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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하리
2002년 겨울 이벤트 : 세월 - 함께 살아가기




"내가 화가 안 나게 생겼냐구요.
세상에 크리스마스 이브를 혼자 보내게 만드는 그런 경우가 어딨어요.
오빠들이라면 화 안 나겠어요? 우리가 오래된 연인도 아니고 이제
겨우 일년이라구요.
처음 맞이하는 크리스마스를 혼자 보내라구…
그런 경우가 어디 있어요. 어디 멀리 가는 것도 아니고 겨우 제주도인데.
치.. 정말 치사해 죽겠어. 같이 간다고 누가 뭐랄 사람이 있냐구요.
아무리 취재차 가는 거라지만 크리스마스 이브에도 일을 하지는 않을
거잖아요. 진우 오빠 정말 너무해요.
오빠가 무심한 성격인 거 모르진 않지만 그래도 이건 너무하잖아요.
화나 죽겠어... "

투덜거림을 넘어서 이젠 울먹거리는 연진의 앞에 마주앉은 혜중과 경수는
난처하기 그지없었다.
난데없이 쳐들어와 푸념을 늘어놓는 귀여운 후배 앞에서 두 사람의 문제를
두고 다툴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엔 지금 당장
둘의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던 것이다.

대체 크리스마스가 뭐길래..
믿지도 않는 어떤 신이 태어났다는 날이 대체 얼마나 대단하게 중요한
날이라고 이렇게들 투덜거리는 건지 혜중으로서는 이해할 수도 너그럽게
납득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반면 경수는 올해도 이렇게 같은 일로 다투게 되는 두 사람의 어긋남이
한심하기도 했지만 조금도 굽혀주지 않으려 드는 혜중이 야속하기만 했다.
그래서인지 울먹거리기까지 하는 연진이 안쓰럽게 느껴지고 있었다.

"연진아... 울지 마라. 울어 봤자 니 속만 더 쓰린 거야.
진우녀석이 원래 그렇게 멋대가리가 없는 놈이잖아.
니가 좀 이해해줘라. 일에 빠지면 지 부모도 나 몰라라 할 놈이야.
올해는 그냥 니가 참고 넘어가. 대신 내년에 제대로 챙겨달라고 하면
되잖아...."

"내년은 내년이죠. 오빠들이야 어차피 둘이 같이 있을 거니까 그렇게
쉽게 얘기 하실 수 있는 거예요. 씨이...다 미워 죽겠어. 오빠들도
진우 오빠 편이죠? 그렇죠?"

위로랍시고 연진을 달래보려는 경수의 말에 토를 달며 연진이 투정을 하자
잔뜩 지루한 표정으로 앉아 있던 혜중이 인상을 굳히며 한마디 던져왔다.

"연진이 너 상당히 유치한 거 알고 있지? 누가 누구 편이라는 거야?
그리고 같이 있고, 안 있고가 그렇게 중요한 거니?
중요한건 마음 아니야?
진우랑 같이 크리스마스를 보내지 못한다고 해서 그 녀석 마음이
너한테서 멀어지는 거 아니잖아.
같이 못 가는 진우도 결코 좋은 마음은 아닐 거라고 생각하는데?
철 없이 굴지 마라. 남자들 여자 철 없이 구는 거 아주 싫어한다.
그리고 누가 같이 있어? 우리도 크리스마스 따로 보내게 될 거야.
그 정도도 이해 못해주면서 좋아한다고 말 할 수 있냐?"

연진을 향해서 하는 말이었지만 그 마지막 말은 연진만이 아닌 그의 연인을
향한 것이기도 했다.
함께 동거하기 시작한지 어느 새 삼년을 넘어서고 있지만 그 이전부터도
실과 바늘처럼 늘 붙어 다니던 사이였기 때문에 혜중으로선 크리스마스니
뭐니 하는 행사 자체가 그다지 의미 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아니 그 보다는 도시 혜중의 성격상 그런 것에 연연하는 것이 시간 낭비로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자신을 잘 알면서도 작년에 이어 올해도 조용히 보내고 싶은 연말을
사소한 다툼으로 시작해서 지나친 감정 싸움으로 만들어버린 경수의
태도가 상당히 불만스러웠다.

뭐 그렇다고 해서 그런 싸움을 마음 속에 담아두거나 하지는 않았지만
혜중에겐 그 순간의 감정 소모가 피곤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던 것이다.
경수 말로는 이런 것도 다 정 들이는 방법이라지만 여기서 더 얼마나
정을 들여야 만족스럽다는 건지 알 수 없었다.
이미 따로 때어놓고는 생각 조차 할 수 없을 만큼 그렇게 가까운데 얼마나
더 가까워져야 경수의 마음이 흡족해질지를 가늠하기 어려웠다.

가족들의 엄청난 반대와 방해에도 끄떡도 하지 않고 경수의 옆을 지키고
있는 것만으로는 만족할 수 없다는 것일까?
아무것도 하지 않고 바보 마냥 옆에 앉아 자신만 바라봐줘야 만족하는 것일까?

가끔 혜중은 그런 의문을 떠올리곤 했다.

여기서 더 이상 어떻게 해줘야 하는 걸까라는...

남들과 다르게 감정적인 부분엔 지나치게 둔한 혜중에게서 가물에 콩 나듯
이라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끌어내는 것이나, 그가 아니면 어느 누구도 안된
다는 느낌에 때로 두려움까지 느끼게 만드는 것으로는 만족할 수 없는 것일까?

너무 지나치게 심각한 생각을 하는 것일지 모르지만 혜중으로선 이런 사소한
일로 투덜거리고 마음 상해하는 경수와 연진을 이해할 수 가 없었다.
아니 이해는 고사하고 그들의 그런 욕심자체가 혜중에겐 도무지 생겨나지 않는
아주 생소한 감정이었다.


지나치게 건조한 말투로 타박을 주는 혜중의 태도에 순간 멈칫하던 연진이
이젠 아예 눈물을 흘리며 야속하다는 얼굴로 그를 노려보기 시작했다.

"흑... 혜중오빤 어쩜 그래요?
위로는 못해줄 망정 어떻게 그렇게 냉정하게 말을 해요?
철 없어요. 저 철없는 애 맞아요. 이제 겨우 24살이라구요.
그래도 제 친구들에 비해서 어른스럽다는 말 듣는다구요.
제가 오죽 속상하고 화가 나면 이러겠어요? 흑.. 경수오빠가 불쌍해.
오빠 속상하지 않아요?
어떻게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크리스마스를 따로 보내 겠다는 말이
나와요? 일이 아무리 바빠도 그렇지... 우앙...."

아예 소리 내 울어버리는 연진을 한심하다는 얼굴로 쳐다보던
혜중은 옆에서 느껴지는 따가운 시선에 경수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니나 다를까 원망과 야속함을 가득 담은 경수의 눈초리가 마치
그를 뚫어 버리기라도 할 것처럼 자신에게 꽂히고 있었다.

그런 그를 멀뚱하게 쳐다보고 있던 혜중은 곧 시선을 돌려버리고
말았다.
경수의 저런 눈초리 공격이 혜중에겐 어떤 공격보다도 무서웠다.
차라리 소리를 치고 화를 낸다면 쉽게 상대를 하련만 한마디도 하지
않고 저런 식으로 뚫어지게 자신을 쳐다볼 때는 정말 어떻게 해야
할지 적응이 되지 않는 것이다.

머쓱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린 혜중은 또 다른 원망의 시선에 아예
이 자리를 피하고 싶어져 버렸다.
맞은 편에 앉은 연진 역시 눈물이 그렁그렁한 눈으로 자신을 쳐다
보며 원망의 눈초리 공격을 날리고 있었던 것이다.

대체 내가 뭘 잘못했다고...

연진을 두고 가버린 건 진우였다. 그리고 그건 진우가 판단한 일이지
혜중이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니었다.
그런데 어째서 연진에게까지 저런 눈총을 받아야 하는 건지..

그냥 일어서서 자리를 피해버릴까 하는 생각을 잠시 했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연진이 문제가 아니라 경수와의 문제를 해결하지 않으면 아주 피곤해질
것이 분명하기 때문이었다.
여자들처럼 토라져 징징대지는 않지만 진짜 화가 나면 일주일이고
열흘이고 아예 입을 다물어버리는 경수의 복수는 혜중을 숨막히게
만들었던 것이다.
주절주절 말이 많은 성격은 아니지만 그래도 혜중에 비해서 말을
많이 하는 경수조차 입을 다물어 버리면 두 사람의 집은 그야말로
무덤 속처럼 괴괴한 적막에 싸여버리게 되고 거기에 더해서
냉랭한 냉기가 감돌았다.

혜중은 그런 상황을 견디는 것이 힘들었다.
안 그래도 두 사람의 일로 인해서 양쪽 집에서는 아직까지도
둘을 갈라놓으려고 기를 쓰고 방해공작을 펼치고 있는데다,
어쩌다 보니 직장에서도 아주 극소수의 사람들이긴 해도
두 사람의 관계를 눈치 채이는 바람에 오나가나 사람들의
이상야릇한 눈초리에 시달리는 것이 지긋지긋했다.
그나마 이 작은 공간 안에서만큼은 사람들의 시선이나 비난어린
말들을 피할 수 있었고, 그리고 이곳엔 사랑이 있었다.
혜중에겐 이 공간만이 유일하게 안심하고 숨을 쉴 수 있는 곳이었기
때문에 경수와 사소한 다툼으로 분위기가 굳어지는 것이
가장 싫었던 것이다.

적어도 사람이 숨은 쉬고 살아야 하는 거니까.

그런데도 올 해 또 같은 일로 살벌하기 그지없는 싸움을
벌이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그의 성격 탓이었다.
도대체 크리스마스라는 것에 목숨을 걸기라도 한 것처럼
특별한 날로 만들려는 것을 혜중은 납득할 수 없었으니까.

처음 크리스마스를 맞이했을 때는 두 사람 사이의 감정과
환경 변화에 적응 하느라, 그런 것에 신경을 쓸 여유 따위가
없었다.
정말 어떻게 서로의 감정을 표현해야 하는지 라는 문제 말고는
다른 어떤 것도 마음을 쓸 수 없었고, 어쩌면 그래서 탈없이
잘 넘어갔던 건지도 몰랐다.
하지만 그렇게 해가 바뀌고 일년을 보내면서 조금씩 틀이 잡히고,
지금까지와는 아주 달라져 버린 둘의 관계에 적응하다 보니 다른
것에도 마음을 쓰고, 신경을 분산할 여유가 생겼고, 두 번 째
크리스마스에 드디어 생각지도 못했던 충돌을 겪어야 했다.

그땐 크리스마스 연휴에 지방 출장을 가야 했던 경수가 함께
가자고 청해왔었다.
아니 청했다기보다는 당연히 함께 갈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크리스마스 따위에 별 의미를 두지 않는 혜중으로선
출장지까지 자신이 따라가야 할 이유를 알 수 없었기 때문에
일언지하에 함께 가자는 경수의 말을 잘라버렸고, 설득과 회유,
협박이 오가는 사이에 두 사람의 집은 포근한 안식처가 아닌
전쟁과 감정싸움의 장이 되어버렸던 것이다.

굳이 함께 가야 하는 이유를 세가지만 대보라는 혜중의 대거리에
딱히 상식적이고 이성적인 이유를 대지 못했던 경수는 결국 자신의
바램을 접을 수밖에 없었지만 작년의 그 일을 계속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지 겨울이 다가오는 시점부터 크리스마스 타령을 하며 단단히
벼르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산다는 것이 결코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듯이 아무리 굳은
결심을 하고 계획을 세운다 한들 닥치는 일은 어찌할 수 없는 것이다.

올핸 경수가 아닌 혜중에게 일이 생겨 버렸다.
꽤나 유명한 M&A 회사에 근무하고 있는 혜중은 직장에서도 상당히
인정 받는 직원이었다.
무엇 보다도 일에 있어서는 개인 감정 따위는 일푼어치도 개입시키지
않고 철저하게 일을 진행시키는 면들이 윗 사람들의 눈에 들었던 것이다.
뭐 그 덕에 젊은 나이에 비해서는 상당히 많은 연봉과 파격적인 대우를
받고 있었고 굵직굵직한 일들이 맡겨지곤 했다.
그리고 올 초에 맡았던 일을 성공리에 성사시킨 혜중의 노력을
높이 산 사장은 연말 보너스 겸 워크샵을 가장한 전직원 야유회를
계획했고, 그 시기가 하필이면 크리스마스 연휴였다.

기혼인 직원은 무조건 가족동반의 워크샵 아닌 워크샵에 빠진다는
것은 불가능 했다.
아무리 그런 야유회 따위를 질색하는 혜중일지라도 자신으로
인해서 계획된 행사까지 무시해버릴 만큼 경우 없는 사람은
아니었기 때문에 희희낙락 크리스마스 계획을 세우고 있는
경수에게 찬물을 끼얹은 것이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그의 감정을
건드렸고, 결국 또 이런 식의 감정싸움으로 번지고 말았던 것이다.

그런데 거기다 연진까지 가세를 해서 무심한 연인이라는 둥,
그럴 수는 없는 거라는 둥 경수의 화에 기름을 들이 붓고 있으니
혜중으로선 이 상황을 대체 어떻게 타계를 해야 할지 도무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그만 울어라. 너 사실은 울 정도로 속상한 것도 아니잖아.
그리고 경수 너도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내가 원해서 이렇게 된 것도 아니고
애초에 니가 계획 세울 때 내가 싫다고 했어? 아니잖아.
내가 원해서 그렇게 된 게 아니라는 거 잘 알면서 왜 그래?
올해가 안되면 내년에 같이 있으면 되는 거고,
꼭 크리스마스가 아니어도 일년 내내 같이 붙어 있는데
더 어떻게 해야 하는 거냐?
너 나 이런 거 모르고 시작한 것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따위
나한테 별 의미가 없다는 거 너도 잘 알잖아.
괜히 쓸데없이 감정만 키우지 말자 우리..
합리적으로 생각해 봐.
이번 워크샵은 나 하나 때문에 계획된 거야.
그런 자리를 내 개인사정을 핑계로 빠질 수 있다고 생각하니?
아니.. 뭐라고 핑계를 댈까?
아예 대놓고 내 애인이 죽어도 같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고 말해?
아니면 멀쩡한 부모님이라도 입원시킬까?
그것도 아니면 내 다리라도 분지를까?
말해 봐. 어떻게 하는 게 좋겠어?
이성적으로 판단해서 순리를 따르는 게 좋겠냐?
아니면 감정적으로 현실을 무시하는 게 좋겠냐?
연진이 너도 마찬가지야.
진우가 무심한 성격인건 사실이지만 그렇다고 아무렇지도 않게
상대의 감정을 무시하는 놈은 아니야.
그럴만하니까 같이 안간 거지, 아니 못간 거겠지.
아까 경수도 말했지만 일에 빠지면 자는 것도 잊어버릴
만큼 깊이 빠져 버리는 거 이젠 너도 알 거 같은데?
감정이 개입됐다고 해서 전엔 이해하던 것들을 지금은
이해 못한다고 하면 너희 둘 다 어른 소리 들을 자격 없어.
내 말이 틀렸어? 조금만 이성적이 돼봐라.
아무리 사랑이 감정이라지만 감정으로 현실을 살 수는 없는 거잖아.
난 들어가서 일 좀 해야겠다.
내일까지 제출해야 할 보고서 마무리 해야 해.
잘들 생각해봐. 과연 누구 말이 옳은지.."


지루한 표정으로 제 할 말만 쭈르르 쏟아 놓고는 서재로 들어가
버리는 혜중을 어이없는 얼굴로 쳐다보던 두 사람은 제풀에
지치기라도 한 듯이 동시에 한숨을 내 쉬었다.

틀린 말은 아니었다.
따지고 보면 혜중이 한 말들은 전부 딱 떨어지게 맞는
말들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라는 것이 어디 항상 이성만 따라주는
것이냔 말이다.
혜중 자신은 이성적인 판단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솔직히
표현하자면 지나치게 무관심, 무감동, 무반응인 그의 신경체계에도
다분히 문제는 있다고 생각하는 연진으로선 같이 한숨을 내뱉고
있는 경수가 갑자기 불쌍하게 느껴졌다.
한때 혜중을 마음에 담아두었었기에 어쩌면 누구 보다도 지금
경수의 심정이 어떠할지 가장 잘 알 수 있는 사람은 아마
연진일 것이다.

물론 혜중만큼은 아니라고 해도 진우 역시 매사에 무신경하기
그지없는 사람이고 보면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는 것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둘이 무슨 일이에요? 나 괜히 온 거 같아..."

휭하니 서재로 들어가버리는 혜중의 태도에 머쓱해진 연진이
미안한 표정을 짓자 경수는 사람 좋은 웃음을 보이며 그녀를 달랬다.

"별거 아니야. 늘 있는 일이지 뭐. 혜중이 성격이야 원래 그렇잖아."

"오빠네도 이번 크리스마스 그냥 넘어가는 거에요?"

"아무래도 그럴 거 같아.
하필이면 그때 혜중이네 회사에서 워크샵이 있어서.
그 문제로 좀 다투긴 했지만 어쩌겠니?
그 녀석 때문에 잡은 계획이라는데
그렇다고 내가 따라갈 수도 없는 노릇이고.."

"후우.. 너무 불공평해요. 항상 경수 오빠가 져주는 거
같아 보인다구요."

한숨을 내쉬며 투덜거리는 연진의 머리를 흐트려준 경수는
그녀만큼은 아니었지만 조금쯤 서운한 표정으로 혜중을 변명했다.

"일부러 작정하고 그런 것도 아니고, 어쩌겠어.
원래 조금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해지기 마련이야.
그리고 별로 손해 본다는 생각도 안 해.
가끔은 이런 사소한 다툼이 번거롭기도 하지만
오히려 그게 우릴 더 가깝게 해주는 거 같다.
서로 지나치게 배려 하고 조심하는 건 사랑이 아니라고 생각해.
뭐 두 사람의 관계니까 어쩔 수 없이 힘의 균형 같은 게
생기긴 하지만..."

편안한 표정으로 이야기하는 경수를 향해 연진은 조금 앙칼진
말투로 그의 말을 끊고 반박을 했다.

"하지만 어느 한 쪽이 일방적으로 굽혀준다는 건 말이 안돼요.
서로 사랑하는 사이라면 두 사람의 관계는 동등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힘의 균형 같은 건 사랑하는 연인 사이엔 적용될 수 없는 거잖아요."

그런 연진을 보며 경수는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부부 사이의 일은 본인들 외엔 절대 알 수 없는 거라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니라는 생각이 문득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글쎄.. 일반적인 논리가 적용될 수 없는 게 혜중이와 나 잖아."

일반적인 논리가 적용될 수 없다는 말 한마디가 연진의 앙칼진
흥분을 가라앉게 만들었다.
결코 일반적이지 않았다.
그렇기 때문에 그들에게 일반적인 논리 역시 적용될 수 없다는
경수의 말엔 연진도 더 이상 반박할 수 없는 것이다.

두 사람의 관계를 납득하고, 받아들이고, 지지하는 입장이라고
해도 이런 식의 이야기가 나올 때면 왠지 모르게 가해자가 되어
버린 것처럼 머쓱해지곤 했다.
물론 연진은 가해자가 아닌 조력자의 입장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두 사람의 관계를 놓고 비난의 손가락질을 해대는 일부 사람들은
그녀와 친분이 있기 때문에 때론 자신도 그들과 같다는 생각을
문득 하곤 했다.

머쓱한 표정을 하는 연진을 보며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띤
경수가 계속해서 이야기를 이어갔다.

"다른 사람들이 보기엔 내가 일방적으로 져주는 것처럼 보일지
모르지만 사실 그렇지 않아.
혜중이 역시 나로 인해서 포기하는 것들, 참고 견디는 것들이 많거든.
부부 사이의 일은 두 사람 외엔 알 수 없다는 말이 왜 나왔겠니.
겉으로 보여지는 모습이 다가 아니야.
혜중이랑 나는 아주 오랫동안 친구였고 서로 모르는 게 없다고
자부하고 있었지만 막상 함께 살아 보니까 의외의 면들이 얼마나
많은지 놀랄 때가 많아.
이건 하나의 과정이라고 생각해.”

잠시 말을 멈추고 연진을 바라보던 경수는 진지함 그 자체의
표정으로 다시 말을 이었다.

“이렇게 투닥거리고 다투면서 서로를 더 깊이 알고, 받아들이고,
그리고 서로에게 동화되어 가는 과정.
그러면서 조금씩 더 많이 사랑하게 되는 거 같다.
왜 결혼은 현실이란 말을 하는지 이제야 조금씩 알아 가는 거지.
서로 다른 두 사람이 감정이든 조건이든 함께 살아간다는 거,
결코 쉬운 일이 아니거든.
그리고 난 죽음이 우릴 갈라놓을 때까지,
아니 그 후에라도 녀석을 놓아줄 마음은 전혀 없으니까.
그건 혜중이도 마찬가지고….
그러니까 더 노력할 수밖에..
힘들 때도 있지만 그것조차도 즐겁다고 생각해.
그렇게 조금씩 더 가까워지는 걸 느낄 수 있으니까.”

여전히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는 연진에게 찡긋 윙크를 하며
경수는 계속 말을 이어갔다.

“가끔은 어느 한쪽이 기다려야 할 때도 있어.
둘이 함께 만들어가고 걸어가는 삶이지만 그 걸음이 항상
같을 수는 없는 거야.
조금 먼저 앞서있는 사람이 뒤에서 따라오는 사람을 기다려
주기도 해야 하거든..
무작정 잡아 끄는 게 능사는 아니지.
잡아 끌어서 따라와지는 사람도 있고 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니까. 나 기다리는 거 잘하잖아.
여태 기다렸는데, 이젠 여기까지 왔으니까..
평생을 앞에 서서 기다려야 한다고 해도 나 전혀 싫지 않아.
기다려서 따라오는 사람이 혜중이기 때문에.. 하하..
이거 말 해놓고 보니 쑥스럽다.”

경수의 이야기를 들으면서 연진은 문득 함께 한다는 것에 대해서
자신은 단 한번도 심각하게 고민해 본적이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아직 그런 것을 생각할만한 나이가 아니라고 하지만 적어도
진우에 대한 감정을 키워오면서 그저 그 감정을 가꾸고 키우는
것에만 연연했지 한번도 언제까지 함께 일지, 그리고 진우가 어떤
생각을 하고 있을지는 그다지 심각하게 생각해 본적이 없었던 것이다.

경수는 원래 진지하기 그지없는 사람이었고, 넉넉하리 만큼
이해심과 배려가 넘치는 사람이었지만 요즘의 경수는 그 보다
한층 더 성숙해진 느낌이었다.
아마도 그건 혜중과의 관계에서 채워지는 감정적인 안정감
때문일 것이다.

“쳇… 아무래도 난 선택을 잘못한 거 같아.
경수 오빠를 찍었어야 하는 건데.. 진우 오빠가 오빠의 반, 아니
십분의 일이라도 닮아주면 얼마나 좋아요.
도무지 그 아저씨가 서른 넷이나 된 성인이라고 볼 수가 있어야죠.”

밉지 않게 투덜거리는 연진을 보며 경수는 모처럼 가벼운 마음으로
소리 내어 웃을 수 이었다.
그녀에게 말은 그렇게 했지만 역시 사람인지라 마음 한 구석에
미진하게 남아 있는 서운함을 완전히 떨쳐내긴 힘들었던 것이다.
어쩌면 연진을 향해 뱉어낸 말들은 그런 자신을 다독이기 위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건 다른 때와 마찬가지로 서운하다고 아우성치는 자신의
약한 마음을 다정하게 다독여주었다.
거기다 연진의 귀여운 투정이 그 다독임을 한층 더 해주기도 했고..

“하하… 남의 손에 있는 떡이 더 커 보이는 법이야.
너야 내가 보여주는 좋은 면만 보니까 그렇지.
아마 다른 누군가도 너에게 같은 말을 할걸?
자기 애인보다 진우가 훨씬 낫다고..
진우 녀석 성격 좋잖아. 일만 아니면 항상 너한테 충성인데 뭘…”

“그렇긴 하지만.. 오빠들은 저처럼 다른 사람하고 서로 비교하는
일은 없잖아요. 남의 손에 있는 떡이 더 커 보이는 거 말이에요.”

애써 반박하는 연진의 콧등을 살짝 쥐어 준 경수가 핀잔을 주었다.

“경우가 다르잖아. 경우가.. 우린 일반적인 관계가 아니니까.
비교될 수가 없지.”

“그렇긴 하지만요..”

이런 말이 나오면 더 이상 반박 따위는 할 수 없어진다.
그런 연진을 보고 피식 웃어주고 자리에서 일어난 경수가
주방 쪽으로 향했다.

“됐어. 모처럼 왔으니까 저녁 먹고 가라.
너 이 시간에 굶겨 보낸 거 진우가 알면 난리 난다.”

“흥.. 애인도 필요 없다고 팽개치고 가버린 사람이 난리 쳐 봤자죠.
진우 오빠 때문에 저녁 먹고 가는 거 아니에요.
오랜만에 경수 오빠가 해준 밥 먹고 싶은 거니까.. 칫..”


확실히 스물 넷이라는 나이에 비해 조금 과하다 싶을 만큼
어른스럽지만 그만큼 털털하고 귀여운 구석이 있는 아이였다.
여자에게 그닥 관심도 미련도 두지 않던 진우가 그녀에게 빠져버린
것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을 만큼 연진은 특별한 아이였다.


귀엽게 궁시렁거리며 저녁 준비를 돕겠다고 나서는 그녀를 보며
경수는 문득 자신이 굉장히 운이 좋은 사람이란 생각을 했다.
사랑하는 사람과 함께 살아가고 있고, 그들의 주변엔 무조건
두 사람을 받아들이고 편이 되어 주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가족들의 반대나 세상의 곱지 않은 시선 때문에 느껴야 하는
괴로움과 부담을 상쇄시키고도 남을 만큼의 행운을 감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비록 사소한 일로 다투긴 했지만 오히려 이런 다툼들이 둘을
더욱 가깝게 묶어 주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알고 있었다.
또 이렇게 서로의 다른 생각들을 발견하고 조금씩 더 가까워져
가는 것이 참된 삶의 발견이라는 생각이 그를 흐뭇하게 만들었다.

오늘쯤은 고집을 꺾고 혜중이 마음 편하게 다녀올 수 있도록
해줘야겠다는 생각을 하며 저녁을 준비하기 시작했다.
아무리 둔하기 그지없는 사람이라고 해도 이런 껄끄러움을 남긴
채로는 무엇을 해도 결코 편하지 않을 테니까….
.









“잘 갔다 와라. 조심하고… 다치지 말고..
동료들 하고 가는 거니까 먹는 거야 잘 먹긴 하겠지만
그래도 끼니 거르지 말고. 도착하면 전화 하고…
편하게 놀다 와.”

“안 다쳐. 갔다 올게.”

무표정한 얼굴로 당부하는 말들을 반쯤 짤라 먹어버린
혜중의 인사에 경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그럼 그렇지라는
표정으로 현관 밖으로 따라 나섰다.

“추워. 나오지 마.”

“너 엘리베이터 타는 거 보고…”

말이 끝나기 바쁘게 도착한 엘리베이터에 오르는 혜중의
뒷 모습을 바라보던 경수는 고집스러워 보이는 그의 등을
뒤쪽에서 덥썩 끌어 안았다.
이런 돌발적인 행동을 그가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은
잘알고 있었지만 왠지 이렇게 하고 싶다는 욕구가 그의 이성을
이겨버린 것이다.

“김경수.”

평소라면 짜증스럽게 이런 경수의 손을 떨쳐버렸을 터인데
오늘 혜중은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경수가 잔소리처럼 하는 말을 짤라 먹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씹어 먹어버리는 경우가 허다한 그가 갔다 오겠다는
인사를 한 것도 그렇지만 이런 돌발적인 행동에 질색을 하
고 뿌리치지 않는 것을 보면 말이다.

“편하게 갔다 와. 나 신경 쓰지 말고..”

“응. 미안… 갔다 올게.”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 웅얼거리는 경수를 슬쩍 밀어내고
마주 선 혜중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기 전에 평소와
달리 미안함이 서린 얼굴로 뭔가 낮게 중얼거렸다..
워낙 낮게 흘러나온 소리라 자칫 잘못 들었을지도 모르지만
분명히 미안이라고 말했다.

평소답지 않은 혜중의 말에 잠시 얼어붙어 있던 경수는
엘리베이터가 닫히고, 아래층으로 내려가기 시작하고 서야
그 말을 제대로 인식했다.

“에… 혜.. 혜중아..”

엉겁결에 닫힌 문을 향해서 혜중의 이름을 불렀지만 이미
엘리베이터는 일층을 향하고 있었다.



얼빠진 얼굴로 멍하니 엘리베이터를 쳐다 보고있던 경수는
옆집 문이 열리는 소리에 그제서야 정신을 차리고 서둘러
집으로 들어갔다. 그리고 미친 사람처럼 헤죽헤죽 흘러나오는
웃음을 도저히 자제할 수가 없었다.

혜중 때문에 새벽에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아마 오늘은 해가
서쪽에서 떴을 거라고 생각했겠지..
살다 보면 정말 생각지도 못한 일들을 수도 없이 겪게 되는
거라고…

거실 한 가운데 서서 실실 쪼개며 미친놈 마냥 건들거리던
경수가 결국은 온 집안이 떠나가라 소리를 치며 뛰어 올랐다.


“혜중아~ 사랑해. 사랑한다 유 혜중. 아하하하하하하하….”

절대 혜중에게 들릴 리 없는 외침이었고 설령 들렸다고 한들
‘미친놈’ 소리 말고는 다른 어떤 말도 듣지 못할 것이 분명했
지만 그런 것은 상관없었다.

간간히 듣는 사랑한다는 말 보다도 오늘 새벽 혜중이 던진
한 마디가 더 기쁜 이유를 누군가 설명하라고 한다면 딱히
논리적인 설명을 할 수 없지만 그래도 어쨌거나 경수는 기뻤다.
아니 행복했다.










편하게 다녀오라는 말을 들었지만 결코 편한 마음이 될 수 없었다.
그 날, 연진이 찾아왔던 날 경수가 했던 말들을 듣지 못했다면,
어쩌면 그랬다면 조금은 평소처럼 그저 무심하게 자신이 놓여진
상황에 충실할 수 있었을지 모르지만 운이 없어서인지, 아니면
이제쯤은 그도 생각을 달리해야 할 때여서 인지 몰라도 경수가
했던 말들은 고스란히 혜중의 귀를, 그리고 청각기관을 통해서
그의 기억 속에 새겨져 버렸던 것이다.


그런 이유로 혜중은 워크샵 내내 나름대로는 꽤나 심각한 얼굴로
과연 자신이 경수를 위해서 고집을 꺾었던 적이 몇 번이나 있었는
지 지나간 시간들을 되짚어 보고 있었다.
하지만 어이없게도 경수를 위해서 자기 고집을 꺾었던 일이라곤
열 손가락이 부끄러울 정도로 드물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뿐이다.

그리고 그것이 혜중의 마음을 불편하게 만들었다.
누군가 타인으로 인해서 불편한 마음을 갖는 다는 것이 혜중에겐
생소한 일이었다. 아니 무언가에 감정을 갖는 다는 것 자체가 그와는
무관한 일이었었다.

물론 그가 전혀 감정이 없는 사람이었던 것은 아니다.
단지 그런 것에 둔감하다고 해야 할까? 아니면 느리다고 해야 할까?
자신의 감정 변화에 대해서 둔하고 무딘 만큼 타인의 감정에 대해
서도 역시 둔하고 무딜 수밖에 없는 것이다.
오랜 시간을 그렇게 살다 보니 어느 순간부터는 느리게 깨닫고
눈치챈다고 해도 이미 자신이 어떻게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어버렸
거나 아니면 너무 오랜 일이라서 상대도 무뎌져 버린 그런 경우가
대부분이고 보니 무언가 느끼고 깨닫는다고 해도 이미 늦어버렸다는
생각에 아예 무시하게 되고, 어느 새 그것이 습관처럼 굳어지고 종내
그의 성격이 되어버렸다.

경수와 함께 살면서부터 아주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렇다고 그것이 눈에 보이게 달라진 것은 아니었다.
일단 느리고 무딘 것을 떠나서, 스스로 능동적으로 자신을 표현한다
거나 하는 것 자체가 혜중에겐 상당히 어려운 일이기도 했고,
누군가 눈치채고 아는 체를 한다면 모를까 스스로의 변화에 대해서
드러내 놓고 표를 내는 것을 체질적으로 싫어하다 보니
그에 대해서 유난히 민감하거나 관심이 많은 사람이 아니고서는
혜중의 변화를 쉽게 눈치채는 사람은 극히 드물었다.
뭐 그보다 훨씬 예민하다고 할 수 있는 경수조차 함께 사는데도
불구하고 그런 혜중의 변화에 대해서 느끼지 못하는 것 같았으니까.

하지만 지금 중요한 것은 자신의 조그만 변화 같은 것이 아니었다.
과연 두 사람의 관계에서 자신이 해야 할 역할이나 어떤 노력을 해
야 하는지에 관한 것이었다.
지금까지 스스로 한 것이라고는 경수가 영영 가버릴까 두려워 손을
내밀었던 것 말고는 딱히 둘 사이에서 그가 자청하고 움직인 것은
거의 없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사회에서든, 그 이외의 관계에서든 힘들기는 경수나 자신이나 매한
가지, 똑같음에도 불구하고….







첫날은 야간 스키를 탄다는 목적으로 다들 우르르 몰려 나가 밤
새 복작거리는 스키장을 누비고 다녔고 둘째 날은 크리스마스
이브를 축하하며 직원과 그 가족 모두가 설천 호수 카페의 야외
모임터에 모여 캠프 화이어와 바비큐 그리고 당연히 따라다니는
술 파티가 벌어진 지 오래였다.

피곤함을 느끼는 것이 정상일 텐데 그조차 느껴지지 않는 것을
보면 지금 자신의 상태가 결코 정상은 아니라는 생각을 하고 있는
혜중은 자신의 표정이 평소와 상당히 다르다는 것을 모르고 있었다.
첫날부터 심상치 않은 표정이라고 다들 등 뒤에서 수근거리고 있
다는 것은 전혀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오히려 눈치챈다면 그것이 더 이상한 일일 테지만..

몇 사람은 꽤 거하게 취해서 같이 온 가족들의 손에 이끌려
숙소로 돌아 갔고, 남은 사람들은 회사 내에서 주당으로 손
꼽히는 몇몇과 늙은 축에도 젊은 축에도 끼지 못하는 애매모
호한 나이의 사람들 몇뿐이었다.
이미 새벽을 훌쩍 넘어서 아침을 향해 가는 시간이다 보니
다들 옹기종기 모닥불 앞에 모여 앉아 편한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지만 유독 혜중만은 한쪽에 떨어져 앉아 자신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다들 그런 혜중을 눈치채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나서서 말을
걸지 않고 있었다. 그만큼 골똘하게 생각에 빠져든 그의 모습
이 ‘나한테 말 걸지 마쇼..’ 라고 시위하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런 이유로 어떤 방해도 없이 자기 생각에 골몰해서 새벽이
깊어 가는지, 날이 추워 모닥불이 있는 앞 쪽은 몰라도 등 쪽은
싸늘하게 얼어가고 있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있는 혜중의
비어있는 옆자리에 누군가 다가와 털썩 주저 앉으며 따듯한 커피를
한잔 불쑥 내밀었다.

코 앞에 디밀어지는 커피잔에 소스라치게 놀라 생각에서 빠져
나온 혜중은 그 잔을 내민 손의 임자가 김 수현 이사 라는 것을
발견하고는 놀란 숨을 내쉬었다.

“이사님..”

“무슨 생각을 그렇게 골똘히 해요? 아까부터 계속 보고 있었는데..
생각에 빠져서 다들 들어간 것도 모르고 있더군요.”

“아..예? 다들….. 들어갔습니까?”

“그래요. 남아있던 사람 중에 몇 사람은 새벽산책 한다고 산책로로
가버렸고, 나머진 자야겠다고 숙소로 가버렸죠.
먼저 간다는 인사도 그냥 낼름 씹어서 삼켜버리는 걸 보면
꽤 심각한 생각 중이었던 것 같은데.. 내가 괜히 방해한건가요?”

“아.. 아닙니다.”

“흠.. 그래요? 그런데 왜 난 혜중씨가 뭔가 심각하게 고민 중이라는
생각이 드는 걸까? 첫날부터 표정이 심상치가 않거든..
몰랐죠? 다들 혜중씨 눈치 보면서 쉬쉬하고 있는 거.
사장님도 한 마디 하시려다 혜중씨 표정이 영 심상치 않아 그냥
아무 말씀 못하고 넘어가시던데. 말해봐요. 뭐 문제 있어요?”

사뭇 진지한 표정을 하고 질문을 던지는 김 이사를 외면하기가
쉽지 않았다. 회사에서 혜중이 남자와 연애 중이라는 것을 아는
몇 사람 중 하나이기도 했지만 어쩌면 그들 중 유일하게 혜중을
이해해주는 사람일지도 몰랐고, 그런 것을 떠나서도 일단 그는
회사에서 혜중이 가장 편하게 생각하는 사람이기 때문이었다.

아직까지 자신의 문제를 두고 그와 진지하게 이야기를 해본적은
없었지만 한번쯤 솔직하게 모든 것을 터놓고 이야기 해보고 싶은
사람이었다.
대부분의 직원들이 업무 상의 문제뿐 아니라 종종 개인적인
문제로도 그와 상담을 하고 있었고, 어쩌면 지금 혜중의 머리
속을 오가는 복잡한 문제들에 대해서 그와 이야기를 나눈다면
조금 더 수월하게 정리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선뜻 이야기를 꺼내는 것이 어려웠다.

일단 혜중의 성격 자체가 자신의 문제를 쉽게 타인과 상담하는데
익숙하지 않았고, 설령 혜중이 아닌 다른 사람이라고 하더라도
연애 문제, 그것도 일반적이지 않은 연애문제를 다른 사람에게
이야기 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었다.

선뜻 입을 열지 못하고 곤란한 표정으로 주저하는 혜중을
묵묵히 지켜 보던 김수현이 조심스럽게 먼저 운을 떼었다.


“혹시.. 혜중씨 곁에 있는 사람하고 뭔가 문제가 있는 건가요?
음.. 이건 그냥 넘겨짚은 거지만.. 그래도 크리스마스라서
여기 온다는 게 쉽지 않을 것 같은데. 선선히 다녀오라고 해요?
내 기억엔 작년에도 휴일 반납하고 일을 했던 것 같은데…
무슨 문제죠? 혼자 고민하는 것 보다는 나라도 좋다면 이야기
들어주는 것 정도는 해줄 수 있어요.
두 사람의 문제인 거지만 가끔은 제 삼자의 시선이 정확할
때도 있는 법이죠.
쓸데없는 간섭인지 모르겠지만 말이에요.”


순간 혜중은 역시 김수현 이사라는 생각을 했다.
겉으로 보기엔 상당히 유하고 느긋해 보이는 모습이지만
어떤 일이든 날카롭게 문제의 본질을 꿰뚫어 볼 줄 알았고
그것을 캐치하고 나면 절대 머뭇대지 않고 순식간에 문제의
해결책을 찾아낼 만큼 행동력이 있는 사람이었다.
마치 한번 점 찍은 사냥감은 절대 놓치는 법이 없는 숫사자
처럼 언제 날카로운 이를 드러내고 달려들지 알 수 없는
면도 갖고 있었다.
물론 그런 부분은 대체로 일에 관련 되어 나타나곤 하지만
때로는 대인관계에서도 그의 날카로운 직감과 행동력이
발휘되곤 하는 것이다.

사실 혜중의 연애관계를 알고 있는 사람이라면 지금 그의
이상한 태도들이 그런 문제와 관련이 있을 것이라고 짐작이야
쉽게 할 수 있겠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직선적으로 문제를
찔러 말할 사람은 없었다.
그만큼 혜중이라는 존재가 사람들에겐 도무지 쉽게 다가서서
사적인 이야기를 할 정도로 편한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사장조차도 뭔가 한마디 하고 싶은 것을 참고 넘어갈 정도
였으니까.

하지만 김수현은 역시 김수현이었다.
쉽게 그리고 당연하다는 듯이 직선적으로 문제에 접근
하면서도 상대의 기분을 상하게 하지 않을 수 있는 요령이
있는 사람이었다.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임에도 전혀 상관없는 제삼자가 아는
척 하는 것이 기분 나쁘게 여겨지지 않도록 할 수 있는
김수현 만의 독특한 분위기 때문일까..
직원들이 가끔 그에게 개인적인 문제를 가지고 상담을 요청
하곤 하는 이유를 혜중도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다.


진지하고 조심스러운 김수현의 얼굴을 물끄러미 쳐다보고 있던
혜중은 문득 그라면 자신의 이야기를 듣고 좀더 쉽게 문제를
풀어갈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딱히 그와 어떤 이야기를 나눠 보고 경험을 해본 것은
아니었지만 왠지 그라면 그렇게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혜중이 조금씩 사그라들고 있는 모닥불 쪽으로
시선을 돌리며 며칠 전 있었던 일에 대해서 차분하게 이야기
하기 시작했다.
사실 그건 어찌 보면 단순한 사랑싸움일 수도 있지만 그것이
일반이 아닌 동성의 문제이고 보면 절대 덤덤하게 이야기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었다. 그런데도 혜중은 마치 남의 일을 이야기
하듯 톤의 변화도 없이 이야기를 꺼내고 있었다.

자신의 이야기를 진지하게 듣고 있는 김수현의 얼굴에 역시나..
하는 표정이 스쳐갔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혜중은 머리 속을
헤집고 있는 생각들을 쏟아놓고 있었다.




그리 긴 시간을 필요로 하는 이야기는 아니었다.
사실 일 자체만으로는 단 몇 시간 사이에 벌어졌던 일이고
그걸 설명하는데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진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생각 보다 이야기를 쏟아 놓는데 꽤 긴 시간이 흐른
이유는 그 일에 대한 설명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혜중의 머리 속을 어지럽히는 생소한 감정과 생각들,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그 끊임없는 생각을 정리해서 이야기
한다는 것이 쉽지 않았던 것이다.
말주변이 뛰어난 것도 아니고, 또 평소 말을 즐기는 타입도
아닌 혜중으로선 단순 명쾌하지 않은 감정이라는 것을 언어로
표현해낸다는 것이 힘겨울 수밖에 없었다.

다행이도 김수현은 타인의 이야기를 들어 줄줄 아는 사람이었다.
어떻게 해야 상대가 편하게 자신의 이야기를 할 수 있는지를
잘 아는 사람이었고, 그것이 혜중으로 하여금 어눌할 망정 더듬더듬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기 쉽게 도와주었다.


혜중이 이야기 하는 내내 한마디 토도 달지 않고 진지한
얼굴로 듣고 있던 김수현은 이야기가 끝나고도 한참을 말 없이
모닥불을 바라보기만 했다.

괜한 이야기를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기 시작할 즈음
처음과는 달리 조금 무거워진 음성으로 입을 열었다.

“두 사람의 관계가 꼭 동등하고 평등해야 하는 건 아니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일방적으로 기다리게 하는 건 그다지…
나도 같은 일을 하고 있으니까.. 알아요. 끝이 보이는 것이든
보이지 않는 것이든.. 기다린다는 것은 괴로운 거죠.”

사뭇 담담한 표정이었지만 그 담담한 표정과 목소리의 이면에
뭔지 모를 감정이 짙게 깔려 있는 것을 느낀 혜중은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그는 분명히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고 있는 걸로 알고 있었고,
그리고 그의 성격상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다는, 아니 그의 아내
이외에 다른 누군가를 기다리게 한다라는 그런 일을 할 사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설마 그가 그의 아내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일까?

하지만 그것 역시 설득력이 없는 생각이었다.
몇 번 보지 못한 사람이었지만 둔하기 그지없는 혜중도 김수현의
아내가 얼마나 행복해 보이는지, 그 행복한 표정이 결코 가식이
아닌 진심에서 우러나오고 있다는 것을 분명하게 볼 수 있었던
것이다.
회사 내의 여직원들 사이에 가장 부러움의 대상이 되는 사람이
바로 김수현 이사의 아내이기도 하고…

“김 이사님은 사모님을 사랑하시잖아요.. 사모님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그런 것에 둔한 제 눈에도 보일 정도니까요.”

무표정한 얼굴로 난처한 투의 말을 웅얼거리는 혜중을 보며
김수현이 허물없이 웃음을 터트렸다.

“하하하…. 물론 아내를 사랑해요. 아내가 아닌 다른 여자는
단 한 순간도 생각조차 해보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조금.. 아니 아주 많이 달라요.
아내를 사랑하는 것과는 아주 다른 사랑을 알고 있어요.
그건 논리와 이성으로는 절대 설명할 수 없는 사랑이죠.
내 영혼의 일부를 만나는 것과 같다고 해야 할까?
아.. 그렇다고 내가 외도를 하고 있는 건 아닙니다.
그건 집사람을 만나기 이전의 일이고…..
우리에겐 혜중씨네와 같이 서로를 선택할 수 있는 기회가
거의 없었을 뿐이죠.
그래서 보냈어요. 그 사람이 있어야 할 자리로.
그리고 기다리는 거죠. 다시 만날 수 있는 날을..”

여전히 담담한 표정과 어투였지만 어딘가 먼 곳을 바라 보고
있는 것처럼 초점이 사라진 눈빛으로 허공을 바라보는
김수현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그가 이야기를 끝낼 때까지는 왠지 숨도 크게 쉬면 안될 것
같은 긴장이 혜중의 마음 속에서 스물스물 자라나고 있었다.

“아마도 우리가 살아있는 동안은 결코 만나는 일이 없겠죠.
그래도 기다리고 있어요.
그 기다림이라는 것이 이렇게 힘들 거라는 걸 알고
예상했으면서도 그럴 수밖에 없었으니까.
나보다 더 날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에 그 사람은 내가
원하는 대로 해줬지만 아마 많이 아플 거예요.
어쩌면 나보다 더…
그 사람은 날 보지 못하지만 그나마 난 언제든지
그를 볼 수 있어서 그가 어떻게 지내는지 알 수 있는데
그는 보고자 마음 먹고 나서지 않는 한 내 소식조차
들을 수 없을 테니까요.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은 절대 날 찾지 않기로 약속했으니까.”

과거의 생각에 빠진 듯이 한동안 이야기를 멈추고 조용히
숨을 고르던 김수현이 생각에서 빠져 나온 듯 머쓱한 미소를
지으며 혜중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하하.. 이거 꼭 신세 한탄하는 거 같네.
그렇다고 지금 나의 삶이 불행하진 않아요. 아내가 있고
또 두 아이가 있어서 행복하니까.
단지 내가 보내버린 영혼의 일부가 비어진 자리만큼은
무엇으로도 채울 수 없더군요.
기다림만으로도 충분히 채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걸로는 턱도 없이 부족해요. 기다림으로 채우기엔
그 자리가 너무 크고 깊은 겁니다.
다른 경우이긴 하지만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건
어쩌면 죄악과도 같은 거예요. 난 그 사람을 보냄으로 해서
두 사람을 기다리게 만들었어요.
멀리 있는 그와 곁에 있는 아내까지…
현재에 아무리 충실하다고 해도.. 내 마음 속에 빈 공간은
아내에게도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죠.
그나마 아내는 현명한 사람이어서 자신의 힘으로 어쩔 수
없는 것, 가질 수 없는 것엔 욕심을 내지 않는 사람이니까.
자신에게 주어진 것에 만족하고 그것을 소중하게 지킬 줄
아는 사람이거든요. 난 운이 좋았던 거죠.”

뚜렷하게 손에 잡히는 것은 아니었지만 김수현 이사의 이야기를
그냥 납득할 수 있을 것 같았다.
다른 무엇 보다도 사랑하는 사람을 기다리게 하는 것은 죄악과
같다는 말에 혜중도 동의하고 있었다.
아주 짧은 시간 경수를 기다렸던, 그가 아주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몸을 떨었던 시간동안 얼마나 괴로웠었는지..
그때의 기억이 새삼 떠올랐던 것이다.

하지만 그 후로 항상 기다리는 사람은 경수 쪽이었다.
그 이전에도 늘 그랬듯, 그 후로도 기다리는 사람은 다시 경수였다.
그런 태도가 결코 사랑하는 사람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것을
알면서도 경수라면 늘 그 모습 그대로 있어줄 거라고 은연중에
믿어버렸던 것이다.
그 역시 사람이기에 지칠 수도 있고, 상처도 받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 애써 외면하고 이었다.
그가 떠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할 때 조차도 만일 그가 떠나지
않고 남아준다면 지금까지와는 다르게 그를 대하겠다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그저 그가 떠나지 않기 만을 바랬던 자신이 얼마나
이기적인 사람인가….
그의 그런 이기적인 태도는 천성이라는 말로도 변명할 수 없었다.

더 사랑하는 사람이 약할 수밖에 없다는 경수의 말, 어쩌면
그 말은 단순히 경수가 생각하고 있는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그건 어쩌면 그의 진심이 아니라 서운한 스스로의 마음을 달래기
위한 자기합리화에 불과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후회와 자책 속에 빠져 허우적거리던 혜중은 어깨를 두드리며
그를 위로하는 김수현의 말에 혼자만의 생각 속에서 빠져 나왔다.

“혜중씨 표정 좀 풀어요. 꼭 세상 끝난 사람 같은 얼굴이군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말아요.
난 그저 이야기 하고 싶었을 뿐이에요.
함께 있을 수 있다면 더할 나위 없이 좋은 거지만
그걸로 만족해선 안된다는 걸..
함께 있기 위해서는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하거든요.
사실 난 겁쟁입니다.
더 많은 노력을 하고, 싸워야 하는 게 두려워서 쉽고
편한 길을 택한 거니까요.”


조금은 허탈해 보이는 표정으로 스스로를 겁쟁이라고 표현하는
김수현 이사를 향해 혜중은 그렇지 않다고 반박을 하며 고개를
휘휘 저었다.

“그렇지 않습니다. 적어도 제가 알고 있는 김 이사님은
노력이 두려워서 쉬운 길을 택할 분이 아니란 걸 압니다.”

혜중의 반박에 수현은 싫지 않은 웃음을 보여주었다.

“이런.. 나도 그저 평범한 사람일 뿐이에요.
날 너무 과대평가 해주는 군요.
하지만 사실입니다. 어쩌면 난 싸워야 하고
살아왔던 날들 보다 그 수십.. 아니 수천 배 쯤 더
노력해야 하는 것이 두려워서 지래 포기한 걸지도 모르니까요.
하지만.. 혜중씨는 그런 실수는 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요.
본인은 어떻게 생각하는지.. 혜중씨의 그 친구는 어떻게
생각하는지 모르지만..
그래요. 혜중씨라면 쉬운 길을 택하기 위해서
소중한 인연의 끈을 놓아버리거나 멀리 밀어버리는
일은 하지 않을 거라고 믿고 있습니다.
주제넘은 참견일지 모르지만..
내 이야기가 혜중씨의 고민을 정리하는데 조금이라도
도움이 됐기를 바래요.
난 원래 참견쟁이는 아닌데… 한번쯤 혜중씨에게
얘기해주고 싶었어요. 그 선택이 어떤 것인지 잘 아니까.
내가 하지 못한 선택을 한 혜중씨에게 좀더 힘내라고…
지나친 참견이었다면 미안합니다.”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요. 그렇지…. “

혜중은 더 이상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아니라는 말 외엔 다른 어떤 말도 필요치 않을 것
같았다.
직장에서 그의 사생활을 알고 있는 사람들 중, 그 사실을
그저 그대로 받아 들이고 어떤 편견도 없이 대해주는 몇
안돼는 사람 중에 하나이기도 했지만 적어도 김수현이라는
사람이 허술하고 줏대 없이 이리저리 흔들리 거나 쉽사리
타인을 동정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것을 혜중은 분명하게
알고 있었다.

그리고 지극히 담담한 표정으로 이야기 하고 있어도 그의
내부에는 누구도 손댈 수 없는 거센 폭풍이 아직도 휘몰아
치고 있다는 것을 둔감하기 그지없는 혜중도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는 노력하는 것이 두려워 편한 길을 선택했다고 말했지만
사실은 그가 한 선택이 가장 힘겹고 고통스러운 것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만일 혜중 자신이었다면 그처럼 경수를 보낼 수 없었을 것이
분명했다. 그의 진심을 알기 전엔 차라리 떠나 보내자고 생각
했었지만 막상 진심을 알게 된 뒤엔 단 한 순간도 경수를
보낸다거나 놓아주겠다는 생각은 해본 적이 없었다.
가족들의 심한 반대와 폭력과도 같은 비난 앞에서도 혜중은
그를 놓을 수 없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렇게 절실한 사람이 원하는 작은 것 하나조차
이기적인 태도로 거절해 버린 것이다.

경수가 원했던 것은 그저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자는 단순한
욕심이 아니라는 것을 이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유치한 발상일지 모르지만 그 날이 자신들에게 특별한 날이
아니라고 해도 함께 살아가는 일상 속에서 하루쯤은 매일과
다른 특별한 날도 필요하다는 것을…….


매일 함께 있는데 거기서 더 무엇이 필요한가 라는 말은
사랑하는 이에 대한 기본적인 예의조차 무시하는 태도라는
것을 이젠 알 수 있을 것 같았다.

함께 있을 수 있기 때문에 더 노력해야 하고, 상대의 바람에
더 민감해야 하는 것이다.
경수가 자신에게 그러하듯…

사랑하는 두 사람의 관계에는 기득권 따위가 끼어 들 수
없는 것이다.
누가 누굴 더 사랑하는가는 단지 스스로 느끼는 감정의
문제일 뿐 살아간다는 것,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서로
동등한 선상에서 같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그런 의미에서 혜중은 세상에 둘도 없는 이기주의자였다.
주변의 반대에 맞서 견디는 것만으로도 버겁다는 것을 핑계로
모든 것을 경수에게 맡기고 두 사람의 관계를 이끌어가는 것은
조금도 신경 쓰지 않았었다.
항상 그 모습 그대로 있을 거라고 믿어버린 것처럼, 늘 그랬던
습관대로 모든 문제는 경수가 알아서 처리하는 거라고, 그게
당연하다고 여기고 있었던 것이다.
그것을 의식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두 사람의 관계가 달라졌다면 서로에 대해서 가지고 있던
고정된 생각 역시 바뀌어야 하는 것이라는 단순한 진리를
혜중은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달라져야 한다는 것을 안다.
어떻게 달라져야 하는지 구체적으로 설명할 수는 없지만
자신이 달라지지 않는다면 두 사람의 관계는 계속해서
한쪽의 일방적인 노력이나, 희생 혹은 체념으로 이어질
것이고, 그것이 언젠가는 경수를 지치게 만들 것이 분명했다.

경수가 연진에게 했던 말처럼 일반적인 상식이 적용될 수 없는
관계이지만 사랑하는데 일반과 이반이 다르지 않은 것이다.
사랑하는 데는 어떤 경우에도 똑같은 룰이 적용되는 것이다.

물론 세상과 그들 사이엔 조금 다른 룰이 적용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조차도 두 사람 함께 해결해가야 하는 일이었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은 나는 나, 너는 너라는 식의 생각으로는
제대로 유지될 수 없는 것이다.



말없이 생각에 잠겨있는 사이 서서히 새벽이 다가 오고 있었다.
더욱 까맣게 내려 앉은 새벽 하늘을 바라 보던 혜중은 깊게
차가운 겨울 새벽의 공기를 들이 마셨다.
그 어느 때 보다도 머리 속이 맑아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마치 끝이 보이지 않는 미로를 헤메다 이제야 겨우 출구를 찾아
달려가고 있는 것과도 같았고, 희뿌연 안개 속을 헤메다 한 줄
따듯한 빛을 발견하고 그 빛을 향해 달려가는 것과도 같았다.



아까와는 달리 한결 편해진 표정을 하고 있는 혜중을 바라보는
수현의 얼굴에도 천천히 미소가 번졌다.

그다지 감정을 표현하지 않는 혜중이 눈에 보일 정도로 고민하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왠지 남의 일로 그냥 넘겨버릴 수 없어 나선
것이었지만 그렇게 단순 의도만은 아닐지도 몰랐다.

어쩌면 스스로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혜중에게 시선을 두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자신과 다른 선택을 한 혜중을 지켜 보면서 그 선택으로
행복한 모습을 보고 싶다는 무의식의 욕심을 가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자신은 겁쟁이여서 포기한 거라고, 노력하는 것이 두려워서였다고
말했지만 정말 그런 이유로 그 사람을 보낸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살아오면서 가끔 자신이 괴로운 만큼 어쩌면 그 이상으로
아플 그를 생각할 때마다 과연 그것이 옳은 선택이었을까 하는 의문을
갖게 되는 순간이 있었다.
그렇다고 지금 와서 그 선택을 후회하는 것은 아니었다.
만일 그가 자신과 같이 평범할 수 있는 조건의 사람이었다면
결코 그렇게 그를 보내는 일 따위는 없었겠지만 그를 위해서
그리고 그와 관련된 수많은 것들을 위해서 수현이 할 수 있는
선택은 그것뿐이었고, 그는 스스로 선택한 것이었으니까.
단지 기다리는 것이 생각보다 힘들다는 것, 아내와 아이들을
사랑하고, 그들에게 넘치게 사랑 받고 있지만 그것으로도 채울 수
없는 빈 자리가 문득 문득 저리게 아파오는 것만은 그도 어쩔 수
없었던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보내는 것이 아닌 함께하는 것을 선택한 혜중이
행복하길 바라는 것일지도..




서로의 생각에 빠져 있던 두 사람은 두런거리며 다가오는
인기척에 생각에서 빠져 나와 자리를 털고 일어섰다.


“고맙습니다. 이사님 덕분에 생각이 많이 정리됐습니다.”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고마움을 표하는 혜중에게 담담한
미소를 지으며 조용히 마지막 말을 전했다.

“내가 나서지 않았어도 충분히 혜중씨 스스로 문제를
풀어갔을 거라고 생각해요.
단지, 난 그 시간을 조금 줄여줬을 뿐이죠.
그러니까 굳이 고마워할 것도 없어요.
오히려 내가 푼수 없이 나섰다고 생각하지 않고 받아들여
줘서 고마워요. 생각이 정리되었다니 다행입니다.
함께 살아간다는 건, 그래요.. 서로 다른 두 사람이
함께 얼굴을 맞대고 살아간다는 건 이인삼각 경기와도
같은 거라고 생각합니다.
한 호흡으로 걷지 않으면 절대 앞으로 나아갈 수 없어요.
한쪽에서 이끈다고 해서 걸어지는 게 아니에요.
같은 호흡을 하면서 같이 느끼지 않는다면 얼마 못 가서
쓰러질 수밖에 없는 거죠.
한쪽이 앞서 가면서 기다려 줄 수도 없는 겁니다.
서로 같은 노력을 하고 상대의 호흡에 항상 귀를
기울여야만 하는 거죠.
그렇다고 그걸 지나치게 의식하고 있어서도 안돼요.
앞을 보고 걸어야 하니까요.
내 짝의 호흡에만 신경을 쓰다 보면 앞에 놓여있는
장애물을 못 볼 수도 있고, 엉뚱한 길로 가게 될지도
모르니까요.
그래서 내 짝의 호흡을 내 호흡처럼 느끼고, 조심스럽게
앞을 보면서 한발씩 천천히 걸어가야 해요.
서둘러서도 안되고, 그렇다고 무작정 느긋해서도 안되죠.”

이인삼각과도 같은 거라는 수현의 말이 혜중의 가슴을
강하게 두드려왔다.
그랬다. 혼자라면 얼마든지 앞을 향해 마구 달릴 수 있지만
이인삼각이란 함께 걸어가는 짝과 호흡을 맞추지 않는다면
제대로 걸어갈 수 없는 경기였다.
그러면서 항상 앞을 향해 시선을 두고 있어야 하는 것이다.
함께 살아간다는 것에 대해서 그만큼 어울리는 표현도 없을
것 같았다.

혼자 가는 것이 아닌 둘이 가는 것을 선택했고, 이미 그들은
이인삼각의 경기를 시작한 것이다.
하지만 지금까지는 그 경기를 경수 혼자서 기를 쓰고 이끌어
왔고, 자신은 모든 것을 그에게 맡겨두고 그저 앞으로 끌고
가라고 재촉만 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젠 그도 경수의 호흡을 느끼고, 그와 어깨를 나란히
하고 걸어가야 할 때였다.
그리고 그런 노력은 어쩌면 다른 사람들 보다도 더 힘들고
어려운 노력을 요구할지도 몰랐다.


문득 혜중은 지금까지 성가시다고 생각했던 것들이 오히려
그런 힘겨운 싸움에서 그에게, 그리고 경수에게 커다란 힘이
되어줄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평범한 매일의 일상에 주어지는 작은 변화가 사람을 북돋워
줄 수도 있다는 것을 이제야 깨달은 것이다.

지금까지는 남들과 다를 것 없는 삶을 살아왔기에 굳이 그런
활력을 구할 필요가 없었다. 혜중에겐 삶이라는 것 자체가
그렇게 애달아 해야 할 만큼 절실하지 않았었으니까.
아니 지금까지 그의 삶엔 간절히 지키고 싶은 것이 없었던
것이다. 어떤 것이든, 어떤 사람이든 있어도 그만 없어도
그만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더 이상 그렇게 삶을 바라볼 수 없었다.
무슨 짓을 해서든 절대 놓을 수 없는 존재가 생겨버린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지키기 위해선 스스로 노력하지 않으면 안된다.
그것은 누가 대신 지켜주는 것이 아니니까.

경수가 자신과 같은 선택을 했고, 지켜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같은 의무를 가지고는 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혜중과 똑같은
크기의 것이었다.
경수에겐 그가 해야할 몫이 있었고, 혜중에겐 혜중의 몫이 있었다.
여태껏 자신의 몫까지도 경수에게 떠넘기고 있었지만
이젠 그에게 맡겼던 자신의 몫을 넘겨 받아야 한다.



“이제 그만 들어가죠. 곧 날이 밝겠군요.”

“네.. 저 때문에 쉬지도 못하셨네요. 죄송합니다. 심려를 끼쳐서…”

“아닙니다. 제가 원해서 한 일인데요.
그냥.. 이런 건 좀 우스운 생각이지만 왠지 혜중씨를 보면
남 같지 않아요. 아마도 나 역시 같은 사랑을 해봤기 때문일까요?
아주 다른 경우고, 너무 다른 선택을 했는데도 말이죠.
대리만족 같은 걸지도 모르죠.
내가 하지 못한 선택을 한 혜중씨가 잘 살아가는 모습을 보면서
대신 만족을 느끼고 싶은 욕심일지도 몰라요. 하하하하하..
나도 그저 평범한 사람이라니까요.”

시원스럽게 웃으며 대리만족일지 모른다고 하는 수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지는 것을 본 혜중은 가슴이 싸아해지는
것 같았다.
그가 하는 이야기와 자신의 생각에 빠져서 선뜻 깨닫지 못하고
있었지만 그가 간직하고 있다는 그 사랑의 대상이 어쩌면
자신처럼 동성이 대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이제사 하고
있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혜중은 숙소를 향해 발걸음을 돌리는
수현의 뒤를 따르면서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이사님. 이런 거 여쭤 보면 실례일지 모르지만…
혹시 그 분이.. “

“아.. 눈치 챘어요? 언제 눈치 채려나 하고 기다렸는데..
역시 혜중씨 둔한 사람 맞군요. 하하..
맞아요. 그 사람도 나와 같은 성을 가지고 있어요.
놀랐어요?”

“아.. 아니.. 그런 게 아니라….”

어색하게 말끝을 흐리며 따라오는 혜중을 앞서 가면서
수현은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갔다.

“그게 그렇게 대단한 일은 아니에요.
난.. 내가 이반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사실 이반이니 일반이니 하는 경계를 짓는다는 것 자체가
우습다고 생각해요. 사람이 사람을 사랑하게 되는데
그런 경계를 그어둔다는 게 우습잖아요.
물론.. 오래된 사람들의 관념상 이성이 아닌 동성을
사랑한다는 것이 아직은 어색하고 쉽사리 용서되는 일이
아니지만 그게 무슨 상관입니까?
내가 사랑하는데?
타인에게 해를 끼치는 것도 아니고..
정말 사랑하는 거라면 당당해도 된다고 생각해요.
이성애를 하면서 난잡하게 살아가는 사람들도 있어요.
하지만 순수하게 사랑하는 거라면 오히려 그게 더
깨끗하다고 생각합니다.
이건 궤변일지 모르지만 사랑은 모든 것을 초월할 수
있고, 모든 것을 용서할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타인의 시선 따위는 중요하지 않죠.
인생은 그렇게 길지 않아요.
그 짧은 인생을 타인의 시선 따위에 신경 쓰면서
내 감정을 속이고 살기는 너무 아깝지요.”

정말 의외의 말이었다.
그가 아내를 두고 다른 누군가를 가슴에 품고 있다는 것도
놀라운 이야기였지만 지금 하고 있는 이야기들은 도저히
혜중이 알고 있는 김수현이라는 사람이 할법하지 않은 것들
이었다.
지극히 정석대로 살아왔을 것 같은 사람에게서 나올 리 없는…

사람이란 이렇게 의외의 면들을 누구나 하나씩은 가지고
있는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모르는 게 없다고 생각했던 경수에게서 생각지도 못했던
면들을 발견하게 되는 것처럼..

“저…. 사모님도 알고 계신가요? “

“네. 알고 있어요. 내가 털어 놓은 게 아니라..
먼저 눈치 채고 있었어요. 집사람이 눈치가 빠르거든요.”

“그.. 그런데.. 어떻게..”

“하하.. 납득하기 힘들죠? 나도 그랬어요.
알면서도 어떻게 그게 괜찮을 수 있는지..
그런데 괜찮대요. 내가 누굴 사랑했건 그런 건 상관없다고
하더군요. 가슴 한 켠에 다른 사람 품고 있어도 좋대요.
그만큼 자기가 더 사랑하고 있으니까 상관없대요.
그리고 누가 뭐라고 해도 지금 내가 자길 사랑하는 걸
아니까. 적어도 살아있는 동안 자신의 곁을 지켜줄 거라고
믿고 있기 때문에 신경 쓰지 않는대요.
하하.. 여자는 현실의 동물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서 과거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고..
아마 그래서 내가 더 아내를 사랑하는지도 몰라요.
과분할 만큼 현명한 여자라서…..
항상 고마울 따름이에요. 늘 변함없이 곁에 있어주는 것도,
한결같이 웃어주는 것도…
어쩌면 아내가 곁에 있기 때문에 견딜 수 있는 건지도
모르겠네요.
하하하….. 이거 왠지 팔불출 같군요.”

“…그렇지 않습니다. 이사님은.. 행복한 분이시군요.
믿을 수 있는 사람이 곁에 있다는 거..
아니.. 누군가를 그렇게 믿을 수 있다는 거 말입니다.”

조심스럽게 행복한 사람이라고 하는 혜중의 말에 걸음을
재촉하며 수현이 대꾸했다.

“그건 혜중씨도 만찬가지 아닐까요?
혜중씨의 그 사람을 믿고 있으니까 그런 고민도 할 수
있는 거죠. 상대를 믿지 않는다면 그런 고민은 할 수 없어요.
아니.. 그런 고민이 생길리가 없죠.
그러니까 혜중씨도 행복한 사람 맞아요.”

역시 그는 한 수, 아니 혜중보다 한참 까마득하게 윗수였다.

그런 식으로 생각해보지 못했으니까.
물론 경수를 믿고 있었지만 그렇기 때문에 이런 고민도 할 수
있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그저 단순하게 눈 앞에 놓인 문제에만 신경을 쓰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혜중씨의 그 사람뿐 아니라.. 그 후배 분.. 친구 분..
다 믿고 있잖아요? 그렇지 않다면 혜중씨 성격에 그들이
다가오도록 하지 않았을 거 같은데 아닌가요?
역시 혜중씨도 행복한 사람인겁니다.
왜 그런 말이 있죠. 조금 엉뚱한 예일지 모르지만
세상에 태어나서 정말 믿을 수 있는 친구 하나만 있어도
그 인생은 성공한 거라고..
그런데 혜중씨는 셋이나 되잖아요.
그리고 스스로 깨닫지 못할 뿐이지 그 외에도 찾아보면
더 있을 겁니다.
혜중씨는 쉽게 다가서기 힘든 사람인건 분명하지만
누구에게든 미움을 받거나, 적이 될 사람은 아니니까요.
다가서기는 힘들지만 가장 믿을만한 사람이라고 생각합니다.”

“제가 그런가요?”

그런 평가를 받기는 처음이었다.
무심한 놈이라는 소리는 지겨울 만큼 듣고 살았지만..
믿을만한 사람이란 평가는 처음이었다.

“그래요. 다른 건 몰라도 사람을 보는 눈은 정확하다고
자부해요. 그러니까 믿어도 됩니다.
혜중씨는 아주 사소한 결점도 많은 사람이지만
그런 것들이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 믿음직한 사람이에요.
그래서 사장님도 혜중씨를 좋아하시는 거고..
아마 다른 직원들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혜중씨 자신은 그런데 별로 신경을 쓰는 타입이 아니라
느끼지 못하겠지만 사내에서 혜중씨에 대한 평가는 그래요.
지독할만큼 성실하고 가장 믿을 수 있는 사람이라고…”

“아…”

당황한 나머지 말문이 막혀버렸다.
그런 과분한 평가를 받고 있는지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이렇게 당황스러워 하는 것 역시 예전의 혜중이었다면
절대 없었을 일이지만……

그 뒤로 대화는 끊겨 버렸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은 평온함이
가득했고 숙소로 향하는 발걸음은 가볍기 그지없었다.
아직 모든 것이 완전하게 정리된 것은 아니지만 지금 혜중의
마음은 그 어느 때보다도 차분하게 가라앉아 있었다.
그것은 평소의 무심한 상태와는 아주 다른 그런 것이었다.
모든 것에 민감하게 반응하면서도 그 것들이 아주 자연스럽게
마음 속에 스며들어 받아들여지고 있는 그런 느낌.


앞에 보이는 숙소의 불빛을 보면서 혜중은 문득 경수가
못 견디게 보고 싶어졌다.
당장 한걸음에 달려가 그를 끌어안고 싶은 기분이었지만
애써 그런 감정을 다독이며 앞서가는 수현을 따라 걸음을
재촉했다.

워크샵에 참가한 이래 피곤함 조차 느끼지 못하고 있었는데
이젠 슬슬 피곤함이 몰려 오면서 온 몸의 근육들이 삐걱거리며
비명을 지르는 것 같았다.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나오면 몸살을
앓는 다는 어떤 친구의 말을 절감할 수 있었다.

마치 힘겨운 산을 정복하고 난 뒤에 찾아오는 충만한 피곤함과도
같은 그런 느낌이었다.

일단 숙소로 들어가 눈을 붙이자…
그리고….. 눈을 뜨면 제일 먼저….

그런 생각을 하는 혜중의 얼굴엔 평온한 미소가 어려 있었다.
아마 다른 누군가 지금 혜중의 얼굴을 봤다면 시껍을 할 정도로
놀랄 것이다. 항상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 감정이 잔뜩 담긴 미소가
어린다는 걸 누가 상상이나 할까.

하지만 지금은 모두 깊이 잠들어 있을 시간이다.

숙소로 향하는 혜중의 발걸음은 그 어느 때 보다도 가벼웠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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