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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쏘
2002년 겨울 이벤트 : 너는, 기다림


Babylone 겨울이벤트


너는, 기다림.


by  andso


1

마음은,
차가운 겨울바람에 칼날처럼 서 있었다.

12월 25일.
크리스마스의 들뜬 분위기가 호림에겐 달갑지 않았다.
어째서 모두들,
누군가를.
저렇듯 행복하게 바라보고 있을까.
혼자서 길을 지나는 사람도 곧 소중한 사람을 만날 것처럼 보여져, 호림은 잠시 눈을 질끈 감아 떴다.
잠시잠깐의 기척.
휘휘, 고개를 돌려 차가운 겨울거리를 둘러보았으나 넘치는 인파와 크리스마스의 분위기외에 다른 것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지나는 사람들.
저들은 친구같고, 또 저들은 가족같고, 또 저들은 직장동료쯤이라도 될까.
손을 마주잡고, 다정스레 팔짱을 하고, 누군가의 어깨를 소중한 듯 감싼 저들은,
아마도 연인이겠지.
호림은 순간 저려오는 가슴에 입고 있는 더플코트의 깃을 그러모았다.
벌써 추위는 아랑곳없이 몇 시간째 이 곳에 서있었는지, 짐작조차 할 수 없을만큼 호림의 손가락은 곱아있었다.
빨갛게 얼어버린 손.
호림의 시선이 자신의 손에 머물러, 작은 한숨을 몰아 쉬었다.
어찌된 일인지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호림은 한 손에만 투박한 장갑을 끼고 있을 뿐이었다.
나머지 한 손은 한겨울의 추위에 무방비의 상태로 호림의 마음을 뒤흔들었을까.
호림의 눈동자가 잠시 아련해졌다.

추억.
그 눈동자는 추억을 담아내고 있었다.
흐르듯,
재생되는 추억.

짧지만 깊은 흔들림.

하지만 호림의 표정은 굳어져 나는 추억하고 싶었던 게 아냐, 하고 말하는 듯 차가워졌다.
호림의 숨이 하얀 입김으로 피어올라 자신의 언 손에 닿아 따뜻함이 삽시간으로 사라졌고,
차가운 손은 이미 따뜻해질 시기를 놓쳐버린 듯 했다.
그러나 호림은 여전히 자신의 손을 무방비의 상태를 놓아둔 채,
나직이 누군가의 이름을 불렀다.

"연오야..."

기억되어, 되뇌어지는 이름.
호림의 한숨이 다시 한번 하얗게 피어오르고,
마치 누군가 그랬던 것처럼 호림은 자신의 손을 포개어 마주잡았다.
마주잡아오던 손,
리와인드되는 테잎처럼 저절로 돌아간 3년 전의 기억.
또는 이제는 명백한 추억, 일까.
후-, 내뱉는 호림의 숨이 투명하기만 했다.


2

3년 전의 크리스마스.
그때는 지금처럼 혼자 이 거리에 서있지 않았었다.
지나는 사람들 모두 행복해 보였으나 지금처럼 외롭지 않았었다.
간사한 사람의 마음.
똑같은 풍경에 호림의 마음은 이다지도 다르다.

연오,
언제나 깊게 다가오는 이름.

호림이 그 이름을 기다려 온 지도 벌써 3년이다.
그러나 연오가 그 예전의 약속을 아직 기억하고 있을까,
호림의 마음은 잔물결이 이는 수면처럼 조용히 흔들리고 있었으나 어디선가
"기다려."
라며 연오가 흔들리는 호림의 마음을 붙잡아 주는 듯도 했다.

그래,
너라면 올거야.

훅-, 하고 지나가는 차가운 겨울바람에도 확신에 찬 듯 호림의 발은 떨어지지 않았다.

기다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다.
단지 호림의 안타까운 마음은 기다림보다는 그리움.
스쳐 지나는 이들의 행복마저 보아 줄 수 없게된 자신의 마음.

"연오야..."

지금 호림을 잡아주는 건 되뇌이는 그 이름뿐이다.



처음 그 이름을 들었을 때도 그랬었다.
싱그럽게 웃으며, 손을 내밀며,

"나는 이연오."

라고 눈부시게 말했었다.

그래서 호림에게 깊은 뿌리가 되어버린 이름이었다.

머뭇거리는 호림에게,

"너는 진호림이지?"

라며 부드럽게 물어온 것도 같다.
아아, 그리고 좋은 이름이야, 라며 다시 웃었었던가.
그 누군가를 만났던 평범한 일상이 상냥함으로 가득 채워져 반짝반짝거렸었다.
'연오'라는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도 그랬었다.
추위를 많이 타는 호림이 올이 두툼한 목폴라를 입고, 따뜻해 보이는 코트를 입고, 그 위에 목도리를 하고서도 추운 날씨였다.
그런 한겨울의 중심에 '연오'라는 이름이 따뜻했었다, 부드러웠고, 밝았었다.


후에 겨우 사귀게 되었을 무렵,
호림이 그런 이야기를 하자 연오는 쿡쿡 웃으며 말했었다.

"무슨 소리야.  그때의 너야말로 북실북실한 강아지같았다고."

그 말을 들은 호림이 금세 부루퉁해지며,

"뭐야, 그럼 따뜻해보여서 말걸었던 거야?"

라고 시큰둥하게 대꾸하자 연오가 웃음을 멈추고 말했었다.

"아니.  그런데도 추워보여서."

연오의 그 말이 호림에게는,
'그래서 따뜻하게 안아주고 싶었어.'
라고 들린 것 같아 울었었다.

연오가 갑작스레 우는 호림때문에 당황하며 왜 울어, 라며 다정스레 말했을 때,
호림은 솔직하게 기뻐할 수가 없어서,

"추워서."

라고 울먹이며 말했었다.

추운 겨울이었고, 길거리를 지나면서였다.
그러자 갑자기 발길을 우뚝 멈춘 연오가 호림의 손을 잡고 불쑥 들어간 곳은 크리스마스 장식을 한껏 해둔 팬시점이었다.
입을 다문 채로, 여전히 호림의 손을 꼭 잡고서, 겨울답게 팬시점에 죽 진열되어 있는 목도리며, 모자며, 장갑이 있는 곳으로 호림을 데리고 갔었다.
그리고는 투박한 털장갑을 하나 골라 나와, 계산을 하고 장갑을 호림의 한 손에 끼워줬었다.
호림이 뜬금없는 연오의 행동에 겨우 울음을 멈추고,

"나머지 하나는?"

이라며 연오에게 물었을 때 그제야 입을 연 연오가 말했었다.

"나머지 한 손이라면 내가 잡아주면 되니까."

그 말이 한 손에 끼워진 장갑보다 더 따뜻했었다.
맞잡아오던 손의 온기가 더 없이 가슴에 와닿았었다.

그래서 연오가,

"추우면 언제든 내가 손잡아 줄테니까, 울지 말아."

라고 말했을 때 호림은 다시 한번 울었었다.
그리고 가만히 손을 꽉 쥐어 오던 연오에게,

"응. 그럼 이 다음 크리스마스에 꼭 다시 한번 손잡고 같이 걸어 줘."

라며 어린애처럼 굴었었다.
그리고 맑게 웃는 연오에게 말했었다.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

그저 조용히 웃어주던 연오의 얼굴과, 따뜻한 손의 온기와,  
그 까칠까칠했던 털장갑 특유의 감촉이 아직도 호림의 손에 남아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그 크리스마스 이후 3년이 지났다.
추억은 늘상 따뜻하지만, 추억이 사라진 현실은 차가웠다.
말없이 지나간 세 번의 크리스마스에 연오는 한번도 호림의 손을 잡아 주지 않았다.


3

누군가의 둔탁한 손이 호림의 어깨에 와닿은건,
따뜻했던 크리스마스,
한겨울의 날씨마저 상관없이 서로가 온기가 되었던 순간이 이제 다시 돌아오지 않을까,
두려운 마음을 털어 내듯 호림이 다시 한번 연오의 이름을 중얼거렸을 때였다.
그러나 혹여 호림이 찰나의 기대라도 할까,
곧이어 들려온 목소리는 연오의 목소리가 아니었다.

"호림아."

라며,
어딘가 연오와 많이 닮았지만 좀 더 가늘고 떨리는 목소리로 자신의 이름이 불리워 졌을 때,
그제서야 호림은 자신을 부른 사람이 누구인지 알아보았다.

그래, 이 사람이 있었다.
언제나 자신의 동생을 다정하게 보듬었던 사람.
그 사랑을 동생의 연인인 호림에게도 편견없이 보여줬던 사람.
그러나 호림이 채 대답도 하기전,
추위에 굳어버린 얼굴로,

"이제 돌아가."

그 다정했던 사람이 말했다.
차갑고 단단하게 내뱉어지는 말.

"누나, 연화누나."

그러나 호림의 얼어버린 입에서 겨우 비어져 나온 대답에 연화의 표정은 더욱 굳어져,

"돌아가."

메아리처럼 똑같은 말이 되풀이되었다.

"돌아갈 수 없어요."

그러나 호림의 마음은 이미 이 거리에 붙박혀 움직일 줄 몰랐다.
연화도 알고 있는 일이었다.
아마도 호림은 연오가 오지 않는다면 이 크리스마스가 다 가도록 여기 서있을 것이다.
알고있기에, 연화는 더 차갑게 굴 수 밖에 없었다.

"돌아가라잖아.
연오는 오지 않아."

연화의 그 목소리는 차가웠지만, 어쩐지 슬펐다.
그러나 알고 있어도 어쩔 수 없는 일이 있다.

"그럴거라고 생각해요.
벌써 크리스마스는 세 번이나 지나갔으니까."

내내 혼자였으니까.

호림의 말이 체념한 듯 여겨지면서도,
절대 돌아갈 수 없다는 듯 들려 연화는 그만 소리치고 말았다.

"알잖아!
연오는 없어!
너를 버리고, 나 또한 내버려두고 가버렸어.
네말처럼 삼년이나 지났다고!"

이제 그만 잊어버려.
연화의 눈은 그렇게 말하고 있었다.
호림아, 제발 이제 그만둬.
연화의 속으로 삼켜지는 말이 호림에게는 누구보다도 잘 들렸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설령 연오가 다시 돌아올 수 없다고 해도 호림에게는 아직 약속이 있었다.
약속은, 호림의 마음 속에 굳어져 깊은 뿌리가 되어 아무리 잘라내도 싹이 되어 남았다.

"누나,
괜찮아요.
나, 아직은 기다릴 수 있어.
그리고 누나도, 잊지 마요."

무엇을 잊지 말라는 건가.
자신의 동생은 삼년 전 크리스마스에 이미 떠났다.
눈 앞에 애달프게 서 있는 호림을 만나고 돌아오다 일어난 사고였다.
그렇게 온 세상이 누군가의 탄생을 축하하는 날,
말없이 떠났었다.
자신의 가슴에 멍을 남기고,
저렇듯 춥게 서 있는 호림을 남겨두고.

"제발, 알잖아.
기다릴 수 없는 사람이란거.
호림아."

호림아, 라고 부르는 연화의 말에 연오를 잃은 아픔이 흘러넘쳐 안타까웠다.
그래도 호림은 움직이지 않았다.
말없이.
차가운 겨울거리에.
올 수 없는 사람을 그저 기다렸다.

그런 호림에게 연화는 더 이상 돌아가라고 말하고 싶지 않았다.
그래, 네가 그렇다면 잊지 말자.
추억은 때때로 가슴아파서 울고 말지만 아파도 잊는 것보단 나으리라.
연화의 마음이 연오에 대한 그리움으로 먹먹해져 갈 때쯤,
호림이 입을 열어 조용히 말하기 시작했다.

"누나.
나, 연오와 약속한게 있어요.
그걸 지키고 싶어."

흔들림없이, 굳은 믿음이 되어 말이 되었다.

"그래."

연화는 그 약속이 무엇인지 물어보지 않았다.
그저 알고 있다는 듯 짤막히 대답했을 따름이었다.
비록 연오가 올 수 없다 해도, 호림이 기다린다면 언젠가는 지켜지리라.
그런 생각이 연화의 가슴을 돌아나올 때,
이제 괜찮다, 라고 느꼈다.
무엇하나 달라진 것 없이 여전히 연오는 돌아올 수 없는대도 굳게 기다리고 있는 호림을 보고 있자니,
이제 괜찮다, 라고 밖에 달리 생각할 수가 없었다.

연화의 마음에 주문처럼 물결치는 말.

그래, 이제 괜찮아.

마음은 소리없이 잔잔해졌다.


4

연화가 돌아가고 난 후에도 호림은 계속해서 연오를 기다렸다.
올 수 없는 사람.
기다림은 끝이 없을지도 모른다.
호림은 생각했을까.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 연오는 다시는 손을 잡아줄 수 없다.
그렇게 세 번의 크리스마스가 지나갔었다.
그런데도 호림은 기다리고 있었다.

시간은 지나가,
전날부터 이어졌던 사람들의 발길이 점점 수그러들 무렵,
이 크리스마스도 모두 지나갔다, 라고 생각될 무렵까지 호림은 그 거리에 서있었다.
여전히 말없이,
한 손에만 투박한 털장갑을 낀 채로,
연오를 기다렸다.

이미 추위에 감각을 잃어버린지 오래인 호림의 손과 발이 더 이상 곱아들 수 없을만큼,
크리스마스의 하루가 모두 지났을 때.
갑자기 호림이 발을 떼었다.
그리고 추위에 굳을 얼굴로 애써 웃었다.
호림은, 마치 연오가 돌아오기라도 한것처럼 맑고 환하게 웃고 있었다.

천천히 내리는 눈.
크리스마스의 끝자락에 하얗게,
조용히 소리없이 눈이 내리고 있었다.
지나는 사람들의 작은 탄성이 울리고,
호림은 이제 됐어, 라는 듯 돌아섰다.

참 많이도 기다렸다.
3년을,
한결같이,
연오를 기다려왔다.

그래, 너는 기다릴 수 없는 사람.
그러나 약속은 남아 나를 기다리게 했었다.
눈이 오는 크리스마스에 꼭 너를 다시 만나고 싶었다.

그리곤 호림의 마음에 소리없이 소복이 내리는 눈이 연오인 듯,
작은 울림이 퍼져갔다.

연오야,
이제 그만 돌아갈까.

그래.

라며 어디선가 부드럽게 연오의 말이 울려오는 듯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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