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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나가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가다

“이젠 잊지 그래? 그는 돌아오지 않아.”

내가 뱉은 말이 섬뜩할만큼 차가워 나는 정신을 차렸다. 다행히 이야기를 듣는 이는 거울 속의 나였다. 한숨을 쉬고 말라 붙은 거품을 닦아내고 새 거품을 발랐다. 면도를 하며 딴 생각에 빠지는 건 내 오랜 버릇이다. 좀 더 미숙하고 열정적인 시절엔 이 버릇 때문에 상처도 많이 냈지만 좀 더 영악하고 몸을 사리는 지금은 보통 면도기를 내려놓고 낮의 꿈을 꾼다. 다시 면도기를 집어들며 중얼거려 본다. 내가 그 아이에게 이런 이야기를 하는 꿈.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고 말하는 꿈.

꿈을 꾸기에 적당한 계절이다. 환기를 시키기 위해 창문을 열고 도시의 뜨거운 열기를 들이마셨다. 풍경은 볼 것이 없다. 반지하이기 때문에 3초만 바라봐도 넌더리가 날 정도로 이글거리는 아스팔트뿐이다. 하지만 열기만큼은 지지 않을만큼 풍성하다.

‘나는 이 계절이 좋아. 모두 흐믈흐믈 녹아버려 경계가 어딘지 모르게 뒤섞여 버리잖아. 왠지 내가 들어갈 틈도 있는 것 같아서… 그래서 좋은 지도 모르겠어. 딱딱하게 굳어버린 겨울은 딱 질색이야.’

그 아이의 말 한마디로 나는 내가 사랑하던 겨울을 버리고 여름을 사랑하게 되었다. 여름에 그들이 사랑했고 겨울에 그들이 헤어졌다는 사실을 기억해 내곤 씁쓸해지긴 했지만 상관없어. 그는 마지막 창문으로 구두 밑창이 녹아버릴 정도로 뜨거워진 보도를 내다보다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그는 돌아오지 않는 걸. 그가 약속했던 봄이 가고 여름이 오고 가을을 지나 겨울엔 전화도 편지도 끊어졌지. 그리고 다시 찬란한 봄이 오고 여름이 타오르고 있어도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네. 불면 날아갈 것 같은 여름 가요를 틀어 놓고 춤추 듯 테이블 사이를 휘젖고 다녔다.

“즐거워 보이네? 도와줄까?”
돌아보니 이제는 청년이 된 아이가 서 있었다.
“괜찮아. 왠일이야? 퇴근하긴 너무 이른 시간 아니야?”

아이는 웃고 외근하다 적당히 핑계를 대고 빠져 나왔다며 콜라를 꺼내마셨다. 아이의 옆모습은 그들이 만나 사랑하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가늘어졌다. 그 모습에 어쩐지 죄책감이 들어 내 늦은 점심을 권해보았다. 단 한 번을 제외하고 그가 내 제의를 받아들인 적은 없다. 그 한 번. 결정적인 한 번.

그 때 아이는 너무 배고파 보이는 얼굴이었다. 아이는 내가 혹시 하고 권해본 음식을 맛나게 먹고 이를 닦고 오더니 영업 중이었던 바 뒤에서 오랄을 해주었다.

‘그.. 걸… 그 걸 받았단 말이야?’
그가 물었다. 아이가 유혹해도 참을 수 있었던, 그래서 애인이 될 수 있었던 그. 그 놈.
‘너무 갑작스럽기도 했고… 정신도 없었고… 뭐 처음엔 말릴 생각이었지만. 이봐 나도 후회하고 있다고.’

뼈져리게… 져리다 못해 부러질만큼 후회했다. 내가 흐트러진 호흡을 가다듬는 사이 아이는 잽싸게 가게를 나가버렸고 쫓아 나가려는 순간 밀려있던 두 건인가의 주문이 들어왔다. 다음에 만났을 땐 그가 아이 곁에 있었다. 아이가 그를 보며 웃고 있었다.

“이제는 지나간 일이지만…”
“뭐가?”
“아니야. 딴 생각 좀 했어.”
“밥 먹다 말고 왠.”
“나는 아직 꿈꾸는 소년이란다.”

아이는 어이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해 보이곤 테이블을 닦아나갔다. 내가 점심인지 저녁인지 알 수 없는 식사를 마쳤을 때 그는 반쯤 끝냈던 청소를 끝내고 안주거리를 준비했다. 걷어 올린 하얀 셔츠 아래의 팔이 슬프도록 가늘다.

“밥. 정말 괜찮아? 너 지금 보기 안쓰러울 정도로 말랐다는 거 아냐?”
이런 말은 정말 하고 싶지 않다.
“안쓰러워? 그 정도인가… 나는 뭐 괜찮아. 요새 식욕도 없고. 더위 먹었나봐.”
“그래도 뭐 좀 먹어야지.”
“됐어요. 엄마. 나는 튼튼하네요.”
이렇게 끝날 것이라는 걸 알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어쩔 수 없다. 그에게 있어 나는 이런 역할이다.

‘나 어쩌면 그렇게 빨리는 못 들어올 지도 몰라.’
‘왜?’
‘들어오려면 돈이 좀 필요하잖아. 이 땅에서 직장 구하는 거 쉽지도 않으니까.’
‘영어 강사 같은 거 해. 수입 짭짤하던데.”
‘그건 그렇지만… 난 좀 안정적인 직업을 가지고 싶어. 하여간 그 동안 쟤 좀 돌봐줘.’

나는 그러마 했다. 내게도 나쁘지 않았다. 나는 그에게 했던 약속을 구실로 아이에게 내 도움을 받도록 강요할 수 있었다. 그러지 않아도 아이는 도움이 필요했지만 나는 아이가 내 도움을 받기를 원했다. 대학에 갓 들어간 사촌을 윽박질러 아이의 공부를 봐주게 하고 내 가게에서 일하도록 그 것 가지고 먹고 살 수 있도록 가게의 창고 방을 비워주고 아이와 함께 그가 돌아오기를-돌아오지 않기를 기다렸다. 아이의 곁에서. 언제라도 아이가 기다림에 지쳐 쓰러질 때 내가 받혀줄 수 있기를 기원하면서.

“음. 최소한 콜라 값보다는 더 한 것 같군. 맥주 한 캔 마신다.”

하지만 아이는 지치지 않았다. 대신 아이는 스스로 어른이 되어 갔다. 방세만큼 일하고 다른 아르바이트 두 개를 더 뛰면서 공부하더니 올해 초에 야간 전문대에 갔다. 입학과 동시에 학교 근처에 방을 얻어 나갔다. 이 가게에서 일하면서 만난 사업가의 사무실에 취직도 했다.

“니네 사장 아직도 찝쩍거리냐?”
“아니. 요샌 다른 애 쫓아다닌다던데. 그래서 이 직장도 위험해. 걘 좀 돈 있는 애라면 좋겠다.”

아이는 웃었다. 아이는 혼자서도 웃을 수 있는 어른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다는 사실쯤 오래전에 받아 들였을지도 모른다. 모르지만 모르지만 모르지만… 나는 아직 아이이기를 바란다. 아이가 상관하든 말든. 소망 한 가지쯤 가진다고 세상이 달라지는 건 아니지만 내 세상 정도는 바꿀 수 있다.

“아참 형. 어제 뉴스 봤어?”
“무슨 뉴스?”
“누군가 사이비 교단을 고발해서 관계자 구속… 긴급 수색시 최소 5구의 시체 발견.”
“아직도 그런 게 있나… 근데 아는 사람이라도 있어?”
“응. 몇 명.’
“누군데?”
“가까웠던 사람. 아마 나오긴 힘들 거야. 사람이 죽었으니까. 찾으면 시체는 더 나올 수도 있데.”
“흠… 너의 가까웠던 사람들은 어느 쪽이야?”
“어느 쪽이라니?”
“시체? 잡힌 쪽?”
“양쪽 다…”
“나는 잘 모르겠다. 워낙 종교랑은 거리가 먼 사람이라...”
“사실 나도 가까운 편은 아니지만… 하여간 그 일 굉장히 개운했어.”

아이는 악동 같은 미소를 지으며 맥주를 홀짝거렸다. 답답했다. 하지만 물을 수 없다. 그라면 물을 수 있겠지. 캐묻는 것도 가능할 지 모른다. 이미 알고 있을 지도 모른다. 그들은 같이 기뻐하고 슬퍼하고 싸우고 화낼 수 있다. 하지만 아이와 나는 그럴 수 없다. 나의 슬픔은 곧 아이를 향한 분노로 바뀌었고 나는 아이의 표정을 내게 익숙한 것으로 바꾼다. 그것은 쉽다.

“전화? 메일? 편지? 뭐든 왔어?”
슬그머니 상처 입히고 홀로 운다.
“아니… 아무 것도… 아 이제 손님 올 시간이네. 가볼께. 콜라랑 맥주 고마웠어.”
“아직이구나… 언제든지 목이 마르면 들려. 넌 언제나 그냥 놀러 올래. 안 그렇게 생겨선 독하다니깐.”

도움을 주고 필사적으로 갚고 아무 것도 남기지 않는다. 사과도 감사도 제로섬에 이를 때까지 반복한다. 알고 있다. 되돌릴 수 없다는 걸 잘 알고 있다. 아이가 마신 캔과 컵을 예전에 머물던 방 가득히 모아 봤자 아이는 내게 결코 입 맞추어 주지 않을 것이다. 그래도 나는 그것들을 모으고 아이는 모르는 척 그것들을 테이블 위에 남기고 간다.

게으른 알바생이 간신히 첫 손님이 들기 전에 도착하고 바쁜 하루가 시작된다. 많지도 적지도 않을 만큼. 적당한 날이다. 장사를 때려치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만큼 바쁘지도 장사를 그만둬야 하나 고민할만큼 한가하지도 않다.

그들은 술을 마시고 적당히 취한 척하며 서로를 탐색하고 가끔은 과감하게 패팅을 하다 화장실로 사라지거나 운이 좋으면 손을 붙들고 웃으며 나가기도 한다. 하지만 다음 날 가게에 오는 건 늘 둘 중 하나다. 둘이 와도 아는 척 하기란 열에 하나 둘 정도 될까. 지겹다. 아니 이제 그런 일에 어떤 감정을 느끼기엔 내 슬픔과 기다림이 너무 깊다. 상관하지 않기로 한다. 그들은 나름의 사정이 있고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다. 어쩌면 그들도 어딘가에 빈 깡통을 모으고 있을 지도 모른다.

“왔군”
나는 그의 이름이 쓰여진 위스키를 집어내리며 눈으로 인사한다. 아이의 회사 사장인 그는 퉁명스러운 표정으로 대꾸한다.
“오라며.”
“새로 다른 애 쫓아 다닌다며?”
“걔가 그래?”
“응. 제발 그 누군가는 돈이 좀 많았으면 하더군.”
“그래… 넌 돈 많냐?”
“네 밑에서 일할만큼 쪼들리지 않는다. 질투 작전은 이제 그만두는 거냐?”
“젠장. 그렇게 쉽게 말하지 마. 재수 없게시리.”

나는 빙글 웃으며 그의 퉁퉁 부은 뺨에 입맞춰 주고 돌아섰다. 가끔은 이런 귀여운 녀석이 있어서 좋다. 그는 얼굴을 붉히곤 투덜거리는 척한다.

“야 솔직히 그 삐쩍 꼴은 애가 뭐가 좋다고 그렇게 정성을 들이는 거냐? 응?”
노려보자, 그는 그만 울상이 되고 만다.
“그 얘기만 안 했으면 쯔쯔.”
서둘러 일어서는 녀석에게 중얼거렸다.
“적선받을 만큼 굶주리진 않았어.”
쏘아붙이는 녀석에게 나도 응대해 주었다.
“제수씨랑 인경이에게 안부 전해줘.”
녀석은 망연한 표정으로 휘적휘적 걸어 나간다. 다신 오나봐라 그가 중얼거리는 말은 못 들은 척 한다.

녀석은 올 것이다. 그가 돌아오지 않는 한, 아이가 포기하지 않는 한. 그는 계속 오게 될 것이다. 혼자만 이 지옥에 떨어지기 싫어 녀석을 끌어 들였고 그는 그의 가족을 끌어 들였다. 어디까지 이어져 있는 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생각하기 피곤해서 바에 앉아 내게 눈맞추려 애쓰는 남자를 꼬셨다.

보통은 이러지 않는다. 나는 내 자신에게 변명을 해 보았다. 아이의 캔과 컵과 아이가 썼던 작은 침대와 옷장 사이에서 처음 본, 내 타입도 아닌 남자의 엉덩이에 사정하며 하는 변명은 물론 내 자신에게도 통하지 않는다. 남자는 일이 언제 끝나냐고 묻고 나는 꺼지라고 대답한다. 남자는 욕을 하면서도 순순히 방을 나서고 계산은 하지 말라는 내 말엔 새초롬한 표정을 짓더니 한 잔 더 달라고 한 뒤, 사람들 사이로 섞여 들어간다. 다른 남자와 함께 계단을 오르는 그 엉덩이를 바라보다 눈을 비빈다. 피곤하다.

새벽. 내 작은 아파트로 돌아와 지친 몸을 누이고 그에게 전화를 건다.

“Can I speak Tony?”
“Oh, J, how are you?”
“Fine, how are you, and how is Tony?”
“I’m fine but he… wait a second, Tony! It’s J”

나는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 아이와 이야기를 했던 날이면 어김없이 그에게 전화를 한다.

“몸은 좀 어떠냐. 이 개자식아.”
전화선 너머 내가 본 적 없는 곳에서 그는 한숨을 쉰다.
“Fuck you J. 오늘 왔었냐?”
“그래 왔었다. 적선하는 셈치고 전화 한 번 해주지 그래?”
“이제와서 무슨. 뭐라디?”
“무슨 사이비 교단 어쩌구 하더라. 들은 바 있냐?”
“가족이 거기 있어. 그래서 그게 어떻게 됐는데?”

나는 그에게 아이의 이야기를 전한다. 그도 내게 아이의 이야기를 전한다. 오늘 알게 된 이야기는 놀랍다. 나는 아이에 대한 사랑이 깊어지는 걸 느낀다.

“병원에 간다더니 갔다 왔냐? 뭐래?”

그는 지지난 겨울 그가 나고 자란 뉴욕으로 돌아갔다. 직장을 구하고 돈을 모으고 놀아났다. 놀아나다 마약을 배웠다. 마약을 구하기 위해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과 잤다. 그 틈에 HIV바이러스를 얻었다. 그는 그 사실을 모른 체 계속 마약과 섹스가 넘치는 파티를 찾아 다녔다. 그는 선을 넘었다. 나쁜 건 그의 경과가 아주 나빴다는 것이고, 가장 나쁜 건 그가 아이가 너무 그리웠다고 변명하는 것이다.

‘너무 외로웠어. 돌아가고 싶었지만 발목 잡는 게 너무 많았어. 다시 돌이킬 수 있다고 믿었던 내가 어리석었어. 알고 있어. 하지만 하는 동안엔 그가 내 곁에 있는 것 같았어.’

아마 본격적으로 아프기 전엔 그는 아이를 떠올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아프고 나서야. 곁에 있어줄 수 있는 사람을 생각해 냈을 것이다. 그는 개자식이다. 그래도 그는 아이의 사랑을 받는다. 나는 그를 그리고 아이의 사랑을 용서할 수가 없다. 하지만 내 용서는 누구에게도 쓸모가 없다.

“이제 좀 죽지 그래? 죽을 땐 죽는다고 꼭 연락해라. 더 기다리게 하지 말고. 알았냐?”
“Dame you. 절대로 알리지 않을 거다. 돌아가지 않아도 너는 평생 그 자리야.”

우리는 서로를 저주하다 전화를 끊는다. 나의 피곤한 하루의 멋진 마무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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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게 무엇이냐고 물으신다면… 예에에에엣날에 썼던 ‘그가 떠나는 날’의 칙칙한 뒷담화;;;라고 대답하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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