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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abyAlone
불운이 아니다

불운이 아니다 (1)



지금 그 모습이 상대의 참모습이라면
그 모습을 그대로 받아 들일 것
지금 그 감정이 자신의 참감정이라면
그 감정도 결코 왜곡하지 않을 것

절대 두려워하지 않을 것
결코 체념하지도 않을 것

그것이 운명이라면
있는 그대로의 피할 수 없는 운명으로
주어진 모든 것을 받아 들일 것

그것을 불운이라 말하지 않을 것
그것을 불운이라 말하지 않을 것





1.

불운…
불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의 약점을 알게 된 그 날의 일을 불운이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그것은 그 날 저녁 우리집 현관을 나서다가 우연히 마주한 사건.

탁탁탁탁…
골목 안을 크게 울리며 이쪽으로 뛰어오는 발자국 소리.

" ……! "

나보다 좀더 큰 듯한 어떤 사람의 체중이 그대로 내 몸에 실리는 듯한 감각.
연습장을 사러 나가던 난, 바로 문 앞에서 누군가와 부딪혔던 것이다.
놀라 고개를 들어 보니, 그건 너무나 낯익은 사람의 얼굴이다.

" 선배…? "

" 숨겨 줘…! "

나지막한… 그러나 거친 호흡이 느껴지는 음성이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방금 나온 대문을 열고서 선배를 들여 보냈다.
선배를 집어 넣고 현관문을 닫자마자,
뒤쫓아 온 듯한 몇몇 사람들의 요란한 발소리가 다다다다 들려온다.

" 젠장… 발 하난 빠른 새끼군…! "

걸음을 멈춘 누군가가 숨이 찬 음성으로 외치는 소리가 들렸고
다시 움직이기 시작한 발소리가 이내 귓전에서 멀어져 갔다.

" 하아… 하아…. "

옆에서 몸을 반쯤 앞으로 꺾어 무릎에 손을 댄 채,
가쁘게 숨을 몰아쉬고 있던 우인선배를 보면서
아직도 상황파악이 안 돼 멍하게 서 있을 따름인 나다.

마침, 우리 집엔 아무도 없었기 때문에
일단 선배를 집안에 들여 2층에 있는 내 방으로 같이 올라간 다음,
목이 말라 보이는 선배에게 물컵을 갖다 주며 물었다.

" 선배… 이게 대체……. "

" 후우… 저 밑에 있는 레코드 가게… 알아? "

" …예… "

" 거기서 CD 몇장 훔쳤지… 택 떼내고. "

야구 캡을 눌러 쓴 모습의 우인선배는 마치
「오늘 아침에 된장찌갤 먹었지…」
하는 듯한 가벼운 표정과 목소리로 말하고는 물을 꿀꺽꿀꺽 마셨다.

" …선배, 장난하는 거 아닙니다. "

" 하… 이걸 보고도…? "

선배는 아직 숨이 찬 속에서도 특유의 여유로운 미소를 짓더니
배낭 앞 지퍼를 열어 그 안에 든 CD 석장을 꺼내 보여 준다.

" 산 거… 아닙니까? "

" 아… 그렇게 믿고 싶으면 믿어도 무방해. "

마치 남의 일을 얘기하는 듯한 말투다.

" 우인선배… 말도 안돼… "

" 왜, 모범생 정연진 군은 이 상황을 받아들일 수 없다… 그 말인가? "

" 모범생이란 딱지가 가장 크게 붙은 쪽이 누굽니까. "

" 남들이 멋대로 붙인 거지. 뭐… 맘에 안 든다면 지금 내보내도 좋아.  
   아직 이 근처를 뒤지고 있을지 모르니 잡힐 가능성은 50% 정도?
   어두워서 얼굴은 잘 못본 듯 싶지만. "

" 왜 그런 겁니까. "

" 가끔 발작을 참을 수 없는 날이 있어.
   여자들의 생리도벽 비슷한 거랄까…? "

선배가 거기까지 말하고 있는데, 아랫층에서 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시장에 갔던 엄마가 돌아오신 모양이다.

" 다녀오셨어요? "

" 오늘은 학원 안 가는 날이니? 저기 신발은 누구 것… "

1층과 2층을 연결하는 계단 난간을 붙들고 있는 날 향해 엄마가 말하고 있는데
뒤에서 불쑥하고 선배가 나타났다.
놀란 표정을 감추지 못하고 엄마가 묻는다.

" 연진아, 누구? "

" 안녕하세요, 연진이 학교 선배 성우인이라고 합니다. "

" 성우인…? 어디서 많이 들어본 이름 같은데… 저 혹시… "

" 우리 학교 학생회장이에요. "

" 그렇지? 그래, 들어본 것 같다고 생각했어. 근데 우리 집엔 왠일이지? "

" 학생회 일 때문에 잠깐 상의할 게 있어서 온 거에요. 방에 들어가도 괜찮죠? "

" 아… 그래, 편히 있다 가요. "

엄마는 학생회장이란 뻑적한 명칭과 그의 매끈한 얼굴에
이내 호감어린 표정을 보인다.
앞서 우리의 대화를 들었다면 절대 그럴 수 없었겠지만.

방문을 닫고 나자 선배가 안심한 듯한 미소를 얼굴에 올렸다.

" 잘 둘러대는구나. "

그 천진한 씩 웃음에 화까지 나려고 한다.
모자를 벗고 고개를 숙인 채 머리를 마구 흐트리고 있는 선배에게
딱딱한 음성으로 뱉었다.

" 이유를 설명해 주시기 전엔 이 집에서 나갈 생각 마십시오. "

" 이유? 아까 말했잖아, 발작.
   그리고 들킬지 안 들킬지 시험해 보고 싶었다고나 할까?
   그래서 일부러 눈에 띄게 훔친 거기도 하지만.
   얼굴만 들키지 않도록 모잘 눌러 쓰고 말이지.
   이번에야말로 잡히는 군… 각오했는데 역시 운이 좋아, 난. "

" 하…. "

선배의 태연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그만 난, 할 말을 잃어버리고 말았다.

검정 야구캡에 카키색 후드 티셔츠, 헐렁한 면바지.
사복을 입은 선배를 본 적이 거의 없어서 그럴까, 생소한 느낌이 들었다.

생소한 것은 복장만이 아니다.
물건을 훔치다니…
학교에서 늘 보아오던 선배의 모습에선 상상도 할 수 없는 행동인 것이다.

곤색 재킷과 회색 바지, 교복에 잘 어울리는 단정한 스타일과 단정한 행동거지…
언제나 견지하고 있는 침착하고 냉정한 태도…
매번 수석을 놓치지 않는 우수한 성적…
그리고 이 모든 것에서 나오는 선생들의 절대적인 신뢰…
이런 것들이 선배를 구성하는 요소인 것이다.

우인선배를 처음 본 것은 입학식에서다.
학생회 임원인 선배의 연설을 듣고 난 후, 난 어느 샌가 선배의 팬이 돼 있었다.
선배의 연설은… 뭐랄까, 압도적인 느낌이 있었다.
지루하지 않으면서 난잡하지 않고,
그러면서도 대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존재하는… 그런 인상의 스피치였다.

그리고 1학기 반장에 뽑혀 학생회에 참석하게 되면서 알게 된 건,
선배의 연설이 선배 자체란 사실.
선배에겐 추진력이 있는 한편 냉정함이 있었고,
유모어가 있는 한편 진지함이 있었고, 위엄이 있는 한편, 여유가 있었다.

선배는 그런 존재였다.
모두 갖추고 있지만 질투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존재.

그런 선배에게 도벽…?
믿을 수 없지만… 이번이 처음도 아닌 듯 싶다…….

" 어쨌든 미안하군, 내게 행운이면 네겐 불운인가…? "

침대에 앉은 선배가 문득 중얼거리는 소리가 가늘게 내 고막을 찌른다.

무겁지 않을 정도로 모양이 잘 잡힌 짙은 눈썹.
자신감과 장난기가 조금쯤 어려 있는, 그러나 어딘가 섬세한 얼굴 짜임새.
아무렇지도 않은 듯, 그러나 뭔가를 누르려는 듯한 꾹 다문 입술.

선배의 얼굴을 보면서 문득 생각했다.
이건 아무래도 불안하다…고.

과연 생각대로 그 날의 일은 단지 시작에 지나지 않았다.

선배의 말대로라면 그건 불운의 서막… 같은 것이었다.





2.

[ 알려 드리겠습니다.
   1·2학년 각 반 학급위원들은 방과 후 학생회실로 모여 주시기 바랍니다.
   다시 한번 알려 드리겠습니다… ]

" 금요일도 아닌데 왠일이지? 짐작가는 거 없냐? "

수업이 끝나고 담임 종례를 기다리는 시간, 스피커로부터 나온 소리.

앞자리에 앉아 가방을 챙기고 있던 부반장 진석이
귀찮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면서 뒤돌아 본다.

" 글쎄. "

실은 대답과 달리 짚이는 게 있는 나였다.

( 그건가…? )

그리고… 예상은 그럭저럭 맞아 떨어졌다.

학생회실에 모든 위원들이 다 모였을 때,
아까부터 와 있었지만 줄곧 침묵하며 앞자리를 지키고 있던 우인선배가
드디어 일어서서 교단 위로 올라섰다.

언제나 그렇듯 우인선배의 낮은 목소리는
뭐라 표현할 수 없는 강한 이미지를 전달한다.
그의 스피치를 처음 들었던 입학식 때부터 선배는 줄곧 나의 우상같은 존재였다.

" 여러분을 이 자리에 모이게 한 것은 어제 교무회의를 통해 퇴학결정이 떨어진
   강윤환 선배에 대해 의논하고 싶어섭니다. "

" ……. "

말이 떨어지자마자 분위기는 상당히 심드렁한 쪽으로 돌변했다.

3학년의 강윤환 선배는 1학년 때부터 줄곧 온갖 말썽에 이름이 빠지지 않았던
문제아로 조폭과도 연루되어 있다는 소문이 들릴 정도였다.
하지만 3학년 1학기에 들어와선 비교적 얌전하게 학교생활을 하고 있었고
왠일인지 문제를 일으키지 않았는데
바로 1주 전에 있었던 집단 패싸움에서 붙들려 온 아이들이
주모자로 그를 지목하는 바람에,
며칠간 학교 선생들에게 붙잡혀 매타작과 각종 심리전을 통한 고문을 당한 끝에
결국 퇴학처분까지 가게 된 것이다.

" 들어서 아시겠지만 윤환선배는 첨부터 자신이 패싸움의 주모자란 사실을
   시인했던 건 아닙니다. "

그랬다.
처음, 윤환선배는 자신은 죄가 없다고 항변했다.
하지만 아무도 그의 말을 믿어주지 않았고
기나긴 심문 끝에 결국 잘못을 시인하고 말았던 것이다.

" 물론 강윤환 선배가 알려진 문제아였단 사실은 인정합니다.
   하지만 최근 들어 이렇다할 말썽을 일으킨 적도 없고,
   제가 듣기론 그는 최근 모든 나쁜 짓에서 손을 떼고 새롭게 시작할
   결심을 한 걸로 압니다.
   그런데, 무조건 이런 식으로 그를 패싸움의 주모자로 몰아 붙이고
   종국에 가선 퇴학까지 시키는 거, 부당하단 생각입니다.
   이런 교무회의 측의 횡포는 학생회에서부터 적극적으로 나서
   방지해야 한다고 생각지 않으십니까? "

분위기는 어디까지나 썰렁했다.

여느 때라면 카리스마를 지닌 채 다가올 우인선배의 연설도
자리에 앉아 있는 소위 모범생들의 머릿속에 오랫동안 각인된,
「강윤환」이란 세글자로 인해 연상되는 문제아 이미지를 벗겨내기에는
역부족이었던 것이다.

모두들 왜 이런 이야기를 자신이 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단 표정들이었다.
내 옆에 앉은 진석은 아예 책상 위에 슬그머니 꺼내 놓은 영어단어집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앉아 있다.

결국, 우인선배의 열변에도 불구하고 이렇다 할 해결이 나지 않은 채,
임시 학생회는 어물쩍 끝나 버리고 말았다.

" 우인선배와 윤환선배가 친한 사이란 소문이 있었는데… 사실인가 보군. "

학생회가 끝나 학교 건물을 막 빠져 나왔을 때, 진석이 던지듯 말했다.

" 뭐…? "

" 두사람이 같이 있는 거 본 사람들이 꽤 있더라.
   학생회장과 학교 짱까지 지낸 문제아… 상상이 안 가지만 말야. "

갑자기… 모든 사람이 나가느라 북적대던 학생회실에
우인선배가 앉아 있던 것이 생각났다.

텅빈 학생회실…
모두들 나간 그 곳에 아직도 그는 머리를 싸맨 채 앉아 있을 것이다.

그럴 거란 생각이… 갑자기 들었다.

" 진석아, 나 두고 온 게 있어. 먼저 가봐라. "

" 같이 가 줄까? "

" 아니, 너 오늘 학원 있다며. 먼저 가. "

" 그래, 그럼 낼 보자. "

진석과 헤어져 다시 학교 건물로 뛸듯 걸어 들어갔다.
문을 지나 2층으로 올라가 오른쪽으로 꺾어져 위치한 학생회실로
막 들어가려 했을 때. 난, 그대로 걸음을 멈추고 말았다.

우인선배가 아까 그 자리에 뒤통수를 보인 채 앉아 있는 것은
생각한 대로지만, 그 앞에 예상치 못한 또 한명이 서 있었기 때문이다.

…윤환선배였다.

칠판에 몸을 비스듬히 기댄 채 말없이 우인선배를 응시하고 있는
키 큰 남자는 바로, 윤환선배였다.
선생들한테 요 며칠간 셀 수 없이 구타당했다던 윤환선배의 다소 초췌한 모습.
조금은 흐트러진 듯한 반팔 교복 셔츠 아래 바지 주머니에 손을 집어 넣은 채,
잠자코 기대 서 있는 윤환선배가 눈에 들어왔다.

하지만 두사람 사이에 이루 말할 수 없이, 심각한 공기가 흐르고 있는 걸
느낀 난, 미처 교실로 들어가지 못하고 밖에 숨듯이 서 있어야 했다.
뒷모습을 보이고 있는 우인선배의 음성이, 숨어 있는 내 귀에 또렷이 들려온다.

" 형… 정말 미안해……. "

" 괜찮아. 어쩔 수 없는 상황인 걸.
   끝까지 버티지 못하고 굴복한 내가 젤 병신같은 놈이겠지.
   하긴… 더 싸워봤자 가망없는 게임이었어, 애시당초. "

윤환선배의 대답이 나직하게 교실 안을 울렸다.

" 어째서 형이 퇴학당해야 하지? 이번엔 정말 아무 잘못도 없었는데…!
   왜 이런 일이 생긴 거냐구! 어째서 믿어주지 않는 거야…! "

" 인과응보…라 해야겠지. 뿌린 씨를 거둔 거야. 내가 문제아인 건 사실이니까. "

" 이젠 아니잖아… 나와 약속했잖아. 다신 그런 짓 하지 않겠다구. "

" 훗… 세상은 그렇게 봐주지 않는 걸. "

분노가 실린 우인선배의 목소리완 달리,
윤환선배는 자포자기한 듯 초연한 말투였다.
중학시절부터 익히 들어온 그 살벌한 이미지를 전혀 찾을 수 없을 정도로.

" 세상은 그런 거야. 첨부터… 나한테 행운이란 없었다…
   아버지가 농약을 먹고 죽었을 때부터… 엄마가 날 버리고 가버렸을 때부터…
   이미 알고 있었어.
   그래도… 너란 놈을 만났을 땐,
   나한테도 행운이라는 게 있을 수도 있겠구나… 그렇게 생각했었지.
   하지만… 착각이었어. 결국 너도  언젠간 날 떠나버리겠지…
   자라온 환경부터 완전히 틀리니까. 넌 나와 달리 모든 걸 타고난 놈이니까.    
   그러니, 너도 착각하지 마.
   너와 내가 함께할 수 있다는 건,
   어차피 첨부터 잘못 꿰인 단추같은 발상이었으니. "

180cm를 넘긴 키인 윤환선배의 그림자가 칠판 위로 길게 뻗어 있는 것이
반쯤 열려 있는 뒷문 사이로 선명히 들어온다.
움직일 수가… 없다.

" 지금 무슨 말을 하는 거야… 나랑 끝내자는 소린가? "

" 역시 머리가 좋아. 알아서 미리 말해주니 편하군. "

" 이 자식…! "

피식 웃으며 몸을 돌리려는 윤환선배의 멱살을
의자를 박차다시피 벌떡 일어선 우인선배가 잡았다.
그리고…
눈을 의심하게 만드는 광경이 어느 샌가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었다.
어제의 도벽사건보다도 더 충격적인… 우인선배의 모습.

우인선배가 윤환선배의 멱살을 잡은 그 자세에서
자신의 입술을 상대의 입술로 강하게 밀어 부쳤던 것이다.
너무 놀란 탓에 잘 보진 못했지만 꽤나 격렬한 키스가 이어진 후에서야
두사람은 겨우 상대방으로부터 떨어져 나갔다.
우인선배가 타오르듯 윤환선배를 노려 본다.

" 이건 뭐지? 이제까지 우리 역사를 전부 없었던 걸로 하자고?
   너 미쳤냐…? 날 사랑한다 했었잖아, 그건 전부 거짓말이었던가? "

" 이러지 마. 들키면 학생회장이자 전교 1등, 선생들이 가장 신뢰하는  
   모범생인 성우인이 이제껏 쌓아온 모든 이미지가 한칼에 무너질 걸. "

" 지금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

평소의 침착냉정한 모습은 온데간데 없는 우인선배의 모습.
약간 틀어진 옆모습을 보이고 있어서 잘 볼 순 없었지만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놀랄 일이었다.
난… 난생 처음으로 이성을 잃은 우인선배를 본 것이다.
하지만 상대적으로 윤환선배는 평정을 전혀 잃지 않은 채,
우인선배의 시선을 그대로 받아내고 있었다.

키가 엇비슷한 두사람이 마주 선 채 상대를 뚫어질 듯 노려보는
교실 안에는 지금 석양이 지는 시각임을 알리는 붉은 빛이 가득 차 있다.
그래서일까, 밖에서 엿보고 있던 나까지 숨이 답답해져 오게끔 만드는…….

하지만, 발을 뗄 수 없었다.
우인선배의 일이라서가 아니라 그 상황이, 그 묘한 분위기가,
발을 뗄 수 없게 만들고 있었다.
윤환선배가 나직이 읊어낸다.

" 네가 어떻게 말해도… 내 결심은 변하지 않아. 솔직히, 너한테 지쳤다.
   환경이 다르니 말이 안 통해. 너도 다르지 않을 거야.
   내가 눈앞에서 사라지면 금새 잊을 수 있을테지.
   …아니라고 부정하지 마. 세상이란, 그런 거니까…. "

" …강윤환! "

" …잊어라. "

윤환선배는 조용하기 그지없는 목소리를 유지하면서 마지막 한마디를 뱉더니,
박힌 듯이 서 있는 우인선배를 그대로 뒤에 놓아 둔 채,
닫혀 있던 교실 앞문을 열고 밖으로 나왔다.  

복도로 나온 그의 시선이 멍하게 있던 나와 그대로 마주쳐 버렸지만
그는 어깨를 한번 으쓱했을 뿐, 전혀 동작을 흐트리지 않고서
내 옆을 아무렇지 않게 스쳐 지나가 버린다.

( ……! )

충격이 몇번을 겹쳐져 머리를 짓누른 것 같았다.

윤환선배의 등에서 겨우 시선을 뗀 내 눈에,
이번엔 뒷문을 통해 아까 그 자리에 박힌 듯 서 있는
우인선배의 모습이 들어온다.

부들부들 떨리는 손을 이마에 가져다 댄 채, 그저 서 있을 뿐인 우인선배….

그건… 이성을 잃은 우인선배를 본 처음이었다.
그건… 동시에 윤환선배를 본 마지막이기도 했다.







불운이 아니다 (2)





3.

" 너, 좀 이상하다. "

진석이 그렇게 말할 만도 했다.
연달아 이어진 사건에 난,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충격의 늪에 빠진 채
수업이건 뭐건 어떤 것에도 집중하지 못하고 있는 상태였던 것이다.

하지만 진석의 다음 대사는 여지껏 받아왔던 충격의 10배 이상을
나에게 전달하고 말았다.

" 알아? 강윤환이 죽었대. "

점심시간이었다.

여느 때라면 엎드려 자거나 농구라도 한판 때렸겠지만,
오늘의 상태론 아무 것도 할 수가 없어 그저 멍하게 앉아 있을 따름인
점심시간이었다.

아직 6월 말인데도 한여름이나 다름없이 진한 햇볕이
땀을 흘러 내리게 만들고 종국엔 속까지 까맣게 태우는, 그런 시간이었다.

" 야, 듣고 있는 거야? "

" 아… 그래. 어디서 나온 얘기야, 그거. "

간신히 정신을 가다듬고 물었다.

" 쫌 아까 만난 옆반 녀석이 그러더라.
   선생들이 쉬쉬거려서 아직 많이 퍼지진 않은 모양인데…. "

" 갑자기, 왜…? "

" 오토바이 사고. 절벽에서 날았다나?
   하지만 아무래도 사고라기엔 좀 미심쩍은 데가 있다고….
   혹시 사고를 빙자한 자살 아닐까? "

안경을 벗고 입김을 불어 셔츠 끝으로 잘 문지르고 나서 다시 얼굴에 쓴
진석의 표정에는 특별한 아무 변화도 보이지 않았다.
연예인 누가 마약을 해서 잡혀갔단 식의 가쉽거리에 관해 얘기하는 듯,  
가벼운 얼굴.

자신 외에 다른사람에게 전혀 관심없는 것이 인간의 본성이라 하지만,  
그렇다 해도 우리학교 3학년 강윤환은 죽음조차 가십거리로 치부될 만큼,
1학년인 우리에게 있어 동떨어진 세계의 인물이었던 건가.

차라리 그가 도저히 구제 못할 악한 인간으로 끝까지 우리들 위에 군림했었더라면
그는 우리에게 단순한 호기심 이상의 어떤 기억으로 남을 수도 있었으련만.
허나… 진석을 비롯한 대부분의 1학년들에게 그는,
한때 불량했다곤 하지만 그것조차 확실치 않은…
다만 소문으로만은 중학시절부터 익히 들어왔던 악명을 지닌,
그저 평범한 3학년 선배일 뿐이었다.

" 야, 어디 가…? "

만일 며칠 전의 일이 아니었더라면
나도 진석과 마찬가지로 약간의 당혹감만을 느끼면서
강윤환의 죽음을 무리없이 받아들였을테지만…
이 순간, 난 그럴 수가 없었다.

우인선배의 연인으로서 강윤환의 존재를 목격한 그 순간부터
강윤환의 일은 내게 남의 일이 아니게 되어버린 것이다.

어느 새 난, 정신없이 우인선배의 교실로 향하고 있었다.
가장 꼭대기에 위치한 1학년 교실에서 계단을 내려
3층에 위치한 2학년 교실로 뛰다시피 걷고 있었다.

알고 있는 걸까?
우인선배… 알고 있는 걸까?

머릿 속이 미친 듯이 얽혀 돌아가고 있다.
대체 내가 왜 이러는지 자신도 알 수 없었다.
아무리 목격한 일이 있다고 해도
우인선배의 일에 내가 신경쓸 필요는 없는 것이다.  

우인선배가 모범생의 가면을 쓰고 방과후엔 물건을 훔치고 다니는
이중인격자이든, 자신과 전혀 다른 환경의 인간…
그것도 남자를 사랑하는 변태든, 내가 상관할 바 아닌 것이다.

한데, 분명 알고 있는데… 내 감정은 상식을 흐트리며 몸을 이끌고 있었다.



" 우인이…? 농구하러 나갔는데? "

2학년 5반 교실에서 문가에 앉아 있는 울퉁불퉁한 얼굴의 2학년생에게
성우인 선배님 계십니까… 하고 묻자 뚱한 얼굴로 이렇게 대답한다.

과연 교실 복도 창문 너머로 넘겨다 보니
우인선배 비슷한 모습이 골대 앞에서 왔다갔다하는 것도 같아서
난, 가보겠다고 입으로 웅얼대곤 그대로 밑으로 달려 내려갔다.

정말 농구대 앞에 선배가 있었다.

교복 셔츠는 어디 벗어 놔뒀는지 헐렁한 흰 반팔 티를 펄럭이면서
농구대 앞을 누비고 있는 선배가 점점 내 시야 안으로 확대되어
잡히기 시작한다.

알고 있는 걸까?
우인선배… 알고 있는 걸까?

머릿 속이 미친 듯이 얽혀 돌아가고 있다.

정확하게 골 안으로 빨려 들어간 선배의 레이업으로 승부가 결정되었는지,
농구공을 대기하던 다른 팀에게 그대로 밀어 보내며 시합이 끝났다.

반팔 티 끝자락을 들어, 미끈한 상체를 반쯤 드러낸 채
이마의 땀을 닦아내며 선배가 이쪽으로 오는 게 보인다.
날 발견한 것 같은 동작은 아니었지만 분명히 내가 서 있는 곳,
나무 그늘이 드리워진 스탠드로 걸어오고 있다.

그리고… 그의 시선과 내 시선이 마주쳤다.

선배는 내가 서 있는 계단보다 두단 낮은 스탠드에 앉았다.
시선을 돌리니 선배와 함께 농구대 앞을 방금까지 점령하고 있던
다른 이들이 수도 앞에 서서 얼굴이며 목에 물을 끼얹고 있는 것이 보인다.

" 세수 안 하세요? "

말을 꺼낸 쪽은 물론 나였고, 선배는 돌아 보지도 않은 채 대꾸했다.

" 씻지 않는다고 타박받을 나이는 지났다 생각하는데. 마누라도 아니고. "

갑자기 오기가 끓어 올랐다.

" 선배에게 관심있는 후뱁니다. "

" 약점 하날 거머쥔 후배인가? "

" 하나 이상일 수도 있겠죠. "

" 약점이라… 한가지 외엔 상관없어. …이제 존재하지 않는…. "

마지막 대사는 나직한 웅얼거림으로 들려 왔고…
순간, 난 그의 모호한 한마디 안에 숨겨진 날카로운 아픔을 정확하게 이해했다.
그의 얼굴을 뒤덮고 있는 땀은,
실은 눈물을 대신해 흐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른다….

" 알고 계신 겁니까, 윤환선배 일…. "

" ……. "

우인선배의 얼굴이 천천히 돌아 나를 바라보는 것이 느껴졌다.

" 사실입니까? "

" 어제 새벽인데… 소문이란 건 참 빠르군…. "

선배는 나직이… 하지만 또렷한 발음으로 말하다가
문득 눈썹을 살짝 찌푸리며 날 노려 보았다.

연한 금을 그은 미간 아래 슬쩍 드러나는 초조함.

아마도 윤환선배의 일에 대해 먼저 묻는 나의 태도에서
뭔가를 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한 것이리라.

머릿 속을 비집고 질문이 새어 나오려 했다.

" 어째서… "

" …우인아! 안 들어가? "

그 때, 저편에서 선배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짧은 대화는 중단되고 말았다.

선배는 나만이 알아차릴 수 있을 정도의 미세한 표정 변화를 얼굴에 담은 채
수돗가로 걸어가 물을 끼얹곤 날 다시 한번 쳐다 보더니
건물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어떤 부자연스러움도 특별한 의미도 찾을 수 없는 몸짓.

하지만 난, 그 때 그런 선배의 몸짓 속에서
격렬하게 끓고 있는 뭔가를 볼 수 있었던 것 같다.

그것 또한, 일종의 불운 같은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4.

" 정연진, 너… 한과목 밀려 썼냐? "

기말고사 성적을 게시한 벽보는
친구 녀석들이 모두 한마디씩 하고 지나간 것은 물론,
담임 면담까지 이어지게 만들었다.

" 흐음… 연진이, 요즘 무슨 고민있니? "

기말고사 석차가 학년 20등으로 내려앉은 것이다.
우인선배처럼 1등을 놓치지 않는 수준은 못 되지만
그렇다고 전체 3등 밖으로 나간 적이 없던 나인지라
주변 사람들이 걱정하는 것은 당연했다.

" 아닙니다. "

" 무슨 일 있으면 언제든지 말해라. 혼자보단 둘이 고민하는 게 나으니. "

" 아닙니다, 그냥 좀 집중이 안되서요. 2학기부턴 제대로 하겠습니다. "

황당했던 건 우인선배의 성적이었다.  

윤환선배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인해 조금쯤 떨어지리라 예상했던
우인선배의 석차는 오히려 2등과의 점수차를 벌려 놓은 채,
부동의 1등자리를 고수하고 있었던 것이다.

성적만이 아니었다.
외견상 보기엔 우인선배의 태도에는 그 어떤 변화도 없었다.

학생회실에서도… 가끔씩 교내에서 마주칠 때도…
어디까지나 트레이드 마크 같은 침착함과 냉정함에서 조금도 벗어나지 않은
모습이었다.  

그러나 그건 물론 진실이 아닐 것이다.
그렇다곤 해도… 그렇게까지 자기 제어를 할 수 있다니….

솔직히 손해본 기분이다.
전혀 관련없는 제3자인 내가 되려 동요했다는 것.

확실히 말할 수 있는 건…
이런 동요가 단순한 호기심 때문만은 아니란 사실,
그리고 이런 마음을 다잡을 수 있는 방법은 단 한가지 뿐이란 사실이다.

난… 알고 있다.



방학식 날.
뻑적하게 놀 궁리만 하고 있는 친구들 옆에서 난,
그저 멍하니 턱을 괸 채 오전 시간을 보냈다.

" 오늘 강남역 갈거지? "

지극히 당연한 일을 말하듯, 윤구가 어깨를 툭 건드렸다.

여느 때와 달리 그런 사소한 동작들, 친구들이 건네오는 한마디 한마디가
왠지 귀찮게 느껴진다.
혼자만의 세계로 몰입하는 자신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

" 어… 미안. 난 좀 빼 줘. "

" 왜 그래? "

" 중학교 때 친구들이랑 벌써 약속이 돼 있거든. …미안하다. "

거짓말이었다…
약속 따윈 아무것도 되어 있지 않았다.

그저 집에 돌아왔고, 그저 낮시간 동안 멍하니 앉아 있다
저녁무렵이 되어서야 주섬주섬 옷을 챙겨 입고 집을 나섰다.

처음부터 우인선배를 보려고 했던 건 아니다.
한데, 정신이 들어 보니… 난 우인선배의 집 앞에 있었다.

학생회 주소록에 적혀 있는 주소를 보고 얼떨결에 찾아 오긴 했지만,
막상 단단한 철문이 내 시야를 가로막자 그대로 굳어진 나였다.
솔직히 우인선배의 집이 맞는지 조차도 자신없었다.  

문패에 쓰여진 세글자,「성기표」- 우인선배의  아버지이자
엄청 잘나가는 국제 변호사의 이름을 보고서도 이건 우연의 일치가 아닐까…
의심했을 정도니까.

( 내가 왜 여기 있는 거야…. )

자신이 천하의 한심이로 생각되었다.
요 몇개월간 내 동경의 대상이었던 선배가 도벽의 소유자였다고 해서…
그가 연애를 하고 있다고 해서… 그 상대가 남자라 해서… 그리고,
그 상대가 얼마 전에 죽었다고 해서… 그 죽음의 원인이 자살로 추정된다 해서…
내가 이렇게 흔들릴 이유가 있을까……?

" 후……. "

쓴 한숨을 토하며 골목을 돌아 나가려던 순간,
철문이 끼익…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우인선배가 열린 철문 앞 대리석 계단을 내려 오고 있었다.

어딘가에 가려는 듯, 사복을 깔끔하게 갈아입은 모습으로 계단을 내려 온  
선배는 그대로 내가 서 있는 쪽 반대 방향으로 몸을 틀어 걷기 시작했다.
날, 알아차린 것 같진 않았다.

( 어디를 가는 거지, 선배…? )

몸을 돌린 난, 5초간 생각했다.
그리고, 이내 결심했다.

단지 충동 만으로 난, 그대로 선배 뒤를 숨어서 쫓기 시작했다.
…들키지 않게끔 상당한 거리를 두고.

( …선배를 알고 싶다. )

순간, 내 머릿 속은 그 한가지 생각만으로 꽉 차 있었다.
그리고…
그런 생각과 행동은 결국 날 멈출 수 없는 결론으로 이끌어 버렸던 것이다.





5.

난 망설이고 있었다.

압구정동에 자주 와 보긴 했지만
길 건너 바로 마주 보고 있는 청담동 쪽으로 가본 적은 거의 없었던 나였다.  

우인선배를 따라 무작정 걸어 오긴 했지만, 막상 그가 청담동,
그것도  뒤편 구석진 곳에 위치한 지하 바로 걸어 내려가자 조금쯤 당혹스러웠다.  
우리 나이 또래 애들은 거의 지나가지 않는 그런 골목.

주로 차를 끌고 오는 손님들이 많은 듯, 옆쪽에 큼직한 주차장이 있었는데
그 주차장에 서 있는 차종 중 국산은 거의 찾아 볼 수 없었다.    
베엠베(BMW)… 아우디(Audi)… 캐딜락… 벤츠… 심지어 페라리까지.

바로 그 옆에 있는 지하 바로 우인선배가 들어간 것이다.
미성년자는 절대 출입할 수 없을 것 같은,
삐까뻔쩍한 대리석 상이 입구에 조각되어 있는 그런 곳으로.

( 어떻게 하지…? )

막 시작된 여름. 저녁인데도 땀이 솟아나는 후덥지근한 시간.
난, 자그마치 1시간 반 정도를 망설임으로만 보냈다.

우인선배 뒤에서 몇명인가 손님이 들어 갔지만
모두 최소 20대 후반에서 30대 초반은 되어 보이는 남자들이었다.
게다가 그들이 세운 차는 전부 벤츠였다.
택시를 타고 온 손님은 우인선배 한사람 정도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 그게 어떻다는 거지…? )

여기까지 온 게 너무 아깝지 않아…?
겁낼 건 없어… 난 우인선배만 찾으면 되는 거잖아.
여기까지 와서 물러설 수 있다고… 생각해?
난 할 말이 있어… 우인선배에게 할 말이 있어.
그리고, 그 말은 지금 해야 하는 거라구.
…바로 지금.

입구 계단을 걸어 내려갔다.
불투명 유리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한 젊은 남자가 내 앞을 가로막다시피 선 채 묻는다.
지극히 정중한 말투였다.

" 회원이십니까. "

" …예? "

" 여긴 회원만 출입가능한 곳인데요.
   저… 실례지만 나이가 어떻게 되시죠? "

" 스물인데요. "

난 입에서 나오는 대로 우선 거짓말을 지껄였다.
남자의 태도는 꽤나 완고해서 전혀 타협할 수 없을 것처럼 보였기 때문에.

힐끗 안쪽을 들여다 보니 바 안에 우인선배의 모습은 전혀 뵈지 않았다.
분명, 이 안으로 들어갔는데 말이다.
자세히 보니 언뜻 작은 카페처럼 보이는 외견은 단지 일부 뿐,
작은 통로가 있어 몇개의 룸으로 연결되어 있는 것을 알아 차렸다.

우인선배… 고교생 신분으로 룸에 입장한단 말야…?
나이야 속인다 치더라도… 여긴 보통 손님들이 오는 곳 같진 않은데…….

" 어쨌든 회원이 아니면 입장할 수 없습니다. "

" 그렇담 손님 중 한명을 불러라도 주셨으면 좋겠는데요.
   그 사람을 만나러 온 거니까. "

" 아, 그래요… 성함이 어떻게 되는 분입니까. "

" 성우인, 이요. "

" 성우인…? "

남자는 약간 눈썹을 찌푸리더니, 잠깐 기다리십시오 라고 말하고선  
카페 입구 옆에 있는 작은 방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잠시 뒤 키가 크고 마른 체구의 여자가 남자와 함께 나오는 것이 보였다.
업스타일 머리에 진한 화장을 한 그녀는
취향이 좋은 것이 그대로 느껴지는 세련된 바지 정장을 입고 있었다.

" 무슨 일이시죠? "

허스키한 음성이 잘 어울린다.

" 성우인씨를 찾아 왔는데요. "

" 죄송하지만… 여기 회원 중 성우인이란 분은 안 계십니다. "

예상 밖의 대답.
그리고 그 말을 뱉는 여자의 말투는 정중하면서도 차가웠다.

난 놀라 눈을 크게 뜨며 항변하려 했지만, 소용없는 일이었다.
옆에 서 있던 남자가 고개를 문쪽으로 밀어 보내며
나가라는 몸짓을 노골적으로 해 보인다.
여자가 고개를 가볍게 숙이고 몸을 돌려 들어가려 했다.

" 죄송합니다. "

" …잠깐만요…! "

순간, 머릿 속을 스쳐 지나간 생각이 있었다.
그들 앞에 버티고 선 난, 최대한 차분한 톤을 유지하려 애쓰며 또렷하게 뱉었다.

" 하지만 강윤환이라는 이름은 아실 텐데요. "

스스로도 감탄할 만큼 당당한 말투였다.
넘겨 짚었단 느낌은 전혀 찾아 볼 수 없을 정도로.
하지만 그 한마디에 대한 여자의 반응은 오히려 놀랄 정도로 빠른 것이었다.
몸을 돌린 그녀는 갑자기 빠른 동작으로 내 아래 위를 죽 훑어 내렸다.

" …성함이 어떻게 되시죠? "

" 정연진입니다. "

" 정연진씨… 잠깐 기다리세요. "

여자는 조금 당혹스런 표정을 짓더니 이렇게만 말하고 날 남겨둔 채로,
룸으로 통하는 통로 쪽으로 걸어 사라졌다.
카운터에 있던 남자가 좀 놀란 듯 내쪽으로 시선을 보낸다.

…3분 정도 흘렀을까.
카운터 옆에 있는 빈 의자에 앉아 기다리고 있던 내 시야에
다시 여자가 나타난 것은 그래, 한 3분 정도 지났을 때였던 것 같다.

" 따라 오시죠. "

여자의 태도는 많이 부드러워져 있었다.
정중한 건 여전했지만
아까와는 달리 딱딱함을 많이 빼낸 느낌의 정중함이라고나 할까.
여자를 따라 통로의 거의 끝까지 걸었다.

( 뭐야… 룸이 한둘이 아니잖아…? )

여자가 멈춘 곳은 꽤나 깊숙이 위치한 작은 룸의 도어 앞이었다.
노크하고 문을 열더니 나를 돌아보며 들어 가라는 신호를 해 보인다.
어색함을 애써 지우려 노력하면서 안으로 발을 옮겼다.


  




불운이 아니다 (3)





6.

당연히 그 자리엔 우인선배가 앉아 있었다.
혼자는 아니었다. 두명, 우인선배보다 나이가 들어 보이는 남자들과 함께였다.

선배는 보기만 해도 푹신해 보이는 소파 등받이에 몸을 기댄 채로,
서 있는 날 올려다 보고 있었다.
그 눈이 묘하게 풀려 있어서 난,
망설이고 있던 1시간 반 사이 선배가 상당히 마셔댔음을 알아 차렸다.
이제 겨우 9시가 조금 넘은 지금…?

( 그냥 술도 아니고 폭탄주를 마신 건가. )

테이블 위에는 위스키와 맥주병들이 가지런히 놓여 있었고,
뒤쪽 벽에는 회오리를 만든 잔해물인 젖은 티슈가
그럴싸하게 몇개나 붙어 있었다.  
술을 마신 경험이 거의 없는 나지만
위스키 잔을 맥주가 든 컵 속에 넣어 회오리주를 만들 때
컵 위에 얹었던 티슈를, 폼 잡고 뒤로 던져 벽에 붙인단 정돈 알고 있다.

" …정연진. "

선배가 피식 웃음을 토하며 내 이름을 불렀다.
꽤 취해 있긴 했지만, 어디까지나 침착한 느낌이 나는 음성과 태도.

참 희한한 사람이다… 취해 있을 때조차 묘한 단정함이 느껴지다니.
하긴… 그것이 이제까지 내가 알아 온 선배의 모습이었지.
연인의 이별 선언에 흥분하는 선배의 모습이 오히려 이상한 건지도 모른다.

" 안녕하세요, 선배. "

의외로 목소리가 침착하게 나왔다.
스스로 생각해도 느긋하기 그지없는 자세.
이제까지 안절부절못하고 있던 자신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마치 약속이라도 되어 있었던 양,
당당하게 선배를 대하는 내가 그 자리에 있었다.

" 생각보다 늦게 왔군. "

" 기다리게 해서 죄송합니다. "

" 거기 앉아. …아, 마마도 여기, 여기 와서 앉아요. "

선배는 들고 있던 위스키 잔으로 내게는 선배 맞은 편 의자를 가리킨 후,
여자를 보면서 자기 옆자리를 다른 한손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자가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며 미소짓더니, 옆자리에 가서 앉는다.

" 벌써 이렇게 많이 마신 거야? "

" …물… 같아. "

마마라 불린 여자의 약간은 질책하는 듯한 질문에 대답하며
선배가 힘없이 눈을 감더니 여자의 어깨에 머리를 기댄다.
여자가 눈만 옆으로 돌려 선배를 어린아이 보는 듯한 눈길로 바라보더니
다시 맞은 편의 내쪽으로 시선을 보냈다.
그리곤 위스키잔을 내쪽으로 내민다.

" 받아요. "

" …마시러 온 것, 아닙니다. "

" 알아, 뭔가 말하러 왔겠죠. 대화엔 술이 필수란 사실, 몰라요? "

입술 끝만 살짝 들어 올리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여자가 잔을 건넨다.
그 묘한 미소에 끌려, 나도 모르게 잔을 받아들고 말았다.

" 첫 잔은 원샷인 거 알지? "

조금… 아니, 상당히 당혹스러웠다.
수학여행 같은 때, 캔맥주를 조금씩 마셔 본 적이 있긴 하지만
도수가 높은 술은 접해 본 적이 없던 지라,
이걸 받아 마시면 내 몸이 어떻게 반응할 지 장담할 수 없었던 탓이다.

( 아… 모르겠다. )

난 말대로 깨끗이 잔을 비워 버렸다.

" 훗… 잘하잖아. "

문득 눈을 뜬 선배가 재미있단 듯이 웃었지만 난 솔직히 조금 당황했다.
넘기는 순간에서야, 술이 상당히 독한 종류임을 알았던 것이다…  
맛도 자극적이지만 효과도 만만찮게 빨라 잠시 후에
난, 단 한잔으로 머리가 핑 도는 걸 느꼈다.

" 이 녀석관 어떤 관계…? "

팔짱을 낀 채, 옆에 앉아 담배만 피우고 있던 단발머리 남자가
흥미롭다는 눈길을, 괴로운 표정을 감추지 못하는 내게 박으며 물어 왔다.
선배가 날카롭게 시선을 들어 단발머리 남자를 보며 반문한다.

" 뭘 묻고 싶은 거야. "

" 아아… 그냥. "

단발머리 남자는 어깨를 으쓱하더니 담배를 재떨이에 비벼 끄고선
머리를 뒤로 쓸어 넘기는 동작을 했다.
자세히 보니 남자 중엔 드물게 좋은 머릿결의 소유자였다.
아니, 여자 중에도 저토록 매끈하게 윤이 나는 머리결을 가진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듯 싶을 정도로 결이 고운 머리를 하고 있다.

살펴 보니 선배 옆에 앉은 두사람 모두 상당히 눈에 띄는 외모의 소유자로
방금 질문한 단발머리 남자가 부드러운 인상에 가깝다면
옆의 다른 남자는 바싹 깎은 머리 때문인지, 넓게 벌어진 어깨 때문인지
러프한 느낌을 남긴다.

" …후뱁니다. "

내 짧은 대답에, 마마라 불린 20대 후반의 여자가 오히려 놀란 표정을 짓는다.

" 정말… 그것 뿐? "

" ……? 무슨 말씀이시죠? "

" 어떤 사이인 거지? 윤환이의 이름을 일부러 들먹일 정도라면…. "

여자는 내 반문에 대답하지 않고
아직도 어깨에 기댄 채로인 우인선배를 내려다 본다.
그 질문에 선배가 서서히 여자의 어깨에서 몸을 일으켰다.

" 사이…? 내가 알고 싶군. "

담배를 입에 문 채 라이터를 갖다대는 선배의 모습은
말하는 투나 행동거지나 표정이나 전부 고교생으로는 보이지 않는
성숙한 남자의 분위기를 풍겼다.
그런 모습은 학교에서와는 영 딴판이었기 때문에
난 또 다시 당혹스러워지기 시작했다.

대체… 선배란 사람은 얼마나 복잡하게 얽혀 있는 인격체인 것일까.
단정하고 카리스마적인 학생회장의 이미지와는 다른, 묘하게 성숙하고 퇴폐적인
분위기를 내보내는 선배의 모습이 이 작은 룸 안에 있었다.

" 완전히 다르지만 제법 생겼잖아… 덤으로 완전 순진파로 뵈고.
   하긴 제발로 여기 걸어 들어올 정도라면 뭔가 다른 게 있는 거겠지? "

" 오버하지 마. "

단발머리 남자의 한마디에 선배는 귀찮다는 표정을 노골적으로 지으며 내뱉곤
여전히 담배를 문 채, 의식이라도 치르는 듯한 엄숙한 태도로 폭탄주를 만들어
내게 건넸다.

" …선배. "

" 일단 마시고 얘기해. "

선배의 말에 난, 또다시 컵에 입을 갖다 댔다.
잘 섞인 술은 그야말로 부드럽게 넘어간다.
정신이… 어딘가로 붕 날아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문득 시선을 들어 앞을 바라보니,
선배 역시 담배를 끄고 술이 반 이상 찬 컵을 입에 가져가고 있다.





7.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르겠다.
확실한 건, 선배가 완전히 취했다는 사실 뿐.

" 우인선배, 여기 자주 옵니까? "

눈을 감은 우인선배를 자신의 어깨에 기대게 한 채 담배를 피우고 있는
마마를 보고 물었다.
나 역시 정신이 자꾸만 몽롱해지려고 하고 있었지만
갖은 정신력을 동원해 버티고 있는 참이다.

옆에 있던 두 남자는 좀 아까, 가봐야 한다고 말하곤
마마에게 팁으로 배춧잎을 두둑히 건네더니 나가 버렸다.

" …꽤. 곧 기말고사라 하면서도 시험 직전까지도 몇번 왔었죠.
   하지만 오늘처럼 술을 들이부은 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잘 취하지 않는 스타일이라… "

" ……. "

" …착한 사람이군요. "

" 예…? "

" 걱정되나요? "

" ……. "

대답 대신 손에 들고 있던 잔 안을 들여다 보았다.
누리끼리한 맥줏물 위에 내 얼굴이 이상한 형태로 일그러져 비친다.

날… 나 자신도 모르겠다.

마마가 그런 날 보더니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 첨엔 우인이 섬씽이라고 생각했었지.
   그런데 지금 보니까 그런 것도 아닌 것 같군요.
   대체, 어디까지… 알고 있는 거죠? "

자는 것처럼 꿈쩍도 하지 않는 우인선배를 슬쩍 쳐다본 후, 한숨을 쉬었다.

" 잘, 모릅니다… 우인선배와 윤환선배의 관계 밖에는. "

전혀 모릅니다.
알고 있는 사실조차 의심스러우니까요.

마마가 담배연기를 위로 훅 뿜어낸다.
섹시한… 그리고 지나치리만큼 퇴폐적인 느낌을 발산하는 사람이다.

" 여기가… 어떤 곳인진 아나요? "

" ……? "

" 내가 어떤 사람인진 알겠어요? "

" 이곳의 주인… "

" 나, 남자에요. "

저도 모르게 눈이 커졌다.
저렇게 아름다운데… 저렇게 갸냘픈데…?
한방 맞은 듯한 기분…

" 역시, 짐작도 못한 모양이었구만. "

" ……. "

" 이곳은 게이 카페에요.
   아까 여기 앉아 있던 두사람도 서로 사랑한다고 생각하는 사이죠.
   회원제로 운영하는 까닭도 아무나 들여보낼 수 없기 때문이에요.
   나도… 그리고 여기 출입하는 사람들도…
   사회에서 말하는 정상은 아니죠. "

" 저한테 그런 얘기 하셔도 되는 겁니까? "

또, 웃는다.
솔직히, 아름답다고 생각했다.
보통 이상의… 아니, 두드러지게 아름다운 미소다.

" 당신, 입이 가벼운 사람으론 보이지 않아.
   게다가 좋아하는 우인이를 쫓아서 이곳까지 들어 왔잖아요?
   뭐, 말해도 할 수 없는 일이지만… "

" 윤환선배는… "

" 이곳에서 일했었죠. 우인이도 윤환이 덕분에 알게 된 거지.
   두사람은 말이지, 정말 안 어울릴 듯 지독하게 어울리는 한쌍이었어.  
   불같은 성격의 윤환이랑 모든 걸 속으로 끌어들이는 듯한 우인이.
   가난한 윤환과 부유한 우인. 윤환인 부모에게 버림받았고,
   우인인 확실한 이유는 모르지만 부모를 경멸하고 있었더랬지.
   변호사란 직업… 올곧은 사람이 받아 들이기엔 부정적인 면들로
   가득차 있으니까.
   두사람이 학교에 대해 말해준 적은 한번도 없었지만…
   필경 감정을 감추는 자체가 지옥이었겠죠.  
   그런 둘에게 자리를 제공할 수 있다는 것이 좋았어.
   여긴 현실이 아니거든. 현실을 잊을 수 있는 공간…
   현실을 잊을 수 있게 해 주는 게 이곳의 술이고.
   윤환이가 죽고 나서도 우인이가 계속 여기 오는 이유도 그래서일거야. "

눈을 감은 채 잠들어 있는 선배를 보았다.

몰랐다.
긴 속눈썹… 여리다.
공허해 보인다.
여지껏… 몰랐었다.

돕고 싶다.
선배… 당신을 돕고 싶어.

" 이제 가봐야 할 것 같은데…? "

마마가 조용히 말했다.
…차분히 가라앉은 허스키한 음성.

" 저… "

" 당신, 완전한 우리 부류는 아니지만… 적어도 이해는 해줄 것처럼 보여.
   우인이를 도와줘요. 기댈 사람이 필요할 거야.
   왠지 당신이라면 할 수 있을 것 같아. 부탁해요…. "

마마는 말하면서 우인선배의 뺨을 가볍게 두들겼다.

" 자… 일어나, 응석받이 양반. 집에 가야지? "

" 저, 술값은…… "

" …훗. "

마마가 날 보며 귀엽다는 듯한 웃음을 토해낸다.

" 아마 앞에 나간 사람들이 내고 갔을 거야. 우인이를 꽤 예뻐하거든?
   아니어도 상관없어. 아니라면 오늘은 내가 내는 걸로 할테니까. "

" 욱……. "

우인선배가 눈을 뜨려다 말고 찌푸리며 신음소리를 낸다.
마마는 그런 우인선배를 보고 다시 날 보며 나직하게 말했다.

그의 짧은 한마디는… 순식간에 가슴을 후벼파고 들어 온다.

" 우인이를… 잘 부탁해. "





8.

어둡다.
어두웠다.
사방이 보이지 않는 터널을 빠져나가는 감각이다.
혼탁한 습기가 사방을 메우고 있는 그런 터널을 빠져나가는 듯한…

택시를 타고 선배의 집으로 향하는 동안, 선배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내게 기대다시피 한 채 앉아 있는 선배의 몸이 놀랄만치 차갑다.

깊게 가라 앉은 속눈썹…
선이 강한 콧날…
자존심이 강해 보이는… 꾹 다문 입술…
흘러 내린 머리카락…

모든 게 얼어 붙어 있는 것처럼 움직이지 않고…
그 모든 게 내 감정을 움직이게 만든다…….

돕고 싶다.
선배… 당신을 돕고 싶어.

선배의 집에 다다랐을 때, 그 조용한 공간에는 아무도 없었다.
선배의 가방을 뒤져 열쇠를 꺼내, 문을 따고 들어갔지만
그 넓은 공간은 우리 둘을 제외하곤 덩그랗게 비어 있을 따름이었다.

" 언제나의 일이야… "

조금쯤 의식을 되찾은 선배가 웅얼거리듯 말한 대사가 내 귀에 들어와 박혔다.
넓은 집. …그러나 어딘가 서먹하고 싸늘한 분위기의…

나보다 한참 큰 선배를 부축해서 집안으로 들어갔다.
선배는 계속 괜찮다며 팔을 잡아 빼더니 혼자 걸으려 애쓴다.
그런 그의 태도가 어지간히 고집스러워 조금 원망스럽기까지 했다.

" …욱…! "

오바이트가 쏠리는지 선배가 비틀대며
입구에서 가장 가까운 화장실로 향하는 모습이다.
쫓아가 부축했지만 고집불통, 또다시 팔을 뿌리쳤다.
화장실 문을 안에서 잠그고…
그리고 잠시 후, 게우는 소리가 들리기 시작한다.

" 후… "

한숨을 토해 내고 이마를 짚은 채, 나 역시 거실 소파에 주저 앉았다.
머리가 아프다… 지독하게 아파.
선배처럼 많이 마시지도 않았는데 괴롭기는 마찬가지였다.

…30분 정도 지났을까.
선배가 틀어박혀 있던 화장실 안으로부터 마침내 물 내리는 소리가 들렸고
이어 입안을 헹구는 소리가 났다.

비틀대며 선배가 나오는 것이 보인다.

" 그럼… 가보겠습니다. "

난, 소파에서 일어서려 했다.
벌써… 2시다.

엄마… 걱정하고 계실 거야.
전화 한통 드리지 못했다.
돌아가야 한다. 하지만…

" ……? "

날 붙잡는 사람이 있을 때라면…
그리고, 그 사람이 줄곧 날 봐주기를 기대했던 사람이라면…?
믿을 수가 없어…

우인선배가 날 안다시피 기대고 있었다.

" 선배…? "

" 가지 마… 부탁이야… 같이 있어 줘…
   제발… 날 더 이상 혼자 놔두지 말아 줘… 이 빌어먹을 공간에 혼자 두지…. "

낮고 정신없이 중얼대는 대사들.
몸 전체에서 풍겨 나오는 술냄새.
그리고… 그 혼탁함 속에서 묘하게 따뜻함을 발산하는 그의 미열.
아까까지만 해도 차갑던 몸이 조금씩 아련한 열을 내뿜고 있었다.

술냄새와 뒤섞여 그의 미열이 내 몸으로 서서히 전해져 온다.
그의 열이… 내 몸으로 전해지자,
마치 장작불을 땐 것처럼 후끈거리는 감각들.

그랬구나…
나, 선배를 원하고 있었구나…
처음부터 선배를 원하고 있었구나….

…도저히 갈 수가 없다.
…선배를 놔두고 갈 수가 없다.

- 우인이를 잘 부탁해.

마마의 음성이 귀에 와서 그대로 박힌다.
순간, 힘이 빠졌고… 난 선배의 몸에 눌려 그대로 소파로 쓰러지고 말았다.





불운이 아니다 (4)





9.

잠을 깬 것은 새벽이었다.

지독하게 목이 마르다…
모래를 씹은 것처럼 입안이 텁텁하다.

술을 마신 뒤에 이렇게 불쾌한 감각이 이어지는 줄 미처 몰랐었다.

" 음… "

온통 부은 듯 찌뿌둥한 몸을 간신히 일으켰다.
…탈진 상태.

눈에 빛이 들어와 고개를 돌리니,
거실과 연결된 부엌에 선배의 모습이 있다.

" 아, 깼어…? "

…침착한 음성.
평소 때의 모습이다.
평소 때의 우인선배다….

선배가 물컵 두개를 가져왔다.

" 마셔. "

하나는 나에게 주고 하나는 자신이 마신다.
물컵을 손에 든 채 그저 멍하니… 앞에 서 있는 선배를 봤다.

선배는 내게서 약간 고개를 틀어 앞벽 약간 아래쪽을 보고 있었다.
그런 각도와 약간 내리깐 눈은
라인이 선명한 옆얼굴과 긴 속눈썹을 지독히 돋보이게 해주고 있었고
어느 새 난 눈을 떼지 못하는 스스로를 발견한다.

여느 때 모습 그대로다…  
도저히… 엊저녁까지 만취했던 사람으론 보이지 않아…
저토록 멀쩡하게 돌아올 수 있을까…?

" 두번이나… 빚을 졌군. "

물컵을 입에 갖다댄 날 바라보며 선배가 중얼거렸다.
그런 그의 한마디는 겨우겨우 나를 현재의 영역으로 돌려 놓는다.

물을 마셨다…
본론으로 들어가기 위한 준비인 양, 천천히 시간을 들여서.

" 괜찮습니다. "

나는 조용히 말했다.
따지려던 건 아니었지만 이상하게 음성이 날카롭게 나왔다.
그리고 그런 음성은 내 것 같지 않은 생소함을 지닌 채,
맨 먼저 자신을 찔러 온다.

" …선배가 제가 생각한 선배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

내 말이 떨어진 순간, 물컵이 탕 소리를 내며 거실 탁자 위에 떨어졌다.
탁자 위에 흘러 넘친 물이 동그란 얼룩을 그리며 번져 있었고
선배의 눈은 날카롭게 날 노려보고 있었다.

" 깊이 들어 오지 마. 넌 내 애인이 아냐, 정연진.
   네가 날 쫓았던 건 진즉부터 알고 있었지.
   하지만, 네게 내 인생에 간섭할 자격은 없어. "

" 저한테 두번 빚을 지신 걸로 기억하는데요.
   이 정도 요구할 권리는 있다 생각합니다. "

철저하게 뻔뻔해지겠다고 결심했다…
뻔뻔해질 수 있다… 우인선배 앞에서라면 난 아무리 뻔뻔해져도 좋다.

" 어째서 이런 짓을 계속하시는 겁니까. 윤환선배 때문입니까.
   물건을 훔치고… 술을 마시고… 스스로를 파괴하는… "

드디어 말했다.
계속 담아 두었던 질문을 토해냈다.
말하지 않으면 그대로 기도사할 것 같이 숨이 막혀서.
듣고 싶었다.
선배에게 기대하던 대답을… 변명을… 듣고 싶었다.

" 역시 다 알고 있었나. 그래, 운을 되돌리기 위해서다… "

" …운…? "

" 그 자식을 만난 불운을 지우고 행운을 되돌리기 위해서.
   그 새끼가 바란 대로 완전히 잊어 주기 위해 앉아 있는 거야.
   난 항상 운이 좋지. 그 자식과 달리 난 모든 걸 타고난 놈이니까.
   우연히 그 자식과 접촉한 게 내 인생 최대 악운이었어.
   그러니까 그 자식이 죽은 건 행운을 되돌릴 기회지.
    …철저하게… 잊어줄 거다. 어차피 이 세상은 운으로 돌아가니까.
   편견과 경쟁하지 않아도 될 행운의 길로 돌아가기 위해서 기다리는 거야. "

화가 났다.
말을 듣고 있는 사이, 화가 치밀어 올랐다.

이런 건… 내가 원하는 선배가 아니다.
동경의 언덕은 이렇게 쉽게 무너져 내려서는 안된다.
우인선배는 내가 동경할 만한 사람이어야 한다.

…그래야만 한다.

" 그래서, 자신의 운을 시험해 보기 위해 물건을 훔치는 겁니까.
   그리고 윤환선배에 대한 선배의 사랑이란 건
   단순한 불운으로 치부될 수 있을 만큼 치졸한 감정이었던 겁니까. "

선배도 화가 났던 건지도 모른다.
선배에 대한 내 실망만큼이나 버릇없는 후배에 대한 분노도 컸던 건지도.
그래서일까, 그는 내게 몸을 뻗어 왼손으로 어깨를 잡아 자신에게 끌어 당기는
한편, 오른손으로는 내 턱을 잡고 자신의 얼굴 가까이에 갖다 붙였다.

상대의 호흡까지 느낄 수 있을 정도의 간격.

아득해지는 의식을 바로 잡으려 갖은 애를 썼지만,
순간… 그의 입술이 내 입술에 닿고 물컹한 물체가 내 안으로 미끄러져 들어 온
그 순간… 난 모든 의지가 부서지는 듯한 감각을 맛보았다.

숨을 쉴 수가 없었다…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정확히 기억하지 못한다.
확실한 건 선배가 날 농락하듯 흔들어 놓았다는 것.

" 우인선배, 왜 이러는 거예요! "

눈물이 났다.
화가 났지만 주먹을 날릴 것 같은 분노 대신, 눈물부터 나려하는 걸 꾹 참고,
선배를 뚫어질 듯 노려 봤다.

" 이건 잘못됐어. 자신을 비하하고, 운을 시험하고, 도망치고,
   남을 상처입히면서 살아가다니, 이건 선배가 아니야!
   이건 선배의 삶의 방식이 아니라구! "

" 그럼 무엇이 옳은 거지?
   윤환형은 자신을 바꾸려고 했었어, 열심히 살아보려 했었다. 하지만…    
   그렇게 결심한 그에게 돌아온 건 세상의 야멸찬 의심의 눈초리였어.    
   불운의 화살이었다구.
   그걸 단순한 인과응보라 치부하는 세상에서
   어떤 게 옳은 삶의 방식이 되는 거지? "

" 적어도 도망치는 건 옳지 않아요. 그런 식으로 타협하고 포기하는 거… "

난 선배에게 주먹을 날리지 않았다.
아니, 날릴 수가 없었다.
어째서인지… 알 것 같은 기분도 든다.

그런 거다…
그런 것이다…
선배는 내게 그런 존재인 것이다…….

" 날 이해할 수 있다는 뜻인가? "

" 이해하는 진 모르지만… 적어도 나, 선배를 사랑합니다……. "

아직까지 머리를 감싸고 있는 몽롱함 탓이라 말해도 좋다.
난, 가슴에 가득찬 감정을 끌어 모아 힘들게… 힘들게… 뱉어냈다.

그런 날 본 선배의 눈이 놀란 듯 커지는가 했더니 이내 평소대로 되돌아 왔고,
그리고 태평한 듯, 잔인한 장난스러움으로 돌아간다.
그런 그를 보고 있노라니 가슴이 시큼거리며 아파 왔다.

그는… 자신을 누르기 위해 사는 사람 같았다.
그런 그의 태도가 날, 내 가슴을 아프게 했다.

" 좋아… 그럼 내기를 하지. "

선배의 눈동자가 묘하게 반짝인다.

" 내…기…? "

" 게이들이 어떻게 사랑하는지 알아? "

태연자약한 말투였다.
흔치 않은 화제를 입에 담는 데 대한 수치심이라곤 눈꼽만큼도 찾아 볼 수 없는…
그래, 그것도 선배라는 사람의 모습이지.

하지만… 나는 느낀다.

" ……. "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숙인 내게 선배의 무자비한 한마디가 이어졌다.

" 만일 옷을 벗고 내 앞에 뒤를 댈 수 있다면… 네가 하는 말, 전부 듣겠어. "

" 선배……!? "

" 도망친다거나 갖다 붙인다고 생각해도 좋아. 네가 그럴 수 있다면…
   난 얌전히 네 말을 들을 거다, 그 어떤 것도. "





10.

고개를 들어 선배를 노려 보았다.
선배도 내 눈을 받아 마주 노려본다.

침묵.
시간이 지나간다.
숨이 막힐 듯한 침묵만이 시공간을 가득 메우고 있다.
마침내, 선배가 눈을 가늘게 만들며 빙긋 미소를 올렸다.

" 못하겠지… 정연진 군은.
   뭐든 이해할 것처럼 말할지라도 자신의 아픔만은 이해할 수 없는 법이니까. "

입술을 깨물었다.

날 상처 입히고 싶다면…
지금 곁에 있는 사람을 상처입히고 싶다면…
마음대로 하십시오. 난… 물러서지 않을 겁니다.

" 불운이 되겠군요… 저에겐… 그렇죠? "

선배는 약간 놀란 듯 쳐다 보더니 피식 웃음을 토해낸다.
그리고, 놀랄 만큼 진지한 표정으로 돌아가 어린아이에게 설명하듯 천천히,
나를 향해 말하기 시작했다.

" 상처를 입을 걸… 육체적이고 정신적인 상처를.
   인생에 흠집이 생겨버린 거지. 지독하게 운이 나쁜 거지.
   그런 상처를 받고도 날 계속 좋아할 수 있을까, 과연…? "

저런 사람이었다…
저런 사람이란 걸 알았는데… 이상하게 싫지 않다.
만일에 저런 모습이 진짜 선배라면 인정할 수 밖에 없다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다. 그리고… 결심한다.

" 그렇다면… "

난 선배를 쳐다 보고 또렷하게 말했다.

" 옷을 벗겠습니다. "

선배는 차가운 눈으로 날 바라보며 입으론 아무 응답도 하지 않았지만
그 태도가 해볼테면 해봐…! 라고 말하고 있었다.

난 천천히 손을 내렸고… 입고 있던 티셔츠를 끄집어 올려 벗었다.

선배를 차지하고 싶다고…
그런 뻔뻔한 생각을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알려주고 싶었다.

" …정말, 하려는 거야? "

" 적어도 전, 이 정도로 난 운이 나빴어, 하고
   체념하거나 인생을 포기하진 않을 겁니다. "

선배에게 무언가를 - 그것이 설혹  상처일지라도 - 받고 싶어하는 존재가
세상에 아직도 존재하고 있음을 알려주고 싶었다.

진바지의 버튼에 천천히 손을 갖다 댔다.

이상하리만치 마음이 편안하다…

난 지금 내가 취하는 동작이 선배에 대한 희생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미친 짓일 수는 있어도 이런 나의 행동을 희생이라 생각하진 않을 것이다.

결코… 후회하지 않을 것이다.

선배를 만난 것에 대해, 선배에게 빠져든 것에 대해, 선배의 말을
자신의 의지로 따른 것에 대해 불운이라고 밀어 두진 않을 것이다.

내가 선배와 한 학교에 다니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와 함께 학생회 멤버가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에게 관심을 갖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가 물건 훔치는 걸 보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의 실연에 대해 목격하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가 게이 카페에 다니는 사실을 알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의 요구를 받아 들여 나를 내주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내가 선배를 사랑하게 된 건… 불운이 아니다.

결코… 결코… 불운이 아니다.

어느 사이엔가 난, 미소짓고 있었다.
어디서 이런 힘이 나오는 걸까… 자신조차 알 수 없다.

그런 내 손에 다른 손이 와서 닿았다.
고개를 들어 올려 보니 선배가 날 묘한 표정… 조금은 부탁하는 듯한 그런 눈길로
내려다 보고 있다.

" 바보야… 도망쳐…. "

" 싫어요. "

" 네가 나 같은 감정에 빠지는 거… 원하지 않는다…
   날 경멸하고… 미워하고… 도망치란 말야. "

" 도망치지 않아요. "

" …폼잡지 마. "

선배의 대사는 무거웠지만 이미 힘을 잃고 있었다.
난 그런 선배를 똑바로 쳐다 보며 웃어 보였다.

" 진심인 거야? "

" …예. 진심이에요. "

선배를 받아들일 겁니다…
마음으로도… 몸으로도… 결점까지도… 아픔까지도.

그렇게 마음 속으로 되뇌인 그 때…

" ……! "

난 안겨졌다.
선배에게 안겨졌다.
선배는 한동안 숨이 막힐 만큼 힘을 주어 날 안고 있었다.

마치… 애원하는 것처럼.
마치… 용서를 비는 것처럼.

" …졌어. "

몸을 떼며 말한 선배는 경직된 나를 풀어 주려는 듯, 눈에 가볍게 키스했고…
그리고 소파 위에 얹혀 있던 티셔츠를 집어 구멍을 목에 통과시켜 입혀 주었다.

" ……! "

난 비틀거렸다.
어제밤부터의 긴장이 한꺼번에 풀린 것이다.
선배는 어깰 안다시피 거의 쓰러질 것처럼 위태로운 날 꽉 붙들어
벽에 기대게 한 채, 내 얼굴을 손으로 붙들고 가만히 들여다 보았다.

이지적인, 그러나 다정함을 담은 눈동자.
그 눈동자로부터 보내져 오는 빛에 나는 그만 안도한다.
선배는… 그렇게 미소 띈 그대로 다시 한번 눌러 담듯 천천히 말했다.

" …완패야. "

막 떠오르는 새벽 햇빛이 거실로 스며 들어와 두사람을 끌어 안기 시작했다.

결국 그렇게… 이야기는 시작하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새롭고… 누군가에겐 되풀이가 될, 사랑이 시작하는 방식은
언제나 그렇듯 어이없을 정도로 갑작스럽게 찾아오는 것이다.

끝은 누구도 알 수 없는 것.

확실한 것은… 그 어떤 결말일지라도 이런 만남이 내게도… 선배에게도…
불운으로 돌려지진 않을 거란 사실이다.

그것만은… 나… 확실히 알고 있다.

확실히… 알고 있다.


                       …………………………………


정연진(Jung Yun Jin)

좋은 성적에 반장을 맡고 있는 전형적인 모범생. 외견은 부드러운 인상에
온화한 이미지이지만 실상은 꽤나 똥고집을 가진 외유내강형.

나이   : 17(고1)
혈액형 : A형
키     : 171cm(아직 고1입니다)
몸무게 : 56kg


성우인(Sung Woo In)

연진과 같은 고교 학생회장.
매끈한 윤곽에 샤프하면서도 여유와 자신감을 갖춘 이미지.
학교 짱이었던 강윤환과 연인 사이였으며 그의 자살로 인해 충격받는다.

나이   : 18(고2)
혈액형 : AB형
키     : 179.5cm
몸무게 : 63kg


강윤환(Kang Yoon Hwan)

연진과 우인의 학교 선배이며 학교 짱이었던 문제아.
누명을 쓰고 퇴학을 당한 후, 자살로 추정되는 사고를 당한다.
불우한 가정환경에서 자란 듯.

나이   : 19(고3)
혈액형 : B형
키     : 184cm
몸무게 : 71kg


                      …………………………………


<불운이 아니다>의 결말에 대해서
부족함을 느끼시는 분들이 많으리라 짐작합니다.
주인공 둘이 막 되려 하는 정도에서 끝내 버리다니,
이게 뭐야…? 하고 말입니다(신도 안 나오고 말이지…).

물론, <불운이 아니다>는 이걸로 끝내진 않을 겁니다.
아마 속편 내지 번외편을 쓰게 될 것 같습니다.
다만 여기서 완결지은 이유는
일단 매듭지어야 할 필요성을 느꼈기 때문입니다.
어느 정도 다른 이야기들을 올리고 나면
<불운이 아니다>의 속편 내지 번외편도 올릴 생각입니다.

세잎클로버   2004/12/29

외전이 정말 기다려지는데요...
그리고...네..정말로 불운이 아니죠^^

하난   2005/11/02

연진이가 쑥쑥 자라길 기대합니다. 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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