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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ategory (59)  시도오 유즈미 (20)  미즈키 마토 (11)  후지키 사쿠야 (16)  츠지 키리나 (12) 
BabyAlone
유우히 & 아츠시 시리즈 2. 펜스 저편에 (7)(끝)

[번역/시리즈]



                           펜스 저편에

                    - 夕日&篤志 시리즈 : 2 -


                                              
                                         원작 : 츠지 키리나
                                                junko@penpen.ne.jp
                                                  
                                         번역 : BabyAlone
                                                babyalone@orgio.net
                                                babyalone@freechal.com




이 소설과 그에 이어지는 부수자료의 권리는
원작자인 츠지 키리나 상과 번역자인 BabyAlone에게 있습니다.

원작자와 번역자의 허가를 받지 않은 불펌은
절대 허락할 수 없음을 먼저 밝혀 둡니다.









7. 펜스 저편에



비는 더욱 강하게 기세를 키워,서킷을 차갑게 감싸고 있었다.
그래도 코스 쪽에선 머신의 폭음과 관객들의 성원이 변치 않고
울려서 들리고 있었다.
이런 빗속에서도 레이서들은 우승을 노린 채 계속 달렸고,
또한 보는 사람들도 승리의 행방을 생각하며 보고 있다.
거기서 탈락한 자의 일 따윈, 이제 말끔히 잊어버린 것처럼.
나는 스탠드 아래의 통로 구석에서 혼자 움츠린 채 앉아 있었다.
흠뻑 젖은 머리카락과 옷이 뺨이나 몸에 달라붙어 지독히 차가웠다.  
때때로 물방울이 주룩 뺨을 흘러,턱을 타고 떨어져 간다.
입술이 줄곧 조금씩 계속해서 떨리고 있었다.
시끄럽게 웅성거리는 그 장소에서,
줄곧 오랫동안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아무 것도 떠오르지 않았다.
내 안의 시간이 저 한순간 멈춰버린 것처럼 조금도 움직이지 않았다.
단지 머릿속에 떠오른 건,
코스 옆 흙 위에서 꼼짝도 않고 쓰러져 있던 아츠시의 모습 뿐.
많은 사람의 손에 의해 들것에 실려 운반되어 가는 광경 뿐.
달리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다,아무 것도 느껴지지 않는다…….
걱정이나 고민할 기분조차 어디론가 가버렸다.
모든 것이 어딘지 먼 세계에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제대로 상황 파악이 되지 않는다.
어떻게 지금 자신이 여기 앉아 있는 건지조차도 제대로 파악할 수 없었다.
그저 난 그 소란스러움이 지독히 거슬렸다.
모든 소리가 나를 꾸짖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모든 것이 나를 야단치고, 소리지르며 질책하고 있다.
모두 네 탓이라고 외치고 있다.
그리고 난 그 성난 소리 가운데서 두려워하고 떨면서,
귀조차 막지 못하고 침묵한 채 전신으로 받아내고 있었다.
뜻밖에 어깨에 손을 놓여,난 꿈틀 몸을 떨었다.
고개를 들자,사토루가 손에 캔 커피를 든 채 서 있었다.

" 어이,유우히. "

그는 그렇게 말하고 그것을 내민 채,내 눈 앞에서 움직이지 않았다.
나는 거절할 기력조차 없어 그저 그 말대로 침묵한 채 받아쥐고
커피를 한 모금 후루룩 마셨다.
달콤하고 쓴 액체가,천천히 입 안에 퍼져갔다.
……이상하다.아무 것도 느끼지 않는 속,묘하게 미각만이 남아 있다.
맛있는지 없는지도 모르면서,제대로 맛만은 느끼고 있다.
나에게 감각이란 걸 인식시킨다.
멍하니 커피를 마시는 날 응시하면서,사토루는 온화하게 말했다.

" 유우히.그 자식,괜찮으니까. "

나는 고개를 들고 사토루를 봤다.
사토루는 조용히 미소짓고,천천히 타이르듯 말했다.

" 지금 팀 사람에게 듣고 왔어.
   꽤나 지독하게 부딪힌 것 같지만 목숨엔 이상없는 것 같다고.
   코스에서 돌아올 땐 제대로 의식도 돌아왔고,
   물으면 대답도 잘 하더래. "

나는 잠시 침묵한 채 그를 응시하고,그리고 조심스레 되물었다.

" ……정말? "

" 응.병원으로 옮겨졌고,아마 그대로 입원하게 되겠지만,
   그렇게 걱정할 만한 사태는 아닌 것 같다고 하더라.
   그러니까 우리도 걱정하지 말라고. "

나는 말없이 그것을 받아들였다.
금방은 이해할 수 없었다.
들은 말을 몇번이고 머릿속으로 굴리면서
아츠시는 괜찮다고 몇번이나 자신에게 타일렀고,
그리고 겨우 그 사실을 납득하자 갑자기 몸의 힘이 빠져,
아 하는 큰 한숨이 입술로부터 새어 나왔다.
그와 동시에 방울방울 눈물이 넘쳐 흘렀다.
나는 아이처럼 흐느껴 울기 시작했다.
변함없이 사고 회로는 멈춘 채,
좋은가 기쁜가, 그런 당연한 감정조차 들지 않았다.
단지 단숨에 풀린 긴장감만이 나를 감싸,
울 기운조차 없는데 눈물이 멈춰지지 않았다.

" 유우히……. "

사토루가 불쌍한 듯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살짝 손을 뻗어 계속 울고 있는 내 머리를 상냥하게 가슴 속에 안아준다.
나와 마찬가지로 젖은 옷은 찼지만,
온화하게 오르내리는 그곳은 겨우 찾아낸 도피처 같았다.
나는 아무 것도 생각지 못한 채,언제까지고 사토루에게 안겨 있었다.
주변을 감싼 소음이 더욱 커진다.
아나운서의 날카로운 음성이 승리한 자의 이름을 소리높여 외치며,
찬사를 보내고 있었다.
레이스는 끝났다.
나와 아츠시의 이뤄지지 못한 약속을 남겨 둔 채.







그 다음 날부터 3일 정도,난 한심하게 열을 내며 깊이 잠들고 말았다.
차가운 비에 맞은 것에 더해서 정신적인 쇼크를 받았던 것이다.
어머니나 아버지에게 쓸데없는 걱정을 끼친 걸 후회하면서도,
침대에서 내려올 수가 없어서
그저 자면서 형태가 되지 않는 악몽으로 가위눌렸다.
나흘째 겨우 열도 내려가고,닷새째엔 어떻게든 학교에 갈 수 있게 되었다.
아직 아무래도 비틀거리는 다리로 오랜만에 교실로 들어가자,
이내 사토루가 걱정스런 얼굴로 다가왔다.

" 어이,유우히.괜찮은 거야? "

나는 힘없는 미소를 돌려 줬다.

" 응.이제 열도 내렸고. "

" 아직 안색이 안 좋아,너.무리하는 거 아냐? "

" 괜찮아.언제까지나 쉴 수도 없고. "

그래도 걱정스런 듯 바라보는 사토루에게,
나는 그 때까지 전하고 싶은데 전할 수 없던 걸 조용히 말했다.

" 사토루, 그간 고마워. "

" 응? 뭐가? "

" 그 때,여러가지로 아츠시에 관한 걸 들어줘서.
   사실은 내가 제대로 혼자 확인하잖으면 안될 일이었는데,
   나 너무 당황해서.정말 한심하지. "

내가 자조하며 그렇게 말하자,사토루는 위로하듯 상냥하게 대꾸했다.

" 그런 거…… 할 수 없잖아.
   누구라도 놀랄 거야, 갑자기 그런 일이 눈 앞에 일어나면. "

" 하지만 도움 많이 받았어.고마워, 정말로. "

고개를 숙이자,사토루는 잠시 쑥스러운 듯 곤혹스런 웃음을 떠올렸다.
한동안 어색하게 머리를 긁고 있었지만,
그런 중 몸을 의지하고 목소리를 낮추듯 하여 물어왔다.

" ……유우히,그 녀석 문병갔었어? ……그런 건 무린가.
   그 때부터 계속 잠만 자고 있었으니까, 너. "

난 한순간 당황했지만 숨길 이유도 없어서 착실히 설명했다.

" 어제,점장님께 전화해 봤다.상태,어떠냐고.
   그랬더니,몇군덴가 골절상은 입었지만 그렇게 지독한 건 아니라고.
   일단 뇌 검사 같은 건 했지만, 이상은 없는 것 같대.
   그리고,그쪽 병원은 머니까 이쪽 병원으로 옮겨왔다고 하셨어. "

" 그렇구나.잘됐네.뭐…… 큰 부상이 아니라니. "

사토루는 마음 속 깊이 안심하는 듯한 표정을 떠올려 보였다.
그러더니 이내 다시금 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 ……문병 갈 거야,오늘? "

나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사토루는 의아한 듯 눈썹을 찌푸렸다.

" 왜? 걱정되잖아, 그 녀석이? "

……확실히 걱정이었다.가슴 아플 정도로.
그래도 나에겐 그를 만날 수 없는 사정이 있었다.
만나면 아무래도 하나의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안될 것이기 때문에.
침묵한 채 고개를 숙인 내게,
사토루는 잠시 기가 막힌 것처럼 한숨을 쉬더니 타이르듯 말했다.

" 무슨 고집을 부리고 있는 거야, 너!
   그야 뭐, 니들 사이에 풍파가 있었던 건 내 책임이지만.
   이런 때까지 싸울 건 없잖아?
   이런 때야말로 네가 곁에 있는 게 당연하다 생각해.
   그 자식…… 틀림없이 기다리고 있을 거라구,널. "

사토루는 추궁하듯 나를 봤다.
그래도 난,대답할 수 없어 침묵한 채 책상을 보고 있었다.
사토루는 우리 사이에 주고받은 약속을 모른다.
저 레이스에 정말은 어떤 의미가 있는지 알지 못한다.
그러므로 내가 망설이는 이유도 모른다.
단지 싸움의 여운으로 우물쭈물 주저하고 있는 거라 생각했는지,
내 머리에 손을 올리고 머리카락을 어지럽혔다.

" 문병,가. 혼자 못 가겠다면 내가 따라 갈 테니까.
   ㅡ아, 내가 같이 가면 외려 싸움이 돼서 곤란한가. "

하하하, 하고 기운을 북돋는 것처럼 사토루는 가볍게 웃었다.
나는 말없이 듣고 있었다.
그러던 중,선생이 들어와 하루 수업이 시작되었다.
나는 오랫만인 수업을 계속 건성으로 받고 있었다.
머릿속은 아츠시의 일로 하나 가득했다.
으응,지금만이 아닌 그 날 그 사고 후부터
난 계속 아츠시의 일만 생각하고 있었다.
열에 휩싸여 몽롱한 의식 속에서도 떠올린 건 그것 뿐이었다.
목숨에 이상이 없다고 했지만, 골절상으로 괴로워하고 있을 게 아닌가.
몇군데나 골절이라니, 대체 어디를 다친 걸까.
손? 발? 그렇지 않으면 몸의 어딘가 다른 부분? 아프진 않을까?
후유증은 남지 않을까? 넌 대체 지금 뭘 하고 있을까?
만나고 싶어…….
아츠시와 만나고 싶다.지금 바로.
허락된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이 자리에서 일어나 그 곁으로 날아가고 싶다.
그렇지만 안된다.
왜냐면 우리가 만날 땐, 이번에야말로 정말로 헤어질 때이기 때문에.
그것은 우리의 약속.이루어지지 못한 아츠시의 맹세.
져 버린 나의 최후 도박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나는 아츠시를 상처입히고 말았다.
내 탓으로 아츠시는 터무니없는 주행을 하여
결과적으로 저런 사고를 내 버렸다.
아츠시를 상처 입힌 건 나.모두 내 탓.내가 없었으면 좋았을 걸…….
역시 난 그에게 있어 불필요한 존재.
필요없는…… 것…….
절망적인 생각이 가슴에 넘친다.나는 마음 속 깊이 후회하고 있었다.
그 때 확실히 헤어져 버렸다면,
쓸데없는 미련으로 쓸데없는 기대 같은 걸 하지 않았다면,
이런 결말은 나오지 않았으련만,
……그런 생각이 반복하고 또 반복해서 나를 꾸짖고 책망했다.
그리고 그렇게 생각하면 생각할수록,역으로 답은 확실해졌다.
그렇다,나는 아츠시를 만나러 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만나서 착실히 끝내지 않으면.
아츠시의 세계에서 나란 존재를 없애버리지 않으면.
그것은 너무도…… 괴롭고 고통스런 일이지만.
가슴이 꽉 죄어오는 것처럼 강하게 아파서,
나는 그 고통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방과 후,나는 아츠시가 옮겨 온 병원 현관 앞에 서 있었다.
진료시간이 끝난 저녁 무렵이라곤 해도,
입원 환자를 문병 온 사람들이 끊임없이 출입하고 있었다.
역시 병원이란 장소인 탓일까
행인들의 얼굴에도 즐거운 분위기는 전혀 없고,
어딘가 답답한 느낌이 감돌고 있었다.
그러나 그 속에서도 분명
내가 가장 어둡고 풀죽은 얼굴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나는 사토루에게 대기실에서 기다리도록 부탁하고,
1인 병동 쪽으로 걸어갔다.
결국 다시 한심하게 사토루에게 의지하고,
어린애처럼 학부형 동반을 해 버렸다.
정말이지 스스로도 기가 막힐 만치 나란 녀석은 겁쟁이다.
언제고 도망쳐서는 숨을 자리만 찾고 있다.
외과병동 대기소에서 아츠시가 있는 병실을 물어,나는 그 방으로 향했다.
안쪽에 있는 그 병실은 작은 3인실로,
입구에서 안을 바라보니 넓은 창 하나 가득 석양이 들어 와
오렌지색으로 눈부시게 실내를 비추고 있었다.
아츠시는 가장 창가 쪽 침대에 있었다.
반쯤 몸을 일으킨 채,뭔가 잡지를 읽고 있다.
변함없이 무뚝뚝한 얼굴,
정말이지 시간 때우기인 별 내키지 않는 독서를 하고 있는 듯 보였다.
침대에 던져진 왼발이 붕대로 빙빙 감겨져 있다.
뼈가 부러졌다고…… 저 다리를 말하는 걸까?
아니, 잘 보면 오른 손목에도 붕대가 감겨져 있다.
여기저기…… 상처 투성이…….당연할 지도 모른다.
왜냐면 그 때 아츠시는 굉장한 기세로 굴렀던 걸.
그래도 이렇게 일어나 있을 정도의 부상으로 끝난 건
정말로 다행스런 일이었다.
나는 생각보다도 건강해 뵈는 아츠시의 모습에 안도함과 동시에,
아프게 감겨진 하얀 붕대에 가슴이 아팠다.
잠시 입구에 선 채 그를 응시하고,그리고 천천히 안으로 들어갔다.
방 한가운데 정도까지 들어갔을 때,
아츠시가 인기척을 알아차리고 잡지로부터 얼굴을 들었다.
그리고 나를 보고,놀란 것처럼 눈을 크게 떴다.
나는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리고 인사했다.

" 야아……. "

아츠시는 대꾸도 없이 꼼짝않고 나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이윽고 조금 눈썹을 찡그리고 걱정스런 어조로 말했다.

" 너,……왠지 말랐어. "

나는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고쳐봤다.
그야 확실히,최근 수일 정도 제대로 먹지 못했기 때문에,
조금 뺨이 여위었구나 하고 스스로도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붕대 투성이로 침대에 누워 있는 상대에게 그런 말을 듣다니,
완전히 입장이 뒤바뀐 게 아닌가.
나는 기가 막혀서 웃었다.

" 아츠시는 참.그런 꼴을 하고,남 걱정 하지 마. "

침대 옆에 있는 작은 둥글의자에 몸을 내리고,그를 응시한 채 물었다.
  
" 몸, 어때? "

침대 위에 반신을 일으킨 채 앉아 있는 그의 파자마 옷깃에서,
가슴에 감겨진 흰 붕대가 언뜻 보인다.
내가 그 쪽에 시선을 돌리고 있는 걸 알아차렸는지,
아츠시는 힐끗 자신의 가슴에 눈을 돌리고 어이없는 말투로 설명했다.

" 늑골이 2개 정도 나갔지만 뭐 그리 대단한 건 아냐.
   그 외엔 이쪽 손에 금이 조금. "

그렇게 말하고,잠시 놀리듯 오른손을 덜렁덜렁 흔들고는
아파파 하고 작게 신음했다.

" 다리는? "

" 이쪽은 염좌 뿐이야.그렇다곤 해도,결국 이게 젤 아팠지만. "

아츠시는 그렇게 말하고 작게 웃었다.
왠지 상처 따윈 아무 것도 아닌 것처럼 흔들고 있다.
뭐, 반은 정말로 익숙해져서일 테지만,
그러나 나머지 반은 나를 걱정시켜서는 안된다는 배려일 테지.
왜냐면 중요한 레이스에서 사고로 물러난 데 가장 분한 건
다름아닌 아츠시일 테니까.
내가 말없이 그를 보고 있자니 그 동안에 아츠시도 말을 잃고,
우리는 서로 침묵에 잠겼다.
병실은 조용했다.
가운데 침대의 주인은 어딘가 나간 건지 모습이 없고,
제일 바깥쪽 침대에선 연로한 할아버지가 조용히 주무시고 계시다.
복도 저편에선 가끔씩 사람 목소리가 들려 왔지만 그것은 이내 지나가고,
평일 오후의 병동을 온화한 정적으로 감싸고 있었다.
너무도 조용해서,내가 하는 말이 아플 만큼 귀에 울렸다.
나는 눈을 내리깔고,툭 하니 말했다.

" 져……버렸네,레이스. "

아츠시 주변의 공기가 꿈틀 흔들린 걸 느꼈다.
그 때까지 표류했던 분위기는 사라지고,
어딘가 화내는 듯 초조한 듯한 표정을 그는 떠올려 보였다.
그래도 아무 말도 않고 굳게 입을 다문 채,
꼼짝않고 침대 위를 매섭게 쏘아본 채 내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었다.
아마 무엇보다도 듣고 싶지 않을 다음 말을.
나는 잠깐 그를 응시하고,그리고 해야 할 말을 계속했다.

" ……약속,지키러 왔어. "

아츠시는 한동안 침묵한 채 듣고 있었지만,
이윽고 고개를 들고 날카로운 눈동자를 돌려 대답했다.

" 정말, 진심인 거야? 유우히. "

확인하듯 분노한 듯 물어오는 아츠시에,
나는 도망치는 것처럼 시선을 돌리고 고개를 숙인 채 답했다.

" 진심이 아니라면,그런 약속 안했겠지,서로? "

아츠시가 눈썹을 꽉 찌푸리며 입을 다문다.
그렇다…….
그로서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음을 알고 있다.
그것은 아츠시가 한 약속이었고
그걸 지키지 못한 것도 그 자신이기 때문에.
그의 성격상 자신의 미스로 져 버린 레이스에 변명 따윌 할 리 없다.
더우기 바이크에 관해서라면 프라이드도 자신도 남보다 배는 센 그다.
그런 그가 스스로 언급한 우승이란 타겟을 놓치고
전복 퇴장이라는 무참한 꼴까지 보인 이상,
그로선 내 말을 침묵한 채 받아들일 수밖에 없다.
이 이상 다른 변명은 하지 않을 것이다.
만일 다른 가능성이 있다면,그건 나 자신이 꺾일 때다.
내가 그 약속을 무로 돌리는 외에 다른 길은 없다.
그리고…… 내게는 그럴 의지는 없었다.
나는 그와 헤어지기 위해 온 것이니까.
나는 잠자코 있는 아츠시를 보면서 의자에서 일어나 조그맣게 말했다.

" 그럼.안녕…… 아츠시. "

아츠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얼음처럼 차가운 무표정으로 흰 시트를 매섭게 쏘아보고 있었다.
꿈쩍도 하지 않는다.얼굴을 들고 나를 보지도 않는다.
나는 그대로 그를 남겨둔 채 걷기 시작했다.
병실을 뒤로 한 채,긴 복도를 걸어갔다.
또각또각 내 발소리가 조용한 병동 복도에 울려 퍼진다.
나는 한번도 돌아보지 않고 발밑만 보고 걸었다.
가슴이 아프다.마음이 아프다.몸 안 어디든 찢어질 듯 아프고,
슬픔에 잡아찢길 것만 같다.
스스로 선택한 결말에 압사당할 것 같았다.
이번에야말로, 이번에야말로 정말 이걸로 마지막이란 걸 알고 있기 때문에
고통은 천개의 바늘처럼 나의 전신에 꽂혔다.
한순간이라도 정신을 놓는다면 큰 소리를 내며 울어버릴 것 같아서,
나는 지긋이 입술을 물었다.
문득 앞을 보자,대기실 옆 복도에 사토루가 서 있는 걸 깨달았다.
내가 심각한 얼굴로 들어가는 걸 걱정한 사토루가 와 준 것일 테지.
나는 크게 한번 숨을 들이쉬고 눈물을 참으면서 그를 향해 걸었다.
나의 따스한 도피처를 향하여.
바로 그 때,갑자기 뒤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 유우히! "

나는 거의 반사적으로 돌아봤다.
거기엔ㅡ 아츠시가 서 있었다.
병실 입구 옆,복도 벽에 매달리다시피 하고
손,상처투성이의 몸을 지지한 채 서 있었다.

" 유우히! "

다시 한번 그가 내 이름을 외친다.나는 꿈틀, 하고 몸을 떨었다.
아츠시는 타오를 것 같은 눈동자로 나를 응시하면서 큰 소리로 외쳤다.

" 너,정말 그걸로 되는 거냐! 정말로 이제 그만둘 생각이야? "

아츠시가 필사적인 모습을 한 채 외치고 있었다.
주변 일 따윈 개의치 않고, 그저 나만을 응시하고 나에게만 호소했다.

" 난 싫어! 난 고작 한번의 승부로 널 잃어버리는 거,절대 싫다!
 싫다구,유우히! "

나는 못 박힌 것처럼 유우히로부터 눈을 뗄 수 없었다.
그의 말에서 도망칠 수 없었다.
망연해서 듣고 있는 내게,아츠시는 큰 소리로 말을 계속했다!

" 만회하게 해 줘,유우히! 한번만 더…… 아니, 몇번이라도!
   내가 널 단념하게 만들지 마! 이대로 꼬리 만 개로 끝나게 하지 마!
   부탁이야! "

복도에 있던 사람들이 무슨 일인가 하고 발을 멈춘 채 우리를 보고 있었다.
병실 사람들까지도 흥미가 생겼는지 안에서 엿보고 있다.
그리고 당연한 듯 소란을 듣고 온 간호사가 초조하게 아츠시를 저지하고,
병실에 돌아가자며 질책했다.
그런 간호사의 말을 무시하고,아츠시는 비명처럼 절규했다.

" 난 네가 아니면 안된단 말이다! 날 버리지 마, 유우히! 유우히! "

두사람의 간호사가 힘으로 그를 병실에 끌고 가는 것이 보였다.
평소라면 그런 여자의 손 따윈 힘도 들이지 않고 뿌리쳤을 테지만,
과연 지금의 아츠시에게 그럴 힘은 없었던 건지 무리하게 되돌아갔다.
난 소리 하나 내지 못한 채
인형처럼 우뚝 서서 그 광경을 응시하고 있었다.
소란의 장본인이 사라져 버렸기 때문에 거기에 끌려서 모여 있던
주변 사람들의 시선이 남아 있는 나 하나에 집중했다.
모두 흥미진진한 시선을 돌린 채,소곤소곤 낮은 소리로 얘기하고 있다.
도대체 무슨 일인가,어떤 사정이 있는 걸까,
제멋대로 억측을 주고받고 있다.
하지만 그 때의 내겐,그런 주변을 의식할 겨를이 전혀 없었다.
망연히 서 있는 내 옆에,한사람의 간호사가 와서 화난 음성으로 말했다.

" 저기,여긴 병원이니까 소동이 일어남 곤란해요.
   싸움이라면 건강해져서 퇴원한 담에 해 주세요. "

" ……싸움? "

나는 멍하니 되물었다.
싸움 따위 안 해…….그런 게 아냐.저건…….
저건…… 뭐였지?
나는 왠지 머리가 돌아가지 않아,제대로 대답할 수조차 없었다.
그 만큼 지금의 아츠시에게 놀라고 있었다.
요란하게,전혀 감추지 않고 감정을 남김없이 드러내는 그의 모습에…….
그러자 잽싸게 사토루가 다가 와 사교적인 미소를 띠고 말했다.

" 아, 죄송합니다.저희도 이제 돌아갈 테니까요.
   시끄럽게 했습니다.죄송합니다. "

정중하게 몇번이나 고개를 숙여 사과한다.
불평을 하러 온 간호사도 그런 그의 모습에 납득했는지 자리로 돌아갔다.
사토루는 내 손을 잡고,목소리를 낮춰 속삭였다.

" 가자,유우히.좋은 구경거리야. "

나는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아직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지켜보는 갤러리들을 남기고 병실을 뒤로 했다.
머릿 속에선 아까의 아츠시의 모습이 빙글빙글 소용돌이치고 있어,
나를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어느 덧 방의 달력이 한장 넘어갔다.
토요일 저녁 무렵.
창 뒤쪽으로 보이는 태양은 아주 낮고,
탈 것 같은 붉은 빛을 눈부시게 뿌리어,
세상을 저녁 노을빛으로 물들이고 있었다.
완전히 해가 짧아졌다.
나는 CD를 듣던 헤드폰을 벗고,멍하니 밖을 바라봤다.
아름답다……라곤 생각했지만 그에 마음이 흔들린 건 아니었다.
그렇다…… 그 때부터 난,
모든 것에 대해 마음 속 깊숙한 곳에서부터 감동할 수 없게 됐다.
어쩐지 항상 어딘가 뭔가가 걸려 있는 것 같아서 기분이 개운치 않았다.
어딘가에서 무언가가 망가지고 있었다.
담담히 흘러가는 시간 속에서,나 혼자 공전하고 있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날,아츠시와 마지막으로 만난 그 시간부터
항상 같은 장소에서 제자리 걸음을 하며,
모든 것으로부터 뒤떨어져 가는 듯한 느낌이 든다.
목구멍까지 치솟아오르는 상념이 괴로워서,
몇번이나 잠들지 못하는 밤을 반복하면서,
그래도 나는 그런 자신을 보고도 못 본 척 잊으려 노력하고 있다.
잊으려 노력하고 있었다.
잊을 수 없을 리 없다고,마음 한편으로 확신하면서 .
아무 것도 할 기력이 없어서 침대에 데굴 굴렀다.
어느 새 꾸벅꾸벅 잠이 들어 의식이 끊겨 갈 무렵,
갑자기 엄마가 손님이 왔다고 알렸다.
누구,하고 물으니 어머니는 잠깐 의미심장하게 웃고는 대답했다.

" 말이지,오토바이에 탄 사람.그렇게만 전해달라고 부탁받았어. "

나는 벌떡 일어났다.

( 오토바이에 타……? 설마……. )

그럴 리가 없다,절대로 그럴 리 없다고 생각하면서,
나는 굴러 떨어질 것처럼 계단을 뛰어 내려, 현관으로 향했다.

( 설마,설마,설마……. )

신발도 제대로 신지 않고 서둘러 현관에서 뛰쳐나간 내가 본 건,
한대의 반짝반짝 빛나는 바이크와 그에 타고 있는 사토루의 모습이었다.

" 여! "

사토루는 헬멧 저편에서 싱긋 웃으며 손을 들었다.

" ……사토루. "

" 뭐 하고 있었어? 유우히.왠지 까칠한 얼굴을 하고 있잖아. "

사토루는 놀란 날 옆으로 불러,
타고 있는 바이크의 차체를 가볍게 치고는 자랑스럽게 말했다.

" 어때? 드뎌 샀다구.근사하지? 뭐,반은 아버지한테 빌렸지만 말이야.
   덕분에 겨울방학은 바이트 삼매경의 매일이 기다리고 있다구. "

그렇게 말하면서도 아주 기쁜 듯이 바이크를 응시하고 있다.
나는 조그맣게 웃으며 답했다.

" 사토루,전부터 갖고 싶어했잖아.잘됐네.진짜 멋지다. "

사토루는 만족스레 얼굴을 누그러뜨렸다.

" 어.ㅡ그렇지.우선 최초로 널 2인승 희생자로 삼으려고 생각해서.
   부탁하러 왔지.자,헬멧.아버지한테 빌린 거지만. "

그렇게 말하더니 한쪽 손에 들고 있던 헬멧을 내밀고 내게 건넸다.
나는 갑작스런 일에 깜짝 놀라 받아들고,그리고 지독히 당황했다.
바이크에 둘이서 탄다…….
그것은 고통스런 추억이었다.
아니, 추억이라고 부를 수 없을 만큼,
지금도 생생하게 내 안에 남아 있다.
그것은 내게 있어,아츠시하고만 쌓아 온 시간.두 사람만의 행위였다.
다른 누구도 개입하지 않은,우리들만의 강한 끈이었다.
내가 주저하는 걸 알았던지,그래도 사토루는 조금 무리하게 졸랐다.

" 괜찮으니까,타.응? "

나는 잠깐 주저하고,하지만 작게 끄덕였다.

" ……알았어.기다려.잠바 입고 올 테니까. "

이윽고 돌아온 날 뒤에 태우고,사토루는 바이크를 발진시켰다.
왠지 머뭇거리게 된다.
그런 나의 불안을 느꼈던지,사토루가 소리지르며 말했다.

" 안전운전은 유의하겠지만,만일의 경우엔 각오해! "

나도 지지 않을 정도의 소리로 돌려줬다.

" 농담하지 마.사토루와 동반자살이라니 사양이야! "

" 하하하핫,냉정하기는! "

" 어디 가? "

" 응,그리 멀리는 무리니까 우선 가까운 고개까지.꽉 붙들어. "

그렇게 외치더니,사토루는 부웅 스피드를 올렸다.
나는 꼭 사토루의 등에 붙어 그에게 몸을 맡겼다.
바싹 밀착한 사토루의 등에서 머신의 진동이 전해져 왔다.
그리고 그의 고동소리도.
약간 빠르고 규칙적으로 계속되는 생명의 흐름을 가슴으로 느끼고,
나는 안타깝게 입술을 물었다.
아츠시가 아냐…….
지금 내가 매달린 등은 아츠시가 아닌 거다.다른 등이야…….
그런 당연한 생각이 가슴에 스며 마음이 꽉 조여져 왔다.
사토루의 등은 따뜻하고 그리 아츠시와 체격에 차이가 있지는 않았지만,
그러나 역시 그와는 달랐다.
그것은 항상 언제고 내가 가슴을 설레이거나 조마조마하면서 매달리던
등이 아니었다.누구보다도 누구보다도 사랑스럽게 느끼던 등이 아니었다.
내게 허락되던 그 세계는 이제 어디에도 없는 것이다.

( 아츠시……. )

새삼스레 상념이 치솟아,지잉하고 눈시울이 뜨거워진다.
나는 사토루의 등에서 몰래 눈물을 흘렸다.
그것은 그와 헤어지고 나서 처음 흘린 눈물로,
나는 그 때 처음으로 운다는 사실조차 잊고 있었던 걸 떠올렸다.
그렇다…… 내 눈물은 언제고 아츠시를 위해 존재하던 것이므로…….
거리에 돌아오려는 차의 흐름에 거슬러,
우리는 해지는 황혼녘의 산길을 꼭대기의 전망대를 향해 경쾌하게 달렸다.
거기에 다다랐을 때엔 이미 주변은 어두컴컴하고,
차가운 바람이 휘잉휘잉 불고 있었다.
고개에선 산들 틈새로 거리가 멀리 조그맣게 보이고 있었다.
빛이 켜지기 시작한 거리는 아름답고,
희미하니 어둠에 둘러싸인 세계를 거기만큼이나 돋보이게 만들고 있다.
진짜 어둠이 덮으면, 보석을 흘린 것처럼 반짝반짝 빛날 것 같다.
그 전망대는 비교적 유명한 최적의 데이트 장소였지만,
역시 이 계절엔 별로 사람의 모습이 없었고,
우리 외에는 몇대의 차가 멈춰 있는 정도였다.
그것도 모두 차에서 내려오려고도 하지 않고,
안에서 행복하게 몸을 붙이고 프론트 윈도우 너머로 바라보고 있을 따름.
이따금 나와도 추워 추워를 연발하며 이내 차로 돌아갔다.
우리는 휘몰아치는 바람에 떨면서,그저 터벅터벅 걷고 있었다.
앞에서 걷고 있던 사토루가 문득 돌아보고 말했다.

" 춥지 않아,유우히? "

" 응,조금 추운가. "

나는 작게 웃으며 답했다.
그러자 그 때,뜻밖에 사토루가 팔을 뻗어 내 몸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휘익 긴 팔이 내 등에 둘러지고, 팟 하고 강하게 가슴 속으로 끌어당긴다.
마치 연인을 안는 것처럼 뜨겁고 격하게.
나는 한순간 아연해져, 하지만 이내 자신에게 돌아와
강하게 사토루를 밀치고 그 가슴에서 떨어졌다.
깜짝 놀라 소리도 나오지 않았다.단지 멍하니 사토루를 응시했다.
사토루는 잠깐 침묵한 채 나를 다시 보고,
이윽고 희미하니 미소지으며 말했다.

" 나는, 안되지? "

" 에……? "

" 바이크에 타는 것도 안는 것도,나는 안되지?
   그 녀석이 아니면,안되지? 유우히? "

나는 답할 말도 잃고 그가 이야기하는 걸 듣고 있었다.
사토루는 상냥하게 웃으며,타이르듯 천천히 이야기했다.

" 별로 설교할 생각은 아니야.
   난 너와 녀석 사이를 갈라놓을 생각도 없고,
   헤어진다면 또 헤어져도 개의치 않는다 생각해.
   오늘은 단지 기분전환이라도 하자 생각하고,널 불렀을 뿐이야.
   ……하지만,현관에서 나온 네 얼굴을 보니 말하지 않을 수 없어졌어. "

사토루는 불쑥 내게 다가오더니 손으로 퐁 하고 뺨을 찔렀다.
그리고 바로 정면에서 나를 응시하고 단호히 말했다.

" 너 말야,어지간히 고집부리는 거 관둬.좀 더 화끈하게 나가봐.
   그 때 그 자식이 병원에서 그랬던 것처럼. "

사토루는 단지 듣고 있는 내게 힘차게 말했다.

" 그 자식,보기 흉했어.
   그렇게 많은 사람들 앞에서 난리를 부리며 미련을 보이다니.
   꼭 그런 건 아니지만 자신만만한데다 머신을 타고 날라다니던 놈으로선
   굉장한 차이였지.ㅡ하지만,그 의미,넌 알고 있잖아?
   그 자식이 그렇게까지 한 이유,지나칠 만큼 느끼잖아? "

" …………. "

" 그렇다면, 왜 답해주지 않는 거지? 너도 미련이 잔뜩 남은 주제에.
   너,좀 전에 자신이 어떤 얼굴을 하고 현관에서 나왔는지 알고나 있어?
   그 자식……,그 자식과 만나고 싶어서
   그것만 생각하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었어.
   그 자식이 좋아서, 좋아서 참을 수 없다고……
   그런 얼굴로 날 보고 실망해선…….
   제기랄! 화가 치민다구,그런 얼굴을 보면! "

" 사토루……. "

" 솔직히 말해! 아직 그 자식을 좋아한다,그 자식을 잊을 수 없다,
   그 자식만 생각하고 있다고,말해 봐,유우히!
   솔직한 기분을 말해 보라구! "

사토루는 진지하게 화내며 그렇게 외쳤다.
뜨겁게 타는 눈동자를 돌린 채 내 대답을 기다리며 삼킬듯이 응시한다.
그 시선 속에서,나는 한마디도 할 수 없이 서 있었다.
사토루의 말이 머리 속에서 격하게 소용돌이친다.
그것은 내 안에서 줄곧 돌아다니고 있던 뜨거운 상념을 끌어내고,
내가 멈춰 있던 시간을 움직였다.
떨리는 입술을 희미하게 열자,
눈물이 방울방울 넘쳐 뺨을 타고 얼굴을 적셨다.
꺼져 들어가는 소리가 끊길 듯 끊길 듯 내 입술에서 흘러 떨어졌다.

" ……아츠시와 만나고 싶어,아츠시를 좋아해,지금도 줄곧…….
   그가 아니면,안돼……. "

스스로도 놀랄 만큼,자연스레 흘러넘친 말이었다.
하지만, 줄곧 내 안에서 조금도 퇴색하는 일 없이 숨어 있던 말이었다.
아츠시가 좋아…….
그 상념은 어떻게 해서도 지울 수 없다.
잊을 수도,시간 저편에 밀어내어 풍화시킬 수도 없다.
언제까지고 내 안에서 가장 크게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다른 걸로 대체할 수 없는 것이다.
그를 잃어버리고 살아가는 따위 생각할 수도 없는데,
어째서 난 거기서 도망쳐 버린 것일까. 어째서 놓아 버렸던 것일까.
이렇게도 사랑하고 있는데…….
시간이 차츰차츰 움직이기 시작한다.
멈춰 있던 시간의 흐름이 천천히 진행하기 시작한다.
그것은 내게 한걸음을 디디라고 말하고 있었다.
기다릴 따름이 아니라,도망칠 따름이 아니라,
자신의 다리로 자신의 의지로 그 장소에서 걸어 나가라고 명령하고 있었다.
사토루는 말없이 나를 응시하고 있었지만,이윽고 상냥하게 미소짓고,
어린아이를 다루듯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 지금의 말,내가 아니고 녀석한테 해. "

" 사토루……. "

나는 눈물로 가득한 눈으로 그를 봤다.
이런저런 생각이 가슴에 꽉 차서 말도 할 수 없다.
좀 더 할 말이 있는데도,이야기하고 싶은데도,
그에게 전하지 않으면 안될 말이 많이 있는데도,소리로 낼 수 없었다.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사토루는 무엇이든 알고 있는 것처럼 싱긋 상냥하게 웃었다.

" 그럼 돌아가자.늦어지면 아주머니 걱정하시잖아? "

그렇게 내 어깨를 안고,그는 이제 완전히 여느 때의 사토루로 돌아 와
나를 오토바이에 태우고 달렸다.
돌아오는 길,나는 그 넓은 등에 매달려 마음 속으로 100만번도 더 중얼거렸다.
사토루에 대한 감사의 말을.
「고마워」라고 …….







아주 화창한 일요일 오후였다.
완전히 높아진 하늘은 멀리까지 맑게 개였고,
여기저기 하얀 구름을 품고 있었다.
그리고 부는 바람은 그것을 하늘 표면에 내보내서는
어지러이 형태를 바꾸며 놀고 있다.
나는 허공을 올려다 보고,크게 심호흡을 했다.
내 앞에는 서킷이 펼쳐져 있었다.
회색 코스 위를 몇대인가 바이크가 소리내며 달리고 있다.
흐트러진 오일타는 냄새를 이따금 바람이 흐름 상태로 바꾸어
내 자리까지 전해왔다.
바이크는 위잉위잉 바람소리를 올리며 달려간다.
그러나 어떤 것도 피부에 꽂힐 듯한 긴장감을 느끼게 하는 일은 없었다.
오늘 시합은 없고,
지금 달리는 바이크는 어떤 거든 연습주행을 하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러므로 그럭저럭 열심이긴 했지만,숨막히는 긴박감은 거기 없었다.
주행해 가는 바이크 속에 낯익은 1대가 있었다.
검은 차체에 노란 카울,배기량 125cc의 약간 작은 머신.
등과 비슷한 장식을 단 청년을 한사람 싣고 있다.
아츠시였다.
아츠시는 상쾌하게 머신을 몰고,내 눈앞 코너를 통과해 갔다.
그 사고로부터 아직 1달도 지나지 않았는데,
부상 따윈 거짓말처럼 건강하게 달려간다.
몇군덴가 골절상을 입고 붕대 투성이인 모습을 하고 있었는데,
정말이지 레이서란 건 기가 막힐 정도로 터프하고 강인한 인종이다.
나는 달려가는 아츠시의 모습을 줄곧 눈으로 쫓고 있었다.
오늘 그가 거기서 달린다는 건 알고 있었다.
며칠 전 CROSS 오토의 점장님에게 전화해서 물었으니까.
하지만 그는 내가 보러온 건 모른다.당연하다.
왜냐면 그 날 병원에서 헤어진 이래,
우리는 한번도 얼굴을 맞대고 얘기한 적이 없으니까.
아침 전차에서도 만나지 않는다.방과 후 역에서 만나는 일도 없다.
물론 그로부터 전화가 걸려오는 적도 없었다.
내가 그 날 그에게 등을 돌려 버렸기 때문에,우리의 관계는 끝나 버렸다.
나는 날 만류한 그의 팔을 뿌리쳐 버렸다.
그에게 만회할 찬스를 주지 않았다.
그러므로 난,이번에는 자신의 힘으로 그를 붙잡으러 가지 않으면 안된다.
내가 도전하지 않으면 안된다.이 기분을 전하기 위해서.
나는 위를 쳐다봤다.눈 앞에 큰 철망의 펜스가 있었다.
그것은 나와 아츠시를 갈라놓고 있었던 것.
나에게 아츠시의 세계로 들어가는 걸 주저하게 만들었던,
높디높은 벽이었다.
우리 사이에는 언제나 보이지 않는 펜스가 있었고,
나는 그것을 두려워하고 있었다.
그것은 넘을 수 없는 것,넘어서는 안될 것이라고 느끼고 있었다.
그리고 펜스 저펀에서 반짝반짝 빛나는 그가 눈부셔서,
손이 닿지 않는 것이 괴로워서,
혼자서 선망하고, 몸부림치고,괴로워하고 있었다.
고통스럽게 울고 있을 뿐이었다.
하지만, 나는 한번이라도 그 벽을 넘으려곤 하지 않았던 기분이 든다.
나는 항상 멋대로 단념하고 등을 돌리고 도망치고 있었던 것이다.
아츠시는 몇번이나 쫓아 와 주었는데,
나를 단념하지 않고 원해 주었는데.
한가지 진실을 알아차리자,마치 구름이 개이듯 보이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아츠시는 언제고 내게 열심히 부딪쳐 주었던 것이다.
처음 내가 이별의 말을 꺼냈을 때도,둘이서 사귀게 되고 나서도,
그는 최대한 나를 보아주었다.
바이크의 세계에 날 유혹하고,날 만나러 와 주고,
내 소심함에 화내고 슬퍼하고,내게 한 걸음이라도 다가오려고 노력했다.
날 사랑한다고 전신으로 외쳐 주었다.
그것을 피했던 건 나다.
내 약함이,자신없음이,나로부터 진실을 응시한 눈을 앗아갔다.
스스로 걸음을 디디려던 아주 작은 용기조차도 나는 갖질 수 없었다.
나는 후우 하고 크게 심호흡했다.그 펜스는 높았다.
수미터……아니, 좀 더 클까? 코스 저쪽과 이쪽을 가르는,형태있는 벽.
나는 그에 손을 댔다.
철망 고리에 발끝을 넣고,양손으로 조금 위를 잡고 다리에 힘을 싣는다.
문득 몸이 한순간 우주에 떴고,
이번엔 다른 한쪽 다리를 좀 더 위로 올렸다.
나는 펜스를 오르기 시작했다.
오르는 것 자체는 그다지 고역은 아니었지만,
그저 철망을 쥔 손이 점차 아파와 나를 조금씩 괴롭혔다.
하지만 개의치 않고 오르기를 계속했다.
나는,이 벽을 넘는다.
치워 없애는 것이 불가능한 벽이라면,그 저편에 발을 디디자.
그것이 우리 사이를 갈라놓는 것이라면, 나는 그것을 넘을 것이다.
아츠시에게 다가가기 위해서,아츠시와 같은 세계에 서기 위해서,
나는 그 저편에 간다.자신의 힘으로.
예를 들어 아무리 아츠시가 내게 손을 뻗어 주더라도,
나 자신에게 벽을 통과할 의지가 없다면,결코 그 손에는 다다르지 않는다.
철망은 사라지지 않는다.
그리고 철망을 넘는 건 누구의 힘도 아닌……
내가 스스로 하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그런 간단한 사실에 어째서 등을 돌리고 눈을 감고 있었던 건지.
어째서 도망치고 있었을 뿐인지…….
분명 무서웠던 것이다.
그가 점점 내 손이 미치지 않는 곳에 가버릴 것이. 그런 그를 뒤쫓는 것이.
언제까지고 따라잡지 못할 기분이 들어서,
나 혼자 뒤쳐질 듯한 기분이 들어서,처음부터 단념하고 멈춰 있었다.
하지만 아츠시.
난 그래도 너를 좋아해.
그 상념은 역시 아무래도 지워버릴 수 없었다.
단념할 작정이었는데도,항상 널 원하고 있었어.
그러므로 나는 펜스를 오른다.
네가 필사적으로 뻗어 주었던 손을 다시 한번 마주 잡고 싶으니까.
용납된다면,널 다시 한번 쫓아가고 싶으니까.
이번에야말로…… 단념하거나 하지 않고…….
위에 가까이 다가감에 따라,바람이 내 머리카락을 살랑살랑 갖고 놀았다.
철망을 쥔 손이 차고 아프다.
발 끝의 감각이 점차 없어져 가는 느낌으로,
자신의 체중을 지지하는 게 정말 힘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꼭대기까지 도달해서,
나는 저린 손가락을 조금 쉬려고,
펜스 정상의 가는 금속 줄에 우선 몸을 내렸다.
바람이 찼다.
하지만 높은 그 장소에서 멀리 바라보는 풍경은
놀랄 만큼 상쾌하고 아름다웠다.
서킷의 회색 코스가 멀리까지 뻗어 있다.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구불구불하게 골 지점까지 계속되고 있다.
우승을 향해 계속 달리는 레이서들을 단단히 그 팔로 끌어안고.
나는 펜스 위에서 달리는 머신을 보고 있었다.
왠지 그들이 아주 가까이서 달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고작 철망 하나를 제거했을 뿐인데
시야가 다르고, 일체감이 다르고,세계가 다른 것처럼 느껴 버린다.
그것은 틀림없이 내 마음이 변한 탓일 테지.
내가 자기 자신의 마음에 있던 펜스를 치워버렸기 때문에,
겨우 보이게 된 세계다.
이 광경을 보기 위해,나는 아츠시를 상처입히고,자신도 상처입고,
사토루까지 괴롭히며,아주 멀리 돌아가 버렸다.
한껏 울고,고통스런 상념만을 가졌던 듯한 기분이 든다.
그러나…… 지금은 이렇게 아츠시의 세계에 한걸음 가까이 앉아 있다.
이것이 시작이다,분명…….
아츠시는 앞으로도 점점 앞을 달려갈 것이고,
내가 어떻게 쫓아가도 다다를 수 없을지도 모르지만,
펜스는 잔뜩 솟아 있을 지도 모르지만,그래도 난 넘어갈 것이다.
그 의지와,그리고…… 아츠시가 뻗어주는 손이 있다면…….
나는 불어오는 바람을 뺨에 받아내며,그 상쾌한 감촉에 살짝 눈을 감았다.
잠시 상쾌감에 잠기고 나서 문득 코스로 시선을 되돌리자,
달리는 머신의 몇대인가가 달리는 스피드를 줄여,
분명하게 이쪽을 보면서 천천히 지나가는 것이 눈에 띄었다.
겨우 철망 위에 올라 있는 날 알아차렸을 것이다.
대체 무슨 일이 있는 걸까,이쪽을 보면서 달려간다.
그리고 뭔가를 생각할 새도 없이,
뜻밖에 발밑에서 큰 소리가 울렸다.

" 너!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냐, 그런 데서! "

정신이 들자,어느 새 펜스 아래에 서킷 관계자 같은 사람들이
몇명이나 모여서 나를 쳐다보고 있었다.
모두 긴장과 분노로 굳어진 얼굴을 하고 있다.
주위를 멀찍이 바라보자 코스 저편이나 센터 건물 쪽에서도,
사람이 몇명인가 달려오는 게 눈에 띄었다.

( 곤란……. )

그렇게 생각했을 때는 이미 늦었다.
내 행동은 확실히 눈에 띄어, 모두가 허둥대며 저지하러 왔던 것이다.
뭐,당연하다면 당연하겠지만.넘어서는 안되니까 펜스가 있는 거다.
그런 걸 오르는 녀석 따위 보통은 있을 리 없기 때문에,
경비의 눈은 비교적 허술해서,나는 쉽게 거기 오를 수 있었다.
그걸로 바로 내려왔으면 좋았겠지만 올라갔단 사실에 너무나 만족해,
꼭대기에서 느긋이 감개에 취해버렸기 때문에 멋지게 발각되어 버렸다.
나는 모인 사람들을 보고 약간 동요했다.
설마 이렇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하고 소란을 키워버린 걸 후회했다.
하지만 그 행위 자체엔 조금도 후회없었다.
상식도 규칙도 처음부터 염두에 없었고,
예를 들어 저지당했다 해도 틀림없이 틈을 보아 오르고 말았을 것이다.
왜냐면 그것은 내게 있어,아주 소중한 의식이었다.
아무래도 완수하지 않으면 안될,중요하고 중요한 한걸음이었다.
하지만 역시 이 이상 폐를 끼칠 수도 없어서,
나는 우선 거기에서 내려오려고 발을 뻗었다.
그 때였다.
갑자기 코스 쪽에서 큰 소리로 이름을 불렸다.

" 유우히! "

나는 깜짝 놀라 아래를 내려다봤다.
거기엔 코스 위에 머신을 멈춘 채 이쪽을 쳐다보는 아츠시가 있었다.
아츠시는 잠깐 어안이 벙벙한 듯 날 보고 있었지만,
이내 코스에서 벗어나 허둥대며 이쪽을 향해 달려왔다.
그리고 근처 잔디밭에 내던지듯 머신을 누이더니,
초조하게 달려와 헬멧을 벗고 나를 올려다봤다.

" 유우히! 너 뭐 하는 거야, 대체! "

" 아츠시……. "

" 빨리 내려 와! 위험하잖아! "

평소 본 적도 없는 당황한 얼굴을 하고 필사적으로 외치고 있다.
난 순순히 그 말에 따라 아츠시가 있는 코스 쪽을 향해 내려오기 시작했다.
중간에 한번 불을 헛디디자,
아래 있는 사람들로부터 왓 하고 긴장한 소리가 났다.
또 내려오기 시작하자,후우 하고 안도한 듯 한숨을 쉰다.
내려오는 본인에겐 그리 대단한 건 아니었지만,
아래서 보고 있는 쪽에선 상당히 위태로운 행위로 보이는 듯하다.
몇분 정도 걸려서 내가 땅에 내려서자,기다렸던 듯 아츠시가 뛰어왔다.

" 유우히! 괜찮아? "

창백해진 얼굴로 묻는다.나는 뚱하니 답했다.

" 응.이래뵈도 운동 신경은 좋은 편이야.별 거 아냐,이런 철망. "

" 바보 자식…… 무슨 생각으로……. "

아츠시는 크게 한숨을 쉬더니,
이번엔 내 어깨를 꽉 잡고 큰 소리로 외쳤다.

" 너 말이야! 대체 왜 저런 데 올라간 거야?
   어디 사는 바본가 봤더니…….심장이 멈추는가 싶었다구,제길! "

오랫만에 보는 아츠시는 진지하게 화내고 있었다.
이런 얼굴의 그를 보는 것도 어쩌면 처음일지 모른다.
지긋이 삼킬 듯 나를 응시하는 아츠시.
날 걱정해서 감정을 폭발시키는 아츠시.
난 바로 가까이서 그를 마주 보면서 마음이 흔들리는 걸 느끼고 있었다.
아츠시는 그런 내게 개의치 않고,
방금 맛 본 조마조마함을 분노로 대체하며 강하게 말했다.

" 도대체 뭘 생각하는 거야,너?
   날 만나러 왔다면,피트 쪽에 있으면 되잖아.
   펜스를 넘어오지 않아도 된다구.
   떨어지면 어쩌려고? 저런 높은 데서! "

하고,거기까지 말하다가 문득 그는 말을 멈췄다.
그리고 조금 당황한 듯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 ……만나러,온 거야? 날? "

눈동자가 불안한 듯 흔들리고 있다.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 응. 널, 만나러 왔어. "

" 유우히……. "

나는 바로 정면에서 그를 지긋이 응시하고,
천천히,그리고 분명하게 이야기했다.

" 널,만나러 왔어.이 철망을 넘어서…….
   너와 한번 더 시작할 찬스를 갖고 싶어서,다시 한번 널 쫓고 싶어서,
   나는 여기에 왔어…….
   그런 식으로 등을 돌려 버렸지만,나 역시 깨달았어.
   네가 아니면 안돼, 네가 없으면 살아갈 수 없어.
   그걸 알았기 때문에 나,여기 왔어.아츠시……. "

주룩 눈물이 한줄기 넘쳐 흐른다.
나는 입가에 희미하게 웃음을 떠올리고 떨리는 목소리로 말했다.

" 내게도 ……다시 한번 만회할 기회를 주겠어? 용서해 줄 수 있어……? "

아츠시는 잠깐 침묵한 채 나를 응시했다.
바람이 그 긴 머리카락을 사락사락 흐트러뜨린다.
나는 그의 답을 꼼짝 않고 기다리고 있었다.
이윽고 아츠시는 천천히 내 몸에 팔을 두르고 그 가슴에 끌어 안았다.
강하게 강하게,괴로울 만큼 강하게,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끌어 안았다.
강인한 팔에서 그의 상념이 전해져 온다.
귓가에 그의 음성이 들렸다.

" ……당연하잖아. "

( 아츠시……. )

나 역시 그 등에 손을 돌려 안았다.
최대한 힘을 집중해서,이제 다시는 헤어지지 않도록,
다시는 어긋나거나 하지 않도록,온 몸과 마음을 다해 마주 안았다.
라이더 수트를 입었던 그의 몸은 차가웠지만,그러나 몹시 따뜻했다.
그 때 난,겨우 자신이 있어야만 하는 장소를 찾았다.
아츠시라는,무엇보다 소중한 나의 둥지를 …….





그 후 날 기다리고 있었던 건,당연히 딱딱한 설교였다.
초조하게 모여 있던 많은 사람들 앞에서,아츠시와 둘이서
당당히 러브 신을 보여 버렸다는, 얼굴에서 불이 날 것 같은 수치심에
잠길 새도 없이 난 서킷 관리실까지 끌려 가 엄청난 꾸중을 들었다.
한마디도 대꾸하지 못한 나는 순순히 머리를 숙인 채 질책을 듣고 있었다.
이렇게 누군가에게 꾸중들은 것도 실로 오랫만이다.
스스로도 돌이켜 보니 충분히 각오했어야 했다고, 기가 막혔다.
그러나 역시 후회는 없었다.
화내고 있는 눈 앞의 사람에겐 죄송하지만,
그것은 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었다.
한참 30분 정도 쥐어짜인 끝에 겨우 해방되어 밖에 나가자,
거기 아츠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라이더 수트를 언제나의 가죽 재킷으로 갈아입고,
긴 머리칼을 살랑살랑 나부끼며 서 있었다.
내가 나온 걸 보고 조금 쑥스러운 듯 미소짓고는,
그리고 일부러 외면하며 툭 하니 말했다.

" 자, 돌아가자. "

나는 눈시울이 지잉하고 뜨거워지는 걸 느끼면서, 웃으며 답했다.

" 응. "

그에게 매달려 함께 걷기 시작하자,
뜻밖에 아츠시의 손이 뻗어 와 내 머리칼을 휘적휘적 어지럽혔다.
아츠시는 몹시 기쁜 듯 상냥한 눈으로 응시하면서,
언제까지고 언제까지고 쓰다듬어 주었다.
내가 이제 그만 참아달라고 소리를 높일 때까지.







그로부터 이틀 뒤의 아침,난 언제나의 전차에 타고 학교로 향했다.
어제 아츠시는 타지 않아서,난 약간 풀이 죽었다.
어떤 약속도 한 건 아니었지만,
그것은 당연한 것처럼 다시 시작된 만남의 기회라 생각하고 있어서다.
하지만 그걸로 불안하게 생각하고,
멋대로 이런저런 걱정을 하는 건 이제 그만이다.
나는 어제 처음으로 그에게 전화했다.정말,처음이었다.
이제까지 꽤 오랫동안 사귀어 왔는데도,
전화 한번 스스로 한 적이 없다고 생각하자,
다시금 자신이 얼마만큼 아무 것도 하고 있지 않았던가를 뼈저리게 느꼈다.
두근두근거리면서 그가 받기를 기다리고,
그의 음성을 듣자 더욱 두근두근거려,
최초의 기념비적인 내 쪽에서의 전화는
왠지 제대로 얘기를 나누지 못한 기분이 든다.
그래도「오늘 아침은 못 만났네」라고 말하자,
그는 「늦잠잤어」하고 퉁명스레 대답해 주었다.
그리고 내일은 만날 수 있어? 하고 묻자,
아츠시는 잠시 망설이듯 침묵하고,그리고「아아」하고 말했다.
저 한순간의 당황의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하지만 난 그 날 전차의 언제나의 장소에서 전처럼 날 기다려 준
아츠시의 모습을 보고,그 이유를 바로 알아차렸다.
나는 멍하니 입을 벌리고,눈을 깜박깜박거렸다.

" 아츠시…… 그 머리……. "

그런 중얼거림 외엔 말도 안 나왔다.
왜냐하면 거기 있던 아츠시의 머리는
볼 만하게시리 빡빡머리가 돼 있었던 것이다.
저 살랑살랑 부드럽게 흐르던 긴 머리카락은 흔적도 없이 깎여,
모양좋은 두상이 드러나 있었다.
그렇다곤 해도 약간 긴 스포츠 머리랄까,
스님처럼 완전히 민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이전의 장발이 인상 깊었던 만큼 굉장히 충격적이었다.
나는 2·3분동안 충분히 침묵한 채 응시하고,그리고 조심스레 물었다.

" 어떻게……된 거야,그 머리? 왜 잘랐어? "

아츠시는 예상 외로 뚱해져서는,
시원해진 머리에 손을 올리면서 진지한 말투로 답했다.

" 응,글쎄,뭐랄까……,나 나름대로 변신하고 싶었어.
   ……바보 짓이라곤 생각했지만. "

" 그래서 중머릴 한 거야? "

" 아아. "

그는 어이없는 듯 대답했다.

……변신하는데 중머리…….이 얼마나 체육계적 사고방식인가.
나는 잠시 기가 막혀 하면서도 열심히 응시하고 있었다.
그러자 아츠시가 갑자기 이야기를 시작했다.

" 어제…… 리카를 만났어. "

나는 한순간 철렁했지만,귀 막지 않고 진지하게 들었다.

" 다시 한번 제대로 이야기하지 않으면 안되겠다 싶어서.
   나의 녀석에 대한 마음,너에 대한 마음,
   전부 말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생각했어.어중띠지 않게.
   그래서 너에 대해서도 전부 이야기했어. "

가슴이 두근거렸다.

" 리카 상…… 뭐라고? "

" 확실히 했어.
   뭐랄까…… 내가 진심이 아니라고 막연히 느끼고 있었던 것 같아.
   그래서 따로 좋아하는 상대가 있다고 들었을 때도,
   아아,그래,정도로 생각했다고.
   ……우선,상대가 남자인 건 다소 쇼크였던 것 같았지만. "

아츠시는 잠깐 자조하듯 웃었다.

" 하지만 그것도 잠깐이고,알았다고 했어.
   그리고…… 진심이라면 절대로 놓치지 말라고 화끈하게 말하더군.
   내가 뜨거워질 수 있는 상대란,그리 흔치 않다며. "

나는 그것을 듣고 왠지 가슴이 아파왔다.
아츠시의 그녀에 대한 기분이 어떻든간에,
역시 리카 상은 진심으로 아츠시를 좋아했다고 생각한다.
좋아하지 않는다면,그렇게 아츠시를 이해해 줄 수 없다.
왠지 기분이 어두워져 고개를 숙이고 있자니,
아츠시가 위로하듯 가벼운 말투로 이야기했다.

" 그 자식,이 머릴 보더니 기가 막혀 하더군.전혀 안 어울린다면서.
   거기다…… 까까머리 남자친구 따윈 싫으니까,
   이쪽에서 사양한다고까지 말했어.
   너무해,그렇게까지 말할 건 없잖아. "

아츠시는 잠시 입술을 내민 채 투덜투덜 불평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로서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것은 리카 상이 아츠시가 걱정하지 않도록
마지막 배려를 해 준 거란 사실.
그러므로 나도 침묵한 채 듣고 있었다.
그리고 역시 그녀에 대해 미안한 기분을 느낄 수 밖에 없었다.
정말로 좋은 아이인 걸.
명랑하고,상냥하고,그리고 너무도 심지가 굳은,
나 따위보다 훨씬 잘 자란 여자아이.
내가 없었다면 아츠시와 행복해질 수 있었을지 모르는데도 …….
문득 아츠시를 보자,언제나의 무뚝뚝한 얼굴로 뚱하게 있었지만,
왠지 눈길이 걱정스러워 보였다.내 기분을 헤아리는 것처럼.
그런 그를 보고 나는 다시 생각했다.
내가 없었다면 따위 생각은 아츠시에게도 리카 상에 대해서도 실례다.
나는 날 사랑해 주는 아츠시를 위해서도,
우리를 인정해 준 그녀를 위해서도,
꿋꿋이 자신을 응시한 채 살아가지 않으면 안되는 것이다.
도망치면 안 되는 것이다.
모처럼 여러 사람이,여러 배려가,
내게 다시 한번 그와 걸을 찬스를 준 것이니까.
아츠시는 잠시 침묵한 채 나를 응시하고 있었지만,
잠시 후 오도카니 중얼거렸다.

" 저, 그렇게 안 어울려,이 머리? "

나는 한순간 목을 움츠렸고, 그리고 곧바로 웃으며 답했다.

" 응,전혀. "

아츠시는 으응 하고 신음하고,난처한 듯 얼굴을 찡그렸다.
곤란한 듯 망연한 듯한 모습으로 입술을 ヘ모양으로 찌그러뜨리고 있다.
나는 쿡 하고 웃고,그리고 그에게 얼굴을 가져가 살짝 속삭였다.

" 저어,이번엔 날 위해 길러 줄래? 그 머리. "

아츠시는 슬쩍 곁눈질로 보고,더욱 불쾌한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 ……뭐,게으르면 길어질지도. "

그렇게 말하면서도 왠지 쑥스런 듯 얼굴을 돌린다.나는 쿡쿡 웃었다.
그렇게 하는 사이, 어느 새 전차는 내가 내릴 역에 다다르고 있었다.
내가 허둥대며 문을 향해 걸어가려는데,
그런 나를 잡고 아츠시가 귓가에 살며시 중얼거렸다.

" 나중에 봐,유우히. "

나는 빙긋 웃는 얼굴로 대답하고,
서둘러 인파를 밀어젖히고 막 도착해서 열린 문에서 홈으로 내려섰다.
돌아보니 전차는 만원으로,아츠시의 얼굴은 보이지 않았다.
하지만 난 보이지 않는 그를 향해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 응,기다릴게.절대로 갈 테니까. "

전차가 바람을 일으키며 달려간다.내 머리카락을 살짝 날리면서.
아침 역에, 조금 차가워진 바람이 상쾌하게 불었다.
 


끝.





드디어……군요.

유우히만큼이나 저도 먼 길을 돌아온 듯한 기분이 듭니다.
츠지 키리나 님께 번역허가를 받은 2001년 중순에 1부 번역을 끝내고 이제서야 겨우 2부의 끝을 바라보고 있다니ㅡ

그 때까지만 해도 아직 아마추어시던 츠지 키리나님도 이젠 상업지 작가가 되셨고, 웹에는 아주 뜸하게 모습을 보이시는군요.
그 분의 홈페이지에 링크되어 있는 제 홈의 배너가 어쩐지 생소한 기분이 듭니다.

어쨌거나.
아마도, 이것이 제가 웹에 완결하는 마지막 번역이 될 겁니다.
그렇게 처음부터 생각했었고, 이제 더 할 기력도 없고, 아쉽게도 더 관심이 가는 번역물도 없군요.

읽어 주시는 분들 중에는 2000년 처음 번역을 시작했던 천랸 야클 시절부터 따라와 주신 질긴 분들도 계시고, 지금은 더 이상 활동하지 않는 열린창문, 엘슘이나 날개동부터, 지금도 몸담고 있는 보러동에서부터도 보아주신 분들도 계시고, 개인 홈인 바빌론이나 암시장에서 처음 뵌 분들도 계시지요.

모두모두 감사했습니다.
짧고 굵게(막판에는 질질 끌었지만), 저의 여성향 번역 라이프를 마감(?)하려 합니다.
아마 전에 끝냈지만 아직 폴더에만 감춰뒀던 다른 걸 보여드리게 될 수도 있지만 그것도 아주 드물게, 제 개인 홈의 좁은 울타리 안에서겠지요.

그저, 감사드린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었습니다.
그다지 매끄럽지 않은 번역에도 불구하고 제 폴더에 차곡차곡 번역물이 쌓여갈 수 있었던 것은, 언제나 즐겁게 읽어주신 여러분이 있었기 때문이었죠.

정말로, 감사했습니다.

비가 온 탓에 조금쯤 센치해진
BabyAlone 올림

* BabyAlone님에 의해서 게시물 이동되었습니다 (2004-08-20 23:41)

시린이슬   2005/10/02

우아아앙 이 시리즈 단숨에 읽었어요. 이걸로 끝나는 시리즈인가요? 왠지 아쉽네요ㅠㅠ

아톰언냐 2006/11/26

호호호호 너무나도 재미있었어요!! 바이크! 감동적이에요

메리메리 2006/12/05

수고하셨습니다. 놀러왔다가 우연히 봤는데 빠져버렸답니다.
즐겁게 잘 읽고 가요

별빛사랑 2007/02/11

너무 감동이었어요~~~ 잘 읽고 갑니다!

월하 2007/03/29

너무 수고하셨습니다^^
하여튼, 아츠시군..유우히가 좋아하니 별말은 안겠네만, 나는 은근히 사토루 쪽으로 바라고 있었건만.

히로키 2007/05/27

잘보고갑니다 수고하셨어요~ ^^

과세표준 2007/05/29

너무너무 잘 읽었습니다.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아아 2007/05/29

왠지 굉장히 짜증이 난다라고 해야 할까요. 이 공 이 수 정말 하나도 마음에 안 들어요, 미적 미적 포크레인 수에다가 다른 여자하고 양 다리 걸치는 데다가 역시 미적 거리며 좋아하고 있어 라는게 전혀 보이지 않는. 이런 공 수 대비 최악 .

realeye 2007/06/23

정말 오래 기다린 건데 일단 끝을 본 것만으로도 대만족! 이지만 사실 엔딩이 살짝 실망이기도 하네요. 하지만 끝을 보게끔 번역해주신 것, 정말 감사드립니다.

유우히 2007/07/13

예쁜 엔딩이네요~ 유우히같은 성격...자신감을 조금만 더 가지면 본인도 아츠시도 좋을텐데...뭐..말로는 쉽지만ㅡㅡ 제가 남일같지 않아서 맘이 아프네요..ㅜㅜ 앞으로 서로 많이 노력해서 이쁜 사랑하길 바래요~
ㄲㄲ 소설과 현실을 구분못하는 이의 댓글추가요~!

벗지마 2007/07/20

삽질수의 기나긴 여정이 끝났군요. 아무리 삽질해봤자 결국 굴파서 나와보면 어느새 공의 품속...그래도 그게 밉지만은 않은게 우리네 인생도 삽질의 연속이라서일까요. 잘 읽었습니다^^*

없는꿈 2007/09/12

이런 내일 학교간야하는데 벌써 하하

라피스라줄리 2007/12/26

재미있게 잘 보았습니다..

우르키오라 2008/01/09

ㅋㅋ이젠 끝이네요 -_ㅜ
아쉽다아 !!그래도 해피엔딩이라 기쁘네요 ^^

요떼아모 2008/06/18

정말.. 감동적입니다. 담백한 끝마무리도 정말 좋구요.
무엇보다도 '펜스를 넘어서'란 제목 그대로 펜스를 넘어 한 발 앞으로 나간 모습에 박수를 보냅니다. 더불어 성실히 번역을 마무리해주신 님께도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

얄루 2008/08/07

아하... 재밌게 잘보았습니다.흥.. 엔딩이 좀 밋밋..하다고 할까나. 그래도 해피엔딩...^^ 기분이 산뜻해졌습니다.

바리 2008/09/23

감사히 보고 가요~이거 중간까지는 어떻게든 찾아봤는데..마직막이 궁금해서 뒤지다가 찾아왔어요...덕분에 즐거운 엔딩까지보고 가요~

사니 2008/12/03

정말 오래전부터 읽어왔던 글인데, 어찌어찌하다보니 감사하다는 표현도 한번 못했었네요. 늦었지만, 감사히 잘읽었습니다. 언제가 건강하시고 행복하세요~!

달곰 2009/01/13

잘읽었습니다~ 아유 이쁜것들

김기사 2009/06/07

재밌게 읽었습니다~ 좀전에 아츠시따위 개나 줘버려 하는 마음이 그나마 옅어졌네요, 녀석, 나중에 잘하지 않으면 한대 맞을줄 알아라? 에공

kitty 2009/08/13

뒷부분 번역이 없었는데 여기 있었네요 잘 봤습니다~

soul 2009/11/23

잘 읽었어요~

통통한 분홍색 2009/12/04

잘 봤어요 감사합니다 > <
그런데 이 소설은 책으로 출간된 건가요? 아니면 츠지 키리나 작가님의 홈페이지에서 개인적으로 연재하던 건가요?? 항상 일본소설 보면 원본을 보고 싶은데 구할 방법이 없네요 ㅠㅠ 아 혹시 츠지 키리나 님 홈페이지 주소 가르쳐 주실 수 있으신가요??

ㅇㅃ 2010/01/02

뒷부분이 짤려서 찾다가 이곳까지 오게됐네요 잘읽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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