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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리
소천 & 동희 시리즈 1. 마음 가는데로 (상)




                         마음 가는데로 (상)
    
                                                         by 하리
                                                         kyoko72@hanmail.net
    





        
         정신없는 소란스러움…
         이런 부산함을 미리 알았다면 동희는 결코 사인회 같은 것을 열자는
         출판사 쪽의 제의에 찬성하지 않았을 것이다.
         시간이 흐르면 사람은 변하기 마련이라는데
         꽤나 활동적이었던 동희의 성격은
         30줄에 접어들면서 조용한 것을 더 좋아하게 되었다.
         시의 외곽에 마련한 작은 작업실을 겸한 집이 동희에겐 가장 편하고 안락한 장소였다.
         사람의 변화란 것은 다분히 그가 살아가며 겪는 환경에 지배당하게 마련이고
         참으로 아팠던 젊은 날, 그 상처들이 완전히 아물었다고 하면 거짓이겠지만
         이젠 차분히 바라볼 수 있는 여유를 갖게된 동희였다.
         시인으로 등단한 뒤 삼년…
         다작은 아니었지만 출간한 작품집 마다 상당히 호평을 받았고
         꽤나 넓고 두터운 독자층을 확보한 시인으로 알려진 동희였다.
         물론 동희의 시에 대해서 꽤나 날카로운 비난을 퍼붓는 사람들도 있었지만
         정작 동희 본인은 그러한 사람들의 평가에 그다지 신경을 쓰지 않는 듯,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세미나나 강연회 따위에 일절 참석하지 않을 뿐더러
         가끔 문단의 모임엔 할 수 없이 끌려 나가지만
         그 외에 소위 작가들의 모임이니 파벌이니 이런 것에
         전혀 구애되지도 끼어들지도 않는 동희의 태도에
         처음엔 문단에서도 거만하다느니 이런저런 구설수가 많았지만
         삼년이 넘어 사년에 접어드는 지금도 여전히 똑같은 태도를 보이는
         동희에 대한 그러한 구설수는 어느 덧 조금씩 가라앉아 가고 있었고
         아예 그러려니 하고 덮어두는 일이 되어 버리고 있었다.
         어거니 갑자기 등단한 시인, 그리고 등단하면서 폭 넓은 독자층을 확보한 시인…
         대단한 사상과 철학이 담긴 시가 아닌, 단지 삶이란 것의 향기와
         나름대로 사랑에 대한 김동희식의 철학이 담겨진 시였지만
         그의 그런 담백하고 화려하지 않은 문체가 연령대와 상관없이
         사람들의 감성을 자극하고 빠져들게 만드는 매력이 있었다.
        
         그런데 그 시인 김동희가 동화를,
         딱히 어른을 위한 것도 아니고 아이를 위한 것도 아닌
         그야말로 김동희다운 자신의 동화집을 출간한 것이다 .
         뭐 시인이나 소설가들이 동화집을 출간하는 경우는 빈번하기에
         그 자체만으론 그다지 센세이션한 일이 아니겠지만
         문화계의 눈길을 한번에 잡아 끌어버린 이유가 있었다.
         그 덕에 이리 귀찮은 팬 사인회까지 하게 된 것이긴 하지만
         동희로선 그것이 이유가 되었다고 해도 결코 후회할 마음은 없었다.
         그 이유?
         시인 김동희의 동화집에 삽화를 넣어준 사람이 화가 최유이였기 때문에…
         한국에서의 마지막 전시회 이후 도불하고 사년에 접어드는 지금…
         유럽 쪽에선 꽤나 여러번 전시회를 가졌지만
         단 한번도 한국에선 전시회를 갖지 않았고 화단 쪽에서 여러번 요청을 했지만
         절대 한국에선 전시회를 열지 않겠다는 대답 외엔 노코멘트를 유지하고 있는
         김유이가 동희의 동화집을 위해서 삽화를 그려 주었던 것이다.
         그러니 문단 뿐 아니라 화단 쪽에서도 이번 동화집 출간에
         꽤나 안테나를 세우며 주시를 하게 된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바란 바 아니었지만 자신이 등단하게 된 시가 아닌, 동화를 쓰게 되었던 이유…
         하나의 그림이 모티브였다.
         최유이… 천재 여류화가 그녀가 한국을 떠나기 전 마지막 전시회에서
         동희에게 선물한 작은 수채화.
         커다란 나무 아래서 아련하게 먼 하늘을 바라 보고 있는,
         소년인지 소녀인지 알 수 없는 한 아이… 그리고 지평선과 노을…
         무척이나 고적하고 쓸쓸한, 그리고 애타는 기다림 같은 것이 느껴지는 그림이었다.
         그 마지막 전시회에서 그 그림을 구입하겠다는 호사가들이 꽤나 많았고,
         그들이 제시한 액수 역시 초유의 것이었지만
         화가 최유이는 전시회 끝날까지 그 그림은 비매표를 달아 둔 채
         어떤 사람의 제의도 거절했었다.
         그리고 그림은 전시회 마지막 날…
         갤러리를 찾은 사람들이 보는 앞에서 동희에게 전해졌다.
         그 그림이 특별히 아름답거나 대단한 작품성을 가져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최유이의 화풍과는 거리가 멀어도 한참 먼,
         평론가들이나 화단의 사람들은 최유이가 저런 그림을 그렸어? 정말? 이라고
         되물을 만큼 최유이답지 않은 서글프고 가라앉은 모티브의 작품었다.
         더욱이 유화를 주로 하는 최유이의 수채화.
         화가로 이름이 알려지기 전 개인 소장품엔 수채화가 몇점 있는 것으로
         알고 있지만 화가 최유이는 철저한 유화, 그것도 비구상의 그림만을,
         그리고 상당히 정열적이고 파괴적인 표현을 하는 파격적이고 와일드한
         화풍을 구가하는 화가였다.
         그림만으로는 그 그림을 그린 사람이 여자라는 생각을 할 수 없을 만큼
         거칠고 대담한 화풍의 최유이가 지극히 소녀적 감성이 넘쳐나는 듯한,
         아니 소녀 혹은 소년의 유년기, 그 안타까움과 허탈함이 묘하게 어우러진
         느낌의 그림을 그렸기 때문에 그 그림이 수집가들의 시선을 끌었던 것이다.
         어거나 그 그림의 현 주인은 바로 시인 김동희였고
         그 그림이 김동희에게 헌정된 뒤에
         꽤나 많은 사람들이 그 그림을 구입하겠다고 제의해왔지만
         시인 김동희 역시 그 그림에 관한 한
         최유이 만큼이나 고집스럽게 불매를 표명했을 뿐이었다.
        
         이런저런 사연들로 인해 한때는 최유이와 김동희의 연애설 같은 것도
         풍문으로 흘러 다니긴 했지만 최유이 쪽에서도 김동희 쪽에서도
         그런 인터뷰 요청 따위는 철저히 거절을 했고,
         사적인 자리에서도 그 질문에 대한 답은 그저 웃음으로 얼버무리기 마련인
         동희의 태도에 결국 그 소문은 그저 소문인채 사라져 가고 있었다.
         그런데 이번 동화집 출간에 최유이가 삽화를?
         더 관심을 끌게 된 이유는 프랑스에 자리를 잡고 있는 최유이가
         올해 이년간 사귀고 있었다는 물리학자인 청년과 결혼을 발표했기 때문이다.
         항간에선 그 삽화가 이별 선물이 아니냐는 설도 돌아다녔지만
         여전히 화가 최유이나 동희 쪽에선 노 코멘트…
         단지 친구일 뿐이라는 말 외엔 어떤 답도 나오지 않는 것이다.
         어거나 그 덕에 등단 이후 지금까지 동희의 책 출판을 맞고 있던
         OO 출판사 쪽에선 팬 사인회를 제의했고
         처음엔 주저하며 거절을 하던 동희 쪽에서 어느 날인가 갑자기
         하겠다는 의사를 표명했기에 지금 이 자리가 열린 것이다.
        
         정신없이 쌓여진 책에 독자들이 원하는 이런저런 멘트를 넣어 싸인을 해 주는
         동희는 그 중간중간 마치 누굴 찾기라도 하듯…
         아니 누군가 오기를 기다리기라도 하는 듯이
         사인회장의 입구를 계속 쳐다보고 있었다.
        
         " 김선생님… 조금 쉬시죠. 점심시간도 됐고…. "
         "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되었나요? 이거 종일 계속 해야하는 겁니까? "
         " 호홋… 팬 사인회가 이런 건 줄 모르셨어요?
           그나마도 김선생님의 경우는 한자리에서만 하시는 거니 얼마나 좋아요?
           다른 작가 선생님들은 여기저기 돌아다니시면서 하신다구요.
           선생님 고집만 아니었어도 여기 말고 영풍이랑 종로 쪽에서도 했을텐데……. "
         " 아이구… 최기자님, 그런 끔찍한 말 하지 마세요.
           젊은 작가 분들은 힘이 넘쳐나는지 모르겠지만 전 늙었다구요.
           사양할렵니다. 사인회가 이런 건 줄 알았으면 절대 한다고 안했을 겁니다.
           휴…… 팔에 마비가 올 거 같아요……. "
         " 어머… 무슨 말씀이세요. 김선생님이 어디가 늙으셨어요?
           김선생님이 서른 하나시라고 하면 누가 믿겠어요? 정말 동안이시라구요.
           저보다도 젊어 보이시는 걸요. "
        
         동안, 확실히 동희의 얼굴은 동안이었다.
         지금도 대학 동기들을 만나면 졸업 때나 지금이나 하나도 변한 게 없다며
         놀려대곤 했다.
         그 또래가 그렇듯이 글을 쓰는 친구들을 제외하고는
         다들 학교 선생이나 직장을 다니는 사회인들이었기 때문에
         나름대로는 나이보다 늙어 보이는 녀석들이 꽤나 많았다.
         동희야 원체 타고 나길 동안으로 타고난 얼굴이라
         나이를 먹는 것이 겉으로 표가 나지 않았지만
         친구들은 그런 동희를 볼 때마다 자신들의 얼굴을 들이대며
         꽤나 억울해 하고 부러워 했던 것이다.
         최기자의 동안이란 말이 문득 동희로 하여금 쓴웃음을 짓게 만들었다.
         자신의 동화집에 나오는 나비의 대사……
         소년의 기다림 속에서 그 모습 그대로 변하지 않고 기다렸으면 좋겠다는…
         자신의 동안인 이유…
         아니, 근 십년의 세월동안 그 흐름의 흔적이 남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던가?
         기다림?
         아니면, 그 기다림이 동희의 시간을 그 때 이후로
         흐르지 않도록 매어두고 있는 것일까?
        
         " 김선생님? 선생님… 무슨 생각을 그리 골똘히 하세요? "
         " 아… 죄송합니다. 동창들 생각이 나서요…
           녀석들 저보고 동안이라고 꽤나 놀려대거든요. "
         " 흠… 친구분들이 부러우신 모양이죠. 사실 저도 부러운 걸요.
           나이를 먹지 않는 얼굴이라니 모든 여자들의 꿈이죠…… 호호호호. "
         " 하하하… 그런가요? "
        
         둘이 그런 환담을 나누는 사이,
         또 한사람의 팬이란 사람이 책을 들고 와서 싸인을 부탁했고
         그 사인을 마지막으로 점심식사를 위해 자리에서 일어난 동희는
         최기자가 이끄는 대로 말없이 따라 나섰다.
         교보 빌딩의 맞은 편, 세종문화회관 뒷골목에 위치한 작은 일식집 "고향".
         꽤나 조용하고 차분한 분위기를 풍기는 일식집이었다.
         그리고 그곳엔 이미 출판사 사장과 편집장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 이봐 최기자 빨리 모시고 오라고 했더니 왜 이제서야 오는 거냐? "
         " 어머… 편집장님. 전 최대한 빨리 모셔온 거라구요.
           김선생님 인기가 오죽해야 말이죠… 저한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칫…. "
         " 네. 최기자님 잘못이 아닙니다. 제가 괜히 뭉기적거리다 늦어진 겁니다. "
         " 어휴… 저 화상… 뭐든 남탓이지… "
        
         토닥거리며 말싸움을 하고 있는 편집장과 최기자를 바라보던 사장이
         동희에게 무엇을 먹을 건지 물어왔다.
        
         " 선배님, 뭘로 하시겠습니까? 여기 정식도 괜찮은데요. "
         " 아… 난 일식은 잘 몰라서… 유사장님이 알아서 시켜주시죠? "
         " 어이구… 선배 여전하시네. 선배 사석에선 말씀 낮추세요.
           출판 일로는 작가와 사장인지 몰라도 사석에선 전 절대 후배란 말입니다.
           자꾸 그러시면 서운합니다. "
         " 아아… 미안… 습관이 되버려서…… 니가 알아서 시켜……. "
         " 그럼 정식 A코스로… 최기자는? "
         " 저도 같은 걸로 할께요, 사장님… 오늘은 좀 먹어도 되는 거죠?
           저도 노가다 하고 있잖아요. "
        
         애교있는 미소를 보이며 같은 코스를 주문하는 최기자를 향해
         편집장은 밉지 않은 눈초리로 노려보며 그새 또 한마디 걸고 넘어졌다.
        
         " 허허… 이봐라 최가자야… 너 솔직히 속셈은 다른데 있으면서 왜 그러냐?
           너 김동희 선생이랑 같이 있어서 좋은 게 눈에 다 보이는데 어디서 내숭을 떠냐?
           임마… 니 뒤에 그 꼬리 아홉개나 감추고 구라를 쳐라…. "
         " 어머… 편집장님 제가 언제요?
           뭐, 김선생님이랑 같이 있어서 좋은 건 사실이지만 이거 노가다 맞아요,
           뭐… 그렇죠 김선생님? 제가 한가하게 놀고 있었던거 아니죠? "
         " 네… 최기자님도 오전 내내 바쁘셨습니다.
           너무 놀리지 마세요, 김편집님…."
         " 하하… 선배님 놔 두세요…
           저 두사람은 서로 놀려먹고 갈구는 게 사는 낙인 사람들이에요.
           그래도 오늘은 선배님 계시다고 좀 덜하는 겁니다.
           평소엔 대단치도 않은 사람들인데요."
        
         한마디 거드는 사장을 보며
         최기자는 그새 고 예쁜 입술을 삐죽거리며 토라진 표정을 지었다.
        
         " 칫… 사장님까지…
           편집장님이 일방적으로 절 괴롭히시는 거지 제가 언제요?
           전 한번도 먼저 시비건 적 없어요. "
         " 참 내, 누가 시비를 걸어? 임마, 니가 맹한 거야. "
         " 내가 어디가 맹해요? 나만큼 똑똑한 기자 있으면 나오라고 해봐요?
           내가 언제 실수한 적 있었어요?
           신입 딱지 떼고 나서 지금까지 편집장님 맘에 안 든 거 있었냐구요?
           왜 자꾸 저만 가지고 그러세요?
           힝… 김선생님 편집장님 순 심술 할아버지라구요……. "
        
         좀 과장되게 하소연을 하는 최기자를 답답하다는 표정으로 바라보며
         물만 들이키고 있는 편집장을 보며 동희는 무언가 눈치를 챘다.
         최기자의 하소연에 적당히 대꾸해 주며 사장을 바라보니
         최기자와 편집장의 눈을 피해 슬쩍 윙크를 해보이는 모습이
         자신의 짐작이 틀림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피식 웃다가 우연히 편집장과 얼굴이 마주친 순간
         그 노련하고 능구렁이 같은 편집장의 얼굴에
         어색하고 안절부절 못하는 표정이 떠오르는 것을 보며
         동희는 터져 나오려는 웃음을 애써 참아야 했다.
         그렇게 둘이 토닥거리며 이야기를 주고 받는 사이 사이에
         음식이 나오고 마지막 후식까지 먹고 난 후
         편집장은 더 있다 가겠다는 최기자를 억지로 채근하며 먼저 사인회장으로 갔고
         사장과 단 둘이 남은 동희는 은은한 향이 우러나는 차를 앞에 두고 앉아 있었다.
        
         " 선배 감사합니다. 번거롭고 시끄러운 거 싫어하시는 거 알고 있는데…
           이런 무리한 부탁 들어주신 거 말입니다. "
         " 아니야… 뭐 생각보다 좀 시끄럽긴 해도…
           내 독자들이랑 직접 얼굴을 대할 수 있어서 나도 좋은데 뭐…  내가 오히려 고맙지.
           무슨 대단한 책을 낸 것도 아니고 고작해야 동화집인데…
           볼 거라고는 유이 그림말고 뭐가 있어야 말이지…… "
         " 무슨 말씀이세요? 유이가 넣어 준 삽화도 좋지만… 이번 동화는…
           뭐라고 해야 할까요? 장사꾼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히트상품,
           선배님 독자 입장에서 말씀드리자면 묘한 감동의 물결이라고 해야할까요? "
         " 아이구, 비행기 그만 태워라. 아 참… 그나저나 넌 유이 결혼식에 가 볼 거니? "
         " 네… 그래야죠.
           다른 녀석도 아니고 최유이 결혼식인데 안 가면
           아마도 두고 두고 저주라도 받을 거 같아서 무슨 일이 있어도 간다고 했습니다.
           선배님도 가실 겁니까? "
         " 아아… 난… 글쎄…… 봐서…… 훗… "
         " 음… 선배님… "
         " 응? "
         " 저 한가지 전부터 선배님에게 물어 보고 싶은게 있었습니다. "
        
         대학 후배, 전공은 달랐지만 같은 문학 동아리의 후배였던 저 녀석,
         문학에 대한 열정은 넘쳤지만 재능은 없었던……
         하지만 졸업 후 그 열정을 재능있는 문단의 인재들을 발굴해내는 데로 돌려
         꽤 여러 작가를 발굴해내고 성공시킨 녀석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첫사랑을 조금은 알고 있는 후배…
         무엇을 묻고 싶은 건지 어렴풋이 짐작은 갔다. 그 첫사랑이 궁금한 거겠지?
        
         " 뭔데? "
         " 실례인 줄 알지만…… 험험… 그러니까… 그 소년이 기다리는 것이 대체 뭡니까? "
         " 어? "
        
         의외의 질문… 첫사랑이 아니라 동화의 내용이 궁금했던 건가?
         오늘 사인회 도중에도 많은 사람들이 물어보았던 것이다.
         홀로 남겨진 소년이 기다리는 것이 무엇이냐고…… 무엇일까?
         사람들에겐 당신들 마음 속에 있는 기다림과 같은 것이라고…
         그 기다림은 바로 읽는 이의 가슴 속에 그 답이 있다고 말했었다.
         하지만 이 후배에게도 과연 그 답이 통할 지……
        
         " 소년은 무엇을 기다리는 겁니까? "
         " 아아… 뭐 그건 누구나 다 가지고 있기 마련인……. "
         " 휴… 선배님… 그건 저한테는 안 통하는 변명이라는 거 아실텐데요? "
         " 어? 그, 글쎄… 나도 잘 모르겠다. "
         " 어제 유이 전화 왔습니다.
           선배님과 통화가 안된다고… 몇일 전에 보낸 전보 받았는지 확인 좀 해달라구요…
           그 전보의 내용이 대체 뭐였을지,
           그리고 오전 내내 누군가 기다리고 계신 거 같은 선배님 모습도 그렇고… "
         " 아아… 그 전보…… 훗……. "
         " 설마 아직도… "
         " 아직도 뭐? 유이? 하하하하하하… 이봐 유사장…… 아니 유정호……
           설마 유이가 그 전보에 약혼자를 버리고 나한테 온다고 썼을까 봐
           그러는 거야? "
         " 그건 아닙니다.
           전보 내용을 모르지만 유이가 온다는 내용이 아니란 건 이미 알고 있습니다.
           단지 궁금한 겁니다. 대체 그 소년은 무엇을 기다리는 건지…
           어떤 확신을 가지고 기다리는 건지… 그 소년은 바로 선배님이죠?
           부인하지 마십시요… "
         " 허허…… 이봐…… "
         " 선배님…!!! 저도 알 만큼 알고 있습니다. 선배, 유이, 그리고 소천 선배…… "
        
         알고 있다고? 어떻게?
         물론 자신이 언젠가 술을 마시고 우연히 만난 이 후배에게
         유이에 대한 감정… 그리고 유이의 감정…
         그 괴로움을 쏟아놓은 적이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 때 분명히 소천에 대한 이야기를 한 기억은 없었다.
         그렇다고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그 날 했던 이야기는 모두 기억을 하고 있었다.
         그런데 어떻게 이 녀석이 알고 있다는 거지? 설마 유이가?
        
         " 무, 무슨 소리야? "
         " 선배…… 이제 와서 이런 이야기 하는 것 참 많이 늦었고
           어쩌면 하지 말아야 할 이야기일지 모르지만, 저 선배님 좋아했습니다.
           아니, 사랑했습니다.
           누군가를 사랑하게 되면 사랑하는 만큼 그 사람에게,
           그 사람의 주변 사람에게 예민해지기 마련이죠.
           소천 선배님… 김선배를 사랑하셨죠?
           선배는 유이를, 유이는 소천 선배님을…… 아닌가요? "
        
         자신을 사랑했다고? 이게 대체 무슨 소리란 말인가?
         멀쩡하게 결혼하고 지금 두돐을 맞는 딸과
         아직 태어나지 않은 뱃속의 아이까지 있는 녀석이?
         남자인 자신을 사랑했다니?
        
         " 너 호모냐? 너 결혼했잖아? "
         " 하아… 선배는 여전하네요. 물론 게이인 사람들도 있지만
           남자를 좋아하게 된다고 다 게이인 건 아닙니다.
           어느 날 정신차리고 보니까 선배님을 바라보고 있더군요.
           그게 사랑이란 걸 아는데 얼마 걸리지 않았구요.
           하지만 걱정 마세요.
           그 이전이나 그 이후로 남자에게 관심을 가져 본 적은 없으니까요.
           사실은 저도 좀 걱정됐어요.
           선배님도 아시다시피 저희 집안이 그런 것을 이해해줄 만한 집안도 아니고,
           그렇다고 제 성격에 정말 제가 게이라면 그걸 숨기고 살아갈 자신도 없고…
           훗… 정말 걱정 많이 했었죠.
           하지만 졸업하면서 선배에 대해서 정리하고, 또 그 때 우연히 만났을 때요…
           사실 그 때 집사람 만나 사귀면서 결혼을 할까말까 고민하던 시점이었거든요.
           그런데 그 때 선배님 만나 선배님의 유이에 대한 마음을 새삼 확인하고
           그러면서 선배에 대한 제 감정 완전히 정리했어요.
           그리고 나서 지금 집사람을 만났는데…… 이 사람이다 싶더라구요.
           그러니까 선배님은 제 첫사랑인 셈이죠.
           좀 특이하게 그게 이성이 아니라 동성이었을 뿐이지만요…… "
        
         동희는 갑자기 할 말을 잃었다.
         첫사랑이 남자였을 뿐이라고? 남자를 좋아하면 다 게이가 아니라고?
         문득 전에 어떤 사람에게 퍼부었던 말들이 떠올라
         동희의 가슴을 미어지게 했다.
         그 표독스러운 비난과 저주의 말들……
         그것이 과연 자신의 입에서 쏟아진 말이 분명한 건지
         어쩌면 그런 말들을 입에 담을 수 있었는지….
         하지만 엎질러진 물을 다시 주어 담을 수 없듯이
         이미 내뱉은 말 역시도 되담을 수 없는 것이었다.
        
         " 제가 왜 갑자기 이런 이야기를 꺼내는지 궁금하시죠?
           사실 저, 선배 동화집 초고를 보았을 때부터 정말 궁금했습니다.
           그것이 단지 상상의 산물이 아니란 생각이 너무나 강하게 들었으니까요.
           날아가 버린 들꽃… 떠나간 나비… 남겨진 소년…
           그리고 다시 또 다른 들꽃을 찾아 행복한 나비… 기다리는 소년…
           소년은 분명 선배님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소년이 기다리는 것은 들꽃이 돌아오는 거였죠?
           그 들꽃이 소천선배님 아닌가요? 선배는 소천선배님을 기다리시는 건가요?
           어제 유이가 그러더군요. 지나가는 말로 소천선배님을 만났다구요.
           지나가는 한마디였지만 선배의 동화집… 그리고 선배의 태도…
           뭐 이 정도는 누구나 짐작할 수 있는 일이죠.
           전 단지 그 기다리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궁금할 따름입니다.
           단순한 호기심이 아니라 제가 한때 사랑했던 사람의 마음이 궁금한 겁니다.
           방황하던 마음의 귀로 말입니다. "
         " ……. "
         " 죄송합니다.
           제가 이런 걸 물어서 선배님 기분을 상하게 만들어 드렸다면……
           하지만 전 들을 자격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비록 선배에게 다가가서 고백조차 해보지 못하고 접어버린 마음이었지만
           전 분명히 선배를 사랑했던 사람입니다.
           나름대로 그 사랑으로 많이 울었던 사람이기도 하구요.
           물어 볼 자격, 이만하면 충분한 거 아닙니까? "
         " 그래… 자격있다. 충분히. 화가 난 게 아니야. 난 화를 낼 자격도 없고…
           어거나 나로 인해서 니가 힘들고 아팠던 시간들…
           내가 알 지조차, 아니 너의 그런 힘겨움 눈치채지 못했던 거 미안하다.
           그저 그 때 니가 아주 많이 아팠지 않았기를 바래… "
         " 그건 이미 지나간 일입니다. 맺혔거나 남겨진 찌꺼기 같은 것은 없습니다.
           그런 게 남았다면 선배님의 등단 소식을 듣자마자 찾아가
           출판을 부탁하지도 않았을 겁니다. 그런 걱정은 하지 마십시요 선배님… "
        
         깍듯하고 똑부러지는 말투…
         상대에겐 편한 말투를 허용하면서도
         정작 자기 자신은 절대 함부로 말을 낮추는 법이 없는
         예절이 완전히 몸에 베어있던 이 후배.
         군인 집안에서 유일하게 군인과 관련없는 생활을 하고 있는 녀석이지만
         그런 집안의 분위기가 몸에 배어 절도있게 행동하는 버릇은 여전했다.
        
         [ 그렇겠지.
           그러한 감정들이 정리되지 않았다면
           아마도 저 녀석은 절대 내 앞에 나타나지 않았겠지.
           들을 자격은 충분해… 하지만 답해 줄 말이 없는데……. ]
        
         " 그래. 걱정 안해. 넌 그런 녀석이니까. 그런데 나도 답해 줄 말이 없어.
           네 말대로 그 소년은 내가 맞다. 기다리는 것도 소천이 녀석이 맞아.
           하지만 내가 기다리는 이유? 그건 나도 몰라.
           기다리는 대상은 소천이임이 분명하지만 그 마음이 무엇인지는 나도 잘 모르겠다.
           아까 니가 그랬지? 꼭 게이여서 남자를 좋아하게 되는 건 아니라고…
           하지만 소천인 분명 게이야. 녀석은 남자만을 좋아한다. 본인이 시인했던 일이고…
           그렇다고 녀석이 그래서 나를 좋아했다고 생각하진 않아.
           나 때문에 남자를 좋아하게 되었다고도 생각하지 않아.
           하지만 난 아직도 잘 모르겠어.
           내가 소천이를 같은 마음으로 좋아하고 있는 건지에 대해선…
           소천이 녀석 말없이 그렇게 사라져서 벌써 4년이야…
           처음에 녀석이 떠나버렸을 때는 정말 다행이다 싶었어.
           난 그 마음 받아줄 수 없는데…
           아무리 상대가 소천이라고 해도 게이라는 거… 그런 생활 감당할 자신이 없었어.
           하지만 시간이 갈수록 소천이의 빈 자리가 얼마나 큰 건지
           녀석이 내 안에서 차지하고 있던 자리가 얼마만큼 컸는지……
           그리고 내가 소천이에게 준 상처가 눈에 보이기 시작하더라.
           찾으려고 마음만 먹었다면 얼마든지 찾을 수 있었겠지,
           하지만 기다리기로 했다.
           소년이 들꽃이 다시 피기를 기다리는 그 마음… 다른 들꽃……
           아니면 들꽃이 날아간 곳을 찾아가지 않고 기다리는 마음……
           그게 내 마음이야. 반드시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어.
           언젠가는 한번은 나에게 꼭 돌아올 녀석이라고…
           그 때 녀석의 마음이 어떤 것이든……
           난 먼저 녀석을 만나면 꼭 안아줄 거라고 생각해.
           나의 마음… 나도 몰라…
           하지만 녀석이 돌아오면 그 땐 알게 되지 않을까? 항상 그랬던 거 같아.
           내가 혼란스러워하고 답을 찾지 못할 때마다
           소천이 녀석, 항상 내 곁에서 답을 제시했던 것 같아.
           그러니까 이번에도 녀석이 답을 알고 있지 않을까? "
         " 그런 건가요? 결국 소년의 마음은 들꽃이 피어나야 알 수 있는 건가요?
           유이가 그러더군요. 결자해지라고… 무슨 말이냐고 했더니 그냥 웃더군요…
           프랑스의 결자는 문제를 완전히 풀어 버렸다고 전해달래요.
           그리고 결혼식에 꼭 와 달라고, 결혼식에 오지 않으면
           이젠 오빠로 생각하지 않을 거라고 전해달라더군요. "
         " 하하하하… 유이답구나… 정말 너무나 유이다운 내용이다. "
         " 대체 전보의 내용이 뭡니까? "
         " 훗… 궁금하니? 나도 잘 몰라… 딱 세마디…
           결자해지… 마음 가는데로… 솔직해지기… "
         " 푸하하하하하…… 정말 유이다운 내용이었군요… "
         " 아, 그리고 추신에 기다려… 이 한마디가 더 있었다. "
         " 흠…… 기다려라… 그래서 지금 기다리고 계신 겁니까? "
         " 아아… 글쎄… 프랑스의 결자는 문제를 풀어 버렸다니…
           결국은 남은 두사람의 문제인 거니까.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기다리는 일뿐이야.
           오늘이 아니어도… 언젠간 반드시 올 테니까…… "
        
         동희의 말을 마지막으로 한동안 조용히 차만 마시던 두사람은
         조금은 홀가분한 표정으로 마주 웃고 식당을 나서서 다시 사인회장을 향해 걸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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