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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리
소천 & 동희 시리즈 3. Life is... (9)

                     마음가는 대로 - Life is..  9


                                  by   하리





"네. 알 수 없어요. 그게 언제가 될지."

-세.. 세상에.. 이런 일이. 어쩌면 좋아.-

작게 흐느끼는 여자의 음성을 들으며 동희는 자신도 눈물이 치밀어 오르는 것을 애써
삼키며 담담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갔다.

"집으로 모실지 아니면 이대로 병원에 계실지 아직 결정을 못했습니다.
저희도 어제 밤에야 알았어요. 일단 어머니께 연락을 드려야 할 것 같아서요."

-동희씨.. 부모님께는 알려드렸나요?-

"아직.. 이제 전화 드려야죠."

-최대한 빨리 갈게요.-

"아뇨. 그러실 필요는..."

-아니에요. 천이 때문이 아니에요. 형님께 해야 할 이야기들이 있어요.
조금이라도 시간이 남아 있을 때.. 할 수 있을 때 해야 할 이야기들이..-

"그럼."

-계속 거기 있을 거죠?-

"네. 그래야 할 거 같습니다. 일정 잡히면 연락 주십시오. 천이나 제 핸드폰으로 전화 하세요."

-그래요.-

이미 받아들인 일이었지만 이렇게 소식을 알리다 보니 새삼스럽게 이 모든 일들이 두렵게
느껴졌다. 무언가 가슴팍을 짓누르고 있는 것만 같은 압박감이 숨통을 막아오는 것만 같
았다. 애써 그런 느낌들을 외면하며 다시 수화기를 든 동희는 익숙한 번호를 눌렀다.

"어머니. 저예요."

-그래 왠일이니?-

"저... 고모님이...."

말끝을 흐리는 그의 태도에 무언가 감지하신 걸까. 아주 조심스러운 음성으로 그의
이름을 부르시는 어머니의 목소리에 동희는 목이 메어 왔다.

-동희야..-

"고모님이 쓰러지셨어요."

-뭐?-

"희망이 없데요. 미리 알려드려야 할 것 같아서...."

-이게 무슨 일이라니. 대체.. -

"어떻게 해요.. 어머니.. 고모님 저렇게 가시면 천이... 어떻게 해요..."

-니가.. 아니다. 어느 병원이니.  내 당장 내려가마.-

"여기... 부산.. 침례병원이요. 어머니.... 저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어요.
어떻게 해야 할지....."

-울지 마라. 니가 무슨 자격이 있어 우는 거니? 너 마저 그러면 천이는 누구한테
기대겠어? 너라도 정신 단단히 차리고 있어라. 가족들 누구 하나 제정신이 아닐 텐데..
지금 니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몰라서 이러니?-

울먹이며 어쩌면 좋으냐고 되뇌이는 동희를 향해 지독할 만큼 냉정한 말을 쏟아내시는
어머니의 태도에 놀라 터져 나오려던 울음이 쑥 들어가 버리고 말았다.
정이 많고 다정하시기만 한, 그가 알고 있는 어머니가 아니었다.
이렇게 냉정한 어투로 말씀하시는 건 단 한번도 본적이 없었다.
소천과의 일을 말씀 드렸을 때도 당황해만 하셨지 언성을 높이지도, 냉정하게 말씀하시
지도 안았었던 분이었다.
그런 분의 냉정하고 딱딱 끊어지는 말투는 감정 속으로 빠져 들어가려는 그의 이성을
다시금 반짝 깨워놓고 있었다.

-지금 니가 해야 할 일이 뭔지 누구 보다 잘 알고 있을 거야. 니가 천이 옆에서 힘이
돼 줘야지. 아프고 괴롭다고 한들.. 니 심정이 천이만 하겠니?
넌 그러면 안 된다. 울지도 말고, 쳐지지도 말고, 정신 바짝 차리고.. 곁에서 버텨 줘
야 해. 알겠니 동희야? 내려가마. 언제가 될지 모르는데..
내 친구가 간다는데 내려가서 배웅해야지. 그래야지....-

친구... 그랬다. 어린 그들이 만났던 그 때 한 동네 사는 우연으로 만난 부모님들도
아이들이 친구가 되었던 것처럼 좋은 친구가 되었던 것이다.
비록 자식들의 관계가 이렇게 어른들의 바램과 다르게 발전해 버린 덕에 어색해져
버렸는지 몰라도 저 분들의 마음속엔 여전히 서로가 친구였던 것이다.
자식들은 자신들로 인해 그 관계가 무너진 거라 생각하며 그 조차도 무거운 짐처럼
가슴에 담아두고 있었지만 부모님들은 그러지 않으셨다.
어쩔 수 없이 어색해졌다고 해도 오랫동안 마음속에 담아두고 가꾼 그 우정을 그렇게
쉽게 버리지 않고 단단하게 간직하고 계셨던 것이다.

그들의 부모님들은 그런 분들이셨다.
지켜야 할 것이 무엇인지 아시고, 어떤 경우에도 그것을 소중히 지킬 줄 아는..
어떤 이유로도 쉽게 사람을 버리지 않으시는..
고모님이 두 사람을 외면한 것이 아니라, 마음속의 욕심을 떨치기 위해 외면하셨던
것처럼, 어쩌면 동희의 아버지 역시 고모님과 다르지 않은 마음을 가지고 계실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얼핏 그의 머리 속을 스쳐지나 갔다.

-......그렇게 알고... 빨리 내려가마.-

"예... 아..... 알았어요 어머니..."

전화를 끊고 멍하니 허공을 바라보고 있던 동희는 애써 멍해지려는 마음을 다잡으며
다음 전화할 곳이 어디인지를 생각했다.

그리고 또 한곳 전화를 해야 할 곳을 떠올렸다.

-오빠. 왠일이야?

"고모님이.... 쓰러지셨어."

-뭐? 무슨 소리야?-

"길어야 두 달이라고 한다. 미리 알려둬야 할 거 같아서."

-오빠.. -

".........."

-오빠.. 괜찮아? 응? 괜찮은 거야?-

"응... 난 괜찮아."

-천이 오빤 어떡하고 있어?-

"그냥.. 고모님이랑 같이 있어."

-내가 갈까? 아니 내가 갈게. 지금..-

"아냐. 너 지금 홀몸도 아니고. 그러지마.
그냥 나중에 다 끝난 다음에 그때 보자. 너 오면 다들 걱정하셔.
그러니까.. 알고만 있어. 자주 전화해줄 거니까."

-오빠.....-

감정이 풍부한 유이의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며 그 뒤로 흐느낌이 이어졌다.

".... 유이야."

-미안.. -

"아니. 또 전화 해 줄께."

서둘러 전화를 끊은 동희는 마지막으로 남은 한 곳에 전화를 돌렸다.

-OO출판사입니다.-

"유사장님 부탁 드립니다."

-누구시라고 전해드릴까요?

"김 동흽니다."

-어머 김작가님. 잠시만 기다리세요. 그렇지 않아도 연락 기다리고 있었어요.-

잠시 대기음이 흐르고 나서 익숙한 목소리가 수화기를 통해 흘러나왔다.

-유정홉니다.-

"나다."

-아... 선배님 어떻게 된 겁니까? 집 전화는 안 받고, 핸드폰도 꺼져있고.-

"부탁이 있어서 전화했어."

-무슨 부탁이신데요?-

지나치게 가라앉은 동희의 말투에서 안 좋은 낌새를 느낀 정호가 조심스럽게 무슨
부탁이냐고 물어왔다.

"너 바쁜 거 아는데.. 나 아무래도 이번 원고는 좀 뒤로 미뤄야겠다.
우리끼리 약속은 했던 거지만.. 이번만은 좀 미뤄줬으면 좋겠는데....."

-그건 문제가 안 되는데... 저.. 그 이유를......-

조심스러운 질문을 던지는 정호의 목소리에 자신이 얼마나 굳은 목소리로 이야기를
꺼내고 있는 그제서야 깨달았다.

"고모님이 쓰러지셨어."

-네? 그게 무슨....-

"지금 부산이야. 그래서....."

-많이 안 좋으신가요?-

단순한 예의상의 물음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하지만 문득 이런 이야기를 자기 마음대로 다른 사람에게 전해도 좋을지 판단이 서질
않았다. 대학 후배이고, 가까운 사이라지만 경사도 아닌 일을 함부로 전하는 것이 왠
지 꺼림찍하게 느껴졌던 것이다.
그런 동희의 주저함을 느꼈는지 정호가 조금 전과는 달리 단호한 목소리로 무슨 일인
지 물어왔다.

-선배님. 무슨 일인지 알고 싶습니다. 저 그 정도 자격은 있다고 생각하는데요.
다른 사람도 아니고 소선배님 일이잖습니까? 어느 정도 안 좋으신 겁니까?-

그의 단호한 질문에 동희는 이대로 말을 얼버무리는 것도 정호에 대한 예의가 아니라는
생각을 했다. 어쨌거나 그는 두 사람 사이를 알고 있는 사람이고, 그리고 그들을 열심히
이해하고 받아들이려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찌 보면 그 역시 두 사람에겐 가족이나 다
름 없는 사람일 수도 있었다. 혈연이 아닌 인연으로 맺어진 가족.

"많이 안 좋으셔. 길어야 두 달이라고 그래......"

-대체 무슨 병이시길래.. 선배.....-

"췌장암 말기야. 병원에선 더 이상 할 수 있는 게 없데. 약물 치료고 방사능이고
이미 환자의 몸이 견딜 수 있는 상태가 아니라고 해. 암이라는 게 밝혀지고 나서
기다리기라도 했던 것처럼 급속도로 퍼지고 있어...... "

-선배님. 저희 아버님 동기분 중에 연세대 암 센터에 계신 분이 있습니다.
그 쪽에 연락해둘 테니까....-

"아냐.. 니 마음만 고맙게 받을 게. 주치의한테 자세히 설명 들었어.
기적이 일어나지 않고선, 사람의 힘으로 할 수 있는 게 아무 것도 없더라..
아무 것도......"

아무 것도 없더라는 동희의 한마디는 그야말로 처절한 분노가 베어있었다.
정호는 그 한마디에 더 이상 무어라 토를 달 수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동희나 소천이 그런 생각을 하고 있다면 이미 더 이상 손을 쓸 수 없는 상태라는
거였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그건 두 사람을 위해서 최대한 편의를 봐주고
그들이 가족 이외에 다른 일상의 일에 마음 쓰지 않을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뿐이
었다.

-알겠습니다. 선배님. 책 문제는 잊고 계십시오. 제가 알아서 처리하겠습니다.
그것 말고 제가 도와드릴 일은 없습니까? 이쪽에서 처리해야 할 일이라든지..-

"응. 워낙 정신없이 내려오다 보니까... 집에 한번 들려줄 수 있겠니?
집 아래 동네 슈퍼 아주머니한테 물어보면 우리 집 일 봐주시는 아주머니댁
알려주실 거야. 그분한테 여벌 키가 있으니까. 미안하지만 니가 들려서 둘러봐
줬으면 좋겠다. 한겨울도 지났으니 동파 될 일도 없을 거고...
일단 가스 같은 것들.. 잠시 끊어달라고 대신 신청 좀 해줘. 그리고 아주머니께
우리 없는 동안 자주 들러 돌봐달라고 부탁도 좀 해주고... 천이네 화랑에도..
일본 어머니도 정신 없으셔서 아마 연락 못하실지 몰라...... 그러니까 니가 대신
당분간 일을 할 수 없을 거라고 전해주고... 어....그.... 그리고 나.. 나중에......."

의외로 차분하게 뒷일을 부탁하던 동희가 갑자기 말을 더듬었다.
나중에..... 그 나중에 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알 수 있었다.
가신 뒤에, 이 모든 일이 끝난 뒤에..
하지만 차마 그것을 입으로 소리 내어 말하는 것이 두려운 것이겠지.
동희의 심정을 헤아린 정호가 먼저 그 뒷말을 이었다.

-제가 알아서 연락하겠습니다. 병원에 계신 거죠? 어딥니까? 제가 가끔 병원 쪽으
로 연락해서 경과를 알아볼 테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선배님.
뒷일들은 이쪽에서 제가 알아 처리할 거니까.. 두 분은 그 쪽 일에만 마음 쓰시면
됩니다.-

"여기 구서동 침례병원이야. 고맙다. 정말......
너한테 참 여러 가지로 신세만 지는 구나."

-무슨 말씀이십니까? 신세라니요. 선배님들과 제 사이가 이런 일로 신세라고
표현할 만큼 그렇게 먼 사이였던가요? 그건 아니잖습니까.
일단 이쪽 일들은 제가 알아서 처리할 테니까 신경 쓰지 말고 잊고 계세요.
그리고 저도 바쁜 일 정리되는 대로 내려가 보겠습니다.-

"아냐. 그러지마. 괜한 걸음 할 필요 없어. 우리 다 정신도 없고, 문병객 무조건
사절하고 있어. 가족들끼리.. 그냥... 나중에 와라. 나중에....."

-..... 정 그러시면.. -

"그래... 나중에 얘기하자. 나 들어가 봐야겠다. 고맙다 정호야."

-예. 들어가십시오.-


전화를 끊고 난 동희는 그대로 전화기 옆에 주저앉아 버렸다.
현수에게 받아 두었던 열쇠로 문을 열고 싸 들고 내려온 가방을 가져오긴 했지만 솔직히
정리하고 자시고할 것도 없었다.
정신없이 챙긴 물건이고 보니  그저 손에 잡히는 대로 마구 쑤셔 넣었던 지라 정작 필요한
것은 없고 당장 필요한 속옷 따위나 면도기 따위는 일단 구입해야 할 형편이었다.
먼저 전화부터 돌려놓고 급하게 필요한 것들만 구입하러 나갈 작정이었지만 막상 생각나
는 곳에 전화를 돌리고 나니 기운이 빠져 무언가를 사러 나갈 엄두가 나지 않았다.
병원이 큰 길 건너에 있고 집과의 거리가 걸어서 십분 내외의 거리인 것이 다행이라면
다행일까.....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2 2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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