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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
소천 & 동희 시리즈 3. Life is... (10)

                       마음가는 대로 - Life is..  10


                                   by   하리


한동안 넋을 놓고 마루바닥에 주저앉아 있던 동희는 날카로운 전화벨 소리에 소스라쳐
멍한 상태에서 깨어났다.

"여보세요."

-저.... 거기가 김소양씨 댁 맞나요?-

"네? 아. 맞습니다. 지금 소양인 집에 없는데 실례지만 어디시라고 전해드릴까요?"

-아뇨. 그럼 소경숙씨는......-

"고모님도 안 계십니다만.. 어디시라고 전해......"

동희는 말이 끝나기도 전에 끊겨버린 전화에 일순 당황했지만 그 전화의 주인공이 대체
누구인지 고민할 만큼 정신적으로 여유를 가지고 있지 못했다.
가족과 관련이 있는 사람이라면 다시 전화할 것이고, 소양과 관련된 것이라면 소양에게
전화를 하겠지 라고 무심하게 생각해 버린 동희는 또 다시 늘어질 것 같은 몸을 일으켰다.
힘들기로 따지면 가족들 누구와도 비교할 수 없는 입장이니까.
그의 어머니 말씀대로 지금은 이렇게 힘들다고 늘어질 수 없는 입장이니까.

풀어둔 짐 가방 안에서 부족한 것들이 무엇인지 대충 챙겨본 동희는 가방을 한쪽으로 치
워 두고 이틀 째 갈아입지 못한 옷을 편한 것으로 갈아입었다.
마음 같아선 뜨거운 물 속에 푹 잠겨 들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병원에 남겨두고
온 소천 생각에 간단한 샤워로 만족하기로 했다.
그리고 그 역시도 무언가 갈아입을 옷가지가 필요할 거란 생각에 가방을 뒤적여 가장
편해 보이는 옷을 꺼내 비닐 백 안에 담아 들고 집을 나섰다.

언제나 그들이 찾아왔다 이 현관을 나설 땐 웅성대는 식구들이 분주하게 그들을 배웅해
주곤 했었다.
담담하기 그지없는 표정이셨어도 그들이 돌아갈 땐 한번도 거르지 않고 골목 어귀까지
고모부와 함께 배웅을 해주시던 고모님이 떠올랐다.
이미 분가해 따로 살고 있는 고모내외의 자식들이 하루가 멀다 하고 찾아와 북적대는
대가족의 전형이었던 이 집이 이렇게 썰렁하게 비워지는 날이 오리라곤 상상조차 해본
적이 없었는데.....
자신의 손으로 현관문을 잠그고 나가는 일을 하게 될 줄이야.
오랜 세월의 녹을 머금은 철문이 무겁게 닫히는 소리가 왠지 불길하게 느껴진 동희는
애써 고개를 흔들며 그런 객쩍은 생각을 떨쳐내려 했다.
하지만 마음 한 구석에선 떨쳐내려고 발버둥치지 말고 이제 그만 담담하게 받아 들이라
는 종용의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도대체 어느 쪽에 귀를 기울여야 할지 갈피를 잡을 수 없어 괴로웠다.
이미 결정되어진 미래를 담담히 받아들이기 위해 노력해야 할지, 아니면 마음의 다른 구석
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와 증오에 몸을 맡겨야 할지......

그저 담담히 받아들이기엔 너무나 어이없고, 기가 막힌 일이었다.
그렇게 보내드리기엔 그도 소천도 하지 못한 것이 너무 많았고,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
았고, 듣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던 것이다.
하다못해 쭉 저 상태라고 해도 일년만, 아니 육 개월만이라도 더 곁에 계셔 주셨으면..
그렇다면 고모님이 가신 뒤에도 두 사람이 언제까지나 나란히 기대어 의지하면서 살아
갈 거라고, 이젠 더 이상 아픈 아들을 걱정하실 필요 없다고 확신을 드릴 수 있을 텐데....
이 선택이 세상 모든 사람이 인정해주는 삶이 아니라고 해도, 두 사람은 충분히 행복 하
다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을 텐데.....
아쉬운 것, 후회되는 것이 너무 많아서 담담히 받아들인다는 것이 불가능하게 보여졌다.
세상에 둘도 없는 효자라고 해도 부모가 가신 뒤에 남는 것은 후회뿐이라던가.
효자 자식도 그럴진데, 하물며 두 사람이야..

그렇다고 무턱대고 확실한 대상도 없는 분노와 증오에 마음을 맡길 수도 없었다.
그렇게 허비하기엔 주어진 시간은 너무나 짧은 것이었다.
신 따위는 믿지 않는다고, 정말 신이 있다면 이럴 수는 없을 거라고 속으로 온갖 욕을
해대며 하늘을 향해 주먹질을 하고 있지만 그런 만큼 간절히 정말 신이라는 것이 있다면
이렇게 빨리 데리고 가진 말아달라고, 하루라도 좋으니 조금이라도 더 곁에 계실 수 있게
허락해달라고 애절하게 매달리기도 했다.
너무나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지만 누구도 그 화풀이의 대상이 될 사람은 없었다.
전혀 눈치채지 못했던 가족들 중 어느 누구도 그 대상으로 적당치 않았다.
그렇다고 저렇게 무너지려 하는 소천 또한 그 대상은 아니었다.
남은 사람은 동희 자신뿐이었지만 그 또한 대상이 될 수 없었다.
자신을 표적 삼아 괴롭히고 나면 소천의 곁에서 어깨를 빌려줄 사람이 누가 있을까.
지금 그를 달래고 위로할 수 있는 사람은 동희 뿐이었다.
그가 안심하고 기대어 잠시라도 쉴 수 있는 사람은 동희 밖에 없었다.
그럼 고모님? 그녀를 상대로 자신의 분노를 풀어 버린다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있을 수
도 없는 일.
가야 할 그녀의 심정이 어떠할지 상상조차 할 수 없는데.....
아니.. 그녀의 심정을 짐작해볼 엄두조차 나지 않는데....
남겨질 자신들만큼이나 먼저 가야 할 그녀의 가슴은 그 배로 찢어져 피를 흘리고 있을
텐데....
지금까지 그만큼 그녀에게 어리광을 부렸건만 무엇이 부족해서.... 여기서 더 얼마나 어
리광을 부릴 수 있단 말인가.


깊은 한숨을 내어 쉬던 동희는 갑자기 오래 전 끊어버린 담배 생각이 간절해졌다.
한때는 꽤나 골초였지만 언제부터인지 그 담배 맛이 싫어져 끊어 버렸는데 아직도 몸에
배어있던 습관 탓인지 아주 가끔 글이 안 써질 때나,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기면 이렇게
담배 생각이 나기도 했다.
작년 정동진 여행 이후로 소천 역시 담배를 끊은 탓에 니코틴의 중독에서 멀어진 지 오래
건만 오늘은 유달리 담배의 그 쌉싸름한 냄새가 간절하게 그리워졌다.
가는 길에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한 갑 사볼까 하는 생각을 하며 골목 어귀를 벗어나던
동희는 어두운 길가 쪽에서 어떤 중년 여인과 실갱이를 하는 소양을 발견했다.

"왜 이래요. 이거 놔요."

"소양아... 잠깐.. 잠깐만 얘기 좀 하자. 잠깐이면 돼."

"할 얘기도 없고, 들을 얘기도 없어요. 가요. 그리고 두 번 다시는 나타나지 말아요."

그가 알고 있는 소양이란 아이는 나이 보다 훨씬 차분하고, 정이 많은 아이였다.
그녀와 워낙에 나이 차도 많은데다 입양하고 얼마 뒤 두 사람의 결별 아닌 결별로 인해
천의 다른 형제들과 달리 소양에 대해선 그다지 알 기회가 없었다. 하지만 소천과 함께
살게 되면서 종종 부산을 찾을 때마다 항상 다정한 미소로 두 사람을 맞이하는 그녀를
보면서 참 어른스럽고 따듯한 아이라는 인상을 갖게 되었었다.
그런 그녀가 지금 지독하리만큼 차가운 표정과 말투로 어쩔 줄 몰라 하는 중년 여인을
가차없이 뿌리치고 있는 모습은 동희에겐 놀랍고 생소한 것이었다.
저 작고 따듯한 아이의 몸 속 어디에 저런 냉기가 숨어 있었을까 싶을 만큼..
지금 그의 눈앞에 있는 그녀는 소양이 아닌 다른 사람처럼 보이고 있었다.

"소양아.... 제발.."

"추해. 당신 정말 추해 보여요. 가요. 나 토할 것 같아."

정말 토할 것 같은 표정으로 허리를 구부리는 모습에 놀란 동희가 그 쪽을 향해 달려가
그녀를 붙들었다.

"소양아. 무슨 일이니?"

"동희오빠?"

갑작스런 동희의 출현에 놀란 소양이 그대로 얼어붙은 것처럼 그 중년의 여자도 잠시
경직된 채로 두 사람을 멀뚱하게 바라보았다.
그 얼어붙은 상황을 깨트린 것은 소양이었다. 언제 토하려고 했냐는 듯이 멀쩡한 얼굴을 하고 별 일 아니라고 말하고 있었다.

"별 일 아니에요. 자꾸 도에 관심 있냐고 그러잖아요. 아주머니. 정말 관심 없어요.
그 딴 거에 신경 쓸 여유 없으니까 다른 사람한테나 얘기해보세요. 가요. 오빠."

"어.. 그...그래...."

도 운운하며 매몰차게 중년 여인을 몰아붙인 소양이 동희의 팔을 잡아끌며 가자고
하는 통에 급하게 끌려가면서도 흘낏흘낏 뒤를 돌아보던 그는 아예 그 자리에 쭈그
리고 주저앉는 중년여인의 모습을 보고 잠시 걸음을 멈추었지만 그런 그를 힘껏
잡아끄는 소양의 재촉에 못 이겨 그 자리를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

대체 저 여자가 누구길래 소양이 이렇게 매몰차게 구는지, 어린 소양이 이렇게 구는
데도 불구하고 매달리듯 사정을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했지만 어색하게 굳어 있
는 소양의 얼굴엔 아무 것도 묻지 말라는 무언의 부탁이 가득했기에 그대로 삼켜버려
야 했다.

"저기.. 소양아. 편의점에 들러 살 것들이 있는데.. 너 집에 가던 길 아니었니?"

"아뇨. 병원으로 그냥 가도 상관없어요. 죄송해요. 오빠 형편도 묻지 않고 마음대로.."

"아냐. 아무데나 편의점에 가면 되는데 뭐. 어.. 저기 가면 되겠네. 같이 갔다 갈래?"

"네."

굳이 피하지 않는 것을 보면 그다지 심각한 일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며
대체 어떤 일로 저러는지 몰라도 왠지 경우가 아니라는 생각에 그 중년 여인에 대한
이미지가 흐려져 버렸다.
어떤 사정인지 몰라도 지금 소양은 그녀의 부탁을 들어줄 사정이 아닌데...
물론 이런 일들을 모를지도 모르지만 아까 그녀를 붙들고 하는 양을 봐선 꽤 잘 아는
사이 같아 보였고, 그렇다면 모를 리가 없는 것이다.
가능하면 매사에 경우 바르게 살고 싶다고 생각하고, 그러기 위해서 노력하는 동희로
선 그 중년 여인의 태도가 아주 불쾌하게 여겨졌다.
그렇다고 일일이 간섭할 일도, 같이 욕을 해줄 일도 아니라고 생각하지만..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편의점으로 들어선 동희는 면도기와 속옷 몇 가지, 그리고 간
단한 세면도구 따위를 구입하고는 소양에게 뭔가 마시지 않겠냐고 물었다.

"날이 꽤 쌀쌀하다. 뭐 따듯한 거 마실래?"

"사주시면요."

"그래. 커피 아니면 녹차?"

"커피요. 집에선 엄마가 절대 못 마시게 하시거든요. 밖에서나 먹을 수 있는 별식이
죠."

"그래. 고모님이 그러시지. 우리 학생 때도 그러셨어. 절대 집에선 커피 구경도 못
했으니까."

계산을 하고 따듯한 커피 캔을 하나씩 손에 든 두 사람은 건널목에서 신호가 바뀌기
를 기다리며 이런 저런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묻지도 않고, 이야기하지도 않고, 마치 아까의 그 일은 없었던 듯이.

"어디 갔다 오는 길이니?"

"학교요. 이번 학기 등록하고, 이것저것 볼일도 보고.."

"그렇구나.. 등록할 시기로구나. 힘들겠다."

"아뇨. 사실 전 이번 학기는 휴학하려고 했는데 엄마가 허락하질 않으셔서......
약속했거든요. 어떤 경우에도 평소처럼 해야 할 일 절대 미루지 말고 성실하게
하기로.... 그것 말곤 힘든지 모르겠어요."

"그래. 고모님다우시다. 항상 그러셨으니까. 자기에게 주어진 일, 해야 할 일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해야 한다고.... 그래서 더 힘들 거야."

이미 까맣게 어둠이 깔린 지 오래인 거리엔 차조차 별로 없이 한적하게 밤이 깊
어가고 있었다.
신호가 바뀌자 그 어둠을 가르고 천천히 길을 건너며 두 사람은 편할 것도, 불편
할 것도 없는 대화를 계속 나누었다.
묻고 싶은 것을 커피와 함께 그냥 삼키면서, 하고 싶은 변명을 역시 커피와 함
께 삼키면서...

"오빠들이 오셔서 마음이 놓여요. 엄마가 제일 보고 싶어하고, 제일 걱정하는
사람이 천이 오빠랑 동희 오빤 걸요. 눈앞에 자식 보다 밖에 내놓은 자식이
더 걱정되는 게 부모 마음이라고.. 헤헤..... 제가 이런 말하면 우습죠?
아직 어린 게..."

"글쎄. 우습다기 보다는 왠지 여자들이 위대하게 느껴지지.
그건 여자들에게만 주어진 타고난 본능, 아니 축복이라고 해야 하나?
남자들 보다 더 따듯한 본성이라고 해야겠지. 모성본능..
그건 나이하고 상관없이 여자라면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거니까.
조금도 우습게 생각되지 않는데?"

"그럴까요? 누구나 다 가지고 있는...... "

병원 로비로 들어서며 말끝을 흐리던 소양이 갑자기 걸음을 멈추자 따라 멈춰선
동희가 왜 라는 얼굴로 곁에 선 그녀를 내려다보았다.

"오빠. 한가지만 부탁할게요. 아까 본 거..... 그냥 덮어주세요. 아빠든 엄마든..
아셔서 좋을 거 없으니까. 그래 주실 수 있죠?"

"니가 그래 주길 원한다면..... 그런데 한 가지 대답이 필요해.
내가 함구해서 너나 다른 사람들이 곤란해지는 일이 아니라는 대답.
너한테 뭔가 아주 곤란한 일이 벌어진 게 아니라는 확답.
그게 있어야 나도 니가 원하는 대로 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런 거 아니에요. 누가 곤란해질 일도 없고, 저 역시 곤란해질 일은 없어요.
그 아줌마 정말 그런 사람이에요. 어떻게 이름까지 알아서는 끈질기게..
왜 있잖아요. 집안의 우환이 조상 탓이니..이러면서.....
진짜 귀찮아 죽겠어요. 잊을 만 하면 한번씩......"

살짝 이마에 주름까지 잡아가며 귀찮다고 투덜대는 모습이 왠지 어설퍼 보였지만
그렇다고 여기서 그 말이 사실이냐고 따질 수도 없었고, 또 그럴 만큼 자격이 있는
지도 알 수 없는 동희는 애써 아니라고 하는 소양의 말을 믿어줄 수밖에 없었다.

"그래. 소양이 니 말 믿을 게. 대신.. 혹시라도 그 일로 뭔가 문제가 생기면 절대 숨
기지 말고 나한테 얘기해 줄 수 있겠지? 고모부도 그러시고 다들 마음들이 엉망이실
텐데... 너도 선뜻 이야기하기 힘들 테고, 나라도 좋다면 언제든지 얘기해 줘.
천이 동생이면 나한테도 동생인 거니까."

"그...그럴게요. 고마워요 동희오빠."

고맙다고 말하는 소양의 얼굴이 살짝 붉어지는 것을 동희는 보지 못했다.
그 말투에서 뭔가 미심쩍은 기색을 느끼긴 했지만 그렇다고 그걸 꼬투리 삼아 길게
이야기를 할만큼 여유로운 상태도 아니었기에 그냥 그렇게 지나칠 수밖에 없었다.
어리다고는 하지만 이미 성인이니까, 그리고 고모님이 키우신 이 아이가 설마 미련한
짓을 할 리가 없다는 생각을 하며..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2 23:53)

BabyAlone   2003/02/21

하리님, 정말 오랜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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