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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Alone
사일런트 블루 (상)

Silent Blue(사일런트 블루) (1)



무한의 청색. 그것은…

잊을 수 없는 첫사랑의 이미지.
버릴 수 없는 그리움의 이미지.

힘겹게 토해내던 가쁜 숨결과
햇빛 아래 빛나던 투명한 땀방울과
존재 자체만으로 상대를 마비시키는

눈동자, 그 안으로부터 흡수된

그 아득한 설레임…
그 고요한 부서짐…





1.

바다… 바다 냄새를 좋아한다.

소금기가 담뿍 어려 있는 정겨운 냄새를 맡고  있노라면,
찡… 하고 가슴을 뚫고 지나가는 한줄기 물거품의 향기를 느낄 수 있다.

메마르고 삭막한 도시의 건조한 냄새는,
언제나 짭조름한 소금기에 대한 향수를 느끼게 만든다.

매년, 단 한번도 빠짐없이 여름방학이 올 때마다 이곳에 들르는 이유도
아마 그 냄새를 무심결에 그리워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 에구, 도련님. 여기 오신다는 말씀 미처 못 들었는데…
   저, 이번 여름은 외국에 나가신다지 않으셨습니까. "

약간 당혹스런 표정으로 별장 관리인 아저씨가 웅얼대는 소리다.
조금은 거만함이 섞인 사무적인 말투로 그 웅얼거림에 대꾸해 주었다.

" 다른 식구들은 예정대로 인도네시아에 가 있어요. 온 건 저뿐입니다.
   귀찮으신 건가요? 그렇다면 다시 서울로 가도록 하죠. "

" 아아… 그럴 리가요… 전 다만 하도 갑작스런 일이라서요,
   예년관 달리 아직 청소도 덜 돼 있고……. "

"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어요. 일주일만 있을 겁니다.
   연락도 하지 않고 와서 죄송하게 생각해요. "

" 아… 아닙니다, 도련님…… 아휴, 들어 가십시다.
   사실, 매년 오던 사람이 안 오면 저희들도 섭섭하기 그지 없답니다. "

별장 관리인 아저씨는 대충대충 일을 하는 점을 제외하면,
기본적으로 심성이 착한, 좋은 사람이었다.  
내 입장에서 보자면 아주 다루기 편한 사람이다.
적당히 강약을 조절하며 이야기를 내 방향으로 이끌어 가는 일은
식은 죽 먹기다.

이번 경우야, 이 별장은 아버지 것이므로
내가 갑작스럽게 오든 안 오든
아저씨에게 잔소리를 들어야 할 이유는 원래 없지만 말이다.
그래도 미안하다는 사과 한마디면
관리인 아저씨의 당혹감은 금새 사라지게 되므로
가끔씩 말해줄 가치가 있다.

사실, 아저씨도 우리 가족이 올해 별장에 오지 않는 것을 기회로
개인적인 플랜을 세웠을 지도 모르는 일인데,
무작정 연락도 없이 내려온 나에게도 잘못이 없는 건 아니지 않은가.
그리고 사과의 말 한마디면
아저씨 이하 그 아랫사람들의 진심어린 서비스를 불러들일 수 있으므로.

어릴 적부터 적당한 사과와 기분좋은 말 한마디,
그리고 약간의 협박이나 강공을 섞어 주변 사람들을 내 편으로 만드는 능력은
굳이 재벌집 아들이란 프리미엄을 내세울 필요도 없게끔,
나에게 많은 이득을 가져다 주었다.

연한 미소를 섞은 부드러운 음성으로 내 의견을 피력하면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고개를 끄덕이며 이쪽에 끌려가게  되는 그런 패턴이
어릴 때부터 죽 계속되었던 것이다.

사람에게 언어가 있다는 것… 입을 통해 말을 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음성을 듣고 느낄 수 있다는 것이 아주 유리한 요소로 내게 작용한다.

주변 친구들이나 어른들이 늘 독특하다 내지는 매력적이라고 감탄하는
나의 목소리는 세상 살아가는데 상당한 플러스 요인이 되어 주곤 했다는 말이다.

물론… 미모 하나만으로 아버지 같은 거물을 휘어 잡은 엄말
꼭 빼어 닮은 외모 때문일지 모르나, 빌어먹을…
그 여잘 닮은 것은 그다지 반갑게만 생각할 일도 아니다.

" 저기… 항상 쓰시는 도련님 방, 아직 정리를 전혀 안해 놨는데,
   옷만 갈아 입고  잠깐 나갔다 오심 안될까요?
   그동안에 삭, 정리를 해놓고 기다리면…. "

" 그러죠. 제 호퍼(작은 요트), 정고에 있죠? 방수되어 있어요? "

" 지난 주에 오신 손님들 덕분에 예, 되어 있습니다. 타시려구요? "

" 날씨도 마침 괜찮은데 한번 뛰고 올까 해서요. "

" 도련님이야 뭐, 요트건 뭐건 선수급이니 걱정하지 않겠습니다.
   오늘은 도련님이 오셨으니 요리사에게 특별히 영덕게를 준비하라고      
   이르죠. 아니면… 킹 크랩이나 랍스터가 좋으신가요? "

" 아무거나 부탁합니다. 신경쓰지 마시고 평소 하던 대로 하세요.
   너무 신경써 주시면 외려 제가 부담스러우니까. "

시내에서 꽤 떨어진 바닷가에 지어진 아버지의 별장은
미국의 저택을 본따 만든 것으로 크기건 뭐건 흠잡을데 없는 화려함 자체이다.
이 별장은 그러나, 여름을 제외하고는 우리 가족이 오는 일이 거의 없어
나머지 기간에는 관리인 아저씨와 그 가족, 그리고
그 아래 다양한 고용인들만이 한가하게 이곳을 지키고 있을 뿐.

물론 가끔 아버지가 사업상 외국에서 온 손님을 접대하기 위해 이곳을 찾거나,
나와는 어머니가 다른 형들이 각자의 깔들을 옆구리에 차고 아버지 몰래
주말쯤 와선 한바탕 타락의 향연을 보낸 뒤 돌아가는 일도 있지만.

그들이 매달 - 때론 매주단위이기도 하지만 - 바뀌는 그들의 섹스 파트너
- 대체로 골은 비고 가슴만 큰 것들 - 를 데리고 이곳에 와서 무슨 짓을 하는지는
안 봐도 비디오다.

관리인 아저씨며 그 아래 고용인들도 형들이 왜 여기 오는지 다 알고는 있겠지.

비싼 위스키들을 바닥내고, 외국서 밀반입해 온 마약으로 환각상태에 빠지고,
술 냄새를 풍기며 가슴 큰 여자들과 질퍽한 정사신을 벌이곤,
종국엔 온 저택 안을 난장판으로 만들어 놓고 가 버리는데 모를 리가 없다.

그래도 그들이 아버지에게 입도 뻥끗하지 않는 가장 큰 이유는
그런 짓을 하기 전, 미리 형들이 쥐어주는 빳빳한 수표 몇장 때문일 것이다.

돈은… 아주 효율적인 방어수단이다.
하지만 난, 아직은 돈으로 문제를 해결하고 싶지 않다.
그리고, 사실 고용인들은 돈으로만 문제를 해결하는 형들보다
미소와 따뜻한 말을 건네주는 내 쪽에 더 좋은 서비스를 베푸는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잘해줄 필요는 없다. 적당히… 내가 고용주 쪽이란 걸
잊게 하지 않는 선에서 배려를 하면 되는 거다.

굳이 진심을 담을 필요도 없이 몇마디 말과 미소만 보여주면
때론 그것만으로 충분하니까.





2.

" ……? "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물기가 남아 있는 콘크리트 바닥. 먼지가 조금 낀 정고 안에
물청소를 했음에도 소금냄새가 배어 있는 요트와
조금 더 작은 미니 호퍼들이 줄을 지어 서 있다.

모든 것이 언제나의 여름과 전혀 다를 바 없는 정고 안.

가장 아끼는 푸른 색 호퍼를 끌어 내려 할 때였다.
갑자기,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 누구…? "

대답이 없다.

" 누구 있습니까…? "

그 때서야 저쪽 큰 요트 뒤에서 부스럭거리는 소리를 내며
누군가의 그림자가 일어서는 것이 보인다.
어둑한 정고 안, 미처 익숙해지지 않은 내 눈에는
그 누구의 모습이 뚜렷하게 보이지 않았다.

궁금증이 피어 오르기 시작한다.
…대체, 누구지?

" 거기 누구야? "

그 누군가가 서 있는 요트 쪽으로 다가갔다.
정고의 가장 안쪽에 있던 큰 요트 안에 선 채 내쪽을 보고 있는 누군가가
점점 시야에 잡히기 시작한다.

중학생…? 아니, 키로 보아 고등학생일지도 모른다.

바다색 스트라이프 반팔 티셔츠에 남자애가 입기엔 다소 짧다 싶은
검정 반바지가 예상 외로 잘 어울렸다.
아마, 그것은 바닷가 출신이란 것을 선명히 알려주는 연한 갈색의
매끈한 팔다리가 그 아래로 죽 뻗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그닥 진하지 않은 색을 지닌, 약간 긴듯한 앞머리는
역시 연한 갈색피부를 지닌 이마에 살짝 내려가  있고,
그 아래 진한 속눈썹을 지닌 까만 눈이 나를 뚫어지게 바라보고 있다.

머리카락과는 대조적으로 상당히 진한 색을 지닌 입술을 약간 벌린 채,
녀석은 꼼짝도 하지 않고 이쪽을 보고 서 있었다.
그 눈과 입술 때문에, 여자애 같다는 느낌까진 아니어도
묘하게 섹시하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다.

하지만, 분명 사내녀석…이다.

" 누구지? 여기서 뭐해? "

녀석은 꼼짝않고 나를 쳐다보고 있다가 겨우 알아차린 듯,
서 있는 근처 바닥을 가리켰다.
청소할 때 쓰는 마른 걸레와 함께 자잘한 수리에 쓰는 용구들이
바닥에 즐비하게 놓여 있는 것이 눈에 들어온다.

" 요트 고치고 있었던 거니? "

녀석은 질문에 비해 약간 느리긴 했지만,
어쨌든 고개를 끄덕이며 긍정의 표시를 보내왔다.

잘 보니, 눈에 약간 졸음기가 가득한  것이
수리를 하다 그만 깜박 잠이 들어버린 모양이다.

" 임마, 자고 있었구나? "

" ……? "

녀석은 미처 못 들었는지 고개를 갸우뚱했다.

" 잤. 냐. 구. "

나를 뚫어지게 보던 녀석은, 내가 힘을 주어  한글자 한글자 또박또박
발음한 그 때서야 알아듣고선, 혀를 낼름 내밀며 웃었다.

( 귀여운데…? )

" 저… 도련님, 아직 안 나가셨지요? "

정고 문 밖에서 관리인 아저씨의 음성이 들려온다.
고개를 약간 뒤로 틀어 대답했다.

" 네, 들어 오세요. "

정고 문을 열고 들어온 아저씨는 정고 안에 서 있는 나와 녀석을
번갈아 가며 보고선 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 아, 이 녀석이 있었지…
   말씀 못 드렸죠, 이번 여름에 새로 고용한 아르바이트생입니다. "

" 아르바이트요? 어려 보이는데……. "

" 아직 16살이지만 이 근처에서 죽 살아온 놈이라 바다나 배에 관한 건
   빠삭한 녀석이거든요. 요트 수리도 기술자보다 더 잘합니다.
   …아, 이미 다  보고 올린 겁니다, 이 녀석 고용 건은. "

난 속으로 가만히 웃었다.
미리 선수를 쳐서 방어하려는 아저씨의 말투나 표정이 묘하게 열심이었기
때문이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 말입니다, 아저씨.

" 좋은데요, 여기 동생뻘 되는 사람이 있으니.
   아저씨, 저… 제가 있을 동안만 이 녀석을 잠깐 빌려 주시겠어요?
   배에 대해 잘 안다니, 도움 좀 받으려고요. "

" 아… 예에. 그런데… 저 녀석은……. "

아저씨는 그 애를 쳐다 보며 끝을 흐리더니, 결심한 듯 말을 이었다.

" 도련님의 좋은 상대는 못 될 겁니다. "

" 왜요? "

" 저 녀석… 귀가 안 들려요. 당연히 말도 못하죠.
   입모양을 보고 이쪽이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듣긴 합니다만
   좀 답답할 겁니다. 대화는 아예 불가능하구요. "

저렇게 멀쩡하게 서 있는데…?

아아… 그러고 보니… 내 말에 반응하는 속도가 꼭 한템포씩 느렸다.
입을 열어 대꾸하지도 않았고…….
하지만 지극히 자연스러운 반응이라, 설마 귀가 안 들리는 줄은 꿈에도
생각지 못했는데…….

그러나, 흥미로운 존재다.
그리고 그 흥미는… 녀석의 귀가 들리지 않기 때문만은 아니다.
그것만이 아닌… 흥미를 끄는 뭔가가 녀석에게 있다.

" …상관없어요. 요트 다룰 때 특별히 대화가 필요한 것도 아니고,
   말을 해야 할 때는 뭐, 어떻게든 알아서 할테니까. 괜찮으시죠?
   시켜야 할 일이 많은 건가요? "

" 아, 아닙니다. 그럼 그렇게 하세요.
   해야, 오늘부터 일주일간 여기  도련님하구 같이 지내는 거다.
   말 잘 들어야 해. …알아 들었니? "

아저씨는 녀석을 보면서 행여 못 알아들을까 입모양을 확실히 바꾸어 가며
또박또박 읊듯이 말했다.
녀석이 뚫어지게 보고 있다가 씩 웃으며 알아차렸다는 듯
한손으로 가슴을 탁탁 두드린다.

" 해? "

" 바다 해(海)자, 외자 이름입니다. 성은 서가구요.
   서 해. 좀 특이한 이름이죠? "

나는 그만 웃었지만 연갈색의 피부에 바다색 티셔츠를 걸친 녀석에게
더할 수 없이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내심 생각하고 있었다.

아… 코미디언 송해를 생각하면 꼭 그런 것만도 아닌가(^^).

어쨌든… 녀석쪽을 바라보니, 맑고 검은 눈을 가늘게 만들며
약간 쑥스러움이 섞인 표정으로 생긋 웃는 게 들어온다.

나도… 끌린 듯 웃었다.





3.

녀석은 아저씨의 말대로 배를 잘 다루었다.
살이 별로 없는 연갈색의 몸을 날쌔게 움직여 여러가지 일들을
척척 해낸다.

오후의 햇살이 꽤나 강렬했기 때문에 내 몸은 온통 땀에 젖었지만
녀석은 전혀 변함없이 보송보송한 얼굴과 몸 그대로였다.

땀이라고는 한방울도 흘러 내리지 않을 것처럼 매끈한 연갈색 피부.
더운 여름을 줄곧 겪어 왔기 때문에 이젠 익숙해진 건지도 모른다.

반면에 땀을 무지막지하게 흘린 나는, 썬블록을 발랐음에도 불구하고
그 잠깐의 요트놀이로 인해 어느 사이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아마 내일 하루 정도만 더 나갔다 오면 금새 다 타버릴 듯 싶지만,
그렇다 해도 녀석처럼 아름다운 갈색이 되진 않을 것이다.

녀석의 피부.
흘러내리는 벌꿀처럼 군살없이 매끈한 연갈색은 참으로 멋있었다.
도시에서 흔히 보던 여자들의 썬탠기계로 태운 몸과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자연스런 아름다움이 있다.

요트의 돛을 조절하고 있던 녀석의 매끈한 다리를 난,
어느 사이 홀린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호퍼의 돛을 세우고, 바닷가까지 옮겨서 물에 띄우고
한바퀴 저쪽까지 갔다가 돌아왔을 때는 이미 저녁식사 시간이 되버렸고,
그 사이 내 방도 깨끗이 치워져 있었다.

녀석과 나는 뱃전으로 튀어오른 물살을 조금씩 맞아
반바지와 셔츠 아랫부분을 완전히 적신 채, 저택으로 들어왔다.

열을 반사하는 모래에 찔리고 소금물에 젖은 발바닥은 벌겋게 달아오른데다
굵은 모래가 묻어 따끔따끔거린다.

" 같이 저녁 먹지 않을래? "

정고를 나와서 그렇게 묻자, 녀석은 조금 곤란하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하면서
저택 오른편에 위치한 관리인 아저씨가 사는 집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허락을 받지 않으면 곤란해요… 하는 듯.

…참, 걱정도 팔자군.

" 랍스터를 준비했습니다.
   주방 책임자 말이 영덕게는 바로 가져오기가 좀 곤란하답니다.
   주문해 놓았으니, 글피 저녁에는 드실 수 있을 겁니다. "

" 아무거나 좋아요. 참… 저, 해랑 같이 저녁먹을 겁니다, 괜찮으시죠? "

집에 들어가자마자 나를 맞는 관리인 아저씨에게
뒤에서 쭈삣거리며 따라오는 녀석을 가리키며 말했다.

" 아, 네. 준비하겠습니다. "

아저씨는 조금 놀란 듯 대답하더니 주방 쪽으로 가버렸다.  
두사람 분의 식사를 준비하라고 지시하려는 것일 것이다.  
뭐… 충분히 준비했을테니, 식기만 새로 내놓으면 될 거라고 짐작한다.
어차피 혼자서 다 못 먹을 양인 걸.

위에 걸치고 있던 진한 녹색 폴로 셔츠를 벗으면서 욕실 쪽으로 걸어가다
문득, 뒤통수에 뭔가 닿는 듯한 착각을 느끼고 뒤돌아 봤다.

…녀석이 멍하게 선 채, 날 바라보고 있다.

" 같이 샤워할래? "

폴로셔츠를 손에 든 채, 물었다.

" ……? "

못 알아들은 모양이다.

" 같. 이.  샤. 워. 하. 겠. 냐. 구. "

저쪽에서 도자기를 닦고 있던 하녀 한명이 깜짝 놀라 이쪽을 쳐다 본다.

참… 별 말에 다 놀래는 군.

씩 웃음을 보내니 화들짝 놀라서 다시 도자기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다시 녀석을 보니, 얼굴이 빨개지며 고개를 흔든다.
옆으로 가서 어깨를 툭 쳤다.

" 남자끼린데 뭐 어때, 임마. "

녀석은 이번엔 고개 뿐만 아니라 손까지 열심히 저으며 거부의사를 표시한다.

정말, 귀여운데…?







Silent Blue(사일런트 블루) (2)





4.

쏴아아아…

샤워에 몸을 맡기고 있던 난, 문득 김이 뿌옇게 씌인 거울을 손바닥으로 문질러
거기에 비친 얼굴을 들여다 봤다.

그래… 확실히 아버지보단 엄마를 더 많이 닮았다.
친가쪽보단 외가쪽이 인물이 좋으니 불평할 일은 아니지만… 그래도 싫다.  
가급적이면 어느 쪽도 닮지 않는 것이 좋았을 걸.

아버지와 15살이나 차이나는 엄마.
온통 외제 옷들과 장신구들로 몸을 두른 채
자신을 가꾸는데만 전력을 기울이는… 그런 여자가 내 엄마다.

초등학교 때까지 친구들이 엄마가 무지 젊다며 부러운 눈길을 줄 때마다
속으로 쓴 웃음을 삼키곤 했다.
그 젊은 엄마가 배아파 낳은 자식은 안중에도 없이
자신만을 가꾸는 사람이란 사실을 안다면, 그래도 그 아들인 내가 부러울까.

…싫었다.

인공폭포가 달린 넓은 집도… 몇대씩 딸린 자가용도…
온갖 비싼 식품들이 가득한 부엌도… 이런저런 시중을 다 해주는 고용인들도…
기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보아 왔으니 당연한 양 생각하는 이유도 있겠지만
무엇보다  그런 거죽의 화려함은 내게 있어 아무런 의미를 주지 못했던 것이다.

내가 바라는 것….

주말이면 식구들을 데리고 드라이브를 가주는 아버지.
신경 써주고 가끔 어른답게 위엄을 지닌 채 야단쳐 주는 엄마.
맞붙어 싸우기도 하지만, 중요한 때 의지가 되어줄 따뜻한 형제자매들.

가장 중요한 것 몇가지가… 내겐 없다.

대학 1학년이 된 지금까지, 그 사실은 날 가끔씩 아프게 찌르곤 한다.





5.

샤워를 끝내고 목욕가운을 걸친 채 머리를 타올로 문지르며
욕실에서 나왔다.
에어콘을 틀어 놓은 거실의 냉기가 젖은 머리로 시원스레 감겨온다.

…기분이 좋다.
그런데…?
……?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같이 식사하기로 한 거… 아니었나?
내가 한 말, 못 알아들었던 건가?

옷을 대충 걸치고, 밖으로 찾으러 나갔다.

( 어디 간 거야? )

바닷가 가장 근처에 있는 문 옆까지 갔을 때야 녀석을 발견할 수 있었다.

문 옆에 만들어 놓은 간이 샤워장…
이 저택에 온 사람들이 해수욕을 하고선 발 정도만 씻는
그 샤워장에 녀석이 있었다.
머리부터 어깨까지, 그리고 종아리 중간부터 발까지만 드러낸 채,
나머지 부분은 고동색 여닫이 문에 감추고 서 있다.

시원한 듯, 샤워물에 얼굴을 대고 눈을 감고 있는 모습.
투명한 물줄기가 눈을 감은 녀석의 얼굴을 타고 아래로 흘러내리는 것이
보인다.
손을 들고 앞머리를 문질러 뒤로 넘기면서 녀석은 물줄기에 몸을 맡긴 채,
그대로 서 있었다.

어딘가… 투명한 느낌…….

문득… 가려진 녀석의 몸이 보고 싶어졌다.
어깨 아래부터 다리 중간까지 녀석의 중요한 부분을 전부 가리고 있는
나무 문을 그만 떼어내고 싶어졌다.

…녀석의 알몸은 어떻게 생겼을까.

바다색의 티셔츠와 검은 반바지로 감추고 있던 저 녀석의 연갈색 알몸은  
필경 눈부시게 아름다울 거란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 생각은 잠시 후에 일종의 죄의식 비슷한 걸 불러와,
난 그만 시선을 녀석에게서 돌리고 말았다.

누군가의 알몸을 보고 싶어진 것은… 남자고 여자고간에, 처음이다.
이제껏 데이트를 했던 여자애들 중엔 꽤 예쁘고 섹시한 애들도 있었지만,
알몸을 보고 싶다고 적나라하게 느낀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처음…이다.

" ……? "

녀석이 인기척을 느낀 모양이다.
뒤를 돌아 보더니 화들짝 놀라면서 샤워물을 잠그는 것이 보였다.

" 어어… 괜찮아, 천천히 해. "

손을 저으면서 괜찮다는 신호를 보냈건만 녀석은 대충 몸을 닦더니
후다닥 위에 걸쳐 놓았던 옷을 입고 샤워장 밖으로 나왔다.
어지간히 급했는지
제대로 닦지 않은 머리에서 물이 투두툭 떨어지는 것이 느껴진다.

물을 잘 닦고 나와야지… 젠장, 묘한 기분 들게 하잖아…?

" 이리 와 봐. "

검지 손가락을 움직여서 녀석을 이쪽으로 불렀다.
죄진 사람처럼 놀래더니 이쪽으로 멈칫멈칫 걸어온다.

한… 170 정돈가? 내 키가 183이니까… 그래, 170 정도 되겠는데?

내 앞으로 똑바로 걸어온  녀석을 보며 무심결에 한 생각.

멈춰 선 녀석의 어깨에 올려진 타올을 들어 머리에 대고
문질러 닦아 주었다.  
녀석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진다.

자기가 하겠다는 듯 타올에 손을 대며 막으려 했지만 그냥 계속해서  
녀석의 머리를 단단히 붙잡은 채 힘을 주어 머리의 물기를 문질렀다.  
꿈틀거리던 녀석은 내 손에서 벗어나기 힘들단 걸 알았는지,
포기한 듯 동작을 멈추고 만다.

" 됐다. "

녀석을 놓아주자 휙, 하고 타올을 내 손에서 뺏어간다.
그다지 곱지 않은 시선이
자신을 애기 취급한 게 영 맘에 안든다고 말하고 있다.

" 그러니까 물기를 제대로 닦고 나와야지.
   이거 봐. 바닥에 물 다 떨어졌잖아. "

입술이 조금 분한 듯 비죽거리고 있다.
뭐라고 말하고 싶은데 못하니까 답답한 모양이다.

녀석의 어깨에 팔을 둘러 얼굴을 들여다 보며 웃었다.
샤워한 자국인 양 아직도 물기에 젖어 있는 속눈썹을 아래로 살짝 내리깐 채,
내 얼굴이 아닌 다른 방향을 보고 있다.

하… 속눈썹 한번 더럽게 길군…….

" 화났냐…? 미안. 동생 같아서, 귀여워서 그래. 용서해 줄거지? "

내 눈을 피한 채로 쳐다도 안 본다.

거, 참… 별것도 아닌 일 갖고, 계집애처럼 삐지긴…….

" 이거 봐, 사람 말을 들어야 할 것 아냐. "

턱을 잡고 고개를 돌려 녀석의 눈을 내 눈에 맞췄다.
까만 눈이 놀란 듯 크게 뜨여져 있다.

그 눈에 대고 빙긋 웃어 주었다.

" 식사하러 갈 거지? "

꼴깍.
녀석의 목구멍에서 침 넘어가는 소리가 들린다.

긴장해서 그런 거냐, 아님 배가 고파서 그런 거냐.





6.

아침.

10시쯤 느지막히 일어나, 식사를 거하게 차리려는 걸 마다하고
내 손으로 직접 프렌치 토스트와 블랙커피를 만들어 아침을 때웠다.
커피를 마시고 있던 중, 문득 어제 저녁의 일이 떠올라 키득키득 웃었다.

녀석은 바닷가 출신인 주제에 서양식 랍스터 요리를 처음 먹어본 모양이었다.
속살을 빼 먹는 게 어지간히 서툴러 보여 킥킥 웃고
녀석의 접시를 내쪽에 가져와 일일이 살을 바른 다음, 되돌려 주었다.

고맙다고 고개로만 끄덕거리고 나서 다시 묵묵히 접시에 얼굴을 박은 녀석은
식사가 끝난 잠시 후, 내게는 간단 말도 없이 휭하니 집으로
사라져 버렸었다.

" 아저씨, 해는 어디 있죠? "

" 하늘에 떠 있죠. "

" …쌍팔년도 개그 그만하고 말씀해 주시죠. "

" 정고에서 도련님을 기다리고 있을 겁니다. "

관리인 아저씨의 말을 듣고 정고에 가보니
녀석이 내 호퍼를 열심히 청소하고 있었다.
너무 청소에 열중해설까, 내가 온 것도 모르고 있다.    
귀가 들린다면 금새 알아차렸을 텐데, 역시나 방해음이 전혀 들리지 않으니
집중력이 강할 수 밖에.

녀석이 알아차릴 때까지 팔짱을 낀 채, 정고문에 기대 서 있었다.

" ……! "

녀석이 날 발견하고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얼긴….
내가 널 잡아먹기라도 한다냐, 자식.

" 어이, 다 끝난 거야? "

끄덕끄덕.

" 그럼 나와. "

" ……? "

" 드라이브 가자. "

면허를 따자마자 산, 4WD의 지프차는 내 보물과도 같은 존재다.
여기 내려올 때도 기름을 꽉꽉 채운 지프를 혼자 몰고 내려왔었다.

아아… 시원하군…. 그래, 에어컨 따윈 필요도 없다.

소금기 어린 습함을 머금은 바람이 머리카락을 날리며 뒤로 빠져 달아난다.
선글라스를 통해 비치는 풍경,
길 가장자리에 빽빽이 서 있는 소나무들과
시야 저편에 보이는 바다가 미치도록 아름답다.

" 눈 안 부시냐? 선글라스 빌려줄까? "

조수석에 앉은 녀석을 보며 물었다.  
햇살이 지독하게 내리쪼여 선글라스 없인 앞도 잘 못 보겠건만
녀석은 아무렇지도 않은 모양.

귀가 안 들린다는 걸 깜빡했다. 또다시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쳐다 본다.
내가 말을 했다는 건 느끼는데, 뭐라고 말했는지는 모르는 것이다.

날 뚫어지게 보고 있는 녀석의 까만 눈을 봤다.

긴 속눈썹에 덮인 까만 동공…
금방이라도 빨려들 것만 같은 그 검은 공간 속에 내가 들어가 있다.

" 취소, 감추지 않는 게 낫겠어. "

" ……? "

" 아, 아무것도. 헷소리였다. "

때마침, 커브길이 나타나 핸들을 팍 꺾었다.
불의의 일격을 당했던 듯, 녀석의 몸이 내쪽으로 팍 기울어지더니
결국 부딪히고 만다.

내 팔과 녀석의 어깨가 쿵 하고 충돌했다.
전류가 이는 듯한 느낌.

당황한 녀석이 황급히 몸을 일으키더니 미안한 듯 쳐다본다.
훗… 하고, 녀석을 향해 웃으며 말했다.

" 내 차에 타려거든 균형감각이 좋아야 한다, 알아 둬. "

대충 알아들은 녀석은 자기를 놀린다고  생각했는지 - 사실이지만 -
휙 하고 오른쪽으로 고개를 돌려 버렸다.

아아… 어지간히 자주 삐지는 군…….





7.

" 그러고 보니, 내 이름을 말하지 않았구나. 이준언이다. "

지프를 백화점 옥외 주차장에 세우고 녀석에게 말했다.

길이 전혀 막히지 않기 때문에
상당히 외진 곳에 자리잡은 아버지의 별장에서도
시내까지는 40분이면 충분하다.

또다시 얼굴을 갸우뚱하며 못 알아 들었단 표시를 보내는 녀석에게,
차에 놓아뒀던 메모지 위에 싸인펜으로 휘갈겨 써서 건네 주었다.

「 이 준 언. 」

그리고 엄지 손가락으로 나를 가리켰다.
녀석이 알았다는 표시로, 열심히 고개를 끄덕여댄다.
그러더니 내 이름 옆에 자기 이름을 쓰려 했다.

「 서 」…

" 아, 알고 있어. 서 해 잖아. …훗. "

녀석의 풀네임을 생각하니 다시금 웃음이 삐져 나왔다.

의아한 표정으로 쓰려다 말고 싸인펜을 멈추는 녀석을 기분좋게 봤다.

" 아냐, 써 줘… 네 이름. "

녀석은 간단히 두자만 쓰면 될 일을 길게 끄적거리더니
내게 되돌려 주었다.

「 글씨, 원래 그렇게 못 써요? 」

" 뭐야… 너……!? "

싸인펜을 녀석으로부터 낚아채곤 메모지를 꾸겨 버렸다.

쳇… 내 컴플렉스 중 하나를…….

아마 수능이 주관식이었으면  난 절대 대학에 합격하지 못했을 것이다.  
특차전형이라는 것이 있단 사실이 내겐 정말 다행스런 일이었다.

이런 녀석에게까지 한 소리 듣다니…
서울 올라가면 펜글씨학원에나 등록해야 할까 보다.

" ……? "

입을 삐죽이 내밀다가 녀석을 바라보니… 녀석이 웃고 있었다.
더없이 즐거운 표정으로 고개를 숙인 채,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킥킥대고 있었다.

웃으니까… 더 귀여운 걸……?





8.

백화점에서 필요한 물품들 이것저것을 사니, 점심 먹을 시간이
지나 있었다.
미리 관리인 아저씨에게 점심은 먹고 들어가겠다고 말해 두었다.

하지만 이 근처 어디의 뭐가 맛있는지 당최 아는 게 있어야지.

「 먹고 싶은 거 있어? 」

메모지에 써서 녀석의 눈앞에 디밀었다.
그러자 - 정말 의외였다 - 녀석은 「피자」라고 써서 주는 게 아닌가.
바다 소년이라 당연히 해산물이 먹고 싶다고 할 줄 알았는데 하필 피자라니.

하지만 생각해 보니까, 당연한 일이었다.
녀석은 항상 해산물을 입에 달고 살며 자라왔기 때문에
모처럼 시내에 나온 지금같은 때엔
외려 피자나 햄버거 같은 것에 입이 동할 수도 있을 것이다.

어쨌든… 뭔가 근사한 걸 먹을까 하던 나의 기대는 단숨에 날아갔다.

피자헛 매장에 차를 파킹시켜 놓고, 2층으로 올라갔다.

메뉴판은 볼 것도 없다.
난 여기 오면 무조건 치즈 크러스트 슈퍼 스페셜이다.

샐러드 바를 가리키며 물었다.

" 샐러드나 딴 거 먹고 싶어? "

녀석은 내 눈치를 가만히 살피더니 고개를 끄덕거렸다.

『 초…토…화. 』

거대한 치즈 크러스트 피자와 하나 가득 담아온 샐러드도
우리 두사람의 위장에 비하면 보잘 것 없는 존재였다.
콜라도 물론, 리필이다.

" 오븐 스파게티도 시킬 걸 그랬나? "

배는 그럭저럭 부르지만 약간 아쉬움이 남는 걸.

톡톡.

탁자 두드리는 소리가 나, 앞을 바라보니
정면에 앉아 있던 녀석이 손가락을 들고 주목하란 신호를 보냈다.
그러더니 가져온 메모지에 뭔가를 써서 준다.

「 몇살이에요? 」

그 옆에 크게 「20」이라고 쓰고 덧붙여 천천히 말했다.

" 대학교 1학년. 넌… "

「 고등학생? 」

메모지를 본 녀석은 고개를 크게 흔들더니 그 메모지 다음장에다,
「 학교 안 다녀요. 」
하고 썼다.

" 한번도? 처음부터? "

「 초등학교 3학년까지는, 귀가 들렸으니까. 」

「 병? 」이라고 적으니, 다시 미소지으며 끄덕한다.

「 입모양으로 어떻게 알아들어? 」

「 배웠어요, 그런 거 가르쳐 주는 학교에서. 」

「 지금은 아무 학교도 안 다녀? 」

끄덕하더니 덧붙여 적는다.

「 혼자 공부, 검정고시 준비. 고입 자격까진 땄어요. 」

( …할 건 다하는 놈이잖아? )

" 대학, 가려구? "

얼굴을 쳐다보며 소리내서 물었다.
픽, 웃으며 고개를 젓는다. 가면 뭐해요… 하는 듯이.
그리고 또 적는다.

「 대학 재밌어요? 」

「 별로. 가야 할 것 같으니까 간 거야. 」

" ……? "

녀석의 얼굴에 이해가 잘 가지 않는다고 씌어져 있다.
부연설명을 해줘야 하나.

「 달리 뭘 해야 할지 몰라서. 뭣보다 안 가면 부모님이 펄펄 뛰실거고. 」

「 형, 부자죠? 그렇게 큰 저택이 별장이니. 」

「 좋아 보여? 」

천진한 표정으로 고개를 위아래로 움직이는 녀석을 보니,
그냥 환상을 가진 채 있게끔 놔두는 게 좋을 듯 싶어서
그저 미소짓고 화제를 돌렸다.

「 볼링 치러가자. 」

" ……? "

" 아까 보니까 맞은편 건물에 볼링장 있더라. …가자. "

끄덕거리고 있는 녀석은
외관의 화려함이 행복의 전부가 아니란 사실을 모를 것이다.

아마… 모를 것이다.







Silent Blue(사일런트 블루) (3)





9.

피자헛에서 피자를 먹고 녀석과 필담으로 얘기를 나누다가
맞은편 볼링장에서 볼링 한게임을 치고 나니
벌써 집에 갈 시간이 다 되어 있었다.

볼링이라 해봤자 아무것도 모르는 녀석에게 거의 가르쳐 주기만 하다  
시간이 다 지나갔지만, 그것도 나름대로 재미있었던 것 같다.
귀가 들리지 않는 녀석치곤 말귀를 제법 알아 들었고
나중엔 스트라이크까지 잡아내
내 입을 다물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이다.

핫… 이래저래 귀여운 놈이다.

집으로 돌아가는 차 안에서 느끼는 저녁바람은 더할 수 없이 시원했다.

말을 하지 않는 - 사실은 「할 수 없는」이지만 -  녀석을 상대로
나 혼자 계속해서 입을 놀렸더니, 좀 피곤하다.

음악이라도 들을까.
무심결에 카 스테레오에 테입을 집어 넣으려고 하다가, 손을 멈췄다.

옆에… 녀석이 있다.
귀가 들리지 않는… 녀석이 있다.

…소리가 뭔지, 이젠 모르게 된 건 아닐까.
초등학교 3학년 때라… 그 때까지 들은 소리들에 대한… 기억이 남아 있을까.
전부 다… 잊어버린 것은 아닐까.

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것… 어떤 기분일까.
…어떤, 기분일까.

상상조차… 할 수 없다.
…상상조차도.

멈칫하고 테입을 내려놓자, 녀석이 이쪽을 봤다.

아… 이런.

내 손에서 방금 벗어난 테입을 보더니, 웃으면서 들어 본다.
뭐지…? 하는 듯한 표정을 짓다가 카 스테레오를 이리저리 살펴 보고선  
테입을 구멍에 집어 넣었다.

그리고 나서 이쪽을 향해 차분한 느낌의 미소를 보내더니
다시 앞을 바라 보는 녀석을 나도 멍하게 볼 수 밖에.
녀석의 미소는 미안한 감정조차 잊게 만든다….

아, 안돼… 운전에 집중해야지.

음악이 흐르기 시작한다.

아… Extreme의 곡인가.
꽤나 오래된 노래… <More Than Words>.

저 녀석에겐… 들리지 않겠지.
바로 옆에 있는데… 바로 옆에서 같은 시공간을 공유하고 있음에도…
소리만은, 소리만은 공유할 수 없다는 거… 믿을 수가 없다.

바로 옆, 똑바로 앞을 응시하고 있는 녀석의 차분한 옆모습이 있다.
까만 눈… 적당한 길이의, 일직선으로 이어진 코… 색이 선명한 입술…
그리고… 이젠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귀가 보인다.
소리를 들을 수  없는 귀… 그리고… 적당한 도톰함을 지닌 귓불이 보인다.

순간, 이상야릇한 감각에 전신이 달아오르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뭐라 설명할 수 없을 만큼, 막연하고 기묘한… 그런 감각.

하지만, 단 하나만은 알고 있었다.
…이건 일종의 욕망이란 사실.

녀석의 도톰한 귓불을 만져보고 싶다고… 무의식중에 생각하고 있었다.

『 만. 져. 보. 고.  싶. 다. 』고.





10.

날씨가 너무 좋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하늘은 진한 푸른 색을 띄고 있고
구름은 무척이나 여유롭게 흘러가고 있다.
어제와 마찬가지, 아니 그 이상의 강렬한 햇볕은
아침부터 바다에 뛰어들고 싶은 충동을 느끼게 만들 정도.

아침을 먹고 정고로 가니 부지런한 녀석은
이미 자신의 아침 일을 다 끝내놓고 날 기다리고 있었다.
오늘은 아예 문쪽으로 얼굴을 돌리고 있는 폼이,
나 때문에 놀라지 않으려고 미리 마음의 준비를 하고 있었음을 읽고서
속으로 웃어버렸다.

( 그래 봤자, 또 당할 걸…? )

말도 꺼내기 전에 호퍼를 끌어 내려는 녀석의 팔을 잡았다.
귀가 안 들리니까, 좀 실례라고는 생각하지만
이런 식으로 몸을 먼저 저지하는 편이 훨씬 간편하단 말이다.

말하자면, 이틀 사이 터득한 지혜라고나 할까.

" 배는 나중에 타고… 수영하러 가자. "

" ……. "

" 수. 영. …알았지? "

너무 더워서 물에 그냥 살고 싶었다.
요트 놀이는 그래도 한폼잡을 만큼 여유가 있는 더위 속에서나 하는 것.
이렇게 더울 때는 그저, 뛰어 드는게 최고다.

( …예상 밖인 걸. )

수영팬티를 갈아 입고  나온 녀석을 보기 전엔 그저 깡마른 체구라 생각했는데,
이제 보니 그렇다기 보단 잘 빠진 몸매라 하는 편이 더 어울린다.
군살없는 몸매도 깨끗하게 탄 연갈색 피부 덕분인지 약해 보이기는 커녕,
건강 그 자체.

아직 본격적인 피서철이 시작되지 않은 데다가
아버지의 별장과 붙어 있는 바다는 해수욕장이 아니기 때문일까,
수영을 즐기는 사람은 우리 외에 지금은 아무도 없다.
피서철이 시작되더라도 이 근처 사람들 외에
여기서 수영하는 사람은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

…자유.
…자유로운 기분이다.
…물고기처럼 자유로운 기분이다.

청보랏빛을 띈 바닷물은 햇빛이 반사되어
속이 다 들여다 보일 정도로 투명하게 느껴지고
그 아래 돋아 있는 해초들이 발을 감아올릴 때마다
미끈거리는 감각에 약간은 야릇한 기분.

이런 자연 속에서는 개헤엄이 최고다.
자유영에서 접영까지 수영동작에 대해선 배울 만큼 배운 나도,
바다에선 그저 고개를 내민 채 허우적거리는 개헤엄이 제일 편하다.

저편을 보니 녀석이 이쪽은 안중에도 없는 듯,
한마리 인어처럼 유연하게 헤엄치고 있는 것이 보인다.
녀석이 있는 곳까지 잠수한 상태로 헤엄쳐 갔다.
물안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눈에 물이 들어가는 것이 좀 꺼림직해
처음엔 눈을 감고 헤엄쳤다.

한데, 이 정도면 가까워졌겠다 싶은 곳까지 헤엄쳐 와서 눈을 떴는데도
불구하고 녀석이 보이지 않는다.
고개를 물 밖으로 빼서 주위를 둘러보니… 없다.

" ……? 으…?! "

소리치지도 못한 채 난, 물 속으로 빠져 들어갔다.
녀석이 물 속에서 발을 잡아당긴 것이다.

아… 당했다…
이런… 이쪽에서 장난을 걸 생각이었는데…
그나저나 숨막히잖아… 우웁… 놔줘…

발버둥을 치자, 겨우 벗어날 수 있었다.
몸이 쑥 올라와 머리가 물 위로 나오자, 겨우 살 것 같다.

" 크억… "

소금물을 꽤 마신 것 같다…
우… 짜다…….

눈을 떠 보니 코 앞에서 녀석이 웃고 있다.

연갈색 피부에 대조되어 유난스레 도드라져 보일 만큼 새하얀 이를 빛내면서…
태양처럼 환하게… 환하게…….

눈부셔…….

눈이 부시다고 생각했다….

" 자식, 그런 짓도 할 줄 아냐? "

얄미워져서 녀석에게 달려 들어 머리를 물 속으로 내리 눌렀다.
잡으려 하는 걸 보자마자 달아나려 하는 녀석의 목을 단단하게 끌어 안고
그대로….  
녀석이 물 속에서 캑캑대며 몸부림을 쳤지만 맛 좀 봐라, 하는 마음에
계속 누르고 있었다.

어… 그런데… 이 녀석……?

처음 몸부림을 친 것도 잠시, 이내 움직이지 않는다.
깜짝 놀라 놓아 주었더니 설상가상, 그대로 가라앉는 것이다.

헉…! 뭐야…
나, 살인자 되는 거 아냐……?

놀라 물 속에서 끌어내어, 눈을 감고 늘어져 있는 녀석을
마구 흔들어 보지만 응답이 없다.

" 야… 야……! "

아무리 소리치며 몸을 잡고 흔들어 봐도
그저 힘을 뺀 상태로 몸을 내맡긴 채 앞뒤로 상체가 왔다갔다 할 뿐,
눈을 뜨지 않는 것이다.

맙소사…!

( 이런… 이렇게 약골이란 말야…? )

너무 당황한 나머지, 녀석을 거의 끌어 안다시피 한 채
물살을 헤치고 뭍으로 나아갔다.
뭍에 거의 다 닿아 녀석을 안아 들려고 했을 때…

젠장, 녀석이 눈을 번쩍하고 뜨더니 한술 더 떠서
헤벌쭉 웃기까지 하는 게 아닌가.

" 야, 너…?! "

이젠 화까지 나려 한다.
녀석을 한대 후려칠 것처럼 모션을 취하는 찰라, 잽싸게 몸을 피하더니
모래사장 위로 뛰어 달아나 버렸다.

" 너… 새꺄… 서…!!! "

이건 뭐란 말인가. 허니문 온 신혼부부도 아닌데… 후아…….
웃기지도 않다. 「나 잡아 봐라…」장면을 사내 녀석이랑 연출하고 있다니.

그런데 말이다… 생각은  그렇게 하고 있는데,
몸은 어느  사이 정신없이 녀석을 뒤쫓고 있다.
이런… 코미디도  아니고… 그렇다고, 삼류 멜로물도 아니고…
이게 대체 무슨 짓거리란 말인가.

제길, 가벼우니 그런가, 몸이 엄청  빠르다.
그래도 다리가 훨 긴 덕분에, 간신히 녀석을 붙잡아 넘어뜨릴 수 있었다.

항복해, 이래뵈도 초등학교 때부터 줄곧 체육대회 때마다
반대항 릴레이 주자로 뽑혀 왔던 몸이란 말이다.

아아… 지…쳤…다…….

녀석이 엎어진 바로 옆에 나도 털썩 드러누워 버렸다.

몸 밑에 깔려 있는 모래들이 몸을 따끔따끔 찌르지만
힘들어 일어날 수 없다.

" 허억… 허억…. "

팔을 이마 밑에 댄 채, 엎드린 상태인 녀석과
팔을 들어 눈을 가린 채 하늘을 향해 누워있는 나.
거칠게 호흡을 몰아 쉬고 있는 두사람을,
금방이라도 터질 듯 작렬하는 태양이 내려보고 있다.

뜨겁디 뜨거운 덩어리…
그곳으로부터 내려 꽂히는 강인한 빛  아래, 모든 신경을 잃어버린 것처럼
몽롱한 머리를 힘없이 눕힌, 젊은 우리가 있다.

시간이 조심스럽게 흘러간다.
땀이 조금씩 배어 나오기 시작한다.
몸 표면을 뒤덮고 있던 물기가 눈깜짝할 사이에 말라가고 있다.

누운 상태 그대로, 부신 눈을 간신히 떠서
바로 옆에 엎드린 녀석을 보았다.
때마침, 녀석도 머리를 들고 눈을 깜박이며 빛에 적응하려 하고 있는 참.

몸을 반쯤 일으켜 녀석을 내려다 봤다.
녀석도 자세를 바꾸어 똑바로 누운 상태로 날 올려다 본다.
눈이… 마주쳤다.

녀석의 까만 눈동자.
여름, 부신 태양열도 금새 흡수해 버릴 것 같은 까만 눈을
정신없이 들여다 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한다.

녀석은 이번에는 내 눈을 피하지 않았다.
내 시선을 삼켜버릴 것처럼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그렇게 한 자세로, 두사람은 정신없이 서로의 눈을 보고 있었다.

주변의, 다른 모든 것이 정지하고…
태양과 녀석과 나만 남아있는 듯한 감각.

…나도 모르겠다.

…어째서일까……?
…부서져 가는 태양에 잠시 이성을 잃었던 걸까…?

어느 샌가 난, 녀석을 내려다  보고 있던 얼굴을 그대로 숙여,
연갈색 얼굴 위에 자리잡은 도톰한 진홍색 입술 가까이에
내 입술을 가져가고 있었다.

…위험해……
…위험해……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녀석 쪽으로 고개를 숙여 입술을 겹치려 한 바로 그 순간…
녀석은 연갈색 얼굴을 지극히 자연스럽게 옆으로 돌려 버렸고,
이어 몸을 천천히 일으켰다.

…그 때서야, 정신이 들었다.

짧고 울퉁불퉁하게 모래에 그려진 두 그림자.
저편에 보이는, 변함없이 밀려오는 푸르른 파도.
파도 위로 날개를 쭉 편 채 날아다니고 있는 바다새.
더할 나위없이 깨끗한 하늘과 하얀 구름, 그리고 태양.
그 하늘과 우리 사이를 채운, 약간 짭조름한 공기의 냄새.
그 공기를 가볍게 뒤흔들며 스쳐 지나가는 연하디 연한 바람.

정지해 있던 시공간이 다시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까완 다른 의미의 땀방울이 등을 타고 내려가는 것이 느껴진다.

위험했다…
위험했다… 정말이지…….
아마… 녀석도 알아차렸던 거겠지.

" ……. "

잠시, 어색함이 흘렀다.
그 어색한 공기를 원래 흐름으로 되돌린 것은 녀석 쪽.

몸을 일으킨 녀석은 자신의 행동을 깨닫고 멍하게 주저앉아 있을 뿐인 날
흘깃 살피곤 두리번거리며 뭔가를 찾는다.
그러더니, 크고 끝이 뾰죽한 돌을 집어들곤 바닷물에 조금 젖은 뱃사장에
다음과 같이 큼직하게 썼다.

「 저녁, 우리 집에 올래요? 」

( ……? )

놀라, 녀석을 쳐다 보았다.
녀석은 싱긋이 웃고 아까 쓴 바로 밑에 또다시 시간을 들여 길게 적었다.

「 우리집, 횟집해요. 형, 데려오랬어요. 」







사일런트 블루(Silent Blue) (4)





11.

" 아… 그… 해야가 일한단 저택 되련님이지예. "

횟집은 일반주택을 개조한 것으로 1층은 횟집으로 쓰고 2층에서 식구들이
생활하도록 만든 구조였다.

문가에 들어서자, 빈쟁반을 들고 방에서 나오던 아주머니가 녀석을 먼저
발견하고, 그리고 나를 보더니 이쪽으로 걸어와 반갑게 말한다.

나도 얼떨떨하게 고개를 숙였다.

" 안녕하세요? "

" 어이구, 키도 훤칠하니 억수 잘 생기고 잘 빠졌네.
   우리 해야한테 잘해 준다꼬 해서 오시라 했어예.
   우리가 말이제, 딴 건 못해도 회랑 맨탕(매운탕)은 뽀짐하게 낼 수 있다  
   아입니꺼. 회, 싫어하지 않지예? "

" 예, 좋아합니다. "

" 잘됐네, 참말. 해야, 되련님하꼬 조기 방에 올라가 있그라.
   밑반찬 내 가께. "

아주머니는 해에게 수화로 얘기했다.
아줌마의 사투리 섞인 말투와 더불어 현란한 손동작이 합쳐지자
뭐가 뭔지 정신이 하나도 없다.

까맣게 탄 피부에 환한 미소, 격의없이 맞아주는 저 모습을 보고
갑자기 죄책감이 밀어닥쳤다.

…낮에 있었던 일이 영 마음에 걸려서.

하지만 표정과 행동에 별다른 변화없이 마주앉은 채 미소짓고 있는 녀석을
보니 걱정은 기우일 뿐이란 사실을 깨닫는다.

아주머니가 이것저것 밑반찬을 가득 내어 왔다.

" 우리가 내는 거니까 부담갖지 마꼬, 되련님은 회중 어떤 거 좋아함니꺼. "

존대말로 대하니까 정말 쑥스러워 몸둘 바를 모르겠다.

" 글쎄요…? 그냥 다 잘 먹는데요. "

" 해야, 니는 어찌 생각하나. "

아주머니가 다시 수화로 녀석에게 말하자 녀석이 뭔가 손동작을 해 보인다.

" 광어랑 도다리…? 음… 그래, 방금 가져온 거 있다.
   그거 갖고 되겠심니꺼. "

" 예. 그럼요. "

" 일단 그거 드리고예, 모자라면 다른 것도 드리겠심니더.
   해삼이랑 멍게, 좋아하지예. "

" 예. 아… 저, 말 놓으세요. "

" 신경쓰지 마소, 맨날 손님 받다보니 존대가 입에 배어서예. "

눈꼬리에 주름을 잔뜩 잡으며 친근감 있는 미소를 보내는 아주머니.

잠시 후, 아주머니가 가져온 회를 초고추장에 푹 찍어 입에 넣었다.

녀석이 젓가락을 든 채 가만히 이쪽을 쳐다 보고 있다가 내가 꿀꺽하고
삼키자 눈을 크게 뜨며 어떠냐고 묻는 표정을 짓는다.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였다.

" 최고야, 너무 맛있다. "

맛있는 건 회만이 아니었다.
평소 그렇게 좋아하지 않던 해삼과 멍게도 얼마나 달콤하게 씹히던지.

배가 부를 만큼 회를 먹고, 그리고 나서도 마지막으로 매운탕이 기다리고
있다. 그냥 매운탕이 아니라 수제비를 조금 넣은 수제비 매운탕.

" 죽인다, 죽여. "

" ……? "

" 너. 무.  맛. 있. 다. 구. "

녀석이 그런 날 보더니 웃으면서 자신도 매운탕을 수저로 떠서
입속에 넣는다.

녀석과 내가 마주보고 앉은 이 자리의 공기, 그리고 날 가끔씩 바라보는
녀석의 시선이 너무나 다정하고 부드럽다.

정말 얼마 만인지 모르겠다… 이런 기분.

집에서 늘상 맛봐온, 일류 요리사가 만든 음식이나 호텔에 가서 비싼 돈을
지불하고 먹는 초호화판 요리도 이처럼 맛있게 느껴진 적이 없는 것 같다.

녀석과 마주 한…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
허름한 횟집 방 한구석에 앉아 있는 지금 이 순간… 난, 행복하다.

아주머니가 와서 우리 옆에 자리잡고 앉는다.

" 맛있게 들었슴니꺼. "

" 예, 정말로요. 이렇게 맛있는 거 처음 먹어 봅니다. "

" 거짓말이라도 기분 억수 좋네. 그제, 해야. "

녀석이 나와 아주머니를 둘러보며 환하게 웃는다.
…투명한 웃음.
웃을 때 느껴지는 약간은 소박한 분위기가 아주머니랑 똑 닮았다.

" 이 녀석, 말 못 알아들어서 불편하지예. "

" 아닙니다. 다 알아 듣는 걸요. "

" 울집 막냅니더. 귀는 안 들리지만 심성은 내 새끼 중 젤이지예.
   세상을 떠난 우리집 양반이랑 얼굴도 판박이로 닮았고 말입니더.
   배 아파 낳은 자식은 다 똑같지만, 이놈은 평생 내 옆에 끼고 살고 싶을
   정돕니더. 어리니까, 맘에 안드는 점이 있어도 이쁘게 봐주시소.
   되련님 있는 일주일간 행여 잘못할까 은근히 걱정인 모양이니꺼예. "

아주머니가 녀석을 쓰다듬으며 사랑스러운 듯이 미소짓는다.

좋은 어머니를 두었구나… 녀석은.
내가 항상 원했던 그런 어머니의 모습.

사랑하지도 않는 남자의 후처로 들어가, 그 남편의 자식인 내게 별다른
애정을 느끼지 않고 표현하지도 않는 내 엄마와는 너무나 다른…….

행복감의 한편, 깊은 곳으로부터 쓴물이 솟는 것이 느껴졌다.

녀석이… 진심으로 부럽다…….





12.

녀석의 집 근처 바닷가.

눈앞에 검푸른 바다가 끝이 보이지 않는 형태로 뻗어 있고 그 바다 한편에
점점 붉게 번져나가는 태양이 점점 그 높이를 낮추고 있다.

…석양이 지고 있었다.

" 좋은 분이시다. "

" ……? "

" 어머니 말야. "

끄덕거린 녀석과 난 물이 들어오지 않을 정도의 안쪽 모래사장에 앉아 있다.

" 형제는 몇명이야? "

뚫어지게 보던 녀석은 바닥에 떨어져 있던 돌로,
「 형 1 누나 1 」
라고 적었다. 그리고 알아들었다고 고개로 표시하는 날 보고 다시,
「 형은? 」
이라고 쓴다.

녀석이 적었던 부분에서 「 형 1 」를 「 형 3 」으로 고쳤더니
깜짝 놀란 표정을 짓는다.

" 어머니가 달라. "

별로 입을 크게 벌리지 않았는데 녀석은 알아들은 모양이다.
가만히 있다가 또 다른 말을 흙 위에 적어 내려간다.

「 난, 아버지가 없어요. 」

아까 지나가는 말로 들었다. …돌아가셨다고.
그렇구나… 아주머니가 무척 고생하셨겠구나.

" 아버지… 보고 싶어? "

「 응. 그래도 엄마가 있으니까. 」

녀석은 무릎을 껴안은 자세로 앞을 응시한 채 조용히 미소를 지었다.

하늘이 점점 안타까운 붉은 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아름답다.

문득, 녀석의 들리지 않는 귀에 대고 전부 말하고 싶어졌다.

" 우리 엄마는… 언제나 나가 있어. 엄마는 아무 것도 없이 우리 아버지
   후처로 들어온 사람이지. 돈만 보고 결혼했기 때문에 별로 행복하지 않은
   모양이야. 아들인 나조차 귀찮은 것처럼 밀어내곤 했어,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어찌 생각하면… 불쌍한 분이지. "

녀석은 날 보고 있지 않다.
아마… 내가 말하고 있는 줄도 모를 것이다….

" 어머니가 다른 누나와 형들이 있어. 누나와 형들 어머니와 우리 아버진
   이혼하셨대… 그리고 아버지가 바로 우리 엄마랑 결혼하셨기 때문에
   누나와 형들은 그게 우리 엄마 탓이라 생각하고 있지.
   그래도 누나는 나한텐 잘해 주었는데… 지금은 시집을 가버렸어,
   역시 재벌집 남자랑 정략결혼으로.
   친척들이랑 형들은… 날 대놓고 무시하지. 무식한 여자의 아들이라고. "

앞이 조금씩 흐려지려 한다. 바보처럼…

" 난… 가족의 사랑이 뭔지 잘 몰라. 엄마 한분이어도 좋으니 사랑받고
   싶다고 생각하는 거… 역시 뻔뻔한 걸까…? "

눈에 조금 눈물이 고인 것 같았다.
모랫사장에 앉아, 얼굴을 숙이지도 않고 그저 석양으로 시선을 둔 채.

언제나 꼭꼭 감춰왔던 앙금자국들이 아주 가끔…
이렇게 눈물로 나오려 한다.

눈물을 마지막으로 흘렸던 게  언제였을까. 전혀… 기억나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난, 눈물샘이란 걸 잃어버린 것처럼 건조해져 있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 조금씩 배어나오려는 뭔가를  깨닫는다.

한동안 잊고 있던 존재를 알려준 건 바다 위에 번져가는 저 노을일까…
아니면 내 옆에 앉아 있는 이 녀석일까.

만난 지 이제 겨우 사흘인데… 갑작스레 난, 녀석이  내 영혼을 가져간 것
같다고 절실하게 느낀다. 만난지 겨우 사흘인데…….

녀석이 고개를 돌린다.
황급히 반대쪽으로 시선을 보냈지만 녀석은 이내, 알아 차린 모양이다.

내 뺨에 긴 손가락… 그리고 손바닥이 닿는 것이 느껴졌다.

아아… 따뜻해…….

그 따뜻함이 전해진 순간, 난 필요한 것은 이것이었구나… 하고 깨닫는다.

녀석이 내 얼굴을 두손으로 감싸 자기 쪽으로  돌렸다.
그런 자세로 날 응시하던 녀석은, 눈을 잠시동안 아래로 떨구더니…
내 목을 당겨 그대로 안는다.

방금 내가 한 말… 듣지 않았어도 상관없어…
아아… 그래… 말할 필요도 들을 필요도 없어…

단 한가지면 모든 걸 알 수 있는 걸…?

네가 이 자리에 있는 거… 그거 한가지면 충분해…
네가 지금 날 보아 주는… 그거 한가지면 충분해…

그러기를 한동안… 너석의 어깨에 이마를 기대고 있는 사이, 나의
앙금자국들은 조금씩 희미해지고 마치 흘러 내릴 듯 느꼈던 눈물도
어느 사이엔가 그대로 말라 버렸다.
그리고 그것을 알아차린 그 때, 녀석과 나의 몸도 떨어지고 말았다.

녀석이 볼을 붉히고 있다.
자신의 행동에 스스로도 놀란 것일까…?

아아… 놀랄 것 없어…… 나도 똑같아…
그런 거였어… 우리 둘의 감정은 같은 방향으로 흐르고 있었어…

난 아까 녀석이 그렇게 했던 것처럼 녀석의 얼굴에 손을 갖다 댔다.

날 조용히 감싸고 있던 감정은 지금 이 순간, 도저히 막을 수 없는 파도가
되어 밀려온 것처럼 느껴진다.

순수함 자체로 보이는 그 매끈한 연갈색 이마에 입을 맞추고…
당혹의 감정을 그대로 반영한, 그 크게 뜨여진 까만 눈에 입을 맞추고…
약간 벌려진 채인, 그 도톰한 진홍색 입술에 천천히 내 입술을 갖다댄다….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의식이 자신을 반쯤 벗어나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어느 샌가, 혀가 주인의 의지를 벗어나 제멋대로 상대의 닫힌 입술을 뚫고
들어가려 하고 있다… 그리고…
자연스레 열린 그 입술로 침입해 들어간 뒤에는 더 깊고도 따뜻한 늪 속에
들어간 것처럼 벗어날 수가 없다… 그리고…
상대의 늪속에 숨겨져 있던 뭔가를 마구 헤집고… 감고… 파고들고 있다…….

완전히 별개의 생명체가 내 안에 따로 존재하는 것처럼 움직이고 있다.

순간, 깨달았다.

실은, 처음 눈을 본 순간부터 알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녀석을… 원한다고. 단순히 원하는 것만이 아닌… 녀석을 갖고 싶다고.
아무것도 더하거나 빼지 않은 순수한 욕망 자체로, 녀석을 갖고 싶다… 고.

그렇게… 느끼고 있었다…….





13.

녀석이 날 쳐다보려 하지 않는다.

실은 나도 마찬가지다…
녀석을 쳐다볼 수가 없다.

만난지 나흘째인 오늘.

아침 겸 점심을 먹고 정오가 넘어 호퍼를 끌고 나온 때만 해도 쨍쨍하던
하늘이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구름의 양이 훨씬 늘어났고 바다의 색도 투명하게 비칠 듯한 푸른 빛에서
검은 페인트를 들이부은 듯한 다크 블루로 변해 있다.

파도가 거세지고 있었다.
바람이 머리카락을 세차게 날리고 있다.

( 아무래도 들어가야 하는 걸까. )

일기예보에 전혀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 실수였다.
요 며칠간 날이 너무 좋았고, 아직 장마철이나 태풍이 몰려올 시기가
아니라고 생각했는지라 특별히 신경쓰지 않았던 것이다. 하지만…

아무래도 비가 올 것처럼 느껴진다.
배를 돌려야 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내가 있는 배 뒤쪽에서 한참 떨어져 있는 뱃머리에 서 있는 녀석을
보고 있으려니, 아무래도 말을 걸 용기가 나지 않는다.

어제 저녁의… 키스.
그리고… 말없이 헤어지고 나서  다시 보게 된 오늘 아침…

얼굴을 마주한 때부터 녀석은 나와 얼굴을 가급적 부딪히지 않으려고
갖은 애를 쓰고 있다. 그런 녀석의 몸부림이 좀 우습게 느껴지기도 하지만,
한편으로 씁쓸한 감각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약한 빛에 비춰진 녀석의 연갈색 피부와 색이 연한 머리카락은 평소의  
건강한 모습과는 달리, 약간은 나른하고… 그리고 연약하게 보인다.
길게 뻗어 있는 갈색 다리와 팔도 오늘따라 마치 뼈가 없는 연체동물처럼
느슨하게 움직이고 있다.

등을 돌린 녀석의 뒷모습을 보고 있던 내 이마 위에 가볍게 빗방울이
얹혔다.

( 안되겠어… )

점점 커진 파도가 이젠 뱃전을 완전히 넘어서 솟구치기 시작한다.

녀석도 알고 있을 것이다.
그런데, 왜 이쪽을 쳐다봐 주지 않는 거야?

어이…!

녀석의 몸이 흔들리고 있는 것 같았다.
배가 흔들림에 따라 흔들리는 게 아니라, 그저 혼자서 아주 가늘게
떨리고 있는 것 같은 것은… 착각일까…?

뒤로 약간 몸을 튼 녀석의 귓불만이 눈에 들어올 뿐, 녀석의 얼굴을
볼 수 없다. 등을 돌린 녀석의 마음속에 들어가 그 안에서 날 찾을 수 있다면,
배의 흔들림도 이내 가라앉을 듯한 그런 생각이 문득… 들었다.

들리지 않는 녀석의 귀…
보이지 않는 녀석의 마음…

빗줄기가 굵어지기 시작한다.

" ……? "

배의 흔들림에 따라 녀석의 몸도 흔들리고 있었다.
가늘게… 가늘게……

그러다가 아주 살짝 녀석의  옆얼굴이 보였고 순간, 난 굳어지고 말았다.  
뭔가… 길고 가느다란 물줄기가 녀석의 뺨으로 흐른 듯 느껴졌기 때문에.
그건 그러나… 빗방울이었는지도 모른다.

아아… 그런 건 아무래도 좋다.

중요한 건… 녀석의 동작  하나하나가 지금 배를 마구 흔들고 있는 바람보다
더 강한 파워를 가지고 내 마음을 미친 듯 뒤흔들어 놓는다는 사실.

파도가 돛대 꼭대기까지 힘차게 솟아 오르는 게 보였지만…

배를 돌리는 것 따윈 아무래도 좋아….

난, 노를 손에서 놓아 버렸다.

순간, 요트가 세게 출렁이며 흔들렸지만 난, 전혀 상관없이 뱃머리쪽에
서 있는 녀석에게로 다가갔다. 어깨를 잡히자 돌아본 녀석은…
내 마음을 송두리채 흔들듯한 그런 가련한 표정을 짓고 있다…….

아아… 이젠, 아무래도 좋아… 정말이지…

가늘게 떨리고 있는 녀석의 몸을 그대로 끌어 안아 버렸다…

놓치기 싫다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이젠 녀석을 놓치기 싫어…
어제의 키스가 그저 기억만으로 끝나는 거… 정말 싫다…
난, 완전히 녀석에게 빠져들어 버렸다구…!

격한 감정을 그대로 실은 듯… 세찬 바람이 불었다.

선체가 심하게 흔들렸고 이어 한켠으로 기울어지는 것을 깨달았을 때는,
이미 요트가 그대로 뒤집히고 있었다.

우리를 태운 작은  요트가 힘없이 뒤집힌 순간, 녀석이 날 꽉 붙들었고
그와 거의 동시에 나도 팔에 힘을 주고 말았다…

그리고… 그렇게 끌어안은 자세 그대로 녀석과 나는 바다 속으로
떨어져 갔던 것이다…

서로 껴안은 그대로… 가라앉는다…

바다 속으로…
깊은 바다 속으로…
그 푸르른 심연의 공간으로….





14.

" 도련님, 이게 왠일입니까. "

아침에 잠깐 볼 일 보러 나간다 했던 관리인 아저씨는 어느 샌가 돌아와
있었던 모양이다.

방금 현관문에 들어선 나와 녀석의 꼬락서니를 보고선 완전히 맛이 간
듯한 표정을 짓고 있는 그를 살피며, 난 그저 씩 웃었을 뿐.

" 아침에 비올 거란 얘기를 빼 먹었군요. 괜찮으십니까. "

" 예… 하아… 걱정 마세요… 아저씨 탓이… 하아… 아닌 걸요…… "

녀석도 옆에서 가쁘게 숨을 몰아 쉬고 있었다.  

둘 다 수영을 잘하기에 망정이지, 그렇지 않았으면 꼼짝없이 익사했을지도
모른다.
그렇다곤 해도 무지막지한 파도가 일렁이는 바다에서 뭍으로 돌아오기까진
꽤나 시간을 잡아 먹어야만 했다.

입고 있던 폴로셔츠와 반바지가 흠뻑 젖어 몸에 달라 붙어 있다.

저택 문에 있는 간이 샤워장에서 옷을 입은 위에 그대로 물을 틀어
소금기를 씻어내긴 했지만, 몸이 이상하게 끈적거린다.
정말이지 으슬으슬한 감각.
빨리 더운 물로 씻고 몸을 말리지 않으면 감기 걸리기 딱 알맞겠다.

" 넌 여기서 목욕해. 난 위층에서 할테니까. "

우리 저택에서 제일 큰 욕실로 녀석을 데려갔다. 조개모양의 욕조는
한사람이 아니라 성인 남자 두명이 한꺼번에 들어가도 남을 만큼 크다.

" 그냥 샤워만 하면 감기 걸릴지도 모르니까, 이렇게… 더운 물을 틀어서
   몸을 담그고 있다가 나와서 씻어. 타올은 여기 있고. …알겠지? "

그렇게만 말하고 나가려는데 뒤에서 녀석이 셔츠 끝자락을 붙들었다.

" ……? "

선 채로 고개만 반쯤 뒤로 돌려서 등 뒤에 서 있는 녀석을 봤다.  
그대로 선 채 시선만 뒤로 한 내 뒤에 녀석이 멈칫거리며 다가오더니,
등에 이마를 갖다 댄다.

쏴아……

물소리가 들린다.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
욕조에 틀어놓은 물소리 밖에 들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순간…

목소리가 들렸다…
녀석의 목소리가 분명히 들렸다…
입을 열어 말한 것도 아닌데… 녀석의 목소리가 들렸다…….

「 무서워… 」

물소리를 뚫고, 녀석의 목소리는 내 가슴을 관통해 들어왔다.
뒤로 돌아서 녀석의 어깨를 붙잡고 눈을 들여다 봤다.

" 뭐가… 무섭지……? "

녀석은 날 가만히 올려다 본 채 그 검은 눈동자로 말한다.
너무나 맑고 투명해 내 모든 감정이 그대로 비칠 것만 같은…

「 진심이 아닐까 봐 무서워… 형이 진심이 아닐까 봐… 」

" 바보… "

미칠 것 같다.
…녀석이 사랑스러워서 미칠 것 같다.

녀석에게선 아까까지 한껏 들이마신 바닷물의 냄새가 났다.
짭잘한… 그러나 싱그러운 바닷물의 냄새가.

녀석의 입술에 내 입술을 갖다댔다.
입 가장자리에 혀를 대고 핥고, 녀석의 입술 전체에 내 타액을 묻히면서
그 매끈하고 부드러운 살덩어리를 살짝 빨아 올렸다.

심장이 멋대로… 뛰고 있다.
온몸의 신경이 입술… 그리고, 몸 중심부로 쏠린 듯한 기분.
힘이란 힘은 다 뺀 상태인데, 이상하리 만큼 몸 한구석이 불타 오르고 있다.

갖고 싶다…
녀석을 갖고 싶다고… 가슴이 말하고 있다.

안돼… 이 이상은…… 자제해야 해…

있는 힘을 다해 본능을 누르고서야, 겨우 입술을 뗄 수 있었다.

" 그럼, 씻고 나와. "

얼떨떨하게 서 있는 녀석을 남겨둔 채 욕실 밖으로 나왔다.
닫고 나온 욕실 문에 기댄 채, 이마를 짚고 나서야
겨우 의식이 현실로 복귀한 걸 알아 차린 나.

후… 다리의 힘이 완전히 풀린 것 같아…

…그리고 다음 순간, 난 그대로 주저앉아 버렸다.



계속.

류소현   2004/11/28

고등학교 졸업때쯤 봤던 두번째 소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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