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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즈
2002년 여름 이벤트 : 나의 애완견


2002 바빌론 여름 이벤트 Six Gong Stories
E타입


그는 내게 있어, 신과도 같은 사람이다.

첫 만남은, 그가 이사오던 날.
활짝 열어젖힌 창문 안으로 습한 공기가 선선했던 어느 여름날이었다.





그의_애완견



                                    written by Hise




-최군열, 16세, 여름.


"누구 왔나보다. 군열아!"
"알았어 엄마."

덜컹.

"안녕하세요."
"안녕… 하세요."

흰색 바탕에 물색 줄무늬가 들어간 셔츠.
그 위로 조금 더 고개를 올리자, 눈이 마주쳤다.
나보다 한참 연상인 듯한 그는 내게 들고 있던 떡을 내밀고, 웃었다.

"옆집에 이사왔어요. 잘 부탁해요."
"잘 부탁해… 요, 형."

어색하다 싶은 존대로 대꾸한 게 우스웠는지 그가 픽 하고 웃는 것을,
나는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여전히 바깥에서 불어오는 바람은 덥고 햇살은 뜨거운데
그만은 격리라도 된 듯, 시원해 보여서 부러웠다.

"그럼……."
"아."

그래서였을까.
조금은 내성적인 성격으로 평소라면 하지 못했을 행동을 덜컥 저질러 버렸다.
하지만 그가 내게 허리께를 내려다 보자마자
화들짝 놀라 잡고 있던 옷을 놓았다.

"뭔가 할 말이라도…?"
"아니… ……떡 맛있게 먹을게요."
"그래요."

다행히 그는 그다지 기분 상해하지 않고 쉬이 인사하고 돌아갔다.
나는 어쩐지 멍해져서, 좋아하는 떡도 밀어놓고 방으로 올라갔다.
배고프다며 칭얼대던 내가 갑자기 조용해 진 것이 이상했던지
밑에서 부르는 엄마의 목소리를 못 들은 체 하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았다.

감은 눈에, 어렴풋이 방금의 광경이 떠올랐다.
노란 햇빛… 파란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그.
이불을 잔뜩 끌어올려 덮었다.
그리고 조금 뒤에, 더위와 호흡곤란에 푸아 하고 얼굴을 내밀었다.





"…무슨 일?"

두 번째로 만났을 때부터 그는 내게 말을 놓기 시작했다.
나는 그 쪽이 좀더 친근한 것 같아 맘에 들었다.

"접시요."

말하며 들고 있던 접시를 들어 보여주자,
그는 접시를 받아들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었다.

"저 애 아니에요! 벌써 중학교 3학년인데,"
"어, 그거밖에 안 됐냐? 고2쯤 됐나 했는데… 요새 애들 발육 빠르단 게
사실이긴 사실인가 보네……."

본전도 못 건졌다.
때문에, 조금 불퉁해 있었더니 그걸 눈치챈 듯 그가 다시 한번 말했다.

"그래, 애 취급하지 않을게."
"……네…."

하지만, 그 말이 더 애 취급하는 것 같이 들렸다.

"내 이름은 이경훈이다. 너는?"
"전… 최군열이라고 해요."

쭈빗거리며 그렇게 말하자, 그는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 부탁한다, 이웃사촌."
"네… 형."

좋은 표정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더 오래 기억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뚫어져라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는 그런 내게 별다른 제재 없이, 가만히 기다려 주었다.
만난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다정한 성격의 사람 같다.
……좋은 사람이다.





"감사합니다."

한참동안 흔들리던 차체에서 내려 땅에 내려서자 묘한 감각이 들었다.
부르릉, 하는 소리와 함께 학원차가 떠나고 나는 집을 향해 터벅터벅 걷기 시작했다.
신발 밑창이 바닥과 부딪혔다 떨어지고, 또다시 부딪혔다 떨어지는 소리가
아래에서부터 울려 되돌아왔다.
깨끗하고 차가운 새벽의 공기는 수면부족으로 둔중한 머리에 기분 좋게 와 닿았다.

우리집은 아파트다.
더 높은 곳에서 내려다 보면, 마치 성냥 곽을 세워놓은 듯한 모습들 중 하나.
하나만 쓰러트려도, 도미노처럼 넘어갈 것 같아 보이는 건물.
요즘은 아파트도, 30층 가까이 세워지는 모양이지만
내가 사는 아파트는 조금 낡아서 15층이 최고층이다.
그래도, 낡아서 좋은 점은 옥상이 있다는 것.

가끔가다 옥상용 비상층계를 통해 올라가, 아래를 내려다 보기도 하고
아무도 없지만 무척이나 개방된 공간이라는 그 웬지 모를 느낌을 음미할 수도 있어
고층 아파트가 부럽지 않다.
그리고 무엇보다, 오래 살아서 그런지 편안한 느낌이 들어서.

"……어."

…목소리? 이 시간에…… 나같은 학생일까?
하지만 생각했던 것과는 다르게, 그 사람은 내가 아는 사람이었다.

"들어가라니까."
"바래다 준다고 했잖아."

투닥거리는 듯 하지만, 다정한 대화.
예쁘다기 보단 친근하게 생긴 목을 덮는 커트머리의 여자아이,
그리고, ……형이었다.

"디게 조용하다."
"응. 난 이런 시간대가 좋아. 그렇지 않냐?"

웃음기 담긴 목소리는 형의 것이다.
나와…… 같은 생각을 했구나.

"난 무서워서 조금 꺼려져. 나쁘진 않지만……."
"그래. 그러면서 뭘 들어가라 그랬냐 아까는?"
"그야……뭐. 귀찮아 하잖아?"
"귀찮지."
"야, 그럴 땐 보통 귀찮지 않다고 하지 않아?"

모자를 푹 눌러쓰고, 모퉁이를 돌아 나와 집 쪽으로 걸었다.
꽤나 떨어졌을 텐데도 조용해서 그런지 도란도란 나누는 대화 소리가 아직도 들렸다.
형, 애인 있었구나. ……나는 언제나 되어야 저런 사람이 생길까.
그렇게 생각하는 동안, 가슴이 답답해졌다.
그 때문인지, 기분까지 가라앉아서 나는 집으로 뛰어 들어갔다.





부드러운 살결이 피부 위를 스쳤다.
감긴 눈 위를, 뺨을, 입술 위를, 가슴 근처를
쓰다듬듯 가볍게 만지고 배꼽 주위를 간질이며, 내가 반응할 때마다 재미있다는 듯 웃음소리를 낸다.
잡힐 듯 말 듯, 안타까운 느낌에 손을 뻗지만 번번이 놓치기만 했다.
그러다 말고 손을 잡혀 고개를 드니, 가만히 있으라는 듯 손을 세워 입가에 갖다대는 게 보였다.

곧게 뻗은 손가락. 뭉툭하게 짧은 손톱.
예쁘다. 피부 색도, 굉장히 마음에 들었다.
엷은 주홍빛으로 물든 입술이 목을 타고 흘렀다.
한숨이 절로 터져나왔다-
말로 형언할 수 없을 정도로 기분좋은 감촉.

간지러운 듯 하면서도 그것과는 사뭇 다른, 애타는 감각에 목이 말랐다.
더 이상은 참을 수 없어서 가져다 댄 손 끝에, 피부가 닿았다.
좋아…….
좋아…….
좋아…….

온 몸을 타고 흐른 열기는 허벅지 근처로 모여들었다.
더 이상은 움직여 주지 않아서, 내 손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아무리 문질러도… 크게 움직여 봐도, 애타는 감각은 그대로. 변하지 않는다.
오목한 허리를 잡아 끌어, 허벅지 사이로 질러 넣었다.
따스하게 감싸는 느낌… 녹아 내릴 듯한 감각.

키스하고싶어.

목을 잡아 끌어 내렸다.
투명하고 맑은, 검은 눈동자.
나를 곧게 응시하고 있는 그것은 부드럽게 웃음기를 머금고 풀어져 있었다.

좋아해.
좋아해.





"아!"

잡아 당기는 듯한 아픔에 벌떡 일어났다.
황급히 티슈를 뽑아 다리 사이로 집어 넣었다.
간발의 차로, 겨우 맞췄다.

"하아……."

한숨을 내쉬고, 휴지를 구겨 쓰레기통에 버렸다.
사위는 아직 어둠에 싸여 있었다.
머리가, 깨질 듯이 아프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
하지만,
망막에 박힌 듯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내가 아는 사람 중에, 그런 눈을 가진 사람은 하나밖에 없다.

"……아냐……."

하지만, 소리내서 부인해봐도 방금의 그 사람은, 그였다.
형… 경훈 형.





"어, 웬일이냐. 한동안 안 오더니."

갑자기 쳐들어 왔는데도, 반갑게 맞아 주는 것이 기쁘다.

"오늘 시험이 끝나서 자려고 집에 왔는데, 아침에 깜빡 열쇠를 안 가져 와서요.
조금 신세를 져도 될까요?"

부모님은 자주 집을 비우신다.
오늘은 시험이 끝나는 날이라 일찍 오신다고 말은 하셨지만
일찍이라 해도 아마 저녁 때일 거다.
어디를 갈까 하고… 생각을 하면서, 발은 저절로 이 곳으로 향해 버렸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핑계거리잖아……?

"당연하지, 얼른 들어와."

"감사합니다."





기분 좋아…….
자연스럽게 눈이 떠졌다.
몇 번 깜빡이는 사이에 선명해진 시야로 비치는 광경에
의구심을 품었던 것도 잠시,
이 곳이 형의 집이라는 게 생각났다.

얼마나 잔 걸까, 나.
거실에서 형이 덮어 준 얇은 이불을 덮고 잤었던 것 같은데,
어째 꽤나 시간이 지난 것 같다.

"일어났냐?"

"……네."

그 목소리가 너무 가까이에 있었던 탓에 조금 놀랐다.
자고 있는 얼굴을, 봤을까.

"지금 몇 시쯤 됐나요…?"

"일곱 시 조금 전."

역시. 꽤 잤다.
여섯 시간 정도 잤나…….
멍하니 시간을 헤아리고 있는데, 그가 머리카락을 쓰다듬어 왔다.
이젠 버릇이 되어서 놀라지도 않게 되었다.
처음엔 굉장히 놀랐었는데.

"샴푸 뭐 쓰냐?"

"음… 어머님께서 사오시는 걸로 써요. 매번 바뀌던데요."

"그럼 천성인가보네. 좋은 거 쓰면 좀 나눠 쓰자 그러려고 했더니만."

"네?"

"매번 생각하는 거지만 네 머리, 보들보들한 게 기분 좋아."

그렇게 말한 뒤 그는, 한참동안 손을 떼지 않았다.
신기한 것을 만지는 듯한 손놀림, 그렇지만 섬세한 움직임에 예민해진 감각이 반응한다.
하지만 결코 자극적인 반응이 아니라 하나 하나가 깊은,
녹아 내릴 듯한 감각.
노랗게 물들어 가는 하늘을 멍하니 보다가
이끌리듯 눈을 감았다.

이대로,
시간이 멈춰 버렸으면…….
처음으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참, 너 조금 있으면 방학이겠다?"

천천히 눈을 뜨고, 조금 멍한 채로 대답했다.

"아, 네. 다음 주 금요일쯤이면 해요."

그의 손이 떨어졌다.
그가 일어서서 어딘가로 가는 동안, 허전한 느낌이 들었다.
알듯 모를 듯한 상실감. 감촉이 어렴풋이 남아 있다.
이불을 걷고 상체를 일으켰다.
시계 바늘은 일곱시를 조금 넘기고 있었다.

"방학 중 하루 정도, 시간 내 줄 수 있겠냐?"

그가 방에서 나오며 말했다.

"네."

당연하죠.
그런데, 왜요……?
단숨에 가슴이 부풀었다. 안쪽에 기포가 가득찬 듯한 느낌.
머리 한켠으로, 심장 박동이 울리는 게 들렸다.
그가 조금 복잡한 표정으로, 웃었다.

"나, 결혼한다."





깡통이 지면에 부딪히며 시끄러운 소리를 낸다.
귀에 거슬리는 그 소리도, 금새 멀어져 갔다.
풍선 몇 개가 차의 속도를 이기지 못하고 떨어져 날아올랐다.

……오늘의 그는 내가 아는 그의 모습 중에 제일 단정하고 세련된 모습이었다.
분명히 멋지고 아름다워서,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두근거렸을 거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마음껏 볼 수 없을 지도 모르는 그의 모습을 나는,
조금밖에 보지 못했다.
고개를 들면 금방이라도 눈물이 쏟아질 것 같아서.

아무런 시도도 해 보지 못했다.
……어차피 할 수 없었을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이제야 조금 알게 되었는데.

힘없이 걸음을 옮겼다.
부모님은 오늘도 일이 있어서 형의 결혼식에 오지 못 했다.
집까지는 혼자서 가야 한다.
문득, 여름의 햇살이 뜨겁게 느껴졌다.
후덥지근한 기온에 어깨가 조금 더 무거워진 듯한 느낌이 들었다.

평일의 낮 시간대이기 때문인지, 사람이 없는 역은
텅 빈 느낌이 났다.
목이 말라서 주위를 조금 두리번거리다 자판기에 가서 음료를 뽑았다.
탄산밖에 없어서 조금 불만스러웠지만…….
나는 탄산을 잘 먹지 못한다.

따가운 느낌을 삭이며 몇 모금 마신 뒤
갈증이 해결되고 나자 컵의 처치가 곤란해졌다.
어쨌든 버리긴 아까우니까 들고 있자 라는 생각으로
컵을 든 채 의자로 향했다.

그러는 사이에 부저음 소리가 나고, 안내방송이 흘러나왔다.
컵을 든 채로 열린 문 안으로 올라탔다.
그리고 문이 닫히기 조금 전
신문을 커다랗게 펼치고 보던 한 남자가
고개를 들더니 헐레벌떡 일어나 짐을 챙겨 나갔다.
신문 보느라 내릴 역이 온 것도 몰랐나 보네.

피식 웃으며 그 뒷모습을 보고 있는데
어쩐지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모르는 사람인데.
그 뒷모습은 오늘 떠나간 누군가를 떠올리게 했다.
닮아 있었다.
문이 닫히지 않았다면, 달려가 어깨를 잡아 챘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발이 한 발짝 움직였을 때
눈 앞에서 문이 닫히고 덜컹거리며 전철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들고 있던 컵을 들어 단숨에 마셨다.
얼음이 녹아 묽어지긴 했지만 많이 남아 있던 탄산이
한참이나 괴로운 감각을 주었다.

몇 번이나 닦아도 나오는 눈물은,
그것 때문이라고 생각하기로 했다.
결국은 닦다가 닦다가 포기하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만 주룩주룩 흘렸다.

그렇게,
내 첫사랑은 끝이 났다.






-최군열, 19세, 봄.


이런 것을 춘곤증이라 하던가…….
냉기를 온기가 덮고 새싹이 푸른 잎을 틔운다.
분명히 바깥에 나가면 기분 좋을 정도의 햇빛이 있을 것이다.
……하고 말해도, 그런 걸 신경쓸 때가 아니다.

자꾸만 감기려는 눈꺼풀을 흡뜨며, 펜을 강하게 쥐었다.

"……이것은 옥텟규칙이라고 해서 최외각전자가 여덟개를 채우려는 성질이다.
최외각전자는 원자가전자라고도 하지. 이것의 예로는……"

하지만, 졸리다.
새벽에 잠을 잘 못 잔 탓이다.
시험 기간도 아닌데 몇 번씩이나 저절로 깨 버렸었다.
짧게 자도 푹 자면 머리가 맑은데.

이 놈은 졸리지도 않나, 월요일 첫교시인데.
슬쩍 옆을 보자 녀석은 정말이지……기술적으로 졸고 있었다.
다리를 꼬아 상체가 수그려지는 것을 막고, 손에 펜을 쥐고.
언뜻 보면 자는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더군다나 가끔 슬쩍 실눈을 뜨고 동태눈을 한 채 칠판을 보고
약간의 메모를 한 뒤 도로 눈을 감거나 하는 걸 보면
……감탄만 나온다.

주위는 다 그런 상태다.
간 크게도 엎드려 자고 있는 놈도 보인다. 하지만 곧 화학 선생의 호통에
느릿느릿 몸을 일으키고 졸기 시작했다.
그걸 보니 더 졸리다.

……. …아?

<3학년 2반 최 군열 학생. 최 군열 학생. 지금 바로 교무실로 내려오세요.
3학년 2반 최 군열 학생. 다시 한번 반복합니다. 3학년 2반 최군열 학생은 지금 당장
교무실로 내려오시기 바랍니다.>

……무슨 일이지?
화학 선생에게 인사를 하고 교실을 나왔다.
기지개를 켜며 잠을 깨고, 계단을 천천히 내려갔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좀 오래 걸렸으면 좋겠군.





"……군열아!"

문을 열고 들어서자 마자, 담임이 헐레벌떡 뛰어온다.
표정도 험악하고… 뭔가 허겁지겁한 것이 맘에 들지 않는다.
나쁜, 기분이 들었다.

"왜 부르셨어요, 선생님?"

"너희 부모님이 일을 당하셨단다. 선생님이랑 어서 가자!"

……일?
…부모님이?

손을 잡힌 채로 도로를 달려 택시 안으로 밀어넣어졌다.
피부가 꽉 막히는 듯한,
숨막히는 느낌.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찰칵.
끼이익.
불을 켰다.
내려앉아 있던 어둠이 순간적으로 사라졌다.

터벅터벅 걸어, 내 방 문을 열었다.
옷을 벗고 이불을 핀 뒤 안으로 기어 들어갔다.

그저께 빨았던 겨울용 이불이 그리워질 정도로 냉기가 몸을 덮쳐왔다.
몇일 덮지 않아 깨끗한 섬유린스 냄새가 나는 이불에 코를 묻었다.
……하얀색의 잔상이, 지워지지 않는다.
눈을 감아도,
뜨고 있어도.
…잠을 자면 꿈에 나올 것만 같다.
슬프기 전에 무서웠다.

낮에는 조용하던 집안도 이 시간 쯤이면, 언제나 인기척이 났었다.
내가 반쯤 잠에 잠긴 채로 누워 있으면,
현관의 문이 열리고, 불이 켜지고, 내 방문이 열린다.
그리고 나를 보며 몇 마디를 나누거나 혹은 잘 자라, 고 말을 한다.
……몇일 전까지만 해도, 그것은 일상이었다.

하지만
이제…… 그리 해 줄 사람들은, 없다.
지금이라도 내 방문을 열고 들어와서… 왜 아직까지 안 자고 있었냐, 고.
얘기해 줄 것만 같은데.

입술을 깨물었다.
……사실이라고 인정하는 것 같아서.
울지 않을 거다.
그런 일이, 사실일 리가 없다.



하지만 기다려도 문은 열리지 않았다.





"먹고 죽어보자."

학교가 끝나자 마자, 오늘따라 졸지도 않고 있던 녀석이
내 손을 잡아 채 당기며 그렇게 말했다.
……역시, 들었구나.

얼마 전에 있었던 일이고, 딱 일주일이 지났을 뿐인데.
아무도 나에게 별다른 말은 해 오지 않았지만 …보는 시선의 색깔 부터가, 다르다.
평이하게 스쳐 지나가는 시선이 아니라
살피는 듯한 시선, 그리고 혹여나 눈치챌까 두려워 금새 회피해버리는 시선.

아침에도 담임에게 불려 갔었다.
슬쩍, 내 얼굴을 쳐다 보고. 시선을 내려 다른 곳을 보다가,
보는 내가 안쓰러울 정도로 어렵게 위로의 말을 꺼내던 모습에
……나보다, 다른 사람들이 먼저 앞질러
나의 일에 적응해 버렸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아직도 실감이 나지 않는데.

창욱이 녀석은 성큼성큼 빠른 걸음으로 앞서 걸어가더니
학교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는 제놈 집에 들어갔다.

"너네 집엔 왜 왔냐?"
"옷 갈아 입어야지."

자신의 교복을 벗어 던지며, 조금 퉁명스럽다 싶게 대꾸하고는
초록색 티와 청바지를 내 쪽으로 던졌다.
그래도,
이 녀석이 제일 변하지 않았다.
……하루종일 답답하게 붕 떠 있던 가슴이, 조금 펴진 것 같다.





오락실에서 한참 대전게임을 하고, 노래방에서 소리도 지르고
명동에 가서 이것저것 구경해 가며 사람들과 부딪히기도 했다.
그러는 사이에 시간이 흘러, 벌써 날짜가 넘어갔다.

제놈도 고 3인데…… 지금 이렇게 흘려 보내는 시간도, 이럼으로 해서 망치게 될
내일 오전도, 가벼운 것은 아닐 텐데.
하고 생각하면서도, 이렇게 흥청망청 하는 것이 나쁘지 않아서,
원래대로 돌아가 숨막히는 느낌 속에 파묻히려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몸 가는 대로, 녀석이 이끄는 대로 따랐다.

"어디까지 가게?"
"배가 부르니까, 좀 걸으려고."

그건 나도 마찬가지였던 지라, 고개를 끄덕여 동의했다.
양 손에 가득히 든 소주병들과 약간의 안주거리가 슬슬 무겁게 느껴질 때 즈음
우리 단지를 나와서 도로를 조금 더 걸었다.
보이기 시작한 것은, 검은 강물. 한강이다.
여기서 마시려는 건가.

창욱이 녀석이 강변 경사면에 털푸덕 앉고, 나도 그 옆에 따라 앉았다.
낮에는 여러 사람들이 많은 이 곳도, 지금은 조용하다.
늦은 시간대니까. 거의가 자고 있겠지.

"마셔."

창욱이 녀석이 종이컵에 따라주는 술을 받아 들고 녀석의 컵에 술을 따랐다.
어둠 속에선 물색일 술도 까매 보인다.
그것을 주욱 마시고, 또 한 잔을 따랐다.

"……어떻게 했냐?"
"뭘?"
"부모님… 말야."

한 모금, 더 마셨다.
싸아 한 음료가 목을 타고 넘어갔다.
오늘따라 술이 단 거 같다.
그렇게 잘 마시는 편은 아닌데, 알콜이 독하게 느껴지지도 않고.

"…뿌렸어."

이 곳에.
뿌렸었지.
그 하얀 가루의 촉감은 굉장히 이질적이어서, 지금도 손가락에 기억이 남아 있다.

"그래……?"

그리고 한동안 말 없이 술을 마셨다.
두 병째를 비운 뒤 부터, 녀석은 병째로 마시기 시작했다.

"……네 녀석 무뚝뚝한 건 알고 있지만 말야."
"……."
"가끔씩은, 힘들다고 투정도 부려 봐. ……누구에게라도."
"……응."

그래, 네가 있었구나.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아무도 없는 듯한 고독 속에서
조금쯤 건져 올려진 것 같은 느낌.
운이 없는 편이지만, 이럴 땐 나도 정말 못 사는 것은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리고,
문득 떠올렸다.
……그 사람의 얼굴을.





이러면 안 된다는 거 알고는 있다.
폐가 될 거고, 이렇게 하고 있는 내 꼴이 스스로가 생각해도 한심하고 꼴사납다는 거.
하지만 아무리 머릿 속으로 몇 번이나 같은 생각을 해 봐도
아무리 꾸짖어 봐도
보고 싶다는 생각이……가시질 않았다.
이번 한 번만이야.
어쩔 수 없잖아.
어쩔 수 없으니까, 나도.
그런 일이 있었으니까……조금쯤은.

그 뒤로 3년이 가까워 오지만
나는 아직도 잊지 못했나 보다.
괜찮아 졌다고 생각했었는데.
어제 갑자기 그가 생각났을 때부터,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그가 보고 싶었다.
그래서 학교까지 땡땡이 치고 와 버렸다.

그는 가끔씩 편지를 보내 주곤 했었다. 두세 달에 한번 정도.
그저 조금 친한 이웃의 동생 정도가 아닐까 싶은, 그의 나에 대한 인식으로서는
의외다 싶은 일이라 조금은 기대가 될 때도 있었지만
그것은 전부 나의 망상일 것이 뻔하기 때문에.
결국은 곱게 보고, 아쉽게 접어넣곤 했던 물건이다.

최근에 온 그의 편지는 일주일 전의 것.
아침에 등교를 하다가 우편함에 꽂혀 있는 그것을 보고,
더 이상 참을 수가 없어져서 나는 그것을 들고 여기에 서 있다.

몇 번이나 전전긍긍 고민했지만.
결국엔 와 버렸다.
그는 신촌에 가게를 열었다고 했다. 가벼운 식사와 음료를 주로 취급하는 카페.
이상해 보이는지, 지나가던 사람이 내 쪽을 흘끗 쳐다보았다.
심호흡을 하고, 문을 밀었다.

"어서오세……어, 너……?"

들어가자 마자 저절로 시선이 그를 쫓았다.
약간의 미소를 띠고 말을 하다가 나를 보고 점차 놀란 표정으로 바뀌는 그의 표정이,
눈 안에 박히듯 들어왔다.
조금 야위어 보인다.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있었던 걸까.
물어보고 싶은 마음이 치밀고, 가슴이 아팠지만
우선은 웃었다.

"오랜만이에요."





"너 고 3이라며. 공부는 잘 하고 있냐? 어쨌든 잘 왔다."

그는 내 팔을 잡아 끌어 안쪽으로 인도했다.
자리에 앉자, 뭐 먹을래? 하며 메뉴판을 내민다.
걸어오는 동안 긴장을 해서인지 목이 조금 말라서 아이스 티를 주문했다.
조금만 기다려, 라고 하던 그는 정말 금방 음료를 들고 왔다.
서둘러 준 걸까 하고 생각하니 마음이 따스해진다.

"감사합니다."

한 모금을 마셨다. ……굉장히 시원하고, 달고, 맛있다.

"맛있네요."

그렇게 말하자 씨익 하고 웃는다.

"그치? 바쁜 녀석 졸라서 배운 거다."

딸랑.
종 소리와 함께 여자 두어명이 들어왔다.
그는 잠시만, 하고 눈짓으로 말하고는 황급히 일어났다.

조금 더 목소리를 듣고 싶었는데…….
하지만 아쉬웠던 것도 잠시, 바쁘게 움직이는 그를 보고 있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하얀 와이셔츠에 검은색 진바지를 입고 메뉴판을 든 그.
여자들이 그가 주문을 받고 돌아간 뒤 그를 쳐다보며 서로 소근대는 것을 보면,
역시 내가 보듯이 남들도 보는 거겠지 하는 생각이 든다.
저 사람은, 어디를 봐도 그저 한참 바쁠 대학생이다.
그 누구도 그가 유부남이란 사실은 눈치 못챌 거다.

……사실, 들어오기 전에 조금 긴장했었는데.
졸업을 한지 오래되어서 무뎌진 걸까. 열심히 준비한 <개교기념일>이란 변명은 아무래도
필요 없어진 것 같다.
거짓말을 할 필요가 없어져서 마음이 놓였다.
하긴 나도 중학교 때의 수업 시간이라던가 하는 것이 잘 기억나지 않으니까.

주머니를 뒤져 보니 암기용 수첩이 나왔다.
그를 쳐다보다 눈이 마주치는 것도 어색할 것 같아서, 애써 시선을 내리고
영어 단어에 정신을 집중했다.

"……배 안 고파?"

목소리에 핫 하고 정신이 들어 고개를 드니,
조금 질린 듯한 표정의 그가 메뉴판 위에 고개를 기대고 나를 보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아침을 먹지 않았다.

"…고파요."

그가 내 머리를 톡 치고 메뉴판을 펼쳤다.





배 부르다.
수저를 내려놓고 물을 몇 모금 마시고 있자, 건너편에서 마찬가지로 수저를 내려놓은 그가
주방으로 들어가서 차를 들고 왔다.

"네 녀석 그러고 있는 거 보니, 공부 걱정은 안 된다만. 건강 관리는 잘 하고 있는 거냐?"
"네, 잘 하고 있어요."

진심으로 걱정해 주는 건가.
아니, 진심이더라도 그렇게 진지한 종류의 것은 아닐 테지.
알면서도 자꾸만 기대하게 된다.
그의 자그마한 친절에도, 나는 언제나 바보처럼 허둥거리고야 만다.

그 별것 아닌 말이
지금까지 몇 번이나 들었던 다른 사람들의 걱정이 가득한 말 보다.
나를 위해 해 준 말들 보다,
나를 위해 흘려준 눈물 보다도
더…… 가슴을 울린다.

"그동안 별 일 없었냐? 뭐하고 살았냐?"

"그냥 적당히 시간 보내며 살았죠."

"그래?"

함께 있다는 사실 하나로 마음이 가벼워진다.
어깨에 잔뜩 들어가 있던 힘이 빠진다.
역시 나,
이 사람을…… 좋아한다.

이른 아침 시간이 지나, 슬슬 손님이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럴 때마다 형과의 대화가 끊겨서, 오늘 같은 날은 좀 손님이 적었으면 좋았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기적이지만.

메뉴판을 들고 바쁘게 돌아다니던 형이 내 옆에서 멈춰섰다.

"미안해, 군열아. 열한시 반쯤 되면 아르바이트들이 오니 그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네, 괜찮아요. 시원하고 좋은데요 뭐."

그는 피식 웃고 내 머리를 슥슥 쓰다듬은 뒤 걸어갔다.
오랜만이다. 이것도.
언제나 나를 보면 머리부터 쓰다듬곤 했던 그였는데.
어린애 취급은 싫지만, 그에게 만져지는 것은 기분이 좋다.
손을 올려 살짝 만졌다. 그가 만지는 것과는 확실히 다르다.
다른 사람이 만졌을 때는 이런 느낌이 나지 않았는데.

잠깐만 하고 들어온 거였는데 역시나 싶게 일어날 수가 없다.
그의 느낌이 배어 있는 카페의 느낌이 포근해서,
눈 앞에 있으니 더…… 욕심이 솟아서.
자꾸 조금만 더 하고 바라게 된다.

열한시 반에 온다던 아르바이트생은 12시가 가까이 되어서야 왔다.
지겹기도 하고, 형도 힘들겠다 싶어서 슬슬 도와주겠다고 하려던 차였다.
그리고 12시가 넘었을 때 즈음, 한명이 더 도착했다.
형은 두번째의 아르바이트생이 오자 마자 일을 넘겨 버리고 내 앞에 앉았다.

"아이고, 이제 숨 좀 돌리자."
"장사 잘 되네요."
"그래 보여? 바쁜 것 같긴 한데, 잘되는 건지 안되는 건지 도통 감이 안 잡혔거든.
다행이다."
"……형은 별 일 없었어요?"
"응, 나야 뭐."
"요새 바쁘진 않아요?"
"한가한 편이지 뭐. 회사 관뒀으니까. …그나저나 폼새가 수상하다, 너. 뭐 부탁할 거 있냐?"

웃으며 말하는 형을 보니 말할 용기가 난다.
괜찮겠지, 이상한 내용도 아닌데.

"네."
"무서운걸. 뭔데? 말해봐. 가능하면 들어줄게."
"사실은 저, 자취를 하려고 하는데요."
"자취? 왜?"
"통학도 불편하고, 공부하기에 환경도 나빠서."

사실 교통편은 그렇게 불편할 것까진 없지만,
요새 공부를 못하고 있는 건 사실이다.
부모님이 안 계시는 커다란 집에 혼자 있다 보면 자꾸만 이런저런 생각이 나고
너무 쓸쓸해서……
이사가고 싶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집이 끔찍하게 싫다고 느낄 때, 매번 창욱이의 신세를 지는 것도 미안하니까.
여기에 와서 이 얘기를 하게 될 줄은 몰랐지만.

"그런데 그런 쪽으로 아는 게 없어서요."
"그래, 마침 잘 됐네. 나도 그런 쪽으로 알아보려고 하고 있었는데."

그런 쪽이라면, 자취?
형이? 하지만, ……아내는?

"역에서 5분 거리에, 방 두개가 있는 28평짜리 아파트야. 혼자 살기엔 넓겠지만,
가사 전반을 담당해 줄 룸메이트가 있으니까 쓸쓸하진 않을 거야."
"전……."
"솔직히 자취하려는 거, 혼자 살아보고 싶어서 그러는 마음도 있을 거라고 생각해.
그래도 자취 시작하면 제일 힘든 게 혼자라는 거거든. 게다가 먹는 것도 부실해질 텐데,
넌 고 3이라 잘 먹어야 할 시기잖아. 나도 3년 전에 자취를 해 봐서, 잘 알아."

그렇게나 생각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렇게 너무 금방 끝나는 건 싫다.
집을 핑계로 해서 조금 더 만나보려고 한 거였는데.
거절의 말을 꺼내려 했지만 그 전에 먼저 그가 입을 열었다.

"요새 좀 쓸쓸했거든. 우리 집, 나쁘지 않은데. 들어오지 않을래?"

순간, 숨이 막혔다.

"이사가긴 귀찮은데 세들이기는 싫고, 룸메이트 구하려니 이것저것 복잡해서 손 놓고 있었거든.
그런데 마침 네가 이사갈 집을 구한다니 잘 됐다 싶어. 잘 해줄게. 혼자 자취하는 것보다
훨씬 나을 테니까, 어때?"
"……부인은요?"

그가 아, 하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내가 얘기 안 했구나. 미안, 정신이 없어서…… 나, 작년 겨울에 이혼했어."

하느님.

"짐, 언제 옮기는 게 좋을까요?"

나,
이 기회, 놓치지 않을 겁니다.
당신이 내게 먼저 손을 내밀었으니까.
……안 그래도 힘든 내게, 희망을 품게 만들었으니까.

"올거야? 잘 결정했어."

그는 가슴의 주머니를 뒤져 종이와 펜을 꺼내 뭔가를 적어 내밀었다.

"우리 집이랑, 내 핸드폰 번호야. 물어볼 거 있으면 전화하고… 참, 우리 집 한번 가 봐야지.
언제 올래? 언제든 상관 없어."
"저도 언제든 괜찮아요."
"음, 그럼 내일… 올 수 있겠어? 내일은 좀 일찍 문을 닫을 테니까.
학교 끝나고서 오면, 저녁 먹고 하룻밤 정도 자고."
"네, 내일 갈게요."
"그럼 동거하게 된 기념으로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내가 살게."
"네."

다행이다.
……정말 다행이다.
용기를 내서 와 본 것이.
신을 믿는 것은 아니지만, 어쩐지 믿고 싶어졌다.

앞서 가는 그의 뒷모습은 그날과 그리 다르지 않았지만,
오늘의 그는 몇 번이고 내 쪽을 돌아 봐 주었다.
…그것이, 너무 기분 좋다고 생각했다.





"일찍 왔네, 어서 들어와."

그가 열어주는 문 안으로 들어섰다.
처음 보는 집인데도 어색하기 이전에 그리운 느낌이 든다.
분명 기억나지 않는 예전의 언젠가 와 본 듯한, 이런 걸 데자뷰라 하던가.

"구경할래?"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오늘따라 더욱 즐거워 보인다.
아마 <쓸쓸하다>고 가볍게 말은 했어도, 실제로는 가볍지 않았을 테니 사람이 반가운 것이겠지.
겨울에 이혼했다고 했으니 이제 서너 개월쯤 되었을 텐데
여기저기를 둘러 보아도, 타인의 흔적은 없다.
조금 살풍경해 보이는 집 안. 가구도 얼마 없어 더욱 집이 넓어 보인다.
야윈 것은, 그 때문일까.
……그러니까 결혼 같은 거 하지 않는 게 좋았잖아.

방을 둘러보던 중에 그가 갑자기 생각난 듯 말했다.

"참, 요새 부모님은 잘 계시니? 이사 건도 있고, 오늘 밤 자고 가는 문제도 있으니까
최소한 전화는 드리고 싶은데 계속 연락이 안 되더라구. 많이 바쁘시지?"

……그런 것을 걱정했던 건가.
잊고 있었다기 보단 잊고 싶었다.
하지만 앞으로 같이 살아야 할 텐데 …힘들다고, 피해선 안 되겠지.

"괜찮아요."
"네가 괜찮아도, 내가 괜찮지 않아."
"정말 괜찮아요. 부모님……이제 안 계시니까. 얼마 전에 사고가 났거든요."

그의 표정이 굳어들었다.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했는데, 역시 이런 데는 소질이 없다.

"……신경 쓰지 말아요, 형."

사실은,
이렇게 말하고 있지만 나……
차라리 이걸로 형이 나를 동정이라도 해 주면 좋겠다고 생각하고 있어요.
동정심이라도 좋으니까, 라고.
……비겁하지만, 그래도.

"괜찮으니까."





그날 밤,
그는 베개를 들고 난입해왔다.
아마 나를 위로하려는 심산에서였겠지.

서툰 방법이라고 생각했지만,
따스한 타인의 체온은 생각했던 것보다 위로가 되었다.
내내 등을 토닥여 주며 머리를 쓰다듬으며 어린애 취급을 해 주는 그 때문에,
나는 찔끔 나온 눈물을 힘들게 집어 넣어야만 했다.

"……좋은 꿈 꿔."

그도 이런 데는 소질이 없는 건지,
무언가 여러 번 말을 하려다 말다가 하다 결국 저 한마디만 하고 먼저 자 버렸다.
그래도 나는 단순하니까, 그 한 마디에 들떴다.

조금 용기를 내서 끌어안은 피부의 촉감은 상상했던 것 만큼 부드러웠다.
코끝을 간질이는 은은한 바디샴푸 향에 잠이 몰려왔다.

새근새근 하는 숨소리를 자장가 삼아 들으며,
잠에 빠졌다.





-최군열, 19세, 여름



그와의 동거 생활은 순탄하게 이루어 지고 있다.
매일같이 얼굴을 보고 서로 늦으면 현관까지 마중을 한다거나,
가끔은 거실에 이불을 깔고 나란히 자기도 하고.
……그리고 그는 여전히 내 머리카락을 가지고 노는 것을 좋아한다.

-군열아~.

벨 소리에 전화를 받자마자 튀어나오는 그의 목소리.
방금까지 펜을 잡았던 터라 저려오는 손을 털며, 빙그레 웃었다.

"무슨 일이에요, 형?"

-미안해, 오늘 못 들어갈 거 같아. 대학 선배에게 잡혀 버려서…….

그는 난처한 상황에 처한 것 같다.
결혼 때문에 자퇴하기 전까진 대학에서 꽤나 활발한 활동을 해 왔었던지라,
그가 갑자기 자퇴한 뒤에 다른 사람들이 좀 곤란했을 거라고, 얘기했었지.
그래도 미움받지 않고 지금까지도 그를 만나러 찾아오는 걸 보면
조금은 질투가 나기도 한다.

그만큼, 그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사랑받고 있다는 거니까.
……내가 당신을 제일 사랑하는데.
나는 그들처럼 매달리며 불만을 표시한다거나 하는 일도 할 수 없다.

"괜찮아요. 문 단속 잘 해 놓을게요."

-그래, 고마워. 먼저 자.

전화를 끊고, 한숨을 쉬었다.
오늘 밤엔 그의 얼굴을 못 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아쉽다.
허전한 느낌도 들고.
내일은 휴일인데 ……잠깐만 쉴까.

전화기를 집어들어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시계가 흔들 흔들 한다.
……안 먹는댔는데, 창욱이 녀석이 자꾸 놀려서 울컥 하는 마음에 잔뜩 마셔 버렸다.
술은 싫어……. 탄산은 더 싫지만.
그나마 다행인 건 그가 늦게 온다는 거다. ……하지만 보고 싶은데. 어째서 다행인 거지?
아, 모르겠다.
그냥 형이 보고 싶다…….

어라.
보고 싶다고 생각하니까, 보이는 것 같다.
이런 건 꿈속에서나 가능한 일인데.
……꿈인가 보다…….
기분 좋다.

"혀엉……."

끌어안자 뜨거울 정도로 따뜻한 체온이 느껴진다.
덥지만 떨어지고 싶지 않아.
하지만, 무겁겠다. 이 커다란 덩치로 잔뜩 기대면 싫겠지…….
제대로 서기 위해서 조금 떨어졌다. ……어, 어, 어라.
다리가 휘청, 하면서 풀려서 엉덩방아를 찧어 버렸다. 조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안 아픈 것 같기도 하고.
어쩐지 재미있다.

"죄송해요, 형. 그렇게 많이 먹인 건 아닌데, 원래 술을 못하긴 하지만……
오늘은 좀 안 받았나 보네요."

"미성년자가 웬 술이야, 술은! ……뭐, 나도 그때 한참 마시긴 했지만."

"지금같은 시기에 먹는 술이 제일 맛있다고들 하던데요."

"그렇긴 하지."

……싫어.
다른 사람에게 웃어주는 거, 싫단 말야.
바짓단을 잡아 당기자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피식 웃는다.
그런 그에게, 마주 웃어 보였다.

"100일주 마실 땐 나도 동행할 거니까, 알아서 해. 알았지? 자꾸 술 먹이지 마.
우리 군열인 순진하다구."

장난스럽게 말하는 그.
<우리 군열이>란 말에, 다시 기분이 좋아졌다.

"자, 일어나야지. 들어가자."

"으응……."

부축을 받아 가며 걸음을 옮겼다. 기분은 날아갈 것처럼 가벼운데… 가벼운데,
어쩐지 잘 움직여지질 않아.
밀려서 침대 위로 넘어졌다. ……푹신하다.

"휴우. 옷 벗자."

눈을 감고, 그가 움직이는 대로 옷을 벗었다.
몸이 둥둥 하고, 떠 있는 느낌이 난다.
기분 좋아…….
익숙한 향이 느껴졌다.
손을 뻗어 잡히는 것을 당겼다.

"어, 어……윽."

부드럽다.
기분 좋아…….

"……아해요."

그 몸을 끌어안았다.
……꿈이니까, 이 정도는 괜찮겠지.

"세상에서 제일 좋아해……."

달콤한 숨결이 귓가를 스친다.

"좋아해요, 형……."

천천히 무거운 눈꺼풀을 들자, 어렴풋이 그의 얼굴이 보였다.
그 뺨에 손을 대어, 입을 겹쳤다.

입술이 맞닿아 눌리고 말랑한 느낌이 접촉한 곳에서부터 솟아나
황홀하게 온 몸을 타고 번졌다.
……좋아해.
……좋아해요.





머리가 아프다.
정신이 들자, 숨이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몸을 옆으로 굴러 막힌 것을 토해냈다.

"콜록, 콜록!! 콜록……."

그가, 들을 지도 몰라……. 걱정을 끼치는 것은 싫다.
이불을 끌어다 입에 대어 막고 계속 기침을 했다.
……요새 학교에서 추울 정도로 에어컨을 세게 튼다 싶었더니만.
어제 술을 마시고 취해 버려서, 긴장이 풀렸나 보다.

그래도 여름이라 기침은 금새 사그러들었다.
여름감기는 바보도 안 걸린다던데…….
약간 두통이 있는 머리를 손으로 지탱하며 방을 나왔다.
둘러본 거실엔 아무도 없다. 아니, 아예 집 안에 인기척이 없다.
벌써 나갔나?
다행이다, 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조금 쓸쓸할 것 같다.





수화기를 들었다.
번호를 누르고 기다렸다. 신호가 좀 오래 간다 싶어서
혹시 전화하면 안 되는 상황인데 무턱대고 걸어버린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망설이고 있을 때 찰칵 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형, 저에요."

갑자기 아무 소리도 안 들린다.
핸드폰이 아닌 이상, 문제가 있을 리는 없을 텐데.

"…형? 안 들려요?"
-응, 아니 잘 들려. …일어났니?
"네. 형은 벌써 카페 나가신 거에요?"
-응.

언제나보다 한 시간이나 빠른 시간. 예약 손님이라도 있는 걸까.
꿈 속에서 형의 얼굴을 어렴풋이 본 거 같긴 한데,
그것만 가지고는 부족하다. 어제 밤에도, 오늘 아침에도 못 봤다.
……보고 싶어.

"어제는 잘 들어 오셨어요?"
"……응."
"언제쯤 끝나요?"
-……아, ……음, 오늘도… 늦을 것 같아.

어쩐지, 목소리가.
기척이……
순간, 심장이 내려앉았다.

아니, 아니겠지.

"언제쯤요?"
-새벽…… 두 시 넘어서.
"기다릴게요."
-더 늦을지도 몰라. 그냥 먼저 자.
"……네."

수화기를 내려놓았다.
커다란 소리라도 들은 것 마냥 귀가 멍멍하다. 무겁게 눌리는 듯한.
숙취로 지끈대던 머리가, 깨질 것처럼 아프다.
……대체, 왜?

그는 언제나 늦을 때면 내게 이유를 설명하곤 했었다.
아무리 별 거 아닌 이유라도,
혹시나 내가 걱정할까 봐서. ……그렇게나 따뜻한 사람인데. 잊을 리가 없는데.

나를,
피하는 건가.





찰칵.
현관문이 열리고, 자그마한 발 소리가 났다.
마른침을 삼켰다.
끼익…….
방문이 열렸다.
조심성을 기울인 까치발 걸음소리가 천천히 다가왔다.

그는, 침대 옆에서 한참을 가만히 서 있었다.
내 얼굴을 보고 있을까.
긴장으로 얼굴이 딱딱해 졌을 지도, 하고 걱정을 하고 있는데

"……휴우."

하고.
한숨……?
그러고 나서, 그는 방을 나갔다.
문이 닫힌 뒤에 나는 꼭 쥐고 있던 손바닥에 흥건히 배인 땀을 이불에 문질러 닦았다.
어째서일까.
자꾸만 불길한 예감이 든다.
혹시 나 뭔가 미움받을 만한 일이라도 저지른 걸까.

생각이 났다.
어젯 밤의 기억이, 없다.





"야, 정말 별 일 없었다니까."

녀석이 보기에도 내 상태가 심상치 않은지, 안색이 변해선 땀을 뻘뻘 흘리며 변명을 한다.
……네 녀석이 보기에 별 일이 없었다고 해서, 그에게도 그럴 거란 보장이 없잖아.

"별일이든 아니든, 어쨌든 얘기해 봐."
"알았어, 알았어. 꼭 사람 죽일 것처럼 드네. ……어제 네가, 한 병을 단숨에 마시고
그대로 뻗었었잖아."
"그래. 네가 시켜서."
"미안하다 그래! 내가 그거 갖고 그렇게 될 줄 알았냐 뭐.
어쨌든 그래서, 내가 책임을 지고 여자애들 먼저 보내고선 널 부축해서 집에 데려갔었어."
"그리고?"
"그리고는 무슨 그리고야. 끝이지. 경훈형 보자마자 네 녀석이 들러붙어서
잘 들어갔었잖아."
"들러붙어……?"

그게 무슨,

"폭 안기더구만. 아니, 체격 차가 있으니 네놈이 안는 거겠지만. 어쨌든 그게 다야.
뭐 때문에 그러는 건데?"
"……아냐, 고마워. 나 이만 간다."

그렇게 말하고 벌떡 일어섰다.

"어, 야! 벌써 가?"
"그래, 공부 열심히 해라."

창욱이의 집을 나왔다.
벌써 7월 중순이라서, 나오자 마자 더운 기류가 온 몸을 휘감아 왔다.
나는 여름을 싫어했다.
지금도 싫어한다. 더위도 진득한 땀도 전부 다 싫다.

……그를 보냈던 3년 전의 더위가, 잊혀지지 않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렇게 혼자 남겨져야만 하는 걸까.

눈치를 채 버린 걸까.
내가 무슨 실수를 했다던지…….

속단하지 말자.
단지, 정말 바빠서 얘기하는 걸 잊었을 수도 있고
내 착각일 수도 있으니까.

자꾸만 드는 나쁜 예감을, 애써 떨쳐냈다.





오늘로, 3일 째.
그가 늦게 들어오기 시작한 지 3일째 되는 날이다.
그리고 밤샘 3일째이기도 하다.
그가 돌아올 때까지 기다리고, 기척을 살피고
끝도 없이 이어지는 생각에 고민하다 보면 어느새 날이 밝아오곤 했다.
그렇게 보낸 것이 벌써, 3일.

미칠 것만 같다.
밥도 넘어가지 않고, 공부도 머리에 들어오지 않고, 잠도 잘 수가 없다.
이대로라면 말라서 죽어버릴 지도 모른다.
틀림없다.

그는, 내 마음을 눈치챈 것이다.

……더럽다고 생각하는 걸까.
혐오스러운 표정을 짓고 있어도 상관없다.
내게 더럽다고 욕을 해도 좋아. 때리더라도 ……내가 싫다고 한다 해도.
그가 보고 싶다.
그의 목소리가 듣고 싶다.

책상에 있는 시계는 12시, 자정을 알리고 있다.
……만나고 싶어.
벌떡 일어났다.
현관으로 달려가 신발을 갈아신고 집을 나와 열쇠로 문을 잠근 뒤, 엘리베이터 앞까지 뛰었다.
1층을 눌러, 문이 열리자 마자 뛰쳐 나왔다.
하지만,
한참을 뛰다 말고 멈춰 서 버렸다.

그 곳까지 찾아가면 더 싫어할지도 모른다.
그런 건 싫다.
보고 싶은데.
너무, 보고 싶은데…….
이를 악물고, 도로 아파트 입구로 돌아갔다.
여기서 기다리는 건, 괜찮겠지.





"……최군열?"

가로등 불빛을 받아 희끄무레하게 보이던 물체가 가까이 다가왔다. 그다.
내가 선물해 준 연노랑 색 티를 입고 있다. 입어 줘서, 다행이다.
오랜만에 듣는 목소리. 귀가 조금 간지러운 것 같기도 하다.
걸어오던 그는, 나 때문인지 이 쪽으로 뛰어왔다. 그리고 바로 앞에서 멈추었다.
그가 가까이 다가와서일까.
주위의 온도가 조금 낮아진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야, 너. 왜 여기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아니 그것보다……너 어디 아프냐? 안색이 안 좋아."

그가 손을 내밀어 내 이마를 짚었다.
걱정해 주는 거에요……?
나, 싫어하지 않는 거에요?
더럽다고, 역겹다고, 나가 버리라고 말할 거 들을 각오하고 왔는데.
이마를 짚은 그의 손을 잡았다. 엄청 놀랐는지, 그가 움찔 하는 게 보였다.
미안하다고 생각했지만, 손은 놓지 않았다.

"알고 있죠."
"……군열아."
"……알아챈 거죠, 형."

그는 몇 번 눈을 깜빡였다.

"내일 얘기하자. 너 열 있어. 자고 일어나서 내일 아침에……"

말하며 그는 잡힌 손을 빼 내려고 했다.
그의 손이 빠져나가기 직전, 나는 잡은 손에 힘을 주어 손을 빼지 못하게 했다.

"싫어요!"

그런 거 싫어요.

"……내가 싫어요? 더럽게 느껴져요?"
"무슨 소리야! 그렇지 않아."
"그런데 왜…… 피하는 거에요? 좋아해요. ……좋아한다구요."

더 이상은 싫어요.
차라리 지금 전부 듣고, 전부 끝내는 게 나아.
차라리 그게 나아요!

"……아냐. 네가 아직 어려서 착각하는 거야."
"지금도 피하고 있잖아요, 형은. ……그런 게 아니에요. 나는 형보다 어리지만,
내 감정이 어떤 것인지 정도는 알 수 있다구요!"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군열아……. 좀 쉬고."
"조금 열 나는 것 정도, 상관 없어요. 아니, 여기서 죽어 버린대도 좋아.
피하지 말아요. 차라리 싫다고, 역겹다고 말 해 줘요. 그럼……
이렇게 어설픈 희망을 가지고 옆에 있지 않아도 되잖아요."

그를 기다리는 동안 별별 생각이 다 들었다.
어쩌면, 그는 내가 싫은 정도가 아닐 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내가 있음으로 해서, 나라는 사람 때문에 당신이 괴로워 할 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참을 수 없어. 그러니까, 싫다고 하면 사라져 줄게요.
그래도 좋으니까 얘기해 줘요.

"대답해 줘요, 형. 나가라면 나갈게요. …얼굴 보이지 말라고 하면, 차라리 그럴게요.
이런 건 …싫어요. 형. 부탁이에요."

하지만.
하지만…….

"……그래도, 괜찮다면 싫다는 말은 하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그냥 지금,
나가라고, 단 한 마디만 해 줘요. ……나, 이기적일지도 모르지만."

미안해요, 형.
모든 게 뒤죽박죽이다.
스스로 말하면서도 앞뒤가 안 맞는다는 거 알고는 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어…….

속사포처럼 단숨에 말을 쏟아낸 뒤에,
그의 판정을 기다리며 고개를 숙이고 있는 시야에 팔뚝 위로 두둑두둑 떨어지는
물이 보였다.
비가 내리는 것 같지는 않은데, 하고 생각한 직후에 그것이 내 눈물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바보처럼 울고 있었구나.
얼마나 보기에 나쁠까. ……부담스러워 하지 않게, 냉정하게 말하고 끝냈어야 하는데.
너무 감정적이었다.

많은 말을 하는 동안에도, 끝난 후에도.
그는 아무런 대답이 없다.
입안이 바싹 마르고, 머리속을 울릴 정도로 심장이 크게 뛴다.

고개를 들면,
그가 질려하는 표정으로 나를 보고 있을 것만 같아
무서워서
고개를 들 수가 없다.
눈물을 집어넣고 싶어도 그것도 멈춰 주질 않는다.

나, 정말, ……바보 아냐.

그런데 문득,
코 끝에 부드러운 것이 닿았다.
연노랑이 바로 앞에 있었다.
등에, 그의 팔이 닿아왔다.

……그가, 나를, 안아 주었다.

그렇게 멈추지 않던 눈물이 단번에 들어갔다.
혹시 이거, 꿈인 걸까.
3일동안 밤을 새다가 나도 모르게 잠이 들어 버렸다던가.

찌륵 찌륵 하는 울음 소리가 들렸다.
언제부터 울고 있었을까.
오래동안 여기서 기다리고 있었는데 전혀 몰랐다.
그래, 여름이었지.
맞닿은 피부에 찬 습기를 느끼며, 멍하니 생각했다.

"……나도 널 좋아해."

그는 그렇게 말하고, 조금 쉬다가 말을 이었다.

"너와 같은 의미인지는 아직 잘 모르겠지만, 알고 있니? 난 언제나 차갑고 매정하다는
평가를 받았다는 거."

……차갑고, ……매정해?
아냐, 그렇지 않아. 형은 언제나 따뜻하고 다정했는걸. 나를 배려해 줬는 걸.
지금도 이렇게나.

"다른 사람에게 배려를 해야 한다는 것이 귀찮게만 느껴져서,
언제나 대충 지냈었지. 내가 누군가와 함께 할 수 있을 거라곤, 나도 상상하지 못했어."

어쩐지,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듣고 있는 것 같다.
하지만 형은,
나에겐…….

"그런데, 어쩐지 군열이 너는…… 좋은 느낌이 들었어. 처음 봤을 때부터."

……나도.
나도 그랬어요, 형.
귓가에서 속삭이듯 말하는 그의 목소리가 간지럽다.
조금, 팔을 올렸다.

"그래서 동거를 하자고 했던 거야. 그리고, ……"

그의 허리에 조심스럽게 팔을 둘렀다.
거부하지 않는다.
빳빳하게 긴장되어 있던 어깨가 풀렸다.

"타인에게 신경쓴다는 것이 기분 나쁘고 귀찮은 것만은 아니라는 걸, 네가 가르쳐 줬어.
네가 바란다면…… 언제까지라도 함께 지낼 수 있을 것 같기도 해."
"……정말?"

나…….

"정말이에요?"
"응, 정말이야."
"……진짜로?"
"그래, 진짜로."

그를 안은 팔에 있는 힘껏 힘을 주었다.
정말로 이 팔 안에 있는 사람이, 형이 맞을까 하는 생각이 갑자기 들어서
고개를 올려 쳐다본 얼굴은, 그가 맞았다.
눈이 마주치자 빙그레 웃어주는 얼굴에,
또 눈물이 나와 버려서,
고개를 내려 그의 품에 얼굴을 파묻고 다시 끌어안았다.

"…사랑해요."
"그래……."

여름의 기온 때문인지, 그의 티셔츠에서 땀 냄새가 풍겨왔다.
그것을 맡고 있는 동안 마음이, 편안해졌다.

나는 이렇게도, 당신이 없으면 안 되는 사람인데.
당신은 그렇지 않을 테지만,
반의 반 만큼이라도 나를 좋아해 줬으면 좋겠어.
……그래주면, 좋겠어요.






- 최군열, 19세, 가을


넓은 광장. 검은색 강물. 둘러싼 도로, 강을 가로지르는 다리…….
눈에 익을대로 익어 어디든 다 알고 있다고 자신하던 풍경인데도,
단지 몇 달을 다른 곳에 산 것 뿐인데 예전과는 느낌이 다르다.
마치 과거를 들여다보고 있는 듯한 감각. 보이는 곳곳마다 추억이 묻어 나왔다.
옛날 사진이라도 되는 것 같이.
그만큼, 내가 그와 사는 것에 익숙해 졌다는 증거일까.

"난 이곳이 좋아."

그가 말했다.
수능이 정말 몇일 남지 않아서 필사적으로 책에 매달려 있는 내가 안쓰러웠던지,
오늘 하루 정도는 쉬자며 그가 끌고 온 이 곳은, 한강 고수부지.
……몇달 전에 부모님을 묻은 곳이다. 그는 모르겠지만.

"그런가요?"

그렇다면 나도 이 곳이 좋아.
당신이 좋아하는 것은 나도 좋아하게 될 테니까.

"예전에 네 옆집으로 이사갔던 것도, 한강이 좋아서였거든.
한강 바로 근처의 집을 못 사고 조금 떨어진 곳에라도 살아야지 하면서 말이야."
"넓어서 좋군요."

별 생각 없이 한 말인데, 그것이 웃기기라도 했는지 그가 피식 웃었다.
그 웃음에 기분이 들떴다.

"저거 봐. 해가 진다. 붉은 색이야."
"바다엔 안 걸리네요."
"나중에 바다에 걸리는 모습을 보여줄게. 수능 끝나면 일주일간은 너도 나도
휴일로 하는 거야. 가게 문 닫고… 학교는 안 가도 되지?"

장난스러운 그 말에 벌써부터 기대가 되기 시작했다.
그의 말이 진심인 건지, 그냥 한 말인 건지는 모르겠지만 정말 그러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슬슬 날이 저물자 어둑한 도시에 불이 켜졌다.
도로를 지나다니는 자동차의 불빛도, 가로등의 빛도 일렬로 죽 서 있는 게
구경하기엔 딱 좋다. 강물엔 그 빛이 닿지 않는 듯 하지만.
검은 색의 강물에 그 날의 일이 떠올랐다.

"……많이 힘들지?"

멍하니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다가 그의 말을 잠시 이해하지 못했다.

"네?"
"공부하는 거 말야."
"아, 네……조금요."
"조금은, 무슨."
"정말 괜찮아요."

당신이 언제나 신경 써 주니까.
부모님의 빈 자리를 못 느낄 정도로 잘해 주었으니까.
내 곁에 있으니까…….

"어서 수능이 끝났으면 좋겠어."
"미안해요. 신경쓰이게 해서……."
"어? 별로 신경 안 쓰고 있는데."
"그래도, 본인보다 다른 사람이 더 힘들다고 하던데요. 수험생의 경우는…."
"난 모르겠던데……. 그러니까 그런 거 걱정하지 마."

대화가 끊겨 한동안 멍하니 강물만 바라보고 있었던 때문인지,
잠이 몰려왔다.
눈을 꿈뻑거리며 잠을 깨려고 해 봤지만 하품만 나온다.

"졸려?"
"약간……."
"집에 돌아갈까?"
"아뇨, 괜찮아요. 집에 가서 자게 되면 못 일어날 것 같아서."
"그럼 여기서 잠깐만 자. 내가 깨워줄게."

풀밭 위에 드러누워서?
나쁘진 않군, 하며 누우려는데 그가 내 머리를 당겨 자신의 무릎 위로 올렸다.

"감사합니다."
"그래, 영광인 거 알면 곱게 자."
"……네."

웃으며 대답하자, 그도 웃음으로 화답해왔다.
가끔 부는 바람이 선선해서 기분이 좋다.
아니, 바람 뿐만이 아니라 지금 이 상황의 모든 것이.

몸의 힘이 점점 빠지는 동안, 그는 끊임없이 머리를 쓰다듬었다.
이젠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 진 감촉이다.

"…좋은 꿈이라도 꾸는 거야? 입가가 웃고 있어."

희미하게, 어렴풋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잘 자."

그의 무릎을 베고 자는 동안, 나는 꿈을 꿨다.
일어난 뒤에도 기억은 나지 않았지만 굉장히 행복했을 정도로
달콤하고 긴 것이었다.
마치 그의 느낌처럼…….
그것은 어쩐지, 행복한 예감이 드는 꿈이었다.

그래서,
수능이 끝나면 다시 한번 고백하기로 결심했다.
지난번처럼 뒤죽박죽이 아니라 멋진 것으로 말이다.
그는 이렇든 저렇든 상관없을 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 때엔…… 대등한 입장으로서의 대답을 들으면 좋겠다고,
상상해 봤다.






-최군열, 19세, 겨울


시험이 끝났다.
어떻게 봤는지도 모르겠다, 끝나고 보니.
그래도, 고등학교 3년동안 해온 것들 전부를 쏟아 부은 것 같아서 후련하긴 하다.
바깥 세상으로 나오니 현실감이 안 느껴질 정도지만,
생각나는 것은 하나 뿐이다.

차들이 그득그득 들어찬 도로를 힐끗 보고, 뛰기 시작했다.
인파를 어느 정도 헤치고 나와서 인도를 계속 가로질러 내려갔다.
언덕배기에 위치한 학교였기 때문에 내려가는 동안 가속이 붙었다.
뛴 덕분에 땀이 차 올라서, 두르고 있던 목도리를 벗었다.

보고 싶어.
형.





딩동 딩동,
벨소리가 안쪽에서 희미하게 울려퍼졌다.
인기척이 나고, 누구세요- 하는 그의 목소리가 들렸다.
대답도 하지 않았는데 찰칵 찰칵 하고 자물쇠가 풀리는 소리가 나더니 문이 벌컥 열렸다.
나쁜 일 당하면 어쩌려고, 형.
하지만 이제까지 생각했던 것은, 형의 얼굴을 보자 전부 사라졌다.
남은 것은……

"군열이 왔구나."
"다녀왔어요. 형, 저……"



나는 아직도 당신을 사랑하고 있습니다.
앞으로도 언제까지나, 당신의 곁에 머물고 싶습니다.
사랑합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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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유는 모르겠습니다. 그냥 좋아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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