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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oot9
2002년 여름 이벤트 : 부비트랩

            
2002 바빌론 여름 이벤트 Six Gong Stories
F타입


                           부비트랩 (booby trap)  


                                  by root9





booby trap == 건드리면 폭발하도록 임시로 만든 간단한 장치.



1

뜨거운 태양이 그 위세를 떨치고 있는 7월의 어느 토요일 오후 두시다.
아스팔트가 달아오를대로 달아올라 거리를 걷고 있는 사람의 에너지까지
훔쳐낸다. 아스팔트 위에 삼겹살 한조각을 올려놓아도 지글지글 그 특유의
기름기를 흘리며 금세 익어버릴 것 같은 그런 날이라 불쾌지수 또한 만만치 않다.

길가에 늘어선 플라타너스 나무들이 위세당당하게 그 푸르름을 내세우지만
뜨거운 뙤약볕은 피할 그늘을 만들기에는 태양의 위치가 머리위다.
자신의 건재함을 과시라도 하듯 태양은 오만하기만 하다.
한줄기 소낙비라도 쏟아져 주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으로 하늘을 쳐다보기도
하지만 구름 몇점 고즈넉하게 떠있는 하늘은 그런 사람을 비웃듯이 청명하기만
하다.

이런 뜨거운 거리를 걸을 사람은 더위만큼 뜨거운 혈기를 자랑하는 학생들이나,
생명과 관계되는 다급한 일이 있는 사람외에는 제정신이 아닌 사람 뿐일거다.

옮기는 걸음걸음마다 무거운 추를 다는 모냥 점점 더 걸음이 느려진다.
아침에 칼날같이 다려입은 와이셔츠는 등줄기부터 척척하게 젖어 휘감겨왔고,
자신의 몸에서 나온 땀냄새가 호흡을 괴롭혔다. 목을 옥죄고 있던 넥타이는
어느새 한뼘가량 늘어져 덜렁거리며 걸음에 맞춰 느린 리듬으로 움직인다.

반나절의 일의 마치고, 오후의 게으른 나태함을 기대하며 퇴근한 해룡은
뜨거운 거리를 걸으며 기어코 짜증을 터뜨렸다.

퇴근할 때 머리속에 세워둔 오후의 일정은 이렇게 뜨거운 아스팔트를 걷는 것이
아니였다.
알맞게 익은 오이소백이에 점심밥을 배부르게 먹고 따신 밥을 먹느라 송글송글
코위에 맺힌 땀을 닦아내는 샤워를 하고, 선풍기 한 대 틀어놓고, 늘어지게
긴듯한 낮잠을 자는 거였다.
그리고 해가 기우는 저녁 나절이 되면 오랜만에 서경을 만나 냉방이 잘되는
호텔에서 뜨거운 섹스 한판으로 마무리하는 환상적인 스케줄이었다.

그런데, 바람나 집나간 똥개 한 마리 찾는 꼬락서니처럼 이 더위에 진룡을 찾으러
뜨거운 아스팔트길을 걸어야 하는 것이 못내 못마땅하기만 하다.

뙤약볕아래 공용주차장에 차를 주차시킬때만 해도 간단한 계획이었다.
큰 길을 건너 가벼운 마음으로 인사를 하러 가게 문을 열었을때만해도 콧노래를
흥얼거렸었다.
그저 다녀왔습니다. 하는 간단한 인사만 전한후에 휭하니 이층으로 올라가려하던
가벼운 마음은 무거운 표정의 아버지의 얼굴을 본 순간 사라져 버렸다.

" 진룡이 어제도 안들어왔다. 그리고 오늘 학교에도 안나왔다고 하더구나. "

그래서요? 라는 말이 먼저 튀어나올뻔 했다.
아버지의 등뒤에서 해룡의 눈치를 보며,
근심이 가득 쌓인 어머니의 무거운 어깨를 보기 전에는 말이다.

" 요즘 자주 외박도 하는 것 같은데, 그 집에 너가 한번 가봤으면 좋겠다. "
" 예? "

편안한 휴식의 기대로 차있던 부푼 마음에 벽돌 하나가 얹혀졌다.
투덜거리는 표정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해룡의 얼굴을 쳐다보는 아버지의 목소리는
조용조용하지만, 힘이 잔뜩 실려있다.
강제로라도 해룡을 보내기라도 할듯한 강압성이.

" 이따 저녁에 한번 가볼께요. "
" 지. 금. 갔다 오거라. "

안간힘을 다해서 잔머리를 굴려보려고 했다.

" 아직 점심도 안먹었는데요. "

불쌍한 표정을 지으며 어머니를 건네다보았지만, 진룡에 대한 걱정이 하나가득인
어머니는 해룡의 그 표정을 단호하게 외면했다.

" 그럼ㅡ 샤워라도……. "

늘 자상하기만 하던 아버지의 눈초리가 매서워진다.

" 네. "

해룡의 대답이 떨어지자마자 아버지는 주소가 적힌 종이 한 장을 건네주고,
어머니의 표정은 방금전의 외면이 무색하게 밝아진다.

" 밥은 잘 먹고 있는지, 혹시 무슨 일이ㅡ 있는건 아닌지
   아프지는 않은지 꼼꼼히 살펴. "

혹시라도 예전에 똘마니들과 어울리는 것이 아닐까 하는 염려가 배여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꼼짝도 하기 싫ㅡ다.

그러나 평상시에 뺀질이로 유명한 해룡이라도 아버지의 단호한 입매와 어머니의
안달하는 표정을 무시할 수가 없었다.
저절로 한숨 한자락이 폭 바닥으로 떨어져 내린다.

차를 타고 갈까?
가게 현관문 앞에 쫒기듯이 내몰리고 나서 길건너 이글거리는 태양아래 주차되어
있는 흰색 엘란트라를 쳐다보니 김이 모락거리는 것 같았다. 방금 주차를
마쳤건만, 한껏 달아오른 검은 씨트와 다시 뜨끈함과 에어콘의 찬 바람이 만나는
그 어쩡쩡한 불쾌감을 참을수가 없을 것 같았다.
손안에 들린 주소를 살펴보니 그리 멀지 않은 거리다.

해룡은 걷기로 마음먹었다.
그러나 걷기 시작한지 삼분도 안되어 해룡은 후회하기 시작했다.

날은 지독히도 뜨거웠다.
달아오를대로 달아오른 아스팔트의 열기가 해룡을 집어 삼킬 듯이 격렬한 기운을
드러냈다. 왜 언덕을 지나야 한다는 사실을 깜빡했을까?

거리를 지나가는 교복을 입은 학생 몇몇이 아이스크림을 빨고 희희낙낙하며
무리지어 가는 모습을 보고는 기막힌 표정을 지었다.
이런 무더위에 히히덕 거릴 수 있는 저들의 체력이 놀라울따름이었다.

언덕위에 다다르자 갈증이 더 심해진 것 같았다.
차라리 작은 슈퍼에라도 들려 학생들처럼 싸구려 아이스크림이라도 먹어볼까?

해룡은 방금 단맛이 뚝뚝 떨어지는 싸구려 아이스크림을 한입 물어보기라도 한
듯이 이마를 찡그리며 고개를 흔들었다.
흘러내리는 지독한 땀에 이마를 가리던 머리칼이 젖어왔다.

아마 오전내내 신경을 곤두세운 장거래 때문인지도 몰랐다.
시원한 에어콘이 전기세 걱정없이 빵빵 틀어나오는 은행에 한구석에서
조마조마하게 모니터를 노려보며, 마지막 결단을 내릴때까지의 두뇌회전은
많은 에너지를 필요로 한다.

결국 장 마감을 했을 때, 크게 손해보지 않은 정도에서 마무리를 지었지만
해룡은 과장의 닥달이 피곤하기만 했다. 요즘 같아서는 장은 장대로 별로였고,
과장은 과장대로 안달이어서 피곤하기만 한 날들이었다.

또다시 단정한 이마를 흘러 귀 옆으로 땀방울이 흘러내리는 것을 느꼈지만
더 이상 손수건으로 닦고 싶은 마음조차 없다. 손수건조차 후줄그레해진 것은
이미 오래였으니까.
무테안경이 땀으로 자꾸만 미끄러져 내려왔다.

뜨거운 열기에 호흡이 턱턱 막혀온다.
누구라도 시비를 걸어온다면, 드잡이라도 할 만큼 불쾌감이 팽팽해진다.

얼음이 가득 담긴 아이스티 한잔이 간절하다.





2

가깝다고 생각했던 그 집까지 오는데, 십오분이란 시간이 흘렀다.

커다란 철제 대문 앞에서 해룡은 이미 축축해져 불쾌할 따름인 손수건을 들어
꼼꼼히 땀을 닦았다.
짜증스런 시선을 애써 다스리고, 신경질적으로 구겨졌던 미간의 주름도 폈다.  
그리고 길게 호흡을 뱉은후 서서 호흡처럼 길게 벨을 눌렀다.

[ 누구십니까? ]

목소리를 듣는 순간 짜증부터 왈칵 치밀었다.
몸안에 있는 수분까지도 증발될만큼 거리를 지치듯이 걸어온 해룡에 비해
인터폰을 통해 들려온 목소리에는 시원한 물기가 묻어있다. 그러나 어딘지
경계심이 잔뜩 묻어 있는 목소리이기도 하다.
이런 커다란 집에 사는 사람에게는 일상적인듯한 그런 경계심.

" 진룡이--- 여기 있습니까? "

최대한으로 예의를 갖추기 위해 해룡은 안간힘을 다해 정중히 물었다.

철컥!
쇳소리를 내며 대문이 열렸다.
있다는것인지 없다는 것인지 더 이상 아무런 대화가 없다.
안에서 사람이 나올때까지 잠시 기다릴까 하다 해룡은 망설이다 대문을 슬쩍
밀어보았다.

일단계 통과!

담장을 따라 커다란 키를 자랑하는 나무가 시원하게 가지를 늘어뜨리고 있다.
키작은 여름꽃도 피어있고, 꽤 정성을 드린 그런 정원이었다.
돌계단을 천천히 걸으며 해룡은 천천히 정원을 살피며 가격을 메겼다.
꽤 돈을 쏟아 부었을직한 그런 정원이다.

해룡의 안에서도 경계경보가 움직이기 시작했다.
미리 진룡에게서 작은 단서라도 얻어두지 않은 것을 지금 후회를 하고있다.

천천히 돌계단을 다 오르자 현관문을 열어놓고, 벽에 삐딱하게 기대여 느슨히
팔짱을 끼고 있는 장신의 사내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사내는 온몸의 세포 하나하나가 시원하게 냉장되었다가 나온 듯 건강하고
탄력있어 보였다.

날이 설 정도로 바짝 깎은 머리가 노란색으로 염색한 듯이 태양아래서 눈이 부셔
부셔 해룡은 눈을 찌푸렸다.
제법 운동이라도 했는지 널찍한 어깨와 날렵한 눈동자가 해룡을 살피고 있었다.
게다가 눈밑으로 지나간 흉터 자욱이 사납기 그지없는 인상이다.
팽팽하게 긴장된 근육은 금세라도 튀어나올 듯 머리위의 태양처럼 위세당당하다.

해룡은 지친 듯 더운 숨을 몰아서며, 더위에 주눅들어 구부정했던 허리를 곧게
폈다.

눈높이가 얼추 맞았다.

" 지금 어디 있죠? "

남자의 여유있는 모습에 저도 모르게 해룡의 말속에 짜증이 툭툭 묻어난다.
남자의 시선이 해룡을 훑어 내린다.

인터폰 영상을 통해 남자를 보던 순간부터 원재는 강한 호기심을 느꼈다.

현관으로 들어서는 남자를 언뜻보니 하얀 반팔 와이셔츠에 목에 달랑거리는
넥타이까지 영락없는 샐러리맨이다. 키는 훌쩍 크지만, 호리호리한 몸매에
셔츠 아래로 드러난 팔은 햇볕을 받지 못해 하얗다.

수분이 말라 벌어져 있는 입술.
셔츠 첫단추를 끌어 놓아 그 안으로 살짝 보이는 목선으로 흘러 내리는 땀방울.
앞머리가 땀에 젖어 단정한 이마에 착 달라 붙어 있다.
그런데 순간 더위에 잔뜩 지친 강아지 같은 몰골의 남자가 풀어놓은 와이셔츠
첫단추 아래로 드러난 긴 목선과 땀이 흘러내려 번들거리는 피부가 묘하게도
섹시해보인다.

원재는 탐색을 멈추지 않고, 남자의 움직임을 유심히 지켰다.

" 실례지만, 누구신지……. "

먼저 대문부터 열어주고 난 후의 질문이라 이상하지만, 명백히 도전하는 음색으로
물었다. 집안으로 들여보내기 전에 검사를 해야한다는 뜻인가?

" 둘째입니다. "

해룡은 짜증을 억지로 감추며 바지 뒷주머니에서 지갑을 꺼내 명함 한장을 꺼내
원재에게 꺼내주었다.

한글이 어색한 원재가 알아본 것은 은행이란 글자와 이름이 다였다.

재일 은행?
신경질적인 입매와 턱선을 보아 은행원라는 직업이 의외로 남자와 잘 어울릴 것
같았다.

나 해룡.
이번엔 바다ㅡ 용?

원재는 웃음이 치미는 것을 겨우 참았다.
진짜 용. 그리고 바다 용. 그럼 첫째는 무엇일까?
뜬금없이 떠오른 세룡각 주인의 작명센스에 웃음을 흘릴뻔했다.

용둥지에서 또 한 마리가 나왔군.

" 그쪽은? "

해룡의 말투도 도전적이다.
이쪽을 물어봤으면 그쪽도 내놓을 것은 내놓으라는 투다.

" 이원재입니다. "

원재는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 모습에 겨우 다스렸던 신경질이 불끈 솟아 해룡은 시비조를 숨기려 하지
않는다.

" 요즘 집보다 이곳에서 많이 머문다해서, 보러 왔습니다. "

원재는 해룡이 집안으로 들어설 수 있게 몸을 세운후 현관문을 열었다.

이단계도 통과!
해룡은 집안으로 들어섰다.

해룡의 이마에 송글송글 땀이 맺혀 있다.
시원하게 냉방이 잘된 실내로 들어서자 해룡은 손바닥으로 땀을 살짝 훔쳐낸다.

장식품도 없이 대형 텔레비젼하나만 달랑 놓여져있는 거실을 해룡은 빠르고
꼼꼼히 살폈다.  
용도를 알수 없는 나무 문이 세 개.
저 안 어디엔가 진룡이 있을것이다.

등뒤로 현관문을 닫자 마루로 올라선 해룡이 긴장한 듯 뒤를 돌아보자
원재는 여유만만하게 웃었다.

소심한 샌님!
그것이 해룡의 첫인상이었다.

" 뭐, 마실거라도? "
" 아닙니다. 먼저 진룡이를 보고 싶습니다. "

지금 올라가봐야 좋을것이 없을텐데…….
원재는 곤란한 듯이 엄지와 검지 두 손가락으로 턱을 문질렀다.
그리고 저 수분이 말라버린 입술이 신경이 거슬렸다.

" 지금 이층에 있습니다만ㅡ "

삐딱하게 기대여 서 느슨하게 팔짱을 낀체 턱선을 만지는 원재를 잔뜩 못마땅한
눈으로 해룡은 쳐다보았다.

너무 빡빡하군.  이런 의미가 묻어 있는 시선이었다.
해룡은 그런 원재의 시선을 무시하고, 마루바닥에서 걸음을 옮겼다.

" 올라가서 오른쪽 방입니다. "

너가 굳이 가겠다면야ㅡ
갑자기 반짝 하고 원재의 눈빛이 빛났다.

저 짜증이 뚝뚝 떨어지는 해룡이 해루의 방안을 보고 난 후의 표정이 어떻게
변할것인가가 참을수 없이 궁금해졌다.
오랜만에 느껴보는 장난끼에 원재는 즐겁다.

그 동안 건방진 진룡에게 받았던 스트레스가 한꺼번에 해소되는 듯 기분이
유쾌해져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어졌다.

예리한 시선으로 원재를 마땅치 않은 시선으로 훑어본 해룡이 용감하게 등을
돌리더니 이층계단을 밟는다.

크크크크.

원재는 속으로 천천히 숫자를 세기 시작했다.

하나…… 두울…….

밤을 세워 피아노를 친 해루였다.
이제껏 연주중에는 들어갈수 없는 피아노 방안에 해루는 진룡을 들여놓았다.
언제나 자신에게는 금지되어 있던 그곳에 고작 진룡이 들어섰다는 사실이
불쾌했었다.
피아노 방에 들어갈수 없는 원재는 밤새워 들리는 피아노 소리를 원재는
이층 계단 턱에 앉아 들었다.

어젯밤에는 음란하면서도 자극적인 피아노 소리가 끊이지 않고 들려 원재의 피를
들끓게 했다. 중간중간 끊기는 피아노 소리 사이로 계단아래까지 들려오는 피아노
소리만큼 음란한 신음소리.

어쩌면 그 탓인지도 모르겠다.
저 얌전해 보이는 샌님이 어떤 충격을 받을지 뻔히 알면서도 이층으로 안내해 준
것은.

세엣…… 네엣…….

피아노 소리가 중간에 멈추었을때마다 손등이 시퍼렇게 변할까지 주먹을
움켜쥐었었다. 해루가 다시 살아나는 것은 좋지만, 그것이 저 난데없이
날라들어온 용 한 마리 때문이라는 것은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늦은 아침으로 방문 앞에 샌드위치를 날라 주었지만, 두사람이 잠자리에서
깨어났을지도 미지수였다.

다아섯…… 여어어어섯 …….

저 샌님이 과연 어떤 표정을 하고 내려올까?
원재는 갖가지 표정을 그려보며 벽에 등을 기대고, 팔짱을 낀체 느긋히 계단을
쳐다보았다.

이이일곱…… 여어어어덟…….

역시 후다닥 당황한 발걸음이 들려온다.
원재는 팔짱을 풀고 천천히 벽에 기대였던 몸을 세웠다.

아홉…… 여얼!
열을 끝내기도 전에 시뻘겋게 상기된 얼굴로 계단을 다 내려온 해룡이 주방으로
달려들어간다.

푸하하하.
원재는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3                

처음 집안에 들어섰을때의 예의바름은 간데없이 사라졌다.
황급히 멋대로 냉장고 문을 열더니 안에서 생수 한병을 꺼내 벌컥벌컥 마셔댄다.

원재는 주방 앞에서 움직이는 목울대를 쳐다보았다.
물 몇방울이 입가에서 흘러나와 목선을 타고 흘러내려가자 홀린 듯이 그 물방울을
따라 시선이 따라간다.

이상한 날이었다.
고작 물방울과 땀방울에 시선을 빼앗기다니…….

물을 숨도 안쉬고 들이킨 해룡이 손등으로 입가를 훔쳐내자마자 대뜸 따지듯이
물어왔다.

" 탑이야? 바텀이야? "

의외였다.
저런 샌님에게서 저런 말이 나온 것은 정녕 의외였다.
주어도 숨기고 물어오는 말에 대답을 하기 위해 원재는 천천히 숨은 뜻을 살폈다.

원재에 입가에 메달려있던 가벼운 웃음이 사라졌다.
금세라도 싸움이라도 걸어올 듯이 해룡의 호흡이 거칠다.

" 당연히 탑이겠지? "

마지막 카드를 기대감으로 확인하고자 하는 안간힘으로 해룡이 물었다.
이번엔 원재는 숨은 뜻을 알아챘다.

" 아니, 바텀! "

해룡의 기대를 무참히 박살내는 원재의 대답에 해룡의 턱이 한치는 떨어져
내린다.

" 하! 벼엉신. "

해룡이 다시 급하게 생수병을 들고 벌컥벌컥 들이킨다. 그러나 조금전에 상당히
많은 양을 들이킨 터라 남아있는 병은 금세 바닥을 드러낸다.
물양이 적어 아쉬운 듯 병을 탈탈 털어댄다.

충격이 만만치않은 모양이다.
하긴, 자기 동생이 벌거벗은채로 얽혀 있는 것을 그것도 같은 머스마랑 얽혀 있는
모습을 방금 보았는데, 놀라지 않을수 있겠는가?
나, 바른생활 사나이다. 라고 명패를 붙인 듯 살아온 샌님인 경우에는 더더욱.

" 그럼 당신도 바텀인가? "

한방울의 물이라도 더 마시려는 듯 빈 물통을 들여다보다 갑자기 생각난 듯이
물어오는 해룡의 대답에 이번엔 원재의 턱이 반치쯤 툭 떨어졌다.
럭비공처럼 뜻밖의 방향으로 몇단계 훌쩍 뛰어 넘어 튀어간 대화다.

무테 안경아래 날이 선 눈빛이 번뜩인다.
농담은 아닌 것 같은데…….
원재는 또다시 곤란한 듯 턱을 긁적거리며 해룡의 의중을 파악하려고 애를 썼다.
주어도 수식어도 빠진 한국말은 알아듣기가 힘들다.

" 당신 진룡이 파트너 좋아하는거 아니였나? 형재는 아닌 것 같은데ㅡ "

왜? 내말이 틀려? 하는 시비가 명백히 드러나는 해룡의 말이였다.

꿈틀!
원재의 미간이 심하게 꿈틀거렸다.
고작 10분 정도 마주한 것 같은데, 저 샌님은 벌써 원재의 가슴 속 깊이
비밀금고에 숨겨놓은 사실을 바로 알아챘다.

" 아니. "

모욕을 당하기라도 한 듯 원재는 심하게 인상을 구겼다.

" 그쪽이라면ㅡ 내가 대줄수도 있지. "

아마 그것은 도전 같은 거였을거다.
너가 감히 내 비밀금고에 단번에 쳐들어 오다니.
혹은 너같은 샌님이 할수 있을꺼냐?
아니면 지나치게 더운 7월의 오후의 장난이었던지.
이런 속내가 고스란히 눈빛에 드러나 해룡을 쳐다보았다.

시선과 시선이 얽혔다.
감히 너가?
ㅡ하는 비웃음이 담긴 원재의 도전과 안경너머로 생각을 감춘 해룡의 우물같은
눈이 허공속에서 얽혀 들었다.

저 생각을 알수 없는 날이 바짝 선 눈이 무슨 생각을하는지 원재는 알고 싶었다.
그러나 몇초, 아니 몇분동안 탐색전을 벌였지만, 그 뿌연 눈동자는 제 색을
드러내지 않는다.

위ㅡ험ㅡ하다.
최초의 위험을 느낀 것은 그 순간이었을거다.
그러나 원재는 가볍게 무시했다.

" 그래? 방이 어디지? "

하!
이번엔 원재가 큰소리로 탄식을 할뻔 했다.

정말 하겠다고?
너가?
ㅡ그 탄식에는 이런 의미가 숨어 있었을꺼다.


" 계단 옆에 문! "
" 안에 욕실은 있겠지? "

이번에는 해룡이 하얀 이를 드러내며 씨익 웃었다.
그런데 그 웃음이 일말의 거리낌도 없이 당당하기만 하다.

언제부터인가 존칭을 생략한 대화를 하는 두 사람은 그런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고 훌쩍 훌쩍 건너뛰는 서로의 대화 내용을 따라가기에 모든 신경을
집중했다.

여전히 팔짱을 낀채 해룡을 대하는 원재는 정말? 이라는 눈으로 여전히 해룡을
주시했다.

샌님이었다.
분명 원재의 시선속에 드러난 해룡의 정체는 샌님이었다.

탑과 바텀까지는 우연히도 알았더라도, 지금의 이 화두는 샌님에게는 위험한
화두였다.

하얀 셔츠가 비록 땀에 절어 흐트러져 있지만,
목을 죄고 있던 저 넥타이가 이 무더운 여름에 퇴근후임에도 불구하고
느슨하긴 하지만 아직 메달려 있는것도 그렇고,
은행이름이 찍혀있는 명함도 그렇고,
제대로 볕한번 받아보지 않은 것 같은 드러난 팔을 봐도 그렇고,
분명히 샌님이었다.

그런데, 원재는 이 상황이 싫지가 않았다.
어쩌면 도발에 넘어와라. 하는 마음과 진룡의 건방짐과 해루를 빼앗겼다는
상실감에 치졸한 복수심이 얽혀 있었지만, 이상하게도 이 상황이 싫지 않았다.

해룡이 얽힌 시선을 풀더니 원재 옆을 일부러 가볍게 스쳐 지나간다.
와이셔츠 소매가 원재의 팔뚝을 스치며 바람을 일으켰다.

땀냄새와 섞인 남자의 향취가 열기와 함께 훅 하고 끼쳐오자 흥분이 제 혼자
척추를 달리더니 아래로 돌진한다.
원재는 그순간 불끈 흥분하는 분신을 느끼고 말았다.

쿡!
웃음이 터질 것 같았다.
탑을 하겠다고?
쿡!쿡!
아무리 충격이 심했다 하더라도 탑이라니?

등뒤로 방문이 닫히는 소리가 나자마자 원재는 참지 못하고 웃음을 터뜨렸다.

집안은 냉방이 잘 되어 있었지만, 밖은 머리가 녹아내릴 정도로 더운 날이었다.



                  

4                      

원재는 더 이상 웃을수 없었다.
샤워를 막 끝낸 해룡이 피부에 물기만 묻힌채 빈몸으로 걸어나오자
원재의  얼굴에 남아있던 웃음의 잔재가 사라졌다.

물을 잔뜩 흡수하기라도 했는지 탱탱하게 되살아난 해룡의 피부는
집안에 들어설때의 그 지친 기색은 찾아 볼 수가 없다.

타올로 중요부위를 가리지도 않고, 당당히 원재 앞에 해룡이 섰다.
이번에는 원재의 목울대가 심하게 일렁였다.

" 정말 하겠다는 거야? "
" 왜? 댈 자신이 없나보지? "

차가운 무테 안경이 사라진 건조한 눈이 원재를 쏘아본다.
벌거벗은 사람은 해룡인데도 불구하고 더 자신만만하게 원재를 쳐다본다.

" 아니. 그런데 감당할수 있겠어? "

원재의 시선이 해룡의 나신을 훑어 내린다.
검은 음모사이에 서있는 그것은 얌전하기만 하다.
한동안 그것을 쳐다보던 원재의 시선이 다시 해룡의 눈과 마주쳤다.

그 여리여리한 몸으로 자신을 안을수 있겠냐는 무시의 시선이었다.
그런데 그 순간 해룡이 씨익 웃는다.

" 두껑은 열어봐야 알지. 긴말 말고 벗어! "

서로가 서로를 도발하고 있다.
원재는 해룡과의 시선을 풀지 않고, 천천히 웃옷을 끌어 올렸다.
베이지색의 니트가 머리위로 훌렁 벗겨지는 잠깐동안만 두사람의 시선이 떨어졌다.

원재의 맨몸이 조금씩 드러났다.
해룡은 이상하게도 여유만만하게 웃으며 원재의 움직임을 쳐다보고 있었다.
밀폐된 방안에서 벌거벗고 서있으면서도 전혀 긴장감이없다.

바지 버클에 천천히 손을 대면서 원재는 이제라도 해룡이 항복 선언을 해주기를
바랬다. 그러나 바지 지퍼를 내리는 그 순간까지도 해룡은 여전히 알 듯 모를
듯한 미소만 걸치고 있었다.

바지가 엉덩이 밑으로 내려가는 순간 해룡이 몸을 갑자기 돌렸다.
원재는 해룡이 항복 선언을 하는 줄 알고 안도하는 동시에 긴장했다.
요만쯤이 좋았다.
더 이상은 서로가 위험했다.

마치 아슬아슬하게 언덕에 걸쳐있는 브레이크가 잠기지 않은 자동차처럼.
조금만 움직인다면 언덕아래로 무시무시한 가속도를 붙이고 돌진할 것 같은
그런 아슬아슬함.

다시 원재의 목울대가 긴장으로 울컥했다.

그러나 등을 돌린 해룡이 벗어 놓은 옷을 뒤져 찾아낸 것은 의기양양한 미소와
함께 은박지에 쌓인 콘돔이었다.

" 뭐가 이렇게 늦어? 벗겨줘? "

손안에 콘돔을 쥔 해룡이 성큼 원재에게 다가오더니 다짜고짜 팬티 위로
원재의 남성을 억세게 잡아챘다.

" 헉! "

그리고 해룡의 입술이 독수리처럼 원재의 입술을 찾았다.

원재의 호흡까지 삼키는 키스였다.
꾸밈없이 바로 원재의 혀를 찾아내 돌진하는 그 공격성은 분명 샌님의 그것은
아니었다. 야수의 그것을 닮은 직진성과 공격성이 그 키스에 묻어 있었다.

저도 모르게 온몸을 긴장한 듯이 힘을 바짝 주고선 벽에 두손을 착 붙이고
키스를 받던 원재도 해룡의 어깨를 끌어 안았다.

마치 전사의 싸움과도 같은 키스였다.
서로가 서로에게 영역을 선포하는듯한 거친 키스.
한치의 양보가 자신의 영역을 내줘야 할지도 모르는 치명적인 전투를 하는
사람마냥 거칠게 두 사람은 돌진하기만 했다.

우위권을 차지하려는 수컷들의 싸움이었다.

하아. 하아.
입술이 떨어졌을 때 두 사람은 모자란 산소를 들이키기 위해 급하게 어깨를
들썩이며 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시선은 서로를 노려보며 떨어질줄 몰랐다.

언덕 아래로 차가 내려가기 시작했다.
처음엔 느리게 시작한 그 속도가 언덕이 길어질수록 가속도가 붙기 시작한다.

해룡의 손이 아슬아슬하게 걸쳐 있는 원재의 팬티를 내렸다.

" 처음인가? "
" 대주는 것은. ㅡㅡ그쪽은? "

코끝이 맞닿을 정도로 두 사람의 거리가 가깝다.
뜨거운 호흡이 서로의 목덜미와 귓가에 쏟아져내려 서로를 자극한다.

" 글세… "

입꼬리를 말며 싸늘한 미소를 지은 해룡이 천천히 아래로 미끌어져 내려간다.

팬티가 내려간 자리에 적나라하게 드러난 몸의 중심.

거친 솔밭을 지나ㅡ
덥석!

원재의 반쯤 일어선 물건이 해룡의 입안으로 들어간 순간 원재는 질끈 눈을
감았다.
어쩌면 처음 현관 앞에서 긴 목덜미를 본 순간 이렇게 될 것 같다는 생각을 한
것도 같다.

어느 순간 능숙하게 펠라를 하는 해룡의 뒤통수를 잡았다.

서늘한 손이 엉덩이 주변을 배회하다 어느 순간 씨감자 두가마니가 있는 영역을
침범한다.

" 하아. "

거친 신음이 저도 모르게 흘러나왔다.
글쎄…… 라는 대답의 정답은 무엇일까?
원재는 점점 더 달아오르는 자신을 느끼며 해룡의 말에 숨은 속뜻을 찾아내려고
애를 썼다.

고작 펠라에 가고싶지 않았다.
겉보기와는 다르게 이 녀석 경험이 있다는건가?

때로는 교묘한 혀 놀림으로 때로는 날을 세운 치아로 원재를 농락하는 해룡의
솜씨는 프로의 그것 같았다.
아찔한 흥분이 척추를 치달아 이성을 마비시킨다.

그리고, 원재는 끝내 자신을 추스리지 못하고 해룡의 펠라에 지고 말았다.
쾌감을 느끼는 순간 낭패감이 동시에 찾아왔다.

냉수를 들이킬때처럼 목울대를 천천히 움직이며 일어선 해룡이 천천히 씨익
웃는다.

" 상처가 제법 많은데 그래? "

집게 손가락으로 상반신의 상처를 쿡쿡 누르며 장난이라도 하듯 해룡이 입을
열었다. 옆구리를 천천히 따라가는 손가락의 느낌에 오싹해진다.

" 오래 굶었나봐? "

빈정거리는듯한 저 말투. 그리고 생기를 되찾은 저 까만 우물같은 눈.
차라리 입이라도 닥치라고 하고 싶었다.

" 가서 엎드려. 본격적인 게임을 하자고. "

해룡의 여유만만한 속삭임이 뜨거운 입김과 함께 귓볼을 머물렀다.
그리고 잠시후에 살짝 귓볼을 깨물리자 원재는 자즈러질 듯이 놀랐다.

잔뜩 긴장하며 원재는 해룡이 시키는 대로 침대에 다가가 자세를 잡았다.
분명 도발은 원재가 시작한것이지만, 웬지 속은 듯한 기분.
원재는 뱃속을 휘젓는 흥분속에서 그런 생각을 했다.

언제 공격이 들어올지 대비하는 긴장감과 부스럭 거리는 은박지 소리가 등뒤에서
들려오자 저도 또다른 흥분이 척추를 달린다.

해룡이 등뒤로 다가온 기척이 들린다.
처음의 공격적인 키스처럼 바로 시작할 것 같았는데, 의외로 뒷목덜미로 시원한
입술이 와 닿는다.

" 상처가 정말 많군. "

낮은 목소리. 그리고 천천히 등뼈를 따라 입술이 움직인다.

히끅!
더 이상 놀라지 않을거라고 생각했었는데ㅡ
원재는 등이 성감대가 될수도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입술이 한번 닿을때마다 머리끝이 설것같은 흥분감이 내내 원재를 괴롭혔다.

" 빨리 해. "

참을 수 없을만큼 흥분된 원재가 놀리는듯한 해룡에게 항의하듯 잇새로 말을
내뱉었다.

" 그럴수는 없지. 처음이라면서? "

저 말투에 흥분한 기색이 전혀 없어 원재는 적잖이 당황했다.
잠깐 체온이 떨어져가더니 이번엔 침대 사이드 테이블을 뒤져 무언가를 찾아낸다.

차가운 감촉과 더불어 엉덩이 사이로 미끌거리는 이물질이 들어온다.

철저한 자식.
낯선 감촉에 원재는 이를 악물었다.

" 아직 멀었어. "

여전히 흥분감을 찾을수 없는 말투.
분명 흥분하고 있을터인데, 해룡의 말투는 여전히 냉정하기만 하다.

발기하고 있는 해룡의 그것이 원재의 그것에 와 닿는다.

" 허억! "

고개를 벼게속에 처박은 원재가 억눌린듯한 신음을 낸다.
허벅지의 연한 살을 문지르는 해룡의 그것이 선명하게 느껴진다.
그리고 손가락의 이물감 역시도.

또다시 예민해질대로 예민해진 그것은 방출의 욕구를 느낀다.

악마 같은 놈.

원재의 머리속에 악마란 단어가 생각난 그 순간에 해룡의 그것이 원재의 몸안으로
들어왔다.

거친 호흡이 방안을 떠돌았다.
냉방이 잘 된 방임에도 불구하고 원재의 등에 송글송글 땀이 맺혔다.

그리고 해룡의 단정한 이마에도 땀방울이 맺혔다.
조심하는듯한 움직임이면서 감질나게 몰아가는 해룡.

지난밤 차곡차곡 정리되어 몸안에 남아있던 해루의 음란한 피아노 음이
원재의 몸안에서 폭발을 일으켰다.

맞닿았던 체온이 아무런 망설임도 없이 떨어졌다.

털썩!
원재는 무너지듯 침대위로 쓰러졌다.

가뿐 호흡을 정리하며 팔을 들어 이마에 올렸다.
아직 환한 햇살이 살아 있는 대낮에 처음 본 남자와 얽혀버렸다.
당혹감과 낭패감과 흥분의 잔여운이 치밀하게 얽혀들었다.

온몸이 흠뻑 땀에 젖었다.
조용한 듯 하지만 꽤 과격한 섹스였다.

티슈를 뽑아 냉정하게 콘돔을 정리하는 해룡의 모습을 시선만으로 쫒았다.

망할!
욕설이 저도 모르게 치받았다.

벗어놓은 옷을 뒤져 핸드폰을 찾아낸 해룡이 침대 옆자리에 천천히 내려앉는다.
벌거벗은 차림에 익숙한듯한 당당함이다.

원재는 해룡의 작은 움직임을 하나라도 놓칠세라 철저히 시선을 고정했다.

" 아버지? 네. 진룡이 잘 있어요. 별일은 아니구요.
   잠깐 감기기운이 있었다나봐요. 예. 예.
   여기로 식사 좀 보내주세요. 제꺼도요.
   가게 음식 말고, 어머니께 말씀드려주세요.
   예. 그럼 이따 들어가겠습니다. "

해룡은 어느새 예의바름을 찾았지만, 원재는 더 이상 속지 않는다.

더 이상 해룡은 샌님이 아니었다.
샌님인척 하는 닳고닳은 전문가였다.
원재는 그것을 그제서야 알아챌수 있었다.
뭔가 상당한것에 말려든 것 같은 느낌을 떨칠수가 없다.

예의바름을 가장한 목소리와는 반대로 손은 망설임없이 폴더를 닫았다.

" 움직일수 있겠어? "

해룡의 건조한 목소리가 들려오자 원재는 기막힌 듯 노려보았다.

" 진룡이를 이해할 것 같군. 꽤 좋은데? "

나즉하게 혼잣말을 털어놓은 해룡이 씨익 웃는다.
이미 시들어 있는 원재의 그것을 전화기로 장난스레 툭 건드리더니 벌떡
일어나더니 제멋대로 옷장을 뒤진다.

망할! 망할!!
원재의 심장이 덜컥거렸다.
그 글쎄의 정답은 처음이다, 였다.

원재는 화끈 열이 오르는 맨몸을 가리기위해 시트를 끌어 올려야 했다.

원재는 다시 눈을 뜨고 해룡의 나신을 훔쳐 보았다.
미끈하게 빠진 등선이 고혹적이다.
좁붓한 엉덩이와 그밑으로 이어진 늘씬한 다리의 선이 예쁘다.
늘 보아왔던 해루의 몸과 묘하게도 닮아있는 그 늘씬한 나신의 매력을 원재는
그제서야 알아챘다.

해루와 닮았다.
겉은 한없이 약할것같아 보이지만, 막상 벗겨놓으면 의외로 강골이 들어앉아 있는
맨몸. 연주하는 일이나, 지휘하는 일이 의외로 체력소모가 많은 일이라지만,
저 샌님이 저런 몸을 하고 있을줄은 상상도 못했다.

다른 것이 있다면, 아직 경험이 없는 해루의 그것의 맑은 색깔에 비해
해룡의 그것은 이미 익숙한 색깔을 갖고 있다.

옷장안에서 원재의 티를 하나 찾아낸 해룡이 거리낌없이 팔에 꿴다.
진룡이나 해룡이나, 두 형제 모두가 남의 집에서 제멋대로 이다.
원재는 사라져가는 해룡의 맨살을 아쉬워 하면서 속으로 투덜거렸다.




                    
5

멋대로 빌려입은 원재의 티셔츠와 바지를 단정하게 챙겨입고 침대옆 작은
테이블에 편안하게 앉아 담배를 꺼내 물었다.

방금까지의 7월의 더위만큼이나 맹렬하고 뜨겁던 열기가 무색할 정도로 서늘한
표정이다. 무엇을 생각하는지 도통 알수 없는 눈동자가 아직도 침대에 나른하게
누워있는 원재를 직시해온다.

누워있는 것이 꽤 자존심이 상해 침대 머리 장식판에 기대여 볼까 잠깐
생각했지만, 허리가 삐걱대며 무겁다.

" 직업이 뭐야? 꽤 무시무시한 상처가 있던데……. "

순간 원재는 관계중에 몇번이나 상처 얘기를 하던 해룡의 어투와 그 밀도있는
순간이 기억나 자신도 모르게 호흡이 빨라졌다.
젠장할.
저 능구렁이같은 샌님은 표정하나 변하지 않는데, 겨우 말 하나에 호흡이
변하다니…….

원재는 억울하고 또 억울했다.

" 보디가드. "
" 저 위는ㅡ 얼마나 된거야? "

해룡의 시선이 힐긋 이층쪽을 가르킨다.
이제는 탐색전인가?
자신의 동생과 관계된 일임에도 불구하고 해룡의 말투는 타인을 얘기하는것처럼
흔들림이 없다. 원재는 또다시 시작된 해룡의 마구 건너뛰는 대화를 따라가기
위해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 오월부터. "
" 그런데 왜 안 떠나는 거야? 보모 노릇이 의외로 적성에 맞나보지? "

젠장.
저 서늘한 표정으로 뱉어내는 저 가시 같은 말이 원재를 쿡쿡 찔러왔다.

" 나도 한 대 줘. "

원재의 말에 해룡이 새 담배 하나를 꺼내 피고 있던 담배로 진지한 표정으로
불을 붙여 원재에게 건네준다.
잠깐 흰 담배를 사이에 두고, 손끝이 부딪혔다.

사이즈가 몸보다 큰 옷이 입은 해룡의 모습은 서늘한 이목구비와는 반대로
흐트러져 보인다. 그 모습이 어울리지 않게도 마치 손님을 유혹하는 창부같기도
하다.

" 빚이 있어. "

길게 담배 연기를 토해낸 원재가 먼 생각을 떠올린듯한 표정을 짓더니 한숨처럼
말을 했다.

" 빚? "
" 저애의 어머니 목숨! 꽤 방심했었지.
   그 날. 우리 모두 기분이 꽤 좋았었거든. 정말 굉장한 날이었어.
   그런데 웬 미친놈이 하나 나타나서 총구를 들이대는거야.
   그 때 내가 방심하지 않고 평상시처럼 그애의 곁을 지켰다면
   저 애는 아무것도 잃는 것이 없었을꺼야.
   ㅡ저애 어머니가 대신 총에 맞았어.
   폐를 뚫고 지나간 총알 자리에, 시뻘건 피가 마구 솟구쳤어.
   그 길로 미친놈을 따라가서 머리를 쐈어. BOOM! "

원재는 손안에 총이 있기라도 하듯 방아쇠를 당기는 시늉을 한다.
지금껏 해룡을 꾸준히 따라다니던 원재의 시선이 허공속에 무엇을 잡아낸 듯
오래도록 해룡에게서 떨어져있다.

" 갚아줘야해. 저 애가 잃은 것을 찾을 때까지. "
" 그런다고 죽은 목숨이 살아나지는 않아. "
" 그건 나도 알아. 저 애는 어머니 목숨이 사라지는 동시에 더 큰 것을 잃었거든.
   재떨이 좀 줘. "

잠깐 동안 씁쓸한 표정이었던 원재의 얼굴이 금세 도전적인 얼굴로 되돌아 왔다.
여전히 생각을 알수 없는 눈동자로 해룡이 재떨이를 원재에게 건네준다.

" 그 눈동자ㅡ 회색이었나? "
" 혼혈이야. 여섯 살때 미국으로 입양됐었어. "

이번엔 원재도 꽤 냉정한 말투였다.

" 그랬군. "

정확이 무엇에 대한 동의인지 모르겠다. 해룡은 더 이상 질문하기를 멈추었고,
원재 역시도 더 이상 말을 하기를 멈추었다.

" 진룡이를 제대로 이해하자면 깔려봐야 하는거 아니야? "

문득 생각난 듯이 원재가 항의하듯이 물었다.

" 진룡이가 깔아 본다면, 생각해보지. "

망설임없이 시원하게 내뱉는 해룡의 말.
여름의 긴 햇살이 기울어가고 있었다.

이번에 세룡각 배달통에서 나온 음식은 손바닥만한 삼계탕이었다. 뜨거운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작은 닭을 해룡이 식탁위에 침착하게 내려놓았다.
주방으로 해루와 함께 들어서던 진룡이 해룡의 모습을 보고 놀라며 걸음을
멈추었다.

" 어? 형이 여긴 웬일이야? "
" 너 찾으러. "

멋대로 먼저 식탁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챙겨드는 해룡의 모습을 진룡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 설마 이거 형이 배달했어? "
" 아니. "

무안할 정도로 냉정하게 말이 끊어진다.
해루는 그런 분위기를 전혀 못느끼는지 늘 앉던 자신의 의자에 앉아 젓가락을
들었다.

" 어서 먹어라. 꽤 체력소모가 많은 것 같던데……. "
" 엑? "
" 방학동안 여기서 머물꺼라고 집에 얘기해두마. "

원재는 놀란 듯 입까지 벌린채 움직임을 멈추고 해룡을 쳐다보았다.
그러나 해룡은 익숙하게 닭다리를 발라내어 먹기 시작한다. 서툰 젓가락질을 하는
해루의 그릇에 담긴 닭다리를 뜯어 해루에게 내밀기까지 하는 친절함까지
발휘하면서.

익숙하게 식탁에 앉아 음식을 먹는 해룡의 모습을 진룡은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닭뼈를 살뜰하게 골라내며 음식을 먹고 있는 저 악마같은 놈이 꺼내는 말은
예측불허다.

진룡이 원재에게 재빨리 눈짓을 보낸다.
원재는 진룡의 신호에 진룡을 따라 밖으로 나왔다.
아직도 태양의 기운이 남아 있는 정원에 내려서자마자 진룡이 먼저 입을 열었다.

" 우리 형, 언제 왔수? "
" 오후에. "
" 설마ㅡ 이층에도 올라왔었수? "
" 아주 잠깐. "
" 젠장. 저 크레믈린. "

진룡이 불끈 열기가 치솟는지 정원을 서성인다.

"저 인간 아하면 어 하는 인간이라구요.
  생긴 건 저렇게 순진해 보여도 속은 보통이 아니거든.
  딜러인데. 그 딸러 사고 파는거. 꽤 잘하나봅디다.
  하긴 눈치 백단인데 그정도야 식은죽 먹기겠기.
   참 우리형 공수부대 나왔는데 언제한번 비서양반 붙어보지 그러우? "

" 아참, 형하고 말할땐 정신 바짝 차리슈.
   잠깐 잘못하면 어느새 말려들고 마니깐.
   궤변논리에 귀신이거든. 앞으로 골치 아프게 생겼네. "

자기 할말만 마친 진룡이 원재를 그대로 두고 다시 집안으로 들어간다.
아마 해루와 단둘이 남겨져 있을 식탁 상황이 궁금했을터이겠지만, 원재는
황망한 표정으로 진룡의 뒷통수를 노려보았다.

용둥지에서 나온 두 마리의 용은 감당하기가 벅찼다.

비를 머금은 여름의 바람이 정원을 스쳐 지나갔다.
주머니를 뒤져 담배를 찾아내어 담배불을 붙였다.
한숨처럼 길게 담배연기가 공기중에 뿜어졌다.

부비트랩을 놓은 것은 원재였다.
그러나 그것을 밟은 것은 처음부터 해룡이 아니라 바로 원재였다.



- END -





<BabyAlone의 1줄 코멘트>
아, 그런 거였습니까? o.o 해루가 공이었다니ㅡ;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1 18:33)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1 18: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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