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Jaywalk
2002년 여름 이벤트 : 무천화(無舛花)


2002 바빌론 여름 이벤트 Six Gong Stories
F타입



- 저 불에 먹힐만큼 가까이서 춤추고 있는 아이가 누굽니까?
- 신들린 듯 추고 있는 저 아이 말이냐.
   아마 네 또래쯤 되었을 게다.  
   워낙 곱다랗게 생겨 먹어서 처음에는 계집아인 줄 알았지.
   거기다 떠도는 춤패에 속해 있는 녀석이었으니 말이다.
- 춤패……?
- 올 해 제천축제가 이 마을에서 베풀어진다는 것을
   멀리서 듣고 찾아 온 광대들이지.
   저 춤패 덕분에 축제가 더 성대하게 벌어지고 있지 않니.
   옳지, 저 녀석 봐라. 어찌나 춤을 잘 추는지.
   오자마자 사람들의 혼을 쏙 빼놓았단다.  
- 이름이 무엇이라고 합니까?
- 미마지(味魔枝) 라고 한다.
  「마귀를 유혹하는 가지」 라고 들었다.

                                                          

                                무천화(無舛花)
                                            
                                                                                                          
                         by Jay(az_indigo@hanmail.net)

                                                

                                                                                                      
[ 백제 무왕 13년(612) -〈일본 추고천황(推古天皇) 20년〉]

--- 기울어져 가는 땅

사자수 곳곳에 솟은 기암괴석과 기이한 화초들,
그 위로 깍아 내지르는 듯한 절벽, 그 위에 다시 14개의 두리기둥으로 받쳐진
우아한 모루단청 부재의 누각이 하나 세워져 있다.      
복숭아 나무 향기 그득한 차후와 군후의 맑은 현소리가
은은하게 대왕포 일대를 메우고 있었다.
아울러 울려 퍼지는 장적과 막목의 높낮은 음향이 분위기를 헌걸차게 한다.

옥구슬과 비단수건으로 장식한 기녀들의 나긋한 춤과 고량진미는
일배일배 들이키는 궁중대신들의 흥겨움에 가락을 더하고 있었다.  
대신들은 하나같이 기녀를 옆에 앉혀두고 그 앙가슴에 얼굴을 묻거나
치마 속으로 손을 넣어 허벅지께를 애무하기에 정신이 없다.  

긴 상의 모서리 끝에는 비단 황색 도포의 앞섶을 풀어헤친 젊은 왕이 있다.
양 쪽는 아리따운 기녀를 끼고 옥으로 빚은 술 잔이 비워질 틈도 없이 부어댄다.
흥에 이기지 못할 때엔 자리에서 일어나 기녀와 어깨춤을 추곤 하는 것이다.
과하게 취해 눈도 제대로 뜨지 못하는 한 대신이 그 모습을 보고 크게 소리쳤다.

" 일국의 가장 커다란 분이 이토록 몸소 흥을 돋구시니
   어찌할 바를 모르겠습니다.
   무(舞)를 알고 가(歌)를 아는 진정한 광명왕불(光明王佛) 이십니다! "  

그 말에 왕의 옆에서 눈웃음을 치던 기녀가 간사스럽게 다음 말을 이었다.

" 가장 높은 세계에 계시다는 광명왕불도
   이처럼 즐거운 한때를 보낸 적이 있을까!
   폐하의 춤이 가소로운 저희 기인들보다 더욱 경사스럽습니다. "

왕의 손은 어느새 그 기녀의 가슴 속으로 들어가 있다.
취중으로 붉어진 볼을 기녀의 얼굴에 가까이 댄다.

" 앙팡지구나. 네 이름이 무엇이냐? "

" 달사(達巳), 라 합니다.
   비류(比流) 님의 명을 받자와 폐하를 모시고자
   이 자리에 긴히 참석하게 되었습니다. "

왕은 슬그머니 입가에 조소를 흘렸다.
흐흐 하던 왕의 웃음이 점차 크게 번지자
각자의 자리에서 즐기고 있던 문무대신들도 박장대소를 터뜨리기 시작했다.

연유를 몰라 고개만 이리저리 휘젓던 악사와 기녀들도 다같이 웃음을 터뜨린다.
일동의 웃음소리가 누각에서 흘러 나오는 가악마저 묻어버릴 즈음,
어느 사이, 왕의 웃음은 뚝 끊겨 있었다.

" 누구냐! "

순식간에 상을 뒤엎고 손에 가지고 있던 잔을 아래로 내동댕이 친다.
일순간 모두의 안색이 변하고 만다.

" 비류의 손아귀에서 놀다 온 계집을 누가 여기 끌어 들였단 말인가!
   여흥은 깨졌다. 다들 물러가라! "

왕은 열이 올라 붉어진 얼굴로 누각을 나가 버린다.
신하들은 망망하다 경황이 없어 허겁지겁 나중에서야 뒤를 따른다.
그들 중 어느 하나 제대로 된 걸음을 걷는 자가 없었다.  



……작열하는 태양빛 이다.
대왕포에서 조금 멀어져 홀로 술기운에 비틀대던 왕은
괘씸하기 그지 없는 동생을 생각했다.
왕실에서 쉬쉬하고 있는 왕비의 간통으로 인해 태어난
총명하고 약빠른 머리의 미남자를.  
불길한 탄생내력에도 불구하고 전왕의 관심을 독차지했던 걸
왕위에 오른 지금 이순간까지도 용서할 수가 없다.  

그에겐 숨겨진 보물이 하나 있다고 들었다.
왕은 그 보물이 무엇인지 안다.    
그리고 얼마 전 중국과 왜에서 한 번씩 다녀간 사신들을 생각했다.
곧 입가에 잔인한 미소가 걸린다.  



저 멀리 사람들이 몰려오고 있었다.



+++++     +++++     +++++



[ 열흘 후,
   뜨거운 여름 태양이 내리쬐던. ]



사람 몸 하나가 겨우 빠져나갈 듯이 솟솟이 난 대나무 밭,
창창한 녹빛 공기로 겨우새 들어오는 햇빛 사이
거칠어지는 온기의 숨결을 내뿜고 있는 두 남녀가 있다.
이 두 남녀는 대나무 몇 개에 의지하여 서서 서로의 몸을 희롱하고 있었다.  

" 아, 아니됩니다. 비류 님."
" 뭐가 아니되는데? 내 손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어느 손이 네 몸에 닿지 않으면 되는지 말해다오.
   내 이 두 손이 모두 아니된다면 사리꽃 같이 붉어진 유두에
   입맞춤을 하는 것은 부디 막아서진 말아다오. "

이미 어깨를 모두 드러내어 한 쪽 젖가슴마저 비져나온,
여인의 기울인 자태가 나오는 말과는 달리 비류를 유혹하는 '모양'이었다.
입으론 안된다고 자꾸 말하면서도 여인은
서글서글한 비류의 미소에는 대항할 수가 없었다.
자신의 입꼬리에도 자꾸 웃음이 번지는 것을 어찌할 수가 없는 듯
비류도 그것을 알아채어 손놀림을 더욱 음탕하게 하는 것이었다.

여인은 이젠 거의 견딜 수가 없는 듯 스러지고 있었다.
비류의 목을 두 팔로 감아 거의 매달리듯이 몸을 맡겨버린 여인은
정신없이 비류의 손길에 처음으로 경험하는 쾌락에 취해 버렸다.

비류는 여인의 배꼽 아래에까지 손을 집어넣어 탐하고 있을 동안에도
사실 그 눈길만은 한 곳에 집중되어 떨어지지 않고 있다.
아까부터 여인의 저 뒤쪽에서 여기를 쳐다보고 있는,
어느 호리호리한 인영에서이다.
처음에는 둘의 모습을 발견하고 잠시 피하는 듯 싶더니
어느 사이 그 자리에 북박아 처음부터 비류와 여인의 애무를
하나도 빼놓치 않고 두 눈에 담아두는 것이었다.

비류는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  
그가 누구인지를 깨달았음에도 비류는 자신이 하는 짓을 그만두지 않았다.
오히려 그가 보고 있다는 것이 의식될 수록 손놀림이 대담해 지는 것이었다.

풀어헤쳐 허벅다리까지 닿는 긴 검은 머리.
그 멀리서도 유달리 눈에 띄는 하얀 얼굴과    
일개국의 왕과 똑같은 색상을 가진 소매의 통이 큰 자주빛 도포.
지체높은 형님이 직접 하사하신 무용수의 고위급 벼슬을 나타내는-.

그는 비류의 눈과 눈을 마주치고 있었다.
비류와 여인과의 행위를 그대로 보고 있을 뿐 아니라
비류가 자신을 보고 있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눈길을 절대 피하지 않고 있었다.



비류는 일순 눈을 감았다.
여인의 체향에서 느껴지는 아찔한 감촉 때문이 아닌,
마치 꽤뚫리는 듯한 강렬한 시선에 현기증을 일으켜서였다.

( ㅡ 검게 물들여진 심연의 바다보다,
      저물어 가는 어둠의 향연보다,
   한없이 깊고 그윽한 저 두 눈이 나를 보고 있어.

   번뇌를 없애고 평안을 가져다 주는  
   공작명왕(孔雀明王)의 자비의 안(眼)도
   저 눈동자보다 더하진 못했을 것을. )  

인영은 이윽고 고개를 돌리더니 허리를 곧게 세우곤
침착하게 대나무 숲을 걸어나가기 시작한다.
이 나라 최고 무용수라 불리만큼의 우아한 걸음걸이로.

그가 등을 돌려 걸어나가는 것을 보니 비류는 급한 마음이 들었다.
여인에 대한 탐욕스러운 성욕은 이미 가신지 오래였다.
그가 자신의 행위를 보고 있다는 사실에 흥분되었을 뿐
상대가 고개를 돌리는 순간부터 이미 여인은 안중에도 있지 않게 되었다.
손길이 멈추자 더 매만져 주길 원하는 여인이 처절하게 안겨 붙는다.  

" ……오늘은 여기까지야.
   당신을 망가뜨리고 싶지 않아. "

여인의 흐트러진 웃옷을 다정스럽게 매여주며 살짝 입을 맞춘다.
이미 정신이 나가 버린 여인을 뒤로 한 채 비류는
아까의 인영이 사라진 길을 따라 대나무 밭을 빠져 나왔다.



대나무 밭에는 여인이 혼자 남겨졌다.







" 별로, 아무것도- "
" 아니, 분명 성이 났잖아. "  

비류는 특유의 서글한 미소를 계속 싱글거리며
자주빛 도포를 입은 사내의 뒤를 조금 떨어져 걷고 있었다.

" 이래봬도 해질 녘까지 계속 기다렸단 말야.
   날 보고서도 형님의 내전으로 그냥 입성해 버리더군.
   오늘따라 차가워,  미마지(味魔枝). "

미마지라 불리운 사내는 아름다운 뒷모습을 가지고 있었다.
아무리 두꺼운 도포라 할지라도 사내의 맵시마저 가리진 못했다.
어느 한 군데 균형을 잃지 않아 발끝까지 주욱 곧은 모양이다.
길게 늘어뜨린 머리카락이 소소소 부는 바람에 따라 하늘 거렸다.

" 형님의 내전으로 가기 위해서 격식을 차린 건가?
   폐하와 똑같은 자주빛 도포-. 형님에겐 어울리지 않지만 너에겐 잘 어울려.
   내가 하사하진 않았지만 형님의 입장이었더라도 같은 것을 내렸을 것 같아. "
" ……지나친 말씀이십니다. "
" 흠. 반 밖에 따르지 않았다 하더라도 왕족의 씨인 것은 틀림없지.
   격식을 차리지 않는 것은 내 앞에서 뿐인가, 미마지? "

말이 떨어지자 마자 미마지는 뒤를 돌려 바로 한 쪽 무릎을 꿇어 앉는다.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억양이 없는 어조로 말했다.

" 용서하십시오. 잊고 있었습니다.
   궁중 제1 무용수, 대덕등의 미마지, 인사 올립니다. "
" 하하. 장난이었는데 이럴 것 까진-."
" ㅡㅡㅡ비류 님. "

미마지는 고개를 들어 비류의 손을 잡는다.


ㅡ바람이 불기 시작한다.  



하나의 신성한 의식마냥 손바닥에 입술을 댄다.
처음에는 닿을 듯 말 듯 대었다 떼었을 정도이지만
천천히 눈을 감으며 다시 비류의 손에 입술을 댄다.
파르르, 감은 눈에 물결이 일었다.

비류 또한 장난스런 표정을 거둔다.
온유한 눈길로 미마지를 내려다 보다가
몸을 구부려 자신을 손을 잡은 그의 손에 입을 맞추었다.
미마지의 입맞춤과는 달리 조금은 열기가 담겨 있다.

  

ㅡ바람이 불고 있었다.
어둑해 지고 있는 기운으로 풀벌레들의 기척이 부산해 질 무렵,
한 낮 뙤양볕에 시달린 몸을 화초들도 한껏 늘어 놓는다.
어둠 속에 얼핏한 모양으로만 비치는 못 위에
곱게 오무린 연꽃에선 은은한 향내가 나고 있다.

ㅡ바람이, 불고 있었다.
바람을 따라 잠자리들이 높게 날고 있다.

후텁한 기운을 담고 있는 한 여름의 바람.
인공못 모퉁이 네 군데에 심은 커다란 버드나무의 가지들이
한 방향으로 흔들려 솨아 하는 소리를 낸다.
여기, 두 사람 밖엔 없다.

ㅡㅡㅡ바람이, 불고, 있었다.

아아. 무엇에 도취된 것인가.

    

  

" 춤을…… 보아 주시겠습니까? "









미마지는 가죽신을 벗는다.
비단 버선을 마저 벗어내어,
옥으로 장식된 금고리가 흰 발목을 두르고 있다.  
어둠에 깔려 자색이 감빛이 된 도포를 이어
차근하게 벗어내어 한 쪽에 개어두고,
홍색 겉저고리를 벗겨내니 흰 속적삼만을 입었다.
옥색 바지마저 벗어두니 얇은 천으로 된 속바지가 살을 그대로 비추고 있다.

적삼을 벗는다.
바지를 벗는다.
가는 어깨가 드러나고 늘씬한 허벅지와 흰 종아리가 나타난다.
그대로 나신이 되어 긴 머리카락을 온 몸에 드리우고
서서히 고개를 들어 몇 발짝 앞에 있는 비류의 얼굴을 곧게 바라본다.

차랑--…
차랑---…

왼손을 올려 작은 원을 그린다.
왼손이 허리께에 닿을 때 즈음
오른손을 올려 좀 더 커다른 원을 그린다.
      
비류는 뒤로 물러났다.
뒤의 자귀나무.
잔 가지가 볼을 스치는 것도 모를 만큼
이미 미마지의 동작에 심취해져 있다.

미마지가 다시 원을 그린다.
점차 커지는 동작으로 부드럽게 허리를 돌리며,
발뒤꿈치를 들고 고양이처럼 걷는다. 풀 위를 걷는다.
팔랑거리난 듯 하늘 거리난 듯 날아든다. 뉘누리친다.
팔목의 방울이 운다. 발목의 고리들이 부딪혀 맑은 파음을 낸다.

차랑--…
차라랑--…

높게 치어든 하얀 다리가 인제 고개를 드는 달빛보다 밝다.
두 팔을 올려 손가락을 우아하게 꺽고펴다
고개를 뒤로 젖히고 허리마저 뒤로 젖혀 좌로 기울인다.
중심은 흔들리지 않고 다시 빠르게 우로, 좌로,
그 반동에 흩날리는 검은 머리칼이 부드럽게 미마지의 몸을 감싸고
미마지는 커다랗게 뛰어 오른다. 다시 내려와서 몸을 구비치고 뛰어 오른다.

이번엔 느린 동작으로 발바닥을 땅에서 끌더니
허벅다리께로 천천히 올려, 함께 목을 휘둔다.  
팔은 계속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날개가 달린 양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이다.
  
아슴스레, 아즐하게 자신을 향하는 시선을 느끼고 있다.
다시금 그 시선에 전율한다.

단 하나의 가지, 마귀를 유혹할 수 있는, 단 하나의ㅡ.
너는 지금 누굴 유혹하고 있느냐.
고즈넉한 여름 저녁은 그닥 밝지 않다.
애처롭게 어른거리는 가녀린 인영을, 호접 한 마리를,
비류는 지금 보고 있다.

미마지가 등을 돌린다.
하얀 등의 곧선이 부드럽게 흔들린다.

차라랑ㅡㅡ--…

얼굴을 보여줘, 미마지.
네 얼굴이 보고 싶다.
손을 뻗었다.
허공에서 팔을 휘저었다.

[ 무용단은 이 마을에서 얼마간 머물게 됩니까? ]
[ 아마…… 이레 뒤엔 축제가 끝날 것이니, 그 때까진 머무르겠지. ]

비류의 하얀 등엔 땀방울이 맺혀 있다.
땀으로 축축히 젖은 머리칼이 흔들릴 때마다
땀방울이 달빛에 튕겨 빛나고 있다.
미마지는, 얼굴을 보이지 않는다.

[ 안됩니다! 그 아이를 데려가지 말아 주세요!
   우리가 무슨 죄를 지었다고 내 아일 데려가는 겁니까. 제발……! ]
[ 계집이 요란스럽구나. 네 주제를 알아야지!
   평생 왕궁의 벽문이라도 만질 수 있을 줄 아느냐.
   여봐라, 어서 아이를 끌고 가거라! ]
[ 어머니…, 어머니…! ]
[ 안됩니다. 흐흑, 미마지야! 미마지야! ]

손을, 뻗는다.
제발, 얼굴을 보여줘.

---차랑ㅡ--……

손이ㅡ 닿았다.
땀으로 젖은 마른 가슴살이 손바닥에 가득 느껴지는 순간,
비류는 미마지를 뒤에서 그대로 껴안아 품으로 강하게 끌어 당겼다.
비릿한 살냄새가 코끝에 풍겨왔다. 역하지 않다.  

작게 거친 숨을 몰아쉬는 미마지가 어깨를 들썩 거리는 것이 느껴진다.
그것이 자신에게서 빠져 나가려는 듯 느껴져
비류는 더욱 강하게 자신의 안으로 끌어 당겨 팔에 힘을 주었다.

" 어딜 가려느냐.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
   널 어떻게 내 옆에 두었는데! "

미마지는 답이 없다.
얼굴을 돌리지 않는다.

" 보내지 않을 거라고 했지 않아!
   십 여년 전, 마을에서 널 처음 보았을 적에도
   절대 놓치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내 옆에 두었어. 보내지 않는다! "
" …왕명이십니다. 저는 곧 왜나라에 보내질 것입니다. "



ㅡㅡㅡ 다시 바람이 불고 있었다.



그대로 미마지를 안고는 있지만 절로 힘이 빠지는 것을 알아챌 수 있었다.
미마지는 비류의 팔을 풀어 그 자리에서 몸을 돌린다.
비류의 품 안에, 나신 그대로의 상태에서 비류의 얼굴을 올려다 본다.
미마지의 팔이 비류의 팔꿈치를 잡는다.
두 사람은 그렇게 자리에 주저 앉아 무릎을 꿇었다.

생기를 잃었던 눈빛에 인제 광기가 돈다.
미마지의 가는 흰 목에 손을 댄다. 다른 손으로는 미마지의 얼굴에.
두 손에 점차 힘이 들어간다.
미마지는 비류의 그 손등에 자신의 손을 대고 부여 잡는다.

" 보이지 마라!
   왜왕에겐 이 얼굴을 보이지마. 가면을 써라. 두꺼운 옷을 입거라.
   너의 벗은 몸은 나밖엔 보지 못한 것이고 앞으로도 그래야 해.
   얼굴을 왜왕에게 보이지 마라! "
" 예, 비류 님. 그러겠습니다. "

비류는 한 층 더 소리를 높여 격정적으로 외쳤다.
한 손에 쥐여지는 미마지의 목에 가느다란 통증이 울린다.

" 절대 이 얼굴을 보이지마! 이 얼굴을…….
   우스꽝스런 가면을 쓰고, 어리석은 탈옷을 입어라!
   이렇게 간청하니, 얼굴을 보이지 말아라! "
" 예, 예……. 알겠습니다. 비류 님. 그렇게 하겠습니다.
   명심하겠습니다. 가면을 쓰지요. 탈옷을 입지요.
   왜왕에게 얼굴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

미마지의 목소리도 한층 커진다.

" 얼굴을 보이지 마라……."
"예. 얼굴을 보이지 않겠습니다……."

비류는 미마지의 머리를 잡아 자신의 목덜미께로 강하게 끌어 안는다.




    
자귀나무 아래, 단 한 줄기의 빛.
그믐의 환영적인 분위기가 못가를 휩싸고 있다.
옅은 어둠의 정적. 그러나 두 사람은 깨어 있다.  

커다란 나무 뿌리사이에 서로를 기대어 비스듬히 누워있는 모양이다.  
비류는 비색 저고리를 벗어 미마지의 나신을 가린 채  
한동안 자신의 안에 품고 있었다.

ㅡㅡㅡ달빛에 붉게 물들여진 둥근 꽃을 꺾는다.  
피빛 자홍색 < 천일홍 >을.

……너와 같다.
천일동안 시들지 않는, 아름다운 붉은 꽃잎.
이 붉은 빛은, 보는 이를 첫눈에 매혹시키고 말지.

네가 왜에 간다면
나는 불가에 귀의하겠다.
이토록 타락한 미물을 부처님께서 받아주실지
그러나, 이 천일홍에 두고 맹세컨대!

단연코, 불변하리라.
너와 내가 같은 하늘 아래 있지 않다면
나 역시 이 땅에 있길 거부하겠다.  

…-유혹 당할 가지가 없다면  
그 끝의 꽃 또한 피지 않는 것이 당연하거늘-.
홍자주, 그건 너의 색이다. 미마지ㅡ.

구름에 달이 가리워 진다.
달안개가 자욱하게 끼기 시작한다.
이내 빛이 없어진다.



- 출생도 모르는 비천한 것을 궁에 둘 생각을 감히 하셨습니다.
   난생 처음 알게 된 글자, 정식으로 배울 수 있게 된 춤.
   평안하고 새롭기만 한 궁궐 생활.

   그러나 마냥 편치많은 않았습니다.
   비류 님을 미워했던 것은 사실이었으니까요. 가엾으신 어머니.
   역마살 운명을 짊어진 채, 평생 그렇게 살다 가실지도 모른단 생각에
   당신을 원망하고 또 미워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결국, 당신에게 마음을 열은 것은 나의 죄.
   평생 춤을 추었고 평생 한 사람을 바라보았던 것을
   저는 후회하지 않습니다…….

   …-여태 그래왔던 것처럼
   앞으로도 비류 님만을 위해 춤을 출 것입니다.
   오직, 단 한 사람만을 위한-…



빛은 없다. 바람도 사그러든다.  
두 사람의 밤이 잦아지고 있었다.
이미 꺾여 버린 붉은 꽃의 밤도 함께 잦아지고 있었다.

달빛에 붉게 물들여진 둥근 꽃.
붉은 꽃의 밤도 함께 잦아지고 있었다.


붉은…
꽃잎이 질 준비를 끝내놓고 있었다.
안쓰러운 달빛도 끝내 고개를 들지 않는다.
끝내, 고개를 들지 않는다.



                                                        ㅡ FIN ㅡ



※ 몇 가지 덧붙여 ※

1. 배경
시대는 백제 말, 무왕 때입니다. 소설 첫머리에는 올라온 년도는
실제 존재했던 미마지라는 인물이 왜나라에 보내진 때를 기준으로 넣은 것입니다.

2. 인물
∵ 미마지
- 그 시절 왜나라에 보내진 고급 벼슬의 무용수로, 실제 존재했던 인물입니다.
   (한자는 다릅니다. ^_^;) 백제의 기악에 대한 기록은 거의 찾아볼 수 없으나,
   머리는 묶었어도 풀어헤친 형태에 손에는 방울을 들고 춤을 추었다고 하네요.   ∵ 비류
- 왕비의 불륜으로 태어난 「비류」는 가상 인물입니다.
   어느 신라시절, 왕비의 불륜은 실제로 있었던 사건이라고 전해지는 바가
   있습니다. 비류는 그 이야기에서 따온 인물입니다.
   ( 바람둥이처럼 보였어야 했는데. -_-; )

3. 제목
'춤출 무(舞)'는 '없을 무(無)'자와 '어그러질 천(舛)'자가 합해져 나온 말이라고
하는데 그것을 마음대로 풀어서 쓴 것이 바로 '무천(無舛)' 입니다.
뒤에 '꽃 화(花)'자를 붙여 자의적으로 '춤추는 꽃' 이라는 뜻을 만들었습니다.  


<BabyAlone의 코멘트>
한국어가 얼마나 아름다운 언어인지 실감케 한 글입니다.
제이워크, 아직 안 죽었네?

케로   2004/09/22

아아- 역시 좋아 ㅡ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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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여름 이벤트 : 무천화(無舛花)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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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여름 이벤트 : 나의 애완견
히즈    2004/08/21   11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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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헨    2004/08/21   8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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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여름 이벤트 : 마음으로 살고 싶다
atlantis    2004/08/21   8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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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여름 이벤트 : 카페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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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여름 이벤트 : 부비트랩
root9    2004/08/21   9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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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2년 여름 이벤트 : 한여름밤의 꿈
엘리카    2004/08/21   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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