 주방에서 시준이 녀석이 부른다.
식사가 다되었구나 싶어 주방으로 갔다.
역시 녀석의 요리솜씨는 좋다. 맛깔스럽고 간도 딱좋고.  조금 번화가에 위치한 한식집에서 일하고 있는 녀석이 폼으로 다니는 것이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건 바로 이런 순간이다.


"맛있지?"
녀석이 실실 웃는다. 입에는 한가득 음식물을 물고는.

"아니, 배고파서 먹는거야.  누가 맛있데. 흥."
"아 그래?   맛없어서 미안하구만."
녀석이 삐졌다. 얘도 아닌것이 사소한것에 잘 삐진다.
난 재빨리 화제를 돌렸다.

"저기, 요 앞 상가에 송원사진관이란데 가봤어?"
"..송원사진관?"
"응. 왜  허름한 건물상가촌 있잖아."
"응. 알아. 나 요리사 이력서 낼 때 사진내느냐고 거기서 찍었어."
"그래? 거기 어때?"
"어떠냐니. 뭐가? 사진이 주인이, 어느쪽을 말하는 건데."
"아니다. "

"뭐야,  뭐가 궁금한건데. 거기 사진은 조금 촌스럽다고나 할까, 그럼에도 개성을 살려주는 사진이라고 생각해. 물론 요즘애들이야 얼굴뽀샤샤하게 찍는거 좋아하지만 그거 왠지 밀가루 뒤집어 쓴거같아서 나는 별로더라고.  거기 사진 맘에 들어.  왜? 너도 사진찍을 일 생겼냐, 혹시 다시 취직하기로 한거야?"

"아니,  오늘 그집 꼬마가 나한테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하더라고. 근데 그게 좀 이상해. 사진관하는 자기집 나두고 구태여 나같은 아마추어한테 초상화그려달라니. 게다가 그림에 쓸려고 사진을 달랬더니 이런사진을 주더라고."

나는 방으로 들어가 코트주머니에 있던 사진을 꺼내 보여주었다.
"와!  못난이 인형이다."
"자기 초상화 그려달라면서 이런 사진을 주는 이유가 뭘까. "
"취향이 독특한가보지. 뭐."
녀석이 다시 오징어 볶음을 입에 넣는다.

"내가 돈줄테니까 사거리에 있는 초상화집에서 하라고 해도 싫데 내가 해줘야한다는데."
"헉, 그애 혹시 장님이라던가...뭐..그런거..?"
나는 녀석을 한번 째려보았다.

"농담아냐, "
"알았어. 진지하게 들어줄께. 그래서 그게 고민인거야? 사진관집 딸이 초상화를 그려달라고 한게."
"아니, 하필 왜 나란게 고민이야."

"흠.. 그렇긴 하네.  니가 맘에 들었나보지."
"박시준, 나 정말 농담아냐. 말안할래. "
"미안미안, 하지만 니가 그렇게 무언가로 고민하는거 너무 오랜만이라 자꾸 놀리고 싶어져서.  미안합니다.  "

녀석이 웃는다.
나는 식탁위에 놓인 사진을 들고 한참을 보았다.
그 아이 정말 이사진속에 못난이 인형같은 모습을 그려달라는 걸까? 대체 뭐야.

"일단은 그려달라는 사람이 그려달라는데로 그려줘. 뭘 바래. 그냥 해달라는대로 해주면 되지.
그보다 너 그거 정말 그릴 수 있냐. 내가 알기론 너 아직 정식으로 데생에 들어가지도 않았잖아."
"...응.  선생님이 아직 선이 거칠다고 조금 더 다듬고 들어가보자고 하시네."
"정말 그려줄 수 있겠냐, 자신없으면 다른사람에게 맡기던지. 거절해. 아님 화실선생님께 부탁해보던지."


여전히 입안에 음식물을 넣고 오물오물 말하고있는 녀석을 보니 한숨이 나왔다.
의도를 알수 없는 그 아이의 부탁은 심히 부담스러웠다. 나는 사진을 쳐다보면서 녀석과 저녁먹는것에 전념했다.







잠자리에 들기전에 내일 화실에 가서 선생님께 부탁드려봐야 겠다고 생각했다.  뭐 어찌되었던 부탁은 받았고 원하는 그림을 주기만하면 되지 않은가란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조금 마음이 편해졌다. 하지만 그럼에도 뭔가 무거운 기분만이 떨쳐낼 수 없었다.


한참을 이리뒤척 저리뒤척 거리며 잠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눈만감고 있을 뿐 머리속에선 온갖 생각들로 복잡하기 짝이없었다. 한 30분 정도 지났을까. 슬금슬금 맨살위에  더듬는 손이 느껴졌다.  처음엔 장난처럼 배를 쓰다듬더니 이내 대담하게 유두근처를 애무한다.  시준이 녀석이다.  

"어이, 박시준 이손 빼시지."
"어, 안자고 있었네,"
"뭐야, 그럼 너 자는 사람하고 할 생각이었어?"
"뭐,  한번쯤 해보고 싶었거든. 잠든 연인과 섹스한다던가.... 뭐 깨있었으니 다 틀렸네."
"너 왠지 점점 변태같아 지는거 아냐, 그게 어디가 섹스야! 폭력이지. "

안타깝게 배회하던 손이 유두를 비튼다.  아무생각 없는 나로서도 본능적으로 반응할수 밖에 없다.
게다가 시준이 녀석 꽤 그쪽으론 소질있는걸.


"흣,  야...그만해."
"좋잖아. 그렇게 좋은듯 소리를 흘리면서 싫다고 해봤자 나로선 더 먹고싶어 진다고."

녀석이 내쪽으로 몸을 기울인다. 그리곤 이내  깊게 입술을 머금는다.  이젠 될되로 되란 기분이다.
녀석이 입술을 떼더니 나를 보며 살짝 웃는다.  

"근데, 내일 출근해야 하지 않냐?"
녀석이 나의 유두를 입안에 넣고 이리저리 굴린다.
정말 미치겠다. 너무 기분이 좋아.  녀석이 이런쪽에 경험이 많은건가. 아님 내가 민감한것인가.

"아, 5시반까지 출근."
여전히 입안에선 이리저리 유두를 굴리며 말한다.

"뭐! 5시반?"
나는 녀석의 머리를 치우게 하곤 말했다.
시계를 보니 1시 40분을 분침이 막 지나가고 있었다.

"왜 그래?"
"바보야, 그럼 얼른 자기나 해. 새벽부터 출근하면서 그럴 기분이 드냐?"
"뭐 하루쯤 밤샌다고 쓰러지지 않지, 게다가 너랑 이러고 있는게 더 좋거든."
"됐어.  이제 그만 자라구. 나 갑자기 하기 싫어졌어."

녀석이  나의 말에는 아랑곳 하지 않은체 여전히 애무를 계속해 나간다.  그러면서 손은 어느세 아래를 향하고 있다.  이리저리 저항하던 나도 결국 어쩔 수 없이 항복하고 말았다.
녀석은 눈치를 챈건지 더욱더 농도깊게 애무해온다.



"그..그만...  읏"
"쿡,  ..."
벌써 한참이 지났다. 분명  몸 이곳저곳이 좋아서 어찌할지 모르겠는데 무엇때문인지 집중이 안되는 것이다.  몸은 이제 갈때까지 간듯 시준을 받아들이고 싶어 안달이 나지만 왠지 그럴기분이 들지 않는것이다.
이 무슨조화인가. 분명 즐겁긴한데 온전히 집중할수가 없다.

"저기... 시준아."
"..응?"
"오늘은 그만하자."
"뭐!  지금 너 내 상태를 보고도 그런소리가 나오냐? "
그렇다.  시준이 녀석도 흥분할때로 흥분했는데 약간 당황해 하는것 같다.

"집중이 안되-  오늘은 여기서 그만하는게....."
"혹시 내 테크닉은 떨어졌다거나.....혹시...!"
"대체 뭘 생각하는거야, 그냥 오늘은 그럴 기분이 안들어. 물론 기분은 좋지만."
"헤에?"
"미안."
"휴 -  혹시 아까 그 꼬마일 아직도 신경쓰는거 아니야? "

녀석이 테이블에 있던 담배를 꺼내 불을 붙인다.
"그런가?"
"이사람아, 그렇게 고민할거 왜 그런 부탁은 받아들여서... 혹시 그 애 처량하게 앉아있었냐?"
"응....그랬지. 아마도."
"너 그거 정말 못말리는 거 알어? 처량한 사람이 부탁하는거 거절못하는거, 물론 나도 같은 종류의 일로 니옆에 있게되었지만. 어느땐 너무 바보같다는 생각이 든다고. 매번 그렇게 고민될일을 만들어 오다니말야."
"알고있었냐.. ."
"당연하지 바보, 아마 너만 모르고 다른 놈들은 다 알껄.
  휴- 오늘은 다 글렀구나. 마음 편히 먹고 잠이나 자.  바보."

시준은 이마에 키스를 해주며 자리에서 일어난다.
"안자고 어디가?"
"이거 한대만 피우고 잘께. 이대론 잠 잘수 없을껄. 근데 그 꼬마 니가 이렇게 고민하는거 알고나 있을까?"

"..아마 절대로 모를껄."

녀석이 웃으며 방에서 나간다. 왠지 미안해졌다.  하지만 노곤한 몸이 잠을 부른다.
나는 이불을 얼굴 깊숙히 까지 올리고 깊은 잠을 청해본다.






나는  소녀가 준 사진을 뚫어져라 봐라보았다. 벌써 스케치북을 핀지 30분이 지나가고 있는데도 손도 못대고 있다. 어디서부터 시작해야 하는가. 연필을 이리저리 돌리면서 다시 사진을 뚫어져라 본다.

"뭐하십니까?"
"아.. 초상화 좀 그릴려고......"
"흠... 이사진으로요? 재미있게 찍은 사진이네. 그런데 누가 초상화를 그린다고요?"
"그러니까.. 제가."

선생이 한참을 나를 본다.
"윤성연씨 아직 선연습하고 있죠. "
"그렇죠."
"하하하. .. 재미있는 분이시네."
"저기 농담아닌데요. 저 이거 그려야 하거든요."

한참을 웃던 선생이 웃음을 멈추고 다시 날 쳐다본다.

"욕심이 지나친거 아닙니까?"
"저기..선생님께서 도와주시면....안될까요?"

선생은 사진을 한번 더 쳐다보더니 묻는다.
"중요한 겁니까?"
" 아마도... 그렇죠...하하하..."
"흠.  한번  해봅시다. 이런 경험도 좋은 경험이니까."
"앗. 정말요,  고맙습니다."

어쩐일인지 매일같이 나를 놀리던 선생이 저렇게 순순히 응할줄이야. 물론 좀전에도 놀렸지만.
어찌되었든 나는 선생님의 지도에 따라 사진속에 아이를 그려나갔다.
쉽지는 않았지만 곁에서 선생님께서 차근차근 잘 지도해주시고 그림은 2시간 반만에 완성되었다.
물론 완벽하게 잘 했다곤 할 수 없지만 아직 선연습만 하는 나에겐 굉장히 뿌듯한 일이었다.

선생님도 왠일이지 칭찬해 주셨다. 많이 좋아졌다고 다음주부터 데생 들어가자고 하시며
이래저래 기분이 좋았다.


나는 그림을 노트사이에 넣고는 가벼운 걸음으로 소녀의 사진관으로 향했다.
그림을 받으며 기뻐할 소녀를 생각하며,  한참을 걸어 사진관앞에 다다랐다.

문앞에서 그림을 꺼내 보았다.
기분이 좋았다.  내가 그린 그림을 보며 뿌듯해 하다니 나도 참 나르시즘이 있단말야. 헤헤.
한참을 그림을 바라보는데 왠지 이건 아니다 싶은 기분이 불현듯 들었다.  물론 잘그려진건 아니지만 이정도면
그 소녀에게 주기엔 손색이 없었다. 그럼에도 마음한구석이 개운치 않았다.
나는 사진관 문을 열려다 다시 발을 돌려 집으로 향했다. 그림은 노트에 다시 넣어둔체.




집으로 돌아와선 다시 책상에 앉아 사진과 그림을 놓고는 앉아있기를 벌써 2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시계를 보니 8시를 가리킨다.  저녁도 안먹고 오자마자 한것이라곤 뚫어져라 보기만 한것이 전부다.

"딩동, "
짧게 초인종이 울린다. 시준이 녀석이 퇴근을 한 모양이다.
번화가에 위치한 가게인데도 7시 칼 퇴근을 입사조건으로 건 시준은 출근을 일찍하는 대신 퇴근만은 꼭 맞춰달라고 부탁한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그걸 잘도 허락했다. 그가게. 다른사람은 적어도 11시에 퇴근할텐데. 녀석이 실력이 있긴 있는건가. 아님 그 깡이 맘에 들어서인가.  그건 아무도 모를 일이다.

나는  현관문을 열어주곤 반갑게 맞는다.

"아 추워, 내일 눈 내릴것 같아. 날도 흐리고 왜 이렇게 춥냐. 걸어오다 쓰러지는줄 알았네."
"오버쟁이."
"아, 근데 그림 그렸냐?"
"아...응."
"어디좀 봐봐. 궁금한데. 어디에 있냐?"
" 책상위에"

녀석은 즐거운듯이 책상에 놓인 그림을 본다.

"호오, 잘그렸는데. 제법이다."
"괜찮은거 같냐?"

"내가 보기엔 괜찮은데.  혼자 그렸어?"
"아니 선생님이 도와주셨어."
"그래,  잘했네."

시준이 좋다고 저렇게 말해주는데도 내 기분은 풀리질 않는다.
나는 시무룩하게 다시 책상에 앉았다.

"이거, 맘에 안들어."

옷을 갈아입던 시준이 고개를 돌려 쳐다본다.
"응? 맘에 안들어?"
"그래,  이그림 줄수가 없어."
"내가 보기엔 좋구만. 그냥 이걸로 줘. 어차피 내일 줘야하는거잖아. "
"맞아, 근데 이걸 받은 아이의 모습을 전혀 상상할수가 없어."

녀석이 편한 옷으로 갈아 입더니 의자를 땡겨 옆에 앉는다.
"흠, 그래?"
"정말,  그 아이 이렇게 그려주는걸 원하는 걸까. "
"너무 깊게 생각하는거 아냐, 단순히 그냥 그렇게 그려주길 원하는거 아닐까."
"아닌거 같아."


녀석이 다시 사진을 들어 오랫동안 바라본다.
"근데 이 남자 폐병같은거 앓았나. 눈주위가 너무 어둡네.  가만보니 웃고있는데도 힘이 안들어가있고."

나는 녀석이 보고 있는 사진을 보았다.
정말이다. 지금껏 아이만 신경쓰느냐 아이를 안고있는 남자는 눈에 보이지 않았는데 정말로 어딘가 아파보이는 남자였다.

"정말이네"
"그렇지.  애도 얼굴을 찡그리고 있지만 정말로 싫은 표정은 아닌데."
"...그렇네. "


이상한 기분이 든다. 사진은 얼핏보면 그냥 아버지는 웃고 아이는 찡그리는 평범한 사진같다고 생각했는데  자세히 보니 뭔가  슬픈 느낌의 사진이었다.
이 아이... ..그랬구나.


"나 다시 그릴래."
"정말?"
"다시 그릴래.  이제야 감이 잡혀."
" 훗, 다행이네. 열심히 그려줘."
녀석은 기분좋게 미소지어주곤  나간다.




한참을 그림을 그렸다.
몇번이나 다시 그리고 지우고 그리고를 반복했다.
창밖에는 벌써 칡흙같은 어둠이 깔려 보이는것은 가로등 불빛만이 반짝인다.
시준도 오늘은 혼자 잠이 들은 모양이다.

그런데도 그림은 완성되지 않았다.
나는 이제 막 완성될 듯한 그림을 보다가 다시 스케치북을 다음장으로 넘긴다.
방안에는 지우개질 소리와 연필이 종이에 스치는 약간 거친 소리만이 조용한 밤의 적막함을 깨우고 있었다.
열심히 하는데도 왠지 머리속에 가득한 이미지를 옮길 수 없다. 머리속에는 분명 어떤 그림이 떠오르는데 그걸 종이 옮길때면 전혀 다른것이 되어버리는 것이다. 내가 생각한것은 이런것이 아니다. 이런 이미지가 아니야.


한참을 그리다 갑자기 눈물이 났다.  답답하고 초조했다.
왈칵 눈물이 쏟아줘서 어찌할 수가 없었다.
스케치북 위에 한방울 두방울 눈물방울에 떨어져 작은 멍울을 만들어 갔다.


"성연.. 아.  아직도 그리니?"
녀석이 나의 울음소리에 잠이 깨었나보다.
내가 훌쩍거리고 있자 녀석이 놀라 일어나 내쪽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나는 녀석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체 울어버렸다.
한참을 어깨에 기대었다. 녀석은 조금 놀란듯 보였지만 아무말없이 등을 토닥여 주었다.

"마음대로 되질않았어. 분명 머리속에는 그리고 싶은게 있는데 마음대로 되질 않는거야, 흑.
답답하고 어째서  그려지질 않는지 분해서 너무나 속이 상해서 참을수가 없었어.  나 나름대로
열심히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머리속에서 떠오른 이미지는 선명하게 알고 있느데도 어찌할수가 없어서. 흑."

"그래서, 그리고 싶지 않아졌어? 그래?"
"아니, 그리고 싶어. 끝까지 그려내고 싶어.  그럼에도 속상해서 참을수가 없는걸."
"그리고 싶으면 됐어. 끝까지 해보고 싶은 마음만 있어도 너는 할 수 있어. 다만 지금 넌 니가 그려내고 싶은 이미지를 선명히 표현할수 없을 뿐 이잖아. 그렇지?"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무엇이든 같아, 자신의 생각을 자신의 머리속에서 꺼낸다는건 누구에게나 어려워.
글을 쓰든 그림으로 그리던 요리로 표현하던 하다못해 말로 표현한다고 하더라도 그걸 상대방에게
보여주기란 쉬운게 아냐,  머리속에 있는 생각을 느낌을 마음을 표현하는건 그건 자신의 일부를 상대에게 공유시  키는거야. 그러니 쉬울리가 없지.  천명의 사람이 있다고 해서 천명의 생각이 있는것은 아니지. 만개도 억개도 수 로 헤아릴수 없을 만큼의 생각이 있을수도 있어. 그 깊이도 가지 각색이고.  그러니 니가 그것을 표현하기가 힘들다고 해서 속상해 할 필요는 없는거야.  
나도 날마다 수많은 요리를 하지만 언제나 내 마음대로 되질 않는걸. 어느땐 정말 생각과는 다른것이  나와버리는걸. 하지만 사람들은 알고있어. 그걸 먹어본 사람은 알지.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를 얼마나 나의 생각을 표현해하고 싶었는지를 먹어본 사람은 알아.  다만 잘되었는지 덜 표현되었느냐의 차이일 뿐이야.  진심은 통해. 사소한 점하나로도 통하기 마련이야. 그러니 울지마, 그러니 속상해 하지마ㅡ  너는 충분히 노력하고 있으니까."

나는 술술 나오는 녀석의 말에 조금 위안을 받았다.  솔직히 많은 위안이 되었다.
나는 울음을 그치고 녀석을 보았다.

"너,  요리사말고 변호사해봐,ㅡ  청산유수네. 헤.."
"이제 다 울었냐. 울보. "

녀석이 머리를 쓰다듬어 준다. 뭔가 마음이 가벼워졌다. 녀석의 한마디는 수많은 나의 생각을 정리해 주었다.
시준은 주방으로 가 한참을 있더니 따뜻한 차를 가지고 왔다.

"고마워"
"옆에 있어줄까?"
"아니 이젠 할수 있어."
"그러다 또 울면 나 이젠 안 일어날 꺼야."
"바보, 이젠 안울꺼야.  한번이면 족해.  자기나 해."

녀석이 입맞춰 주곤 다시 잠자리에 든다.
나는 잠자리에 드는 녀석을 바라보곤 다시 연필을 잡았다. 다시금 그리기 시작했다.
이번엔 정말 그려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성연아, 일어나? 윤성연"
몸이 으슬으슬 춥다. 시준이 나를 흔들어 깨운다.
새벽녘까지 그림을 그려 결국 완성했다. 그리곤 이내 책상위에서 잠들어 버렸나 보다.

"왜 여기서 자. 어서 침대로 가서 자."
"지금 몇시야?"
"6시야."

녀석은 나를 안아 침대에 눕혀주었다.
"나 지금 출근해야 하니까. 저녁에 보자."
"응"

녀석은 설피 잠들어 가는 나를 보다가 책상으로 간다.
그리고 다시 내곁으로 와서 속삭였다.

"이제 만족하십니까.  고집쟁이ㅡ  
훌륭해,  이제 좀 편하겠구나. 그럼 이따보자. "

설피 잠든 나에게도 그말은 선명히 들려 기분좋게 미소지었다. 녀석도 작게 웃고는 볼에 키스하며 집을 나선다.
녀석이 나간 후 작게 말했다.

"고마워. 시준아"
녀석이 그말을 듣지 못했겠지만 ---






2시가 되어서야 일어났다.
피곤하긴 했나보다 그렇게 늦게까지 잘 줄이야.
나는 서둘러 준비하곤 그림을 챙겨 사진관으로 갔다.


문앞에는 마치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는듯 소녀가 앉아있었다.
나는 작게 웃으며 소녀에게로 달려갔다.


노트에서 그림을 꺼내 소녀에게 건내주었다.
소녀는 웃으며 기뻐했다. 한없이 기쁜 표정이어서 나도 기뻐했다.

"이거야,  이걸 원했지?"
소녀는 고개를 끄덕인다.

"고맙습니다.  이거라면 기뻐할거에요. 흣"
아이가 운다.


나는 몸을 숙여 아이의 눈물을 닦아 주었다.
"이 사진속에 사람에게 주고 싶었지?"
"응.  저희 아빠에요.  아빠에게 주고 싶었어."

"그럼 어서 아빠에게 갖다 드려야지. "
"저랑 같이 아빠한테 가실래요.  아마 아저씨를 고마워 할꺼에요. 같이 가요 ."

나는 작게 끄덕이곤 아이의 손을 잡고 아이가 가는대로 뒤따라 갔다.
한참을 걸어 도착한곳은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 아이는 나를 운동장 구석으로 인도했다.

나는 이해할수 없었다. 왠 학교에.

아이는 저기야 하는듯 손가락을 가리킨다.
손가락을 가리킨 곳에는 작은 무덤이 있었다.
마치 작은 동물을 묻은 듯한 무덤.

"여기에 아빠가 계셔?"
"응,  여기에 아빠가 계셔요."

아무리 보아도 작은 무덤일 뿐 사람이 묻힐만한 곳은 아니다.
"아버지가 작은 사람이구나."
나는 반농담으로 말을 건냈다.

"아니야, 우리 아빠 키도 컸어요. 이만큼."

아이는 까치발을  세우고 손을 있는 힘껏 올리며 말한다.
나는  무덤을 한번 더 쳐다보았다.

"그럼 아빠가 여기에 묻히신거야?"
"아니. 여기엔 아빠의 뼈가루가 묻혀있어."

"유골?"
"엄마가 그랬어요. 아빠는 이젠 살아있지 않다고요.
작은 가루가 되서 이젠 가고싶은곳에서 살고싶은곳에서 마음껏 살아갈 수 있으시다고."

아마도 아이의 어머니는 아이에게 유골을 설명하면서 저렇게 설명했나보다.

"그런데 내가 훔쳤어. 엄마 몰래 보자기를 풀고 뚜껑을 열어서 한움큼 훔쳤어요.
엄마가 이젠 아빠를 강에 뿌리면 다시는 만날 수 없다고 했어요. 이젠 볼수 없데.
그런데 나, 아빠가 보고 싶을 것 같아서 아주 조금 훔쳤어요. 그래서 이곳에 묻으면 매일 볼수 있으니까
여기에다 묻었어."

"엄마도 아시니?"
"아니, 엄만 몰라.  알면 엄마한테 혼날꺼야. 나만 아빠를 만난다고 혼낼꺼에요."

나는 순간 말문이 막혀왔다. 죽은 아버지의 유골을 자신의 학교 운동장에 묻는 아이의 조막만한 손을 생각하니 가슴이 저려왔다.
아이는 이내 작은 무덤옆에 땅을 파기 시작했다.  나는 가만히 그것을 지켜보다가 아이를 도와주었다.
조금 깊게 파진 땅에 아이는 사진과 그림을 넣고 묻기 시작했다. 나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다만 아이가 묻는것을 도와주었다.

아이는 흙을 차곡 차곡 덮어 손으로 꽉꽉 누른다.

"미안해요, 아빠 미안해요. 나 그때 아빠한테 밉다고한거 거짓말이야. 사실은 아빠가 좋아요.
그러니 이젠 나 미워하면 안되요,  내일부터는  새아빠한테로 가야해요. 다른곳으로 가야한다고 엄마가 말했어,
미안해요. 정말 미안해요. "

아이는 작게 말한다.
아이는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넉넉잡아 열두살이나 열한살쯤 보이는데 나라면 울었을텐데 아이는 너무나 담담하게 말하고 있었다. 마치 내가 아이인것 같이 느껴졌다.  


"아저씨 이젠 됐어요. 고맙습니다. 아빠가 좋아하실 꺼에요. 나 맨날 저 사진보면서
아빠가 미워할꺼라고 생각했어요.  맨날 아프셔서, 나 싫다고 했거든요,  할아버지 같은 아빠가 밉다고 말했어요.
사실은.. 정말은 아빠가 좋아요.   이젠 만날수 없다고 한 엄마가 미울 정도로 아빠가 좋아.
저사진하고 그림 같이 묻어줬으니 아마 아빠도 알꺼에요. 이젠 미워하지 않을꺼야. 그렇죠?"

나는 울컥하는 눈물을 감추고 작게 끄덕여 주었다.
내 무엇이 아버지에 대한 저 아이의 사랑보다 더한것이 있을까.  내가 얼마나 무덤덤하게 살아왔던가.


고개를 숙이고 무덤에 인사를 하곤 아이를 집에 데려다 주었다.  아이는 고맙다며 인사를 했다. 그리고 작게 손을 흔들어 주었다. 이제 내일이면 엄마를 따라 타지역으로 이사를 간다고 했다. 새아빠와 함께 살러 간다고. 아이는 작게 웃어주며 사진관 앞에서 아이의 모습이 작은 손가락 만할때까지 손을 흔들어 주었다.


내가 그려준 그림은 다른것이 아니었다. 다만 아이가 아버지쪽을 향해서 마주보고 웃고 있는 초상화를 그려주었다.  어찌보면 처음그린 그림보다도 별로인 그림일지도 모른다. 데생도 엉망이었고 구도도 부자연스러웠지만 아이의 눈만은 맑게 웃는 그림을 그려주고 싶었다. 아이는 사실은 그때 웃고싶었다고 생각했다. 초췌한 아버지의 품에 안겨 웃으며  안겨있고 싶었다고 생각했다.  
세상의 모든 가족이 서로를 사랑한다고는 말하지 않는다. 설령 미워하더라도 가족에게선 미워도 아무리 분하고 화나도 또는 가슴 아프게 하더라도 죽을때까지 떨어질 수 없다. 그것이 혈연의 끈이든 인연의 끈이든 혹은 다른 무엇이 있다고 해도 인간의 기본적이 감정으로는 가족을 표현할수 없다. 다만 그것을 때로는 사랑이라고 말하기도 하고  정이라고 말하지만  손을 잡을수 있는사람이라고 아이의 아버지도 나도 누구든.



이제 어두워진 아파트 입구에 들어서니 관리실 앞에 녀석이 서서 나에게 손을 흔든다.
"일찍 퇴근했네."
"응, 사실은 뻥좀 쳤어. 집에 아픈 사람이 있다고. 니가 걱정되서 일이 손에 잡혀야 말이지.
일은 잘 해결됐어?"
"응. 깔끔하게 해결됐어."
"잘 됐다, 오늘은 외식할까."


녀석이 나의 주머니에 손을  잡아 넣는다.
따뜻한 손.


"앗, 눈이다!  결국 오는구만.  그렇게  꾸물꾸물하더니 결국 오네. "
"눈도 뭔가를  묻어두었나 봐. 함박눈이다.  너도 뭔가 해결되었나 보구나."
"에? 눈한테 말거는거야?  아!  근데 왜 너한테 그려달라고 했던거야?"
"몰라, 그런게 뭐 중요해. 잘 해결되었으면 됐어."
"그런가?"

나는 피식하고 웃어주곤 녀석의 입술에 살짝 키스해주며 귀에 대고 작게 말해주었다.

"시준아, 사랑해."
녀석은  순간 놀란표정을 짓다가 이내 커다랗게 쑥쓰럽게 웃었다.

"이제야?  나는 이미 오래전에 사랑했다구. 바보야!"
녀석과 손을 잡고 함박눈을 맞으며 걷기 시작했다.




말할수 없다고해서 말하지 않았다고해서 슬퍼하지 말자.
내일이든 모레든  언젠가는  진심을 표현할테니 자신에게 믿음을 주자.
진심으로 사랑하고 있다고 마음은  언젠가는 자신에게서 나와 어느덧 나도 모르게 상대에게  갈테니
그러니 지금은 이렇게 웃으며 아껴두자.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1 20: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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