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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
소천 & 동희 시리즈 3. Life is... (11)

                           마음가는 대로 - Life is.. 11



                                      by  하리




집에서 머문 시간도 길에서 보낸 시간도 그리 많이 흐른 것 같지 않았는데 어느 새
병원은 조용히 안식의 침묵 속에 잠겨 있었다.
기숙사 소등시간처럼 조용한 어둠 속에 가라앉은 병실 복도를 말 없이 걸으며 두
사람은 각자의 생각에 빠져 있었다.

"형.. 소양이랑 같이 오시네요."

병실이 늘어서 있는 복도 한 가운데 마련되어 있는 로비에 앉아 있던 현수가 다가
오는 두 사람을 보고 아는 채를 해왔다.
사뭇 꺼칠해 보이는 그의 얼굴은 체념과 괴로움이 잔뜩 어려 있었고, 그런 그의
모습이 문득 안타깝고 안쓰럽게 느껴진 동희는 현수의 곁으로 다가가 그의 어깨를
조용히 안아 주었다.
모두 담담하게 받아들이고자 노력하고 있다고 하지만 그것이 노력한다고 쉽게 될
일도 아니거니와 오랜 지병 끝이 아닌 갑작스러운 비보에 지치고 괴로울 수밖에
없는 그 심정을 충분히 공감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힘들어 보인다."

"아니에요. 그렇게 힘들지 않아요. 그냥.."

그냥 이라며 말끝을 흐리는 투가 더할 수 없이 처량하고 불쌍해 보인다는 것을
과연 그가 알고 있을까.....

"후.. 우리 힘내야겠지? 이렇게 늘어져서 아무 것도 못하고 감상에 빠져있기엔
남은 시간이 너무 짧고, 너무 안타깝다."

"형.. 와주셔서 너무 감사해요. 내도록.... 천이형이 그렇게 가족들에게서 멀어지는
게 얼마나 속상했는지 몰라요.
형이 우리형을 잡아주신 게 얼마나 고마운지.."

생각지도 않은 말이었다.
순하고 여려서 남에게 독한 마음 같은 건 절대 갖지 못할 사람이란 것은 동희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고모님의 다른 아이들이 과연 자신과 소천의 관계를
어떻게 받아들일지 두려운 동희였다.
그들이 두 사람의 관계를 외면하고 경멸한다고 해도 할 말이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을 뿐, 이렇게 자신이 고마운 대상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따윈 해본 적이
없었던 것이다.

"무.. 무슨.. 오히려 내가 고맙지. 날 싫어하지 않아 주는 것만도.."

"아니에요. 우리 부산 내려오고 부터는 형이랑 자주 만날 기회가 없었지만
저 옛날부터 형이 정말 좋았어요. 물론 천이형도 좋아하지만 우리 형 좀 어렵
잖아요. 그런데 동희형은 정말 편하고, 그냥.. 진짜 친형이 있다면 아마 이럴
거 같다는 생각 많이 했어요.
전... 형이 천이형 옆에 있어주는 게 너무 고마운 걸요.
형이랑 같이 하고 부터 천이형한테서 사람 냄새가 나기 시작했어요.
이젠 천이형한테도 좀더 편하게 하고 싶은 이야기도 하고 그러는 걸요.
예전 같으면 생각도 못할 일인데요 뭐... 예절 바르고, 깍듯하긴 해도..
그냥 왠지 모르게 한발쯤 멀리 떨어져 있는 사람 같았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아요. 그래서 우리 모두 형에 대해서 고맙게 생각하는 거예요.
형이 아니었으면 천이형 이렇게 우리 가족 속에 돌아오지 못했을 걸요?
소양이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응. 현수오빠 말이 맞아요. 그냥 천이오빠가 사람이 나쁜 건 아닌데 왠지
어렵고, 가족이라기 보다는 먼 친척처럼 그렇게 느껴졌었는 걸요.
그런데 이젠 안 그래요. 현수오빠처럼 정말 오빠라는 느낌이 드니까요."

"그... 그랬니?"

그가 알고 있는 소천과 이들이 느낀 소천은 전혀 다른 인물인 것 같았다.
단 한번도 그가 멀리 있는 사람이라거나, 어색하고 어려운 사람이라는 느낌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한때 낮선 감정에 멀어지려 했던 적은 있었지만 그럴 때조차도 소천은 바로
곁에 있는 사람이었다.
곁에 있기 때문에 더 받아들이기 힘들었을 뿐, 현수나 소양이 느끼는 것처럼
타인과도 같은 거리감 따위는 느껴보지 못했는데..

같은 사람을 두고 서로 다른 감정을 느끼게 되는 것은 어떤 이유일까?
그건 사람을 보는 시각과 관점의 차이이겠지만 이 경우엔 그렇다기 보다는
당사자인 천의 태도 문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다.
가족들이 소천 이라는 사람에 대해서 가지고 있는 감정은 어디까지나 스스로
가족이라는 울타리 속에 어울리지 않으려 했던 그의 태도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는 항상 그랬다.
어디에 있던, 누구와 있던 자신이 정해 놓은 선을 넘어서 누군가를 들이는 일도
없었고, 또 그 이상 다가서지도 않는 사람이 바로 소천이었다.
조금 다가섰다고 생각하면 어느 새 저만큼 멀찍이 떨어져 있는..
친구들 사이에서도 친한 듯 하면서도 늘 한발자국 쯤 떨어져 있는 것 같다는 말
을 자주 들었던 그이고 보면 현수나 소양이 그렇게 느꼈던 것이 당연할지 모른다.
어쨌거나 이전의 소천에겐 친구나, 가족이나 크게 다를 바 없는 존재였을 테니까.

물론 그런 그를 가족들의 틈으로 들여보낸 사람이 자신이라는 그들의 말을 액면
그대로 인정하는 것은 아니다.
아마 동희가 아니었다고 해도 소천 역시 언젠가는 그 가족의 틈으로 스스로 걸
어 들어갔을 거라고 생각했다.
단지 자신의 존재가 그 시기를 약간 앞당겼을 뿐이라고..

그러고 보면 모든 사람에게 그와 같이 거리감을 느끼게 만들던 소천에게 그런
느낌을 받지 않았던 것은 아마도 아주 오래 전 그들이 처음 만나 친구가 되었던
그 시절부터 동희는 그에게 곁을 내어줄 수 있는 유일한 존재였기 때문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달을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해줘서 고맙네. 솔직히.. 너희들 보기에 우리가 어떻게 보일지
많이 걱정하고 있었어. 누구도 비난하지 않고 그냥 말없이 받아들여주긴
했지만 이런 거 일반적인 일이 아니니까...
행여라도 우리가 결정한 일로 인해서 천이가 가족에게서 더 멀어질까 봐.
정말 다행이고 고마운 일이지.. "

"동희오빠. 그런 생각 이젠 하지 마세요. 우리.. 이젠 한 가족이잖아요.
오빠가 진짜 우리 가족이 된 걸 얼마나 기쁘게 생각하는데요."

가장 나이 어리고, 가족 속에서의 인연이 가장  짧은 소양의 그 말은 어떤 누구
의 말보다도 더 강하게 동희의 마음속에 와 닿았다.
소천의 가족 중에서 제일 낯설다고 할 수 있는 그녀가 그렇게 느껴주는 거라면
다른 가족들의 마음 역시 같은 거라고 믿어도 된다는 생각이 들었다.

가슴 아프고 괴로운 현실 속에서 이렇게 생각지도 않은 기쁨을 느낄 수도 있다
는 것이 아이러니 하게 느껴졌다.
대놓고 기뻐할 수 있는 상황이 아니기에 그저 마음속으로만 고맙게 느껴야
하지만 그래도 그 기쁨을 완전히 감추기는 힘들었다.

이틀만에 처음으로 입가에 미소가 어리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참담한 후회와 자책에 사로잡혀 내려왔는데....

무언가 이런 마음을 이야기하고 싶었지만 왠지 더 이상 말을 하면 안될 거 같은
생각에 동희는 그저 조용히 미소를 지으며 곁에 앉은 현수와 마주 서 있는 소양
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마주치는 시선 속에서 가족이 아니라면 절대 오갈 수 없는 믿음과 편안함을
느낄 수 있었다.
가족이라는 것은 바로 이런 것이라는...
그렇기 때문에 가족이라는...
혈연과 상관없이 가슴과 영혼으로 맺어지는..

"고모님은 주무시니?"

"네. 잠드시는 거 보고 나왔어요."

"그래? 천이는?"

"형도 잠들었어요. 많이 지치고 놀랬나 봐요. 아까 가보니까 침대 가에 엎드려
잠이 들었더라구요. 깨우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그냥 두라고 하셔서.."

"그랬구나. 현수 넌 여기 계속 있을 거니?"

"아니오. 아버지 오시면 모시고 들어 가야죠.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형들 내려오시지 않았으면 우리 셋 중 한 사람이 병원에 있었겠지만..
그냥 오늘은 형들이 여기 계시는 게 좋을 거 같아서요."

"그래. 고모부 오시면 모시고 들어가라. 소양이도.. 오늘은 천이랑
내가 여기 있을게."

지치고 힘든 이틀간이었다.
청천벽력 같은 사실에 심장이 너덜너덜해지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아직은
견딜 수 있었다.
그리고 견뎌야 했다.
모두들 그렇게 소중한 사람을 보내고, 떠나면서 사는 것이 인생이라니까.
자신들만 겪는 불행이 아니라 사람이라면 누구나 겪는 일이니까.


침묵 속에 잠겨 있던 세 사람은 복도를 울리는 작은 발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왜 여기들 나와 있니?"

"아빠."

피곤한 모습을 감추지 못하고 구부정하게 걸어오던 고모부가 그들을 발견하고
다가오자 동희의 맞은 편에 서 있던 소양이 쪼르르 쫓아가 그의 품안에 고개를
파묻었다.

"이 녀석. 아직도 아이처럼 구는 버릇 못 버리고.."

"아빠. 많이 힘드셨어요? 왜 이렇게 피곤해 보이세요?"

"일이 좀 많아서 그래. 그런데 왜들 여기 이러고 있어?"

품안에 고개를 묻은 소양을 다독이며 지친 얼굴에 애써 미소를 지어 보이는 그의
모습은 실제 나이보다도 더 늙어 보여서 동희와 현수의 마음을 아릿하게 만들고
있었다.

평생을 친구처럼 서로 기대어 살아온 아내를 이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야 하는
그의 심정을 그들 중 누구도 이해할 수 없을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들 나름대로 그녀를 보내야 하는 것에 대한 아픔을 가지고 있지만 그것은
그가 느낄 상실감과는 사뭇 다를 것이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잠드셨어요. 아버지 오늘은 집에서 주무세요.
형들도 내려왔고 어머니도 오늘밤은 아버지 집으로 모시고 가라고 하셨어요."

자리에서 일어난 현수가 경철의 곁으로 다가가며 집으로 가자고 말했다.

"그래? 그럴까? 동희도 같이 가지 그러니. 피곤할 텐데.."

"아니에요. 전 천이랑 같이 병원에 있을 생각이에요. 고모부 들어가셔서 좀 편히
주무세요. 현수야. 모시고 들어가라."

"네. 아버지 가세요."

"그래. 그럼 동희야. 수고해라."

지친 것이 분명했다.
평소의 그라면 쉽게 아내의 곁을 비우는 일은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요 몇 일의 일들이 그를 무너지게 만들고 있다는 것을 여실히 느낄 수 있
었다.
자상하고 강한 사람이었지만 경철 역시 어쩔 수 없는 사람이기 때문에 이런 상황
에서 그 강함을 유지하길 바란다는 것은 지나친 욕심에 불과하다.
딸과 아들을 양쪽으로 걸어가는 그의 어깨가 얼마나 야위고 왜소해졌는지 동희는
새삼 그의 모습이 눈에 가득 박혀오는 것 같았다.

소천의 부모님도, 자신의 부모님도 이젠 더 이상 젊다고 할 수 없는 나이였지만
그래도 자식이기에 언제까지나 내 부모님은 항상 그 모습 그대로이실 거라고 은연
중에 믿게 마련이다. 그렇기에 부모님이 나이 드심을 쉽게 의식하고 인정하지 못
하는 것이 자식들의 이기적인 욕심이지만 이렇게 힘겨운 일이 닥치고 보면 자신들
이 외면하고 있는 사이 하루가 다르게 늙고 약해진 부모의 모습은 그런 이기적인
마음속에 가장 커다란 아픔으로 새겨지는 것이다.

문득 꽤 오래 뵙지 못한 아버지가 떠올랐다.
벌써 몇 년을 찾아 뵙지 못한 자신의 아버지 역시 고모부처럼 그렇게 늙고 쇠약해
지셨을 거라는 생각을 하자 작정한 일은 아니었지만 이렇게 불효를 하고 있는 스
스로가 한없이 부끄러워지는 것이다.
아무리 아버지가 고집을 부리시고 외면하신다고 해도 자주 찾아 뵙고 나이 들어
늙어가시는 모습을 기억 속에 담아두었어야 했는데..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한 가지를 택하면 두어가지 쯤은 포기해야 하는 것이라고 해
도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것도 있는 법이다.
그렇기 때문에 소천을, 그의 사랑을 선택했지만 그런 만큼 부모님 역시 절대 포기
할 수 도 없고, 또 포기해서도 안 되는 것인데, 그 고집을 꺾을 수 없다는 핑계로
자신에게 주어진 의무를 회피했던 스스로를 반성해야 했다.
고모님과의 관계가 소원해졌다고 생각했던 것이 자신들의 착각이었듯이 어쩌면
그의 아버지 역시 고모님처럼 아들에 대해 가지고 있던 욕심을 버리시고자 그리
모질게 외면하셨던 걸지도 몰랐다.
고모님에게도, 아버지에게도 먼저 손을 내밀고 다가서야 했던 것은 다른 누구도
아닌 소천과 동희였는데..
아무리 내리 사랑이 치사랑 보다 큰 법이라 해도 치사랑이 결코 없는 것은 아니다.
자식 된 도리로 부모님 앞에 자존심 따위는 아무 의미도 없는 고집일 뿐인 것이다.
어차피 그의 아버지 역시 아니 보시겠다고는 하셨어도 두 사람 사이를 떼어 놓겠
다고 하셨던 것은 아니었으니, 결국 먼저 다가서서 관계의 회복을 위해 노력했어
야 하는 것은 그들이었던 것이다.
받아오기만 하던 사랑에 대해서 돌려드려야 하는 입장이었음에도 그런 진실을 외
면하고 서운하다고만 투정을 부렸던 것이다.

사람은 평생 살아가면서 배워야 한다는 말은 바로 이런 것 때문에 나온 말일지도 모
른다.
나름대로는 머리가 큰 어른이라고 생각하지만 살다 보면 스스로 부끄러워지는 일들,
나 보다 어린 사람들에게 배우는 일들이 허다한 법이다.
사랑은 그저 내리사랑만 있는 거라고 단정하듯 생각하고 올려드려야 할 치사랑은
나 몰라라 하기 쉬운 게 바로 자식이라는 사실..
하지만 그 치사랑 역시 존재하는 것이고, 내리사랑을 주시는 부모님에게 가장 큰 힘
이 되고, 큰 기쁨이 되는 것이 바로 그 치사랑이라는 것을 깨닫고 나면 이미 때는 늦
어 버린 경우가 많았다.
그리고 지금 소천과 동희는 그런 늦은 깨달음에 가슴을 쥐어뜯으며 너덜거릴 만큼
후회로 치를 떨고 있었다.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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