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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http://notyet.ivyro.net
열정 12 - 완

12.

나는 비틀거리면서 걸었다. 밤, 궁동의 밤은 화려하고 시끄럽지만 한걸음만 벗어나면 주택가다. 그러나 주택가에도 사람은 끊이지 않는다. 그 사람들이 흘끔거리면서 지나가고 있었다. 문득 속이 메스꺼웠다. 나는 엉덩이를 벤치에 붙였다. 앉는 순간 온 몸이 부서지는 듯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누군가의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손을 저었다.

“괜찮아요.”

내 목소리가 아득했다. 사실 눈앞이 어두워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뺨이 터졌는지 혀가 둔하게 움직였다. 어디로 가야하지. 나는 깜깜한 시야라도 보기 위해 눈을 뜨고 시선을 앞으로 돌렸다.
갈 곳이 없었다.
보고 싶었다.
혜영을 보내고 누웠다. 상념이 많았는데도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자다가 이상한 소리가 들려 잠이 깼다. 색, 색, 들리는 소리가 숨소리라는 생각이 들자마자 잠이 퍼뜩 깼다. 몸을 벌떡 일으키는 순간 눈앞에 불꽃이 튀었다. 정신없이 눈앞이 뒤집혔다. 몸이 허공에 떴다.
“컥!” 목으로 내장이 튀어나올 듯 몸이 흔들렸다. 나는 몸을 웅크렸다. 배를 친 주먹은 쉬지 않고 몸 여기저기를 두들겼다. 잠시 웅크려 맞으면서도 몸을 수습한 뒤에야 앞이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놈은 나를 정확히 치고 있는데! 순간 몸이 떨렸다. 눈이 멀었나 두려웠다. 허리가 부서질 듯, 옆구리를 맞아 침을 토하면서도 나는 손을 들어 눈을 만졌다. 뭔가가 가리고 있었다. 안심하기도 전에 손목을 붙들렸다. 그리고 웅크리고 있던 몸이 홱 뒤집혔다.
공포가 엄습했다. 대체 누가 이러는지, 얼마나 맞을지, 죽지는 않을지, 두려웠다. 손목을 빼내려고 안간힘을 쓰는데 한 번 붙들린 손목을 빼내기란 죽기보다 어려웠다. 손목에 힘이 도통 들어가지 않았다. 이를 악문 순간, 뜨거운 감촉이 배에 닿았다. 잠시 머리가 비었다. 다음 순간 혐오감이 오싹오싹 등줄기를 훑어내렸다.

“치워!”

나는 몸을 비틀며 고함쳤다. 감촉이 순순히 떨어졌다. 손목을 뒤흔드는데, 이번엔 그예 입안이 터졌다. 충격에 몸이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나마 까닥일 수 있었을 때는 이미 손목이 뭔가에 묶여 있었다. “하아…” 낮은 한숨이 귓가에서 흘렀다.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몸이 멈췄다. 섬광이 뇌리에서 번쩍였다.
손길이 가슴을 어루만지는데도 머리가 제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혹시, 모른다. 모르는 일이다. 그러나 내가 당하는 것만은 분명했다. 어째서 일이 이렇게 된 걸까. 뭐가 잘못된 걸까.
손길에 젖꼭지가 팽팽해지고 있었다. 혹시나 싶어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그 어떤 말도 하기 어려웠다. 그저, 이 손의 주인이 여기서 멈추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몸은 비록 삐걱댈지라도 없었던 것처럼 넘어갈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그럴 수는 없었다.
손이 허리를 잡아 돌려눕혔다. 기묘한 예감이 가슴속에 자리잡았다. 나는 불안감으로 이를 악물었고, 스미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사람을 참담하게 만드는 불안이었다.
발목이 잡혀 벌어졌다. 다리가 벌려지는 그 느낌, 앞이 보이지 않아도 느껴지는 그 시선, 섬뜩했다. 나는 침묵한 채 기다렸다. 여기서 끝나기를. 확인하지 않기를. 그러나 손이 엉덩이 사이를 조심스럽게 건드렸다. 나는 부어오른 목으로 침을 삼켰다. 피비린내가 입안에 가득찼다. 그렇게 참담한 심경을 끌어안고 나는 조용히 중얼거렸다.

“너, 중환이냐?”

색색대던 숨소리가 멎었다. 뭔가가 가슴 속에서 부서졌다.
나는 다시 벤치에서 일어나 걸었다. 어디로 가야할지 알 수 없었다. 정신을 차려보니 바 앞이었다. 온더락이 흘러들며 진한 알코올맛과 화끈한 통증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바텐더가 나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괜찮으세요?”

그렇게 물으며 바텐더는 재빠르게 비닐봉투로 즉석에서 얼음주머니를 만들어 안겨주었다. 나는 고맙게 받아들고 술값과 팁을 내려놓은 채 바를 나섰다.
이 근처에서 교수를 처음 보았지. 나는 계단을 내려다보았다. 계단에 앉아서, 머리를 감싸고, 술에 취해 있었다. 얼마 전 일이었다. 1년도 지나지 않았다. 그 일이 까마득하게만 여겨졌다.
나는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무의식 중에 걷다 보니 와 있었다고 변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길은 너무 길었고 내 의식은 또렷했다. 걸을 때마다 전신이 욱신욱신 아팠다. 한 걸음이 너무 길었다.
그곳에 가서 보면 생각날 것이다. 어디로 가야할지, 무엇을 해야할지 생각날 거다. 그러니까 가는 거야. 다른 이유가 아니야.
나는 나 자신을 속이면서 걸음을 옮겼다.
담 너머로 빛이 넘어오고 있었다. 나는 집을 바라보는 자리를 찾아 대충 주저앉았다. 오롯이 빛나는 집. 대문을 열면 작은 마당. 한쪽에 차고. 현관을 들어서면 통유리로 전면이 트인 거실과 미닫이 문으로 열리는 방과 주방. 책상과 컴퓨터와 앉아서 책을 보고 메일을 쓰고 공부하며 작업하는 교수의 등. 나는 이부자리에 드러누워 그런 교수의 등을 바라보면서 야한 상상을 펼치고는 했었다. 내가 교수를 범하는 그런 상상을.
나는 낮게 웃었다.

“왜 이렇게 늦었어.”

교수의 마른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살짝 고개를 돌렸다. 교수가 어느새 등 뒤에 와 있었다. 길쭉한 손가락이 내 어깨를 끌어안다가 흠칫 멎었다.

“어디서 이렇게 다쳤어! 누가 이랬어?”

교수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아닌 게 아니잖아! 자네 발음도 지금 이상해! 봐봐, 얼마나 다친 거야?”

-        왜 나는 안돼! 교수랑 잤지? 혜영이랑도 잤어! 그럼 왜 나는 안되는 건데? 왜 나는 안돼?
중환이 놈의 목소리가 내 안에서 울렸다. 교수가 내 뺨에 손을 얹었다. 놈의 목소리가 사그라들었다. 나는 눈을 내려감았다. 떨어져야 하는데. 돌아가야 하는데. 여전히 갈 곳이 생각나지 않았다.

“치료하자.”

교수가 손목을 잡아끌었다.
곤란하다. 정말 마음이 흔들린다.

“돌아온 거 아니에요.”

교수가 잠시 서서 나를 바라보았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돌아온 거 아니야.”

교수가 손을 뻗었다. 어깨가 딸려갔다. 그가 나를 끌어안았다.
따뜻하고 다정했다.

“아니라니까?”

교수는 말없이 내 허리에 손을 두르고 머리를 쓰다듬었다. 뒤통수에 규칙적으로 손이 오르내렸다.

“자네가 내 앞에 나타났을 때, 난 꿈이라고 생각했어.”

교수가 천천히 말을 시작하고 있었다.

“게이바에 자네가 나타났을 때, 있을 수 없는 일이라고 생각했어. 그런 우연이 어디 있어? 그래서, 그 날 아침, 그게 모두 꿈이라고 생각했어. 자네가 내 집에 있는 걸 보고 내가 만들어낸 꿈이라고.”

교수의 와이셔츠가 젖고 있었다.

“믿을 수가 없었어. 금방 자네가 사라질 거라고 생각했어. 그래서 붙잡을 수가 없었어.”

나는 팔을 들어올렸다.

“미안해. 항상 두려웠어, 그래서 붙잡을 수가 없었어. 이젠 어디로 가도 붙잡을 테니까.”

나직한 목소리가 내 몸에 흘러갔다.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일 수 없었다. 나는 팔을 들어 교수의 등에 감았다.
해결된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어쩌면 놈은 또다시 같은 짓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혜영의 얼굴을 어떻게 다시 볼 지 모르겠고 태연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또한 여전히… 나는 그녀에게 상처입히고 싶지 않다. 내 삶이 비루하고 찌들지라도 그러고 싶지는 않다.
그러나 나는 더 이상 나를 속일 수가 없었다. 나를 억누를 수 없었다.

“울지 마.”

교수가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면서 얼굴을 교수의 와이셔츠에 문질렀다.
전제부터 바꾸고 시작하자. 내가 도저히 나를 속일 수 없다면, 기만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그렇다면 인정하고 풀어나가자.

“들어가서 상처부터 치료하자. 대체 어떤 놈이야!”

교수의 목소리가 다시 커졌다. 나는 낮게 웃었다. 다시 놈을 본다면 죽도록 패주고 두 번 다시 그런 짓을 못하게 해줘야지. 그리고, 해답이 나오지 않는 문제는, 나중에 생각하자.
나는 환한 빛이 번져나오는 집으로 발을 옮겼다.
바로 곁에서 진하게 풍겨오는 체취에 마음이 욱신 저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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으악, 3년 걸렸다 orz
시작한 장소에서 끝내게 되어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좀... 오래걸리긴 했지만-_-;;

케로 2006/08/05

오오- 완결 되었군요!!! 언제 날 잡아서 꼭 읽고 싶습니다. iㅁi <-먹고 죽을 시간도 없...(;)

엘루네드   2006/08/07

시간이 빨리 나셨음 좋겠습니다 >_< (...)

BabyAlone   2006/08/23

헉, 이거 완결났군요. 돌아가서 읽기 시작합니다!

Yurica   2006/09/08

헉?! 처음에 잘못본줄 알았는데 정말 완결이군요!
저도 돌아가서 읽기 시작합니다- //ㅅ//

엘루네드 2006/09/10

에헷, 기왕이면 감상도... (도망)

블루밍   2006/11/14

완결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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