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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루네드     http://notyet.ivyro.net
열정 5

5.


  아이들은 아직 학교에서 돌아오지 않았고 집에는 큰어머니 혼자 계셨다. 돈을 더 준다는 이유로 공장 야간조를 지원한 큰어머니는 이틀에 한 번 밤을 새우고 돌아온다. 피폐한 얼굴로 큰어머니는 나를 맞이했다.

  “이번달에는 조금 적어요.”

  내가 여인숙에서 자고 있기 때문에. 큰어머니는 봉투를 받아들었다.

  “무슨 일이라도 있는 거니?”

  큰어머니는 잠시 뜸을 들이면서 나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한 채 말했다. 그녀는 자신의 말이 걱정처럼 들리기를 바랐고, 나는 내 말이 자연스러운 보고처럼 들리기를 바랐다. 우리 둘 다 서로의 바람을 알고 있었다.

  “아뇨, 별 일 없어요.”

  나는, 큰어머니라기보다 오히려 젊은 이모에 가까운 그녀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늦게 큰아버지에게 시집온 큰어머니는 졸지에 여드름붙은 시조카까지 시중들어야 하는 신세가 되어버렸던- 그런 여자다. 사업을 일으키기 위해 밤낮을 뛰어다니는 큰아버지의 뒤에서 말없이 버티는 척 하며 부엌에서 그녀는 수없이 울었다. 애들은 자고 남편은 없는 시간, 그녀는 손에 든 수세미를 눈물로 적셔 반짝반짝 빛날 때까지 냄비를 문질렀다. 나는 수험생이었고 얇은 벽 너머로 설거지 소리에 묻히지 않는 흐느낌을 들으며 책장을 넘겼다.

  그래도 그 때까지는 버틸만했고 큰아버지도 큰어머니도 내게 남았던 보험금에는 끝내 손대지 않았었다.

  나는 큰어머니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말을 덧붙였다.

  “다음 달에는 좀더 드릴 수 있을 거예요.”

  “이걸로도 충분해, 너도 용돈 써야지. 옷이 그게 뭐니.”

  나는 짧게 웃었다. 일어서는 나를 그녀는 황망한 얼굴로 올려다보았다.

  “애들이 형 언제 오냐고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다렸다가 애들 얼굴 보고 가렴. 저녁도 안 먹었잖니? 먹을 거 없지만 그래도 저녁 먹고 가라. 응?”

  큰어머니는 엉거주춤한 자세로 일어서려 했고, 나는 고개를 저었다.

  비탈길을 올라올 때까지만 해도 나는 망설이고 망설였다. 아무 것도 상관없다는 듯 똑바로 나를 주시해오는 교수의 그 담백한 눈빛, 그 담백한 표정- 깜짝 놀랄 정도로 무너지고 흩어졌던 밤의 그 표정, 직선적으로 키스를 원해왔던 그 표정을 생각하면서 나는 망설였다. 하지만 이제는 망설일 여지가 없었다. 나는 결정해버렸다.

  집은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초인종을 누르려 했으나, 이미 문은 열려 있었다. 도둑이라도 들면 어쩌려고. 개도 키우지 않으면서. 나는 손을 돌려 대문을 잠그면서 자그마한 마당을 지나 현관으로 들어갔다. 문을 열자마자 음식냄새가 확 끼쳤다. 달콤한 양념냄새와 고기 냄새. 김치찌개냄새도 난다. 웃. 배가 고팠다. 음악소리가 뒤늦게 들렸다. 나는 클래식은 모른다. 바이올린 소린지 첼로 소린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현악기 소리가 들렸는데 귀에 익은 소리였다. TV에서 자주 쓰이는 음악같은데.

  내가 내는 문소리를 들었는지 부엌의 유리문을 드르륵 열면서 교수가 나왔다. 하늘색 정갈한 앞치마를 두르고 뭔가 요리를 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나를 보고, 교수는 가늘게 눈을 뜨며 웃었다.

  “저녁 먹었나?”

  “원래 이렇게 잘 차려드십니까?”

  나는 주머니에 손을 찔러넣고 주방을 넘겨다보았다. 도마와 식칼이 설거지대 안에 들어가 있는 것이 보였다.

  “혼자 먹는 것보다 둘이 먹으면 더 식탁이 화려해야 되지 않겠나?”

  교수는 빙글거리면서 몸을 돌렸다. 나는 잠시 고민했다. 무엇이 앞서야 될까. 배고픔은 익숙했다. 군대 가기 전에도, 군대에서 나온 후에도. 오히려 군대가 편했다. 말뚝박을까 고민했을 정도로. 큰아버지가 뜯어말리지 않았더라면 그대로 있었을지 모른다. 하지만 이쪽이 고픈 것도 익숙했다. 나는 여자를 안고 싶어하는 것이 아니니까, 군대에서는 늘상 고팠다.

  방문 하나가 열려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1인용 침대가 있는 것이 눈에 띄었다. 나도 모르게 누군가가 있나 싶어 그쪽으로 다가가 문을 두들기려다가 빈 방 특유의 냄새를 맡았다. 자그만 방은 옷장과 침대 뿐이었다. 자주 청소를 하는 모양인지 빈 방 치고는 먼지없이 정갈했다. 그리고 희미하게 여자 냄새가 풍겼다.

  “손님용이야.”

  교수는 아무렇지도 않게 내 등뒤에서 말하면서 문고리에 손을 댔다. 은연중에 나를 이 방에서 몰아내려는 그 얼굴을 바라보면서 나는 이걸 어떻게 생각해야 될지 난감했다. 나는, 바이를 싫어한다.

  하지만.

  나는 교수의 손에서 국자를 뺏어들면서 목선으로 손을 뻗었다. 나는 입술로 그의 귓불을 훔쳤다. 왜 그러냐는 듯 국자를 꼭 쥐고 있던 손이 순순히 국자를 내준다. 턱뼈가 움직였다.

  “배고프지 않은가?”

  “그렇긴 하지만.”

  저녁 때라 까슬까슬한 뺨을 할퀴듯, 비어있는 손으로 목을 애무하면서 나는 그와 입을 맞췄다. 농도짙은 키스, 키스, 키스. 그는 교묘하게 나를 그 방에서 이끌어내며 키스를 멈추지 않았다. 느린 춤을 추듯이 한 발, 한 발, 애무와 키스로 몸을 움직이게 만든다. 음악과 음식냄새와 헐떡이는 정욕이 뒤섞여 공기가 들뜨고 있었다. 점잖은 척 흘러나오던 클래식은 이렇게 에로틱한 것이었던가? 나는 배가 고픈지 이 남자-와의 섹스가 고픈 건지 이미 분간할 수가 없었다. 카펫이 깔린 마루는 차갑지 않았다. 난방이 되는지 적당히 따뜻했다. 베란다 바깥이 검었다. 커튼이 젖혀진 유리창은 마루를 고스란히 비춰낼 것이다. 시선에 노출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감 때문에 몸이 더욱 달아오르고 있었다.

  뒤쪽에 다가온 자극이 차갑고 매끄러운 것을 바르고 있을 때에서야 나는 약간의 정신을 되찾고 흠칫 물러섰다. 교수가 입술을 벌려 단내가 묻어나는 숨결을 뱉었다.

  “왜?”

  “바텀이 싫어요.”

  교수가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나도 싫은데.”

  “왜 나만 매번!”

  교수는 손가락에 듬뿍 묻은 크림을 바라보면서 대답을 궁리했다.

  “내가 더 잘하니까.”

  “나도 잘하는데.”

  나는 고개를 삐딱하게 꼬았다. 교수가 빙그레 웃었다.

  “미안하지만 자네 반응을 보면 적성이 어느 쪽인지는 알겠어. 나이 스물을 넘었으면 이제 자기 정체성에 솔직해야 되지 않겠나?”

  “남의 정체성을 멋대로-!”

  이번에도 교수는 대뜸 내 입을 막아 버렸다.

  그렇게 위치가 고정되어 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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컴백했어요^_^

열정은 편하게 느슨하게 쓰고 있는 글입니다. 희한하게 편해요.

요즘 꽤 가슴 통증이 심해져서 왜 아플까 멍하니 생각하고 있었는데,
오륜 시리즈를 만드는 게 어떨까 싶어졌습니다(개연성 제로)
그럼, 열정은 부부유별이 되겠네요. 왜 부부유별인지는 계속 보시면 아실 겁니다 호호
부부유별 다음에 나올 건 부자유친-이겠지만,
헷, 일단은 열정 완결부터.

바쁜 일이 끝났으니 달려봐야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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