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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ijen
2002년 겨울 이벤트 : 눈 오는 날




1999년 12월-


















"오래 기다렸니?"

남자는 창문을 반쯤 내리고 미안한 얼굴로 묻는다.

"아뇨."

퉁명스레 대꾸하고 차 앞을 돌아 조수석의 문을 열고 앉았다.
옆으로 메는 책가방을 가슴에 안다시피하자 안전벨트를 메기가 힘들다.

"이리 줘."

손을 내미는 남자에게 가방을 건내주자 몸을 뒤로 돌려
뒷자석에 가방을 조심스레 내려놓는다.

얼마전까진 늘 저 뒷자석에 앉아있었는데…
가방을 던져놓고 거의 눕다시피 늘어진 포즈로 앉아있었다.


그랬는데.




"어디로 갈까."

"영화보러 가요. 보고싶은거 이번에 개봉했어요."

"그럴까."



차가 가볍게 진동하더니 천천히 교문앞을 벗어났다.












얼마전까진 늘 저 뒷자석에 앉아있었는데…
가방을 던져놓고 거의 눕다시피 늘어진 포즈로 앉아있었다.


그랬는데.






언제부턴가 이 남자의 옆자리에 앉고 싶어졌다.




















                                                               눈 오는 날


























"재미 있었어?"
"볼 만 했어요."




거짓말이다.
사실은 영화같은거 눈에 들어오지도 않는다.



"좋아하는 배우라고 했지? 여주인공이."
"그랬죠."
"눈이 높네…."



높지. 그래.
오죽 높아서, 그 커다란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는 예쁜 여배우는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고개 돌리면 바로 코가 닿을 거리에 앉아있는 당신 얼굴만 봤을까.

스스로에게 어이가 없어서 피식-, 하고 웃자
핸들을 쥔 상태로 묻는다.


"밥 먹으러 갈까?"
"……."
"먹고 싶은거 있어?"
"집에 갈래요."
























- 퍽!

가방을 벽에 던진 순간, 안에 들어있는 CDP가 걱정되었지만
이미 늦었다.

괜히 짜증이 나 「에이 씨」 하며 벌렁 침대에 드러누웠다.
성장기에 너무 탄력성이 큰 침대는 오히려 몸에 좋지 않다하여
조금 단단한 매트리스를 고른 어머니덕에 늘 벌렁- 하고 침대에 드러눕는
설은 자주 엉치나 허리를 다친다.

자신이 키가 크지 않는 이유는 그래서가 아닐까, 하고 진지하게 생각해봤지만,
허리가 아예 부숴진 것도 아니고. 사실 그건 이유가 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고개를
저엇다.

몸을 뒤집는 통에 교복 바지 주머니에서 뭔가가 짤랑, 한다.
열쇠고리다.
이곳 사람이라면, 절대 스스로 들고 다니지는 않을
흔하다 못해 질릴 정도로 보아온 돌하르방이 달려 있는 열쇠고리.






"……."












「 자, 이거 」
「 뭔데요…… 」
「 여기 온 첫날 공항에서 산건데… 줄게 」
「 이런건 집에 굴러다녀요 」

어이가 없어서 하, 하고 웃는데
그래도 남자는 손에 쥐어줬다.

처음 만난 날 이었다.














「 아르바이트 할래? 」

통속적인 대사다.
하지만 그 통속적인 대사에 '싫어요' 도, '전 남잔데요' 도 아닌
'보수가 얼만데요?' 라고 대꾸한건, 그렇게 말을 걸어 온 남자의 외모는
전혀 통속적인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반듯한 양복차림.
단정하게 앞머리를 올린 시원한 이마에 조금 짙은 눈썹이 꽤 남자다웠다.
그래도 얼굴선이 너무 고와서 한결 인상이 부드러워 보였다.
살짝 웃는 낯에 더욱 호감이 가는 남자.

자신보다 예닐곱 살 정도 많지 않을까 짐작했던 남자가 사실은 자기 나이의
꼭 두배라는 사실을 알았을 때 설은 놀랐지만, 그런건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남자가 말한 아르바이트, 라는 것은
주에 두번 자신을 만나는 것.
만나는 장소는 설의 학교 앞으로 남자가 승용차로 데리러 온다.
그리고 영화를 보거나, 함께 저녁을 먹으며 이야기를 나누고
집으로 돌아간다.
주말엔 시립 도서관에서 만나 책을 보기도 하고 3층 멀티영상실에서 비디오를
보기도 한다.

즉, '나이' 같은건 전혀, 하등의 상관이 없는 '일'을 하고 있다.
보수는 크다.
단지 만나서 영화를 보고, 밥을 먹고, 이야기를 나누는데 이정도 보수라면
오히려 자신이 사기꾼이다.

더구나 지금은,
언제나 그 남자에게서 연락이 올까 노심초사하고 있는 자신이다.
'만나주는' 댓가를 지불해야 하는건 오히려 내가 아닐까.






시작이 뭐였더라…?






"아아… 그래……."






「 도서관 」 이었다.

















「 이름이 특이하네. 」
「 …제 이름 아세요? 」
「 아까 친구가 불렀잖아. '윤 설' 아냐? 외자? 」
「 맞아요… 」


달리 좋지도, 싫지도 않은 이름.
하지만 평범하진 않다.


「 누가 지어준 이름이지…? 」
「 부모님이요. 17년 전에 제주도에 딱 한번 눈이 왔는데,
     그 날 제가 태어났대요. 그래서 지은 이름이래요 」
「 제주도는… 눈이 잘 안오지? 」
「 안 와요. 일단 태어나서 지금까지 진짜 눈 내리는걸 본 기억이 없는걸 보면 」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다.
지금은 그게 습관이란걸 알고 있다.


「 그런데… 넌 사투리 안 쓰는구나 」
「 …요즘 시대에 그런 소리 하면 제주도민들에게 칼 맞아요, 아저씨 」
「 그래 」


습관.
의미 없는, 습관같은 행동들.



열람실에서 옆에 서서 책을 고르던 남자가 툭- 하고 어깨를 치더니
작은 소리로 아르바이트 할래? 라고 물었었다. 보수가 얼마냐고 묻자
의외인 표정을 하더니 나가서 이야기 하자며 휴게실로 자신을 이끌었다.

그 때가 8월.
매미소리가 너무 시끄러워 낮잠을 잘 수도 없던 여름이었다.


























"많이 추워? 얼굴이 빨갛네."
"추위 많이 타요……."

안 추워요? 하고 묻자

"별로… 난 추위 잘 안타는 체질이거든. 그리고 여긴 따뜻한데…
너 서울에 오면 집밖으론 한 발짝도 못 나가겠다."
"잘난척 하긴."

남자가 하핫, 하고 기분좋은 듯 웃더니 엑셀레이터를 밟는다.



"그런데 왜 제주도로 온 거예요? 좌천?"
"아니, 과정이라서."

평일의 이른 저녁, 패밀리 레스토랑엔 비교적 사람이 적었다.
남자는 후식으로 나온 커피를 한 모금 마시더니 소리가 나지 않게
잔을 내려놓았다.

"2년정도 지점에 가 있으래. 돌아가면 바로 본사 기획실 실장으로 발령나겠지.
운이 좋아서… 입사 초년 시절에 기획한 일 몇개가 결과가 좋았거든.
너무 고속 승진이라 말들이 많아서, 입막음용으로 제주도로 온 거지.
……이런 얘기 재미없지?"


재미없지 않아요.

- 라고 말해주고 싶었다. 하지만

당신 이야기 잖아요. 더 듣고 싶어요. 더, 더 말해줘요.

- 라고 말 할 용기가 없어서
설은 조금 넓은 글라스에 담긴 아이스크림을 스푼으로 몇번인가 찔렀다.

"아직 춥니…?"

남자는 설의 그런 행동을 추워서 아이스크림이 내키지 않는거라고 해석했나보다.

"추우면 코트를 벗었겠어요."
"그래…."

또 저 미소…….
지겹다.











"토요일에 만나자. 두시까지 학교로 가면 될까?"

고개를 끄덕이자 「잘자라」고 한번 웃어주더니 그대로 차는 시야 앞에서
멀어져갔다.


달리 한 일이라곤 없는데 지친다.

힘들고
피곤해서

눈물이 났다.




















토요일은 방학식 이었다.
오전 열한시 쯤에 식이 끝나고, 집에 돌아왔을 때는 열두시가 조금 안 되었다.
침대에 누워 눈을 감고 잠을 청했다.

잠깐 눈을 붙인것 같은데, 핸드폰 벨 소리에 잠에서 깨어난 시각은
이미 세시가 훨씬 넘어있었다.



「 어디니? 」

"……."

「 설아? 설이 폰 아닙니까? 」

"좋아해요."

「 …… 」

"…끊을게요."



그 후로 또 남자가 전화를 했는지는 알 길이 없다.
배터리를 아예 빼 두었기 때문이다.





















다시 만난 건 1월 중순 무렵이었다.


방학을 맞아 잠깐 호텔 벨보이 알바를 하는 친구녀석을 찾았다.
이곳은 관광 도시답게 그런 종류의 시설이 널렸고, 아르바이트 종류도
대부분이 거기서 거기였다.

조금 기다리라고 말하며 친구가 건내준 호텔 라운지의 무료 음료 쿠폰을 들고
상층으로 올라갔다.
1월도 성수기라면 성수기라고 말할 수 있는 관광시즌 답게, 로비는 제법
분주했다.

거기서 자기 또래의 여자아이와 함께 있는 남자를 보는 순간,
설은 심장이 폭발하는 줄 알았다.
두 사람은 막 일어나려던 참으로, 설이 자리에 앉음과 동시에 일어서서
함께 라운지를 떠났다.

















개자식 이잖아.

설은 조용히 웃었다.





















"야, 너 왜그래?"

몇분동안 떠들었건만, 자신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깨달은 친구가 툭툭, 팔을 친다.

"야, 윤 설. 너 위에서 뭐 잘못 먹었냐? 야, 너 왜…,"
"야. 부탁하나만 하자."
"엉?"




















들키면 모가지라는 친구의 발악을 뒤로 하고,
당당하게 엘리베이터를 탄 설이 객실 앞에 섰다.
아직 체크아웃 하지 않았다는 사실에 안도함과 동시에,
그렇다는 것은 즉-, 하고 상황을 추리하던 설은 더 큰 절망을
느끼며 복도에 주저앉았다.

도대체 자신은 뭘 기대한걸까.

남자가 자신을 기다려주길?
자신과 같은 마음으로, 자신을 생각해주길?


"원조교제 따윌 하는 놈에게……."

어이없음에, 웃음이 나왔다.
진심이 되어버린 자신이 바보라고, 자리를 털고 일어서는 순간,




"…설아."

문이 열림과 동시에 익숙한 목소리가 자신을 불렀다.






















"이거 놔요!"
"어떻게 알고 찾아온거야?"

남자가 현관문을 닫으며 묻는다.

무슨 착각을 하는거냐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변명의 여지가 없는 상황이었다.

이미 자존심 따위는 흔적도 없이 부서졌다.
이왕 이렇게 된거, 욕이나 해주자고 이를 악물고 차갑게 물었다.

"이번엔 여자애예요?"
"……."
"난 아저씨 게인줄 알았는데……의외로 여자도 좋아하나보죠?
아니면 내가 예외였나? 원래는 어린 여자애가 타입인가?"
"설아."
"아, 씨발. 그럼 처음부터 여자애나 찾던가. 뭐가 신기하다고 사내놈을
꼬셔요, 꼬시긴. 여자랑은 너무 많이 해서 질렸어요? 그럼 이번엔 남자는 어떤가
해서 말 건 거예요? 그래도 막상 하려니까 용기는 안나고, 그래서 쓸데없이
영화나보고, 밥이나 먹고, 쓰잘데기없는 잡담이나 하면서 시간 죽인 거예요?"

입에서 나오는데로 떠들어도 남자는 여전히 웃고 있다.
그게 더 열이 받았다.

"재수없어! 변태새끼!"

차라리 한대 맞았으면 좋겠다는게 솔직한 심정이었다.
실컷 얻어맞고, 마음속으로 부터, 진심으로 이 남자를 미워하게 되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

정신을 차리고 보니 남자의 품 속이었다.

"보고싶었는데……."

뻔한 거짓말이라는 걸 알면서도 가슴이 터지는게 아닐까 싶을 정도로
크게 뛰었다.

"핸드폰으로 연락해도 받지도 않고……."

당연하다. 발신자를 확인하니까.

"방학인지도 모르고 학교까지 갔었거든."

거짓말 이겠지.

"집으로 찾아가면 곤란할까봐, 그것도 못하고…."

거짓말.

"보고 싶었는데… 다행이다. 정말."
"거…,"


"거짓말 하지 마요!" 라고 외침과 동시에 남자를 밀어냈다.
주르륵- 눈물이 흘러서 당황했지만 닦아 낼 생각은 없었다.
추하다는걸 알고 있지만, 팔을 들어올릴 힘조차 없었던 거다.





"취미예요? 멀쩡한 애 병신 만들어놓고, 아닌 척, 다정한 척, 신사인 척 하는게  
취미예요? 도대체 뭐예요! 왜 끝까지 사람 헷갈리게 만드는 건데요, 왜!"

"서……,"

"가까이 오지마요!"


손에 집히는데로 던져놓고 보니, 화장대에 비치되어있던 로션이었다.
퍼억- 하고 병이 벽에 부딪히고, 하얀색의 크림이 사방으로 튄다.


"전요… 아저씨에 대해서 아는게 하나도 없어요…….
나이, 이름, 그거 두 가지밖에 몰라요. 반년동안, 그거 두가지밖에 알아낸게
없어요. 이런거, 이상하잖아요…?
전 아저씨한테 별에 별 이야기를 다 했어요…. 가족은 몇명이며, 형은 몇살이며,
담임 선생님 이름이 뭐며…… 수학이 싫다, 국사가 좋다… 그야말로, 별 쓸데없는
이야기까지 다 했어요……."

"……."

"왜 그랬는지 알아요…? 우리 옆집에서 키우는 개 이름까지 아저씨에게
하나 하나 다 말하는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는데요…? 심심해서?
둘이 하루종일 아무 말도 없이 앉아만 있으면 지루하니까?
……천만에요."

"……."

"좋아해서 그랬어요……."




목소리가 마치 꺼져가는 불씨 같다고 생각했다.





"좋아서, 아저씨가 좋아서……
…그래서 나에 대해 알아주면 좋겠다고…… 아무리 사소한 것 하나라도…
나에 대해서 알아주면 좋겠다고… 언젠가 여길 떠나도… 그런거… 하나라도,
기억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했어요……."

"……."

"바보같은거 알아요…. 아저씨가… 나같은 어린애에게 진심일리가 없다는 것도,
장난이었다는것도…… 다 알아요…. 한심한 놈이라고 생각한다는 것도 다 알지만,
그렇지만……."

"……."

"그런게…… 마음이라는게…… 내가 원하는데로 안 바뀌잖아요…….
눈에 보이는 태도가 아닌걸……. 드러나는 행동이 아니라, 내 마음인데……
'이건 아니다, 그러니까 고쳐먹어라.' 고 명령한다고, 그렇게 한다고
바뀌는게 아니잖아요……."




어떻게 하라구요……





한 손으로 얼굴을 덮었다.
그래도 눈물은 계속 흘러나와 손바닥을 타고 아래로 흐른다.









한참동안 방 안은 고요한 적막에 휩싸여 있었다.










기이-……










남자가 침대에 걸터앉으며 말했다.


"내 이야기…… 해줄까……."





어딘가 자포자기 한 듯,
많이 지친 음성이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셨어. 중학교 다닐 때 돌아가셨지.
나보다 열 네살이나 많은 누나가 하나 있는데, 누나 집에서 살았다.
누나는 다리를 조금 절거든. 그래도 꽤 미인이라, 제법 일찍 결혼했지.
제법 사이가 좋다 싶었는데…… 이혼을 했어. 남자쪽에서 먼저 말을 꺼냈고,
위자료로 살던 집을 받았지. 이혼 사유는… 남자가 다른 여자를 만난거지.
당시에 나는 고등학교에 막 들어갔고… 그래, 지금 네 나이구나.
……처음으로 여자와 자 봤다."

"……."

"우리 누나였지."






설의 얼굴이 굳었다.
무슨 말이든 하고 싶었지만 입이 제대로 떨어지지 않는다.






"한번 이었는데… 딱 한번 이었는데 애가 태어났어.
아마 네가 말하는 그 여자애…겠지."





남자의 얼굴에는 여느때의 미소가 지워져 있었다.






"바로 집을 나와서 학교 기숙사로 들어갔지. 집에는 고등학교를 졸업 할 때까지
연락도 하지 않았어. 누나 역시 단 한번도 나를 찾지 않았고. 방학때도 기숙사와
친구의 집을 전전하면서… 그렇게 보냈어. 그리고 3학년 말에 대학 진학 문제로
보호자의 동의가 필요해서 누나집엘 갔었지. 애가 하나 있었어.

난 아닐거라고… 그럴 리가 없다고 말했지만, 누가 봐도 알 수 있었을거야.
누나의 전남편이 아닌 날 많이 닮았다는 걸.
남매니까… 누나를 닮았다고 해도 상관은 없어. 다들 전 남편의 아이라고
알고 있으니까. 누나를 많이 닮은 아이라고…. 하지만 나는 알고 있잖아.
누나와 나는… 진실을 알고 있잖아. 그 아이가 누나와 나의 아이라는 사실은
결코 바뀔 수 없어. 그게 '진실' 이니까.

정신질환을 가지고 태어났어. 선천적인 거지. 근친혼으로 태어난 아이들에게
흔히 나타나는 유전적 질병이야. 의심할 필요가 없다는거지."

"……."

"…십오년이 지옥 같았다고 하면……이해 못하려나…….
아무 말 없이 날 바라만보는 누나와… 몸은 자라도… 정신 연령은 늘 그 수준에
머무는 아이……. 도망치고 싶어서 대학공부에, 그리고 취직 후에는 회사일에만
매달렸지. 비겁한 놈이야……. 주제에… 함께 살겠다고 말한주제에…
…누나가 강요한건 아냐. 내가 스스로 그 집에 들어갔지.
…아이를 좋아한 것도 아니야. 사랑스럽다고 생각한 적도 없어. 다만…
미안할 뿐이지. 미안할 뿐이야. 그게 다야.

이곳으로 오기 하루 전날, 짐을 정리하고 방에 있자니 연우가 들어오는 거야.
연우… 그게 이름이지, 그래.
  침대에 앉아있는데 내 발 끝에 앉아서 '삼촌 어디가?' 하고 묻는거야.
'연우야, 삼촌 멀리 가' 하고 말했더니 '멀리 어디?' 하고 계속 묻더군.
그래서 조금 멀리… 하고 말하자 '언제 와?' 하고 다시 묻더라고.
빨리 온다고 대답했지. 그 애는 한참동안 물끄러미 날 바라보더니,
'잘가' 하고 웃으며 손을 흔들었어. '삼촌, 빨리 돌아와, 선물 사가지고
빨리 돌아와.' 하며… 손을 흔드는데……"




둑- 투둑-
침대 시트위로 자국이 번진다.





"…미안했어…… 죽고 싶을 정도로 미안했어…
태어나게 해서 미안했어… 이렇게…… 이렇게 태어나게 해서… 너무 미안했어……
하지만 무엇보다도 미안한건…… 그런데도, 전혀 사랑스럽다는 감정이 생겨나질
않는다는거였어…… 너무 미안한데… 그런데…… 그래도 벗어나고 싶었어……
이게 꿈이었으면… 눈 뜨면… 다 흩어지는 꿈이었으면…… 그렇게 생각하는
현실이… 그 애가 있는 현실이란게… 너무 미안했어……."



남자의 어깨가 떨리고 있었다.
말을 해야 하는데… 울지 말라고… 부탁이니까, 울지 말라고…
그렇게 말을 하고 싶은데 아무런 말도 나오지 않았다.
목이 타는듯한 아픔.

천천히 다가가도 남자는 고개를 들지 않았다.
밀어죽이려 했지만, 흐느낌이 새어나온다.

떨리는 손 끝에 남자의 머리카락이 닿는다.
그대로 끌어안고, 그대로 남자의 머리를 얼굴에 끌어안는 순간
자신의 입에서도 오열이 터져나왔다.





"넌… 내가 좋아서, 내가 너에 대한 모든걸 알아줬으면 하고 바랬겠지만……"



남자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물로 엉망이 된 얼굴로 웃으며, 천천히 말한다.



"너무 좋아서… 그래서…… 나에 대해 아무것도 몰라줬으면……
그냥…… 네 앞에 있는 나, 자신만을 알아줬으면… 그렇게 바라는 나라는 사람도
있었다…… 몰라달라고… 제발… 제발 몰라달라고…… 빌고, 또 빌었어……."






젖은 뺨을 만졌다.
아직 뜨거운 눈물이 흐르는 남자의 뺨을 어루만지며
설이 애원했다.









울…지마요……울지마요…… 제발… 제발………




































"건강해라…."

공항에서는 언제나 목소리가 울리는 기분이 든다.
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틀 전 서울에서 연락이 왔다.
본사로의 복귀, 인 것이다. 예상보단 빠르지만 어쨋든 지금 본사에선
그가 필요한 것 같았다.


"잘 가세요…. 몸 조심 하시구요."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우한테… 안부 전해줘요……."
"그럴게……."


돌아올게, 라는 말은 하지 않는다.
연락할게, 라는 말도 없었다.

마찬가지로 기다린다는 말도 하지 않았다.

돌아올거죠? 라는 질문도,
연락해요, 라는 당부의 말도 부질 없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짧은 겨울이 끝나가고 있었다.
결국 그 해에도, 제주도에는 단 한번도 눈이 내리지 않았다.






























2001년 1월-











"김실장님, 이번에 큰거 따내셨다면서요. 세상에…… 실장님이 되신 뒤로는
아주 승승장구시네."

회사를 나서며, 여자가 가느다랗게 웃는다.
남자는 언제나처럼 웃는 얼굴로 대꾸했다.

"저 혼자 한 일이 아니잖아요."
"또, 또~ 혼자 겸손한 척 하시네. 어머, 눈 오네……."
"……."

남자가 건물 현관 앞에 걸음을 멈추었다.

"올해는 눈이 너무 잦네요. 적당히면 반갑지만, 너무 자주 오면 지겨운데……."

여자가 어깨에 내려앉는 눈송이를 가볍게 털어내며 투덜거린다.
하지만 남자쪽에서 일체의 대꾸가 돌아오지 않자, 조금 당황하며 살핀다.

"김실장님…? 어디 보시는……"
"아직도 실장님인가요?"

여자의 말을 자르며 성큼, 두 사람 앞으로 다가온 남자 하나가 묻는다.

"2년 동안 사장님 정도는 될 줄 알았는데."

남자는 아직도 믿기지 않는 듯,
멍하니 눈앞의 소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함께 회사를 건물을 나온 여자는 '저 먼저 가볼게요' 라고 짧은 인사를
던지고 먼저 자리를 떠났다.














"나, 처음으로 눈… 맞아봐요."




이미 청년이라 부르기에 충분 할 만큼 자라버린 소년이
웃으며 말한다.


남자가 한참만에 입을 열었다.




"어때? 태어나서 처음으로 눈을 맞아 본 소감은…?"
"……심장이 터질 것 같아요."


청년이 남자의 손을 잡아, 자신의 가슴위로 가져간다.


"봐요. 두근두근 하죠?"


남자는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데…… 아직 잘 모르겠어요."
"……뭘?"




청년이 대답대신 하늘을 올려다본다.
그리고 다시 눈 앞의 남자를 바라보더니,



"가슴이 두근 거리는 이유가……
처음으로 눈이 내리는 걸 직접 봐서인지…
아니면, 이년만에 당신을 만나서 인지……."


꽤 많이 능글맞아진 얼굴로 말한다.








"……."


남자는 더이상 웃지 않았다.

대신, 만나지 못했던 2년 동안, 자신을 훌쩍 뛰어넘는 키를 한 청년을
천천히 끌어안았다.






"설(雪)……."






그리운 이름이 혀 끝에 감긴다.







눈이 오고 있었다.
두 사람이 처음으로 함께 맞는 '눈'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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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Babylone 겨울 이벤트용.
사실 제주도에는 눈이 많이 오죠.

하난   2005/11/02

이거 멋진걸요.. 설정도, 분위기도.. 장편이라면 어땠을까 기대되는 글이네요. 그래서 아쉽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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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en    2004/08/23   18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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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en    2004/08/2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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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겨울 이벤트 : 세월 - 함께 살아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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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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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상)
하리    2004/08/21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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