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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상)


세월 by  하리





어떻게든 막아 보고 싶은 마음과 이미 엎질러진 물, 무슨 짓을 해도 되돌릴 수
없다는 마음의 빈중거림으로 혼란스러운 상태를 들키지 않기 위해서 마음에도
없는 미소를 짓고 있는 혜중의 상태는 폭발 직전의 폭탄과도 같았다.

대체… 스스로 안된다고 거부한 상대에 대한 뒤 늦은 깨달음이라니…!!!!!!

뭐라고 변명할 수도 없는 마음의 상태와 이런 자신에게 짜증이 나는 만큼
죽자사자 쫓아다닐 때가 언제였다고 저렇게 희희낙락 헤죽거리는 놈의 머리통을
냅다 후려갈기고 싶었다. 그리고 그런 자기 자신도 마구 두들겨 패고 싶은
혜중이었다.

" 야~ 그림 좋다. 너 늦게 배운 도둑질에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야 이자식아
   침 좀 닦아. 아무리 좋아도 그렇지. 어이구 빙구 같은 놈. 그렇게 좋으냐?
   야 유 혜중. 저놈 좀 어떻게 해봐라. 애인 없는 놈 눈꼴시고 배아파 더는
   못보겠다. "

친구들의 야유섞인 농담에도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는 경수를 보며
혜중은 몰래 한숨을 내뱉었다.
어차피 스스로 밀어낸 사람었고, 이렇게 되길 바래 벌어진 일에 대해서 뒤늦게
후회한들 달라질 건 없었다. 그리고 유 혜중이라는 인간의 사전에 후회란
없다라고 외치고 살아왔던 그로서는 뼈져리게 후회스럽다고 해도 절대 그것을
인정하고 싶지도 않았고…….

" 냅둬라. 뒤늦게 복 터져 저러는데 왜들 그러냐? 보기 좋은데 뭐. 없어서
   배 아프면 너도 하나 만들어라. 니가 능력이 없냐, 얼굴이 딸리냐.
   오는 여자 마다하는 네 녀석이 할 말은 아닌 듯 하다만……. "

복잡한 심경을 감추고 평소처럼 무덤덤한 얼굴로 친구놈의 야유를 무시해 버리는
혜중을 보는 경수의 눈빛이 좋아 죽겠다는 헤벌쭉한 표정과는 달리 무겁게
가라앉아 버리는 것을 그 자리에 모인 이들 중 어느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고
있었다.
경수의 옆구리에 찰싹 달라붙어 애교스럽게 웃고 있는 까마득한 후배 여자애만이
그런 그의 반응을 눈치 챈듯 했지만, 박자라도 맞추려는 듯이 모르는 척 경수와
함께 헤실거리며 웃고 있을 따름이었다.

" 진우 선배님. 자꾸 경수 오빠 놀리지 마세요. 부러우면 선배님도 애인 만드시면
   되잖아요. 오는 여자 마다 철저하게 막아 물리치기로 둘째 가는 분이 그러시면
   그건 부러워서 하는 말이 아니라 심술로 밖에 안들리네요 뭐. 혜중 선배님
   보세요. 초연하시잖아요. "

밉지 않게 눈을 흘기며 툭 내뱉는 여자애의 음성은 은쟁반에 옥구슬 구르 듯 맑고
곱게 공명되는 울림을 가지고 있었다.
누구든 듣는 이에게 즐거움을 주는 그런 목소리를 가지고 있다는 사실이 다른
사람에겐 좋게 여겨질지 모르지만 혜중에겐 왠지 껄끄러운 가시처럼 마땅치 않은
것이었다.
경수의 취향이라면 누구 보다 잘 알고 있다고 자부하는 그였기에 그 후배
여자아이의 목소리가 딱 경수의 취향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가 그렇게
취향에 맞는 여자를 만났다는 것이 기쁘기 보다는 괜히 화가 나고 심술이 나기
때문이었다.

사람의 심리라는 것이 원체 제 먹긴 싫어도 남주긴 더 싫어지는 이율배반적인
것이라고는 하지만 자기 자신은 그런 이중성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멀다고 굳게
믿고 살아온 혜중으로선 이런 상황이 짜증스럽게 싫은 것이었다.
무관심, 무감동, 무반응.
삼무의 원칙에 따라 행동하고 생활하기로 유명한 혜중의 속내가 이렇게 펄펄 끓는
기름가마처럼 부글 거리고 있다는 것을 누가 알기나 할까?
맞은 편에 앉아 얼빠진 바보 마냥 헤벌쭉 웃고 있는 저 배꼽친구놈이 과연 알고나
있을까?

경수에게 애인이 생겼다는 말을 들었을때, 그 순간 혜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었다.
그도 그럴 것이 삼십년 가까이 배꼽 친구로 지내온 형제같은 놈으로부터
사랑 고백을 받은 것은 아무리 삼무의 원칙 대로 사는 그일지라도 황당함을
넘어서 당황스러움을 감추기 힘든 사건이었던 것이다.
그렇게 이년 가까이 도끼질을 헤대던 놈이 제정신을 차리고 여자를 사귄다는데
어느 누가 안도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하지만 그런 안도의 한숨은 정말 순간에 지나지 않았다.
년수도 계산하기 힘든 까마득한 후배라는 여자 아이에 대해서 쉴새없이
떠들어대는 경
수놈의 작태가 처음엔 즐거움이었지만 시간이 흐를 수록 왠지 모를 짜증과
부당함으로 느껴지는 것을 자신도 어찌할 수 없었고, 친한 친구놈들에게
제 여자친구를 소개한다는 자리에 억지로 끌려 나온 이 순간, 그 짜증과
부당하다는 느낌은 인정할 수 없는 후회와 혼란으로 뒤바뀌고 있었다.

몇 번이나 둘의 만남에 꼽사리 끼어 같이 놀아줘야했던 순간들이 속속 머릿속을
지나가며 그때마다 치밀어 오르던 그 이유를 알 수 없는 짜증의 원인이
무엇이었는지 어렴풋이 감이 오는 듯 했지만 그것을 인정할 마음도 없었거니와
인정한다고 한들 지금 이 자리에서 그런 감정을 드러낼 만큼 감정적인 사람이
아닌 혜중으로선 마음에도 없는 웃음을 흘리며 이렇게 보릿자루 처럼 앉아 행복에
겨워 숨넘어갈 듯한 두 사람을 말끄러미 쳐다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다.

" 혜중 선배님. 무슨 일 있으세요? "

경수 옆구리에 매달려 있는 연진이 혜중을 향해 이상하다는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 어? 아니… 왜? "
" 그냥… 왠지 뭔가 걸리는 거 같아서요. "
" 아냐. 요즘 일이 바빠서. 야… 김 경수. 한잔 받아라. "

민감하게 자신의 표정을 읽어내는 연진의 시선을 슬쩍 피하며 사람좋은 얼굴로
경수에게 술잔을 권한 혜중의 심장은 덜컹 내려앉는 것만 같았다.
여자는 다 여우라더니… 설마 지금 그의 머리 속에 어떤 생각들이 오가는지
알리는 없지만 다른 누구도 눈치채지 못하는 것을 그렇게 쉽게 집어내는 연진이
순간 두렵게 느껴졌던 것이다. 조심하지 않는다면 자신으로 인해서 두 사람
사이에 트러블이 생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혜중은 잠시라도 속내를 표정에
드러낸 자신을 질책했다.

절대, 절대 겉으로 내보여선 안되는 것도 있는 법.

" 연진이 너도 한잔 받아. "

두 사람의 잔에 소주를 찰랑거릴 만큼 가득 따라준 혜중은 일부러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두 사람의 러브샷을 보여달라는 주문을 했고 자리에 모인 다른 친구들
역시 그의 주문에 박수를 치며 러브샷을 외치기 시작했다.
난처한듯한 표정을 보이던 경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으며 연진과 팔을
엇갈리고 잔을 입에 대는 순간 혜중의 마음은 또다시 그 자리를 떠나 머나먼
거의 기억 속을 헤메고 있었다.





" 앗싸아~ 바람둥이 줄리엣과 일편단심 로미오… 두 사람의 러브샷이
   있겠습니다아. "

부장의 선창으로 연극부원 모두가 러브샷을 외쳐대자 로미오 차림의 경수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어설픈 포즈로 잔을 들고 싫다고 뒤로 빼는 혜중의 팔을
잡아 끌었고, 결국 두 사람은 어정쩡한 얼굴로 맥주 잔에 술을 흉내내서
따라 놓은 음료를 원샷해야 했다.

" 우우~~ 서고의 전통대로 바람둥이 줄리엣은 일편단심 로미오를 낭군으로
   맞이하야 졸업할 때까지 일부종사 할것을 명하는 바이다. "

러브샷을 마지막으로 선언된 부장의 한마디는 오랜 연극부의 전통에 따른
것이었지만 왠지 그런 전통 자체가 그다지 달갑지 않은 혜중은 뚱한 표정을
지으며 한마디 걸고 넘어졌다.

" 누나. 대체 누가 누구한테 일부종사를 하라는 거예요? 그건 줄리엣이
   여자일때나 통하는 말이죠. 전 여자가 아닌 남자라구요. "
" 유 혜중. 너 지금 선배의 말씀에 토를 다는 거냐? 한번 줄리엣은 영원한
   줄리엣이다. 이건 우리 서고의 전통이야. 김 경수. 아니 로미오.
   너 불만있냐? "
" 없씀다아. "

시원스럽게 없습니다 라고 외치는 경수의 옆구리를 퍽하고 찔렀지만 혜중의 그런
손질에도 아랑곳없이 헤벌쭉 웃고 있는 그를 보며 부장은 그럼 그렇지라는 웃음을
터트렸다.

" 어쨌거나 너희 둘은 앞으로 졸업 할때까지 서고의 커플이라는 사실을 잊지
   말도록. "
" 우어~ 그런게 어딨어요. 이 좋은 이팔청춘에 여학생 사귀기도 바쁜데…
   우어~ 너무해. "

매년 있는 축제에 이년 단위로 올려지는 바람둥이 줄리엣과 일편단심 로미오라는
연극에서 줄리엣과 로미오로 뽑힌 사람은 삼학년이 되어 새로운 줄로 커플이
탄생할때까지 학교의 모든 행사에 커플로 등장해야하는 것이 서고의 전통 아닌
전통이었다.
뭐 지금까지는 항상 남녀가 짝을 이루었기 때문에 누구도 그런 전통에 딴지를
거는 사람이 없었고, 줄로 커플로 맺어져 결혼까지 한 선배들도 있기 때문에
그 전통은 서고가 문을 닫고 사라지지 않는 한 없어질리 없는 것이긴 했지만
이번 기수에 그 줄로 커플이 남녀가 아닌 남남 커플이 될거라고 누가 예상이나
했겠는가.
사실 혜중이 줄리엣을 맡게 된것도 애초에 줄리엣으로 뽑혔던 미영이가 축제를
사흘 앞두고 교통 사고를 당했기 때문이었다.
로미오로 뽑힌 경수의 대본 연습을 위해 집에서 상대역을 해주었던 혜중이
연극 대본을 달달 외우게 된것도 어쩌면 우연이 아닌 필연일지 모르지만
하여간 소품담당에 지나지 않았던 혜중이 대본을 외우고 있다는 사실을
경수로부터 전해들은 부장은 평소의 그 부대뽀 카리스마를 팍팍 발휘하며
죽어도 못한다는 혜중을 줄리엣으로 무대 위에 등장 시켰던 것이다.

누가 보기에도 여자같아 보이지 않는 혜중이었지만 아직은 완전히 성장하지 않은
성장기의 남학생을 잘 꾸미고 가꿔 놓으면 충분히 여자처럼 보이게 만들 수도
있다는 놀라운 분장의 사기성을 몸소 체험한 혜중이었다.
솔직히 분장이 끝나고 거울에 비친 자신의 모습을 보며 스스로도 이것이 정말
유 혜중, 자신이 맞는지 놀랍기 그지 없었고, 그런 혜중을 바라보던 경수와
다른 부원들도 놀라움의 한숨과 함께 묘한 신음을 흘려댔으니까.

이제와서 깨질 전통도 아니거니와 이미 부장의 강요에 못이겨 줄리엣을 맡았던
그 순간부터 삼학년이 될때가지는 그 커플이라는 함정에서 빠져나갈 수 없을
거라고 체념 해버린 혜중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한번쯤은 불만을 토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부루퉁한 얼굴로 투덜거리는 혜중을 향해 헤벌쭉 웃으며 너 정말 예뻐라는
말을 던진 경수가 부원들이 보는 앞에서 무차별 폭행을 당했던 것도 서고
연극부의 전설로 남겨진 사건 중 하나였다.

서고 역사상 유일무이한 남남 줄로 커플.







어쩌면 이미 그때부터 경수는 혜중에게 마음을 두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둘도 없는 친구의 얼굴이었지만 경수 스스로도 깨닫지 못한 마음은 그때부터가
시작이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그 날 이후로 예쁘다는 말을 수시로 내뱉어서
혜중의 무차별 주먹질을 끌어내곤 했으니까. 줄리엣으로 분장했던 해중과 현실의
혜중은 하늘과 땅 만큼의 차이로 다른 모습이었기 때문에 다들 분장은 무서운
것이다 라는 말로 웃어넘겼지만 유독 경수만은 혜중이 원래 이뻐서 그런 거라고
우겨댔었다.
경수의 마음은 그때를 시작으로 서서히 자라난 것일지도 모르는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도 이렇게 새로운 사람, 동성이 아닌 이성 앞에선 하루아침에
흔적도 없이 무너지고 마는 허무한 것일 줄이야…….
경수와 처음으로 러브샷을 나눈 사람은 다른 누구도 아닌 혜중 자신인데…….
러브샷을 하는 두 사람을 보며 지난 기억을 떠올리던 혜중은 무언가가 울컥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술에 취해 먹은 것이 치밀어 오르듯, 혹은 심하게 배를 맞았을 때 뱃속에서
내용물이 울컥 치고 올라오듯 정체를 알 수 없는 무언가가 목줄기를 꽉 메우며
치밀어 오르는 것만 같았다. 비척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선 혜중은 자신이 꽤
취해있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 나 화장실 좀……. "

잔뜩 메여오는 목으로 힘들게 한 마디 던져 놓고 자리를 벗어 났지만 어느 누구도
그런 그의 상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니 그들이 둔해서라기 보다는 최대한의 인내를 발휘하며 웃고 있는 혜중의
얼굴만을 본 사람이라면 어느 누구도 지금 그의 상태를 눈치챌리 없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잔뜩 오른 취기에 풀어지려는 몸을 힘들게 가누며 화장실로 향하는 혜중의
상태를 어렴풋이나마 눈치채고 있는 사람도 있었다.

" 경수 오빠… 혜중 선배님……. "
" 알아. "

조근조근 귓속말을 주고 받는 연진과 경수의 모습은 다른 사람들의 눈엔 연인들의
다정한 속삭임으로 보일뿐이었다.

" 야. 그만 좀 해라. 둘이 속삭이는 건 둘이 있을 때나 하란 말이다. 이것들이
   정말 그렇게 팍팍 티를 내야겠냐? 아우~ 아줌마. 여기 소주 좀 더 주세요.
   나 오늘 취할란다. 제길 내가 왜 그 수많은 여인내들을 다 밀어냈던가.
   후회막급이요~ "

또 다시 두 사람을 갈구며 투덜거리는 진우의 너스레에 모두들 크게 웃고
있었지만 경수는 그들과 함께 아무렇지도 않은 듯이 웃는 것이 결코 쉽지 않았다.
다들 취해버린 상태여서 혜중의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깨닫지 못하고 있어도
경수는 지금 혜중의 상태가 결코 평소와 같지 않다는 것을 확실하게 느끼고
있었던 것이다.
하지만 한번 작심한 일, 죽이 되던 밥이 되던 끝까지 밀고 나가야 한다고
다짐하고 또 다짐하며 그런 혜중의 태도를 모른 채 하고 있을 뿐이었다.

애써 모른척 하며 친구들과 어울려 행복한 표정을 하고 있는 것이 솔직함을 빼면
남는게 없다고 부르짖는 경수에겐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리고 이런 일을 한다고 자신이 원하는 결과를 얻을 수 있을 거라는 확신도
없었다.
평소답지 않은 혜중의 태도를 보면서 다 때려치우고 당장 그에게 달려가고
싶었지만 그런 그의 심중을 눈치채고 옆구리를 찔러가며 경고를 하는 연진 때문에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한 채 속만 바짝 바짝 타들어가고 있었다.

" 내가 가볼께. "

슬쩍 경수의 귀에 자신이 가보겠다고 속삭인 연진이 자리에서 일어서자 조금
안심이 되기는 했지만 그래도 그녀를 보내기 보다는 자신이 가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은 경수가 불안한 표정으로 일어선 연진을 올려다 보자 그의 그런 태도를
보던 친구들로 부터 비아냥과 야유가 터져 나왔다.

" 야이 팔불출 새꺄. 적당히 좀 해라. 화장실까지 따라갈래? "
" 야… 말세다. 인간 김 경수 완전 망가지누나. "
" 오옷… 너 임마. 카리스마 경수라는 이름이 아깝다. "
" 야호~ 이 연진. 역시 여자는 무써운 존재였다. "

친구들의 야유를 여유작작한 미소로 일축하며 연진이 화장실로 향하자 혼자
남겨진 경수는 그들의 야유섞인 술잔을 일일이 받아내야 했다.

" 아씨… 마셔… 마셔. 김 경수. 너 오늘 술 먹고 죽어주라. 솔로인 친구들과
   이미 결혼해 발목 잡힌 친구들의 원한이다. 마셔 임마. 먹고 죽어라.
   이 도둑놈. 까마득하게 어린 여자 꼬신 잘난 놈. 오늘은 술 먹고 죽어주라. "

진우가 나서서 장난스러운 야유를 퍼부으며 잔을 채우자 너도 나도 할 것 없이
서로 잔을 돌려대기 시작했다.
피할 수 없는 잔을 받아 안주도 없이 들이키는 일은 참으로 고역스러운
일이었지만 일생을 걸고 시작한 일, 이정도 쯤이야 얼마든지 받아주마라는
심정으로 뱃속에 잔뜩 힘을 주고 친구들의 술 잔을 받아내는 경수의 심정은
그야말로 죽기 아니면 살기였다.



화장실 구석에 주저 앉아 치밀어오르는 무언가를 꾹꾹 씹어 삼키듯이 억누르고
있던 혜중은 누군가 들어오는 소리에 얼굴을 들어올렸지만 취기 때문인지
흐릿해진 시선엔 희미한 사람의 실루엣만이 비치고 있었다.

" 선배님. 왜 이러고 계세요? "

들어온 사람은 연진이었다.

" 어… 나 취한 모양이다. "

끅끅대는 목소리로 취한 모양이라고 말하는 혜중의 목소리는 울음으로 잔뜩 잠겨
있었다.
자신이 울고 있었다는 것을 그제서야 깨달은 혜중은 흠칫거리며 흐릿해진 두 눈을
비벼 보았다. 묻어나는 것은 질척한 눈물…….
그의 목울대를 짖누르며 치밀어 오르던 것은 눈물이었던 건가…….
그런 혜중의 행동을 보며 연진은 묘한 표정을 하고 있었지만 그녀의 그런 표정
조차 깨닫지 못할만큼 그는 당황하며 허둥거리고 있었다.
친구의 좋은 일 앞에서 술에 취해 울고 있는 모습이라니…….
만일 자신이 여자였다면 누구든 오해하기  딱 좋은 모습이 아닌가 말이다.
혜중을 아는 어느 누구도 그가 술에 취한 모습을 보지 못했고, 또 술에 취해 우는
모습 따위는 알지 못했다.
그런 그가 지금 이렇게 다른 어느 곳도 아닌 술집 화장실 구석에 꾸겨져 앉아
울고 있다니…….
지나가던 개가 웃을 노릇이지만 현실이 그랬다.
스스로도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분명 그의 눈을 흐릿하게 만들고 있는 것은
눈물이었다.

도대체 무엇 때문에 울고 있다는 말인가…….
자신이 우는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아니… 알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인정할 수
없었다.

" 선배님… 괜찮으세요? "

곁으로 다가와 쭈그리고 앉는 연진을 외면한채로 취한 모양이라는 말만을
되풀이하는 혜중의 모습은 모르는 사람이 보기엔 딱 취한 사람의 주정으로 보일
뿐이었다.
그건 연진에게도 그리 보이는 것이 당연한 일이라고 해야겠지만 그녀의 표정은
단순히 취한 사람을 보는 것과는 달랐다.
무언가 걱정과 낙담 비슷한 것이 어우러진 그런 눈빛이었다.

" 제가 부축해드릴께요. 일어나 보세요. "
" 아… 아냐. 미안한데 너 먼저 나가줄래. 금방 따라 나갈께. 오늘 술이 좀
   과했나봐. "

분명 혜중이 술을 많이 마신 것은 사실이었다.
하지만 그정도 취할 사람이 아닌 것도 사실이었다.
연진이 그를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연극부 OB로 종종 찾아오던 선배들을 통해서
그리고 대학까지 선후배가 된 인연으로 이리 저리 줒어 들은 유 혜중이라는
사람에 대한 것 중에 공통적으로 나오는 이야기는 절대로 취하는 법이 없는
지독한 인간이라는 것이었다.
그건 삼무의 원칙이라고 비아냥 섞어 말하는 선배들의 퉁박과는 조금 다른,
질려버렸다는 것이 더 적당하다고 할 수 있는 표현이었다.
지독한 인간.
다들 코가 비뚤어져 길바닥에 널부러져도 꼬장꼬장하게 대중 교통 이용해 집으로
들어가는, 혀조차 꼬부라지는 일이 없는 그에 대한 질림의 표현이었다.

그리고 요사이 연진은 그것을 몸소 체험할 수 있는 기회가 여러번이고 보니,
취한 모양이라는 혜중의 말을 절대로 믿을 수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누구 보다도 혜중의 태도에 민감할 수 밖에 없는 자신의 입장 때문에
더더욱 그의 변명을 믿을 수 없었다.

" ……. "

대꾸없이 혜중을 바라보던 연진은 바지 주머니에서 손수건을 꺼내 혜중의 손에
들려주었다. 그리고 조용히 일어나 화장실 밖으로 나가 버렸다.

연진이 쥐어준 손수건을 내려다 보던 혜중은 그 손수건에 코를 박고 참았던
눈물을 터트렸다. 억지로 꾹꾹 삼키던 눈물은 한번 소리내어 터지자 겉잡을 수
없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 끄윽……. 어허어어어……어어어……. "

철이 들고 남자와 여자의 차이를 확실하게 알게 된 이후로 그가 이렇게 소리내어
울었던 적이 단 한번이라도 있었느냐고 누가 물어본다면 단 한번도 없었다고
자신있게 대답할 수 있었다.
알량한 남자의 자존심 때문이 아니라 도시 눈물을 흘릴만큼 감정이 격해지는 일이
혜중에겐 없었던 것이다. 어떤 돌발 상황에도 그저 멀뚱하게 바라보다 그게 뭐?
라는 얼굴로 외면해 버리는 것이 그의 특기였다. 그리고 그건 일백프로 순수한
그게 뭐? 그 자체인…….
정말로 누가 무슨 말을 하고, 어떤 황당한 짓거리를 해도, 심지어는 길을 가다
난데없이 날아온 짱돌에 뒤통수를 얻어맞아도 바닥에 떨어져 구르는 돌을 보며
멀뚱하니 쳐다 보다

- 어… 피 난다……. -

라고 한 마디 하고는 제일 가까운 약국으로 찾아가는게 다인…….
그 정도로 매사에 무덤덤하기 그지없는 인간이 바로 유 혜중이었다.
당황스럽기 그지없던 경수의 고백 사건도 잠시 멍한 표정으로 경수를 쳐다보다
고개를 돌리는 것이 다였다.
속으로 어떤 생각을 했던 적어도 겉으로 보여지는 그의 모습은 그저 멀뚱,
그 자체였던 것이다. 나중에야 혼자서 대체 이 일을 어떻게 해석하고
받아들여야하는 건가 꽤나 골치를 썩이긴 했지만서도…….
그런 그가 울고 있다. 그것도 소리를 내어 울고 있는 것이다.



혜중을 두고 나온 연진은 정신없이 오가는 술잔을 받으며 싱글싱글 웃고 있는
경수를 보며 한숨을 내쉬었다. 대놓고 혜중이 울고 있다고 말할 수는 없었다.
문젠 경수의 태도가 아니라 여기 모인 누구도 그런 혜중의 모습을 알지 못할
것이고, 혜중 자신은 누구에게도 그런 모습 따위 결코 보이고 싶지 않을 것이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어쩌다 이런 일에 끼어들게 된건지…….

스스로도 이해할 수 없는 자신의 속내를 단 한번이라도 곰곰히 들여다 보고
싶었지만 솔직히 그러기가 두려웠다.
깊이 들여다본 자신의 속에서 무언가 감당키 어려운 것을 발견하게 될 것만 같은
두려움이 연진을 가로막았던 것이다.

역대 연극부 부장이라는 입장으로 만나게 된 경수는 좋은 선배였다.
십년 가까운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어린 후배들과 스스럼 없이 어울릴 줄 아는
사람이었고, 그의 시절과는 판이하게 달라진 세태에도 다른 선배들과 달리
어줍잖은 충고나 설교 따위를 흘리는 일이 없었기 때문에 연극부에서 가장
환영받는 선배가 바로 그였던 것이다.
우연인지 몰라도 연진이 입학하던 해 연극부에서 공연한 것이 바람둥이 줄리엣과
일편단심 로미오 였고, 그때 줄리엣 역을 맡은 것이 그녀였던 관계로 더 가까워질
수 있었다.
게다가 대학까지 선후배 관계로 이어지고 보니 십년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오랜 친구처럼 허물없는 사이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그런 그에게서 그의 짝꿍인 혜중에 대한 감정 고백을 들었을 때 솔직히 충격받지
않았다고 한다면 거짓말이겠지만 마음 한쪽은 충분히 그 사실을 납득하고 쉽게
받아들이고 있었다.
먼저 친해진 사람은 경수였지만 그와 친해진다는 것은 단짝으로 붙어 다니는
혜중과도 자주 접하게 되는 것이었고, 가끔은 혜중이 이 연진이라는 사람을
그 무심하기 그지없는 두뇌 속에 기억시켜 놓은 건지 의심스럽긴 했지만 이렇게
자주 어울리기 전에도 간간히 모임 따위에 억지로 끌려나온 혜중과 같이 자리한
적이 여러번 있어서 그때마다 혜중을 대하던 경수의 태도나 경수의 입에서
떨어지지 않는 혜중에 대한 이야기 따위로 두 사람이 얼마만큼 가까운 사이인지
피부로 느끼고 있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렇지 않았다면 딱히 호모 포비아가 아닌 연진이라도 그의 그런 고백에 심한
충격을 받았을 것이 분명했다. 적어도 지금까지 연진의 주변에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기 때문에…….








" 참… 내가 애를 붙들고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 거냐 정말… 김 경수… 완전
   막가는 구나. "
" 아니예요. 선배님. "

뻘쭘하다라는 것이 표정으로 보여지면 어떤 것인지 확실하게 보여주는 경수는
연진을 향해 미안하다는 말을 했다.

" 진짜 미안하다. 연진아. 그냥 늙다리 선배의 푸념쯤으로 여겨주라. "
" 정말 괜찮아요. 저 그렇게 어리지 않아요. 그정도 쯤은 얼마든지 거부감 없이
   받아들일 수 있는 나이라구요. 그리고 솔직히 선배님 세대는 어떤지 몰라도
   저희 세대는 훨씬 개방적이거든요. 뭐 아직까지 주변에 동성을 사랑하는 사람은
   없었지만 그런 것에 대한 반감 같은 건 없어요. 전혀 놀라지 않았다면
   거짓말이겠지만… 왠지… 그냥 역시 그렇구나… 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그래요. 어쩌면 히히.. 경수 선배 태도를 보면서 머리 속 어느 구석 쯤에선
   그럴 지도 모른다는 생각 같은 거 하고 있었을지도 모르구요. "
" 하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긴 하지만……. "

시원스럽게 웃는 연진을 보며 여전히 뻘쭘함 그 자체의 얼굴로 말 끝을 흐리던
경수는 갑자기 무언가 결심하기라도 한듯 결연한 표정을 보이며 의자를 바싹
끌어당겨 앉았다.

" 음… 이 연진. 그럼 너 이 불쌍한 선배 좀 도와줄래? "
" 네? "
" 도와줄 수 있겠니? "

난데없는 도와달라는 말에 순간 당황했지만 너무나 절실해 보이는 경수의 눈빛이
차마 안돼요 라는 대답을 할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 그러니까. 뭘 도와드려야하는 건지 말씀을 해주셔야 대답을 하죠. 무작정
   도와달라고 하시면… 그럴리 없지만 사람을 죽여달라거나 그런 부탁이면
   도와드릴 수 없는 거잖아요. "

난처한 얼굴로 뭘 도와달라는 건지 말해달라는 연진을 향해 더 간절한 표정으로
이젠 그녀의 손까지 부여잡은 경수가 입을 열었다.

" 사람을 죽여달라는 건 절대 아니고, 법에 위배 되는 일도 아니고, 그다지
   양심에 어긋나는 일도 아니야. 그냥 사람 하나 살리는 일이라고 생각하면 돼.
   절대 어려운 일 아니야. 도와주기만 하면 결과가 어떻게 되든… 내가 크게    
   한턱 쏠께. "
" 그…그게 그러니까……. "





그 난데없는 도움 요청에 어쩔 수 없이 그러마고 대답했었지만 솔직히 경수가
도와주길 바라는 것이 어떤 것인지 알았을 때 연진은 그 일을 선뜻 반겼던 것이
사실이었다.
유 혜중이라는 삼무 원칙의 선배가 과연 그런 작전으로 넘어갈지, 두 사람의
곁에서 그들의 모습을 지켜보는 것도 꽤 즐거울 것 같기도 했고, 간절하기
그지없는 경수의 부탁과 절절한 고백에 마음이 약해지기도 했던 것이다. 어떻게든
경수를 돕고 싶다는 그 생각의 발로가 어떤 것인지는 생각해보지 않은 일이었지만
어쨌든 연진은 그를 돕고 싶었고, 지금은 그런 자신의 결정에 약간의 회의와
애매한 심정을 느끼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시작된 일에 이제와서 발을 뺄 수도 없었고, 일이 경수의 뜻대로
성사되던, 그렇지 않던 간에 결국 경수와 자신은 헤어진 연인이 될것이 뻔하므로
이제 슬슬 그 후를 생각해 둬야할 상황이었다. 어째서 처음 이 일에 가담할때
그 후의 일에 대한 생각을 하지 못했는지 스스로가 한심하게 여겨졌지만
그 어째서… 라는 이유를 찾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그냥 생각이 짧았던 거 라고, 자신이 너무 경솔하게 판단했던 거 라고만 생각하고
싶었다.

경수를 바라보고 서서 생각에 빠져있던 연진은 자신을 부르는 소리에 생각에서
빠져나왔다.

" 이 연진. 뭘 그렇게 넋을 놓고 보고 있냐. 경수 얼굴 구멍 나겠다. 이리 와라.
   줄리엣. "

줄리엣이라고 부른 사람은 진우였다.
대부분 대학 동창들이지만 그 중 진우는 연진이나 혜중 처럼 고등학교 동문이기도
했던 것이다.

" 지금 그 줄리엣에 대해서 이야기 중이었지……. "

연진이 경수 옆에 와 앉자 진우는 다시 이야기를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 그게 우리 학교 전통이야. 줄리엣과 로미오로 공연한 커플은 그 다음 커플이
   탄생할 때까지 공식적인 학교 행사에 커플로 등장하는 거 말이지.
   푸하하하하하하……. 근데 그게 우리 때는 남녀가 아닌 남남 커플이 되버린
   거야. 사실 처음엔 우리도 황당했다고……. 혜중이 녀석은 너희도 알듯이
   어디를 봐도 전혀 여성스러움이라곤 찾아 볼 수 없는 놈이잖냐. 뭐 솔직히
   잘생기긴 했다만 그게 어디 여성스러움과 관련이 있냐……. "

너스레에 손까지 휘저어 가며 쏟아 놓는 진우의 입담에 모두의 관심이 집중되어
있었던 탓에 어찌보면 어색해 보이기도 하는 연진의 묘한 표정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없었다.

" 하여간… 줄리엣이 교통 사고를 당해서 무대에 설 사람이 없어져 버린거야.
   그때 딱~ 떠오른게 바로 유 혜중이었지. 소품 담당이었지만 경수녀석 대본
   연습해준다고 줄리엣의 대사를 달달 외워 버렸던거야. 푸흐흐흐……. 우리
   부장이 또 한 카리스마에 한 무대뽀 하던 사람이었 거든. 죽어도 못한다는 놈을
   어거지로 밀어붙여 연습 시키고……. 그런데 막상 말이지 축제 당일에
   줄리엣으로 분장한 혜중이 놈을 보니까……. 와우~ 다들 가슴들이 철렁
   내려앉았을걸? 그게 유 혜중이라는 걸 모르고 봤다면 중성적으로 보이는 소녀의
   모습이라고 해야 하나……. 하여간… 딱 남자라고 볼 사람은 하나도 없었을 걸.
   흐흐흐… 경수 저놈도 아주 넋을 빼고 쳐다 보더라……. 하긴 왜 안그렇겠냐.
   매일 옆에 끼고 돌던 불알친군데, 그놈이 더도 덜도 아닌 딱 여자모습으로 앉아
   있으니 지가 보기에도 놀라웠겠지. 우린 그때 알았던 거야. 분장의 위대함을.
   속지 말자 화장발. 이거 절대 거짓말 아니다……. "

삼천포로 새려던 이야기를 다른 친구들의 원성에 다시 제자리로 돌린 진우는
더 가관으로 떠벌거리며 이야기를 꺼냈다.

" 아주 유명했지. 서고의 남남커플이라고, 두 놈이 친구 사이가 아니었다면
   몰라도 둘도 없는 친구 사이라는게 알려지고 나선 다른 학교에서 구경 오는
   놈들까지 있었다고. 거기다 경수 저놈은 얼빠진 놈 마냥 수시로 너 이쁘다…
   어쩌고 해대니……. 그때도 지금이랑 별반 다르지 않았던 혜중이도 한동안은
   이마에 힘줄 세우고 다닐 정도였거든……. 진짜 고교시절 최대의 이슈였어.
   서고의 줄로 커플 하면 주변 학교에 유명했었지……. 그렇게 커플이 되서
   결혼까지 간 선배들도 꽤 되거든. 그런데 그게 남남으로 맺어진 커플이니……
   이슈도 그런 이슈는 전에도 없었고 후에도 없을 일이지 뭐냐. 후후… 그런데
   또 한가지 놀라운건 말이다. 우리의 이 연진 여사님도 바로 그 줄로 커플이라는
   거지. 잘못된 커플링이 이제야 제 자리를 잡는 셈인건가……. 하여간… 세상에
   우연은 없는 모양이다. 야 이 말도둑 같은 놈아. 이제 제대로 된 줄리엣
   만났으니까. 잘 살아 봐. 내가 다른 여자라면 가만 안있지만 연진이니까 그냥
   봐주는 거다. 이 날강도야. "

잘나가던 이야기가 다시 경수에 대한 비아냥으로 끝났지만 다들 유쾌한 얼굴로
웃고 있었다. 심지어는 혜중에 대한 걱정으로 속이 바짝 바짝 타들어가고 있을
것이 분명한 경수조차도 환한 얼굴로 웃으며 그때의 일을 추억하는 듯 했다.
복잡한 마음을 내색하지 않기 위해 잔뜩 애교띈 표정을 하고 있는 연진이었지만
아직도 나타나지 않는 혜중의 존재에 대해서 누군가 눈치채고 찾지 않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있었다.

다시 싫지 않은 야유가 오가고 술잔이 오가던 중에 한 사람이 너무 늦었다며 먼저
일어나려 했다. 그러고 보니 시간은 어느 새 자정을 훌쩍 넘고 있었다.
다들 직장이 있고 생활이 있는 사람들이기에 내일을 위해 그만 일어나야할
시간이었다.
한 사람이 가야겠다고 일어서자 마치 약속이라도 한것처럼 너도 나도 이제 그만
가야할 거 같다며 주섬주섬 자기 물건들을 챙기기 시작했다.
그런 와중에 혜중의 부재를 눈치챈 사람이 진우였다.

"야… 잠깐. 혜중이 이 놈 어디 간거야. 화장실 간다던 놈이 왜 안나타나냐…….
  이 연진. 너 화장실 갔다 왔지 혜중이 못 봤냐. "
" 에……. "

뭐라고 대답해야할지 알 수 없어 얼버무리려는 찰나 계산서를 챙긴다고 몸을
비틀던 선배 하나가 혜중을 발견했다.

" 저기 온다. 저놈도 양반되긴 글렀다. 야. 유 혜중 너 변기에 빠졌다 왔냐?
   니가 무슨 이완 맥그리거라고……. 자식… 어라… 야 저놈 취한거 아니냐?
   어째 걸음걸이가 저래? "

혜중이 취한거 아니냐는 말이 모든 사람의 시선이 혜중에게로 쏠려 버렸다.
유 혜중이 취하다니, 토끼머리에 뿔이 나고, 해가 서쪽에서 떴다는 말을 한다면
믿을까. 그 지독한 놈이 취했을리 없다는 표정으로 돌아다본 그들은 살아 생전엔
절대로 볼 수 없을 거라고 체념하고 있던 모습을 드디어 볼 수 있었다.
그리고 하나같이 순간 마음 속으로 주여~ 신은 존재하나이다… 라는 식의
중얼거림을 삼키고 있었다.
사람은 절대 볼 수 없을거라고 철썩같이 믿고 체념한 것을 보게 될 때, 현실에선
절대 존재할리 없는 무언가를 보게 될 때, 그렇게 신의 존재를 인정하게 되는
것이다.

취한 사람의 전형적인 모습으로 비틀거리며 걸어오는 혜중의 얼굴엔 평소답지
않은 헤지근한 미소까지 어려 있었고, 그런 혜중의 모습을 보게 되었으니 설령
그들 모두가 무신론자였다고 해도 지금 이 순간 만큼은 신의 존재를 찬양할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그 헤지근한 미소를 보이며 비틀비틀 걸어온 혜중은 경악스럽기까지 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인간들을 향해, 원츄~ 라며 윙크까지 날리는 것이었다.
이젠 단순히 경악스러움을 떠나 공포심까지 느끼게 만들만한 행동이었다.
대체 저 인간이 원츄~ 라며 윙크를 날리는 것을 보게 되다니……. 정말 말세에
가까운거야라는 말세론까지 머리 속에 떠오를 정도로…….

평소에 어떤 일에도 시큰둥하게 무반응, 무감동이었던 그가 이런 행동을 하는
것을 단순히 취해서라고 받아들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니, 죽었다 깨어나도 그가 술에 취하는 모습 따위는 볼 수 없을 거라고 이미
오래 전에 포기한 사람들이고 보니 그의 취한 모습을 보는 것 만으로도 충분히
커다란 충격임이 분명한데 거기다 원츄~와 윙크까지…….
세상이 미쳐 돌아가는 것이 아니라면 이건 절대 현실이 아닐거라는 생각에 슬쩍
자신의 허벅지를 꼬집어 보는 놈, 옆 사람의 옆구리를 쑤셔보는 놈, 두 눈을
껌뻑이다 못해 열심히 손으로 문지르며 행여 시력에 문제가 생긴 것이 아닌지
스스로를 의심하는 놈, 보지 말아야 할 것을 본 죄로 소금기둥이 된 롯의
식솔처럼 완전히 얼어붙어 버린 놈, 있는대로 턱을 떨구고 전형적인 코믹만화와
같은 모습으로 떨고 있는 놈. 아주 가지각색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었다.

" 어… 다들 왜 그러냐아~ 야… 이 진우 넌 왜 얼었냐? 지금 얼음땡 놀이 하냐?
   야 임마. 내가 풀어줄께. 땡~. 자식들 유치하긴 우리가 한두살 먹은 애냐
   그런 놀이를 하게……. 야 진수. 넌 왜 눈을 쑤셔대고 그래. 너 장님 되는게
   소원이었냐. 뭐 니 소원이 그렇다면야 어쩔 수 없지만 여기서 유혈 사태 벌이진
   마라아~ 얼래 형수 넌 또 뭐냐? 너 만화 캐릭터로 출연하기로 했냐? 표정이 왜
   그 모양이냐아~ 히히히.. 이 자식들이 다들 미쳤나 왜 이래? 얼쑤 얌마 김 경수
   넌 뭐냐? 왜 똥 씹은 꼬라지로 면상을 구기고 있어. 짜쉭이… 임마 이쁜 애인
   만들었으면 벙글벙글 웃어도 부족할 판에 그게 뭔 개상이냐. 얼굴 풀어 임마. "

이 사람 저 사람, 놀라 굳어진 그들의 표정을 넉살좋게 품평까지 해대는 혜중의
말투는 행동과는 달리 그다지 취한 사람같진 않았다.
약간 늘어진다는 것 말고는 평소와 별로 다르지 않은 말투였던 것이다.
비틀거리는 몸이나 그 답지 않은 엽기적인 행동이 아니었다면 어느 누구도 혜중이
취했다는 것을 믿지 않았을 것이었다.

친구들을 툭툭치며 품평을 하던 혜중이 마지막으로 경수를 향해 가더니 똥 씹은
면상 운운하며 잔뜩 구겨진 그의 얼굴을 두 손을 턱하니 붙들고는 마구 흔들며
비벼대기 시작했다.

" 임마아~ 형이 면상 풀라면 풀 것이지 왠 반항이냐. 풀어. 안그러면 너
   뽀뽀해버린다아~ 그 때처럼 확 뽀뽀해버릴 거야. 아… 푸히히히… 이 연진.
   너 그거 아냐? 이 자식 첫 뽀뽀는 내가 낼름 먹어버렸다는 거 말이다.
   우하하하하… 증인 많아. 많다고오~ 내가 말이지. 어제 말이다. 남들 다 보는
   앞에서 요놈의 자식 첫 뽀뽀를 홀딱 해치 웠거든. 그런데 연진아. 질투는
   하지마라아~ 그거 그냥 로미오와 줄리엣이다아~ 내가 경수 이놈 연애사를 자알~
   아는데 말이지. 이 자식 지금 총각이야. 아마 뽀뽀도 숫총각이야아~ 크크큭. "

여전히 경수의 얼굴을 쥐고 흔들며 연진을 향해 첫뽀뽀를 먹어치운게 자신이라고
말하던 혜중의 말이 점점 꼬이기 시작했다. 혀가 꼬이는 것이 아니라 점점
늘어짐이 더해가고 뭔가 이상한 말을 뒤섞기 시작했던 것이다.

그런 그의 태도에 얼어붙어 있던 사람 중에 제일 먼저 정신을 차린 것은
연진이었다.

" 선배님. 그만 하세요. 경수 오빠 얼굴 찌그러지겠어요. "

웃음을 머금고 혜중의 손을 잡아때려던 연진의 손을 날카롭게 뿌리친 혜중이 다시
경수의 얼굴을 부여잡으며 그녀를 향해 날카롭게 소리쳤다.

" 건딜지 마앗. 내가 경수 얼굴 펴준다는데 이 연진 니가 무슨 필요가 있어어~
   너 가라. 집에 가란 말이다. 난 오늘 경수 꾸겨진 똥 씹은 얼굴을 다리미로
   펴줘야 해. 애들은 가라아~ "

넋이 빠져서가 아닌 잔뜩 구겨진 얼굴로 그런 혜중의 태도를 두고 보던 경수가
그의 손을 강하게 붙잡고  끌어 내렸다.

" 유 혜중. 그만 해. 너 취했어. 그만 하고 집에 가자. "
" 야 임마아~ 나 안 취했다. 너 나 취한거 봤어? 어… 너 경수… 아 봤구나. 것도
   아주 많이 봤다아……. 우헷… 야아… 김 경수. 너 나 취한거 소문내면 두거어~
   알지. 두글 거야. "

경수에게 손을 붙들린채 여전히 헤지근하게 웃으며 되지도 않는 말을 뱉어내는
혜중을 이젠 안타까운 얼굴로 바라보며 경수는 대충 그의 주정에 말을 맞춰주고
있었다.

" 그래. 알았어 소문 안내. 그런데 너 지금 취했어. 알지? 가자. 집에 가야지. "
" 어… 가야지. 근데 다 어디 갔냐? 애들이 왜 하나도 없어? 연진이만 있네? "

그때까지도 얼어 있던 친구들은 자신을 찾는 혜중의 말에도 누구 하나 대답할
엄두를 못 내고 있었다.
평소에도 취해서 주정을 하는 일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원래 사람이란 자신이 경험해 보지 않은 일, 더욱이 절대 경험할리 없다고
철썩같이 믿고 있는 일을 접하게 되면 아무런 반응도 보이지 못하게 마련인
것이다.
그건 인간의 모든 행동은 과거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며 대부분의 사람이 일어날
가능성이 있는 모든 일에 대한 나름대로의 예상 같은 것을 기억 세포 속에 담고
살기 때문에 돌발상황에서도 쉽게 대처할 수 있지만 전혀 경험해보지 않은 일,
그리고 일어날리 없다고 믿는 일에 대해서는 어떤 대비책 따위도 만들어 두지
않기 때문이었다.

여전히 경수에게 붙들린 채로 고개를 돌릴 생각이 없는 건지, 아니면 취해서
돌릴수 없는 건지 모르지만 앞에 서 있는 경수만을 뚫어져라 쳐다보는 혜중은
친구들이 어디 갔느냐고 투덜거리고 있었고, 그 친구들은 어리벙벙한 굳어짐의
상태에선 풀려났지만 모두들 어떻게 반응해야할지 몰라 난처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런 두 사람의 옆에 어정쩡하게 서서 순식간에 빛을 잃은 그림자가 되버린
연진의 존재조차도 의식하지 못할 정도로 그들은 얼이 빠져 있었던 것이다.

" 저기 진우야. 미안하지만 니가 연진이 좀 바래다 줄래. 다들 미안하다.
   이 녀석이 오늘 취해 버렸네. 야… 너희들 진귀한 구경하는 거야. 유 혜중 취한
   모습을 살아 생전 보다니……. 난 이거 죽을 때까지도 나 밖에 못볼 광경인줄
   알았다. 미안하다. 다들 알아서들 가라. 나 이놈 집에 데리고 가야겠다.
   연진아. 미안하다. 나 혜중이 데리고 가야겠어. "
" 알았어요. 잘 챙겨가요. 가다가 어디 흘리지 말고……. 뭐 어련이 알아서 잘
   챙기겠어요만……. "

구겨졌던 얼굴을 펴고 웃기까지 하며 말을 하고 있었지만 그런 경수의 눈빛은
결코 아무렇지도 않은 것이 아님을 연진은 알고 있었다.
그리고 자신에게 하는 미안하다는 말이 어떤 의미를 담고 있는지도…….
아마 이렇게 자신이 해야할 역활은 끝이 났다는 의미일 것이 분명했다.

정말 이례적인 혜중의 태도만으로도 자신들이 모의한 이 일의 결과가 어떻게
나올지는 이미 훨씬 전부터 어렴풋이 느끼고 있었으니까…….
선선히 어울려 주던 혜중의 무심한 미간에 살풋 살풋 짜증이 어리기 시작하던
그 순간부터.



이젠 몸도 제대로 가누지 못하는 혜중을 들쳐 업은 경수가 먼저 차를 타고 떠나자
모두 뱡향에 맞춰 뿔뿔이 흩어졌지만 누구 하나 혜중의 주정에 대해 입을 여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좀 흐른 뒤에는 이 일을 두고 두고 안주 삼아 씹을 것이 분명하긴 해도
아직은 그럴 수 있을 만큼 이 일이 현실에서 일어난 일이라는 것을 완전히
확신하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모두 집에 돌아간 뒤 오늘 본 그 모든 작태가 진짜 현실이었는지 아닌지
밤새 고민하다 내일 쯤은 서로의 전화통에 불이 날 것이다. 그리고 급속도로
동기, 선후배들에게 이 소식이 전해질 것이 분명했다.  







모두 떠나고 난 뒤에 임시기사로 임명받은 진우와 연진만이 남아 있었다.
이미 자정을 훌쩍 넘긴 시간이었지만 번화가의 밤 거리는 여전히 불야성을 이루고
있었다.

" 우우 택시가 제대로 잡힐라나……. "
" 진우 선배님. 일찍 들어가셔야 해요? "
" 아니. 그건 아니지만 왜? "

왜 그러냐는 얼굴로 바라보는 진우를 물끄러미 바라보던 연진이 고개를 돌리며
한숨을 내쉬었다.

" 후우… 저랑 술 한 잔 더 하시지 않으실래요? "
" 우잉? 야. 이 연진. 너 쪼잔하게 삐진거냐? 임마. 이해해. 기집애도 아니고
   사내자식이잖아. 그 놈들 아무도 못말리는 거 너도 알거 아니냐.
   너 그거 극복 못하면 앞으로 힘들거다. 쯧쯧……. "

혀까지 차가며 둘 사이를 변명하려는 진우를 향해 힘없는 미소를 지으며 연진이
그의 말을 끊었다.

" 알아요. 두 분 사이가 어떤 건지. 너무 잘 알아서 탈이죠. 삐진거 아니예요.
   질투 같은 것도 아니구요. 그냥 가슴이 좀 답답해서……. 곤란하시면 그냥
   가구요. "

왠지 기운없어 보이는 연진의 표정에 진우는 차마 그녀의 청을 거절할 수 없었다.

" 뭐… 나야 어차피 프리랜서니까 늦어도 상관없지만 넌 집에 연락은 했니? "
" 저… 혼자 살아요. "
" 에? 너 집이 서울이잖아. "
" 부모님 시골에 집 사서 농사 지으시겠다고 동생들 달고 내려가 버리신게
   언젠데요. 저만 여기 딸랑 떨궈졌는 걸요. 늦게 들어온다고 걱정할 사람도
   없고, 잔소리할 사람도 없으니까 걱정 마세요. "
" 허참. 이 녀석아. 같이 안산다고 부모님 걱정이 덜어질 거 같으냐. 그럴수록
   더 잘 해야지. 에혀. 내가 널 붙들고 뭔 소릴 하겠냐. 엄청난 세대 차이다.
   우리땐……. "

우리땐 운운하며 길어지려는 진우의 말 꼬리를 다시 짤라낸 연진이 다시 물었다.

" 어떻게 하실래요? 저랑 한잔 하실래요? 그냥 들어가실래요? "
" 아마도 내가 가자고 하면 너 나만 가라고 하고 혼자 어딘가 가서 술을 마실게
   분명하겠지? 야야… 나 나중에 경수한테 욕들어먹기 싫다. 가자… 가자구…….
   모로 가도 집에만 잘 모시면 되는거 아니냐. 몇 시까지 바래다 드리라고 한 거
   아니니……. 날이 새던 해가 가던 집에만 잘 배달하면 되겠지 뭐… 가자…
   가자고……."

시원스레 가자고 말하며 연진을 끌고 어딘가로 가는 진우의 뒤꼬리에 매달린
그녀의 표정은 이제 힘없음 정도가 아닌 모든 것이 다 끝난 사람의 허탈함과 절망
같은 것이 어우러져 보였다. 하지만 그런 그녀의 표정이 앞서 걸어가고 있는
진우에게 보일리 없었다.
털레털레 그의 뒤를 따라가며 연진은 분명 좋아 보이지 않을 자신의 표정을
가다듬기 위해 노력했다. 충동적으로 술을 더 마시자고는 했지만 그에게 이런
이야기들을 주절주절 털어놓을 생각은 없으니까.


" 야. 여기 가자. 여기 내 단골이거든. 이 시간이면 사람도 별로 없고 한산해서
   조용히 술 마시기 딱 좋지. 어때? "

한참을 골목골목 들어가 당도한 곳은 조금 허름해 보이는 주점이었다.
90년대 초반 대학가에 유행했던 학사주점같은 분위기를 풍기는.
아직도 대학가 곳곳에 남아 있기 때문에 두어번 가본적이 있던 연진은 그런
주점의 풍경이 낯설지 않았고, 무엇보다 사람이 많지 않을 거란 것이 마음에
들었다.
지금은 웅성거리는 사람들 틈에 앉아 술을 마실 기분이 아니었기 때문에…….

" 좋아요. 저 이런 주점 몇 번 가 봐서 알아요. 이런데도 분위기 좋던걸요 뭐. "
" 허허… 그래? 난 니들 세대는 테크노빠나 나이트 같은 곳만 가는 줄
   알았지……. "

연진을 이끌고 들어가며 또 다시 세대 운운하는 진우의 등 뒤로 코를
찡긋해주었지만 솔직히 십년이라는 나이 차이는 충분히 세대차이를 거론할만한
것이었다.
동문 선후배라는 인연으로 만나진 사이라 해도 십년의 차이는 쉽게 극복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연진은 잘 알고 있었다.
진우 역시 경수처럼 그다지 세대간의 격차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니었지만
가끔 이렇게 입버릇처럼 너희 세대라는 말을 쓰는 이유는 그가 프리랜서 방송
작가인데다 주로 구성물을 다루면서 청소년 문제에 관련된 타큐를 여러번 다루다
보니 자연스럽게 입에 베어버린 습관에 불과할 뿐이었다.

스물 한살과 서른 한살의 차이는 숫자 상으로 보기에도 엄청난 갭을 가지고 있는
것이지만 자라면서 겪은 세상사에서도 엄청난 격차를 가지고 있는 것이었다.
그것을 일일이 다 열거하자면 아마도 두 사람은 마주 앉아 이 집 술을 다 동내고
날밤을 홀랑 새도 부족할 것이 분명했다.
거기다 진우라는 인물은 작가라는 직업 때문인지 아니면 그것이 천성인지
모르지만 그 특유의 입담으로 한번 꼬리를 물고 입을 열기 시작하면 청산유수
몇 날 몇 일을 밤을 새도 쉬지 않고 떠들 수 있는 말빨의 소유자였던 것이다.



단골이라는 말을 확인이라도 시켜주듯 진우가 들어서자 한가하게 앉아 책을 보던
주인 아저씨가 그를 반갑게 맞이 했다.

" 어이구. 이작가님 아니세요. 오랜만에 오셨네요. 이쪽으로 앉으세요. "

주인이 안내하는 자리에 앉아 당연하다는 듯이 평소 먹는대로 주세요 라고 진우가
주문을 하자 주인 역시 당연하다는 얼굴로 주방을 향해 이 작가님 오셨어…라는
말을 던졌다.

" 많이 바쁘셨던 모양입니다. 정말 오랜만이시네요. "
" 하하… 바쁘다기 보다는 한동안 여행을 다녀오느라구요. "
" 여행이라면… 드디어 인도에 다녀오신게로군요. "
" 네에. 드디어 갔다 왔죠. 아참.. 사장님 드리려고 사온 게 있는데 오늘은
   예정에 없이 한 발걸음이라서 못 가져왔네요. 조만간 그거 들고 다시
   오겠습니다. "
" 아이구 무슨 선물 같은 걸… 실례인줄 알지만… 이쪽 분은 누구신지……. "

조심스럽게 연진의 존재에 대해 물어보는 주인에게 진우는 허물없는 웃음을
보여주며 후배라고 소개를 했다.

" 이 녀석은 고등학교 부터 대학까지 아주 까마득하게 밑 기수의 후배예요.
   연진아. 인사드려라. 이분은 내가 아주 존경해 마지 않는 분이지. 그리고
   내 오랜 단골 술집 주인이시기도 하고……. "
" 안녕하세요. 이 연진이라고 합니다. "
" 예. 안녕하십니까. 전 주점 사장이라고 합니다. 하하……. 이 작가님이 하신
   말은 앞은 틀리고 뒤는 맞는 말입니다. "

앞은 틀리고 뒤는 맞다는 말에 잠시 무슨 말인가 어리둥절 했지만 장난스럽게
웃고 있는 주인의 미소에 금새 그것이 무슨 말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 아냐. 앞도 맞고 뒤도 맞아. 나 같은 개날라리 허접 글쟁이 말이나 받아준다고
   우습게 봤다간 큰 코다친다. 나도 멎모르고 덤볐다가 아주 아작이 났거든.
   이젠 알아서 꼬리 내리고 있긴 하지만. 사장님. 이 녀석 저랑 같이 오는
   친구놈 애인이예요. 아마 앞으로 자주 보시게 될지도 모릅니다.
   얼굴 잘 기억해두세요."

" 하하……. 허접 글쟁이라니요. 잘 나가는 구성작가 분이 그런 말씀하시면
   안되죠. 그나저나……. 친구분이라면 그 동창분들 말씀이시지요? 네.
   잊어버리지 않고 잘 기억하고 있겠습니다. 이 연진양이라구요. 그럼 즐겁게
   노시다들 가세요. "

술과 안주가 나오자 사장은 사람좋은 웃음을 보여주며 자리를 비켜주었다.

평소 진우의 취향은 소주도 맥주도 양주도 아닌 동동주였던 모양이었다.
집에서 담근 것 같아 보이는 진한 동동주 한단지와 두툼하게 맛깔스러워 보이는
해물파전을 앞에 두고 두 사람은 말 없이 각자의 잔을 채워 진득해 보이는
동동주를 들이켰다.
동동주라면 여러번 마셔 본 술이었지만 이런 맛이 나는 것도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안 연진은 다시 잔을 채워 마치 그 맛을 음미하기라도 하듯 지긋이 눈을
감고 채워진 술을 빨아들였다.

그런 연진을 바라보고 있던 진우는 자신의 잔에 다시 술을 채우며 무심한 어조로
말을 걸었다.

" 그래. 난데없이 가슴이 답답해진 이유가 뭐냐? "

" ……. "

그런 질문은 누구든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더욱이 엄청난 입담 만큼이나 호기심이
왕성한 진우라면 메너 좋게 모른 척 덮어 주고 넘어가는 일 따위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 그냥이라고 하면 안 믿으실 거죠? "
" 허… 그냥이라. 뭐 그냥 그럴 수도 있지. 여자들은 남자랑 달라서 딱히 무슨
   이유가 없어도 괜히 센치해지고 그런 다니까. 그런데 말이다. 이 연진. 넌
   거기에 해당이 안되는 거 같다 만? 솔직히 객관적인 상황이 그렇잖아. 굳이
   말하고 싶지 않다면 안해도 돼. "

말하기 싫으면 안해도 돼 라고 했지만 진우의 표정은 정반대로 듣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이었다. 연진이 그의 말 대로 아무 말 없이 입을 다물어도 상관은
없을 것이었다. 그저 그가 한 말처럼 여자들의 이유없는 센치해짐일 뿐이라고
해도 상관 없었다.

앞에 놓여진 술잔을 내려다 보며 한참 생각을 저울질 하던 연진은 고개를 들고
편한 얼굴로 자신을 바라보고 있는 진우를 쳐다 보았다.

" 선배님. 사람이 어떤 일을 결정할 때요. 대부분 그런 결정을 하는 확실한
   이유가 있기 마련이잖아요. 그런데 그 이유를, 아니 이런 이유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는데 점점 그게 모호해지는 건 왜일까요? "

연진의 두서 없는 질문에 순간 말문이 막힌 사람처럼 멀뚱하게 그녀를 바라보던
진우가 한숨을 내쉬었다.

" 임마. 그렇게 애매한 질문이 어딨냐? 머리 자르고, 꼬리 자르고, 몸통 일부만
   들이대면서 이게 뭐냐고 물어 보면 그게 뭔지 어떻게 알겠어? 내가 암만
   글하고 말로 먹고 사는 놈이라지만 그거 참……. 뭐 어쨌던 니 말에 있는
   그대로 답을 달라고 한다면, 그건 처음 결정할 때 그 어떤걸 이유라고
   생각했는지 몰라도 본심은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지 뭐. "

본심은 그게 아니다.
애매한 질문에는 애매한 대답이 나올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런데 그녀에게는 진우의 대답이 전혀 애매하게 들리지 않았다. 갑자기 속이
바짝 타들어가는 느낌에 연진은 급하게 술잔을 들이켰다. 하지만 그 한모금의
술로는 속이 타는 느낌을 지울 수 없었고 연거푸 서너잔을 더 들이킨 뒤에야
힘들게 숨을 내쉴 수 있었다.

" 야 이 연진. 너 취하기로 작정했냐? 그만 마셔. "

연진의 행동에 당황한 진우가 그녀를 말리려 했지만 그런 그를 향해 피식 웃음을
날릴 뿐이었다. 그리고 다시 몇 잔의 술을 자작한 연진이 푸념하듯 입을 열었다.

" 푸후~ 저 암만 마셔도 취할 것 같지가 않은데요? "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는 연진의 얼굴은 무겁게 그늘이 내려앉아 있었다.

진우는 연진을 잘 안다고 할 수 없다.
경수네들과 친구이다 보니 이리저리 선후배 사이로 연결되었을 뿐 그다지 속 깊은
이야기를 할 만큼 가까운 것은 아니었을 뿐더러 진우 자신은 별로 여자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고, 더욱이 십년이나 차이가 나는 어린 여자애에 대한 관심 따위를
가질 만큼 한가하지도 않았다.
어찌하다 보니 친한 친우의 여자 친구가 되었고, 그저 그 여자애가 참 밝고 편한
녀석이라는 것을 아는 것으로 충분히 만족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가 연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인상은 그것이었다. 언제나 걱정 따위는 모른다는
듯 밝게 웃고 있는, 거리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여자애들과 같은 이미지.
저런 그늘진 표정 따위는 알리 없는 철부지 어린애 라는 것이 진우가 연진에 대해
가지고 있는 이미지였다.

그런 그녀가 막상 단둘이 앉은 자리에서 저렇게 그늘진 표정을 보이자 진우는
도무지 어떻게 해야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었다.
게다가 그가 보기엔 지금 이 자리는 상당히 껄끄러운 자리인 것이다. 경수와
혜중의 유별난 우정의 역사를 잘 알고 있기 때문에 자신이라면 당연하게 받아들일
일이었지만 그가 아무리 여자에 대해 관심이 없고, 아는게 없다고 해도
상식적으로 이런 상황이 여자에게 결코 기분 좋을리 없는데다, 이해하기 쉬운
일도 아니라는 것 쯤은 알 수 있으니까.

" 저… 연진아. 너도 알겠지만 혜중이랑 경수는 정말 형제 같은 놈들이야.
   걔네들 별난 우정이 얼마나 유명한지 너도 들어서 알거 아니냐. 그리고 대체로
   남자들은 가끔 애정 보다도 우정이 먼저일 때가 있거든. 힘들겠지만 니가
   이해해줘라. 아까 상황이 그랬잖아. 혜중이가 취하는 모습 같은 걸 누가
   상상이나 했겠니? 너도 봤잖냐. 우리 다 같이 얼어붙어 한마디도 못하고 있었던
   거. 솔직히 지금도 믿어지지 않는다. 내일 아침에 일어나면 그게 꿈이 아니었나
   싶을 거란 말이다. 그러니 경수도 당황했을 거야. 생전 그런 꼴 안보이던 놈이
   그러니 얼마나 놀랐겠냐? 그냥 친구도 아니고……. 남자들 다 그래. 친구 일엔
   내가 꼬꾸라져 죽는다고 해도 발 벗고 나서는게 남자들이야. 니가 아직 어려서
   잘 모르겠지만, 너 경수랑 사귈려면 혜중이 녀석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할 거다.
   에혀… 에라 모르겠다. 어차피 내친 김에 다 해버리자. 너 혜중이 녀석, 아니
   그 두 놈의 그 별난 우정 받아들일 자신 없으면 일찌감치 손 털어. 니 마음 더
   깊어져서 돌이킬 수 없이 상처가 커지기 전에……. 넌 아직 어려서……. "
" 그게 아니에요!! 자꾸 어리다고 하지 마세요!!!! "

무서울 만큼 두 눈을 빛내며 말을 끊어버리는 연진의 태도에 놀란 진우는 손에
들고 있던 술잔을 놓쳐버렸다. 그리고 그 술 잔에서 쏟아진 술이 흘러 바지단을
적시는 것도 의식하지 못한채로 딱딱하게 굳어버렸다.
진우는 오늘 두 번씩이나 얼이 빠져 굳어버리는 경험을 해야했다.
평소라면 이런 상황에 그다운 입담으로 주눅들지 않고 상대를 깔아뭉게 버렸을
테지만, 오늘은 그 입담이 잠시 파업을 했는지, 아니면 어딘가로 장기 휴가라도
가버린 건지 한마디도 꺼내지 못하고 이렇게 바보 마냥 얼어 붙어 버렸던 것이다.
진우가 이렇게 한마디 대꾸도 못하고 얼어붙는 것은 혜중이 술에 취하는 것
만큼이나 보기 힘든 희귀한 일에 속했다.

그런 진우의 표정을 보며 스스로도 자신의 행동에 놀란 연진 역시 한동안 입을
열지 못하고 있었다.
이렇게 격한 반응을 보일 말이 아니었다. 어리다는 말이 결코 틀린 말은
아니었으니까.  
십년이라는 나이 차이 때문이기도 하지만 스물한살이라는 나이는 그 배가 되는
시간을 산 사람들에겐 충분히 어리게 보일 수도 있는 나이였다.
더욱이 서로 잘 알지 못하는 사이라면 누구든 먼저 나이로 상대를 평하기
마련이니까.
하지만 연진은 스스로를 어리다고도 어른이라고도 생각하지 않았다.
오직 자신의 나이에 느끼고 알야할 것들과 알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 확실하게
구분하고 있었고, 그렇기 때문에 누군가 나이 운운하는 말을 해도 늘 웃어
넘겼는데, 오늘은 그럴 수가 없었던 것이다.

" 미…미안하다. 나쁜 뜻은 없었어. "
" 아니예요. 제가 죄송해요. 진우 선배님이 보시기엔 전 분명 어린 거니까요.
   그냥 지금 제 감정이 너무 뾰족한 모양이네요. 후우……. "

엉겁결에 미안하다고 말하는 진우를 향해 연진은 힘든 미소를 보여주었다.
사람들 사이에서 충돌을 일으키는 것만큼 그녀가 싫어하는 일은 없었다. 누구와든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싶은 것은 욕심일지 모르지만 적어도 타인에게 퉁박스럽게
대한다거나 불쾌감을 주는 것만은 하고 싶지 않았는데, 지금 자신의 행동은
충분히 진우에게 불쾌할 수도 있는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 아니다. 내가 미안하지. 생각없이 말을 내뱉어 버린거 같다. 그건 어디까지나
   너희들 문제인데. 내가 끼어들 일이 아니지. 뭐 그럴만큼 널 잘 아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

무안한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진우를 보는 연진의 마음은 아까 보다도 더
무겁기만 했다.
진우에게 술 한잔 더 하자는 말을 할때 뭔가 해결책을 찾자는 생각이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이렇게 어색하고, 불편한 상황을 만들 생각도 아니었던
것이다.
스스로도 납득할 수 없는 이런 마음 따위 그냥 사람 좋은 진우와 한잔 더 하면서
잠시라도 덮어 두고 싶었을 뿐인데, 평소답지 않은 자신의 행동이 너무나 맘에
들지 않고 화가 나는 연진이었다.

" 아뇨. 선배님 틀린 말씀하신 것도 아닌데요. 모르고 있었던 일도 아니고…….
   누가 봐도 선배님처럼 생각할 수 있는 상황이었던거 저도 알아요.
   선배님 말씀대로 난데없이 술을 마시자고 한 제 행동이 잘못된 거겠죠. "

고개를 숙인 채로 풀이 죽어버린 연진의 태도가 왠지 안쓰러워진 진우는 무언가
위로가 될 만한 말을 해주고 싶었지만 어딘가로 출장가버린 그의 입담은 아직도
복귀 전인 모양이었다. 게다가 여자에 대해선 본능적인 욕구 외엔 그다지 관심이
없는 그이고 보니 이런 상황에서 어떤 말을 해야할지도 솔직히 알 수 없었던
것이다.
연진의 말마따나 애시당초 단 둘이 술을 먹으러 온 것 자체가 잘못 된 것일지도
몰랐다.
하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을 쓰러담을 수도 없는 노릇이고, 어떻게든 이 상황을
타계해야 했지만 딱히 무슨 말을 해야할지 알 수 없는 진우는 어색한 얼굴로
쏟아진 술을 대충 닦아내기 시작했다.

주방 근처에 앉아 책을 읽고 있던 술집 주인장은 그런 두 사람을 물끄러미
바라보다 어쩔 수 없다는 듯이 고개를 휘휘 저으며 다시 자신이 읽던 책으로
시선을 돌려 버렸다.
연진과 진우 외에 두 팀 정도 손님이 있었지만 누구도 두 사람의 어색한 분위기
따위에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대충 흘린 술을 닦아낸 진우는 다음엔 무엇을 해야할지 궁리를 하다 비어 있는
두 사람의 술잔을 채우곤 말없이 술을 마셨다.
이미 술을 더 마시고 싶은 마음 따위는 사라져버린지 오래였지만 술을 마시는 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하는 것도 우습고, 그렇다고
대체 이러는 이유가 뭐냐고 케묻는 것도 그다지 할만한 일이 아니라고 느껴졌던
것이다.



한동안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연진이 잔뜩 괴로운 얼굴로 진우를
쳐다 보았다.
그런 그녀의 행동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할지 알 수 없는 진우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했지만 솔직히 등 뒤로 식을 땀이 흘러내리는 것처럼 불편하기
그지없었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경수를 불러내고 싶었지만, 그걸 연진이 있는
자리에서 할 수도 없었고, 그렇다고 화장실 핑계를 대고 일어나기도 어색해져
버린 상황이고 보니 이렇게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는 것 말고는 무엇도 할 수
없게 되버렸다.

" 선배님. 저 하나만 여쭤보고 싶은게 있어요. "
" 어……. 그…그래. 뭔데? "

대체 뭐가 물어보고 싶은 걸까?

" 사람이 누굴 좋아하게 될때, 아니 그걸 깨닫게 되면 어떻게 해야하는 걸까요? "

아까부터 이렇게 애매한 질문만을 해대고 있었다.
다른 사람이 그에게 이런 식의 질문을 던졌다면 대뜸 면박부터 했을 진우였지만
괴로움이 가득한 그녀의 모습에 그는 그럴 마음 조차 들지 않았다.
왠지 성심성의껏, 최대한 진심을 담아 대답해주어야할 것 같아 한동안 묵묵히
생각을 하던 진우가 입을 열었다.

" 글쎄다. 질문할 대상이 틀린 것 같다만……. 좋아한다는게 어떤 의미냐에 따라
   달라지지. 그리고 그 대상이 누구냐에 따라서도 달라지겠고…….
   그게 사랑을 의미하는 거라면 솔직히 난 사랑을 해본 적이 없어서 잘 모르겠다.
   하지만 글자 그대로 좋아함, 호의를 말하는 거라면 상대와 좋은 관계를
   유지하면 되는 거겠지. 그리고 솔직하게 자신의 감정을 표현하면 되는
   거겠고……. 그런데 사랑이라면… 모범 답안대로 이야기 할 수 밖에 없겠다.
   지극히 상식적인 얘기지만 그 상대가 사랑해도 무방한 상대라면 용기를 내서
   자신의 감정을 털어놓아야 하지 않을까? 그 결과가 어떨까라는 우려를 먼저
   하는 건 바보짓이라고 생각하거든……. 이건 아마도 내 평소 생활신조에 의거한
   생각이겠지만. 그리고 난 그다지 동의하고 싶지 않은 말인데 사랑은 쟁취하는
   거라고 하잖냐. 단지 그 상대가 사랑에 있어서 부적절한 상대라면 자신의
   감정을 스스로 조절해야겠지. 후우… 내 대답이 니가 원하는 대답인지
   모르겠구나. "
" 정답 같은 건 어디에도 없는 거 같아요. 사람이 무언가를 결정할 때 말이죠.
   그 마음의 발로가 어디인지 확실하게 알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아니… 항상, 언제든지 자신의 본심을 확실하게 알고 살 수 있다면요.
   끝이 뻔히 보이는 일에 대한 나의 본심을 뒤 늦게 깨달았을 땐 어떻게 해야하는
   건지……. 전 제가 어른이라고 생각하지 않지만 그렇다고 어리다고도 생각하지
   않아요. 적어도 제가 결정한 일에 대해선 충분히 책임을 질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했는데……. 그게 아니었나봐요. 선배님 말씀대로 전 아직 어린 것 같네요.
   하하……. "

자신의 답이 그다지 맘에 들지 않는 진우에게 힘겨운 목소리로 속내를 털어놓으며
허탈한 웃음을 흘리는 연진의 모습은 마치 사랑에 실패한 여자의 그것과도 같아
보였다.
아니 애인을 빼앗긴 여자라고 해야할까?

" 저… 연진아. 내가 조금 전에도 말했지만 경수랑 혜중이의 관계에 대해서 너무
   긴장하지 마. 그놈들 진짜 형제같은 사이야. 너도 형제가 있어 알겠지만 내
   형제가 평소답지 않은 모습을 보이면 다른 거 눈에 안들어오잖아. 거기다…
   원래 남자란게… 우정이……. "
" 아뇨. 그런게 아니예요. 선배님. 저 경수오빠나 혜중선배님 때문에 이러는 거
   아니예요. 그런걸 이해 못할 만큼 속이 좁은 것도 아니구요. 이미 두 사람
   사이가 얼마나 강하게 이어져 있는지 충분히 알고 있는 걸요.
   그냥… 그냥……. "

진우가 하는 위로의 말을 끊고 그게 아니라고 부정하던 연진이 갑자기 테이블을
박차고 일어나 가게 밖으로 뛰쳐나가 버렸다.
그런 그녀의 행동에 당황한 진우는 성급히 그녀의 뒤를 쫓아가며 사장을 향해
나중에 오겠다는 말을 던지고 가게 밖으로 뛰어 나갔다.

외통수 골목길이기 때문에 그녀가 어디로 갔을지 뻔하다고 생각한 진우는 골목을
벗어나 달리기 시작했다. 그리고 얼마 가지 않아 저만치서 정신없이 뛰어가는
연진을 찾을 수 있었다.
늦은 시간인데도 거리엔 술 취한 취객들이 득실거리고 있었고, 그런 사람들 틈을
비집고 연진의 뒤를 따라 달리던 진우는 점점 숨이 차오르는 것을 느끼고 있었다.
글쟁이라는 직업이 주로 자리에 앉아 글을 쓰는 것이어서 평소에도 몸이 점점
쳐져간다고 느끼곤 있었지만 막상 전력질주를 하며 뛰어 보니 자신의 몸이 어느
정도 늘어져 있는지 절실하게 느낄 수 있었다. 이참에 정말 제대로 작정하고 어떤
운동이든 시작해야한다는 생각을 하며 더뎌지는 두 다리를 더 열심히 놀리는
진우였다.
그렇게 얼마를 뛰었을까, 이제 그만 잡혀주던지 아니면 하다 못해 돌부리에 걸려
넘어져 주기라도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절실해질 때쯤 연진은 도심에 마련된
작은 공원으로 뛰어 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진우는 그녀가 그리로 뛰어가는
것을 보며 한숨을 돌렸다.

적어도 저곳으로 가서도 계속 달리진 않겠지.

그의 얄팍한 바램대로 공원으로 쫓아 들어가자 전만치 보이는 밴치에 주저앉아
있는 연진을 발견할 수 있었다. 그녀를 발견하고 다리를 멈춘 진우는 한참을
그 자리에 서서 허리를 구부린 채로 숨을 골라야 했다.
대체 이게 왠 달밤의 체조인지… 어쩌다 이렇게 우습지도 않은 상황이 되버렸는지
황당해지려 했지만, 분명 이것도 다 이유가 있어서 일어난 일이니까. 어떻게든
끝까지 이 상황을 지켜보는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절대 이유 없는 우연은 없다고 주장하며 사는 진우다운 생각이었다.

한참 숨을 고른 진우는 가을이라도 아직은 여름의 잔재가 남아있던 탓에 비오듯
흘러내리는 땀을 훔쳐내며 근육이 뭉칠것 같은 다리를 애써 놀려 연진에게로
향했다.
멀리서 볼때는 몰랐는데… 그녀에게 가까워지면서 지금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평소 여자에게 관심이 없는 만큼 여자들이 질질 짜며 울어대는 것을 질색을 하던
진우였기에 그녀가 울고 있다는 것을 안 순간 그대로 발길을 돌려버리고
싶었지만, 그렇다고 그녀를 이 어두운 곳에 혼자 두고 갈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일단은 경수에 대한 의리 때문이기도 했고, 그리고 여자, 남자를 떠나서 결코
우연이 아닌이 일을 자신이 불편하게 여기는 상황이라고 그냥 외면해버리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가 다가오는 것을 느꼈을텐데도 연진은 미동조차 하지 않고 고개를 숙인채로
앉아 있었다. 소리도 내지 않고 있었지만 분명히 그녀는 울고 있었다.
그런 그녀를 말없이 바라보고 있던 진우는 들고 있던 상의의 주머니를 뒤져
손수건을 꺼냈다. 하지만 그것을 꺼내들고서도 한동안 그걸 쥐어줘야 할지
말아야할지 고민해야 했다.
고개를 숙이다 못해 상채를 잔뜩 웅크리고 있는 연진의 태도는 누구도 날
건드리지 말아달라는 무언의 항변처럼 보였기 때문이었다.
얼마나 그렇게 서 있었을까. 갑작스런 운동으로 다리가 땡기기 시작한 진우는
연진의 옆에 앉아 말없이 손수건을 내밀었다.

" ……. "

고개를 수그린 채로 흠칫하던 연진이 그의 손수건을 받아 들었지만 진우는 그녀를
향해 어떤 말도 꺼내지 않았다.
그다지 다정다감한 성격도 아니고 참을 성이 많은 성격도 아니었지만 왠지 지금은
그녀가 무언가 먼저 말을 꺼내기 전엔 절대 입을 열어선 안될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행여라도 섣불리 말을 꺼냈다 그녀가 또 아까처럼 뛰어가 버린다면 이번엔
그런 그녀를 따라 뛸 자신이 없기 때문이기도 했고…….



계속.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2 22: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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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겨울 이벤트 : In other words… I love you
ijen    2004/08/23   22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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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겨울 이벤트 : 세월 - 함께 살아가기
하리    2004/08/22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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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하)
하리    2004/08/21   1691 
 
  2002년 BabyAlone 생일 축하 : 세월 (상)
하리    2004/08/21   14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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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jen    2003/11/26   172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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