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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http://notyet.ivyro.net
열정 8

8.


학교에는 휴학계를 제출했다. 다행히 등록금을 몇 푼이나마 돌려받을 수 있었다. 그 돈으로 여인숙 일수를 찍었다. 공사장에 매일 나가기 시작했다. 친구들에게는 당분간 잠수탄다고 말해두었다. 혜영이가 눈썹을 치켜올리며 “교수님하고 헤어졌니?” 물었다. 그걸 헤어졌다고 말할 수 있을까. 아니, 도망친 것이다.

“왜?”
“모르겠어. 아무튼 더 이상은 안돼.”
“갑자기 성 취향이 바뀔 리는 없을 테고. 교수님이 바람피웠어?”

정반대지. 내가 바람의 상대였다.
나는 말하지 않았다. 내 표정이 어땠는지는 몰라도, 혜영은 더 이상 묻지 않았다. 그저 일 있으면 호출한다며 자신이 쓰던 삐삐를 던져주었다. 대체 언제적 걸 이제와서.

“이거 아직도 되긴 해?”

투덜대는데, 갑자기 시야가 흐려졌다. 혜영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학교에 다니면서 다소 느긋하게 일을 했던 탓일까 여인숙에 돌아오기만 하면 곯아떨어져 잠들었다. 일이 고되다보니 다른 생각할 틈이 없어서 그것 하나는 좋았지만 사람의 적응력은 생각보다 빠르다. 나는 금세 일에 적응했고 컴컴한 곰팡내 나는 여인숙이 싫어 공원에 우두커니 앉아 있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그러던 날,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혜영이도 모르는 내 거처를 대체 어떻게 알았는지 놈이 찾아왔다. 여인숙 앞에 인영이 있었다. 늘상 수상하고 삶에 찌든 자들이 오가는 곳이라 그러려니 하고 지나가는데 누가 나를 불렀다.

“현준아.”

누구지. 고개를 돌리다가 나는 주먹을 꾹 쥐었다. 중환이놈의 눈을 노려보았다. 놈은 마치 자신이 희생자인 양 순한 눈, 착한 척하는 눈으로 나를 바라보다가 천천히, 떠오르는 죄책감을 끝내 누르지 못한 채 고개를 돌렸다. 그런 놈이다. 위선도 위악도 떨 줄 모르는, 그저 이기적일 뿐인 그런 놈. 나는 놈을 노려보면서 여인숙 안으로 발을 딛었다. 놈이 손을 들어올렸다. 나를 붙잡으려던 손이 허공을 가르고 지나갔다. 내가 피했으므로.

“교수님과는 어떻게 됐어?”
“네가 알 바 아니야.”
“너보고 나가래?”
“왜 물어?”
“너, 교수와 사귄 거냐.”

그 말 한 마디는 지나치게 무거웠다.
놈이 던진 말을 나는 엉뚱하게 튕겨내어 바닥에 버리고, 놈은 다시 대화를 하려 말을 던지는 패턴을 무너뜨리는, 배드민턴 시합 중에 끼어든 투포환 같은 무게의 말이었다.
그 말 한 마디가 나를 뒤흔들었다. 놈에게 여지껏 빈정대고 약올리며 두던 거리를 일순간 무너뜨렸다. 내 위악의 거짓이 무너졌다.
나는 있는 힘껏 주먹을 휘둘렀다. 주먹이 광대뼈에 맞았는지 일순 시큰거렸다. 나는 한 번 주먹을 털고, 벽에 기대어 비틀거리는 놈의 멱살을 쥐었다.

“날 이해한다며?”
“현준아.”

놈의 입가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나는 놈의 부어터진 입술에 대고 웃어주었다.

“야, 넌 날 이해한다며.”
“응.”
“넌 날 이해한다며! 이 개새끼야! 날 이해한다면서! 이해한다는 새끼가!”

그런 새끼가 날 쫓아내? 커밍아웃 하자마자 날 쫓아내? 애인이 생겼다고 말도 안되는 핑계를 대고?
나는 놈의 머리를 거머쥐고 벽에 내리쳤다. 쿵, 벽이 울렸다.

“내가 병신 같으냐? 날 뭘로 봐? 야, 야 개새끼야, 내가 병신 같냐구! 애인과 동거하겠다고? 동거? 동거 같은 소리하고 자빠졌네, 씨발 새끼! 내가 얼마나 병신으로 보였으면 그 따위 구라를 지껄이냐? 어? 한 번 더 지껄여봐, 새꺄! 한 번 더 해보라구!”

나는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다. 그렇지 않으면 울음이 터질 것 같은 기분이었다. 뜨거워지는 눈가를 억누르며 필사적으로 욕을 지껄이고 놈을 두들겼다. 문득, 저항이 너무 없다 싶었을 때, 세상이 갑자기 번쩍 돌았다. 눈앞에서 뭔가가 찬란하게 부서졌다. 녀석이 나를 업어쳤다.

“미안했다.”

소리를 지르며 일어나려다가 나는 도로 누웠다.

“미안했어.”

나는 누운 채 웃음을 흘렸다.

“장난하냐?”
“아냐.”
“나 갖고 장난치니 기분 좋냐?”
“아냐!”
“그럼 뭐야, 새꺄! 이제 와서 왜 지랄이야, 씹새야!”
“내가 두려웠어!”
“뭐?”
“나 자신이 두려웠어! 널 상대로 내가 욕정할까봐 두려웠어! 너 때문에 내가 짐승같아서! 그게 두려웠다고!”

나는 다리를 들어 허공을 차며 벌떡 일어나면서 그 기세를 타고 놈의 얼굴을 후려쳤다. 놈의 코에서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코를 싸쥐면서 놈이 나를 노려보았다.

“꺼져. 너 같은 놈을 친구라 믿은 내가 한심스럽다.”

기둥처럼 움직이지 않던, 그만큼 혐오스럽던 놈의 기척이 마침내 사라졌을 때 나는 주저앉았다. 친구라고 믿었다. 무슨 10대처럼 세상에 둘도 없이 든든한 우정이라고 여기지는 않았다. 그러나 친구라고 믿었다. 커밍아웃을 일부러 하지는 않았었다. 혜영이는 그 남다른 눈치와 좋은 머리로 알아냈을 뿐, 그 외에 다른 친구들은 몰랐다.
그 때. 그 밤은 기이했다. 나는 그 날 따라 끓어오르는 기분, 그 거친 욕망을 억누르지 못해 같이 밤을 보낼 상대를 급하게 찾았다. 술에 취하지는 않았으나 욕정에 취해 서두른 크루징의 상대는 최상이자 최악이었다. 보기 드물게 나를 바텀으로 여긴 상대였다. 서두르는 나를 물어뜯고 희롱하며 순서를 밟아 내 몸을 열었다. 그 밤은 마치 내가 한 마리 짐승이 되어 구른 듯한 느낌으로 기억한다.
이튿날 집에 돌아와 본 내 몸뚱이는 온통 피멍에 가까운 울혈로 가득했다. 무심결에 옷을 갈아입다가 놈이 내 몸을 보았다.녀석은 잠시 입을 벌리고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        어떤 자식이야! 누가 그랬어!

아차 싶어 흘러나오는 한숨을 내리누르면서 나는 손을 내저었다.

-        아무 것도 아냐.
-        이게? 이게 어떻게 아무 것도 아니냐!
-        그냥… 거칠게 잤을 뿐이야.

난감했다.

-        ……대체 어떤 여잔데? 애인 있었어?
-        남자야.

그렇게 커밍아웃이 이루어졌다.
그리고 며칠 뒤, 놈은 애인이 생겼다면서 더듬더듬 말했다.

-        따로…… 살았으면 좋겠다. 연지 부르기가 힘들어서……

놈이 앞에서 고개를 숙였다.

-        미안하다.

무엇이? 뭐가 미안하냐? 미안한 줄은 아냐?

“개새끼.”

눈물이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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