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완결방입니다. 누구나 글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83   1/  6   0
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하리     http://www.cyworld.com/hari_k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by  하리



사람의 오감은 그 다섯 가지가 적절하게 조화를 이루어야
제대로 된 기능을 한다고 한다.
일예로 눈을 가린 상태에서 서로 다른 종류의 음료수를 맛보게 했을 때
그것들을 제대로 구분해내기 어려우며, 또 다른 종류의 향을 맡게 했을 때
역시 제대로 구분하기 어렵다고 한다.
즉, 오감 중에 보는 것만큼 중요한 기능은 없다는 말이고, 그 ‘본다’라는
기능이 제 역할을 하지 못하면 나머지 기능에도 문제가 생기는 것이겠지.
그러니까 눈을 감아버리면 보이지 않으니 듣는 기능을 하는 귀 역시
제대로 기능을 하지 못해야 하는 거 아닌가.

난 듣지 않기 위해 귀를 막는 대신 눈을 감는다.
그리고 보지 않기 위해서도 눈을 감는다.

나 역시 남들과 다른 것이 없는 평범한 인간이고 그렇다면 본다는 것의
기능은 나에게도 다른 그들과 같이 적용되어질 것이라고 기대하면서 난
눈을 감는다.

지금 내 귀에 들리는 소리는 현관에서 들려오는 소리.
부스럭거리며 서둘러 신발을 신고 있는 소리인 듯도 하고 아닌 듯도 하고.
분명히 난 눈을 감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보이지 않는 행위로 인해 들려오는
모든 소리를 머리 속에서 분석하고 그것을 그려내고 있는 것이다.

그가 신발을 신는 행위. 늘 보아 익숙했던 그 행위가 보이지 않음에도
고스란히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다.
항상 구두주걱이 준비되어 있음에도 습관처럼 허리를 깊이 구부리고는
검지를 이용해서 구두를 신고 있을 그의 모습이 머리 속에 그려지고 있다.
또 구부린 허리로 인해서 연한 갈색을 띤 그의 앞머리가 아래로 흘러내린 모습까지.
한 손을 벽에 혹은 주변 가구 따위에 의지한 상태로 검지를 이용해서 신을
신는 그의 모습은 너무나 익숙한 그림으로 내 뇌리 속에 각인 되어버린 모양이다.
일부러 돌려놓지 않는다면 어디든 항상 들어 온 방향으로 가지런히 신을 벗어 두는
그이니까 아마도 그는 지금 현관 앞 신발장에 왼손을 의지한 모습으로 허리를
구부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는 평소와는 달리 구겨진 양복상의와 반쯤 풀려있는 단정치 못한 넥타이 차림...

난 눈을 더 꼭 감아본다.
마치 그리 하면 더 이상 머리 속에 그의 모습이 그려지지 않을 것처럼.
하지만 소용없는 일. 부스럭거리는 소리가 끝날 때까지 내 머리 속에선
소리를 따라 고스란히 그의 모습이 뇌리 속에 그려지고 있다.

곧이어 늘 부담스럽게 느껴지는 무거운 철문이 열렸다 닫히는 소리가 들린다.
아닌데. 이건 아닌데...
눈을 감고 있으니 저 소리의 의미가 무엇인지 깨닫지 못해야 하는데.
지금 내 머릿속에는 구부정하게 어깨를 늘어뜨린 채 등 뒤로 문을 닫는
그의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아까와는 달리 기억 속에 남아있는 것과는 너무도 다른 모습이 그려지고 있다.
문이 닫히기 전 항상 돌아서서 문가에 서 있는 나를 향해 환하게 웃어 주던
그 모습이 아니라 힘없이 어깨를 늘어트린 채 걸어가고 있는 모습이.

멀어지는 발걸음 소리.
눈을 감고 있음에도 들려오는 발소리까지 차단되진 않는다.
저벅거리는 그 소리는 평소와 다른 소리.
내일을 기약하던 그 소리가 아닌 힘없는 소리.

앉아 있는 침실의 창은 골목 어귀 쪽으로 나있다.
아직은 한낮의 태양이 뜨거운 8월. 열려진 창가로 불어 들어오는 잔바람을 따라
골목어귀를 돌아나가는 그의 발걸음 소리가 들려온다.
한 걸음. 두 걸음.
보이지 않는 그의 걸음을 나는 세어 보고 있다.
눈을 감고 보지 않으려했던 그의 뒷모습을 나는 보고 있다.
그가 올 때면 이렇게 그의 발걸음 소리를 세던 것을 기억한다.
한 걸음 더 가까워지고, 두 걸음 더 가까워지고
그렇게 우리 사이에 놓여있던 거리는 좁혀지는 거라고 애써 생각하면서.
하지만 지금 내가 세고 있는 그의 걸음은 좁혀지지 못했던 우리의 거리를
더 멀게 만드는 걸음.
영영...... 그렇게 가서 돌아오지 않을 편도행.

움찔거리는 나의 얇은 눈꺼풀 위로 햇살이 스쳐지나 간다.
저만치 멀어져가던 그의 발걸음 소리가 이젠 들리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정말 가버린 걸까.
두 눈을 꼭 감고 있었기 때문에 착각을 하고 있는 것이 아닐까?
다른 소리를, 다른 사람의 발걸음 소리를 그의 소리로 착각하고 있었을까?
오감의 으뜸은 보는 것이고 다섯 가지가 모두 조화되어야 제 기능을 하는 거라는데
난 보지 않았다.
그가 신을 신고 저 현관 밖으로 나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다.
떠나지 않겠다고 소리치던 그의 얼굴을 난 보지 않았다.
침실바닥에 주저앉아버린 내 앞에 무릎을 꿇었던 그의 얼굴을
그때 그의 표정을 난 외면하고 보지 않았다.
울다 울다 쉬어버린 목소리로 사랑한다고 사정을 하던 그의 얼굴을
난 보지 않았다.
눈을 감고 외면하는 나에게 험악하게 소리 지르던 그의 모습을
난 보지 않았다.
무엇도 보지 않았다.
눈으로 무엇도 보지 않은 나의 귀에 들려온 그 모든 소리는,
그건 정말 그의 소리였을까?
눈을 뜨면 그는 여전히 내 앞에 있을 것 같다.
보지 않았으니까. 난 그가 가는 모습을 보지 않았으니까.
어쩌면 그는 아직도 내 앞에 있을지 모른다.

하지만 난 눈을 뜨기 두려워서, 너무나 두려워서 뜨지 않는다.
그가 없는 것도, 여전히 내 앞에 있는 것도 모두 두려워서.
감당할 수 없는 현실이 두려워서.
부서져 내리는 내 누이가 아파서.
나로 또 내 누이로 눈물 흘리실 어머니가 너무 아파서.
세상과 나 사이에서 방황해야할 그가 너무 아파서.
무엇보다 모두 가질 수 없어 증오하게 될 내가 너무, 너무 아파서.
우리 모두가 너무 아파서 난 두렵다.

창가로 파고드는 잔바람은 어느 새 가을바람이다.
언제나 여름의 끝은 이렇게 나의 두 눈을 감게 만든다.
나로 인해 딸을 외면해야 했던 어머니의 눈물을 보던 것도 여름의 끝.
그가 내 누이에게 가는 것을 그저 지켜보아야했던 것도 여름의 끝.
어리고 고왔던 간난 조카가 재로 뿌려지는 것을 보았던 것도 여름의 끝.
그리고 그의 지친 발걸음 소리를 마지막으로 듣는 것도 여름의 끝.
매번 여름의 끝은 나의 두 눈을 뜰 수 없게 만든다.
귀한 오감 중 하나를 포기하게 만든다.
눈을 감고, 아무 것도 보지 않고......

창 너머 골목을 지나가는 여러 가지 소리들.
그 어떤 소리 속에도 그의 발자국 소리는 들어있지 않다.
눈을 떠야 할까.
예전에 그랬듯이 또 난 눈을 뜨고 모든 것이 사라져버린 공간에
외톨이로 남겨진 나를 확인해야 할까.
오후의 낮은 햇살이 내 눈가를 지나, 어깨를 지나, 손끝을 지나...
서쪽 어딘가로 달려 가버린다.
보지 않음에도 느껴진다.
해가 떠나가는 것이 느껴진다.
골목 어귀를 돌아 나가는 그의 발자국 소리.
한 발자국 한 발자국 멀어지던 그의 발소리.
무거운 현관문이 닫히던 소리.
어눌하게 신발을 갖춰 신던 작은 소리들.
차라리 죽어버리라고 혼자가 싫으면 같이 죽어버리자고
악을 쓰던 그의 목소리.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사랑한다고 애원하던 그의 목소리.
그의 소리.
보이지 않아 그저 귀로만 들었던 그의 소리.
안녕이라고 말한 마지막 그의 목소리.
눈을 감아도 들려오던 그의 목소리.
서쪽 어딘가로 달아나버리는 저 햇살처럼
보지 않아도 느껴져서 알 수 있듯이......
보이지 않은 그의 소리는 현실.

하지만 난 보지 않는다.
내겐 보이지 않는다.
눈을 감은 나는 볼 수가 없다.
뜰 수 없는 내 두 눈꺼풀을 가르고 흘러내리는 눈물의 맛은 쓴맛.

두 눈을 감으면 세상은 보이지 않는다.
잃어버린 것도, 내가 버린 것도 보이지 않는다.
감겨진 두 눈을 뜨지 않는다면 보지 않고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난 두 눈을 감는다.
눈을 감으면 그가 없는 이 빈 공간이 보이지 않는다.
오직 내 기억 속에 남아있는 사랑했던 그때가 보일 뿐이다.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
참 칙칙한 분위기의 글입니다만......나름대로 축설입니다.
바빌론 재개장을 자축하는.. 하하하;;;;;ㅜ_ㅜ
죄송해요.  이런 어두운 글을 올려서.
개그불가, 삽질전문인 인간의 한계입니다.
그냥 올려 놓고 휘리릭~~ 사라집니다.





 
 83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가다    2004/09/13   2159 
 82
  難治病
▩멜리사    2004/09/02   1750 
 81
  변명(부제: Normal Blood)
kuroasa    2004/08/30   1655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하리    2004/09/01   1553 
 79
  2002년 겨울 이벤트 : Kiss
멜리사    2004/08/31   4353 
 78
  2002년 겨울 이벤트 : 기다림의 마침표를 찍다
atlantis    2004/08/23   2617 
 77
  2002년 겨울 이벤트 : 너는, 기다림
앤쏘    2004/08/23   1220 
 76
  2002년 겨울 이벤트 : 미련한 결정
엘루네드    2004/08/23   1391 
 75
  2002년 겨울 이벤트 : 미소짓는 언젠가
엘리카    2004/08/23   1290 
 74
  2002년 겨울 이벤트 : 눈 오는 날 [1]
ijen    2004/08/23   1799 
 73
  2002년 겨울 이벤트 : In other words… I love you
ijen    2004/08/23   2188 
 72
  2002년 겨울 이벤트 : 세월 - 함께 살아가기
하리    2004/08/22   1287 
 71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하)
하리    2004/08/21   1655 
 70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상)
하리    2004/08/21   1451 
 69
   [12]
ijen    2003/11/26   17254 
 
  1 [2][3][4][5][6]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Ch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