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완결방입니다. 누구나 글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83   1/  6   0
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엘리카
2002년 겨울 이벤트 : 미소짓는 언젠가




"헉-."

승우는 자신의 앞으로 배달된 우편물을 열어 본 후 경악에 찬 숨을 토해냈다.
또다. 이 빌어먹을 우편물이 또다.

도대체 어떤 모자란 새끼가 이따위 것들을 보낸단 말인가-.
승우는 지끈거리는 이마에 손을 얹으며 난처한 표정을 지었다.

차라리 끔찍한 살해현장이나, 시체 사진을 보내온다거나...
커터칼이 잔뜩 든 무시무시한 괴편지같은게 나을지도 몰랐다.
어차피 많이 받아 본 거라 이제는 무섭지도 않으니까.

그렇지만 이건...
유승우, 29년 평생 살다살다 이런 끔.찍.한 편지는 처음이다.
후, 내가 가장 짜증나는 범죄는 이제부터 스토킹일지도.

승우는 쓴웃음을 지으며 다시 한번 내용물을 꺼내들었다.
장미향이 나는 편지지의 오른쪽 하단에는, 결코 달갑지 않은 말이 들어있었다.

..이번에는 직접 찾아가겠습니다.
물론 도망쳐도 소용 없다는건.. 잘 아시리라 믿습니다.

분명 이 작자는 정신병자거나, 집요한 파파라치일지도 모른다.
아니면, 나에게 원한을 품은 놈들이거나.

평범한 갈색봉투에서 나온 것들은, 정말 언제 찍었을까 궁금할 정도로 많은,
아니 너무 많아서 두려울 정도로 많은 승우의 사진들이었다.

현관을 나서고 있는 자신, 식사를 하고 있는 자신, 안경을 낀채로 서류를 들여다보는 자신..
게다가...게다가... 이 마지막의 사진은 도대체 언제 찍어논 거야!

나른한 표정으로 욕조에서 눈을 감고 있는 사진.
승우는 이런 사진이 찍힐 때까지 눈치채지 못했다는 자신이 정말 한심스러웠다.

분명 이런 류의 사진이 배달되기 시작한 게, 벌써 5개월이 넘어간다.
만나러 온다...라. 어떤자식인지 면상을 짓이겨주지.
정신나간 새끼, 부디 내앞에 나타나만 줘라.
그간의 편지로 인해 상대방이 남자라는 사실은 더더욱 승우를 불쾌하게 만들었다.

다-. 싸그리 없애주지.
결의에 찬 표정으로, 타도 스토커!를 연발하는 승우의 눈에는 어느덧 비장함마저 감돌고 있었다.

12월 23일-. 크리스마스 이틀 전의 따사로운 아침이었다.













**********


"야, 그러니까 협조 좀 하란 말이다아아아!!!!"

승우는 자신이 있는 곳이 어디인지도 잊은채 고래고래 소리를 질러댔다.
그 소리에 놀란 사람들이 복도에 그대로 멈춰서서 승우를 쳐다보았다.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 시끄러워! 닥치고 따라오라고!"

사람들의 시선을 한몸에 받은 승우가 원망에 찬 눈길로 자신을 쏘아보자,
이현은 여간해서는 내지 않는 큰 소리를 질렀다.

사람들의 휘둥그래진 눈길이 두배로 커졌다.
세상에나...눈앞에서 무슨 짓을 해도 눈하나 꿈쩍하지 않을거 같던 정선생님이...
순식간에 간호사들이 쑥덕쑥덕댄다.

이현은 모든 호기심을 째림으로 일관하고 모든 사건의 원흉인 승우를 데리고 자신의 개인 진료실로 들어갔다. 신경질적으로 의자에 풀썩 앉은 이현은 짜증이 팍팍 묻어나오는 목소리로 말했다.

"...도대체 이번엔 무슨일 인데 병원까지 쫓아오고 그래.
네 담당사건 용의자를 고문이라도 한거냐? 응?
그런 거라면 난 절대 협조 못하니까 곱게 돌아가시지."

귀찮다는 듯이 손을 휘휘 내저으며 축객령을 내린 이현을 보며, 승우는 기가 막혔다.
지랄맞은-. 그나마 친구라는 자식이 저렇게 몰인정할 수가!
내가 어쩌다 저런 놈과 말을 섞어서.

"생각하는 게 꼭 그정도냐? 정이현?
6살이나 어린놈과 연애하더니, 너까지 어려진거 아니냐?
오오, 그 놈 제법이네. 늙은이같던 네놈을 이렇게 만들어주고 말야.
너도 놀아볼 대로 놀아본 놈인데...테크닉이 꽤 좋은가보지."

"뭐..!"

다다다 쏘아붙인 승우의 말에 이현은 화를 내려다가 되려 얼굴이 붉으스름해졌다.
승우는 그 순간을 놓치지 않고 계속 용서없는 연타를 퍼부었다.

"훗-. 너 지금 얼굴이 벌개진거 아냐?
쯧쯧, 벌써부터 서방놈한테 매여 살면 너 평생 매이는 수 있다.
그러게 내가 뭐라든.
놀아볼대로 놀아보더니, 이제 6살이나 어린놈을 주워먹다가 탈나는 거라고 했지?
아아, 천하의 정이현 신세 가엾게 됐군.
그 옛날 우리과 퀸카 정소희선배를 울리던 때가 눈에 선한---"

"미친새꺄, 그떄 일은 왜 또 꺼내고 지랄이야?!!!!"

완벽하게 안됐다는 투로 승우가 쯧쯧 거리며 과거의 일들을 조목조목 나열하자,
이현은 머리가 터질 지경이었다.
나도 다 기억 못하는 걸 저놈은 쓸데없이 기억하고 다녀서 뻑 하면 지랄이야, 지랄이.
저 심뽀로 사람을 대하니까 악덕검사라는 소릴 듣지.
내가 언젠가 저놈의 저 입을 반드시 막아야....응?

"-호오. 과를 넘나들며 여자들을 울리셨다고요?
상당히 흥미있는 내용이네요, 승우형. 나중에 꼭 끝까지 들려줘요."

헉! 이현은 순간 입을 쩍 벌리고 멍한 표정을 지었다.
저..저놈은 또 언제 여길 들어와서 저렇게 살벌한 표정을 짓는 거지?
분명 저놈이 들으면 분명 몇날 몇일을 삐져서 삐쭉삐쭉 거릴텐데...!

절규하는 이현과 달리 승우는 든든한 구원병을 얻은 것 마냥 기고만장했다.

"어라? 연우야! 너 잘왔다. 안그래도 이 쪼잔한 놈이---"

"시팔, 유.승.우. 거기서 한마디만 더 하면... 기필코 메스로 네놈 심장을 갈라주지.
십자절개가 좋을지, 뭐가 좋을지 생각해봐. 꼭 열어줄테니, 걱정말라고."

이현은 힘주어 한글자한글자씩 끊어서 승우의 이름을 불렀다.
내가 언젠가는....저놈의 썩어빠진 근성을 고쳐주지.
이때 이를 갈며 노려보는 이현을 역시 마주 노려봐주는 이가 있었으니,

"왜요, 선배. 더 하게 내버려두죠.
선배 인기 많았나보네요. 뭐, 어디까지나 옛.날.일.이니까 전 크게 상.관.안.해.요.
제가 그렇게 쪼.잔.한.줄.아세요.
이왕 말 나온 김에 그간에 울린 여자들 이야기나 들어보죠."

웃기고 있네!
이현은 태연한 척 하는 연우의 말에 울컥하는 것이 올라옴을 느꼈다.
평소 마음이 넓은 척하며 왠만한건 이현에게 양보하는 척은 다하면서 정작 중요한 일은
제멋대로 휘두르는 연우였다.
지금도 승우놈이 있어서 저놈이 태연한 척이라도 하는거지,
만약 집이었으면 당장 무시무시한 눈으로 째려보며 누구냐고 묻겠지.
그다음은 어디까지 갔느냐고 물어볼거고.
지금은 만나냐고, 지금은 누굴 사랑하냐고 졸라대겠지. 으으
마지막은 항상 '선배는 내꺼라구요-'라는 고정멘트와 함께 지멋대로 내몸 휘두르기.
다음날이면 저놈은 상쾌한 기분으로 일하러 가고,
나는 비명을 지르는 몸뚱아리를 추스려서 겨우겨우 나가는 거지.
.......아악! 싫어!

이미 승우의 가벼운 뱀같은 혓바닥 덕에 몇번이나 연우에게 자신의 과거사를 들킨 이후,
항상 치뤄졌던 행사이다시피했다.
물론 연우에게만 행사였겠지만-.

이현은 모든 계산을 마치고, 만면에 웃음을 띄며 연우를 돌아다보았다.
제..제길. 유승우 새끼. 반드시 죽일꺼야. 내가 이런 짓 까지 하게 만들다니.
그렇지만.. 오늘밤마저 그렇게 보내면 난 죽을 거라고...

".....설마. 과장된 표현이야. 대학생 때 교제한번 한걸 가지고-"

"웃기고 있네. 네놈이 한 두번이었냐? 일주일에 3번이나 갈아 치운 적도 있으면서."

냉큼 이현의 말을 자르며 승우가 혓바닥을 낼름 거렸다.
'일주일에 3번......?' 이라는 말을 연신 곱씹으며 살기를 내뿜는 연우.
이현의 이마에는 땀방울이 주르륵 흘렀다.
씨..씨팔새끼. 하여간 도움이 안돼..

"승우야. 오늘은 뭔가 안 되는거 같구나. 다음에 다시 연락해라."

이현은 황급히 승우의 등을 떠밀다시피 해서 문을 열고 내보내려 애썼다.
아직까지도 '일주일에 3번....일주일에 3번....한달이면 12번.....1년이면...144번..'
따위를 중얼거리며 이를 갈고 있는 연우를 흘끗 쳐다보면서 더더욱 행동에 가속도를 붙였다.

"씨팔, 너같은 악덕 검사 안짜르고 놔두는 우리나라 좋은나라냐? 닥치고 꺼져"

"야, 내가 거짓말 했냐? 이자식 완전히 축객령을 내리고 있네."

"오늘은 날이 안좋다잖냐? 연우놈 열받았단 말이닷! 어서 가!"

이제 처량해 보이는(승우의 눈에는) 이현을 보며 승우는 선심쓴다는 듯이 말했다.

"그래그래, 몸 잘 보전하고 나는 이만 가마. 다음에 연락할꼐."

...부디 몸 보전하라고. 라는 말을 중얼거리며 승우는 상쾌하게 웃으며 병원을 나섰다.

반면에 이현의 진료실에서는.

"선배, 이제 우리 둘 뿐이네요."

...삐에로 이야기를 떠올리게 하는 음산한 표정의 연우가 이현을 방긋 웃으며 바라보고 있었다.











*************

"시팔... 그러고 보니 목적달성은 실패로군..."

그 스토커 자식을 잡는데 협력해달라고 부탁하려다가, 분위기 상 가볍게 놀다(?)온 자신을 책망하며 승우는 턱을 만지작거렸다.

할 수없지.... 그 미친 새끼가 혹 온다면.... 나 혼자라도 두들겨 패버려야지..ㅎㅎ

승우는 자신의 집에 난입한 스토커자식을 야구방망이로 흠씬 두들겨 패주는 상상을 하며 자기도 모르게 흐뭇한 미소를 지었다.

퍽-

"아우~ 씨이."

벽. 혼자 실실거리고 다니다가 벽에 부딪혔나보다.
길거리에 왠 벽이...응?

놀랍게도 그 벽은 말도 할 줄 알았다. 저음의 부드러운 목소리까지 가지고 말이다.

"엇, 괜찮으세요..?"

승우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고개를 들었다.

"예, 괜찮습니다....?"

오후의 햇빛 속에서 빛나는 그의 얼굴은 뭐랄까. 어떤 특별한 끌림이 있었다.
175cm의 자신보다도 10센티 가까이 커보였다. 어쩐지 재수없어...이런 종자들 중 범죄자가 많았던 것 같....

".......승우..선배?"

그 벽이 갑자기 자신의 이름을 부르자 승우는 깜짝 놀랐다.
계속 스토커만 생각해서인지, 거리에 있는 모든 사람들이 그것인 것처럼 느껴졌다.

"죄송하지만....혹시 절 아시나요?"

"기억. 아직도. 안나요....선배?"

남자가 왠지 안타깝다는 듯이 말했다.
누구지.....?

"저..정준원입니다. 선배 고교 후배....정준원."

잠시 생각한 승우는 곧 답을 얻을 수 있었다.

".....정신분석동아리 1기 기장이었던......정준원?"

"네, 다행히 기억해주시네요. 다는 아니더라도......."

왠지 슬퍼 보이는 웃음을 지으며 준원이 말했다.
확실히 기억난다. 이 정준원이라는 녀석은.
승우는 잠시 옛 기억을 더듬어보았다. 정신분석인지 뭔지 괴상한 동아리를 만들어서 선생들한테 꽤나 괴짜 소리를 듣던 녀석이었다. 물론 성적은 뛰어났기에 괴짜 정도에서 그쳤기 망정이지.
게다가 학생회를 했던, 자신보다 2살 어린 후배라서 특히 기억에 남았다.

"싸이코 정준원. 아직 살아있었냐? 그동안 이 형님께 문안인사도 안 드리고?"

"......뵈려고. 했었죠. 하지만......이런저런 일로.... 보고싶었어요. 선배."

승우는 잠시 이 후배의 힘없는 모습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았다.
도대체 무슨 일이 있었길래 늘 쾌활했다고 기억하는 준원의 모습이 이렇지-?
마치 자신이 무슨 심한 짓을 하기라도 한 듯한, 묘하게 원망하는 듯한 눈빛이 마음에 걸렸다.
뭔가 준원에 대해 중요한 일이 생각날 듯 말 듯 했으나, 무엇인지 끝내 생각이 나지 않았다.  승우는 그냥 가볍게 잊어버리기로 했다.

"무슨생각..해요, 선배? 혹시 바쁜 일..있나요?"

"음, 미안한데 그래. 다음에 한번 보자."

아쉽군... 승우는 오후에 처리해야 할 자신의 일을 가늠해보고는, 작별인사를 했다.
역시 검사 옷을 벗고 변호사를 해야...쩝.
준원 역시 조금은 아쉬운 얼굴로 순순히 물러났다.

"그럼.. 담에 뵙죠. 선배."

"그래. 내가 다음에 연락할까?"

"편할대로 하세요... 아, 핸드폰에 제 번호 저장해드릴께요. 줘보세요."

현수에게 건네진 승우의 핸드폰은, 깔끔한 흰색바탕으로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는 그의 깔끔한 성격을 여실하게 보여 주고 있었다.

"선배도 저장해줘요. 나중에 연락....하게요.."

여전히 힘없이 중얼거리는 준원의 모습에 고개를 갸웃거리면서 승우도 자신의 번호를 저장시켰다.

"자세한 건 다음에 얘기해요. 그럼, 선배 저 갈꼐요."

"그래, 잘 가라. 자식. "

그래요, 자세한 건 다음에.....아주 천천히,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이야기해야겠죠..? 선배.

이러한 준원의 중얼거림은 듣지 못한 채, 승우는 귀여운 후배 녀석을 만났다는 즐거움에 그날 아주 기분 좋게 밀린 일들을 처리할 수 있었다.










"....그렇다면 방금 증인의 증언에 의해 피고인이 우발적인 살인을 저지른 후 스스로 크게 뉘우치고 있는 바가 크다고 생각해도 되겠지요?"

"이의있습니다. 재판장님."

차분한 표정으로 승우는 말을 이었다.

"지금 변호인은 증인에게 유도심문을 하고 있습니다. '우발적인 살인'이라는 것부터가 명확하지 않은데 어떻게 그리 쉽게 단정할 수 있습니까."

반백의 재판장은 긍정의 뜻을 표하고 상대 변호인에게 말했다.

"변호인은 그런 발언을 삼가시오."

승우는 분해하는 표정이 엿보이는 애송이 변호사에게 싱긋하는 웃음을 돌려주었다.
아직 나에게 이기려면 십년은 모자라...........이 유승우에게 말이야..
마지막 결정타가 남았다.

"존경하는 재판장님. 이번 살인사건의 중요한 단서를 제공할 수 있는 증인을 신청하려고 합니다만.."

긴장하는 상대 변호사의 얼굴을 보며 승우는 회심의 미소를 지었다.











"피곤하군..."

잘못을 파헤치려는 자와 잘못을 변호하려는 자 간의 물어뜯는 싸움.
늘 재판이 끝나고 나면 극심한 피로가 몰려온다.
그렇지만 검사의 직업이 자신에게 매우 맞는 듯. 목적을 이룬 다음에는 항상 왠지모를 뿌듯함과 보람마저 들었다.
크리스마스 이브-12월 24일. 길거리마다 넘쳐나는 크리스마스 열기.
그런날 재판이라니. 최악.
어쩐지 자신만 그 분위기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생각에 승우는 쓴웃음을 지었다.
이런날 이현, 연우 네를 방문할 수도 없고-. 재미는 있겠지만.

띠리리리-

지독하게도 멋없는 자신의 핸드폰이 요란한 소리를 낸다.

"여보세요?"

[선배?]

놀랍게도, 목소리의 주인공은 며칠 전에 만난 후배 준원이었다.

"정준원? 네가 어쩐 일이냐?"

놀람 반 반가움 반으로 승우가 물었다.

[한번 보기로...했었죠.. 설마, 기억, 안나요?]

"아아, 맞아. 그랬지. 방금 일 끝났는데, 크리스마스 이븐데. 특별한 약속 없냐?
그녀-라든지."

[약속이 있었으면 전화했을리 없죠... 그리고, 그녀-라뇨. 그런거 없어요 선배.]

여전히 힘없는 목소리에 승우는 순간 안아주고 싶다고 느꼈다.
여자들이 말하는 모성애인지-. 묘하게 힘이 없어 보이는 그를 다독거려주고 싶었다.
유승우. 네가 드디어 미쳤구나. 이현 놈만 보니까 세상 남자들이 다 여자로 보이디?

[...선배? 듣고 있어요?]

"아? 어어, 잠시 딴 생각 좀 하느라. 미안. 뭐라고 했지?"

[에에- 통화 중 딴 생각하는 버릇은 여전...하네요.]

내가 고교때도 그랬었나..? 승우는 기억을 되짚어보았지만, 생각이외로 준원은 시시콜콜한 것까지 꽤 많이 기억하고 있는 듯 했다.

"미안미안."

[풋-. 됐어요. 선배 ***동에 있는 바이블 알아요?]

"아아, 거기라면 잘 알아. 블러디 메리가 일품인곳, 맞지?"

[네 맞아요. 그곳은 기억.....하시네요. 그럼 거기서 있다가 7시 반쯤,... 어때요?]

"좋아. 그떄 보지."

[예. 그럼.]

오늘은 간만에 귀여운 후배녀석과 술이라... 승우는 흐뭇한 미소를 감추지 못하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무슨일인지는 모르겠지만, 묘하게 계속 힘이 없어 보이는 모습이 가슴아팠다.
자꾸 무언가가 생각나려 했지만, 승우는 그 징조를 미처 알아차리지 못했다.











****************

"어, 선배. 여기에요."

승우가 잠시 두리번거리다 보니 어느새 먼저 와있던 준원이 저쪽에서 손을 크게 흔들고 있었다.

"늦은거냐? 미안."

"늦긴요....... 딱 맞춰서 오셨네요. 저도 방금 왔어요."

승우는 조심스럽게 준원의 맞은편에 앉았다.
온통 크리스마스 분위기로, 거리마다 연인들이 넘쳐나는 바람에 한참을 헤매야만 했다.

앉아서 차분하게 본 준원의 얼굴은, 길에서 우연히 만났던 그때 이상으로 수려했다.
부드러우면서도 의지가 강한 눈동자.

준원의 얼굴 중 가장 마음에 드는 부분을 꼽으라면 서슴없이 승우는 눈을 꼽을 것이다.
힘이 없어보이는 지금의 모습에서도, 눈만은 변함없이 살아있었다.
뭐, 인간 샌드백으로 쓰기에 제격일지도.

"선배, 주문하세요."

"음.. 여기 온 이상, 블러디 메리."

"그럼.. 저도 같은 걸로."

토마토가 들어가, 정말 핏빛처럼 붉은 블러디 메리가 두 사람 앞에 나왔다.
가볍게 마실 수 있게 보이지만, 실은 보드카가 주인 독한 술의 한 종류다.

승우는 사실 술이 썩 세진 않지만, 묘하게 블러디 메리는 마음에 들어했다.
천천히 들이키며, 그간의 생활에 대해 대화를 나누었다.

준원은 현재 부친의 사업일을 도우며, [이사님]이라는 거창한 직함마저 가지고 있었다.
젊은 나이에 그런 위치라니-. 이런 생각도 들었지만 조금은 의외였다.
심리치료사나, 정신과 의사가 딱인데 말야. 딱.

"안어울려."

솔직한 승우의 감상이었다.

"너, 그런거하고 안맞아보여."

"저도 제가 그럴줄은 몰랐어요."

피식 웃으며 준원이 잔을 기울였다.
찰랑거리는 색이 묘하게 일렁였다.

"선배."

"응?"

승우는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으나, 실은 묘하게 술이 빨리 받아버린 탓에, 스멸스멸 술기운이 올라오는
참이었다. 이상하군.. 오늘은.

아아, 또다. 뭔가 생각이 나려고 한다... 준원에 대해. 무언가. 중요한 듯한.
생각하려고 해도, 승우의 머리는 그것을 거부했다.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일이었을까.
생각할수록 자신이 원하는 답은 얻지 못한 채, 승우는 계속 얼굴이 붉어져갔다.

"선배는....다 잊었나봐요."

"뭘...?"

뭘 말이지...? 승우는 순간 준원이 내뱉은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다, 잊었어요. 나도. 그날의 일도. 선배는, 다 잊은거란 말입니다..."

취한건가, 승우는 잠시 어지러운 머릿속을 정리하려 애썼다.
글라스에 반사되는 블러디 메리의 붉은 빛이, 자신의 머릿속을 점령해버린 탓인지-
아무것도 생각할 수 없었다.

"무슨 소릴 하는지, 모르겠어. 지금 약간 어지러워.....이상한데.
나, 이렇게 술이 빨리 받는 체질은 아니었는데...."

어지러움이 속도를 더한다.
소용돌이가 하나, 둘 그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내며 눈앞의 준원의 얼굴을 흐리게했다.
나, 중요한 걸 생각해야 할 거 같은데.

감기는 눈은 주인의 의지를 배신한 채 평온한 어둠 속으로, 승우를 이끌었다.










*****************

"으...응."

승우는 몸을 뒤척이며 뺨에 와닿는 시트의 서늘한 느낌을 즐겼다.
몸이 따뜻해서인지.. 청량한 느낌을 주는 시트가 마음에 들었다.

"정신...들어요?"

옆에서 느껴지는 타인의 목소리에, 승우는 억지로 눈을 힘겹게 떴다.
아까 같이 술을 마셨던 준원이었다. 아, 내 고등학교 후배녀석이었지.

"여긴...?"

"선배 집이요."

내집..? 확실히 자신이 누워있는 침대라던가, 가지런히 꽂힌 시크릿가든의 시디들이나,
검은 책장은 자신의 것이었다.
언제 내집에..?

"너, 내 집 알아?"

준원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네."

"어떻게?"

정신이 조금은 돌아오는 것 같다. 승우는 지끈거리는 머리를 부여잡고 일어나려 애썼지만 뜻대로 되지 않았다.

"선배는.... 정말 하나도 기억하지 못하나 봐요. 잊을거라더니, 정말 잊어버렸군요.
.....전부, 다."

묘하게 슬픈듯이 말하는 준원의 분위기에 왠지 압도되어 승우는 말을 꺼내지 못했다.
무슨말인지... 왜 저말을 들으면 머리가 아파오는 건지. 하나도 모르겠다.

"무슨말인지....하나...도...흡!"

갑자기 준원이 승우에게 달려들어 입술을 겹쳐왔다.
완전히 정신이 들지 않은 승우는 순간 자신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 건지 감이 잡히지 않았다.

"이...이게..무슨....읍"

잠시의 자유도 허락하지 않은 채, 다시 준원이 승우의 몸을 구속해왔다.
강하게, 격렬하게.
승우는 어쩐지 자신이 이 느낌을 알고있었다는 느낌을 받았다.
낯설지 않은, 타인의 품.

준원의 손이 승우의 등으로 전진하여 날개뼈 아래를 부드럽게 쓰다듬을 때야 승우는 정신이 번쩍 들었다.
미친듯이 준원의 어깨를 양손으로 두들겼다.
겨우 준원이 몸을 떼었다.

"이게 무슨 짓이지, 정준원?"

화가난 승우가 소리쳤다.
하지만 승우에게 돌아오는 눈빛은, 상처입은 어린짐승의 그것이었다.
어쨰서-. 남자에게 키스따위를 당하고, 화를 내야 할건 나인데.
왜 네가 그런 슬픈 얼굴을 하는 거지?

"선배가, 기억하지 못하니까.... 선배가 나쁜거야."

준원이 조그맣게 내뱉었다. 승우가 듣기를 바란다기보다는, 자기자신에게 중얼거리는 말.

"어쨰서, 나를 기다리지 않은거죠? 왜....나를. 잊은건가요."

물기 어린 눈으로 자신을 쳐다보는 준원의 눈빛에 승우는 혼란스러워졌다.
중요한 무언가가 기억날 듯도 하지만-.

'난 너를 사랑하지 않아'

'내가 선배를 사랑해요. 선배몫까지, 내가 사랑해요. 이 내가.'

'기다려줘요. 2년. 단 2년이면 돼요.'

'바람피면, 알아서해요!'

'저녁은 선배가 좋아하는 걸로 먹을까요.저, 잘할 수 있어요.'

갑자기 수많은 영상들이 승우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언제....언제였지?
지끈-.

'왜, 왜죠? 선배! 날 잊었다고...다 잊었다고..그렇게 말할 참인가요?'

'거짓말이죠, 선배. 다른 사람이 생겼다면 차라리 그렇다고 해줘요. 제발.'

승우는 타인의 기억이 자신에게로 흘러들어온다고 생각했다.
그렇다고 보기에는 너무도 생생한 자신의 느낌에 놀랐지만.
너는, 그렇다면, 정준원 너는......

머릿속이, 지독하게 울려온다.
더이상, 생각하지마-.
무언가가 자신에게 강하게 속삭였다.

"아아아아아악!!!!!!!!!"

울려오는 관자놀이를 손으로 부여잡고서, 승우는 절규했다.

깊어.
깊어.


다시 기억의 늪에서 헤어 나오기에는, 그 늪이 너무나 깊어.










"선배, 정신 차려요, 선배!!!!"

찰싹. 찰싹.
누군가의 손이 자신의 뺨을 강하게 처올렸다.
아파................... 지독하게 아픈 느낌에, 감각이 마비되는 것 같았다.

"내가 다 잘못했으니까....제발. 내가 다 잘못했어요..선배....
제발 눈을 떠요........."

무언가 따뜻한 액체가 승우의 뺨에 떨어진다.
그것이 눈물이라는 것을 알기까지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아파. 그만...때려."

"....선배?!"

눈물을 뚝뚝 흘리며 자신을 바라보는 깊은 눈동자를, 승우는 잠시 멍하게 쳐다보았다.
강하다고만 여겼던 그 눈동자에 맑은 액체가 고여 있는 것이 어쩐지 가슴 아프게 느껴졌다.

"미안...미안해요. 선배. 다.....내가 잘못했어요...미안해요..."

"뭐가...미안한데?"

마음과는 다르게 지독하게 냉정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기계가 갈리는 느낌. 딱딱하고 메마른 그것.

"다...다요.전부....선배...이렇게 한거....내탓...이에요..기억..해줄..리가.....없단거....
나도...알고있...었지만....."

막혔던 눈물샘이 터진 것처럼, 준원은 마냥 울어댔다.
그런 준원을 바라보며 승우가 입을 열었다.

"뭐가... 날 두고 떠났던게..? 아니면, 나를, 버렸던 게? 어떤게 미안하다는 거지?"

"!"

눈물에 젖은 눈을 들어 준원이 크게 떠진 눈으로 승우를 담았다.
믿을 수 없다는 듯, 놀라움을 감추지 않은채 떨리는 눈동자로.

"기억.....기억난..거에요? 선배? 전부?"

"전부. 아주 깨끗하게 기억 나. 네가 떠난 후에, 내가 어땠는지도. 모두."

옛일이 이제 막 기억났다는 사람답지 않게, 승우는 뚝뚝 끊어지는 음성으로 말을 담았다.
사실은, 기억하고 싶지 않았어. 그랬을거야.
네가 힘없이 나를 바라보고 있는 것도. 그 의미도.

"내가....선배를, 사랑...한다는 것도..요?"

준원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알아. 그랬다는거, 다 알아."

"그럼...........그럼요...선배.. 나, 용서...해줄 수, 있어..요?"

여전히 시야에는 오직 승우만을 담은 채 준원이 고백하듯이 물었다.

"용서..라는게 있어? 넌, 지금도 나를 사랑한다 말할수 있을지 몰라.
하지만, 난 아냐. 내가 아니야. 지금은....
다 잊고 있었어. 전부."

"하지만...내가...내가 사랑해요...선배.."

젠장....승우는 눈을 감아버렸다.
2년 전 일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는다.

분명 자신도, 눈앞에 있는 이 사람을 사랑했었다. 죽을 만큼. 모든 정열을 다해서.
하지만. 그 사랑을 잊고 살았던 것도 자신이다.
그는 자신이 그를 잊고 살아가는 동안에도, 여전히 자신만을 사랑한다 했다.
그렇지만, 그 사랑을 잊고도 살 수 있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살 수 있다.

'당신이 그의 장래를 망칠 셈입니까?'

'아니오. 저는 다만,-'

'그렇다면. 그를 위해 물러나 주십시오. 부탁드립니다.'

"나는... 널 잊고도 살아왔어. 앞으로도 그렇게, 잊고 살 수 있어.
네가 떠난 뒤에도. 계속."

"내가 아니에요. 내가 아니야. 난 선배를 잊고 살 수 없어. 내가 그럴 수 없다잖아."

한편으로는 다시 찾은 사랑을 붙잡고 싶었다.
나만을 사랑한다 말해주는 그의 품을, 붙들고 놓아주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다시 잡으면, 이번에야말로 잊을 수 없겠지.
그가 없는 나를...그떄는 과연 상상할 수 있을까.

승우는 겨우 떨어지지 않는 입을 움직였다.

"나는..무서워. 또다시 너를 잃으면 그떄의 나를 상상할 수가 없어.
다시...다시 그떄와 같은 기분, 맛보고 싶지가 않아."

"도대체... 그 이후 무슨 일이 있었던 거에요? 큰형인가요?
그 사람이 그러던가요? 나를 잊으라고?"

준원이 소리쳤다.

"아니-. 나야. 내 스스로 내린 결정이었지. 그래. 그런거야."

"거짓말 하지 말아요. 내가 선배의 그런 감정조차, 알수없을 만큼 미련곰탱이로 보여요?
그런것도 모를만큼, 나 바보가 아니란거....알잖아요."

아니...아니야. 네가 틀렸어. 틀린거지.

갑자기 강한 힘으로 준원이 승우를 안아왔다.
잠시의 움직임도 허용하지 않은채, 강하게 승우를 옭매여왔다.

"아무것도..아무것도 생각할 필요, 없어요. 선배.
그냥..이대로 있어요. 이대로... 선배를 사랑하는 나...나만 봐요. 그러면 돼요."

어린아이를 달래는 듯한 말투.
부탁에서 애원으로 변하는 그말을 들으면서, 승우는 거부할 수 없었다.
어느새 안도해버리는 자신을 원망하면서 가만히 그 품에 몸을 맡겼다.
자신의 등을 토닥거리면서 쓰다듬는 그의 손길이, 눈물이 날만큼 안도감을 주어서.









눈을 뜨자 제일 먼저 준원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초췌해진 얼굴에 가슴이 죄여왔다.

"잘잤어요..선배?"

"응........"

그 품에 몸을 내맡긴 채 깜빡 잠이 들었나 보다.
순간 준원이 환하게 웃으며 볼을 손가락으로 쓰다듬었다.

"다시...볼수있을줄 몰랐어요.. 선배가 아침에 잠에서 깨는..모습."

다시는 저 내밀어진 손을 잡지 않으려고 했는데.

"계속...보여줄께."

잡아버릴 수 밖에 없는 자신을, 승우도 어쩌지 못했다.
그저 쑥스럽게 웃으며 마주 바라보기만 할 뿐.

"날이 밝으면.....같이 밖에 나가요. 지금은 새벽이지만요."

"크리스마스....지? 날이 밝으면."

승우가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크리스마스 이브 . 아마도 올 크리스마스 이브는 평생 잊을 수 없는 날이 되겠지.

"메리...크리스마스."

승우가 준원의 귓가에 나지막히 속삭였다.
보기좋게 커브를 그린 입가에 키스를 되돌려 주면서, 준원도 마주 속삭였다.

"선배도....메리. 크리스마스."









***************

그리고-. 12월 25일. 아침. 8시 34분.

"앗!"

승우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눈살을 찌푸렸다.
그리고는 대뜸 준원에게 고함을 쳤다.

"너, 스토커지? 맞지?"

"에-?"

준원이 어이가 없다는 가벼운 탄성을 냈다. 따뜻한 햇살이 비쳐오는 아침,
이보다 더 행복할 순 없을 것 같은 기분으로 승우와 외출준비를 하고 있었다.

"봐봐. 이거, 네가 아니란 말야?"

승우는 한 다발의 사진을 준원의 앞으로 내밀었다.
순간 준원의 얼굴에 곤혹스러운 빛이 스치는 것을 예리한 승우의 감각은, 놓치지 않았다.

"..저, 선배...이건-"

[쨍그랑-]

복도 쪽에서 무언가 깨지는 소리가 났다.

"누구야?!!!"

말릴 겨를도 없이 승우가 재빨리 복도 쪽으로 뛰쳐나갔다.
준원도 뭐라 할 수 없어 뒤쫓아가기에 바빴다.

아파트 문을 열고 나온 승우는 복도와 연결된 방의 창문을 깨려고 시도한 괴한을 보았다.
본능적으로 위험신호가 잡혔다.
틀림없어. 이놈이 바로 그 스토커자식이야!!!!!!

"잘걸렸다, 이 자식! 내손에 죽어봐라~!!!!!!!!"

"우아아아악!"

순식간에 멱살을 틀어잡은 손에 힘이 들어가는 것을 느끼며 승우는 주먹을 들었다.
막 주먹이 괴한의 얼굴에 꽂히려는 순간 괴한이 비명을 질러댔다.

"미친놈아! 너는 친구도 몰라보냐?!"

엥?

승우는 스트레이트로 나가던 주먹을 황급히 회수했다.
정말 찰나의 순간이었다.

놀랍게도, 승우에게 멱살을 잡힌 채 신음하고 있던 괴한은, 다름아닌 이현이었다.
전혀 예상치 못한 인물의 출현에 승우는 크게 당황해했다.

옆에서 의외의 인물을 마주친 준원 또한 다른 의미로 당황해했다.

"..정이현? 네가....스토커?"

멍하게 중얼거리는 승우의 얼굴을 흘낏 쳐다보며, 준원은 순간 귀엽다고 생각해버렸다.
웃- 위험해, 위험해. 경고-경고-

인상을 쓴 채로 이현이 옷을 툭툭 털고 일어나 승우를 노려보았다.

"약먹였냐? 스토커? 스토커 같은 소리 하고 있네."

"....그러면? 왜 남의 집 멀쩡한 창문은 깨고 그러냐?"

"내가 알아? 어떤 미친놈이 너네 집에 기웃거리길래 쫓았더니, 그자식이 그랬어."

이현이 억울하다는 듯이 말했다.

"도와주려는 친우의 마음을 저버리고 잘하는 짓이네. 유승우.
언제부터 그랬는지는 모르지만, 그딴 털북숭이 아저씨하고도 사귀냐."

"그럼...그 미친놈이....스...토커..?"

승우의 얼굴이 분노로 얼룩졌다.
그리고, 화려하게 폭발했다.

"씨팔---! 어떤 개자식이 수작이야, 수작이!!!!! $^$%@$%^#%$^할 새끼, 아아악!
사내자식이 그 지랄 떨 때부터 알아봤어-! 뭐? 털북숭이? 아아아악!!!!"

차라리 정상적인 스토커라면 그래도 낫다.
털북숭이 아저씨라니. 털북숭이라니. 아저씨라니. 아악! 싫어!

"...하...하..."

그때까지 눈치만 보던 준원이 낮게 웃음을 흘렸다.
이현을 낮게 노려보았다고 느낀건, 승우만일까?

"어쨌든. 난 이만 돌아가겠어. 연우 녀석이 쟁쟁거리는 통에 얼른 돌아가봐야해."

이현이 얼굴을 구기며 말했다.

"그래....그래라...시팔...그 미친놈. 내가 꼭 잡아다 쳐넣는다..."

그때까지 중얼중얼 거리던 승우가 말했다.

"머리아퍼. 정준원. 나 먼저 내려갈거니까 키 가지고 천천히 나와라."

머리를 내두르며 승우가 나직히 말했다.
그리고는 그때까지도 인상을 구기고 있던 친우에게도 말을 걸었다.

"너도 같이 내려가지. 마침 엘리베이터 올라오네."

의외로 그의 친우는 손을 휘휘 내저었다.

"됐어. 나도 준원이 자식 오랜만에 보는데. 잠깐 얘기하고 같이 내려갈꼐. 신경쓰지마."

"그럴께요. 선배. 먼저 내려가요."

준원이 씨익하고 미소지었다.
바보같이. 이럴떄조차 승우는 그 눈동자에 반해버렸다. 까만 눈동자.

"알았어..."

그렇게 승우가 사라지고, 남은 일당의 모종의 거래가 있었으니......







"....감사합니다. 이현선배."

"알긴 아네. 이 빚은 나중에 받도록 하지."

"승우선배...손에, 제가 그랬다는게 알려지면. 혼나겠죠."

준원이 쓴웃음을 지으며 말했다.

"너도 배짱이지-. 그런 사진으로 그녀석 주의를 확실히 끌어놓고, 무서운 놈이야.
연기력도, 일품이지."

이현이 역시 자신의 후배인 그를 질린다는 표정으로 보았다.

"아무렴요. 누구 후배인데요."

준원이 장난기어린 미소를 지었다.

"그렇지만-."

순간 준원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털북숭이 아저씨라니... 그건 좀 심했어요, 선배."

"내가 당한거에 비하면, 싼거지 뭘그래?
킥- 그 사진들, 네 집에 모조리 장식되어있다는 걸 승우가 알게 되면 무슨 표정을 지을까? 블러디 메리에 탄 약도. 내가 의사가 아니었으면 구하기 힘들었겠지......"

"선배도 공범이죠. 왜 이러십니까."

순간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준원이 무마시키려 애썼다.
이현은 피식 웃으며 벽에 기댔던 몸을 일으켰다.

"됐어. 네 장장한 순애보에 놀아난 내 잘못이지. 안그래?"

"...감사하고 있습니다. 선배."

든든한 자신의 복병에게 준원은 깊이 고개 숙여 인사했다.

"뭘........앗!"

주머니에서 느껴지는 진동에 이현은 서둘러 핸드폰을 꺼내들었다.

"...연우니?...어? 아냐아냐........응....아니.....아니래도.....응...그래.
......금방갈꼐.......응.....응.....알아..금방간다니까....어...나도."

행복한 미소를 지은 채 통화를 하는 이현의 모습을 보고 준원은 피식 웃어버렸다.

그를 만날 수 있어서 감사드린다.
최후의 도박으로, 자신의 잘못으로 자신을 잊어버린 그를 자극시키는 수밖에 없었지만 후회하지 않는다.
지난 2년간의 잘못을- 철없는 자신이 저지른 잘못들을.
이제는 그의 옆에서 속죄하며, 그를 위해 남은 인생을 살수 있다는 것에 대해, 감사드린다.

띠띠띠-

자신의 핸드폰도 짧게 세번 울리며 깜빡깜빡거렸다.

폴더를 열어 문자를 확인한 준원은 자기도 모르게 함박웃음을 지었다.

[빨리와. 심심해....응? 2분내로 오면, 키스해줄께.]

가볍고 빠른 발걸음을 느끼며, 준원은 이 순간이 영원히 지속되기를 빌었다.


<후기>

또다시 후기를 쓸 수 있는 날이 왔습니다!
여름 이벤트 때 썼던 <한여름밤의 꿈>에 나온 녀석들이 게스트로 나왔습니다.(웃음)
헉. 이녀석들을 모르시는 분들도 계실텐데.(쿨럭;)
겨울 이벤트로는 무얼 쓸지, 생각하다가 이녀석들도 넣고 싶더군요.
계절은 두번 바뀌었지만, 저에게는 많은 변화가 있던 2002년이었습니다.
2002년을 마무리하면서- 이제 고3이 되는 스스로에게 무언가 변화가 있기를 바랍니다.
<미소짓는 언젠가>는 흔한 플롯일겁니다. 아마도요.(웃음)
그렇지만 한번쯤 꼭 써보고싶었던 이야기입니다.
크리스마스를 맞아서 행복한 연인들을 그리고 싶었지만- 중간에 이상하게 흘러간지도.
행복하세요.^^*
Merry christmas! and happy new year!



 
 83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가다    2004/09/13   2241 
 82
  難治病
▩멜리사    2004/09/02   1829 
 81
  변명(부제: Normal Blood)
kuroasa    2004/08/30   1718 
 80
  눈을 감으면 보이지 않는다.
하리    2004/09/01   1620 
 79
  2002년 겨울 이벤트 : Kiss
멜리사    2004/08/31   4436 
 78
  2002년 겨울 이벤트 : 기다림의 마침표를 찍다
atlantis    2004/08/23   2694 
 77
  2002년 겨울 이벤트 : 너는, 기다림
앤쏘    2004/08/23   1281 
 76
  2002년 겨울 이벤트 : 미련한 결정
엘루네드    2004/08/23   1448 
 
  2002년 겨울 이벤트 : 미소짓는 언젠가
엘리카    2004/08/23   1360 
 74
  2002년 겨울 이벤트 : 눈 오는 날 [1]
ijen    2004/08/23   1862 
 73
  2002년 겨울 이벤트 : In other words… I love you
ijen    2004/08/23   2245 
 72
  2002년 겨울 이벤트 : 세월 - 함께 살아가기
하리    2004/08/22   1382 
 71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하)
하리    2004/08/21   1735 
 70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상)
하리    2004/08/21   1532 
 69
   [12]
ijen    2003/11/26   17837 
 
  1 [2][3][4][5][6]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Ch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