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완결방입니다. 누구나 글을 올리실 수 있습니다.

 48   1/  4   0
Category (83)  공지 (1)  단편 (48)  장편 (3)  축설 (10)  행사 (21) 
ijen
여름 방학 (下)






"여기다."

터미널에서 녀석을 발견 한 순간,
나도 모르게 엇, 하게 큰 소리를 내고 말았다.

"야, 너 안대……."
"아아… 다 나앗어. 혹시나 불안해서 아까 학원 갈 때 까진 계속 쓰고 있었는데
기껏 바다에 가는데 안대 끼고 가면 구경도 제대로 못하니까."

그렇게 말하며 오른 눈을 손 끝으로 매만지는데
그 손가락이 그렇게 길고, 단단해 보일 수 가 없었다.
그리고,

"가자. 열시 출발이니까 지금 가면 탈 수 있을거야."

휙, 가볍게 내 어깨에 팔을 두르고 차가 있는 곳으로 이끄는데
뭔가, 처음 보는 녀석의 맨얼굴은 참으로 낯설었다.










한밤의 뻥뻥 뚫린 고속도로를 타고 차는 세시간 반 만에 정동진에 도착했다.
그곳에서 밤을 새고 아침에 다시 차를 타고 서울로 올라 올 예정이었던 우리는
버스 안에서는 잠시 눈을 붙이기로 합의,
잠이 오거나 말거나 말 없이 눈을 감고 시트에 몸을 기대었었다.



관광명소 답게 한 밤임에도 불구하고
여기 저기 번쩍이는 간판들과 북적이는 인파로 소란스러운 정동진은
'밤 바다' 라는 단어가 가지는 한적한 분위기와는 거리가 멀었다.

그래도 멀리서 멀리서 보이는 바다와, 더 먼곳에서 들려오는 파도소리,
그리고 바다 특유의 내음에 나는 벌써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낮에 보는 거랑은…… 많이 다르구나."
"정동진 와 봤어?"
"어. 올해 4월에. 수학 여행 코스에 정동진이 있었거든. 그런데 정말 잠깐 동안
차에서 내려서 슬쩍 구경이나 하고 기념품이나 사는게 다 였어. 저기 정동진 역
근처에 내려서 거기서 모래시계 공원 사이에서 잠깐 돌아다니고 다시 차에 탔으니까."
"헤에…."

형진의 별 감흥 없다는 듯한 목소리가 웃겨 피식 하고 웃자
녀석이 왜? 라는 얼굴로 날 바라본다.

"아니, 그냥."
"그냥…… 저 쪽으로 가 보자."

녀석의 손 끝이 가리키는 곳에 바다가 있었다.





















"유학, 정말로 가는 거냐?"
"아마도."

삭─
사악─

형진의 대답 끝에 모래가 바스러졌다.
흐응… 하는 나의 콧소리는 파도에 감긴다.

"멋대로 자연계를 택했다고 엄청 화를 내셨어."
"누가?"
"우리 아버지."

그리고 녀석이 꺼낸 이름은 뉴스나 신문 등지에서 자주 접한…
나 조차도 잘 알고 있는 유명한 국회의원이었다.

잘 나가는 집안이라는 소문은 들었지만,
설마하니 정치가의 아들일 줄은 꿈에도 몰랐던 나는 그야말로
입을 떡 벌리는 수 밖에 없었다.

하지만 그 와중에도
그렇게 따지면 어째서 그 아버지가 유명한 조직의 두목과
아는 사이인가에 대한 궁금증도 쉽게 해결이 되겠다.
원래 정치판과 주먹판은 가깝고도 먼 사이니까.

─ 하는 혼자만의 이해도 머릿속을 굴러가고 있었다.


"너는 외교관이 되어야 한다고 하루에 열두번도 더 말씀하셨거든."
"외교관……."
"응. 그런데 멋대로 이과를 택했으니, 기가 막힐만도 하지."
"설마 그래서 유학을 간다는 거야? 말도 안돼. 전과 제도는 왜 있는건데."
"아니. 유학은 처음부터 정해 진 거였어. 내가 이과를 가건, 문과를 가건……
내 유학 예정에는 별로 영향을 미치지 못했어. 그냥 나 혼자… 혹시나 하는
기대를 걸고 시도해 본 반항이었어, 그건."

혹시나 하는 기대?
반항?

"나는 의사가 되고 싶었거든."
"아아……."

그닥 놀랄 일은 아니었다. 어차피 이과 톱의 자리에 있는 아이들이라면
대부분은 다 대규모 연구소의 연구원, 혹은 의사를 지망하고 있으니까.


"내 동생이, 내가 중학교 2학년 일 때 심장병으로 죽었어."
"……."
"그 때 내 동생은 아홉 살이었거든. 선천적으로 심장이 안 좋은 애였는데,
초등학교 입학 하기 전에 울혈성 심부전 판정을 받고 아홉살 되던 해에 죽었어."
"여동생?"
"응, 여동생."

나보다 조금 높은 위치에 있는 형진의 하얀 얼굴에
달이 그림자를 드리우고 있다.

"별로… 그렇게 사이가 좋은 남매도 아니었어. 나이차도 제법 나고,
걘 태어 날 때 부터 심장이 나빠서 병원에서 거의 살다시피 했으니까
자주 볼 기회도 없었고…… 그냥 가족 관계 조사서에 '동생이 있다' 라고
표시를 하게 만드는 존재… 남에게 저는 1남 1녀 중 장남입니다, 라고 말 하게
만드는 존재… 그 정도였지, 걔는.
그런데, 한 번은 병문안을 갔었거든. 가고 싶어서 갔다기 보단…… 집에 일이
있어서 어머니가 며칠 자리를 비워야 했거든. 간병해주는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네 동생인데 가서 놀아주고, 이야기도 좀 하라고 어머니가 말씀하셔서
그렇게 하자, 하고 병원으로 간 거였어."
"……."
"하지만 막상 갔을 땐…… 별로 할 이야기도 없더라. 놀아주고 싶어도 걘
늘 침대에만 누워 있으니까."
"심장이 나쁘니까……."
"그래, 심장이 나쁘니까. 거기다 병실에서 엄마랑 간병인, 의사 간호사 정도만
만나다보니 엄청 부끄러움을 많이 타는거야. 아무리 오빠라고 해도 일년에 두 세 번
볼까 말까한 사이고…… 아무튼 그런게 불쑥 찾아가니까 애가 눈도 못 마주치더라고."

그렇게 말하며 형진은 작게 웃었다.

"달리 할 말도 없고… 그냥 멍하니 옆에 앉아만 있었지. 옆에 앉아서…… 걔가
밥 먹는 것도 보고, 주사 맞는 것도 보고, 간호사를 불러서 화장실에 가는 것도 보고……
그래도 계집애라고 나한테 화장실 가게 링거 좀 들어달라는 말은 안 하더라고."
"오빠랑은 달리 섬세한 아이였구나."
"그랬을지도."

그리고 형진은 잠깐 말을 멈췄다.
모래를 부스러뜨리며 걷던 발걸음도 멈추고,
가만히 서서 바다를 바라보았다.

검은 물결이 넘실거리며 다가오다가
새하얀 거품과 함께 다시 밀려 나간다.


"점심을 먹고, 하도 심심해서 신문을 읽는데, 거기 재미있는 칼럼이 있어서
읽어줬어. 자세히 기억은 안 나지만… 누가 버스 기사가 난폭 운전을 해서
넘어졌다는 내용이 들어있었지. 한참동안 그걸 듣고 있던 걔가, 갑자기 이렇게
말 하는 거야. '난 버스 한 번도 못 타봤는데…….'
그 말을 듣는데… 뭔가 가슴이 욱씬 거리더라. 걔는 물론, 병원을 오갈때
우리집 자가용을 타고 다녔지. 하지만… 그걸 말 하는게 아니잖아. 버스를
탈 수 '없는' 상황에 있는 거야, 걔는. 버스 뿐만이 아니야. 지하철, 기차, 배,
비행기…… 아무것도 탈 수가 없었지. 아니. 꼭 타는 것 만이 아니라, 뭐든지.
뭐든지… 그 아이는 할 수가 없어. 내가, 혹은 네가 겪은 모든 일을, 그 아이는
알 지 못해. 그럴 기회가 주어지지 않았으니까. 하고 싶다, 하기 싫다라는
선택의 범주를 떠나서, 아예 그것을 선택 할 기회 조차 갖지 못한 거야."
"……."
"그 날 집에 가는데, 걔가 오빠 내일 또 올거냐고 묻더라. 내일은 과외가
있어서 못 온다고 했더니 굉장히 무안해하며 고개를 끄덕이는거야. 그리고 집으로
가는데… 내내 그 무안해 하던 얼굴이 마음에 걸려서 견딜 수 가 없었어. 그래서
집에 가자마자 과외 선생한테 전화를 해서 내일 수업은 다음으로 미뤄달라고 했지.
그리고 서점에 가서, 그 애가 읽을 만한 동화책 몇 권을 샀어. 내일 병원에 가는
길에 들러서 사도 됐을 걸, 그 사이를 못 참고 서점에 달려가서 책을 산 거지."
"자상한 오빠네……."
"그렇지 않아. 동생이 글을 읽을 줄 모른다는 사실도 모르는 오빠가 어디가 자상해?"
"글을 못 읽어?"
"배운 적이 없으니까. 학교는 커녕, 유치원에도 가 본 적이 없는 아이였어. 어머니가
이따금 제 이름 정도는 쓸 수 있게 가르쳤는지 제 이름 석 자만 읽을 줄 알더라.
이, 은, 진, 이렇게 세개만."
"그랬구나……."
"응. 그래서 그 동화책도, 결국엔 내가 읽어줬어. 네 권정도 사 갔는데,
사 간 그날 한 권 읽어주고 나머지는 내일 읽어준다고 했지. 책 읽어주는게
생각보다 중노동 이더라고. 목소리는 갈라지고, 목도 아프고. 그래서 또
읽어 달라는거, 오빠 피곤하니까 하루에 한 권씩만 읽자고 했지."
"그래서, 나흘동안 착실하게 읽어 줬어?"
"아니, 그 날 이후론 병원에 안 갔어."

어째서? 하는 내 물음에 형진이 잠시 눈을 내리깔았다.

"어머니가 다시 병원에 가셨거든. 급한 일이 정리돼서 다시 병원으로
돌아가신 거지. 어머니가 나가시게 되니까… 그다지, 꼭 내가 가야 할
필요를 못 느끼게 된 거야. 거기다 나는 학교에 가야 하니까… 주말이 아니고는
병원에 갈 수도 없지. 물론 내가 조금이라도 부지런을 떨었다면 잠깐 얼굴을
내미는 정도는 할 수 있었을거야. 그치만 그렇게 부지런을 떨 만큼 동생을 아끼는
오빠는 아니었거든, 나는."

형진은 다시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다시, 모래소리와 파도소리가 한데 섞여 그의 발 아래서 부서지기 시작한다.

"다시 병원에 간 건, 병원에서 가족들은 모두 와 달라는 연락이 온 날이었어.
아버지와 함께 차를 타고 병원으로 갔지. 어머니는 너무 울어서 거의 실신할
상태에 있었고, 동생은…… 아직, 살아는 있었어."
"……."
"살아는 있었지만, 이미 의식도 없고…… 반 시신 상태였어. 못 알아 볼 정도로
얼굴은 부어있고, 그 부은 뺨에는 눈물 자국도 말라있고…… 상당히 보기 괴로운
상황이었지. 그리고 그 날 밤 열한시가 넘어서 동생은 죽었어."

담담한 목소리.
마치 남의 이야기를 하는 듯 한 목소리였다.

"어려서 죽은 아이니까 화장을 했지. 옷가지나 물건도 다 태우기로 하고 병실을
정리하는데 걔가 쓰던 침대 머리맡에, 내가 사 간 그림 동화책 네 권이 있더라.
고작 넉달 만에 책이 이렇게 닳을수도 있나 싶을 정도로 손때가 묻어있어서
가만히 쳐다보고 있는데 어머니가 그러시더라. 걔가, 그 때 부터 시간 날 때 마다
그 책만 들여다보고 있었다고. 들여다보고 있어도, 글을 모르니 그림만 죽도록
본 셈이지. 어머니가 아무리 읽어주마고 해도 싫다고 하더래. 오빠가 읽어 주기로
한 책이니까, 오빠 올 때 까지 아무도 읽어주면 안된대. 그럼 오빠가 읽어 줄 때는
이미 내용을 다 알아버려서 재미가 없을거니까, 읽으면 안된다고 했대. 그렇게
말 하면서 틈만 나면 그 책을 펼쳐서 그림만 보고, 이건 어떤 내용일까 혼자서
상상을 한 거지. 옆에서 보던 어머니가 그건 말이야, 하고 말을 하려고 하면
엄마 쉿! 하면서, 절대로 말 못하게 했대."
"……."
"그 말을 듣는데, 처음으로 눈물이 나더라."

형진은 잠시 걸음을 멈추는가 싶더니, 다시 발을 앞으로 내밀었다.

"처음으로 눈물이 쏟아져서 화장실로 달려가서 미친듯이 울었지. 왜 울었는지는
나도 몰라. 그 애가 불쌍해서인지, 책을 읽어주겠다는 약속을 지키지 않은 내가
미워서인지, 아니면 그저… 그저 슬퍼서인지…… 나는 지금도 내가 그 때 그렇게
미친듯이 울었던 이유를 모르겠어. 그리고 화장터로 간 날, 정말로 한 줌 밖에
안되는 재로 변한 그 애를 보면서 또 한번 울었어. 나는 몰랐는데, 그 때 내 동생은
또래의 큰 아이들의 반 밖에 안 되는 몸집이었다더라. 하긴, 초등학교 2학년이
보통 이렇게 자그마한 체구였던가 싶긴 했어. 정말 바보 같지. 보통 아이들의
반 밖에 안 되는 몸집이었는데…… 그것도 모를 만큼 나는 둔하고 멍청했어."

그 때, 녀석의 목소리가 떨렸다.
혹시 이녀석…! 하며 후다닥 형진의 어깨를 짚자
놀란 얼굴로 녀석이 날 바라본다.

"아… 깜짝이야……."
"뭐야. 내가 더 놀랬어."
"아니… 혹시 너 우는건가 싶어서."
"그럴리가."

형진은 가볍게 웃고 그 자리에 주저 앉았다.
엉겹결에 따라 앉은 날 바라보며 다시 한번 씨익 웃는 녀석에게
내가 먼저 질문 했다.

"그래서, 의사가 되고 싶다고 생각한건 동생에 대한 속죄?"
"글쎄…… 속죄라고 해야하나…… 아니, 그런건 아닐거야."

형진이 고개를 저으며 대답한다.

"그럼?"
"속죄라기 보단…… 글쎄다. 이렇게 말하려니 또 애매하네. 그냥, 내 동생
또래의 어린 아이들이 버스나 지하철도 한번 못 타 보고 죽게 놔두기는 싫었어."
"아항……."
"그 조그만 것들이 아파하는 것도 싫고…… 학교도 못 가서 제 이름 말고는
아무것도 읽을 줄 모른 다는 사실도 싫고……."
"이렇게 바보 같은 오빠가 한 약속만 믿고 기다리는 것도 싫고?"
"그렇지."

형진이 웃자, 바다 내음이 확 하고 내게 밀려든다.

녀석의 웃는 얼굴은 누군가를 떠올리게 한다.
처음 본 맨 얼굴의 낯설음에 얼핏 얼핏 누군가가 떠 오르기는 했지만
그게 누구인지 도무지 기억 나지 않아 머리를 쥐어뜯던 나는,
이번 기회에 자세히 녀석의 얼굴을 살피고, 녀석과 닮았다고 생각한
그 누군가를 기억해 내기로 했다.

"야, 다시 웃어봐."
"뭐?"
"빨리."

뭐야, 하며 피식 고개를 돌리는 녀석에게 순간적으로 얼굴 하나가 겹쳤다.

"앗! 철도원!!!"
"뭐?"
"너, 걔 닮았어. 영화 철도원에 나온 그 녀석!"
"철도원? 그거 늙은 영감 나오는 영화잖아.
내가 그 영감이랑 닮았단 소리야, 지금?"
"아니, 말고! 그…… 뭐지, 애들끼리 서로 싸우고 죽이는 영화……
거기에도 나온…… 그래, 안도 마사노부!"
"안도 마사노부?"
"아…… 안도 노부히사 였던가……."
"뭐야, 그게 누군데?"

형진이 떫은 감을 씹은 표정으로 날 바라본다.

"우하, 닮았어! 닮았어! 아무튼 그 안도 뭐시긴가 하는 그 놈이랑 닮았어, 너!"
"……."
"어이, 표정이 왜 그래? 그 사람 잘 생겼어. 니가 선이 좀 더 굵고…
키나 몸집이 더 큰 걸 제외하면 많이 닮았어."
"야, 그 정도면 아예 다른 사람이야."
"어…… 그런가. 아닌데? 닮았는데?"
"뭐, 아무튼."
"그래 아무튼, 그럼 유학가서 의학을 공부 할 거야?"
"무슨 소리야. 외교관 되려고 공부하러 가는 거라니까."

뭐???
마치 뒷통수를 얻어 맞은 듯한 충격이 일었다.

"야… 뭐야, 너…… 너, 혹시 동생 어쩌구 한 거, 다 뻥이야?"
"설마. 아무리 나라도 그런 뻥은 안 친다고."
"그럼 뭐야. 의사 되고 싶다며?"
"그건 내 생각이고. 우리 아버지 생각은 이전에도 앞으로도 외교관."
"……."
"시키는대로 해야지, 뭐."

허……!
그야말로 허! 다, 허!!!

세상에.
뭐야, 이 녀석!
그렇게 잘난 척 해대더니, 고작 부모가 시키는대로만 움직이냐?
정말이지…… 도대체 뭐야!


"가서 한 몇년 공부하고 이래저래 사람도 사귀어놓고 돌아와서
시험을 치라는게 아버님 명령이시다~~~."
"그래서…… 그대로 할 거냐……?"
"뭐… 그래야겠지."
"유학…… 도 가고?"
"음…… 올해 겨울 쯤?"
"……."

그리고 녀석은 천천히 일어서서 엉덩이에 묻은 모래를
툭툭, 두어번 정도 털었다.
하지만 그 동안에도 내가 가만히 입을 다물고 있자,
불쑥, 허리를 굽히고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더니,

"왜, 섭해?"

하고 나사가 빠져도 열 댓개쯤은 빠진 소리를 한다.

"섭하……."
"유학, 가지 말까?"

바로 코 앞에서, 혼자서 잘도 떠든다.
심하게 가까운 위치에서,
아직도 어색한 녀석의 맨 얼굴은……

낯설다.
너무 낯설어서, 심장이 다 두근거린다.




"니가 가지 말아달라고 하면 생각 해 볼게."
"뭘 생각해?"
"뭐, 고등학교 졸업 할 때 까진 미루던가."
"왜?"
"왜라니. 니가 너무 서운한 얼굴을 하고 있으니까 그렇지."
"……."
"야."
"……."
"너 자세히 보니까 진짜 예쁘다."
"이게 진짜!!"

휙! 하고 치켜 든 손이 너무나도 가볍게 붙잡혔다, 고 느낀 순간.


쪽……




하는……
매우……
수상한 소리가 들렸다…….




도대체,
어디서 난 소리야, 이거?





"아무 맛도 안 나네."
"……."
"입술 색이 하도 예뻐서 뭐라도 바른 줄 알았는데."
"……."
"그런데, 진짜 부드럽다. 네 입술."





─ 퍽!!!!


이번에는 소리의 근원지를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최대한으로 길게 뻗은 내 다리의 끝, 정확히는 발바닥.
그리고 그 발과 맞 닿은 녀석의 사타구니.





"끄……."
"야, 이 미친놈아!!! 뭐가 어쩌고 어째? 야, 니 눈에는 내가 여자로 보이냐!
이 썩을 놈아! 아직도 눈병이 덜 나았냐?? 미국이건, 영국이건 가 버려!
아무데라도 좋으니까 빨리 가 버려, 이 병신아! 의지 박약아!! 한심하다!
네 동생이 널 보고 뭐라고 생각하고 있겠냐, 이 얼간아!!!
넌 니가 하고 싶은 일도 못해? 니 말대로 할 수 있는 기회조차 못 가진
네 동생도 있는데!!! 바보! 병신! 평생 그 모양으로 살아라!"

그리고 얼른 자리에서 일어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백사장을 달렸다.
죽도록 도착한 정류장에는 막 출발하려는 서울행 버스가 한 대 있어
얼른 올라 돈을 차비를 내고 좌석에 주저 앉았다.

녀석의 상태가 조금 걱정이 되긴 했지만
죽지 않을 정도로만 차 줬으니 움직일 만 하면 차를 타고
서울로 돌아 올 것이다.

그렇게 생각하고 나는 눈을 감았다.

무엇보다,
지금은 녀석을 보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월요일, 녀석은 학원에 나타나지 않았다.

1교시 수업을 하러 들어온 김 선생에게 형진이 오지 않았다고 말하자
김선생은 잠깐 주저하는 눈치로 말했다.


"형진이는 오늘부로 학원 그만 둔단다."

아이들은 놀라는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네? 하며 한바탕 소란을 떨더니
이내 '유학' 이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며 수근 거리기 시작했다.

"형진이 유학 간대요?"

앞에서 누군가가 묻자 김선생은 글쎄… 하고 애매한 대답을 한다.

"선생님은 그냥 오늘부로 그만둔다는 연락만 받았어. 형진이 어머니께서
직접 전화하셨는데 그 말씀만 하셔서 이것 저것 여쭈지도 못했거든.
자, 아무튼 가는 녀석은 가더라도 남아있는 우리는 열심히 공부 해야겠지?
책들 펴라, 오늘은 138 페이지 문제 풀 차례구나."

파라락 책장이 넘어가는 소리를 끝으로
내 귀에는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형진이 집 주소?"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핸드폰으로 연락을 해도 안 받길래요."
"집 전화는?"
"몰라요."
"집 전화도 안 받을라나……."

김선생이 볼펜 뒷 꼭지로 자신의 볼을 콕콕 누른다.

"가르쳐줘도 상관은 없지만…… 형진이 같은 경우엔 좀 곤란해."
"빌린 물건이 있거든요. 꼭 돌려줘야 해요."

잠깐 고민 하던 김선생이 출석부를 펼치고 메모지에 뭔가를 끄적거린다.
그리고 그의 주소가 적힌 메모지를 반으로 접으며 내게 내밀었다.

"형진이, 시간 나면 가기 전에 잠깐 학원에 놀러라도 오라고 해."
















써 있는 주소 만으로는 찾아 갈 능력이 전무한 나는
학원을 나온 즉시 택시를 잡아탔다.
주소가 적힌 종이를 내밀며 '빨리 가주세요' 를 연발하자
기사가 흘깃 내 얼굴을 살피더니 기어를 넣고 엑셀을 밟는다.


"설마, 벌써 다른 나라 땅을 밟고 있는 건 아니겠지."

그럴리는 없다고 몇 번이나 마음을 다잡으며 나는 차 안에서 발을 동동 굴렀다.




이건 이상하다.

뭔가 이상하다고 느끼기 시작 한 건
으리으리한 집들이 즐비한 넓은 골목에 접어들면서 부터였다.


어째서 녀석이 유학을 간다, 는 말에
내가 이렇게나 동요하고 있는 걸까.

이렇게 잔뜩 불안에 빠져서는……
어째서 이토록 급한 마음으로 녀석을 찾아가고 있는 걸까.




그 모든 의문에 대한 답은, 나중에 찾기로 하고.

나는 현재 내가 할 수 있는 단 하나의 일.
'아저씨, 빨리요.' 를 연발하는 일에 최선을 다 하기로 했다.



















"어라…."
"……."

으리으리한 대문을 열며 녀석이 얼빠진 소리를 한다.
녀석의 얼굴에는, 지난 토요일에는 보지 못했던 새하얀 안대가
다시 제 자리를 찾아간 듯 얌전하게 붙어 있었다.

"너… 그 눈……."
"눈병 걸렸어."
"진짜냐…?"
"뻥이지."

씨익, 하고 웃더니 이내 윽, 소리를 내며 안대를 한 눈을 감싸쥔다.


"다쳤냐?"
"맞았어."
"누구한테!"

순간 내 머리를 스치고 간 건,
학원 근처의 양아치 삼인방.
하지만,

"아버지."
"엉……?"

형진은 담담하게 대답하더니 들어올래? 하며 문을 크게 열었다.








"거기 앉아. 뭐, 마실 거라도 줄까?"
"됐어."
"미리 말해두지만, 실론티는 없다."
"됐어. 됐으니까, 좀 앉아 봐."

그러지, 하며 녀석은 내 맞은 편 쇼파에 주저 앉았다.
다친 곳은 눈 만이 아니었다.

헐렁한 민 소매 티셔츠를 입고 있는 녀석의 팔뚝에는 군데 군데
피멍이 들어있었고, 어느 곳에는 말라 붙은 피딱지가 앉아 있었다.

얼굴에도 안대를 한 반대편 뺨에 생채기가 나 있어
그 한심한 꼴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너, 유학 가냐?"
"응. 10년 후에."
"뭐……?"
"우리나라 의대는 기본적으로 6년 이니까. 군대 다녀오고, 이것 저것
계산해서 넉넉하게 10년으로 잡았다."
"……."

할 말을 찾지 못한 내가 뚫어져라 얼굴만 바라보고 있자,
녀석이 슬쩍 웃으며 이거 말야, 하고 안대를 가리킨다.

"영광의 상처야."
"영광의 상처?"
"동시에 내 의지의 상징이기도 하지."
"알아듣게 설명 해."
"아버지와 싸웠어. 일방적으로 맞은 거니까, 싸웠다고 하기엔 무리가 있겠지만
그래도 내가 아버지한테 반항 한 건 처음이니까 좀 봐줘."

그렇게 말하는 형진의 얼굴에 작게 쑥스러움이 떠 올라있었다.

"일단 나는 외교관이 될 생각은 없다고 말씀 드렸어. 갑자기 골프채가 날아오고
재떨이가 날아오는데 피할 사이도 없었다, 진짜. 그래도 묵묵히 맞고 있으니까
이야기나 좀 들어보자고 하시더라. 그래서 말씀 드렸지. 나는 의사가 될 거고,
심장질환에 대해 연구해서 그 분야의 일인자가 될 거라고. 아버지도 짚이는
구석이 있으셨는지 혹시 은진이 때문에 그러는 거냐고 하시더군. 전혀 틀린건
아니지만, 계기가 무엇이든 간에, 현재 나의 목표는 의사라고 했지. 그래서
이과를 선택 한 거고, 내 의지는 확고하니까 아버지도 얼른 마음을 접어 달라고
했어. 그랬더니……"
"그랬더니?"
"이번엔 발이 날아오더라고."

형진은 유쾌하게 웃었지만, 나는 도무지 웃을 수 가 없었다.

"자식이 자기의 길을 걷겠다는데 그렇게 무식하게 패는 부모가 어딨냐……."
"말 했지? 나는 한 번도 아버지한테 대든 적이 없다고. 말 대꾸도 한 번
안 해봤어. 우리 아버지, 나보다 마흔이나 많으셔. 이제 곧 환갑이지.
원체 나이도 있으시고, 타고 나길 불같은 성격이셔서 어릴 때 부터 아버지
말이라면 그저 예, 예 하고 따랐거든. 물론… 지금도 그래. 나는 여전히
아버지께 순종하는 아들이었지만, 그건 아버지가 두려워서는 아니야.
지금 껏 아버지 뜻에 살아온 삶에 불만은 없었어. 공부는 하고 싶어서 한 거고,
이것 저것 불편 한 거 없이 원하는 것도 다 하면서 살았으니까. 내가 아버지
말씀에 묵묵히 따른 건 단지 그 이유 뿐이야."

거기 까지 말 한 형진은
잠시 할 말을 찾는 표정으로 테이블을 바라보았다.

"아버지는, 처음으로 반항 한 아들에게 어쩔 줄 몰라하는 눈치셨어.
아, 처음은 아닌가. 이과로 진학했던게 최초의 반항이었으니까.
뭐 아무튼……그래서 놀란 마음에 무작정 손에 잡히는대로 던진 거겠지.
발이 날아온 건, '마음을 접어 주세요' 라는 내 말투에 화가 나신 까닭일 거야.
좀 건방졌나봐. 감히 아버지께 '마음을 접어 주세요' 라니."

그렇게 말하며 뭐가 그렇게 웃긴지 키득거리며 어깨를 떤다.

"아무튼, 굉장했어. 몇 시간 동안 이것 저것들이 날아오고, 고함을 지르고……."
"그래서, 또 그걸 다 맞고 있었냐?"
"그거 다 맞았으면 난 죽었어."
"……."
"슬슬 피하면서, 적당히 맞아줬지."
"아하… 적당히?"

내 억양에서 눈치를 챈 듯 형진이 웃는다.

"이건 졸다가 미쳐 못 피한 거야."
"그 와중에 조는 여유까지 부리셨구만."
"노인이잖아. 진지하게 대하면 그 쪽이 불쌍하다구."
"건방지네."
"어제부로."
"너무 갑자기 변하면 죽는다더라."

"누구 덕분에 그렇게 됐다. 에효─" 하며 벌렁 쇼파에 드러눕는다.

"또, 또 책임전가."

내가 눈을 흘기며 말하자 형진이 피식, 웃으며 크게 기지개를 켰다.
그러다 맞은 곳이 잘못 됐는지 '으윽!' 하며 잽싸게 몸을 움츠린다.

"그럼…… 유학 안 가는거냐?"
"언젠가는 갈 지도 모르지. 어쩌면 10년 안으로…… 어쩌면 당장 내년에라도."
"……."
"그치만 언제 간다해도 그 땐 분명히 내가 하고 싶은 공부를 하기 위해 떠나는
유학이니까…… 좋잖아?"
"그렇지……."
"그래도 일단은… 내가 하고 싶은 공부는 한국에서 해도 충분 하니까,
당분간 유학은 보류다. 그리고,"
"그리고?"
"지금은 여기 있어야 하는 이유도 있고 말이야."

그렇게 말하며 녀석은 날 향해 살짝 웃었지만
나는 일부러 못 본체 고개를 돌렸다.

하지만 빨개지는 얼굴은 도무지 감출 길이 없어,
'간다' 를 외치며 벌떡 일어나 현관을 향해 걸어가는 것으로
간신히 상황을 모면했다.





"야…."
"응?"
"내일, 학원 나오냐?"

대문까지 마중 나온 녀석에게 그렇게 묻자,
녀석은 싱글거리며 '갔으면 좋겠냐?' 하고 도로 내게 묻는다.

"오지 마!"

그 능글맞은 태도에 화가 나 소리지르자, 태연하게 웃으며 "갈게." 라고
대답한다.

"오지 마! 그렇게 너덜거리는 꼴로 어딜 온다는 말이야! 오지 마, 새꺄!"
"응? 그렇게 멋져? 알았어. 걱정마, 내일 꼭 갈게."
"귀가 썩었냐? 아님 뇌가 썩었냐?"
"넌 반대로 말하는 거 다 알고 있어. 걱정마. 내일 보자, 안녕."
"야!!!"



















+++





"자, 오랜만에 출석이나 한번 불러볼까."


너덜거리는 형진이 녀석을 바라보며,
김선생이 기분 좋은 얼굴로 출석부를 들었다.

가장 먼저 불리는 이름은 이형진.
가장 마지막으로 불리는 이름도 이형진이다.


"이형진."
"네."
"네."

나는 일부러 형진이와 똑같은 타이밍으로 대답했다.
그리고 잽싸게 녀석의 가슴을 치며 "찌찌뽕!" 하고 외쳤다.

그러자,

"……."

잠시 형진이 말 없이 내 얼굴을 바라보더니,
번쩍 손을 들고 소리쳤다.

"선생님! 형진이가 제 찌찌 만지는데요!!!"
"야!!!"

어찌 할 사이도 없이 강의실은 그야말로 웃음 바다가 되어버렸다.
그 요란한 속에서 형진이 슬쩍 내 귓가에 속삭였다.


"그렇게 만지고 싶었어? 좀만 참지. 아직 학원인데."
"야!!!"
"기다려, 오늘 수업 끝나고 같이 가자."
"가긴 어딜 가!"
"우리집."

됐다고 그 능글맞은, 하지만 정말로 잘 생긴 녀석의 얼굴을
손으로 꾹꾹 누르자 덥썩 내 손목을 붙잡으며 형진이 한 마디 한다.

"조금만 참아라. 오늘 실컷 만지게 해 줄게."
"아, 됐다니까, 글쎄!!!"
"또, 또…… 지금 반대로 말 한 거지? 알았어, 엉아가 다 알아서 해 줄게."
"아니라니까아아아아아아아!!!"
"에구, 이쁜 것."
"으아! 씨, 진짜!!!"


내 고함 소리는 아이들의 웃음소리에 묻혀 들리지도 않았다.









어느 덧, 여름 방학이 끝나가고 있었다.





















==========================================================

로느님 생일 축하 선물로 쓰던 글도 다 못쓰고..이런...ㅡ.ㅜ

죄송할 따름입니다 ㅠ.ㅠ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1 20:31)



 
 48
  그는 돌아오지 않는다
지나가다    2004/09/13   2386 
 47
  변명(부제: Normal Blood)
kuroasa    2004/08/30   1844 
 46
   [12]
ijen    2003/11/26   19072 
 45
  심화(心畵)
atlantis    2003/11/21   1179 
 
  여름 방학 (下)
ijen    2003/08/14   1365 
 43
  여름 방학 (上)
ijen    2003/08/14   2096 
 42
  Sleeping beauty
ijen    2003/06/13   1660 
 41
  나를 찾아 줘
atlantis    2003/06/12   1107 
 40
  인생역전 - 준영이 잠들었을 때
▩ 하리    2003/06/14   1361 
 39
  인생역전 - 현중이 꿈에서 깨어났을 때
▩ 하리    2003/06/10   1347 
 38
  꽃의 왈츠
ijen    2003/05/07   1830 
 37
  심장의 크기 [1]
앤쏘    2003/05/03   1242 
 36
  망할 그 남자 김도중 씨 [1]
아르헨    2003/05/16   1397 
 35
  배고픔과 돈 없음, 그리고 그 남자 김도중 씨에 대하여 [1]
아르헨    2003/04/26   1231 
 34
  Love & War
ijen    2003/04/05   1980 
 
  1 [2][3][4] 
Copyright 1999-2019 Zeroboard / skin by Chan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