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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moon
2002년 여름 이벤트 : 카페 이야기

2002 바빌론 여름 이벤트 Six Gong Stories
B타입




베이비 얼론 여름 이벤트 소설.

소설에 들어가기 앞서…
바빌론 여름이벤트에 참가하게 되어서 무척 영광스럽게 생각합니다.
로느님께서 제가 주신 특명은
일편단심 마당쇠, 머슴공이 등장하는 소설을 쓰는 겁니다.
(사실은 여러 타입의 공들 중에 하나를 고르라고 했는데
   습관적으로 그걸 고르고 말았습니다.
   그나마 가장 쉽게 쓸 수 있을 것이라는 생각에….)
문제라면 문제랄까요…?
요즘 남일씨 덕분인지 싸가지 만땅의 지랄 캐릭들이 새삼 매력적으로 느껴집니다.  
쿨럭;;; 게다가 난데없는 새드물이 쓰고 싶어져 갈등도 했습니다.
결론은… 이래 저래 힘겨웠다는 말입니다. -_-

변명이 길었습니다.
부디 즐겨주시길(_ _)





카페 이야기.



딸랑하는 청량한 소리와 함께 카페의 문이 열리자 더운 공기가 왈칵 들이쳤다.
장식장 위에 걸려있던 시계를 확인하자
예상대로 짧은 바늘이 이제 막 3시를 가리키려는 참이다.

" 어서 오십시오~~~. "

제법 프로의 뽐새가 풍기는 길게 늘어지는 인사말을 건넨 후,
화려한 문양이 새겨진 은제 쟁반에 물 한 컵과 메뉴 판을 받쳐들곤
이제 막 자리잡은 손님에게로 다가갔다.

" 주문하시겠습니까? "

탁하는 소리가 날 만큼 불손한 자세로 테이블에 물잔을 내려놓곤 앞치마에서
펜을 꺼내 남자의 입이 열리기도 전에 주문서에 헤이즐넛1 이라고 써넣었다.

" … 커, 커피…. "
" 커피요? 저의 가게에서 취급하는 커피가 열가지도 넘는데
   어떤 커피를 말하는 겁니까? "

주문서에서 눈을 떼지 않고 싸늘하게 묻자 잔뜩 주눅든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 …… 헤… 헤이… 즐넛. "
" 헤이즐넛 말씀이십니까? "
" …예. "

더듬거리는 대답에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자 남자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허공으로
비켜가더니 다음 순간 남자의 고개가 테이블 쪽으로 푹하고 떨어졌다. 귀 볼은
물론이고 검게 그을린 목덜미까지 진홍색으로 물든 남자를 내려다보고 있자니
절로 기가 막혔다.

" 허참. "

남자의 귀에 들릴 정도로 코웃음을 치자 흠칫하고 남자의 어깨가 떨렸다.

" 또냐? 오늘도 헤이즐넛 달라든? "

지루함이 가득한 얼굴로 카운터를 지키고 있던 사장형은
내밀어준 주문서는 보지도 않고 한쪽으로 밀어놓았다.
지루하던 참에 모처럼 물을 만난 듯, 호기심으로 반짝이는 형의 눈을 보니
기분이 더 나빠졌다.

" 물어 뭐해요. 입 아파. "

퉁명스럽게 툭 쏘아주곤 카운터 안쪽의 주방으로 들어가 커피를 내릴 준비를
했다.

" 저거 중증이지? 상태가 심각해. "
" ……. "

그걸 누가 몰라?
천하의 둔탱이라도 저 지경이면 알아 차리고 말 거야.

" 이제 그만 적당히 버팅기고 못이기는 척 넘어가주지 그러냐? "

말이 쉽다.
아무리 남의 일이라지만 그 동안의 정리가 있는데 너무 하는 거 아니야?

" 학원 안가요? 오늘도 땡땡이? 그 나이에 운전면허 하나 없이 살면 좋아요?
   그런 주제에 차는 왜 사달라고 졸랐대요? "

빙글거리는 꼴이 얄미워 보란 듯이 손목에 차고 있던 시계를 코 앞으로 들이밀자
형의 단정한 이마가 반으로 접혔다.

" 간다, 가. 임마. 누굴 닮아서 그렇게 잔소리가 심한지 원. "  
" 생긴 대로 살다 갈 거예요. "

냅둬요.

" 그게 문제잖아, 지금.
   네 놈이 생긴 대로 살기만 했어 봐, 저런 가련한 인종이 생겼겠냐?
   얼굴에 맞춰 살던지, 아님 성격대로 살던지 태도를 분명히 하란 말이야.
   태도를!!! "
" 의도한 바 없어요. 나한테 반하라고 한 적 없다니깐요. 뭐라 뭐라해도, 아무리
   상대가 곱상하게 생겼다지만 같은 동성에게 반한다는 것 자체가 자연스럽지
   못해요. 형도 알잖아요. 내가 부자연스러운거 싫어하는 거. "  
" 알지, 알아. 물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왜 모르겠냐? 하지만서도, 세상만사가
   말이지 네 생각대로 술술 풀리는 것만은 아니라는 게 문제라는 거지. 그 산
   증인이 바로 저 총각이 아니겠냐? "

형의 말에 잠시 잊고 있던 남자쪽으로 시선을 주었다.
아니나 다를까, 나를 보고 있던 남자의 얼굴이 황급히 창쪽으로 돌아갔다.
설마, 그렇게 시선을 피한다고 다고 뒤통수가 따가울 정도로 쏟아지던 집요한
시선을 눈치채지 못할 거라고 생각하는 건 아니겠지?

" 삐죽거리지 마라, 임마. "
" 안 삐죽거려요. "
" 도끼 눈도 하지마, 임마. 하나도 안 무섭다니깐. 순해 터진 얼굴을
   해가지고선…. 너 말이야, 그 성격 좀 어떻게 안 되겠냐? 도대체가 어느 장단이
   창을 해야 할지 갈피를 못 잡겠다. "

남이야.
내가 순해 터진 얼굴인 주제에 실상은 지랄 속이라서 사장형한테 피해준 거 있나?

" 사모님께 전화 넣어요? 오늘도 학원 땡땡이라고? "
" 간다, 가. 간다잖아. 짜식. 귀염성 없기는. "

그래도 물주인 부모님이 무섭긴 무서운지, 사장형은 중얼중얼 불평을 터트리면
휴게실로 들어갔다.
아차, 커피.
사장형의 수다 때문에 주문 받은 걸 까맣게 잊고있었다.
하여튼 사장이라고 일생일대에 보탬이 안 되는 사람이다.

미니 커피 메이커에 물을 한 컵 들이 붙곤 아침에 갈아놓은 헤이즐넛 네 스픈을
푹푹 퍼 넣고 있는데 머리 꼭대기에서 사장형의 기암하는 소리가 들렸다.  

" 이지수. "

알아, 알아.
뭔 소릴 하고 싶은 건지 벌써 알아. 그러니 조용히 사라져줘요.

" 이지숫!!! "
" 말해요. "
" 저 친구, 헤이즐넛 한잔 시킨 거 맞냐? "

아무렴 혼자 왔으면서 두 잔을 시켰을까.
그 당연한 걸 묻긴 왜 물어.

" 너, 가게 문 닫게 할 작정이냐? 헤이즐넛 한잔 내리는데 웬 커피를 그렇게 많이
   넣어? 손님 다 떨어뜨리고 싶어? "
" 계속 잔소리해요? 전화 넣어요? 어제 그제 운전학원 빠진 거랑, 친구들이랑
   노느라고 장부 마감도 못 했다는 거 사모님께 보고해요? "
" 임마, 치사하게 협박이냐? 전화해, 전화하라고. 무서워서 부들부들 살이 다
   떨린다. "

어쭈, 모처럼 쎄게 나오네.
한번 해보자는 거야?

" 전화 한 김에 밤새 부어라 마셔라 해서 가게 엉망으로 만들어 놨다는 것도
   말씀 드려도 되죠? 가만있자, 의자 두개가 부서지고, 크리스탈 컵 다섯 개가
   깨졌고, 안주 접시가… "
" … 새끼, 간다. 가면 되잖아. 아주 하다 하다 못해 이젠 협박까지 하냐?
   넌 하여튼 그 놈의 성격이 사단이야. 그 성격 고치기 전엔 절대로
   좋은 사람 못 만날 거다. "
" 남 걱정해요? "

남 걱정 하지 말고 서른이 넘은 나이에도 변변한 여자친구 하나 없고 쓸데없는
날 파리들만 꼬이는 그대 인생이나 걱정하시지.  

" 아이고. 내가 무슨 죄가 많아서 너 같은 독종을 만나서 이 고생을 하는지, 원.
   당최 누가 사장이고 누가 종업원인지 알 수가 있어야지. "

사장도 사장나름이지.
아무 생각 없이 그냥 왔다 갔다 하는 사람이 사장은 무슨 사장.

" 시간 다 되가네. 잘하면 오늘도 운전 연습 못하겠네. "
" 새끼, 간다잖앗!!!!! "

형의 신경질적이 고함소리가 채 끝나기도 전에, 쨍그랑하는 날카로운 소리가
들렸다.
어떤 상황이 벌어진 건지 안 봐도 디비디다.
저 남자 소심한 건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만, 저 지경으로 간이 적을 지는
몰랐다.

" 휴우~~ "

엉거주춤 일어난 자세로 어쩔 줄 몰라 우왕좌왕 하는 남자를 곁눈질하며
사장형과 나는 동시에 긴 한숨을 내쉬었다.

" 쯧쯧쯧 오늘도 한건 했지 싶다. 저거 국보급 아니냐? 아깝다, 아까워, 이지수의
   마수에 멀쩡한 인간 하나 또 잡은 것 같다. "

그러니깐, 마수 뻗친 적 없다니깐요!!!!

" 불쌍하니깐 컵 값은 받지 마라. 가게 잘 보고, 적당히 데리고 놀다가
   돌려보내라. "

남자 귀에 닿지 않게 소곤소곤 속삭인 형은 내 양 볼을 죽 늘어트렸다 탁하니
놓아버린 후 휭하니 가게를 나섰다.

" 수건 드려요? "

대걸레를 옆구리에 끼운 채 준비해간 마른 수건을 내밀자 남자의 커다란 손이
머뭇머뭇 다가왔다.    

" … 미, 미안…. "

당신 국가 기밀이라도 팔아 넘긴 거야?
그깟 컵 하나 깼다고 세상이 끝 나기라도 한대?
있는 대로 주눅들어있는 남자를 모른 척 하며 대걸레질을 시작했다.
남자의 스니커즈 사이로 걸레를 넣자 남자의 발이 황급히 옆으로 움직였다.
그런 남자의 다리를 따라 걸레를 밀자, 남자의 발이 반대방향으로 옮겨졌다.
다시 따라붙고, 도망가고를 반복했다.
이런 노골적인 놀림에도 남자는 항의의 말 한마디도 없이 눅눅해진 수건을 들곤
내 움직임을 따라 부지런히 발을 옮길 뿐이었다.
재미없다, 관두자.
놀리는 것도 상대가 제대로 된 반응을 보일 때나 재미있는 거지 이런 무반응은 영
맥이 빠진다.

" 주세요. "  
" …에… 에? "

화들짝 놀라는 남자.

" 수건요. 그나 저나 바지가 많이 젖은 것 같은데 괜찮겠어요? "
" 에…,예. 괜, 괜찮습니다. 이, 입고 있으면 그, 금방 마릅니다. "

누가 몰라서 하는 말이냐? 예의상 그냥 한번 물어본 말이다.
목구멍까지 튀어나온 말을 애써 다시 삼켰다.
이 남자, 쉴새 없이 내 심기를 건드리고 있다.
딱히 뭐가 그렇냐고 꼬집어 말 해보라고 한다면 아무 할 말도 없었다.
특별히 나에게 잘한 일도 잘 못한 것도 없었고, 그에 앞서 잘 잘못을 따지기
이전에 남자와 엮였던 어떤 일도 없었다.
그냥 그랬다.
그래, 그것이 이유였다.
처음 가게를 찾아와 헤이즐넛 한잔을 시키는 남자와 눈이 마주친 그 순간부터
목에 걸린 가시처럼, 눈가의 다래끼처럼 그냥 끊임없이 신경이 쓰였다.

넘칠 듯 말 듯 아슬아슬하게 출렁거리는 커피 한잔을 남자에게 갖다 주곤 서둘러
돌아와 카운터 벽에 걸린 거울로 남자를 관찰했다.
행여나 넘칠 새라, 시한 폭탄이라도 다루듯 조심스럽게 각설탕 두개를 커피에
넣은 남자는 두 손으로 잔을 움켜쥐곤 조심스럽게 들어올려 입가로 가져갔다.
저거, 구제불능 맞다.
그것도 아주 중증인 구제불능이다.
한 모금을 마신 남자의 얼굴이 보기 좋게 일그러지는 것을 보았을 때, 그대로
남자가 커피를 내려놓고 고사를 지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남자는 보기 좋게 내 예측을 깨뜨리고 있었다.
보기만해도 쓴 물이 넘어 올 것 같은 진하디 진한 커피를 묵묵히 들이키고
있었다.
마치 사약을 마시는 것마냥 한 모금 마실 때마다 비장한 얼굴로 심호흡을
해가면서….
남자의 당황하는 얼굴을 보고 싶어서 일부러 마실 수 없는 커피를 갖다 주었다.
아니, 사실은 그것보다 더 많은 것을 남자에게 바라고 있었다.
그것을 빌미로라도 말을 걸어주길, 자신의 의지로 나를 불러 주기를
나는 기다리고 있었다.
그런데 남자는, 바보 같은 남자는 계속되는 노골적인 이지메를 묵묵히 견디기만
하고 있을 뿐, 절대로 먼저 손을 내밀지는 않고 있었다.

" 잠깐 앉아도 되죠? "

손님의 자리에 앉는 것은 원칙상 금지된 일이긴 했지만 누가 본다고 일일이 신경
쓰겠나.
대답도 듣지 않고 맞은 편에 털썩 주저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주머니를 더듬어 라이터를 찾아 보았지만 어디에 뒀는지 찾을 수  없었다.
일어나기 귀찮아.
이제 금방 앉았는데, 차라리 안 피고 만다.
힐끔, 성냥이 준비되어있는 카운터를 한번 보곤 담배를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조금 미련이 남았지만, 귀찮은 건 딱 질색이다.
그 순간이었다.
비호같이 일어난 남자가 카운터로 달려가더니 성냥 하나를 들고 왔다.
바보인 줄 알았더니 쓸모 있을 때도 있구나….
은근히 속을 감탄했다.

내려놓았던 담배를 다시 입에 물곤 기다렸다.
기다렸다.
기다리고 또 기다리고 기다렸다.
그렇게 한참을 기다려도 남자는 불을 당길 생각은 하지 않고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단정하게 붙인 무릎위로 양손을 모아 쥔 채 고개를 떨구고 있었다.
허허ㅡ
이렇게 살다가 내 명에 못 죽지 싶다.
이 남자와 가까이 지냈다간 모르긴 해도 복장이 터져 죽고 말 거다.  

" 불 안 붙여줘요? "

신경질적으로 쏘아붙이자, 그때서야 남자의 얼굴이 들렸다.  

" 에…. 어…? "

남자의 동그랗고 순해 터진 눈과 매섭게 쏘아보던 내 눈이 마주쳤다.
하나, 둘, 셋….
속으로 딱 셋을 헤아리자 남자의 눈이 비켜갔다.
그럴 줄 알았다.
남자는 삼초 이상은 절대로 나와 눈을 마주하지 않았다.
그것도 남자가 내 신경을 거슬리게 하는 원인 중에 하나였다.
휴우ㅡ
길게 한숨을 내쉬는데, 칙하는 소리와 함께 유황이 타는 냄새가 콧 속으로
들어왔다.
부들부들.
수전증 말기의 환자처럼 사정없이 떨리는 남자의 손에 들린 불에 담배를 조준하는
것은 장난이 아니게 어려웠다.
흔들리는 불을 따라 얼굴을 흔들길 몇 번, 왈칵 짜증이 밀려와 그대로 남자의
손을 움켜쥐어 고정시키곤 그렇게 흔들리는 와중에도 용케도 꺼지지 않고 버텨준
성냥의 질긴 생명력에 경의를 표하면서 담배를 길게 빨아들여 불을 붙였다.
남자는 성냥 불이 꺼진 후에도 여전히 내 손안에 잡혀있는 자신의 손을 믿을 수
없다는 얼굴로 노려보고 있는 중이었다.

입에 품고 있던 담배연기를 남자의 얼굴 정면에 내뿜곤 뻔뻔하게 물었다.

" 날씨 좋죠? "
" … 에? 예. 콜록. "

바보 아냐.
네 눈은 해태 눈이냐?
날이 좋긴 뭐가 좋아?
당장이라도 한바탕 쏟아질 것처럼 잔뜩 흐리기만 한데….
토끼처럼 붉어진 눈을 한 채 기침을 해대는 남자를 무시하곤 창 밖을 쳐다보았다.
유리창 정면에 위치한 횡단보도 앞에는 많은 사람들이 멈춰서서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 커피 어때요? 맛있어요? "

간신히 기침을 멎은 남자의 어깨가 흠칫하고 굳어졌다.

" 그… 그게…. "

또다시 남자의 시선이 이리 저리 방황하기 시작했다.
테이블 위를 배회하다가, 허공에 멈췄다가, 창쪽을 한번 봤다가….
의자 깊숙이 몸을 묻곤 남자가 하는 모양을 보고 있자니, 피식 피식 웃음이 터져
나왔다.
그나마 남자의 장점을 찾으라면, 청상유수로 입에 발린 소리를 못한다는 것
정도일까 나…?
아니다, 요즘 젊은 사람들에겐 보기 드문 국보급의 순진함도 장점이라면 장점일
수 있을 것이다.
굳이 따지자면, 생긴 것도 아주 잼뱅은 아니고, 키도 나랑 딱 어울릴 만큼 적당한
크기고, 객관적인 기준으로 보더라도 어딜 내 놔도 꿀릴 것 없는 외모도
장점이라면 장점이지 않을까…?
그 내면이야, 아직은 보장 할 수 없지만.
아/직/은/ 말이다.

" 그거 알아요? 그 쪽 벌써 두 달이 넘게 여기 오고 있다는 거? 주말을 빼곤 매일
   같은 시간에 와선 딱히 하는 일도 없이 멀뚱멀뚱 혼자서 앉아만 있다 가는데…,
   아니, 그건 좋아요. 혼자 앉아있던 둘이 앉아있던 그건 내가 상관할 일이
   아니니깐. 정말 묻고 싶은 건요, 눈은 왜 피해요? 피하는 주제에 어째서 쉴새
   없이 힐끔 거려요? "

참나.
저러다가 땅속으로 꺼지지 싶다.
엄마에게 혼쭐난 아이처럼 어깨를 잔뜩 움츠려진 남자의 어깨를 보자 한숨이
절로 터졌다.

" 고개 좀 들어봐요. 안 들어요? 나, 그냥 가요? 가도 후회 안 해요? "

가고 싶은 맘은 눈곱만치도 없으면서 정말로 일어날 것처럼 소파에 깊게 묻혀있던
몸을 바로하려 하자 그 순간 남자의 고개가 번쩍 들렸다.
웬지 잘 했어요, 하고 칭찬하면서 머리라도 토닥거려줘야 할 분위기다.

" 한번만 고개 숙이면 나 바로 일어나요. 알아서 해요. "
" 아, 아, 안 그래요. 저, 저, 절대로 아, 안 숙여요. "

남자가 맹렬하게 고개를 휘저으며 말했다.

" 더듬는 거, 그것도 하지 마요. 듣기 싫어. "

사장형은 나더러 생긴 것 하고 딴판으로 논다고 했지만,
이 남자에 비하면 나 정도는 애교였다.
청바지 모델을 해도 좋을 만큼의 쿨한 남자의 분위기는 버벅거리며
말을 더듬어대는 그 순간 바로 허공으로 흔적도 없이 사라져 버리는 것이었다.

" 그래서요? "

고개를 숙이는 대신 이리 저리로 정처 없이 방황하는 남자의 눈을 억지로 붙들어
놓곤 전후 좌우 다 잘라먹고 물었다.
남자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고 노골적으로 심호흡을 몇 번 하더니 천천히 입을
열었다.

" 하ㅡ 하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 안 들려요. "

안으로 기어들어가는 남자의 목소리에 짜증을 숨기기 않는 타박을 주자 허공을
맴돌던 남자의 시선이 똑바로 내게 와 부딪쳤다.

" 하ㅡ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

눈이 마주친 순간, 습관대로 나는 속으로 손가락을 꼽으면서 숫자를 헤아렸다.
하나, 둘, 셋….
넷이 지나고, 다섯이 지나고, 여섯이 지나도 남자의 눈은 내게서 떨어질 줄
몰랐다.
남자가 저런 강렬한 눈빛을 할 수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언제나 순해 터진 곰탱이 같아 보이던 남자의 눈이 더 할 수 없을 만큼
정열적으로 화르륵 불 타오르고 있는 중이었다.  

" 조ㅡ 아합니다!!!! "

버럭 고함소리에 있는 대로 폼을 잡고 물고 있던 담배가 뚝하고 바닥으로
떨어졌다.
어이구, 가슴이야. 잘하면 없던 애도 떨어지겠네.
기차 화통을 삶아먹었나 무슨 소리가 그렇게 큰 거야?

" 쯧쯧, 어째서 그렇게 극과 극을 달려요? 중도라는 말 몰라요? "

가볍게 혀를 차곤 새 담배를 입에 물자 남자가 재빠르게 성냥을 집어 들었다.
몇 번의 시도 끝에 간신히 성냥에 불을 당긴 남자는 행여나 꺼질 새라 양손으로
불을 감싸고는 내 쪽으로 천천히 내밀었다.

" 나 남자예요. "

다시 한번 담배연기를 남자의 얼굴에 내뱉으며 말했다.
종종 착각하는 사람들이 있긴 했지만, 나는 민증번호 뒷자리가 1로 시작하는
분명 대한민국의 건장한 남아였다.

" 압ㅡ니다. 알고 있ㅡ습니다. "

허허ㅡ
노력은 가상하구만.
더듬지 말랬더니 말 첫머리에 잔뜩 힘을 주는 남자의 말투가 어쩐지 귀엽게 들려  
실없는 웃음이 삐져 나왔다.

" 그 쪽도 남자죠? "
" 그ㅡ 렇습니다. "
" 정상 아닌 거 알죠? "

심각하게 말할 생각은 없었는데, 가벼운 말투가 나오지 않았다.

" 상ㅡ관없습니다. 좋은데, 좋아한다는데 성별이 무슨 상관입니까? 사람 사랑하는
   거, 죄 아닙니다. 나쁜 짓 아닙니다. "

사랑이라….
뭐, 가끔은 이런 신선한 경험도 나쁘진 않겠지.
동성의 남자와 사귄다는 사실이 꺼림직하긴 했지만 이 남자와 라면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뭐라 뭐라해도, 이미 돌이킬 수 없을 만큼 벌리 와 있는 내 마음이 가장 큰
문제였다.

" 확실해요? 확실히 나쁜 짓 아니에요? "
" 옙, 분ㅡ명히 아닙니다. 절ㅡ대로 나쁘지 않습니다. 절대로, 절대로요. "

두 주먹을 움켜쥔 채 필사적으로 나를 보고 있는 남자의 얼굴정면에다 입안에
머금고 있던 담배 연기를 길게 내 뿜었다.
쿨럭거리면서도, 토끼 눈처럼 충혈된 눈으로 눈물까지 흘려가면서 기침을
하면서도 남자는 내게서 시선을 돌리지 않았다.
강인하고 굳은 의지가 깃든 눈빛으로 내 눈을 잡고 있었다.
제법 긴 시간을 남자와 나는 시선을 맞춘 채 침묵했다.
이만하면 됐다.
충분했다.
아니, 충분하다 못해 넘쳤다.

" 좋아요. 증명할 시간을 주죠. 대신 나쁜 일이라고 생각되면 그 순간 바로
   끝내는 거예요. 약속할 수 있어요? "

결코 배수진을 치는 것을 잊지 않았다.
적어도 도망갈 퇴로 정도는 확보해 놓은 다음 적진에 뛰어들어도 뛰어들
작정이었다.

" 약ㅡ속합니다. 절대로 약속합니다. 정말 후회 안 하게 할겁니다. 약속합니다. "

의기충전해선 고함을 지르는 남자의 눈에서 눈물이 흘렀다.
후두둑하고 닭 똥 같은 눈물이 방울 방울 떨어져 갈색 테이블에 작은 웅덩이를
만들었다.

" 울어요? 왜 울어요? "

이봐, 당신.
소심하다 못해 울보까지야?
너무 심한 거 아냐? 당신 혹시 무늬만 남자 아냐?
하도 어이가 없어서 묻자 소매로 얼굴을 쓱 문지른 남자가 먹먹한 목소리로
더듬더듬 말했다.

" 너무… 기쁩니다. 너무… 행복합니다. 처, 첫사랑입니다. 처음으로 좋아진
   사람입니다. 그, 그게 이뤄지다니…. 정말로 이뤄지다니…. 도,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당장 죽어도… 여, 여한이 없습니다. 정말… 여한이
   없습니다. "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앞으로 가야 할 길이 너무 험난한 듯해 지끈 뒷골이
당겼지만 후회해도 때는 늦었다.
이미 화살은 활을 떠난 뒤, 오로지 앞으로 나가는 길만이 남아있을 뿐이었다.
어쩌면 남자의 슬쩍 비켜가는 시선에 신경을 거슬려 하는 그 순간부터 이미 이런
결말이 준비되어 있었을지도 모를 일이었다.
이렇게 만나는 것이 남자와 나의 운명일지도 모를 일이었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치자, 어딘지 묶여 있던 마음의 매듭이 풀어지는 것 같이,
조금은 느긋한 기분이 되었다.

" 그건 안되겠는데요. 죽으면 내가 곤란해요. 나도… 처, 처음으로 좋아진
   사람이거든요. "

어쩐지 수줍은 기분이 들어 말꼬리가 저절로 흐려졌다.
사람,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내 평생, 이렇게 말을 더듬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사장형이 이 꼴을 본다면 사박 오일은 안주 삼아 씹을 일이었다.
다행이었다, 사장형이 없어서.
그대로 숨이 넘어가는 것이 아닌지 걱정스러울 만큼, 남자는 오랜 시간동안을
숨을 멈춘 채, 입을 뻥하니 벌리고 있었다.

" 파리 들어가요. "

농담 같지 않은 썰렁한 말을 던지며 남자의 턱을 툭하니 쳐선 입을 다물게 만든
다음, 남자에게 히죽 한번 웃어주었다.
남자의 입술이 천천히 벌어졌다.
나를 흉내내듯 작게 벌어지던 입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벌어지더니 결국
귀에 걸릴 만큼 크게 벌어졌다.

나는 그때 사람이 눈물을 흘리면서 짓는 웃음이 그렇게 아름다울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울면서도 기쁘게 웃을 수 있다는 사실을 그때…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 목 말라. 냉장고에서 콜라 하나만 갖다 줄래요? 컵을 필요 없으니까 캔 채 들고
   오면 돼요. "

말이 끝나기 무섭게 남자의 몸이 움직였고, 나는 다리를 꼰 채 느긋하게 팔짱을
끼고 앉아 남자의 하는 양을 보았다.
말 잘 듣는 하인 하나를 둔 것 같아서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아니다, 하인이라 하기엔 너무 귀티나게 생겼으니… 그래, 기사 정도로 해두자.
너무 행복해서 당장이라도 날아 가기라도 할 것 같은 표정을 하고있는 남자와
눈이 마주쳐 살짝 손을 흔들어주었다.
화르륵, 남자는 얼굴을 붉혔고, 내 심장은 난데없이 폭주하기 시작했다.

뭐냐…?
발목을 잡았는 줄 알았더니 사실은 잡힌 거였냐?
미친 듯이 폭주하는 심장을 진정시키려 심호흡을 반복해보았지만 효과가 있을
턱이 없었다.


    
                                                                      End.
  




" 나, 이지수. 당신은? "

생각해보니 남자의 이름도 모르고 있었다.

" …타… 타. "

또다시 더듬기 시작한 남자의 말투를 못 들은 척 해주었다.
뭐, 첫술에 배부르겠어? 차차 가르치면 되겠지.
가르치는 보람이란 것도 있는 법이니깐.

" ……타? 이름이 타? 성은? "
" … 가, 강타. "
" 풋!!!!!! "

저런 저런.
예의에 어긋나는 걸 뻔히 알면서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다.
이런 반응에 익숙했는지 남자는 겸연쩍은 얼굴로 뒤 머리를 긁적거렸다.
그런 모습이 더 웃겨서 허리를 잡고 웃다가 혹시나 싶어 물어보았다.

" 혹, 별명이 칠현이? "
" ……예. "



주행연습을 마치고 돌아온 사장형은 카운터에 앉아 낄낄거리고 있는 나와
어색하게 웃는 얼굴로 손님들 사이를 누비고 있는 강타를 몇 번이고 번갈아
보더니,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어깨를 한번 으쓱해보이곤 다시 밖으로 나가
버렸다.

뭐, 케세라세라.
끝이 좋으면 다 좋은 거 아닌가?

에? 틀려?



                                                                정말로 끝.



<BabyAlone의 코멘트>

하나 일러두어야겠습니다만,
쿨 엉아, '대한민국 민증번호 2로 시작하는'이라고 쓰셨지 뭡니까.
마감 때문에 정신이 없으셨을 테니, 이해해 드립니다요.
그리고 당신 시리어스 전문 작가라는 말 취소할게.
상큼 발랄 유쾌한 게 딱이야요.
쿨 엉아가 강타 팬들에게 죄송타고 전해 달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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