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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http://notyet.ivyro.net
열정 7

나는 장을 봐온 재료와 생필품들을 하나하나 정리했다. 대파와 무, 당근, 양파 같은 것들은 냉장고에, 비누와 치약, 칫솔, 샴푸 같은 것들은 저마다의 서랍과 장에 정리해넣으면서 점차 마음이 가라앉았다.
문득 내 손을 내려다보자 열쇠가 보였다. 나는 물건들을 정리해넣으면서도 여전히 손에 열쇠를 쥐고 있었다. 그런 자신의 행동이 마치 그녀에게 열쇠를 과시하는 듯, 나도 이 집의 일원이라는 듯 주장하는 무의식의 반영인 듯 싶어, 나는 급히 열쇠를 내동댕이쳤다. 자신이 혐오스러웠다.
나는 그 때서야 비로소 그녀에게 말을 건넬 수 있었다.

"어떻게 오셨습니까?"

지나치게 늦었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 하기에는 이미 너무 늦었다. 그녀는 이마를 살짝 숙이며 대답했다.

"남편을 보러 왔습니다. 룸메이트 되시나 보군요."

남편.

"네, 교수님은 지금 강의하러 가셨을 겁니다. 뭔가 드셨습니까? 저녁 같이 하시겠어요?"

그녀는 고개를 저었다.

"괜찮습니다."

남편.
그녀의 손에 가느다란 반지가 끼워져 있었다. 투명한 보석이 빛나고 있었다.
그녀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차분한 목소리로 말을 꺼냈다.

"괜찮으시다면 물 한 잔 주시겠어요? 목이 마르네요."

나는 유리컵에 물을 부어 갖다주었다.
침묵이 흘렀다. 날이 조금씩 어두워지고 있었고 침묵은 어둠의 몇 배로 무거워졌다. 그녀는 내가 움직일 때마다 흠칫거렸고 나는 그녀의 숨소리 가닥마다 귀를 세웠다. 더 이상 견딜 수가 없다는 듯이, 그녀가 한숨을 내쉬었다.

“젊은 걸 보니 제자분이신가 보군요.”
“네, 그렇습니다.”

그녀는 석상처럼 앉아서 말했다.

“나는 뭔가를 보고도 모른척하는 여자가 아니에요.”

나는 대답하지 않고 그녀의 말이 이어지기를 기다렸다.

“하지만 당신은 저와 다른 분 같네요.”

예전에.
나는 큰아버지에게 얼마 안되는 돈이지만 그 돈으로 빚 갚는데 보태쓰라 내놓으면서 말했다.

-큰어머니에게는 말씀하지 말아주세요.
-알면 고마워할 게다.
-아니, 그러지 마세요.

큰아버지도 나도 내가 왜 그러는지 서로 알고 있었다. 예의상 모르는 척 주고받을 뿐이었다. 큰아버지는 겸연쩍고 미안했고, 나는 차라리 큰아버지가 뻔뻔하길 원했다. 내 앞에서 죄스러워 쩔쩔매는 모습을 보고 싶지 않았다. 이모뻘에 가까운 큰어머니는 더했다. 죄스러운 기분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전혀 감을 못 잡는 사람이었다. 그렇다고 숨기지도 못했다. 그래서 나는 차라리 큰어머니가 모르길 원했다.
그러나 큰어머니를 마주했을 때, 나는 그녀가 알고 있음을 직감했다. 그녀는 그 미안하고 빚진 기분을 억지로 숨기려 하면서도 내 눈을 보지 못했다. 나는...... 서투른 그녀의 연기에 장단을 맞췄다.
때로, 서로 모르는 척 하는 것이 도움될 때도 있는 것이다.

“나는 그렇지 않아요. 당신은......”

그녀는 처참한 목소리로 말을 흘렸다.

“내 남편의 애인이군요.”

나는 한 방 먹은 듯 휘청이는 몸을 억지로 지탱했다. 식탁 유리의 차가운 촉감, 나는 어느새 식탁을 붙들어 버티고 있었다.

“죄책감 가지실 것은 없어요. 나와 남편은 계약결혼이었으니까. 나는 야망이 있었고, 남편은 부친의 포기가 필요했고, 시아버님은 아들이 남처럼 평범하게 보이기를 원했기에 맞아 떨어진 계약이었으니까, 그러실 것 없어요. 나는 이 집의 손님이에요.”

그녀는, 교수의 부인은 모르는 척 할 수 없기에 말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나는 그녀와 다르기에 덮어두었다. 그녀의 목소리가 흐느끼고 있다는 것을. 상처받아 흘리는 피가 흥건히 묻은 목소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다.
교수는 기분좋은 얼굴로 돌아왔다. 뭔가 막무가내의 심보를 감춘 얼굴이었다. 대문을 열던 그 얼굴은 부인을 보자마자 표정을 지웠다. 무감정한 가면처럼 굳었다. 반면에 부인은 그 모습을 보자마자 오히려 안심이 되는 듯했다. 저 표정없는 얼굴이 부인에게는 이 집에서 유일하게 익숙한 것이다. 나는 부인이 몹시 안쓰러웠다.

“오랜만이에요.”
“무슨 일입니까?”

나는 두 사람이 이야기할 수 있도록 방으로 들어가려 했다. 하지만 교수는 내 손목을 붙들었다. 나는 뿌리쳤다. 교수는 놓지 않았다. 그렇게 나와 실랑이를 벌이며 부인에게 시선을 고정시키고 사납게 노려보고 있었다. 부인이 희미하게 웃었다. 나는 그 웃음을 보고 저항을 그만두었다.

“회사 일 때문에 왔어요.”
“전화로 하지 그랬어요?”
“주주총회에 관한 일이에요. 유출되면 곤란해서 왔어요.”
“그 말을 믿기에는 시기가 좋지 않군요.”

두 사람의 신경전과 날카로운 말다툼은 오래 전부터 있어왔던 듯 자연스러웠다. 나는 한숨짓고 사이에 끼어들었다.

“그런 회사 문제라면 두 분, 나가서 식사라도 하시면서 말씀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고맙지만 필요없어요.”
“나가서 먹기 싫어.”

두 사람이 나란히 입을 모았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빼내면서 말했다.

“아니, 제가 혼자 있고 싶은데요.”

두 사람의 날카롭던 표정이 일순 풀어졌다.

“집에서 할 일도 있고, 기왕이면 두 분의 싸움은 밖에서 해주셨으면 좋겠다는 의미입니다.”

부인의 뺨이 살짝 붉어졌다. 교수가 싱긋 웃었다. 부인이 고개를 살며시 숙였다.

“미안합니다.”
“두 분 다녀오시기 바랍니다.”

교수가 피식거리면서 부인과 함께 밖으로 나섰다. 그렇게 물어뜯을 듯 으르렁대면서도 교수는 부인을 위해 차문을 열어주고 있었다.
나는 그 두 사람의 모습을 가만히 지켜보다가, 그들이 멀리 가서 혹시라도 잊은 물건을 가지러 돌아오지 않는 걸 확인하고, 재빠르게 짐을 챙겨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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뭐랄까... 죽지도 않고 돌아온 각설이가 된 기분입니다;
요즈음 회사가 정신없이 바쁩니다만
그래도 이제 정말 완결을 위해 달리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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