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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uroasa
변명(부제: Normal Blood)


변명


  TV화면에 클로즈업 된 얼굴을 보면서 나는 어지러움을 느꼈다. 머리속에 뿌옇게 안개가 낀 것 마냥 정확한 판단을 할 수가 없었다.
  올해 초에 입사한 회사에서 퇴근한 후, 그럭저럭 10개월째를 넘기고 있다. 파김치가 되어 돌아와 느긋하게 식후를 즐기려고 켠 TV에는 잊지 못할 얼굴이 박수소리를 배경으로 송출되고 있는 것이다.
  설마, 라는 생각에 눈을 질끈 감고, 심호흡을 했다. 여전히 웃음소리와 박수소리는 들려오고 있지만 사람의 말이라고 생각되는 소리는 끝내 귀속을 후비지 못하고 있다.
  느닷없이 '군대'라는 단어가 나왔었기 때문이다. 힘이 잔뜩 들어간 눈꺼풀이 멋대로 열리더니 기어코 화면 속의 인물을 망막에 들이고 만다. 그 이후부터는 화면 속의 인물이 무슨 말을 했는지, 어떤 내용의 우스개 소리가 자막으로 지나갔는지 기억할 수 없었다. 귀가 소리를 듣기를 거부하고, 눈은 화면 속의 인물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었기 때문이다.
  머리 한 구석에서 회색의 빛이 떠오르더니 점차 뇌속을 지배하듯이 20대초반에 겪어야만 했었던 륙색의복의 인영들이 그려지기 시작했다.


  그 달 초에 상병으로 계급이 올라갔었기에 행동의 제약이 적어졌고, 저녁시간에 밥을 먹고 재빠르게 담배나 피워 물까라는 생각으로 내무반 뒷담벼락으로 걸어가고 있었다. 겨울초엽인데다가 산중에 위치한 장소탓에 날은 어느새 어둠에 잠식당해 있었고, 싸늘한 공기는 겨울임을 실감케 해주었다.
  이른 추위보다 간절한 담배생각에 담벼락이 보이자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꺼내 물고 담벼락 모퉁이를 돌자마자 라이터를 켜 불을 당겼다. 그 때 알아차려야 했었다. 두 인영이 지나치리 만치 마주보고 있었음을. 두 인영이 서로의 얼굴을 끌어안고 있었음을. 캄캄한 어둠 속에서 그 둘은 담뱃불을 눈치채지 못했는지 여전히 서로의 거리를 떨어뜨리지 않았다.
  연기는 계속 피어오르고 나는 두 인영의 윤곽에 계속 초점을 맞추고 있었다. 키가 커 보이는 인영은 나와 같은 날 일병을 달았던 서 준하였고, 조금 체구가 작은 인영은 제대를 두 달 앞둔 김병장이었다. 그 흔한 김병장.
  김병장은 나보다도, 그리고 서 준하보다도 연상이었다. 전체적으로 나약해 보이는 외모였고, 서 준하는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바로 군에 입대한 기가 드세 보이는 외모로 고교시절 꽤 놀았을 것이라고 짐작되는 분위기가 서려 있었다. 어쨌든 서 준하는 외모출중에 인기가 많은 스타일의 남자였다.
  여전히 두 인영은 입술을 맞댄 채였고, 나는 조용히 모퉁이를 돌아서 담뱃불을 땅바닥에 비벼 끄고, 꽁초를 손바닥안에 말아 쥐고 한 동안 서 있었다. 내 인기척도 알아차리지 못한 두 인영에 대한 배려라고 한다면 분명히 거짓말이었다.
  두 사람이 교환하는 타액의 축축한 소리가 내 두 다리를 떨게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아니, 솔직히 표현하자면 두 다리 사이에 있는 나의 그것이 반응을 나타냈기 때문이었다. 제3의 다리라고 경박스럽게 불리는 그 남성의 상징이 떨렸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은 요동치듯이 두근거렸고, 그 상징은 움찔움찔거리며 열을 발산하고 있었다.
  담벼락을 타고 넘어오는 소리는 변함이 없었고, 나는 까닭모를 흥분으로 미동도 하지 않은 채 모퉁이 바로 옆 담벼락에 기대 서 있었다.
  '응―, 준하야,'라는 신음성 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리고, 달아나듯이 세면장에 가서 얼굴에 물을 끼얹었다. 담배꽁초가 주먹안에 있었던 것을 깡그리 잊고서.
  하수구 속으로 빨려 들어가는 물소리가 타액이 넘어가던 소리를 연상시켜 황급히 수도꼭지를 잠갔지만 철제 꼭지에 달라붙은 갈색 담배진을 보고, 입을 다문 채로 비웃음 소리를 콧구멍으로 내뿜었다.
  내무반에서 취침점호를 하면서도 나는 소리가 새어나지 않도록 멈추지 않고 코로 비웃음을 흘렸다. 김병장과 서 준하를 바라볼 수 없는 초라해빠진 내 자신을 비하하면서 말이다.
  김병장이 제대를 앞둔 두 달 동안 나는 종종 그들의 키스행각을 같은 장소에서 목격했고, 그럴 때마다 내 자신이 남자임을 주장하는 남성의 상징은 매번 당연하다는 듯이 떨렸었다. '응―준하야,'라는 비음성 신음은 여전했지만, 나는 한번도 그에 대한 대꾸를 듣지는 못했었다.
  
  제대를 앞둔 김병장의 휴가기간에 서 준하는 한 번의 외출을 했고, 곧 복귀한 김병장은 한 겨울에 제대를 했다. 휴가를 마치고 복귀한 김병장이 왜 두 번 다시 그 담벼락을 찾지 않았는지 나는 궁금해했다. 하지만 김병장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그런 사소한 궁금증 따위는 금새 사그라 들었고, 서 준하는 아랑곳없이 대한민국 군인의 임무를 묵묵히 수행해 나갈 뿐이었다.

  그리고 나도 서서히 그 담벼락의 추억을 잊게 되었다.

  늦은 봄에 나의 계급은 한 단계 올라갔고, 서 준하도 상병을 달았다. 제대한 사람의 빈자리는 신병들로 채워졌고, 이렇다 할 큰 사건없이 군생활은 군인들의 으레적인 훈련으로 지나가고 있었다. 가을 군기증강(?)의 일환으로 개최된 체육대회에서 서 준하가 내 남성을 스치듯이 건드렸던 사건을 제외한다면.
  평균신장이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소속 내무반 농구팀에서 경기를 하게 되었고, 체력조건이 우월한 서 준하는 자연스럽게 그 팀의 일원이 되었다. 후반 5분을 남겨놓고 맹렬히 드리블을 하던 서 준하는 내게 공을 넘겨준다는 식으로 내 곁을 빠르게 지나갔는데, 그의 의도를 모르고 쭉 펴고 있던 상체가 구부려 있던 서 준하의 상체와 높이가 비슷했고, 공을 넘기던 그 짧은 찰나의 순간 그의 손끝이 나의 중심을 스쳤던 것이다.
  그 때까지 운동으로 긴장한 모든 근육이 마취에서 풀려나듯이 이완됐고, 머리속이 심장의 박동으로 울리기 시작했다. 나의 움직임이 둔해지는 것은 뻔한 결과였고, 결국 나는 경기종료 3분을 남겨 놓고 교체되었다. 나의 실수로 상대 내무반에게 4점의 스코어를 올려주고.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으며 내무반의 진영으로 터덜터덜 걸어갔다. 나의 실점으로 동점이 되어 있었던 스코어는 우리팀의 대들보 역할을 맡은 서 준하의 활약으로 우승을 차지했다. 경기종료의 휘슬과 함께 터진 함성과 서로 부둥켜안는 그들을 피해 조용히 뒤로 물러설 수밖에 없었다. 서 준하와 감격의 포옹을 하고 있는 이병장의 모습이 그 날 밤의 두 인영과 오버랩이 되었기 때문이었다.
  입대 후 처음으로 몽정한 밤의 기억이 제대를 세 달 앞두고 기억속을 파고들었고, 기어이 나는 경기가 끝난 그 밤 귓가를 울리는 함성소리를 무시하지 못하고 어설픈 자위를 했다.

  서 준하와 김병장의 키스장면을 목격한지 정확히 일 년이 되던 날, 나는 저녁을 먹고 그 담벼락을 찾았다. 버릇처럼 담배나 펴볼 요랑이었지만, 먼저 와서 그 장소를 차지하고 있던 인물을 보고 숨을 들이키며 입에 문 담배를 땅에 떨어뜨렸다.
  얼굴표정은 어둠 때문에 확인할 수 없었지만, 그 인영은 틀림없는 서 준하였다. 꽁초가 될 때까지 담배를 빨아들였는지 담뱃불이 입술과 가까운 곳에서 발하고 있었다. 담배를 바닥에 비벼 끈 서 준하는 미동도 하지 못하는 나에게 다가와 담배를 후우―하고 내뱉으며, '당신도 하고 싶은 거야?'라는 의미불명의 말을 귓가에 음산하게 주절거리고는 담벼락 모퉁이를 돌아 모습을 감추었다.
  호흡조차 정지되었을거라 생각했는데 의외의 곳이 반응을 했다. 가라앉은 음산한 읊조림. 서 준하의 음성은 내 상징을 두근거리게 만들었던 것이다.

  한 달 후면 제대를 한다. 그 날밤 이후로 나는 담배에 손을 대지 않았고, 당연한 귀결로서 그 담벼락을 찾지도 않았다. 서 준하가 무서웠다. 그에게 발정한 내 모습을 들켜버린 서 준하가 무서웠고, 내 자신에게 두려움을 느꼈다. 빨갛게 달아오른 공덩이가 심장뒤에 숨어서 기회를 엿보며 튀어나올까봐 서 준하와 마주치지 않기 위해 갖은 애를 써야만 했었다.
  가끔 구멍이 날 정도로 내 얼굴을 주시하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되려 모른 척하고 손에 잡힌 일에 몰두하는 시늉을 했었다.
  제대를 앞둔 마지막 휴가에서 나는 부대와는 멀리 떨어진 장소로 단기간의 여행을 했고, 그 곳에서 우연치 않게 고교동창을 만나 회포까지 풀었다. 복학신청이야 어차피 봄에 해야지, 하는 생각에 제대 후 아르바이트할 장소를 물색했고, 집에서 가까운 고기집에서 일하기로 결정까지 되었다.

  제대신고를 하고 부랴부랴 도망치듯이 부대와의 거리를 물리적으로, 그리고 심리적으로 멀리하기 위해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으로 향했다.
  
  이듬해 봄 대학에 복학을 하고, 여섯 학기를 보내면서 미친 듯이 공부에 파고들었고, 떳떳한 성적 덕택에 이름 좋은 회사에 입사할 수 있었다.

  오랜시간동안 잊고 있었던 사실이 봇물처럼 터져나왔고, 무의식적으로 흘려들었던 TV방영 중, 서 준하의 말이 느닷없이 귓가를 후비며 외쳐대고 있었다.

  '민 수진이라는 사람을 참 좋아했어요.'

  테이블 위에 놓아 둔 핸드폰이 울렸고, 기계적으로 플립을 열어 귓가에 갖다 댔다. 말소리는 분명한데 의미를 도무지 파악할 수가 없었다.

"어이, 민 수진, 듣고 있는 거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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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년전에 올렸었던 글인데,
다시 올립니다.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9-03 1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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