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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http://notyet.ivyro.net
열정 9

9.

요즘 같은 청년실업의 시대에 휴학으로 학생의 기간을 늘려놓은 것이 과연 잘하는 짓인가 의심스러우면서도, 어쨌거나 공부를 쉴 수는 없었다. 몸 파는 일이 아니라면 노가다만큼 노동의 양과 대가의 효율이 좋은 일도 찾기 어렵다. 특정 기술도 지식도 없는 나에게는.
학원이라도 다닐까 생각하면서 돈을 헤아려보는 나날이었다.
성실하게 공사 현장을 오가는 내게, 그날그날의 일당을 주는 것 외에는 신경 쓰지 않던 아저씨가 갑자기 나를 불렀다.

“자네, 뭐 사채라도 있어?”
“예?”

어리벙벙해서 되묻자 아저씨가 말했다.

“자꾸 쫙 빼입은 양복 하나가 자네에 대해서 꼬치꼬치 묻고 다닌다는데?”

싸늘한 것이 등줄기를 훑고 내려갔다.

“그래서요? 말해줬어요?”
“몰라? 나한텐 안 왔다. 혹시나 해서 물어보는 거여. 자네 사채는 아닌 거지?”

현장을 뒤엎으러 오는 것이 걱정스러운 모양이다.

“그럼요. 사채 같은 건 아닌데요. 그 사람이 저 찾으면 없다고 하세요!”

아저씨의 눈이 가늘어졌다.

“죄졌어?”
“아뇨!”

벌컥 소리질렀다.
어떡하지? 현장 옮겨달랠까? 아니 아예 딴 데 알아볼까?
나는 고개를 떨어뜨렸다.
너무 무서웠다. 무서워하는 자신이 우스웠지만, 정말 무서웠다. 나를 그대로 찾지 않길 바랐는데, 찾고 있는 것이다. 세상에 내 뜻대로 된 건 거의 없지만 그 사람은 도무지 알 수 없었다. 내가 휘둘리기만 하는 것 같다. 함께 있었던 것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지.
제대로된 이별을 통고해야 했던 건 안다. 도망치는 것에 불과했던 것도 안다. 하지만 도저히 그의 얼굴을 보고 말할 자신이 없었다.
왜냐하면……
그만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여인숙의 앞에 눈에 익숙한 사륜구동이 서 있었다. 차체에 그림자 하나가 기대어 섰다.
어둠에 잠긴 그 그림자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나는 가능한한 소리나지 않게 뒷걸음질치기 시작했다. 운동화 신고 다니길 잘했지, 슬리퍼였으면 대박 난감했다. 모퉁이를 돌자마자 나는 잽싸게 뛰기 시작했다.
다들 어떻게 알아내는 거야, 빌어먹을!
어떡하지? 이제 어떡하지? 머릿속이 텅 비는 듯한 감각을 느끼면서 미친듯이 달렸다. 다행히 돈은 주머니에 있고, 여인숙에는 옷가지만 몇 개 있을 뿐이다. 통장을 인터넷 통장으로 바꾼 건 참 다행이지 뭐냐, 등등 쓰잘데기 없는 생각으로 쿵쿵 뛰는 심장을 달래면서 버스 정류장을 향해 내달렸다. 내리막길을 달려 가속도가 붙었을 때, 모퉁이 하나만 더 돌면 정류장이 있는 대로일 때 발이 걸렸다. 몸이 순간 붕 떠올랐다. 넘어진다! 싶은 순간에 허리가 끌어당겨졌다. 누가 내 몸을 단단히 끌어안았다. 따뜻한 체온이 등 뒤로, 허리를 감은 손으로 느껴지는데도 오싹오싹한 소름이 돋았다.

“어디 가?”

교수의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울렸다. 귀에 닿는 숨결이 머리 속으로 스며들고 몸 속을 더듬는 듯한 감각에 저절로 몸이 떨렸다. 아니, 무서워서 떨린 건지도 모른다.

“급한 일이 있어서요.”

교수의 손이 허리춤을 살짝 더듬었다.

“그래? 잠깐 얘기할 시간도 없는 건.”

나는 숨을 들이켰다. 교수의 입술이 뒷덜미를 눌렀다.

“아니겠지?’
“이건 좀 놓고……”

교수가 쿡 웃었다. 나는 그 웃는 소리를 듣고 살짝 안심했다가, 교수가 나를 돌려세우는 순간 한 걸음 물러섰다. 입술은 웃는데 눈이 이글거렸다.
죽었구나. 눈을 질끈 감는데, 교수가 천천히 말했다.

“차에 타. 잠깐 얘기 좀 하지.”

아니, 저 눈… 저 광기가 타는 듯한 눈을 보고 있으면 차에 탔다간 그대로 지옥까지 끌려갈 것 같다. 나는 용기를 쥐어짰다.

“어디 가시게요?”

교수의 반응은 평소와는 달리 한 박자씩 느렸다. 그건 마치 교수가 분노를 있는 힘껏 누르며 평소처럼 행동하려고 애쓰는 것처럼 보여 더더욱 두려웠다.

“저런 데 들어갔다가 나도 어떻게 행동할지 모르겠어서.”

교수는 내 바로 뒤를 쳐다보고 있었다. 나는 흘긋 뒤를 돌아보고 얌전히 차에 올랐다. 모텔이었다. 내가 타는 걸 확인하고서야 교수는 운전대를 잡고 차 문을 잠갔다. 평소와 같은 버릇인데도 묘하게 신경이 쏠렸다.
교수는 차를 어디론가 몰아갔다. 어디로 가는지 알 수가 없어 가만히 있는데, 날은 완전히 어두워지고 교수는 본격적으로 도로를 달리기 시작했다. 비까지 후둑후둑 쏟아지기 시작하자 나는 조금씩 신경이 날카로워지고 있었다.

“어디 가요?”
“대청댐.”

교수가 언젠가 대전에서 좋아하는 곳이 동학사와 대청댐이라고 말한 적이 있었지.
나는 갑자기 벌벌 떠는 자신에게 울컥 화가 치밀었다. 생각해보면, 오히려 화를 내야할 건 내가 아닌가. 교수는, 속이지는 않았지만 말하지도 않았어. 난 몰랐고, 아무런 준비도 하지 않은 때 갑자기 부인과 마주해야 했어. 화를 낼 건 오히려 나잖아!

“왜 그랬어?”

교수가 낮게 물었다.
비 때문에 창문을 닫아두었는데도 차 안에 물냄새가 차오르고 있었다. 교수는 손을 열어 히터를 올렸다. 내 팔에 돋은 소름을 언제 봤을까. 빗줄기가 화음을 이루고 있었다. 수면에 쏟아지는 빗소리,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 서로 다른 주제가 교차하면서 반복했다. 이윽고 수민과 빗줄기의 노래에 유리창을 두드리는 타악의 음이 묻혔다.
교수는 내게 손을 뻗었다. 그 차갑던 손의 감촉을 떠올리다가 뜨거운 체온을 느끼고 놀랐다. 교수는 나를 응시했다. 내게 닿고 싶어하는 눈길이었다. 소통하려는 눈빛이었다. 나는 불현듯 일렁이는 욕정을 느끼고 움찔거렸다.

“왜, 그랬어?”

차를 몰고 오는 동안 교수의 분노는 한풀 꺾인 모양이었다. 분노가 수그러든 자리에서 슬픔이 엿보였다. 나는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나를 속였으니까.”
“벌이라는 건가?”

교수가 헛웃음을 지었다. 온화해지던 낯에서 분노가 되살아나 번뜩였다.

“멋대로 도망치지 마.”

교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나는 단단히 잡힌 손을 내려다보았다. 뜨겁고 확고한 손이었다. 말문이 막힌 채 나는 그저 그 손만을 보았다. 여기서, 이 자리에서 끝을 내야 한다. 이것이 마지막 기회다. 여기서 내가 교수에게 져서 넘어간다면 앞으로도 계속 그럴 테지.
되풀이해서 눈앞에 반지가 떠올랐다. 투명한 보석을 물고 있던 그 반지. 부인의 가느다란 손가락.
헤어져야 해. 우리 중 누구도 사귀자는 얘기도, 그 어떤 시작의 말을 꺼내지 않았지만 관계는 어느새 시작되어 버렸어. 시작될 때처럼 말없이 끝낼 수는 없어. 언어 없이도 끝내기엔 이미 너무 깊어져버렸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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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주엔 끝내려 했는데... ;
게시판 도배는 정말 민망하군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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