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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http://notyet.ivyro.net
열정 11

11.

며칠을 혼곤하게 앓았다. 삐삐가 몇 번이나 진동을 했다. 일어날 수가 없었다. 열 속에서 혜영의 얼굴을 보았다. 꿈인가 싶었는데, 혜영이 나오는 꿈이라니. 생각만 해도 무섭다. 그러니 생시일 거다. 다들, 대체 내가 숨은 걸 어떻게 알아내는 거야! 잠수탄다고 했으면 내버려둬야할 것 아냐! 교수의 얼굴도 봤던 것 같다. 그건 꿈이 분명하다. 내가 마지막으로 봤던 교수의 얼굴은 관계의 끝에 동의하는 얼굴이었으니까. 말로 하지 않아도 알 수 있는 것이 있으니까.
눈을 떴을 때 곁에 큰어머니가 있었다. 놀라서 둘러보니 내 여인숙이 맞았다.
“눈 떴니?” 나는 웃었다. “어떻게 오셨어요?”
큰어머니의 안색이 파리했다.

“혜영이란 아가씨 연락을 받았거든. 네가 아프다길래.”
“별 거 아니었는데요.”
“너 사흘이나 아팠어.”

나는 겸연쩍게 웃었다. 큰어머니는 사과를 깎은 접시를 내 앞으로 밀어놓으며 조용히 말했다.

“이건 진작부터 하려던 얘긴데.”
“예?”
“이제 우리에게 보태줄 필요는 없단다.”
“예?”
“네 앞길에 신경써야지. 이제 우리도 형편 꽤 나아졌고, 너도 네 등록금 마련하는 것만으로도 힘에 부친 거 안다. 그러니 이제 괜찮아. 너도 행복해져야지.”

큰어머니가 왜 갑자기 그런 말씀을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엉뚱하게 되물었다.

“어디 가세요?”

그 때까지 안색이 굳어있던 큰어머니가 살풋 웃었다.

“가긴 어딜 가니.”

애들 올 시간이 됐다면서 큰어머니는 일어났다.
정신은 들었지만 굳이 움직일 생각이 들지 않았다. 식욕도 없었다. 하지만 큰어머니가 보온병에 죽을 담아서 두고 가셨다. 억지로 몸을 일으켜 죽을 한 숟가락 떴다. 포근하고 부드러운 죽 냄새가 퍼졌다. 입에 넣는 순간 눈이 뜨거워졌다. 대체 왜 이렇게 눈물에 헤퍼졌나 싶어 한숨이 절로 났다. 자신이 너무 바보같았다. 사과도 다 먹고, 보온병도 다 비워서 씻어놓고 누웠다. 깜박 잠이 들었던 모양이다. 눈을 뜨니 혜영이 있었다.

“다들 어떻게 알고 오는 거야-.”
“네가 생각하는 것보다 유성은 좁거든.”

혜영은 피식 웃으면서 손에 들고 있던 책을 내려놓았다.

“왔으면 깨우지 그랬어.”
“모처럼 악몽도 꾸지 않고 자고 있길래.”
“악몽?”
“열 때문에 제대로 못 자는 것 같아서.”

잠시 무슨 잠꼬대라도 했나 창백해지는 내게 혜영이 태연히 답했다.

“내가 온 건 말이지.”
“응?”
“사모님이 널 찾으셔.”
“뭐?”

나는 내가 잘못 들었나 잠깐 의심했다. 혜영은 그러거나 말거나 말을 이었다.

“사람을 풀어 찾을 수도 있지만 네 의사를 존중해서 내게 묻는대. 너한테 만나고 싶다고 전해달라던데, 이 번호로 전화해달라고 하셨어.”

나는 묵묵히 혜영이 내미는 전화번호를 들여다보았다.

“이 사람이 왜……”

나는 무어라 말해야할지 목이 막혀 그대로 앉아 있었다. 혜영의 글씨로 씌어진 전화번호가 사정없이 가슴을 찔렀다. 이 사람에게 상처입혀버렸다. 가느다란 몸으로 아슬아슬하게 서 있던 그녀를.
내게 상처입고 사라진 교수를 떠올렸다. 교수가 내게 뭐라고 했었지. 섹스할 때마다 교수는 내 눈을 보길 좋아했다. 눈을 들여다보면서 낱낱이 나를 살피는 걸, 내가 쾌락에 들뜨는 걸 살펴보면서 그 역시 달뜬 숨을 뱉으며 속삭였다. 사랑한다고.
상처입히면서 살고 싶지 않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군대에서 고참에게 밟혀 구르고, 알량한 보험금을 들고 대학을 다니는, 그다지 볼 것도 없고 하루하루 연명하는 삶일 지라도 상처입히면서 살고 싶지는 않다.
2주일동안 용돈을 모아서, 그토록 바랐던 필통을 어린 나는 사들고 왔었다. 의기양양해야 하는데 밥도 잘 넘어가지 않았다. 자신도 갖고 싶어서 매일매일 같이 문방구를 들여다보았던 짝의 실망하는 얼굴이 눈에 어른거렸다. 필통의 값을 듣고 놀라면서 한숨쉬는 얼굴이 잊혀지지 않았다. 그렇다고 내 걸 주고 싶지도 않던 어린 날의 나. 아버지가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살면서 누구에게도 상처를 주지 않을 수는 없는 거란다. 그러니까, 의식적으로 사람은 노력해야 하는 거야.
아버지의 청결한 비누내음과 함께 다정하던 목소리.
나는 고개를 들었다. 혜영이 손을 뻗어서 내 뺨을 어루만졌다. 부모님이 돌아가신 뒤 오랫동안 울지 않았다. 눈물이 말랐다고 생각했는데 사실은 눌려 있었던 것일까. 자꾸 눈물이 흘러넘쳤다.
갑작스레 꽃향기가 풍겼다. 부드러운 감촉이 입술을 누르고 있었다. 움직일 수가 없었다. 교수와는 달리 서늘한 입술이 달콤하고 부드러운 장미향을 머금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혀가 들어와 탐색했다. 막아보려고 살며시 붙든 어깨가 너무 작고 부드러워서 움직일 수가 없었다. 여자란 원래 이렇게 꺼질 듯 부드러운 건가. 나는 여자를 안아본 적이 없었다.
감히 더 이상 움직일 엄두를 내지 못한 채 가만히 굳어 있자 영원같던 시간이 끝나고 혜영의 입술이 떨어졌다.

“울지 마.”

혜영이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내 얼굴이 어땠는지 몰라도 혜영이 쿡 웃었다.

“뭐니, 그 얼굴.”
“너, 날 좋아했어?”

어리석은 질문이었다. 하지만 묻지 않고는 견딜 수가 없었다. 혜영이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면 왜 여기 앉아있겠니.”

사모님 전언이라던 건 핑계였구나.

“언……”

언제부터냐고 물으려다 입을 다물었다. 부질없었다. 물어서 뭐하겠다는 건가.

“그렇게 당황하지 말아줘.”

혜영의 뺨이 붉게 물들었다.

“너한테 알리고 싶지 않았어. 단지 충동을 못 이긴 것 뿐이야.”
“갑자기 키스해오면 누구라도 당황해! 어떻게 태연할 수 있어? 게다가 넌 친구라고!”

난 뒤늦게 벌컥 성을 냈다. 혜영이 웃었다.

“그렇다고 해두지. 간다.”
“가게?”

혜영은 일어서서 멍한 목소리를 내는 나를 내려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응. 괜찮아진 것 같으니까.”

가슴 어딘가가 아려오는 듯한 미소였다. 배웅을 거절하면서 혜영은 신발을 신었다. 그녀의 등 뒤로 맘에 두지 말라는 말이 들려오는 듯해 나는 흐려오는 눈을 깜박였다.
문을 닫은 뒤 나는 천천히 주저앉았다. 화장은 하지 않지만 향수는 뿌리는지 방에 은은한 향이 떠돌고 있었다. 혜영이 전해온 위로. 내가 동했으면 혹시 잤을지도 모른다. 혜영은 그걸 떠볼 생각이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불같이 뜨거워진 얼굴을 감쌌다. 나는 태어나서 여자를 안아본 적도, 여자에게 매력을 느껴본 적도 없는 진성게이다. 대체 언제부터 혜영이 나를 좋아했던 걸까. 가망도 없는데. 태연한 얼굴로 내 귀 뒤에 난 키스마크를 지적하면서, 연애상담을 들으면서, 군대에서 섹스를 굶으며 몸을 뒤트는 내 투정을 들으면서 대체 언제부터 혜영은 그렇게 참아왔던 것일까. 그럴 수 있나.
어쩔 수 없다. 나는 이때까지 게이였고, 앞으로도 게이일 것이다. 짝을 구하지 못해 혼자 늙어가며 하룻밤 상대조차 구하지 못하는 비루한 삶이 될지라도 나는 게이다. 변하지 않는다. 그건 어쩔 수 없다.
하지만 이런 나만 참으면 상처를 주지 않을 수 있는 사람도 있다.
아버지는 자살하겠다고 뛰어든 사람을 피하다가 돌아가셨다. 나는 장례식에서 하염없이 울었다. 어이없게 죽었다고 사람들은 한숨지었고 큰아버지는 그 자살하려던 남자에게 가서 따지고 주먹을 휘둘렀지만, 나는 혼자가 되어 느닷없는 충격에 휘청거리며 울었지만, 알고 있다. 나 역시 그렇게 행동했을 것이다. 아버지는 죽든 살든 결과에 상관없이 피하셨을 것이다. 그 다음에 어머니와 살아보려고 애쓰셨겠지만, 그 노력은 수포로 돌아갔다.
나는 그런 아버지를 사랑했다. 아버지가 옳다고 느꼈다. 그러니까…… 나는 무릎을 끌어안고 뺨을 대었다.
그러니까……
그렇게 생각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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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다음화는 엔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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