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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2002년 겨울 이벤트 : 미련한 결정


                                   미련한 결정

                                                                     by 엘루네드


  기숙사의 수도관이 터졌다. 고치는 공사는 한 달. 집으로 내려가고 싶지는 않았다.
6개월 이상 계속 하는 아르바이트 자리도 있고.

  “오빠와 같이 사는 게 싫으니?”
  
  아버지는 전화기 저편에서 조심스럽게 눈치를 보고 있었다. 태평하고 무관심한 어머
니와는 달리 섬세하고 예민한 아버지.

  “오빤 이미 후배랑 살고 있다면서요. 남자 둘이 사는 집에 내가 들어가는 건 좀 그
렇잖아요?”

  안보여도 보이는 듯하다. 이마를 찌푸리는 아버지가.

  “하지만 너 혼자 사는 건 문제야. 돈도 돈이지만, 여자애 혼자 살면 남자들이 깔보
고 덤비는 법이다.”



  “같이 사는 애를 걱정할 필요는 없어. 다혈질이라 그렇지 좋은 애야. 나도 너 따로
보내고 싶진 않아.”

  오빠는 그렇게 말하면서 웃었다. 다정한 오빠, 상냥한 오빠, 누구에게나 친절한 오
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서 결국 같이 살게 됐어? 방은 어때?”

  커피가 맛없어. 원두를 대체 뭘 쓰는 거야? 잔만 예쁘면 뭐해. 투덜투덜거리던 진희
가 물었다. 주문한 토스트가 생크림과 함께 바구니에 담겨 나왔다. 따끈하게 구워진
토스트와 모닝롤. 빵냄새가 푹신하게 피어올랐다. 모닝롤을 갈라 생크림을 바르자 기
다렸다는 듯 진희가 손에서 모닝롤을 뺏어들었다.

  “방이야 뭐, 냄새나서 방향제 꽂은 거 빼면 괜찮아.”

  남자 혼자 쓰는 방이 그렇지 뭐.
  진희는 네명의 딸들 중 둘째다.

  “불편하겠다.”

  도저히 감이 안잡힌다는 표정으로, 그러나 불편함을 가늠해 보겠다는 표정으로.

  “괜찮아.”

  진희는 베어먹은 모닝롤을 마저 입에 넣었다. 우물거리면서 손가락에 묻은 생크림을
빨아먹고 여상스럽게 말했다.

  “그럼 뭐가 신경쓰이는데?”

  진희는 항상 내가 숨겨둔 감정을 기민하게 알아차린다. 언제나 항상.

  “두 사람 다 내가 싫은가 봐.”



  나보다 늦게 들어온다. 대부분 둘 중 하나가 먼저 들어온다. 때로는 오빠가, 때로는
유준이가. 시간은 대략 열두시를 넘겼을 때. 새벽 세 시에서 열두시 사이에 들어오는
듯하다. 정확한 시간을 모르는 것은 내가 그 시간에 자기 때문이다. 두 사람이 일찍
들어올 때도 있다. 그 때는, 세 사람 다 말이 없다.
  게다가 둘 다 오늘은 들어오지 않았다. 아침에 눈을 떴을 때, 집에 온통 썰렁한 기
운이 감돌았다. 씻고 화장하고 빵집에서 크루아상과 바게뜨를 사왔다. 바게뜨를 빵칼
로 탁 잘라 한입 무는데 비틀, 유준이가 들어왔다. 대뜸 식탁까지 술냄새가 번졌다.
안주로 골뱅이 무침, 해물잡탕, 조개탕. 소주냄새가 강렬하다.

  “너는 맨날 빵이냐.”

  유준이가 내손에 들린 바게뜨를 쳐다보고 있길래 나는 접시의 바게뜨 한 조각을 내
밀었다. 피식 웃으면서 고개를 흔든다.

  “밤새 술펐는데 무슨 빵.”
  “오빠하고 마셨어?”

  유준이 흠칫 굳어서 문고리를 잡고 돌아보았다.
  말하지 않아도 답변을 들을 수 있다. 나는 남은 크루아상과 바게뜨 절반을 랩에 싸
서 바구니에 담았다. 저녁때 와서 먹을까.
  강의가 끝나길 기다렸다는 듯 오빠가 전화했을 때는 조금 놀랐다. 영화를 보고, 저
녁은 일식 돈까스. 오빠와 이런 식으로 둘이 다닌 건 두 번째다. 처음은, 오빠와 처음
만났을 때.
  이제부터 넌 내 동생이 되는 거야. 나도 네 오빠가 될 테니까, 잘 알 수 있지?
  만화영화를 보여주고 그렇게 말했던 것 같다. 햄버거를 같이 먹으면서.

  “유준이한테 얘기했는데, 괜찮겠어?”

  오빠에게선 알싸한 담배냄새가 풍겼다. 군대를 제대하고 복학하면서 오빠는 자취를
시작했다. 집에서, 그러니까 서울로 가기 전, 대전의 오빠 방에 들어가면 가끔 담배냄
새가 났다. 가끔 서울에서 돌아올 때도 재킷이나 손가락에 배어있는 담배향. 그러나
내가 오빠의 집에 같이 들어앉았을 때, 담배의 흔적은 없었다. 집에서도, 오빠에게서
도.

  “담배 피우네.”

  가방을 뒤적이던 오빠가 하하 웃었다.

  “싫어?”
  “아니. 상관없지만, 집에서 안 피우니까 끊은 줄 알았어.”
  “유준이가 싫어하거든. 녀석 은근히 결벽이라서.”
  
  후식을 커피로 주문하고 오빠는 담배를 문 채 나를 건너다보았다.

  “역시 싫어?”
  
  오빠는 오빠와 내가 피 안섞인 남매라고 말한다.
  나는 숨을 골랐다.

  “친한가봐. 그런 얘기도 하고.”
  “같이 오래 살았어.”



  “형은 원래 그렇게 친절해?”
  
  웬일인지 유준이 먼저 들어와 있었다. 오빠는 연구실로 다시 돌아가야 된다며 손흔
들고 떠났다. 크루아상은 그렇다치고 바게뜨가 딱딱해졌을 생각에 돌아오는 길, 고기
와 우유와 양파를 샀다. 굳어버린 바게뜨에 우유를 붓고 양파를 다졌다. 매운 기가 올
라와 눈이 따끔거린다. 고개를 젖히고 환풍기를 틀었다. 우유를 먹으면서 부드러워지
는 빵. 후추를 약간 뿌리고 고기와 빵, 양파를 섞어 손바닥만한 크기로 뭉쳤다.
  
  “그게 뭐야?”
  “구워먹으면 돼.”

  유준이 데굴데굴 눈을 굴렸다.

  “먹을래?”
  
  만들어진 패티를 지퍼백에 담아 냉동실에 넣어둔다. 한덩이씩 구워서 기름종이를 감
아 유준에게 건네주었다. 말없이 하나를 먹어치우고 왼손의 것에 다가가던 입이 급작
스레 목소리를 냈다.

  “형은 원래 그런 사람이야?”

  말의 뒤는 내가 이었다.

  “친절하고 다정하고 누구한테나 상냥한 사람.”

  갑자기 집안에 감돌던 패티의 냄새가 싹 가라앉고 기름냄색만이 역하게 속을 치받쳐
올렸다.



  밤새 열로 머리가 들떴는지 가위에 시달려서 도저히 학교에 갈 수가 없었다. 온몸이
열로 끓었다. 전에 사두었던 감기약을 먹고 도로 누웠다. 침대에서 손이 뻗쳐 몸을 잡
아끄는 듯한 감각에 시달리다가 정신을 차렸을 때는 벌써 해질녘이었다.
  아직까지 열이 남아있는 탓인 줄 알았다. 간밤, 내가 내 신음소리에 흠칫흠칫 놀라
깬 것처럼, 아직도 혼곤한 머리가 들은 환청으로 알았다. 방문을 열고, 찬물을 마셨을
때 환청이 아니라는 것을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알아차렸던 모양이다. 두근두근 심장이
미칠 것 같이 뛰었다. 오빠와 유준이 쓰는 방을 열었을 때, 나는 즉시 몸을 돌렸다.
습관처럼 몸이 움직여 내방의 코트와 목도리를 손에 쥐고 문을 나섰다. 탁탁 맨션의
현관까지 나왔을 때에서야 무슨 소리가 들렸던 것 같다.

  “지영아! 민지영!”

  그 목소리. 몸과 몸이 얽힌 모습이 겹쳤다.



  내가 찾아가자 진희는 놀러온 것처럼 나를 맞이했다. 내 얼굴을 보고 감기약을 사와
서 밥을 차려놓고 마주앉았다.

  “왜 그래?”

  진희가 물은 건 그 때였다.

  “아프다더니, 그 얼굴이 아니잖아?”

  나는 웃는다고 웃은 것 같은데, 내 얼굴이 생각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결국 나는 노
력을 관두고 한숨지었다.

  “오빠하고 싸웠어.”

  진희는 더 이상 말을 않았고, 식사 내내 밥알이 모래알처럼 입안을 굴러다녔다.


  
  까페로 출근했을 때, 미영이 호들갑스럽게 나를 반겼다.

  "언니! 왜 이제 와요? 아까부터 저렇게 잘생긴 오빠가 언니 기다리고 있던데! 친구
라면서요? 되게 잘생겼다아- 남자친구예요? 둘이 사귀어요?"

  둘 다 아무 말도 못하고 마주보고만 있었다. 한참을 떠들던 미영은 후배녀석이 잡아
끌어서야 분위기를 눈치채고 사라졌다.
  입술이 달라붙은 듯 파란 낯으로 경직되어 서 있다. 눈 밑이 새까맣게 변했다. 둘이
서 밤새도록 고민한 모양이지. 저 얼굴, 죄지은 듯한 저 얼굴. ……나는 비겁하다.
  나는 돌아섰다. 유준이 급하게 나를 불렀다.

  "야, 너-."
  "가."
  "형한텐 잘못 없어, 내가-."
  "가."

  비겁하다, 나는. 자꾸만 입술에서 비난이 비집고 나오려고 해.
  스팀에 팔뚝을 데고, 생과일 주스용 키위를 깎다가 손가락을 베었다. 에스프레소를
뽑아 잔에 담다가 떨어뜨려 발등을 찢기고 데어버렸다. 급기야 사장언니가 놀라서 달
려왔다.

  "아니, 얘가 왜 이래! 너 왜 이러니, 어디 아프니? 집에 무슨 일 있어? 얼굴도 왜
이렇게 창백해!"

  와르르 얼음을 쏟아놓듯 걱정을 내뱉던 언니는 이마를 짚어보고 내 등을 떠밀었다.

  "안 되겠다. 너 열있어. 집에 가서 쉬어라."

  야단칠 때는 혹독하지만 사람을 잘 챙기는, 좋은 사람이다. 나는 웃어보이고 돌아섰
다.
  마음이 몹시 아프다.
  나, 나, 오빠를 좋아했었나.
  이렇게 마음 아프도록 좋아했었던가.
  누구에게나 상냥하던 사람이 오빠라는 것에 만족하고, 내가 그의 동생이니까, 동생
만큼의 특별한 의미라는 것에 만족하는 것, 나, 나를 속이고 있었나.
  눈물이 쏟아진다.
  동생이 아니라 좀더 특별하고 하나뿐인 의미로 봐주기를 기다리고 있었던 걸까.
  화가 난다. 비겁하다. 비난하려고 해. 상대가 내가 아니란 이유로, 흠을 찾아서, 정
상이 아니라며 비난하려고 해. 내 마음이 아프니까… 아픈만큼 비난하려고 해….


  
  마음을 추스르는 데에 이틀이 걸렸다.
  아니, 추스르려면 아직도 멀었다. 하지만 얼굴을 짐싸는 시간 만큼만 보고 있을 수
있을 정도로 추스르는 것에 이틀이 걸렸다.

  "지영아."

  이른 아침이었는데도 둘다 깨어 있었다. 침울한 표정, 그러나 놀란 표정으로 둘이
앉아있다가 일어섰다. 식사중이었던가, 때로 오빠의 작업대로도 쓰였던 탁자 위에 밥
과 찌개, 반찬그릇이 차려져 있었다. 내가 방으로 들어가자 오빠가 따라 들어왔다. 나
는 여행가방을 찾아 먼지를 털고 옷장을 열었다.

  "갈 거야?"
  "응. 내려가려고."
  "야, 민지영!"

  유준의 목소리가 화를 품고 버럭 터졌다.

  "나, 동거하는 집에 들어와 살 정도로 눈치없진 않아."

  한참 정적이 흐른 뒤였다. 나는 더 이상 말하지 않고 대강 옷을 챙기고 당장 필요한
CD와 책을 꺼내어 품에 끌어안았다. 나 외에는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얼음이 깨지
기 전 미미한 소리를 내듯 누군가의 한숨이 가만히 흘렀다. 유준이었다.

  "있어도 괜찮아."

  내가 괜찮지 않아. 보고 있는 건 고통이고, 아직 마음을 추스르지도 못했고, 언제
갑자기 비난을 터뜨릴지도 몰라. 이렇게 늦게나마, 몰랐다면 모를까 난 내 마음을 깨
달아버렸고 같이 생활할 자신 없어.
  하지만 이런 말들을 내뱉기엔, 오빠의 얼굴이 너무 환했다. 마음속에서 고통과 기쁨
이 동시에 인다. 순식간에 CD들, 책들, 꾸려놓은 옷가지를 원상복귀시키고 오빠는 내
손목을 잡아 끌었다.

  "가서 아침먹고 놀러나가자. 오늘은 사상 최악의 크리스마스가 될 줄 알았는데."

  나는 오빠에게 웃어주었다.
  바보같구나.
  순식간에 결심이 종이 날려가듯 사라졌다. 안심한 얼굴로 두 사람이 손을 꼭 쥐었
다. 탁자 밑에서 보이지 않도록 서로 손을 꼭 쥐고, 다행이야, 안심했어, 눈빛을 마주
하고- 오빠의 눈밑은 조금 붉었다. 문득 오빠가, 거의 동시에 유준이가 내게로 눈을
돌렸다. 나는 빙긋 미소지었다.
  전에도, 앞으로도, 이보다 더 미련한 결정을 할 일이 없을 것만 같아. 나, 잘 해낼
수 있을까?


끝.



 
 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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