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작 공개방입니다. 비회원들도 보실 수 있습니다.

 11   1/  1   0
BabyAlone
사일런트 나이트 (상)

[창작/중편]


                       SILENT NIGHT(사일런트 나이트)

                          -  (속) 사일런트 블루  -

                                                                      
  
                                         Presented by BabyAlone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어둠에 묻힌 밤

쌓인 슬픔을 흘려 보내는 밤
긁힌 상처 자국을 지우는 밤

당신과 함께 흰눈을 맞는 밤
당신과 함께 노래를 부르는 밤
당신과 함께 미래를 꿈꾸는 밤

이 밤…
고요한 밤
거룩한 밤

영원히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무한의 밤

당신과 나의… Silent Night.





[ 제 1 편 ]





0. Before November of This Year

내 이름은 「해」라고 합니다.
하늘에 뜨는 해를 말하는 게 아니고,
「바다」란 뜻의 한자 이름이고, 외자 이름입니다.

이름 그대로, 난 바닷가에서 태어나 바닷가에서 자라 왔습니다.
태어난 곳을 거의 벗어난 적이 없기 때문에,
드넓은 세계에 대해 알진 못하지만, 바다에 관한 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을 정도로 알고 있다고 자부하고 있습니다.

난 귀가 들리지 않습니다. 태어날 때부터 그랬던 것은 아니고,
초등학교 저학년 때 심하게 병을 앓은 이후, 청각기능을 잃어 버렸습니다.
물론 그 때까진 나도, 귀로 듣고 입으로 말을 할 줄 아는
지극히 정상적인 아이였지요.

처음 귀가 들리지 않게 된 그 때를 회상해 봅니다.
갑작스레 청각을 잃은 어린 난, 그저 멍한 기분이었습니다.
두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하염없이 흐느끼고 계신 엄마를
눈으로 보면서도, 난 내게 들이닥친 현실을 믿을 수 없었습니다.
엄마가 울고 계신다는 사실을 바로 코 앞에서 보고 있으면서도
내 귀는 마치 일체의 소리를 흡수하는 견고한 벽에 가로막힌 양,
엄마의 울음소리를 전해 주지 않는…….

믿을 수가 없었고 믿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하지만, 인정할 건 빨리 인정해 버려야 합니다.
처음에 그 사실을 쉽게 시인하지 못했기 때문에,
어린 나와 우리 가족들은 한동안 헤매야만 했습니다.

귀가 들리지 않는 상태로 소리를 내서 말하는 것은
생각보다 아주 까다로운 일입니다.
처음, 난 가족이며 주위 사람들에게 들리지 않는 상태에서
짐작만으로 입으로 말해 보려고 했습니다.
언뜻, 그건 별 문제 없을 듯 보였습니다.
병을 앓기 전까지의 난 아주 정상적인 아이였으니까요.

하지만, 예상과 달리 현실은 비참했습니다.

내 말을 들은 사람은 고개를 갸우뚱거리며 다시 한번 「응?」하고
되묻기 일쑤였던 겁니다.  
나 자신, 정확히 말한다고 한 것 같은데
실은 얼토당토 않은 소리를 내고 있었던 겁니다.

게다가 청력을 잃게 된 초등학교 저학년 때까지의 어휘력으론
내가 하고 싶은 말을 다 표현하기에 턱없이 부족하단 사실을
자라면서 깨닫게 되는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습니다.

현실은… 현실은… 그렇게 냉엄한 것이었습니다.

아무튼 당연한 듯 누리고 있던 것을 잃어버린 어린 난
심각한 우울증에 걸리고 말았습니다.
학교는 어차피 그만두게 됐지만, 학교와 관계없이 집 밖으론
나가고 싶지도 않았고, 내 귀가 들리는 것 따윈 아랑곳 않고
잘 살아가는 다른 사람들을 내 시야에 집어 넣고 싶지도 않았습니다.

너무나 불공평하다고 생각했습니다.
한동안 앓은 것도 억울한데, 왜 남들이 다 가지고 있는 것까지
빼앗아 간 것일까요.
게다가 내겐 다른 아이들은 다 가지고 있는 아버지란 존재도 없는데.
그것만으로 충분히 불공평할진대 어째서, 어째서, 이런 식으로
날 힘들게 하는지 신이든 뭣이든 내 운명을 주관하는 자가 있다면,
정말로 그런 자가 존재한다면, 그를 저주하고 싶을 정도였습니다.

어린 심장에선 끊임없이 피가 흘러 나오고 있었습니다.
그렇게 피를 흘리면서 난, 나도 모르는 사이 서서히 죽어가고 있었습니다.
세상과 나 사이에 문을 닫고 자물쇠를 채운 채,
투명하지만 견고한 공간 밖으로  절대 나가지 않겠다고 무심결에
다짐을 걸면서 난 산 채, 죽음의 방향으로 발을 디디고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 어린 날, 위험한 길에서 끄집어 내어 현실에 부딪힐 수 있도록
도와 준 건 갓 고등학교에 입학한 형이었습니다.  
형은 방 구석에 쭈그리고 앉은 채, 누구와도 접촉하지 않으려는 내 옆에
말없이 헬렌켈러의 전기를 놔 두고 갔습니다.
그런 형을 난 처음엔, 쳐다보지도 않았습니다.

미워.
미웠습니다.

형은 귀가 들리잖아.
아픈 적도 없었잖아.
형이 날 위로할 자격이 있다 생각해?
귀가 들리는 사람은 내게 뭐라 말할 자격 따위 없어.
절대 없어, 없다구.

그렇게 귀가 들리는 모든 사람들, 날 이렇게 만든 운명, 그리고
내가 살아있단 사실까지 마음 속으로 저주하고 또 저주하면서
꼼짝않고 앉아 있던 어린 나도 식구들이 나가고 혼자 남은 그 외로움을
견딜 수가 없게 되자, 결국은 책을 집어 들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아무 생각없이 눈을 활자에 따라 보내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어떻게 됐냐구요?  
음… 조금… 울었던 것 같습니다.

내 고통이 더 큰 고통을 겪고 있을 다른 사람들에 비해 아무 것도 아니란 걸
깨닫고 난 처음으로 내 자신의 처지에 대해 감사의 마음을 가졌습니다.

어린 헬렌 켈러, 눈도 보이지 않고 귀도 들리지 않는,
게다가 나보다 더 어릴 때부터 그런 고통을 받고 자란 그녀에 비하면
내 고통은 아주 사소한 것으로 느껴졌던 겁니다.  

게다가 내겐 나만을 걱정해 주는 엄마와 형제자매가 있습니다.
그 사실을 깨닫고 난 아주 오랜만에 「기뻐」 눈물을 흘렸습니다.

그 눈물은 아주 투명하고 따뜻한 감각을 내게 전해 주었고,
입가에 흘러 내리는 찝찔한 소금맛을 느끼면서 난 행복하다고,
지금 이렇게 살아 있어서 행복하다고, 실감하고 또 실감할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저녁.

아주 오래간만에 밥을 먹으러 내려 온 나를 놀라서 쳐다 보는 가족들에게
「공부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지?」하고 종이에 적어 보여 주었습니다.

그 종이를 본 엄마의 표정… 난 지금도 잊을 수 없습니다.  
눈물이 그렁해서 입으론 힘겹게 웃고 있는 그 표정… 그 얼굴을 본 순간,
난 내가 얼마나 그 동안 엄마를 힘들게 해 왔는지 깨달았습니다.

나란 아이가 얼마나 한심하고 못나게 굴었는지도요.
자신이 뭔가를 잃었단 그 사실 하나만으로,
주변 사람들을 얼마나 상처입혀 왔는지도요.
얼마나 바보같은 행동을 하고 있었는지도요.

눈을 꼭 감았다가, 그리고 뜨고, 마음 속으로 중얼거렸습니다.

( 미안해요… 엄마. )

그리고 병원에서 퇴원한 후,
처음으로 내 발로 밖으로 나와 바다를 보았습니다.

내 눈물 맛과 조금쯤 비슷한 그 찝찔한 물을 손가락으로 찍어 맛보면서,
저 멀리 가로로 전개되어 있는 수평선과
그 위로 존재하는 맑고 청명한 하늘과 그 위에 존재하는 흰 구름,
그리고 가로선 밑으로 이어진 짙은 푸른 물을 보면서,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것인가…
감사하는 자에게 세상은 얼마나 아름다운 감동을 부여하는가에 대해  
어렴풋이 깨닫고, 느끼고, 생각하게 된 어린 나였습니다.

그리고, 감사했습니다.

나란 영혼을 이 세상에 내려 보내주신 어떤 분에게, 나란 존재가
한 생명으로 세상에 나오도록 서로 사랑했던 우리 엄마와 아버지에게,
내가 힘든 지금, 따뜻하고 조금은 안타까운 시선으로 날 기다려 준
내 형과 누나에게, 아주 중요한 진리를 일깨워 준 나의 시련에게,
그 시련에도  지지 않고 버텨준 내 어린 몸과 마음에게, 그리고
그 몸과 마음을 둘러싸고 있는 이 눈부시도록 아름다운 하늘과 바다,
그리고 그걸 포함한 시공간과 그 위에 존재하는 생명체 전부에게.

나와 가족들은 수화를 배우기 시작했습니다.
손으로 말한다는 게 처음엔 너무나 어색하고 힘들었지만, 어느 새
수화에 익숙해져 버린 난, 언젠가부터 입으론 아예 말하지 않게 됐고,  
그런 사이 입으로 말한다는 것에 대한 기억 자체도 희미해져 갔습니다.

입모양으로 상대의 말을 알아듣는 방법도 배웠습니다.
중학교엔 결국 가지 않기로 했지만, 자상한 형과 누나의 덕분으로
집에서 중학 과정도 마칠 수 있었습니다.

가끔은 입으로 소리내어 말해 보고 싶단 생각도 했지만,
그럴 필요가 굳이 없었기에 난, 구화(口話)의 가능성에 대해선
아예 접어 버리고 있었습니다. …「그」를 만나기  전까지는.

엄마, 형, 누나만큼…
아니, 그보다 더 소중할지도 모를 나의 「그」를 만나기 전까지,
나의 혀는 가장 중요한 한가지 기능을 잃은 채 존재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리고…
그 여름.
그 눈부신 여름.
그를 만나게 되고 나서 난, 내가 살아 있단 사실을, 아주 오래간만에
다시금 실감하고 감사하고 행복에 취할 수 있었습니다.

그리 길다고까진 할 수 없을 지라도 이제껏 살아온 16년이란 시간들이
「그」를 만나기 위해서 존재했던 게 아닌가 생각하면서,
또 그런 감각을 내게 알려 준 그에게 뭔가 선물을 하고 싶단 생각에서…  
난, 꽤나 오랫동안 잊고 있던 내 혀의 기능을 되찾기 위해
다시 한번 노력하기 시작했던 겁니다.





1. One day, November

난 매일 아침 일찍 눈을 뜹니다.
철이 들기 시작한 무렵부터의 습관입니다.

자명종 시계  같은 건 틀어 놀 필요도 없습니다.
물론 있다 해도 내겐 별 쓸모 없는 물건이긴 하지만요.

창문 새로 아직 아침 햇살이 채 스며들기도 전, 눈을 뜬 내가  
몸을 일으켜 침대 시트를 정리하고 쭈욱 기지개를 켤 무렵에야
겨우, 겨울의 해는 미약한 힘을 발휘해 그 빛을 내려 보내기 시작합니다.
그 햇살을 느끼면서 난  창문을 엽니다.

11월도 거의 다 갔긴 하지만 바닷바람이 좀 거세진 걸 제외하곤
아직은 따뜻한 날씨.

창문을 열고, 시원한 바깥 공기를 한껏 들이 마시곤,
창문을 닫고, 욕실로 향합니다.

횟집을 하시는 엄마는 오전 중으로 집안 일을 대충 끝내야 하기 때문에,
많이 바쁘십니다.
아버지 없이 자란 우리 형제들을 키우느라 힘드신 엄마에게
내가 해 드릴 수 있는 오직 한가지는 늘 그렇듯 집안 일을 거드는 것
뿐입니다.

빨래랑 집안 청소, 다 제가 합니다.
대학생인 형이나 누나는 기숙사에 들어갔기 때문입니다.
군에서 막 제대한 형은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고,
누나는 부산에 있는 학교를 다니지만 둘 다 집에서 꽤 멀기 때문에,
기숙사에 머물러 있습니다.

횟집은 저녁부터 본격적으로 바빠지기 때문에 집안 일을 일찍 끝내면
난 우선적으로 공부를 합니다.
영어책도 보고 머리를 톡톡 두드리며 조금은 까다로운 수학 문제도 풀고,
그러면서 시간을 보냅니다.

그러다가 횟집이 바빠지기 시작하는 5시까지 에누리 시간이 조금이라도
남으면,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갑니다.

PC방에 가기 위해서입니다.
물론 시내에 나간 김에 필요한 이것저것을 사올 때도 있지만
PC방에는 빠지지 않고 꼭꼭 들러 봅니다.

집에는 컴퓨터가 없지만, 난 내 멜 주소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 주소로 멜을 보내주는 사람도 있습니다.
그 사람의 소식이 궁금해 난, 시간이 날 때마다 멜을 확인하러
PC방에 갑니다.

대낮의 PC방은 그리 사람이 없이 텅 빈 상태입니다.  
카드를 받아서 - 단골인 PC방은 카드제입니다 - 자리에 앉습니다.

가슴이 두근두근거립니다.
이 기다림의 시간이 너무너무 좋습니다.
「멜이 왔을까…?」 기대하며 가슴을 누르고,
마우스에 손을 댄 채 스크린에 뜨는 영상을 응시하는 이 시간.

기대가 실망으로 돌아갈 땐 그야 좀 허무하지만,
기대를 할 수 있단 그 사실 하나만으로 난 행복합니다.

「 새편지가 1통 있습니다. 」

믿을 수가 없습니다.
그저께 확인했는데, 그새 또 멜이 왔습니다.

너무 기쁩니다.
너무너무 기쁘고 기뻐서 손가락이 조금 떨리려 합니다.

클릭했습니다.

컴 위에 뜬 글씨들.
그걸 친 사람의 마음을 느끼기 위해 난, 조금은 조급한 동작으로
스크롤바를 내리면서 눈을 고정시킵니다.

그리고… 놀랍니다.



    해에게


    눈 내리는 걸 한번도 본 적이 없다고?
    아하--- 그건 좀 문제가 있군.
    눈이라…. 산성눈 까짓거 봐 봤자지만, 너랑이람 근사할지도….

    그래서 말인데… 이번 방학, 서울 오지 않을래?
    나, 집 나온 건 알고 있지? 학교 근처에 자취방 얻은 거.
    방학 때도 집엔 안 들어갈 생각이야. 계절학기도 신청해 놨고….

    네가 오면 이 무료한 겨울을 혼자 지내지 않아도 될 것 같은데, 어때?
    어머니가 허락 안 하실까?
    너 오면 스키장도 데려가고, 여기저기 구경시켜 주고 싶은데…
    역시 무리한 제안일까?

    답멜 줘.
    네가 안 오면 내가 내려갈 거지만… 어쨌든.

    많이… 보고 싶다.


                                                                                      준언.
              




2. 19th, December I

가슴이 조심스레 뛰고 있습니다.

기차 안.
어둑한 차창에 엷게 비치는 내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 봅니다.

조금만… 조금만 기다리면, 꿈에도 그리던 얼굴을 만날 수 있다는 사실…
그 기대감이 너무나 황홀해 푹 자도 될 기차 안에서의 시간동안,
줄곧 말똥말똥한 눈을 하고 있었습니다.

지금, 준언형을 만나러 가는 중입니다.

엄마한테 며칠을 조른 끝에 겨우겨우 허락을 받아냈습니다.
그야 물론 걱정도 되시겠지요.
내가 지극히 정상적인 신체를 가지고 있다고 하더라도 망설일 텐데,
귀까지 안 들리는 엄마의 막내동이를 서울로 올려 보낸다는 거,  
맘처럼 쉽지는 않을 겁니다.

그래도 서울역에 준언형이 마중나올 거다, 건강하게 잘 지내다 올 거라고,
몇번이나 말하고 또 말해 결국 허락을 얻어 냈답니다.
엄마가 준언형에게 호감을 가지고 계신 것도
허락을 얻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하긴 누가 봐도 호감을 주는 모습을 하고 있는 형입니다.

훤칠하게 뻗어 올라간 키, 적당한 크기의 길게 찢어진 눈.
선명하게 솟아 근사한 형태를 그리고 있는 코,
약간 도톰하고 시원한 인상을 주는 입이 살짝 미소를 띄면
대부분의 사람은 그대로 녹아버릴 겁니다.

…나만 해도 그랬었으니까요.

처음, 그 어둑한 정고 안에서 문득 잠에서 깨어 형을 봤을 때.
열어 놓은 문 틈 사이로 가늘게 빛이 비쳐 와
그 늘씬한 그림자를 반쯤 감싸고 있는 걸 봤을 때…
그대로 심장이 멎는 줄 알았습니다.
저렇게나 근사한 아름다움을 지닌 사람이
정말이지 세상에 존재하고 있었구나…
진한 녹색 폴로셔츠에 아주 평범한 베이지색 반바지를 걸쳤을 뿐인데,
타고 나길 근사한 사람은 뭘 입어도 다른 것 같다고요.

- 거기서 뭐해?

입모양으로 알아 듣곤 깜짝 놀라 시선을 뗐습니다.  
정신없이 빨려 들어갈 듯 그를 쳐다 본 내 의식이 행여 들키지나 않았을까
두근거리면서.

그랬던 내가, 그 날 요트 타기가 끝난 후, 「같이 샤워」하자고
형이 물어왔을 때 당황했던 건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마치 내 마음을 읽고 있는 것 같아서.

젖은 폴로셔츠를 벗은 그의 상체가 너무도 탄탄한 역삼각형을 그리고 있는
걸 보곤, 질투와 동경이 반반씩 뒤섞인 감정에 동요하던 나였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사랑의 감정은 아니었습니다.  
아직 사랑이 되기엔 뭔가 부족하고 미성숙한…

그 땐 그랬습니다.



기차가 드디어 역에 도착했습니다.
옷가지며, 여러 필요한 것들을 넣은 큼직한 가방을 어깨에 메곤,
역에 내립니다.

개찰구까지 걸어가는 동안 심장의 고동은 점점 더 큰 소리를 내며
나를 달콤한 설레임으로 압박하고 있습니다.

못 본 사이, 형은 어떻게 변해 있을지…

그리웠습니다.
때론 너무도 그리워서 입술을 깨물고 참은 적도 있었습니다.

바다를 볼 때마다 요트를 다루는 그의 모습이 그대로  떠오르고,
저녁 놀을 볼 때마다 내 옆에 그가 앉아 있어
함께 그 광경을 공유하는 듯한 착각.

처음 헤어져, 무려 1년을 참고 다시 만난 그 해 여름.
그에게 뭔가를 줄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힘겹게 구화 훈련을 받은 1년이 지나, 다시 정고에서 그를 마주했을 때,
나는 정말로 행복하게 미소할 수 있었습니다.

사실은 형에게 1년 뒤에 만나자고 한 건
나와 그의 감정을 시험해 보기 위한 얄팍한 속셈도 있었지만…
그런 생각으로 참고 버틴 1년.
그 1년이 지나 그 앞에 섰을 때 난, 겨우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지금의 감정이 일시적이고 바래기 쉬운 것이 아니라,
아주 견고하고 강한 것이라는 사실을…
나… 그를 도저히 지울 수 없을 감정으로 사랑하고 있단 사실을.

그렇게 사랑하는 그의 모습이 시야에 비치기 시작해,  
난 믿을 수 없는 심정으로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그가 정말로 내 시야에 있습니다.

단정한 입술을 열어 희고 고른 이를 드러낸 채 환하게 웃으면서,
약간 날카롭고 길게 찢어진, 하지만 결코 사나워 뵈진 않는 눈을
따뜻한 느낌이 들 만큼 누그러 뜨린 채 환하게 웃으면서.

손을 흔드는 그 모습이 내 망막을 통해 시신경을 자극하고, 그리고
뇌로 전달돼 지금 이 기쁨이 현재의 것이라는 사실을 인식시켜 줍니다.
그리고, 그렇게 개찰구를 빠져 나온 날, 그는 그대로 끌어 안습니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따윈 의식하지 않은 채,
어디까지나 따스한 동작으로 끌어 안아주는 나의 그…
나의… 나만의… 준언형.

처음엔 그의 갑작스런 동작에 조금 당혹한 나지만
이내 그 당혹감을 행복으로 바꾸면서 그의 어깨에 내 얼굴을 묻습니다.

그러자 그는, 내 등을 툭툭 치곤 안 어울리게시리 얼굴을 발갛게 물들이곤
수화와 구화를 섞어 묻습니다.

" 피곤하지? "

으응- 하고 난 고개를 흔듭니다.

" 가자. "

그가 내 어깨에 얹힌 가방을 들더니 자신의 어깨에 올리곤
내 눈을 들여다 봄과 동시에 내 볼을 툭 하고 건드리며 말합니다.
응, 하고 고개를 끄덕이곤 난, 그의 긴 다리에 내 걸음을 맞춰
걷기 시작했습니다.

이것은 현재…
그가 옆에 존재하는 이것은 꿈이 아닌 현실.

그는… 나의 그는… 분명 이 순간 내 옆에 존재하고 있습니다.





3. 19th, December II

신촌의 작은 원룸.
형이 사는 곳은 의외로 작은 원룸이었습니다.

형의 집이 굉장한 부자란 사실을 익히 알고 있기에 이보다는 훨씬 근사한…
말하자면 오피스텔 같은 곳에 살 줄 알았건만, 의외로 그가 지내는 곳은
두사람이 지내기에도 빠듯해 뵈는 작은 원룸이었습니다.

입구에 작은 욕실이 있고,
그 맞은 편에는 정말 좁은 부엌이 위치해 있습니다.
그리고 안으로 들어가면 침대와 책상이 놓여 있는 방.
놀랍게도 남자 혼자 사는 방 같지 않게
차곡차곡 정리된 모양새를 하고 있는.

" 너 온다고 청소 좀 했다, 어때? "

방안을 두리번거리는 날 툭 치더니 - 그렇게 하지 않으면
내가 그의 동작이나 입모양을 살필 수가 없으므로 -  
형이 수화를 섞어서 말합니다.

그는 아직 수화가 능숙하지 않기 때문에
대사 전체를 수화로 바꾸지는 못하고 문장 전체 중 단어 몇개만 골라
수화로 표현합니다.  
예를 들어 「청소」라든지 「어때?」같은 단어.

난 엄지 손가락을 들어 보이면서 싱긋 웃었습니다.
밖에서 막 식사를 마치고 온 참입니다.
형이 근사한 스테이크를 사 주었습니다.

많이 먹으라며 자기 것까지 썰어 밀어준 그를 보고
난, 웃지 않을 수 없었습니다.
그렇게 조금만 먹어도 괜찮을 리 없잖아요?
키가 큰 형이 나보다 칼로리도 많이 소모할 텐데,
그거 조금 먹고 배부를 리가 없다고 생각하고,
한편으로 날 위한 그의 배려에 가슴이 찡하고 울리는 것 같았습니다.

형은 처음부터 그랬습니다.
고작 아르바이트생일 따름인 날 불러서 비싼 요리를 대접해 준
형이었습니다.

형은 대학생이 된 지금까지 키가 자라는 것 같다고 합니다.
물론 그가 자란 것만큼 내 키도 꽤나 자랐기 때문에
난 잘 못 느끼겠지만요.
형은 2cm 정도 큰 것 같고, 나도 3cm 정돈 자란 것 같습니다.
형은 정말 큰 키지만, 나도 아주 작은 키라고까진 할 수 없습니다.
하지만 체구는 판이하게 다릅니다.

형은 군살은 전혀 없지만 타고 나길 어느 정도 근육질의 몸매를 지닌 데다,
워낙에 여러 스포츠를 즐겨선지 탄탄하고 근사한, 남자다운 몸매를
하고 있습니다.
아마 보통의 여자들이라면 그런 형의 뒷모습을 - 앞모습은 말할 것도 없지만
- 보기만 해도 황홀해 하겠지요. 남자인 나까지 끌어당길 듯한 그 모습에.

하지만 나는 그에 비해 너무 야리야리하니 일자형 체구를 하고 있습니다.
어려서 그런 건지, 아직까지는.

" 아, 하고 싶으면… 샤워해. "

욕실을 가리키며 그가 말하는 것이 보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준언형의 얼굴은 조금 어색한 뭔가가 깃들여져 있어,
난 고개를 갸우뚱거립니다.

그리고 그때서야 그의 어색함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조금이나마 깨닫곤
희미하게 웃고 맙니다.

형의 말대로 욕실로 들어가 샤워물을 틉니다.
보일러를 틀어 데운 미지근한 물줄기가 약간의 찬물이 나온 뒤에,
시원하게 뿜어져 나옵니다.

처음 만났던 그 날, 형이 말했습니다.

- 같. 이.  샤. 워. 하. 겠. 냐. 구.

- 남자끼린데 뭘 그래, 임마.

아주 천연덕스런 낯빛으로요.
그 때 고개를 흔들었던 건 나였습니다.  
당황해서 시선을 피했던 건 나였습니다.
완벽한 역삼각형을 그리고 있는 그 등을 보다가 당혹감에 시선을 피했던 건
분명 나였습니다.

하지만… 지금…
형도 그 때의 나와 마찬가지로 당혹하고 있단 사실을 깨닫고,
난 저도 모르게 엷은 미소를 흘리며
옷을 벗고 뜨뜻한 물줄기 아래로 몸을 갖다 댑니다.

형이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 지 어렴풋이 알 수 있기에
조금은 어색하니 쑥스럽지만, 그것의 한 몇십배 정도 진한 행복감이
더운 물에서 흘러 나오는 열기와 더불어 몸을 휩싸기 시작합니다.

그. 도.
나. 를.
의. 식. 하. 고.  있. 어.
나. 만. 큼. 이. 나.
나. 만. 큼. 이. 나.

기쁩니다…
하지만…
하지만…….







[ 제 2 편 ]





4. 19th, December III

어색한 침묵이 흐릅니다.

형의 침대에 누워 있는 지금… 이 좁은 원룸을 지배하는 묘한 공기에
호흡조차 버거운 것을 느끼고 있는 중입니다.
아마 그건… 침대 아래 요를 깔고 누운 형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분명… 피곤했었는데…
그 피로는 어딘가 먼 곳으로 날아가 버리고 작은 공간 속에
나와 형만이 존재하고 있음을 절실히 체감하고 있는 중입니다.

난 눈을 감고 있지만, 정신은 또렷이 깨어 있습니다.

" ……. "

형이 내 반대 방향으로 몸을 돌리는 것이 느껴집니다.
똑바로 누워 천장을 보며 자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그는 괴로운 것입니다.
그렇게 괴로워 하면서도 그는 내 곁으로 오려 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좀처럼 내게 손을 대려 하지 않습니다.
내 쪽에서 그를 향해 손을 뻗지 않는 한, 그는 나에게 접촉하지 않습니다.

아마 날 또 다시 상처입힐까 두려운 것일 겁니다.
아마… 그런 것일 겁니다.

실은 나도 두렵습니다.

왜일까요… 난 분명히 형을 사랑하고 있는데, 절실하게 원하고 있는데…
그 한편으로 어찌할 수 없는 두려움이 내 안에 존재하고 있어
그를 무의식 중에 거부하게 만듭니다.

그 날…
그 비오는 밤의 사건.

실은 처음 그에게 입술을 허락했을 때부터
내 몸은 온전히 그의 소유나 다를 바 없는 것인데,
그가 몸에 키스하도록 놔둔 건 나 자신인데,
그에게 손을 뻗어 내 쪽으로 끌어당긴 장본인도 나 자신인데,
책임의 최소 절반은 나에게 있을 것인데,
난 형을 어쩔 수 없이, 뻔뻔하게, 두려워 하고 있는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그는 그것을 너무나 잘 알고 있기에 내게 일체 손을 대지 않습니다.

아팠습니다…
그래요… 지독히 아팠습니다.
예상치 못한 데서 온 쇼크 때문에 더욱 아팠는지도 모릅니다.

솔직히 잘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 때껏, 그런 식으로 몸을 합칠 수도 있단 사실에 대해
전혀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알게 되었을 때,
참담한 아픔이 내 몸과 마음을 때려 왔습니다.

난 남자입니다.
형도 남자입니다.

형이 좋아… 좋다고 생각하면서 두사람이 남자란 지독한 현실에
눈뜨게 된 것은 어리석게도 그날 밤이 처음이었습니다.

내장이 비틀리는 듯한 감각이었습니다.
몸의 내부가 한번 심하게 쥐어 짜였다가 겨우 제자리로 돌아온 듯한
극심한 아픔…
아마 겪지 못한 사람은 결코 알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을 고통.
저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 나오고 솔직히 그런 고통 속에
어떻게 저택을 빠져 나와 빗속을 걸어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는지,
전혀 기억하고 있지 못합니다.

다음 날, 전날 바다에 빠진 데다 빗속을 걸어온 탓에
감기 몸살까지 걸린 몸으로 정신없이 앓으면서도 난,
온몸을 찌르듯이 덮쳐오는 통증 속에 확실한 한가지를 깨닫고선
입술을 깨물고 소리 죽여 울었습니다.

몸이 아파서 우는 것은 이미 아니었습니다.
마음이, 정신이, 어쩔 수 없을 만치 지독하게 아프고 아파
버틸 수가 없었습니다.

나도 남자고 형도 남자라는 사실에 눈뜨기 시작하자
다른 현실도 비치기 시작했던 겁니다.  

내가 귀가 들리지 않는… 보통 사람만큼도 못한 존재란 사실과,
우리 집이 형네 집과는 비교도 안될 정도로 가난하단 사실,
그리고 언제까지고 계속 한 자리에 머무를 수 밖에 없는 나와 달리
모든 것이 갖추어진 형은 자꾸만 앞으로 앞으로 나아갈 사람이란 사실…
그와 내가 하늘과 땅만큼이나 먼 존재라는 사실.

한동안 푸른 하늘과 바다만 응시하고 자란 어린 나는…
그 날 오래간만에 강도 높은 폭풍우를 겪었던 것입니다.
그 폭풍우는 너무나 큰 위력을 지닌 것이어서  
오랫동안 난 그 영향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말았습니다.

실은… 지금도 두렵습니다.  
과연 내가 형에게 있어 가까이 있어도 괜찮을 존재인지 잘 모르겠습니다.

내 주제에, 나란 하찮은 녀석이, 이런 멋진 사람과 함께 할 수 있는
자격이 있는 걸까요…?

어느 샌가 잠든 듯한 준언형의 평온한 얼굴을 내려다 보며
난 조그맣게 한숨을 내쉬었습니다.





5. 20th, December I

형과 나는 간단히 빵으로 아침을 때운 후,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남들 눈엔 사이좋은, 그저 보통의 선후배 정도로 비칠 지도 모르겠지만
두사람은… 「데이트」를 하기로 했습니다.

겨울치곤 꽤나 포근한 날씨입니다.

" 이래 갖고 눈내리는 걸 보여 줄 수나 있을지 모르겠어. "

라고 준언형이 아침에 말했을 정도로 포근한 날씨였습니다.

아직 미처 내지 못했다는 마지막 과제물을 과 사무실에 제출한 형과 나는
학교 정문을 빠져 나가 죽 이어진 인도를 걷기 시작했습니다.

방학이 되어선지, 학교 앞 죽 이어진 길을 걷고 있는 학생들은
모두 여유로운 표정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런 수많은 인파 속에 익명의 두사람이 되는 것도
퍽 기분좋은 일이었습니다.

이럴 때, 난 새삼스레 실감합니다.
내 옆에 서 있는 이준언이란 사람이 나 뿐만이 아닌 다른 사람들에게도
얼마나 매력적인 모습으로 비쳐지고 있는 가를.

길을 걸어가면서 난 지나치는 많은 여자들 - 때론 남자들도 - 이
연신 준언형에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고 돌아 보는 것을 알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정작 당사자인 준언형은 전혀 의식하지 못하는  듯 - 그런 척
하는 건지도 모르지만 -  앞만 보고 걷다가 문득 날 기분좋게 내려 보며
잠깐 말을 걸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리곤 합니다.
그런 일련의 사소한 동작까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매력적인 사람입니다, 그는.

유난히 늘씬한 키는 그렇다 치더라도
샤프한 인상을 풍기는 갸름한 얼굴에 아주 단정히 박힌 이목구비,
단단한 느낌을 주는 어깨에서 허리로 이어지는 라인이며,
기장이 맞는 게 과연 있을까 싶을 정도로 길게 뻗은 다리까지
눈길을 끌 요소는 전부 갖고 있는 사람입니다.

거기에다 자라난 환경을 그대로 보여 주는 듯, 어딘지 모르게
부티가 풍기는 이미지가, 알고 보면 비싼 것이겠지만 언뜻 봐선
별 특별할 게 없을 진회색 브이넥 스웨터에 흐린 회색 면바지, 그리고
검정 반코트를 걸쳤을 뿐인 그의 차림을 무척이나 돋보이게 만듭니다.

" …응? "

그가 내 시선을 느꼈는지 고개를 돌려 날 바라 봅니다.  
난 그 아무 것도 모르는 듯한 시선에 되려 당황해 화들짝 고개를 흔들곤  
다시 정면으로 시선을 돌립니다.

그리곤 침묵….
간혹 얼굴만 마주 볼 뿐, 두사람은 한참동안 말없이 걸었습니다.

처음엔 수화로 몇마디 얘기하곤 했지만 걸으면서 손을 놀리기
영 불편한 탓일까 언젠가부터 대화가 뚝 끊겨 버렸던 겁니다.
그건 또 그대로 또 괜찮았습니다.

서울엔 전에도 와 본 적이 몇번 있지만,
이렇게 느긋이 걸어 본 적은 별로 없던 것 같습니다.
기분이 좋아서 난, 그저 걷고 또 걸었습니다.
그것도 괜찮았습니다.

……?

정신이 들었을 때, 난 옆에서 줄곧 보조를 맞추며 걷고 있던 형의 인기척이
뚝 끊겼음을 깨닫고 당황하며 주위를 두리번거렸습니다.
그리고 바로 뒤에서 형이 누군가와 이야기를 하고 있음을 깨달았습니다.  
형과 대화하는 사람은 엷은 금발을 한 외국 남자였습니다.

내가 머뭇거리면서 옆으로 다가가니,
형은 미안하다고 입 모양으로 말하면서 눈짓하곤,
손가락으로 방향을 그려 보이면서 외국인에게 열심히 뭔가를 설명했습니다.

외국인이 고맙단 듯 인사하자 형은 싱긋 웃으면서 손을 들어 보이곤
조금 떨어진 곳에 서 있던 내 옆으로 와서 어깨를 쳤습니다.

" 누구, 에요? "

나는 구화와 수화를 동시에 써서 말했습니다.
형 역시 입으로 소리를 내는 동시에 수화를 섞어서,
「미국 사람. 길을 물어 봐서 가르쳐 줬어」
라고 대답했습니다.

" 영어, 도, 잘, 해요, 형? "

난 눈을 동그랗게 뜨며 이번엔 구화만으로 물어 봤습니다.

형은 멋적은 듯 싱긋 웃더니,
「아, 그럭저럭. 미국에서 5년 정도 살았으니까」
하고 이번엔 손가락 다섯개를 펼치면서 말합니다.

그러더니 덧붙였습니다.

" 누구나 5년 정도 살면 어느 정도 말할 수 있… "

하다 형은 문득 말을 멈췄습니다.  

깨달은 겁니다.

아무리 미국에 5년 정도 산다 하더라도
결코 「영어를 말할 수」 없는 사람도 있단 사실을.
한국말도 겨우겨우 버겁게 발음하는 사람이 5년이든 10년이든  
미국에 산다고 해서 영어를 유창하게 말하게 될 리 없단 사실을.

" ……. "

순간, 번화한 거리 중 우리가 선 주위에만 썰렁한 공기가 감돕니다.
그 공기가 너무 어색해서 난 생긋 형에게 웃어 보이곤 손을 내밉니다.  
쑥스러운 듯 미안한 듯 내 손에 자신의 것을 얹은 형의 손을 잡고
난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습니다.

하지만… 마음은 그렇게 편치 않았습니다.  

외국어까지 유창하게 말할 수 있는 형과…
한국말도 제대로 말하는지 모를, 아니 분명히 더듬대며 발음할 나.
너무나 안 어울린다고 무심코 생각하게 됩니다…
어쩔 수 없이, 침울해집니다….

" ……? "

그리곤 뭔가를 발견하고 걸음을 멈춰 버립니다.
우울한 기분에 쐐기를 박는 그것은 큰 레코드 가게였습니다.  

윈도우에 큼지막한 포스터가 붙어 있습니다.
유명 가수의 캐롤송 광고인 모양입니다.
산타클로스 복장을 한, 꽤나 미인인 듯한 여가수가 미소짓고 있습니다.

준언형도 내 옆에 멈춘 채 난감한 표정으로
포스터와 날 번갈아 들여다 봤습니다.
그런 그를 문득 올려다 보며 말합니다.

" 들어, 가도, 돼, 요? "

준언형은 퍽 당혹스런 듯 날 뚫어지게 들여다 보더니,
입술에 조금 힘을 주면서 고개를 끄덕였습니다.

레코드점 안은 역시나 북적거리고 있었습니다.
입구 쪽에 설치된 특별코너엔 아까 포스터에서 봤던 여가수의 CD가
놓여 있었습니다. 아마  특별히 싸게 파는 품목인 모양입니다.

사도 소용없는 것…
사 봤자, 소용없는 것…

압니다.
알고 있습니다.

그런데…

저쪽 앞, 머리 긴 여자애가 서 있는 것이 보였습니다.
잘 살펴 보니 그녀는 헤드폰을 머리에 쓴 모습이었습니다.
아마 뭔가 듣고 있는 모양입니다.

그런 그녀 옆에 남자친구인 듯 보이는 대학생 남자가 다가와
음악에 몰입 중인 그녀를 툭, 하고 건드렸습니다.
그녀가 화들짝 놀라 그쪽을 쳐다 보고 웃더니,
헤드폰을 벗어 상대에게 씌워 줍니다.

남자친구는 고개를 약간 옆으로 기울인 자세에서
헤드폰을 낀 채 가만히 서서 음악을 듣더니 잠시 후,
헤드폰을 벗으며 여자친구에게 기분좋게 고개를 끄덕여 보였습니다.

그러더니 뭔가를 얘기하며 두사람은 내쪽으로 걸어왔고
여자아이가 내 앞에  놓인 여가수의 CD를 두장 집어 들었습니다.  
남자친구가 CD를 달라고 손을 내미는 것이 보였지만 그녀는
그런 남자친구의 배를 살짝 치면서 생긋 웃곤 그대로 계산대로 걸어갑니다.
그러더니 계산을 끝내고서야 남자친구에게 들고 있던 두장 중
한장의 CD를 미소지으며 건네 주었고, 남자친구는 조금 쑥스런 듯 웃으며
여자친구의 어깨를 감싸, 둘은 레코드점 밖으로 걸어 나갔습니다.

툭툭.
옆에서 내 어깨를 두드리는 걸 느끼고 난 큰 키를 올려다 보았습니다.
준언형이 턱을 으쓱하며 나가자는 시늉을 합니다.

난 손을 들어 잠깐, 하는 몸짓을 해 보인 후,
앞의 진열대에서 그 여자 가수의 CD를 집어 들었습니다.
그리곤 형을 쳐다 보지도 않은 채, 계산대로 걸어 갑니다.

" ……! "

형이 당황한 듯 날 쫓아 와 내 어깨를 붙들었지만,
난 그걸 무시하고 계산대 뒤의 점원에게 CD를 내밀었습니다.
형이 옆에서 뒷주머니에 있던 지갑을 황급히 꺼내기도 전에
내 지갑을 열어 돈을 지불합니다.
그리곤 비닐 봉지 안에 담아 준 CD를 봉지 채, 형에게  내밀었습니다.

어안이 벙벙한지 형은 처음엔 우선 눈썹을 가만히 찌푸린 모습을 합니다.
그러더니 내가 계속 한 자세로 CD를 내밀고 있자, 그제서야 손을 들어
「나한테…?」하고 검지 손가락으로 자신을 가리켜 보이는 겁니다.

그 모습이 왠지 모르게 사랑스럽게 느껴져 난 입끝을 올려 가만히 웃곤,
고개를 끄덕이다 문득 생각나서 걱정스럽게 물어 봤습니다.

" 있어, 요…? "

" 아,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

형이 웅얼거리는 것처럼 말해, 그 입모양 만으론 정확히 무슨 말을 하는지
알아 들을 수 없었지만 대충 그렇게 말한 것 같아, 계속 미소를 유지한
자세로 다시 한번 CD를 내밀어 보이니, 형은 기쁜 것 같기도 하고
곤란한 것 같기도 한 묘한 표정으로 CD를 받습니다.

" 고. 마. 워. 잘… 들을께. "

형은 이번엔 찬찬히 수화를 하면서 이렇게 말하곤
무슨 큰 은혜라도 받은 사람처럼 정중히 내게 고개를 숙여 보입니다.

그 모습이 귀엽기도 하고 우습기도 해,
난 손을 저으며 픽, 웃고 말았습니다.





6. 20th, December II

그렇게 거리를 무작정 걷고 다리가 아파 들어간 영화관에서 영화를 보고
- 자막이 달린 외국영화였습니다 - 밥을 먹고…
하루종일 그렇게 보내고 집으로 돌아 왔습니다.

내가 먼저 샤워를 하고 나오자
형도 찌푸둥한지 샤워를 하러 욕실로 들어갑니다.

그 뒷모습을 무심히 보다가 타월을 젖은 머리에 문지르면서
침대에 앉은 내 머릿 속에, 형을 처음 만난 그 날의 일이
또 다시 떠올랐습니다.

난 좀처럼 땀이 나지 않는 체질입니다.
왠만한 태양빛 아래선 수분 따윈 나오지도 않는 그런 체질입니다.
그런데 그 날, 형이랑 처음으로 호퍼를 탄 그 날은…
왠지 몸이 화끈거려서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좀처럼 하지 않는 행동, 즉 간이 샤워장에 들어갔던 겁니다.    
달아오른 얼굴과 마음을 식히기 위해서.

그런데… 내가 샤워하는 모습을 형이 보게 되리라곤 생각지도 못했습니다.
정말 당황해 제대로 물을 닦지도 못하고 나온 내 머리를 타월로 문질러 주던
그 날의 그.

그 큰 키에서 풍겨 나는 향긋한 비누 냄새가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날 자극해, 행여 두근거림이 들킬까 그에게서 떨어지려 했었습니다.
혹 내 이 말도 안되는 감정을 알아차릴까… 두렵고 두려워서,
호흡조차 힘들어져서 어떻게든 그와 떨어져 있고 싶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래서, 그가 내 턱을 잡아 나랑 눈을 맞췄을 땐
그대로 몸이 굳어서 움직일 수도 없었던 겁니다.

그렇지만 그런 긴장 속에서도 어렴풋이 느껴지는 한가지 감각…
그것은 행복감이었더랬습니다.

행복했습니다… 분명히.



난 그 때를 생각하곤 피식 웃다가,
문득 형 책상 옆에 작게 자리잡은 책꽃이로 시선을 돌렸습니다.
대부분은 전공서적이었지만 그 중간에 도드라지는 것이 하나 보임을 깨닫고
무심결에 걸어가 그것을 끄집어 냈습니다.

그 책은 자줏빛 천으로 싸여진 묵직한 앨범이었습니다.
조금쯤 호기심이 발동해 괜찮겠지… 하는 마음으로
그 책 표지를 열어 봤습니다.

그리곤 웃고 말았죠.

첫 페이지엔 큰 눈을 동그랗게 부릅뜬 통통한 아기가 천에 둘러 싸인 채
이쪽을 노려 보고 있었던 겁니다.

형의 아기적 모습.
지금은 저렇게 훤칠한 모습을 하고 있는 그에게
이런 시절이 있으리란 생각을 미처 못했었습니다.

아… 정말… 정말… 귀엽습니다.
어릴 때는 꽤나 통통했었군요. 쿡쿡.

앨범을 넘기면서 조금씩 성장하는 아기의 모습에 감탄하고 또 즐거워 하며,
난 정신없이 빠져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그런 내 눈을 붙든 사진이 있었습니다.

그것은 세사람의 사진이었습니다.
두세살 정도 돼 보이는 어린 준언형을 가운데 두고
미소지으며 서 있는 두 여자의 모습이 그 사진 속에 있었습니다.

세사람은 정원 한가운데 서 있는 모습이었습니다.  
두 여자는 형을 가운데 두고 있었지만 그 느낌은 서로 아주 달랐습니다.

한명은 굉장한 미인인데, 자세히 뜯어 보니 형과 어딘가 윤곽이 닮아 있어
금새 형의 어머니임을 알아차릴 수 있었습니다.
놀랄 만큼 젊어서 애엄마라곤 도저히 느껴지지 않을 정도의 외모였지만,
그러나 어딘가 차갑고 도도한 인상.
그리고, 완벽하다 싶을 정도로 깔끔하게 메이크업을 하고 있었습니다.  

반면에 다른 한명은 아주 평범한 인상을 한,
조금 살집이 잡힌 작은 여인이었습니다.

화장은 물론 전혀 하지 않았고,
형의 어머니가 입은 나긋하고 고급스러워 뵈는 원피스와 확실히 대조되는
긴 녹색 치마를 입고 있어 확실히 촌스러운…

그런데… 그 표정이 사람을 끄는 데가 있었습니다.
부드러운 인상…  
인생을 따뜻하게 보는 시선이 그대로 느껴지는 차분한 눈웃음…
그리고 아주 포근한 느낌을 주며 가늘게 뜬 그 눈은
어린 준언형을 한없이 사랑스런 시선으로 보고 있습니다.

( 이상해… )

뭔가 이상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리고 사진을 다시 한번 찬찬히 뜯어 본 난,
그제서야 왜 이런 느낌을 받았는지에 대해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세명이 나란히 앉아 있었지만,
형이 사이좋은 듯 몸을 가까이 맞대고 있는 사람은 친엄마 쪽이 아니라
촌스러운 차림을 하고 있는 땅딸막한 아주머니란 사실.

" ……?! "

책상 앞에 앉아 있다, 인기척을 느끼고 뒤를 돌아 보니 샤워를 마치고 나온
형이 조금 놀란 눈빛을 한 채 날 내려다 보고 있었습니다.

눈이 마주치자, 책상 앞으로 걸어 와
내가 보고 있던 페이지를 자신도 들여다 봅니다.

" ……. "

그 사진.
세사람의 사진으로 눈을 보낸 형의 안색이 조금 어두워진 걸
그 순간… 난 분명히  볼 수 있었습니다.

물어도 될까… 망설여졌지만 참지 못하고 입을 열고 말았습니다.
…아주머니를 가리키면서.

" 누, 구, 에요…? "

말이 잘 나오지 않아 목구멍의 진동을 어색하게 느끼며
겨우겨우 소리를 내니, 형은… 아직도 굳어 있는 표정을 풀지 않곤
날 뚫어지게 쳐다 봅니다.

" ……? "

무거운 시선에 당황해 고개를 갸웃거리자,
형은 무뚝뚝한 표정으로 자줏빛 앨범을 덮어 버렸습니다.

조금 차가운 몸짓…
굳은 시선…

확실히는 모르겠지만 내가 괜한 걸 물어 봤다는 것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을 정도로, 그렇게…

" 아…! "

형은 자신이 한 행동을 그때서야 깨달은 것처럼 놀라 나를 보더니,
아까의 굳어 있던 표정을 어떻게 바꿔야 할 지 모르는 것처럼
입을 꾹 다물었다가 어색하니 웃어 보였습니다.

그런 그의 태도에 더욱 미안해진 나도 약간 입술만 들어 올려,
미소를 짓고 맙니다.

그리고, 결국 내 질문은 어색함 속에 그대로 묻혀지고 말았습니다.







[ 제 3 편 ]





7. 21th, December I

12월의 아침은 더디게 시작됩니다.
그 더디게 찾아 오는 아침 햇살이 방안을 점령하고서 한참 뒤에서야,
난 뭔가 구수한 냄새가 내 후각을 간지럽히는 걸 느끼고 눈을 떴습니다.

" ……? "

좋은 냄새가 납니다.
뱃속 깊은 곳에서부터 식욕을 끌어 올릴 정도의 기분 좋은 냄새가.
여닫이 문을 사이에 두고 저편에 위치한 부엌에서 나고 있습니다.

( 형…? )

난 파자마를 걸친 몸을 일으켜, 여닫이 문쪽으로 향했습니다.

" 어, 일어났어…? "

형이 있습니다.
여닫이 문을 열자마자 보이는 좁은 부엌에서 형이 뭔가를 젓고 있었습니다.

아까부터 내 코를 자극하던 것은, 다름아닌 카레 냄새.  
그가 국자로 휘젓고 있던 그것은 카레였던가 봅니다.

" 오늘 나가면 내내 휴게소에서만 먹어야 하니까…
   아침을 좀 든든히 먹어야 할 것 같은데,
   할 줄 아는 게 이 밖에 없어서…. "

형이 머리에 손을 대면서 어색하게 웃어 보입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스키장에 가기로 했었죠.
나가기 전에 식사를 든든하게 하자는 뜻인가 봅니다.

나는 그만 웃고 말았습니다.
눈 앞에 펼쳐진, 조금은 믿을 수 없는 풍경에 우선 당혹스러워,
그리고 이어 내 가슴에 서서히 퍼져 나가는 정체불명의 기쁨에,
그저 웃을 수밖에 없습니다.  

큰 키의 형이 몸을 구부린 채, 국자로 카레를 젓고 있는 광경…
어색하고 낯설면서도, 어딘가 정겹고 사랑스러운….

( 아아… 나, 좋아… 이 사람이, 정말 좋아…! )

순간, 그런 생각이 막을 틈도 없이 머리를 치고 올라 와,
난 연한 파도가 내 안으로 밀려 오는 듯한 싸아한 감각으로 인해,
저도 모르게 형 가까이로 다가서고 있었습니다.

그 편편하고 곧은 등에 머리를 얹고… 그리고, 눈을 감아 버립니다.

( 좋아… 정말 좋아하는 거, 알아요…? )

너무나 아름다운 사람.  
너무나 근사해서, 나 따윈 올려다 보지도 못할 것 같던 그 사람이
지금 내 옆에 선 채, 나를 위해 뭔가를 하고 있단 사실.

믿을 수 없을 만치 투명한 환희의 감정이 몸의 혈관을 두루 돌아  
자신을 치고 올라 옵니다.
이 기쁨이 영원토록 사라지지 않기만을 빌며
난 그의 등에 나를 가만히 기댑니다.

" ……. "

그가 돌아 봅니다.
그가 날 돌아 보곤, 내 어깨를 잡고… 조용히 끌어 당깁니다.
처음부터 그래야 했던 것처럼 난 그에게 당겨져 가만히 그 가슴에 안깁니다.

날 안은 채, 그는 내 이마에… 그리고 감고 있는 눈꺼풀에
살며시 입술을 포갭니다.

눈에 하는 키스는 널 언제까지나 지켜 줄게… 라는 존중의 표시.
그는 무언으로, 행동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 그의 따뜻한 눈동자를 보고 싶어,
난 감았던 눈을 뜨고 그를 내 시야에 끌어 당깁니다.
눈동자… 감정을 전하는 그 영원의 공간 속에,
다른 그 누구도 아닌 내가 비치고 있음을 깨닫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정적.  
귀가 들리지 않아서가 아니라, 그것은 다른 모든 존재를 정지하게
만들 정도의 힘을 지닌, 본래부터의 고요함입니다.

그 정적 속.
마치 그래야 하는 것처럼 우리의 입술은, 깊숙히… 겹쳐집니다….





8. 21th, December II

형의 지프차에 탄 건 정말 오랜만의 일.
차 뚜껑 위에 형의 스키를 얹고, 스키장으로 가고 있는 중입니다.
스키장에 한번도 가 본 일 없는 나로선 솔직히 기대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런데… 차가 생각보다 막힙니다.
거의 줄을 서 있는 수준입니다.
준언형은 초조할 때의 버릇인지, 핸들을 톡톡 손가락 끝으로 두드리면서
이맛살을 찌푸린 채 앞을 응시하고 있습니다.

그런 형의 기분을 풀어 주려면 어찌해야 할까 하고 난, 두리번거리며
차 안을 둘러 봤습니다.
뒷자리에 CD 케이스가 있음을 발견하곤, 몸을 길게 뻗어 집었습니다.
케이스 속에 내가 산 캐롤도 있는 걸 보고 그만 기분이 좋아집니다.

" ……? "

형은 무슨 일이냔 듯한 표정을 짓다, 내가 들고 있는 CD를 보더니
엷게 미소지었습니다.

" 들어, 봤어, 요? "

이럴 때면 구화를 배우길 정말 잘했단 생각이 절로 듭니다.
준언형의 운전을 방해하지 않고 내 의사도 표시할 수 있단 사실이  
너무 기쁩니다.
내 동작을 보지 않고도 형이 내가 뭘 말하는지 알 수 있단 사실.

형은 고개를 저었습니다.
난 틀게요, 하는 듯 다시 한번 그 CD를 흔들어 보이곤
형의 스테레오에 CD를 집어 넣었습니다.

차는 작년과 마찬가지였지만 새로 교체한 스테레오 만은
정말이지 근사합니다.

음악이 흘러 나옵니다.
알 수 있습니다.
귀로 들리진 않아도, 첫 곡이 무척이나 경쾌한 음악이란 것만은
짐작할 수 있습니다.

형을 쳐다 보니, 그는 내쪽으로 고개를 돌려 미소지어 보이곤
오른손을 내 머리 위에 얹어 머리카락을 흐트립니다.

---고맙다.
정말, 고맙다.

그런 뜻입니다.  
말은 하지 않아도… 그래요, 말하지 않아도… 알 수 있습니다.
형이 뭘 말하고 싶어하는지… 들리지 않아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아니, 들리는 것 이상의 뭔가를 느끼고 파악할 수 있습니다….

그래도 조금은 허전합니다.
음악의 아름다움이 어떤 건지 짐작도 할 수 없는 나 자신…
아무리 노력해도 형과 함께 멜로디를 공유할 순 없단 사실이
조금… 아주 조금… 아픕니다.

난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입니다.
아마 내가 무겁게 호흡하는 소리가 들렸는지,
형이 날 쳐다 보는 시선이 느껴지고… 그리고 이어,
길지만 단단한 마디를 지닌 손가락이 내 손등 위로 뻗어 옵니다.

" ……. "

형을 봅니다.
더 이상 날 응시하지 않은 채, 입끝을 살짝 올리곤 앞만 응시하고 있는
그는 나의 동작에 반응하는 대신, 내 손을 잡고 있는 자신의 손바닥에
힘을 줍니다.

그리고… 나도 고개를 돌리고… 웃고… 그리고,
손바닥을 뒤집어 그의 손바닥과 내 손바닥을 맞닿게 합니다….

두사람의 손바닥은 여느 때보다 조금 뜨거워, 난 윈도우를 살짝 내립니다.

차창 밖으로부터 들어 온, 조금쯤은 흐려야 할 겨울 공기는 지금 이 순간,
기대 이상의 청명함을 지닌 채, 우리를 감싸고 있습니다.

미소가 흐릅니다.

…행복합니다.
…행복합니다.





9. 22th, December I

어제는 저녁 늦게나 되어서야 도착할 수 있었던 탓에
스키고 뭐고 피곤에 지쳐 저녁만 먹고 자기로 했고,
실제로 세상 모르고 곯아 떨어지고 말았습니다.
덕분에 아침 일찍 일어날 수 있었지만요.

" 전혀 타 본 적 없다 그랬지? "

끄덕.

사람들이 북적거리는 스키장.
전날 밤 눈이 왔던 지라, 약간 쌀쌀하니 스키 타기엔 최적의 날씹니다.

짙은 청보라색 스키 점퍼를 걸친 준언형은 여전히 근사하게 보입니다.
하지만, 형이 중학교 때 입었다던 푸른색 스키복이 영 어색한데다,
무거운 게 달린 발의 무게를 지탱하는 게 고작인 난 그저 서 있을 따름.

" 걷는 것부터 하자. 자, 날 봐.
   그냥 나가면 미끄러지니까 이렇게 모서리로… "

형이 꼭 붙들고 있던 내 손을 놓고 앞서 나가면서 시범을 보입니다.
전에 볼링도 이런 식으로 배웠지만… 형은 유능한 강사입니다.
쉽게 가르쳐 주고 참을성 있게 돌봐 줍니다.
이렇게 공짜로 배우는 게 어쩐지 좀 미안할 정도로 말이죠.

[ 해 볼게요. ]

수화로 말하곤, 저편에서 미소짓고 있는 준언형이 아까 보여줬던 것처럼
걷기 시작했습니다. 조심스럽게 한발 한발… 형이 있는 곳으로 갑니다.


형이 서 있는 자리…
그가 선 저 장소로 가고 싶어……

나, 형이 좋아…
언제까지고 그 옆에 있어도 되는 걸까?
그래도 정말 괜찮은 걸까…?

준언형… 준언형… 준언형…
나… 정말 형이 좋아요…
좋아… 좋아해요… 형…

떠나지 않을 거죠…?


" 잘 했어…! "

형이 수화를 하면서 자기 옆까지 온 내 머리를 기쁜 듯 쓰다듬습니다.

" 정말 잘하는구나. 언제나 놀라게 돼.
   그럼 이번엔 미끄러지는 방법을 가르쳐 줄께. 자, 봐. 무릎. "

무릎을 툭 치면서 날 쳐다 봅니다.
입모양만으로도 잘 알아들을 수 있도록, 날 뚫어지게 보면서
천천히… 천천히… 설명합니다.

" 무. 릎. 이. 가장. 중. 요. 해. …알겠지? "

끄덕.

" 가장 기본적인 건… 자, 봐…
   이렇게… 한 무릎을, 구부렸다, 피는, 거야. "

응…?
잘 모르겠어요, 형.
한번 더.

" 좋아, 다시 보여 줄게. "

알 수 있을 듯도 해…
이렇게… 이렇게…?

형을 따라 계속 연습했습니다.
조금씩 익숙해져 가는 듯도 합니다.
아직 감은 확실히 안 오지만 그럭저럭…

" 잘했어. 이야… 하루만 연습하면 나보다 더 잘 타겠는데? "

형이 기분좋게 미소합니다.
그러더니 내 어깨를 툭 쳤습니다.
내가 얼떨떨하니 고쳐 보자, 고개를 으쓱하며 말합니다.

" …가자. "

" 어, 어디, 요…? "

" 어디긴. …위에지. "

[ 아, 안돼요. ]

난 깜짝 놀라 손으로 엑스자를 만들어 보였지만
형은 일단 위에서부터 내려 와야 실력이 는대는 둥 어쩌고 하며
억지로 날 끌고 리프트 줄에 세웠습니다.

아… 안되는데.

두근거리면서도 난 형이 이끄는 대로 무작정 리프트에 탔습니다.  
형과 나란히 앉자 덜컹거리며 리프트가 올라가기 시작합니다.

" 시원하지 않아? "

형이 날 툭 치더니, 눈을 찡긋하며 말합니다.
어정쩡, 고개를 끄덕이긴 했지만 실은 그게 아니었습니다.

( 너무… 높아… )

얼굴을 덮치는 바람이 조금 찹니다.
점점 높이 올라가는 리프트 아래를 내려다 보니,
사람들의 스키타는 모습이 까마득하게 작아져 버렸습니다.

어쩐지 조금 무서워져 형을 쳐다 보니, 재미있단 듯 날 빤히 보고 있습니다.
그 표정이 조금 얄미워서 입을 부루퉁 내밀며 째려 봐 줬습니다.
그러자 싱글거리던 표정을 진지한 얼굴로 바꾸며 그가 찬찬히 말합니다.

" 내가 있어. …알지? 내가, 있어. "


아아… 알아요… 형…
그래… 믿어요… 형의 말…


난 그의 눈을 봅니다.
그도 나의 눈을 봅니다.

그걸로 충분합니다.
그가 내 옆에 있어 똑바로 날 바라 봐 주는 그거 한가지로, 충분합니다.

알고 있습니다.
저 짤막한 대사 속에 그가 진정 말하고 싶은 게 무엇인지 잘 알고 있습니다.

그것은… 마음이 통하는 사람들만의 특권입니다.
연인끼리의 작은 듯, 큰… 특권.



리프트가 목적한 곳까지 도착하기 직전입니다.

형이 시키는 대로 몸을 일으켜 세우고
스키를 타는 지점까지 이어지는 야트막한 경사 아래로 미끄러져 내려갑니다.

" ……! "

생각보다 너무 미끄러워 그만 내려가며 중심을 잃을 뻔 했습니다.
다행히 동시에 미끄러져 내려간 형이 내 허리를 붙잡아 세워줬습니다.

두근…!

그의 따뜻한 가슴에 안기자, 은은한 젊은 향기가 흘러 나와
내 머리는 어찔함을 느낍니다.

좋은 냄새…
따뜻한… 은은하지만 미약하지 않은… 한없이 근사한…

벗어나고 싶지 않습니다.
이대로 계속, 영원토록, 안겨 있고 싶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여기는 우리만의 공간이 아닙니다.

" ……. "

난 형의 몸에서 떨어져 고맙다고 수화로 말해 보였습니다.

그의 눈은 보지 않습니다… 아니,볼 수가 없습니다.
그의 향기에 내가 어떤 충동을 느끼고 있는지 행여 들킬까 봐.

난 지금도 그렇게 나 자신의 감정을 그저 숨기고 싶은 것인지도 모릅니다.
난 그를 사랑하고, 그도 날 사랑하고 있단 사실을 알고 있는데
스스로를 번데기의 껍질에 가둔 채, 벗어나지 못하고 있습니다.

벗어나는 게 두렵습니다.
내 전부를 그에게 밀어 보내는 게 한없이 불안합니다.

이미 그를 몸으로도 마음으로도 느꼈는데도 불구하고,
아직 완전히 피어나지도 않은 지금의 아름다운 감정이
금새 추하게 시들어 버리지나 않을까 두려워 하고 있습니다.

앞날을… 상처를… 겁내고 있습니다.

언제 난, 껍질을 탈피해서 날개를 활짝 펼칠 수 있을까요.






[ 제 4 편 ]





10. 22th, December II

대체 몇번을 넘어졌는지 기억조차 안 납니다.
막상 내려 오려 하니까 왜 그리도 까마득하고 경사가 급해 보이던지….

몇번을 넘어지고 눈속에 파묻히면서 겨우 한번 내려 갔습니다.  
형이 친절하게 되풀이 해 가르쳐 줬지만 어떻게 하면 매끄럽게 탈 수 있는지
감이 잘 오지 않는 상황.

두번째로 리프트를 타고 올라와 꼭대기에 선 내가 한숨을 내쉬었을 때.

( 앗…! )

뒤에서 누군가가 휙 스쳐 가 난 그만 내려갈 준비를 미처 하지 못한  
상태에서 미끄러져 버리고 말았습니다.

( 저, 정신차려…! )

당황한 중에서도 마음 속으로 외치곤 균형을 잡으려 애쓰면서
다리에 힘을 준 내게 기적같은 일이 일어났습니다.  
몸을 기울이며 한쪽 무릎을 구부리자,
속도가 줄면서 방향이 멋지게 틀어진 겁니다.

( 아아, 그래… 형이 말한 게 이거였구나…! )

난 알 것 같아 이번엔 반대쪽인 왼쪽 무릎에 힘을 실었습니다.  
그러자 또 방향이 바뀌고 어느새 난 그럭저럭 유연한 자세로
경사를 내려가는 자신을 발견할 수 있었습니다.

그러고 나자, 담부턴 일사천리.

절반 이상을 정신없이 내려간 난, 숨을 몰아쉬며 멈췄습니다.
정지한 내 뒤로부터, 준언형이 빠른 속도로 내려 와 멈춰 섭니다.

" 대단하잖아! 뭐야, 첨 타는 거 맞아…? "

형은 손에 든 스키 스틱을 휘두르면서 기쁘게 웃었습니다.  
고글 아래 자리잡한 그의 희고 고른 치아가 상쾌하게 드러납니다.

…역시, 근사합니다.

" 맞아, 요? "

" 그래. "

형은 스틱을 한손에 모아 쥐더니,
다른 한손을 내 머리로 뻗어 툭툭 쳤습니다.

" 후… 대체 못하는 게 뭐냐? 너. "

그의 손은 따뜻한 감촉을 띄며 닿은 것 만으로 날 포근하게 만들어 줍니다.
난 어깨를 움츠리며 기분좋게 웃었습니다.

그리고, 생각합니다.

( 못하는 게 없는 건, 내가 아니고 형이잖아요. 그거, 알고 있죠… 형? )

그래서, 조금 부담스러워요…
때론… 조금 불안해요…….

그렇게 스키를 탄다는 게 뭔지 겨우 알게 되긴 했지만
두번 정도 더 내려 오자, 난 조금 지쳤습니다.  
누가 뭐래도 처음 내려 왔을 때 눈에  몇번이나 뒹군 탓인지,
몸 이곳저곳이 욱신욱신거립니다.

" 뭐 좀 먹자. "

형의 제안에 내가 기쁘게 끄덕여, 두사람은 스키를 벗곤  
이층에 있는 식당으로 향했습니다.

식당 안은 사람이 북적이긴 했지만 자리가 어느 정도 비어 있습니다.

형이, 주문한 유부 우동과 김밥 등을 가지러 간 사이,
혼자 자리를 지키고 있는 테이블 빈 자리에
남자 둘, 여자 둘의 젊은 남녀가 자리를 잡았습니다.

" ……! "

음식을 가지고 온 형이 좀 놀란 듯, 선 채 옆자리 일행을 쳐다 봤습니다.
눈을 돌려 보니, 그쪽 일행인 남자들도 형을 놀란 표정으로 보고 있습니다.

- 이준언 아냐!

남자 둘 중 한명이 일어서며, 형의 어깨를 툭 치더니 뭐라고 말합니다.

잘은 못 알아 들었지만, 눈치를 보아 하니 형은 스키장에 같이 가자던  
두사람의 제의를 거절했던 모양이었습니다.
옆에 있는 여자들은 어색하니 앉아 있는 걸로 봐서,
여기 와서 같이 놀게 된 부킹 상대인 것 같고요.

" 그래, 우리 팽개치고 같이 온 사람이냐? 누구야? "

쳐다 보기에 얼떨결에 고개를 숙여 보였습니다.

" 이름이 뭐에요? "

물어 옵니다.
상대가 알아듣지 못할 수화를 쓸 수가 없어, 입을 열었습니다.

" 서, 해, 요. "

" 뭐…? "

내 목소리가 잘 들리지 않았나 봅니다.

- 서 해, 라고.

준언형이 대신 말해 주는 것이 보입니다.

" 목 아파요? 말투가 왜 그래? "

약간 비웃는 듯한 미소를 입가에 그리면서, 한 남자가 말하는 걸 보고
난 그만 얼굴이 붉어지고 말았습니다.

아무리 노력해도 역시 말투가 이상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자신의 음성을 들을 수가 없는 난 잘 알 수 없지만
역시 다른 사람이 듣기에 내 말투가 어색한 건 어쩔 수 없나 봅니다.

" 신경 꺼. "

형이 조금 날카로운 표정으로 남자를 쳐다 보며 말하는 게 보였습니다.
그리고 뭐라고 말하더니, 날 응시한 채 천천히 입을 움직입니다.

" 자리 옮기자. "

" ……? "

얼떨결에 날 붙든 형의 손에 끌려 반대편 구석진 자리로 갔습니다.
자리를 잡자, 형은 말없이 음식을 턱으로 가리키더니
자신도 수저를 듭니다.

아까의 네사람이 우릴 힐끗거리며 보고 있는 게 느껴졌지만 형은 그쪽으론
시선도 주지 않은 채, 말없이 음식을 입으로 집어 넣을 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나도 형의 조금쯤 무뚝뚝한 태도에 눌린 것처럼 대사를 잊고
시키는 대로 수저를 들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두사람 사이에 흐르던 공기는 묵직하게 가라앉아 버립니다.
그러나, 그건 혼자만의 감각일지도 모르지만…
그러나, 그건 내게, 호흡조차 힘겨운 압박으로 다가옵니다.

그래서…
그래서… 난, 하고 말았습니다.

…그를 당혹스럽게 만들 한마디를.





11. 22th, December III

" 형… "

콘도 안의 작은 키친.

그 키친에서 바로 보이는 거실 소파에 형이 앉아 있는 것이 보입니다.  
물컵을 들고 머뭇거리면서 낸 작은 소리에 바로 형이 돌아 봤습니다.

아무리 작은 소리라도 형은 언제나 빨리 반응해 줍니다.
날 진심으로 배려해 주는 듯한 행동.

그러나…

" 나… "

스키를 즐기고 저녁식사를 한 후 느긋하게 쉬고 있는 지금,
일견 평화로워 뵈는 지금 이 순간…

그러나 그 평화는 아주 깨지기 쉬운 얇은 유리막 같은 것이어서
지켜 보는 것만으론 그저 불안하고 고통스러울 따름입니다.

묘한… 긴. 장. 감.

아까부터 묻고 싶었던 한마디가 점점 가슴에서 부풀어 올라
내 내부를 지배하고, 그리고 갉아 먹고 있습니다.

스키를 타는 동안, 식사를 하는 동안…
줄곧 묻고 싶었던 한마디, 그러나 정작 묻기 두려운 그 한마디가….

따뜻하게 난방이 되어 있는 콘도 안.
그러나, 난 몸을 엄습한 한기에 그만 몸을 떨고 맙니다.
마음을 지배하던 한기가, 이제 몸까지 지배하기 시작한 걸까요…?

( 무슨 말을 하려는 거야… 바보… 무슨 생각을 하는 거야…! )

자신을 다잡으려 한 그 순간, 날 응시하는 형의 불안정한 눈동자에 그만
다짐을 잊고 여지껏 혀끝에서만 맴돌고 있던 한마디를 뱉고 말았습니다.

" 나… 창피, 해요…? "

…바보같은 한마디를.
…한심하기 그지없는 한마디를.
…그를 당혹하게 만들 뿐인 한마디를.
…자신을 비참하게 만들 뿐일 한마디를.

" ……! "

형의 몸이 굳어지고, 그는 당황한 나머지
한동안 움직이지도 못한 눈동자로 날 멍하게 바라보고 있다가,
겨우 정신을 차린 듯 일어나 내가 서 있는 부엌 입구로 왔습니다.
내 손에 들려 있던 컵을 가져 가더니, 그 안에 절반쯤 남아 있던 물을
정신없이 마셔 다 비운 후에야 비로소 입을 뗍니다.

" …무슨 소릴 하는 거야. "

" ……. "

난 고개를 숙여 버린 채 입술 안쪽을 꾹, 깨뭅니다.
형이 그런 날 들여다 보고 숙인 고개를 손가락으로 들어
자신과 눈을 맞추게 하더니, 또 물어 옵니다.

" 무슨 소리야… 응? "

" ……. "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말을 시작하면 꼭, 눈물이 나올 것 같아서…
그런데, 그런 연약한 자신이 싫어서…
말을… 할 수가 없습니다.


왜, 날 선택했어요…
왜, 왜, 나 같은 걸 선택했어요…?


" …말해 봐. "

날 내려다 보는 그의 시선이 슬프게 흐려집니다.
미묘한 공기의 진동이, 실제는 들리지 않는 그의 음성이
미미하게 떨리고 있음을 말해 줍니다.

" …내가, 상처 입힌 거야? 내가, 또… 널, 상처 입혔니…? "

" ……. "

" 그래…? 응? "

형의 다그침에 대답을 해야겠단 생각이 들었지만
목이 막힌 듯 소리를 낼 수가 없었기에 난,
내 어깨를 붙들고 있던 형의 손을 살짝 떼어낸 후,
손을 들어 수화로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 아까… 형의… 친구들이… 왔을 때… 왜… 자리를… 옮겼어요? ]

형의 눈을 보면서, 떨리는 손을 움직입니다.

[ 내가… 내 목소리가… 그렇게… 이상해요…?
    내… 말투가… 그렇게… 이상한가요…? ]

형은 정말 놀란 모양입니다.
무척 쇼크를 받은 듯, 비틀거리는 몸을 뒤에 있던 식탁 의자에 내렸습니다.
이마에 손바닥을 가져 갑니다.

( 형이 놀랐잖아… 바보… )

하지만 지금의 대사는 오후 내내 눌러 왔던 한마디였습니다.
무겁게 압박하던 상념… 난, 그 무게를 이기지 못한 겁니다.
그 지독한 무게와 그 한편으로 날 괴롭히던 상실감을 버티지 못하고
난 결국 형에게 이기적인 질문을 하고 말았습니다.

" 그…렇게 보였어…? "

형이 자신을 내려다 보고 있는 날 향해 입을 엽니다.  
그의 표정은 지독하게… 굳어 있습니다.

그 굳은 표정을 풀지 못한 채, 묘하게 더듬거리며
그가 말을 이어가는 모습이 눈에 들어 옵니다.
그 어색한 표정이 오히려 가슴 깊숙한 곳으로부터의 진심을 반영하는,
그런….

" 아냐… 나, 널 창피하다고 생각한 적 없어.
   다만, 아까 그 놈들은… 남에 대한 배려가 없는 녀석들이라,
   혹, 네게 상처 줄 말을 할 것 같아… 그것이 두려웠어.
   그래서, 자릴 옮긴 거야…. "

" ……. "

" 누구도… 적어도 내가 아는 누구도, 네게 상처입히게 하고 싶지 않아…
   나도, 네게 상처입혔고, 그리고 지금도 입히고 있는지도 모르지만…
   그래도 네가 아파하는 거, 그것만은 보고 싶지 않아… 그래서…. "

" ……. "

" 미안… 나로선 배려라고 한 행위가 널, 또 상처입혔나… "

그가 고개를 숙이는 것이 보입니다.


그런 거였나요…
미안… 형… 나야말로 너무 내 본위로만 생각했었군요…
형의 배려를 이기적으로 해석한 건 나였어요…
미안해요… 형… 내가, 미안해요….


그에게 해 주고 싶은 말이 있습니다.
그에게 해 주어야 할 말이 있습니다.

난 스스로에게 용기를 부여하듯, 가능한 한 밝은 표정을 지으려고
입가에 힘을 주면서 천천히 입을 떼었습니다.

" 나… 약하지, 않아요. "

그가 숙인 고개를 천천히 들어 날 올려다 봅니다.
그런 그를 향해 미소를 지으면서 난, 다시 한번 되풀이합니다.

" 형… 나… 강, 해요. …지지, 않아. "


나, 계속 구화로 말할 거예요.  
내가 말하는 걸 다른 사람들이 잘 알아듣지 못할 지라도… 비웃을 지라도…
나, 노력할 거예요.

나, 이대로 포기하지 않아요.
그들이 못 알아 듣는다면, 알아 들을 때까지 연습할 거에요.
귀가 들리는 사람들처럼 말할 수 있을 때까지 노력할 거예요.

형… 걱정 말아요… 나, 절대 지지 않아요.
형만 있으면… 나, 절대 지지 않아요.
형만 날 믿어 주면… 난, 할 수 있어요…….


긴 침묵 속.

시선의 부딪힘만으로도 공기는 그 색채를 투명하게 정화시킵니다.

물기어린 눈을 들어 잠자코 날 바라 보는,
내게 있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누군가에게 나 역시 천천히 다가가…  
그 가라앉은 몸으로 팔을 뻗어,
앉아 있던 그의 머리를 내 가슴으로 끌어 당겨 안습니다.

날 생각하는 그의 마음을 이젠 전부 알았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습니다.
고맙다고도 말하고 싶습니다.

하지만 입이나 손을 써서 말하는 대신에,
난 그를 그저 따뜻이 안아 보입니다.

그리고 몸을 내려 무릎을 꿇은 자세로 의자에 앉은 형을 올려다 봅니다.
그리고, 미소짓고, 눈을 맞추고, 굳어진 형의 시선을 향해
손을 들어 입술을 움직여 소망을 전달합니다.

마음 속 깊은 곳에서부터 끌어 올린, 투명한 소망을.

" 나, 안아 줄, 수 있어요…? "

" ……. "

형이 경직된 듯 날 뚫어지게 응시합니다.
그 시선에 내 눈을 상냥하게 맞추면서 난 미소짓곤, 다시 한번 말했습니다.

" 안아 줄 수 있어요…? "


그랬었어.
아아… 그래… 잊고 있었어.

그 날… 밤의 사건이 있던 다음 다음날…
겨우 조금 회복된 몸을 일으켜 무작정 정고에 온 그 순간…
그의 눈물을 본 그 순간을.

그의 눈물을 본 순간… 나, 생각했었지.

이 사람이라면 상처입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내 몸과 마음, 그 전부를 내 주어도 좋다고.
이 사람이라면 내 치부를, 남겨진 상흔(傷痕)을 모두 내보여도 좋다고.

그 결심을 난 자신만을 생각하는 이기심으로 인해, 그만 잊고 있었던 거야.
그 결심,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나의 그를 위한 아름다운 결심을.
다시는 잊지 않을 거야…

나, 그로 인해서라면 얼마든지 상처입어도 좋아.
나, 그에게라면 내 몸도, 마음도, 그 이상의 그 무엇도 전부 내 줄 수 있어.
나, 그에게라면 가장 수치스런 부분도, 보기 흉한 자국도 내 보일 수 있어.

두려워하지 않아.
앞날 따위, 결코 두려워 하지 않아.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하니까.
…그를 사랑함으로 난 강해질 수 있으니까.


" 무슨, 말이지? "

형의 입모양이 그렇게 말합니다.

그 말에 대답하는 대신, 난 눈을 가늘게 만들며 가만히 미소했습니다.

" 괜찮아…? 정말, 괜찮아…? "

눈을 감으며 끄덕였습니다.
그래도 움직이지 못하는 형을 위해, 또 살짝 입술을 뗍니다.

" 나, 원해요… "

" ……. "

" 나, 형을, 원해요… "


나, 원해요…
형에게 안기길.

아주 많이…
아주 절실하게.



계속.

Prev
   사일런트 나이트 (하)
BabyAlone
Next
   사일런트 블루 (하) [77]
BabyAlone


Copyright 1999-2018 Zeroboard / skin by Change